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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리코는 그 곁에서 책을 읽었다. 같은 공간 안에서라면 각자 다른 일을 해도 마음이 참 편하다고, 온천욕으로 노곤하게 달아오른 다리를 뻗으며 루리코는 생각했다. 보고 싶을 때 볼 수 있고, 만지고 싶을 때 만지러 갈 수 있으니까, 라고.[각주:1]

 

물론 그것이 사랑 같은 게 아니라는 것을 루리코는 알고 있었다. 전화를 걸고 마는 것도, 금세 다시 걸어오는 것도.

그 증거로, 루리코는 샅사토시의 목소리를 들어도 행복하지 않았다. 반가움조차 일지 않았다.[각주:2]

 

침실 옷장에서 청바지와 남방을 꺼내 입는 동안에도 루리코는 곁에서 뭔가 말을 했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 회식은."

사토시가 묻자 루리코는 단박에 입을 다물고는 놀란 듯이 말했다.

"전혀 안 들었구나. 아까부터 내내 그 이야기 했는데."[각주:3]

 

"방해돼?"

"그런 건 아니지만."

"곁에 있고 싶었어."[각주:4]

 

그렇게 말하면 루리코는 우선 침묵하고, 이윽고 알았다고 말한다. 희한하게도, 늦는 이유는 아무려나 상관없는 모양이었다. 잔업이든 술자리든 데이트든.

-질투는 꼭 여자한테만 하는 게 아니야.

라고 아내는 말한다.

-난 당신회사에도 책상에도, 상사에게도 동료에게도, 술집에서 우연히 옆에 앉은 여자에게도 질투를 느껴.

라고.[각주:5]

 

이번에는 국제전화를 걸었다.

버밍엄은 지금 오후 1시다.

"루리코?"

애너벨라는 지난달보다 한층 더 놀란 목소리였다.

"틀림없이 아주 안 좋은 일이 생기겠구나."

그녀 특유의 담담한 어조다. 듣기 좋은 낮은 목소리.

"안 좋은 일?"

루리코가 되물었다.

"그래, 전에도 그랬잖아. 네가 나한테 자주 전화하고 나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기억해?"

아니, 하고 대답했다. 전화기를 쥔 채 창가 의자로 돌아온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데?"

"너, 결혼해버렸어."

루리코는 아주 조금 웃었다.

나도 풉 하고 웃었던 대목. 동시에 상아가 너무나도 보고 싶어졌다. 내게도 애너벨라와 같은 친구가 있다면 그건 상아일 것이다. 나도 무슨 일이 일어날 때에 늘 상아를 찾았다. 상아에게 가 내 결정과 선택에 확신을 얻고 용기를 얻곤 했었다. 그랬었다.

 

남자란, 좋아하게 될 거라 생각하면 언제든 그렇게 되기 마련이다. 누구에게나 좋은 면은 있고, 그건 그 사람만의 장점이므로.[각주:6]

 

루리코는 이렇게 하루오의 품 안에 있는 것이 좋았다. 여전히 잔뜩 어질러진 방, 열어놓은 창문, 나뒹구는 앙투안.

"지난번이랑 같은 화랑?"

맞아,라고 대답하고 루리코는 눈을 감는다. 하루오의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린다.

"작년과 같은 장소에서, 3월 3일부터 19일까지."

이러고 있으면 거역할 수 없는 편안함이 느껴진다고 루리코는 생각한다. 이대로 잠들어버리면 얼마나 좋을까.[각주:7]

 

시호는 확실히 귀엽지만, 시호와 함께 있으면 사토시는 왜 그런지 루리코의 좋은 점만 떠오른다. 루리코의 좋은 점. 미인에, 눈치 빠르고 머리가 좋다. 낯가림이 심하고 타인에게 경계심이 많은 만큼, 사토시만은 무서울 정도로 신뢰한다. 화를 내지 않고 소란스럽지 않다. [각주:8]

 

쓸쓸함은 아마도 인간이 안은 근원적인 문제이지 사토시 탓은 아닐 것이다. 자기 스스로 대처해야 하는 것이지 누군가가-설사 남편이라도-구원해줄 수 있는 성격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사토시가 좋아하는 복숭아를 깎으면서 루리코는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다면, 하루오와 함께 있을 때 쓸쓸하지 않은 것은 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토록 충만감에 사로잡히고 마는 것은. [각주:9]

 

루리코는 간신히 입을 연다. 오싹하리만치 쓸쓸한 목소리가 나왔다.

"왜 거짓말을 못하는지 알아? 사람은 지키고 싶은 사람에게 거짓말을 해. 혹은 지키려는 사람에게."

루리코는 자신이 내뱉은 말에 자신의 심장이 얄팍한 종이처럼 간단히 찢겨 나가는 것을 느꼈다. [각주:10]

 

하루오가 만드는 공기, 하루오가 선택하는 언어, 그 방에서 마시는 커피. 하루오의 손목뼈, 발바닥 모양. 목이 좀 늘어난 티셔츠 사이로 엿보이는 쇄골. 갑자기 활짝 웃는 얼굴. 토라진 말투, 담배를 피울 때 찡그리는 눈썹. 루리코를 끌어안는 힘 있는 팔, 입술이 녹고 허리가 부러질 것 같은 키스, 하루오의 살냄새.[각주:11]

 

 

총평.

뭐가 됐든, 사랑에 빠진 사람의 마음과 상태에 대한 묘사가 돋보이는 책. 또 사랑이 식어가는 사람의 마음과 상태에 대한 묘사도 돋보이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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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조림 몇 개 때문에 한 노인을 죽이려고 했을 때, 저희는 짐승들이 되어 있었습니다. 한 노인을 살려주고 나니, 그제야 저희는 사회 속에 사는 인간이 되어 있더군요. 그래서 저희는 살았습니다."[각주:1]

 

지금의 사회 분위기가 그랬다. 무엇이든 차별을 하는 것들은 희대의 몰상식한 것들이고, 매장당해 마땅한 것들이었다.

그러자,

 

"뭐야? 가능하잖아?"

 

세상에 모든 차별이 사라졌다. 사람들 스스로도 놀랐다. 세상에서 차별을 없애는 게 가능했다니?

 

시간이 흘러 신인류 아이들이 자라난 뒤에도, 아이들의 여섯 손가락을 놀리는 사람은 없었다. 아이들 스스로도 창피해하지 않았다.

그냥 별것 아닌 당연한 일이었다. [각주:2]

정말 별것 아닌 당연한 일들인데.

도덕교사는 참 어렵다고 매번 느낀다. 이렇게 당연한 말들과 일들을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당연하게 행동하지 않는 아이들에게 가르쳐야하니까.

그래서 더 재밌고, 자극적이고, 참신한 것들을 수업에 가져오려 한다. 하지만 그또한 한계는 있기 마련이다. 아이들이 혹여 너무 가볍게 생각하거나 받아들이지는 않을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이 책에는 참 많다. 그래서 더 좋고 더 살갗으로 다가온다.

내가 노자나 장자와 동시대 사람이었더라면, 이 책을 읽듯 그들의 책을 읽었을까?

무튼 정말 정말 도덕교사에게 좋은 책!!!!!!! !!!!!!!!!!!!!!!!!!!!!!!!!!!!! 강추★★★★★

 

 

김대리는 꿈에도 몰랐다.

 

정대리가 비 오는 날을 가장 좋아했다는 것을 몰랐고,

자신이 맑은 날을 가장 좋아했다는 것을 몰랐고,

아내가 흐린 날을 가장 좋아했다는 것을 몰랐고,

아기가 지진이 있었던 날에, 그 흔들림이 좋아 방긋방긋 웃었던 것을 몰랐다.

 

그렇게 자신하던 보물의 사용법을, 그는 최후의 순간까지도 몰랐다.[각주:3]

우리는 무엇을 알고 살까. 당장 내 곁의 사람이 무엇을 싫어하는지 정말 잘 아는걸까? 무엇을 좋아하는지는 또 잘 알까?

비단 곁에 있는 사람뿐일까, 나조차 관심 두기에 너무 바쁜 삶인데.

놓치고 있는 것들이 너무 많은건 아닐까- 반성하게 된 글.

 

 

 

유명 인사들의 급사가 몇 번 일어나자, 기업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곳간을 풀었다. 그 돈은 모두 사회안전망을 위해 투자되었다.

 

"한국의 청년들이 자살하는 이유가 뭡니까? 그 원인을 해결해야 합니다!"

"빌어먹을 학교 폭력! 그동안 왜 이렇게 손 놓고 있었던 거야?"

"노인복지가 이게 뭡니까? 언제까지 폐지를 줍고 다니시게 할거야?"

"경찰은 뭐 하는 거야? 어제도 살인 사건이 벌어졌잖아! 치안에 신경 좀 쓰라고!"[각주:4]

지하철에 읽다가 풉,하고 웃었던 부분.

학교 폭력이 나온게 왜이렇게 반갑고 씁쓸하면서 웃기던지.

이 외에도 열거된 수많은 사회 문제가 있었는데 내가 학교폭에서 웃었던 것을 보니, 어쩔 수 없는 교사이긴 한가보다. ㅋㅋㅋ

아휴 저 문제들 정말, 작가님이 써주신대로 척척 풀리면 얼마나 좋아!

이 책에는 작가님이 그리는(나도 대부분 동의하는) 이상사회의 모습이 매 편마다 등장한다. '오~ 신박하다!'하면서도 이내 슬픈 것은 이것이 소설이라는 점. 역설적으로 이는 상상에 불과하다는 것. ..

 

 

"정말... 자라고 싶습니다... 제발... 늙어주십시오..."[각주:5]  

'자라다'와 '늙다'의 차이.

지금도 나는 어른이 된 어느 나이의 내 모습을 종종 상상하곤 하는데, 이런 상상을 어릴 때는 더 갈망하곤 했다. 언젠가 내가 어른이 된 순간의(그게 언제인지는 정말 궁금하다. 아직도 나는 스스로 어른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그 날이 올까 싶기도 하고..) 나는 어떤 모습과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지금도 너무너무 궁금하다. 아직까지는 무의식적으로 얼른 나이를 먹어서, 성장해서, 자라서 어른이 되어야지- 했었는데.. 지금까지 내가 떠올린 단어에 '늙다'는 없었다는게 조금 충격이기도 하다. 난 자라고 싶지 늙고 싶은 게 아니니까.  

아직도 늙는 게 두렵긴 하다.

자라는 건 좋은데, 늙는 게 두렵다라. 폐부를 꿰뚫리는 느낌이 드는 글이었다.

내가 늙어야 누군가는 자라는구나. 또 내가 자라면서 누군가는 늙고 있겠구나.

어렵다. 그리고 조금은 서글프다. 아직은 영원히 이십대 초-중반이고 싶은데!! !!!!!!!!!!! ㅠ_ㅠ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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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시인이자 수필가인 새뮤얼 존슨은 걱정을 일컬어 "상상의 질병"이라고 말했다. 걱정 많은 사람들은 이리저리 곰곰이 생각하며 온갖 상상력을 꽃피운다. 바다 위로 추락하는 비행기, 희귀 질병, 활활 불타는 집, 배우자의 불륜, 파산, 실직 등등 말하자면 끝도 없다. [각주:1]

하지만 결과가 우리 손에 달린 경우는 사실 아주 드물다. 대부분의 인생에서 재앙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건 어떤 태도와 행동을 취할 것인가다. [각주:2]


다른 사람들은 우리 일에 우리만큼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특히 우리가 실수라고 여기는 것들에 대해 타인은 크게 마음을 쓰지 않는다.) 다음번에 업무상 회의, 영업 프레젠테이션, 가족 모임을 치르고 나서 속 끓일 일이 생긴다면 이 메시지를 꼭 떠올려보자. 어쨌든 인생은 계속 굴러갈 것이고 남들은 우리가 스스로를 평가하는 것만큼 우리에게 가혹한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다. [각주:3]


"아까 낮에 어디서 읽은 건데 말이야. 아기들이 잠투정을 하는 건 지금 잠들면 다시는 엄마를 만날 수 없다고 생각해서 그런거래. 제법 그럴듯하지 않아?" [각주:4]

으악.. 구ㅣ여워어..... 다시는 엄마를 만날 수 없다고 생각해서 우는 거라니. ㅠㅠ 지구 뿌셔 ㅠㅠㅠㅠㅠㅠ


그녀는 인간이 앎을 사랑하는 존재임을 아기를 키우며 온몸으로 깨달았다. 앎에 대한 사랑, 그것은 인간의 본질이다. 그래서 그리스인들이 철학을 필로소피아라 명명했을 것이다. 무지의 암흑 속에서 앎의 광명 속으로 더듬거리며 나아가는 것. 더 이상 울지 않게 되는 것. 그것이 삶이다.[각주:5]


운동하는 모든 곡선에는 변곡점이 있다. 지식이 공포를 물리쳐주지 못하는 결정적 순간이 언젠가는 들이닥친다. 이제 제법 나이가 든 그녀는 아는 게 너무 많아 다시 공포에 시달리기 시작한다. 노파심. 필요 이상으로 남의 일을 걱정하고 염려하는 '할머니의 마음'.[각주:6]


우리는 의식이 극도로 발달한 시대에 살고 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고도의 경계와 긴장 속에서 살아간다. 소셜 미디어는 우리가 세상사에 관한 최신 정보다 타인의 삶을 담은 이미지에서 한시도 떨어져 있기 힘들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는 사람을 지치게 하고, 에너지를 고갈시키고, 불안감을 생성하며, 영혼을 회복하고 다시 채워나갈 여유를 앗아간다. 가드닝의 정신적인 이점은 바로 이런 부분에서 발휘된다. [각주:7]


정원을 가꾸는 데 적어도 하루에 몇 분 정도는 투자해야 할 것이다 그조차 부담스럽게 느껴진다면 일단 조그맣게 시작하라. 그리고 우리의 목표가 남들에게 어떻게 보이느냐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 즐길 수 있는 일, 즉 우리의 인생과 웰빙 감각에 보탬이 될 만한 일을 시작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각주:8]


때로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으면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두려움을 없애기 바라며 약물 치료를 원하기도 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실존적 울음을 쏟아놓을 상대로 나를 선택한다. 내 입장에서는 영광이다. 우리는 결국 문학이나 철학 이야기를 나누고,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사람 수가 적으면 공상과학과 판타지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그들은 내게 인생의 의미를 묻고, 나는 어느새 그 안에 들어간다. [각주:9]


그러나 사실 남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우리가 지닌 전문지식이 아니라, 우리의 고통과 나약함 그리고 이를 치유하는 과정에서 얻은 지혜다. 자신의 경험과 타인의 경험 사이에 공감의 다리를 놓으려면 스스로의 내면을 들여다봐야 한다. [각주:10]


네 번째 원칙은 삶의 조건을 바꾸지 않더라도 스스로의 내면에서 휴식 공간을 찾을 수 있음을 알려준다. 내면의 휴식 공간은 언제나 열려 있다. 우리는 그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기만 하면 된다. 다른 방해 요소 없이 이 순간, 이 활동에 온전히 집중한단면 이러한 휴식을 경험할 수 있다. 꾸준히 연습한다면 언젠가 이 널찍한 휴식 공간이 삶의 일상적인 부분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각주:11]

나는 이것이 잠(수면)이라고 생각한다. 아직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는 내면의 휴식으로 취하는 연습이 부족한 탓이겠지. 

아! 지금처럼 이렇게 책을 포스팅하는 것도 나만의 휴식이라고 할 수 있겠다. 또 다이어리를 쓰는 것도. 


그것은 바로 스즈키 로시가 남긴 명언에 등장하는 '초심자의 마음'과 같다. "초심자의 마음에는 크나큰 가능성이 있지만 전문가의 마음에는 가능성이 거의 없다."[각주:12]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또 한 가지는 여성에게 '얌전함'을 요구하는 문화 규범과 양육 탓에, 많은 여성들이 발전시킨 자기 검열 메커니즘이 있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얌전함은 때때로 치묵과 복종의 다른 표현이며, 중요한 문제에서 모습을 드러내기는 하되 관여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각주:13]

그렇다.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 그렇게 했을 때 차라리 속 편했던 것 같다. 대학교 3학년 때도 그렇고. 아직도 화가나!!!!! 


"잡음은 말 못하는 한 인간의 일상적인 투쟁을 강조하는 의도로 쓰였어요. 목소리를, 깨끗한 목소리를, 사람들에게 들리는 목소리를 찾고자 하는 투쟁이요." 차차게가 말했다. "마침내 다이얼을 잘 돌려서 목소리를 잡아내도 남성의 목소리만 들려올 뿐, 저기 서 있는 (영상 속에서) 눈앞에 흐릿하게 보이는 여성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죠."[각주:14]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소녀들의 사연은 개개인의 비극이다. 하지만 그 이야기가 모두 모이면 국가적 비극이 된다.' [각주:15]

화장실 몰카가 떠올랐다. 정말 아주 아주 어렸을 때부터 당연하게 봐온, 화장실 문에 있던 수많은 구멍들. 정말 그냥 그것은 야외 시설이고 공공 시설이기에 낡거나 혹은 수리하느라 생긴 흔적인줄만 알았다. 누가 알았겠는가 그것이 같은 곳의 화장실이라 하더라도 여자 화장실에만 유독(오직)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는 행복을 깨닫지 못할 때가 많다. 언제, 어디에서 행복해질지 공상하느라 바쁘기 때문이다. 우리는 눈앞에 있는 것을 무시하고, 행복은 인정사정 없이 우리는 지나친다. 행복해지는 비결 중 하나는 날마다 딱 1분간 행복 일기를 쓰는 것이다. 그날 자신을 행복하게 만든 순간을 두 가지 정도 나열해보자. 2018년 봄이 한창일 무렵 행복한 순간의 목록을 갖게 되고, 적어도 가끔은 자신이 행복하다는 증거로 쓸 수 있을 것이다. [각주:16]


TV를 보는 와중에 갑자기 숨이 턱 막혔다. 30초짜리 짧은 세탁기 광고가 문제였다. 세탁기의 성능보다는 가정에서 여성이 맡아야 하는 '기능'에 대해 광고하는 것 같았다. 그 광고가 말하는 것은 다음과 같았다. '남편은 다 큰 성인이지만 세탁기도 제대로 사용할 줄 모르기 때문에 가정주부가 잘 돌보아야하고, 워킹맘은 바쁘게 일하고 퇴근하는 중에 핸드폰으로라도 세탁을 해야 한다.' 차라리 짧은 치마를 입고 나온 여자가 섹시한 춤을 추는 노골적인 광고는 눈살을 찌푸리며 무시하기라도 하지, 이런 시나리오에 예쁜 영상과 잔잔한 음악을 곁들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별생각 없이 넘어간다. 하지만 남자는 무능하게, 여자는 집에 얽매인 존재로 그린 이 CF가 정말 아무 문제없을까? [각주:17]


사회 전체가 앞장서는 이 '나쁜 교육'에서 도망치고 싶은데 오늘도 결국 TV를 켜고 스마트폰을 들여다본다. [각주: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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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코의 미소

 

나는 쇼코가 준 세계지도를 내 방 벽에 붙여놓고, 쇼코가 살고 있는 A시와 우리 군에 빨간색 점을 찍었다. 두 점은 한 뼘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가까웠따. 그리고 쇼코가 가고 싶다는 세계의 도시들에도 점을 찍었다 베이징, 하노이, 시애틀, 크라이스트처치, 더블린. 그 작은 점 속에서도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생각하니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각주:1]

가끔 내가 빽빽한 아파트 단지나, 버스를 볼 때에 느끼는 감정을 작가님께서 잘 묘사해주었다. 때로 내가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과 그 무엇을 글로 풀어내주시는 수많은 분들께 감사하다.

 

 

 


씬짜오, 씬짜오

시간이 지나고 하나의 관계가 끝날 때마다 나는 누가 떠나는 쪽이고 누가 남겨지는 쪽인지 생각했다. 어떤 경우 나는 떠났고, 어떤 경우 남겨졌지만 정말 소중한 관계가 부서졌을 때는 누가 떠나고 누가 남겨지는 쪽인지 알 수 없었다. 양쪽 모두 떠난 경우도 있었고, 양쪽 모두 남겨지는 경우도 있었으며, 떠남과 남겨짐의 경계가 불분명한 경우도 많았다.[각주:2]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

마당에 우두커니 서 있던 이모를 처음 봣을 때부터 엄마는 순애 이모가 좋았다. 언니라는 말의 울림이, 그 다정하고도 애틋하게 들리는 말이 엄마는 좋았다. 왜 어린 시절에는 고작 몇 살 위의 언니들이 그다지도 커 보였을까. 엄마는 가슴이 뛰어서 이모에게 먼저 말을 걸 수조차 없었다. [각주:3]

언니라는 말의 울림. 이보다 예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언니에게 느낀 수많은 감정선을 하나의 표현으로 담아낸 예쁜 말.

 

 

엄마는 그날 이후로 말수가 적은 사람이 되었다고 고백했다. 엄마가 그 일에 대해 내뱉었던 그 순진했던 모든 말들과 이상주의에 기댄 세상에 대한 몰이해가 부끄러웠고, 세상의 단단함이,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뚫고 들어갈 수 없는 그 단단한 벽이 엄마를 침묵하게 했다고 했다. [각주:4]

 

엄마는 이모의 등에 붙어서 작은 숨을 쉬는 아이가 이모의 몸 밖에 붙어 있는 심장 같다고 생각했다. [각주:5]

 

사실 엄마는 행복한 편이었지만 조금이라도 그 행복을 드러냈다간 이모가 박탈감을 느낄 것 같아서 그렇게 말했다. 엄마는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런 태도가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을 기만하는 짓이라는 걸 깨달았다. [각주:6]

나에게도 해당되는 말. 어쩌면 내게 하는 말.

 

 

이십대 초반에 엄마는 삶의 어느 지점에서든 소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어린 시절에 만난 인연들처럼 솔직하고 정직하게 대할 수 있는 얼굴들이 아직도 엄마의 인생에 많이 남아 있으리라고 막연하게 기대했다. 하지만 어떤 인연도 잃어버린 인연을 대체해줄 수 없었다. 가장 중요한 사람들은 의외로 생의 초반에 나타났다. 어느 시점이 되니 어린 시절에는 비교적 쉽게 진입할 수 있었던 관계의 첫 장조차도 제대로 넘기지 못했다.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 이 생의 한 시점에서 마음의 빗장을 닫아걸었다. 그리고 그 빗장 바깥에서 서로에게 절대로 상처를 입히지 않을 사람들을 만나 같이 계를 하고 부부 동반 여행을 가고 등산을 했다. [각주:7]

 

 

 


한지와 영주

난 스물일곱이야, 라고 말하면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의 부모도, 내가 여행을 떠나기 직전에 아이를 낳은 언니도 지도교수와 연구실 사람들도 그랬다. 이십대는 어느 때보다 치열해야할 시기였고, 여기서 치열함이란 죽기 살기로 빠른 시간 내에 안전한 경력을 쌓는 것을 의미했다. [각주:8]

나는 치열했다. 위의 기준에서 보자면 어디까지나. 그런데 아직도 나는 나의 슬픔과 혼란함을 삼킬 방법을 알지 못한다.

 

 

그는 언제나 내가 자신을 '만나주는 것'이라고 말했었다. 그 말은 나를 당황하게 했고, 그를 조금 경멸하게 했으며, 무엇보다도 그에 대한 편안함을 느끼게 해줬다. 그는 내가 아닌 다른 누구를 만났더라도 그렇게 이야기했을 것이다. [각주:9]

 

"괜찮아, 영주." 한지가 말했다.

충동적으로 여기에 머물기로 한 것도, 네가 해야 했던 일을 내팽개쳐버린 것도, 수도원 생활도 모두, 괜찮아.[각주:10]

내가 가장 듣고 싶어하는 말이지만, 내가 가장 듣지 못하는 말이기도 한 이것. 괜찮아.

 

 

글쎄요. 하지만 우리가 어떤 상상을 하든 천국은 그 상상을 뛰어 넘는 상태일 겁니다. 천국에는 시간도 공간도 존재하지 않을 테니 천국은 영혼의 상태라고 이야기할 수 있죠.[각주:11]

난생 처음 들은 이야기, '천국은 영혼의 상태이다'라는 것. 그러고보니 천국은 있을 법하고, 또 있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종교에 있어 가장 회의적이었던 천국으로 대변되는 내세를, 이제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되갚아주고 싶은 건가.

아니면 그저 누군가를 자극해서 그 반응을 보고 싶은 건가. 나는 그런 식으로밖에 자신에 대해 안심하지 못하는 그들이 지심으로 가엾게 느껴졌다. 누군가를 조롱하고 차별하면서 기쁨을 느끼는 삶을 얼마나 공허한가. [각주:12]

 

카로는 한지에 대해서 얼마나 아는 걸까, 한지는 자신이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내게 한 만큼의 이야기들을 해왔던 걸까. 나는 궁금해졌다. [각주:13]

 

나는 쓰레기통 앞에 가만히 서서 한지가 조금 전까지 서 있었던 자리를 바라봤다. 한지는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나는 알았다. 한지가 나를 피하는 이유가 무엇이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한지는 이제 나를 피하고 있고, 내가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건 한지를 괴롭히는 일이 될 것이다.

나는 그애를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

내가 어떻게 사과를 하든, 어찌된 일이냐고 따져 묻든 그건 모두 잘못된 일이었다.

사람들은 떠난다. 할머니는 그렇게 말했었다.

그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돼.

나는 나에게 속삭였다. [각주:14]

가끔 세상은 알 수 없는 것들로 가득차곤 하지만, 나는 그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먼 곳에서 온 노래

"소은, 어린애들은요, 어른이 한 말을 다 진짜라고 믿고 받아들여요. 평생 동안 그 말과 함께 살아가는 거지요.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 아버지가 내게 말했어요. 너는 쓸모없는 계집애야. 너는 덩치만 큰 계집애. 눈에 띄고 시지 않았는데도 자꾸만 몸이 커졌습니다. 웅크리면 조금이라고 작아 보일까 해서 구부정하게 다녔지만 소용없었어요. 사라지고만 싶었습니다. ..."[각주:15]

섬뜩하지만, 평생 마음에 새겨야 할 말임을 절감했다. 내가 하는 작은 말들이 한 사람의 평생과 살아가야 한다니, 더욱 신중해지고 조심하게 된다. 지난 해와 더불어 올 한 해도 나로 인해 적어도 한 명의 친구라도 풍요로이 평생을 안고 살 말들을 가져주길. 조금은 이기적인 바람.

 

 

지금 생각해보면 고집불통에 독한 인간이라는 소리를 듣던 선배도 고작 이십대 초반이었을 뿐이다. 여러 사람의 미움을 견디기로 마음먹었다고 하더라도 상처받을 수밖에 없었겠지. 자신을 지지하고 인정해주는 동료가 없는 내부에서의 투쟁이란 대체 얼마만큼의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을까. 그날 로터리 횡단보도 앞에서 스물다섯 선배가 흘렸던 눈물을 분노가 아니라 그때까지 누적된 외로움이었는지도 모른다. [각주:16]

 

자제심이 무너질까봐 그동안 차마 그 노래들을 듣지 못했다. 선배가 죽었던 페테부르크에 발을 딛는 것도 두려웠다. 잘 쌓아올린 접시처럼 내 감정이 흔들려도 무너지지 않기를 바랐다. 그것들이 다 무너져 내 속을 찌르고 어지럽히지 않기를 바랐던 결벽이 있었다. [각주:17]

내가 그를 그리며 하는 생각과 감정들을 닮아있다. 그러고보니 나도 결벽이 있었구나. 아플 수 있겠지만 너무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고, 모든 것이 와르르 무너져 나까지 집어 삼키지 않았으면 하는 결벽. 

종현아 너가 너무도 많이 남은 이 세상에서 나는 너무너무 속상하고 슬프다. 정말 카뮈처럼 너는 가버린걸까. 그렇게 해야만 전할 수 있었던 것이 있었던걸까. 나와 가까운 죽음에 이리도 내가 많이 흔들릴 줄은 몰랐다. 이제 곧 설 명절이야. 좋은 사람들 보러, 맛있는 음식 먹으러 이곳에 오면 좋겠다. 단 한 번이라도 스쳐보지 못한 인연이지만 여전히 너에게 빚진 게 많아.

 

 

 


미카엘라

엄마는 매사가 그런 식이었다. 김치가 잘 익었다고 감사, 돼지고가 가격이 내려 마음껏 먹을 수 있음을 감사, 발가락에 난 사마귀 치료가 잘된 것을 감사, 일을 할 수 있는 건강을 허락해주심에 감사, 외식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 일이 안 풀리면 일이 잘 풀릴 때에 감사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음을 감사.

엄마의 감사 타령 속에서 그녀는 오히려 엄마의 초라한 현실을 봤다. 언제든 외식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굳이 그런 일에 감사할 필요가 없을 테니까. 언제든 양껏 돼지고기를 먹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돼지 고기 가격이 내렸다고 감사할 필요가 없을 테니까. 돈이 있다면, 부유한 부모나 남편이 있다면 통증을 견뎌가며 매일 열 시간씩 서서 일할 수 있음을 감사할 필요가 없을 것이므로. 그녀는 차라리 엄마가 스스로의 처지에 솔직해져서 불평하기를 바랐다. 초라한 현실에 대한 엄마의 감사가 얼마간은 기만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각주:18]

읽다가 웃음이 났던 곳. 놓치 말아야 할 태도로 감사를 꼽는 나임에도 웃음이 지어졌다. 웃프다 라고 할까. 그래도 아직은 전자가 좋은 걸 보니 어린 건지, 어리석은 건지.

 

 

사고가 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부활절을 맞았다. 여자는 일 년 중에 가장 좋아하던 부활절 주간을 예전처럼 보내지 못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기쁜 메시지도 가슴에 닿지 않고 멀리로 부유할 뿐이었다. "기뻐하세요, 자매님. 부활절입니다"라는 말조차도 그들에 대한 애도를 가로막는 폭력처럼 느껴졌다. 여자는 처음으로 부활절 미사에 참례하지 못했다. [각주:19]

 

여자는 옆에 앉아서 꾸벅꾸벅 조는 노인을 바라봤다. 이 노인은 얼마나 여러 번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어버렸을까. 여자는 노인들을 볼 때마다 그런 존경심을 느꼈다. 오래 살아가는 일이란, 사랑하는 사람들을 먼저 보내고 오래도록 남겨지는 일이니까. 그런 일들을 겪고도 다시 일어나 밥을 먹고 홀로 길을 걸어나가야 하는 일이니까. [각주:20]

내가 여전히 겪는 이 슬픔을 앞으로 때때로 느껴야 한다니, 세상은 너무나도 슬픔과 고통으로 점철되어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수가 좋은 것만은 아님을 처음 알게 되었다. 나는 과연 앞으로도 마주할 수많은 죽음과 슬픔들에 잘 견뎌낼 수 있을까. 다시 일어나 밥을 먹고 홀로 길을 걸어나갈 수 있을까.

 

 

 


비밀

말자는 지민이 서러움을 모르는 아이로 살기 바랐다. 흘릴 필요가 없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으면, 겪지 않아도 될 고통을 겪지 않았으면 했다. 삶에 의해 시시때때로 침해당하고 괴롭힘당하지 않기를 바랐다. 지민은 삶을 견디는 사람이 아니라 삶을 기꺼이 누리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야야, 지민아, 너 마음 쓰지 말어."

...

"너가 어른이 되면 남자고 여자고 없다. 너가 여자여서 안 도니다는 소리 듣거들랑 무식한 소리구나 하구 비웃어버려. 넌 뭐든 다 되고 뭐든 다 할 수 있다. 너 땐 남자구 여자구 마음 바른 사람이 잘 살 거여."[각주:21]

하물며 우리 반 내새끼들에게도 느끼는 이 감정을, 손녀에게 오죽 그러하리랴. 내가 겪는 슬픔들을 아아아아무것도 겪지 않고 좋은 일만 있길 바라는 그 마음.

마음 바른 사람.

마음이 바른 사람..

 

이 단편을 읽으며 정말 소리내어 엉엉 울었다. 내가 몸담고 있는 교직에서 만날 수 있는 일이라 그런가? 내가 겪었을지도 모를 이야기여서일까?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세하지 않아서 더 속상하고 슬픈 이야기. 소설이 소설이 아닐 때 슬픔은 극대화되는 것 같다. 모두가 알지만 모두가 지켜주는 비밀, 지민이는 잘 지낼까. 이런 소설에서도 마주하는 죽음에 여전히 그의 생각이 나는 걸 보면, 아직 나는 무뎌지기엔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저 멀리 집배원도 갈 수 없는 곳에 있는 지민씨, 아마 그 누구보다 예쁜 학생들이 그리워할 거예요. 그리고 그게 진짜 선생님인 것 같아요. 아이들 마음에 남아있다면 기관제인지, 기간제인지 무관하게 그게 진짜 선생님인 것 같아요.  

 

아 너무 속상하고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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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구입 날짜를 보니 17.09.20. 

봉부장님과 우리 부장님과 함께 본청에서 하는 박웅현씨의 강연을 듣고서 산 것. 

그가 말하는 것에서 진심을 느낄 수 있었고, 또 듣는 능력 또한 내가 본 그 나이대의 사람들 중 손에 꼽혔다. 

개인이 멋있으니 책을 자연스레 사게 된 것.

엄마 집에는 대학생때 읽다 만 <책은 도끼다>가 있을텐데, 이번 설에 가면 읽고 와야지. (포스팅도 물론)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 박사는 "모든 사람은 완벽하게 불완전하다"라고 했습니다. 맞습니다. 완벽한 인간은 없어요. 우리나라 최고 기업의 총수, 최고 대학의 총장, 대통령까지도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 불완전해요. 다만 그들의 직책이나 직위 때문에 완벽해 보일 뿐이죠. 그들은 완전한 면만 부각이 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완전한 면만 두드러져 보이기 때문에 차이가 나 보이는 것뿐입니다. 누구나 단점은 많습니다. 저도 그렇고요. 하지만 세상에 태어나 살아남은 유기체들인데 어떻게 단점만 있겠습니까? 분명히 장점도 있죠. 그러니 내가 가진 장점을 보고 인정해줘야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부사,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존중해야 하는 거이죠. 단점을 인정하되 그것이 나를 지배하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러니 못났다고 외로워하지도 마세요. [각주:1]


자신의 길을 무시하지 않는 것, 바로 이게 인생입니다. 그리고 모든 인생마다 기회는 달라요. 왜냐하면 내가 어디에 태어날지, 어떤 환경에서 자랄지 아무도 모르잖아요? 각기 다른 자신의 인생이 있어요. 그러니 기회도 다르겠죠. 그러니까 아모르 파티, 자기 인생을 사랑해야 하는 겁니다. 인생에 정석과 같은 교과서는 없습니다. 열심히 살다 보면 인생에 어떤 점들이 뿌려질 것이고, 의미 없어 보이던 그 점들이 어느 순간 연결돼서 별이 되는 거예요. 정해진 빛을 따르려 하지 마세요. 우리에겐 오직 각자의 점과 각자의 별이 있을 뿐입니다. [각주:2]


여러분은 여기서 뭘 보았나요? 계속 변하는 기술들을 보았습니까? 저는 사람을 봅니다. 모든 것은 변하지만 Everything Changes,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그것입니다. 사람들의 웃음은 변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본질의 시대고 '변하지 않는' 그것을 잡아야 해요.[각주:3]


고스톱이나 애니파 같은 게임을 진짜 잘하는데 그럼 이게 내 본질일까? 저는 이렇게 이해합니다. 내가 하는 행동이 5년 후의 나에게 긍정적인 체력이 될 것이냐 아니냐가 기준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하철에서 휴대폰으로 치는 고스톱이, 애니팡이 당장의 내 스트레스는 풀어주겠지만 5년 후에 나에게 어떤 영향을 줄까요? 본질은 결국 자기 판단입니다. 나한테 진짜 무엇이 도움이 될 것인가를 중심에 놓고 봐야 합니다. [각주:4]


그들이 한창 사랑을 나눴을 때 축복을 내리던 햇살은 아직도 따뜻하게 머리 위를 비추고 있죠.. 인간은 이 세상의 덧없는 길손일 뿐입니다. 영원한 것은 돌이고, 청동이고, 햇살이죠. [각주:5]


그래서 저는 어린 시절 제가 받은 교육을 생각하면서 선생님들께 부탁이니 딱 한 번만 효율을 포기하고, 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스피커를 가져다 놓고 아이들에게 비발디의 음악을 들려주라고 했습니다. 분명 그중 반 이상은 감동을 받아 소름이 돋을 것이고 그러면 그걸로 됐다고, 그 이후로는 스스로 찾아 들을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많이 가르치는 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서울대 권장도서 100권을 꼭 읽고 외우지 않아도 인생은 얼마든지 풍요로울 수 있습니다. 방법만 알면 아이들은 자신에게 좋은 것을 알아서 찾을 테니까요.  [각주:6]

내가 늘 고민했던 부분이랑 비슷해서 와닿았던 부분. 사실 우리 아이들은 내 전공이 무엇인지, 내 과목이 얼마나 고상하고 위대한 학문인지 관심이 없다. 정말 1도 없다. 그리고 궁금해 하지도 않는다. 

이러한 아이들의 생각에 초점을 맞추니, 지식 전달은 무용할 뿐더러 나를 소진시키는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대학교 4학년 때 경기도 선배님의 특강을 듣고서부터 한 생각이지만 아직까지 변함은 없다) 그래서 여유롭고, 놀며, 쉬며 가더라도 아이들이 느낄 수 있게 진한 활동들을 하자-고 다짐하게 됐다. 그리고 내 욕심이 너무 커 모든 친구들이 전부 감동을 받거나, 영감을 얻거나, 깨달았으면 하지만 이조차 나를 옥죄는 것이더라. 그리하여 이 중 단 한 명이라도 감화받으면 그걸로 됐다-라고 생각하게끔 혼자 늘 다짐한다. (그럼에도 나는 17년 너무 예쁜 아가들만 만나서 거의 대부분의 친구들이 좋아해줘서 교사 자존감은 하늘을 찌른다 하하)



그러니까 준비할 수 있어야 해요. 클래식, 고전을 만나기 위해서는, 함부로 씹다 버린 껌처럼 여기지 않으려면 준비해야 합니다.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가 아랑야 할 것을 가리고 있다는 말을 자주합니다. 우리는 첨성대를 알고, 비발디를 알고, 도스토예프스키를 압니다. 하지만 진짜 알까요? 잘 생각해보세요. [각주:7]


고전을 궁금해 하세요. 여기저기 도움도 받고, 책을 통해 발견해내면서 알려고 하세요. 클래식을 당신 밖에 살게 하지 마세요. 클래식은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즐길 대상입니다. 공부의 대상이 아니에요. 많이 아는 건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요. 얕게 알려고 하지 말고, 깊이 보고 들으려고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각주:8]


그 차이입니다. 흘려 보고 듣느냐, 깊이 보고 듣느냐의 차이. 결국 생각해보니 지금까지 나의 경쟁력이 되어준 단어는 '見'이었습니다. [각주:9]

見, 아마 통찰력이 아닐까. 혹은 감수성. 혹은 진심. 


수많은 시간을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며

꽃들이 햇살을 어떻게 받는지

꽃들이 어둠을 어떻게 익히는지

외면한 채 한 곳을 바라보며 

고작 버스나 기다렸다는 기억에

목이 멜 것이다.

-조은, <언젠가는> 중에서[각주:10]


네 명이 술을 마실 때 그냥 마시는 사람과, "창 밖 좀 봐. 가을비가 내린다"하는 사람의 삶에는 차이가 있어요. 그러니 순간을 온전히 살려면 촉수를 예민하게 만드세요. 그래서 다섯 개의 촉각을 가진 동물이 되는 걸 목표로 삼으세요. [각주:11] 

나 스스로 기억하기에 2016년 3월에는 박웅현씨가 말하듯 순간을 온전히 살았던 것 같다. 당시 블로그 일상 글만 봐도 알 수 있다. 꽃에 내린 햇살에 감동하고 볕에 훌쩍 크는 개나리들에 황홀해했다. 

왜일까? 이 책의 이 장을 읽으며 그 때가 가장 많이 떠올랐고, 이유가 무엇인지 굉장히 궁금해졌다. 

심신의 평온과 평정심, 안정감 등이 있겠지만 그때 나를 지배하던 주된 생각은 '이 개나리도 내년이면 못 보겠구나'였다. 아마 이번 내가 보는 이 순간이 마지막이 될 것이라 생각했기에 모든 것이 그토록 아름답게 다가온 것일까? 충만한 일상과 행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의 나날들이었다. 언제쯤 또 경험할 수 있으려나.. 책에서 작가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그렇게 바라볼 수 있는 시선과 사유를 연습하라고.



어떤 선택을 하든 간에 선택을 하고 나면 답은 그 자리에 있습니다. 아니면 없습니다. [각주:12]


갈 수 있었겠어요? 못 가죠. 명백하게 못 가는 거예요. 하지만 사람인데 미련이 안 남았겠어요 폴 고갱 같은 의미 있는 삶이 있을 텐데, 나도 뭔가를 누리고 싶은데, 그냥 이렇게 살면 평범해질 것 같은데, 하는 아쉬움이 왜 없었겠습니까.[각주:13]

박웅현씨 같은 사람도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생각을 하는 구나.



판사증후군, 대학증후군 이 이야기는 우리 생각 저변에 '아, 저 학교 간 사람은 다 똑똑해, 의사가 된 사람은 다 존경할 만해'라는 식의 생각이 깔려 있다는 거죠. 이런 단순 도식이 있을 수 있나요? 아니 인새이 이렇게 단순한가요? 인생은, 사람은, 절대 단순하지 않아요. 판사 중에 후진 판사는 정말 후져요. 의사 중에 무식한 의사도 많고요. 뉴스 사회면에 나오지 않습니까? 멋지고 말고의 문제는 직업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도 이 정도는 다 알고 있어요.[각주:14]

내가 지난 한 해 동안 가장 많이 깨지고, 무너진 나의 잘못된 신념이 이것이 아닐까. 교사증후군. 내가 힘들게 준비했고 힘들게 된 것이니 만큼 이미 이 일을 너무나도 훌륭히, 잘, 그것도 오래 수행해온 대상들에 대한 맹목적 기대가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자그마한 인격적 흠결에도 나는 소스라치게 놀란 게 아닐까. 또 슬퍼한 게 아닐까. 

정말 멋지고 말고는 사람 본연의 문제다. 향기가 나는 사람, 반짝반짝 빛이 나는 사람. 



"무슨 이야기인지 잘 압니다. 나는 그래서 안전장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매카트니라는 스타 입장에서도 그렇고 '나'라는 입장에서도. 매카트니는 자기 이름을 딴 별도 가진 사람입니다. 이런 대중적인 스타와 나를 분리시킬 필요가 있어요. 사람들은 그걸 잘 못하는데, 나는 나를 그렇게 놔두지 않습니다. 스타로서의 업적에 대해서는 기쁘고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때로는 감격합니다. 하지만 집으로 가면서 '난 내 이름을 딴 해성도 있지'라고 하진 않죠. 난 여전히 리버풀에서 버스를 타고 다니던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빅이슈>6월호, 폴 매카트니 인터뷰 중에서[각주:15]

이것이 워라밸의 일종일까? 멋있다. 이뤄내고 성취한 그것들 없이도 저렇게나 곧고 자존하는 사람이라니. 멋지다. 



엘리베이터에서 사장님이나 회장님 만나면 당당하게 인사도 하세요. 어쩔 줄 모르고 구석에 서 있지 말고, 이야기 나누면 되는 거죠. 어떤 상황에서도 비굴하게 굴복하지 마세요. 똑똑한 젊은 사람들이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인생이 너무 슬퍼지는 것 같아요. [각주:16]


우리를 무서워하게 해야 해요. 무조건 복종하는 사람들을 무서워하진 않아요. 회장님에게도 건의할 수 있는 거예요. 아닌 건 아니라고 말 할 수 있어요. 상대 눈치를 보는 가장 큰 이유는 돈을 주는 사람이라는 생각 때문일 텐데, 우리는 공짜로 일을 하는 게 아니잖아요? 그쪽의 시혜를 받는 게 아니란 말이죠. 정당하게 일을 하고, 일한 만큼의 대가를 받는 것이니 할 말은 해야 하는 겁니다. [각주:17]


권위에 굴복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나이 먹어 윗것이 되었을 때 권위를 부리지 않는 태도도 중요합니다. 권위는 우러나와야 하는 거예요. 내가 이야기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상대가 인격적으로 감화가 돼서 알아줘야 하는 거예요. 그게 권위입니다. 절대 긴 복도가 권위가 되어서는 안 되는 거죠. [각주:18]

내가 생각하는 중등 교사로서의 권위. 소리 지른다고, 인상 쓴다고, 점수를 깎는다고 권위가 서지 않는다. 그에게 내가 인정을 받고 나로인해 한 번 더 생각하게 될 때 권위가 서는 게 아닐까. 

아직은 나도 잘 모르지만, 아직까지의 내 생각. 



그리고 옳은 게 이긴다는 걸 믿으세요. 옳은 말은 힘이 셉니다. [각주:19]

내가 믿는 두 가지.

1. 진심은 전해진다.

2. 옳은 말은 힘이 세다. 



어떻게 해서든 아랫사람들이 편하게 말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게 윗사람들이 할 일이에요. 그래야 서로 소통이 되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요즘 영화는 뭐가 재미있니? 어제 드라마는 어땠어? 그래? 그렇구나, 하고 맞장구쳐주는 노력이 필요해요. 그렇게 말이 오고 가면서 서로를 이해하고 막힘 없이 소통이 가능한 사이가 되는 게 아닐까요?[각주:20]

처음에는 준비한 게 없어 시작한 도덕쟁이(DJ)가, 위와 같은 역할로도 기능할 때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모든 아이들의 모든 쉬는 시간을 관찰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비슷한 상황 속에 자연스레 내가 있으면서 더 알게 되는 것들은 확실히 있다. 진도나 교과적인 측면에서 무능한 것 아니냐는 비판을 받을 수 있겠지만, 아이들의 마음을 알아봐주고 들어주고 품어주는 게 도덕과 전혀 별개의 일일까? 교과서를 펼쳐보아라. 자신을 위한 것보다는 타인, 그대를 위한 덕목들이 훨씬 많음을 알 수 있다. 

또 덧붙여 내가 수업시간에 내 이야기를 잘 하지 않게 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긴 하다. 이야기라는 것조차 상당히 일방적인 구조인 점이 스스로에게 의문으로 다가오기 때문. 

어렵다. 여전히 모든 게.



그렇다면 전인미답의 길을 즐기기 위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우리들의 불완전함을 받아들이고 실수에 휘둘리지 않는 겁니다. 전인미답이잖아요. 실수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본 적이 없는 길입니다. 가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완벽하겠습니까? 길을 걸으며 당연히 실수할겁니다. 그러니 실수를 못 견디고 좌절하지 마세요. 나만 그런 게 아닙니다. 우리는 때로 바깥에 선을 그려놓고 누구 누구의 인생은 이런 실수가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하겠지만 전혀 아니에요. 전인미답(全人未踏), 누구의 인생이나 같습니다. [각주:21]


하나 더 덧붙이자면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에 너무 안달복달하지 않는 태도가 정말 지혜로운 삶의 태도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패는 나와 먼 이야기고, 불행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내 뜻대로 일이 풀릴 거라는 전제 하에 삶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실패하면 하늘이 무너진 듯 좌절하죠. 아쉽게도 인생은 종종 내 뜻과 무관하게 실패와 마주하게 됩니다. [각주:22]


우린 언제든지 이길 수 있다. 우린 언제든지 질 수 있다.[각주: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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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봄

 

 

그는 장기간에 걸친 계획이나 약속 따위를 좋아하지 않았다. 다음날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게 되면 그는 불편을 느꼈다. [각주:1]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일을 내버려두는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가정집에서 모든 사람들의 관대한 용납을 받는 귀여운 고양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부지런히 힘겨운 삶을 살고 있는데 자신은 아무 걱정없이 우아하게, 화려할 정도로 당당하게 지내고 있는 모습과도 같았다. [각주:2]

 

그녀는 한동안 멈춰 선 채 그 아름다운 사내를 들여다보았다. 이 사내에 대해 그녀의 남편은 놀라운 이야기를 많이 해주었다. 그녀는 그의 감긴 긴 두 눈 위로 매력적이고 밝은 이마 위에 그려진 짙은 눈썹과 좁지만 갈색을 띤 뺨, 매력적인 선홍색 입술과 갸름한 목을 바라보았다. 모든 게 그녀의 마음에 들었다. 문득 그녀는 자신이 옥센에서 하녀로 일하면서 때때로 봄날의 변덕스러운 기분에 빠져 이런 멋진 낯선 청년의 사랑을 받아들이던 시절을 떠올렸다. [각주:3]

 

그는 위로 올라가 무두장이와 인사를 나눴다. 거실은 말끔히 청소가 되어 있었고, 밝은 색조의 나무 벽과 벽에 걸린 시계, 거울, 사진 등이 어우러져 친근하고 안락한 분위기를 이루고 있었다. 겨울에는 이렇게 깔끔한 거실도 나쁘지 않다고 크눌프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을 위해 결혼해야 할 만큼 가치 있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각주:4]

 

이봐, 재단사 친구, 자넨 성경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고 있어. 무엇이 진리인지, 인생이 본래 어떻게 이루어진 것인지는 각자가 스스로 깨달아야 하는 것이지 결코 어떤 책에서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일세, 내 생각은 그렇네. 성경은 오래된 책이지. 옛날 사람들은 우리가 오늘날엔 아주 잘 알고 있는 사실들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면에서 아직 모르고 있었지. 하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성경 안에는 아주 아름답고 멋진 이야기들이 담겨 있는 거야, 진실한 이야기들도 아주 많이 들어 있고 말야. [각주:5]

 

그 대신 그는 다른 지방에서 있었던 새로운 사건들을 이야기해 주면서, 자신을 친지이자 친구로, 또한 공모자로서 그곳에 거주하는 명망 있는 사람들의 삶과 연결시켜 주는, 느슨하고 기분 좋은 연결 고리가 존재하는 것을 기쁘게 생각했다. [각주:6]

어색하고 낯선 서울에서 처음 일을 시작한 때와는 달리, 지금은 내게도 느슨하고 기분 좋은 연결 고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느낀다. 교직에 있는 선배, 동기 보다 서울에 계신 동교과 지인 샘들의 수가 늘어나는 것을 실감할 때 나도 일원이 된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는 가정과 결혼의 행복에 대해 무두장이가 위엄 있게 이야기하던 것을 떠올리며 조금은 비웃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군가가 자신의 행복이나 미덕에 대해 자랑하고 뻐길 경우, 대부분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양복 수선공의 경건함도 예전엔 그랬던 것이다. 사람들이 어리석음 속에 빠져 있는 것을 구경할 수도 있고, 그들을 비웃거나 동정심을 가질 수도 있지만 결국 그들이 자신들의 길을 가도록 내버려둘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각주:7]

 

 

 


크눌프에 대한 나의 회상

 

 

 

그건 그렇고 소원이란 건 재미있는 면이 있어. 내가 만일 지금 이 순간 고개 한번 끄덕이는 걸로 멋지고 조그마한 소년이 될 수 있고, 자네는 고개 한번 끄덕이는 걸로 섬세하고 온화한 노인이 될 수 있다면, 우리들 중 누구도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걸. 그러고는 지금 이 모습 그대로 남아 있기를 원할 거야. [각주:8]

 

가장 아름다운 것이란 사람들로 하여금 즐거움뿐만 아니라 슬픔이나 두려움도 항상 함께 느끼게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무슨 말이냐면, 정말로 아름다운 소녀가 하나 있다고 해봐. 만일 지금이 그녀가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고, 이 순간이 지나고 나면 그녀가 늙을 것이고 죽게 될 것이라는 점을 모른다면, 아마도 그녀의 아름다움이 그렇게 두드러지지는 않을 거야. 어떤 아름다운 것이 그 모습대로 영원히 지속된다면 그것도 기쁜 일이겠지. 하지만 그럴 경우 난 그것을 좀더 냉정하게 바라보면서 이렇게 생각할걸. 이것은 언제든지 볼 수 잇는 것이다, 꼭 오늘 보아야 할 필요는 없다고 말야. 반대로 연약해서 오래 머무를 수 없는 것이 있으면 난 그것을 바라보게 되지. 그러면서 난 기쁨만 느끼는 게 아니라 동정심도 함께 느낀다네.

이 두 감정은 서로에게 연결된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오래 지속되는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이지. 그렇지 않아? [각주:9]

 

계획하고 생각한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이야. 사실 사람들도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거든. 실제로는 바로 자신의 마음이 원하는 대로 매순간 아주 무분별하게 행동한다구. 친구가 된다거나 사랑에 빠지는 경우가 아마도 내가 말한 경우에 해당되겠지. 하지만 결국 모든 사람은 자신의 몫을 철저히 혼자서 지고 가는 것이고 다른 사람들과 공유할 수는 없는 거야. 누군가 죽었을 경우에도 그걸 알 수가 있지. 하루, 한 달, 또는 일 년 동안 사람들이 통곡하며 애도하겠지. 하지만 그러고 나면 죽은 자는 영원히 죽은 거야. 그 다음엔 그의 관 속에 고향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는 떠돌이 견습공이 누워 있다 해도 아무 상관 없는 일이 되는 거야. [각주:10]

 

어쩌면 자네가 이야기한 것처럼 될지도 모르지. 그렇게 되면 의지라는 게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고 모든 것이 우리를 완전히 배제한 채로 저절로 진행된다는 것을 깨닫고, 사람들이 몹시 상심하게 되는 경우가 가끔 생기지. 하지만 사람들이 사악해지는 것말고는 다른 길이 없다고 해도 한 가지 죄는 여전히 존재하게 될 걸세. 왜냐하면 사람들이 자신의 내부에서 그것을 느낄 테니까. 그리고 선한 일을 하면 만족을 느끼고 양심의 가책도 없을 테니, 그러게 되면 선한 일이 바로 옳은 일이 될 수밖에 없고 말야. [각주:11]

 

모든 사람은 영혼을 가지고 있는데, 자신의 영혼을 다른 사람의 것과 섞을 수는 없어. 두 사람이 서로에게 다가갈 수도 있고 함께 이야기할 수도 있고 가가이 함께 서 있을 수도 있지. 하지만 그들의 영혼은 각자 자기 자리에 뿌리 내리고 있는 꽃과도 같아서 다른 영혼에게로 갈 수가 없어. 만일 가고자 한다면 자신의 뿌리를 떠나야 하는데 그것 역시 불가능하지. 꽃들은 다른 꽃들에게 가고 싶은 마음에 자신의 향기와 씨앗을 보내지. 하지만 씨앗이 적당한 자리에 떨어지도록 꽃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 그것은 바람이 하는 일이야. 발마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신이 원하는 곳에서 이곳 저곳으로 불어댈 뿐이지. [각주:12]

이 책을 읽게 된 계기인 <앙리할아버지와 나> 연극에서 나왔던 구절. 폴과 콘스탄스가 이야기하는 대목이 이 부분이었던 것 같다. 대동소이한 이유는 아마 번역의 차이겠지? 연극에서는 몰랐는데 읽으면서 정말 헤세같다-하고 느꼈던 부분.

 

난 종종 내 부모님들에 대해서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어. 부모님은 내가 그 분들의 자식이고 자신들과 비슷하다고 생각하셔. 하지만 내가 그 분들을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그 분들에게 난 이해할 수 없는 낯선 인간일 뿐이야. 내게 중요한 일이고 어쩌면 내 영혼 자체일지도 모르는 일들을 부모님들은 하찮게 여기시고, 그것이 내가 어리거나 변덕스러운 탓이라고 돌려버리시는 거야. 그러면서도 그 분들은 나를 사랑하시고 기꺼이 최고의 사랑을 베풀어주시지. 아버지는 그의 자식에게 코와 두 눈과 심지어는 이성까지도 물려줄 수 있지만 영혼은 아니야. 영혼은 모든 사람들 속에 새롭게 존재하는 것이지. [각주:13]

이 책을 읽기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던 곳. 최근의 내가 가장 골몰히 생각하던 부분이기도 하거니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공유되는 부분이 있구나를 새삼 느끼게 된 부분.

'영혼' 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사실 나는 종교가 없는 집안의 종교가 없는 인간으로 자랐기에 영혼과 같은 것에 대해 천착한 적이 거의 없다 해도 무방할 것이다. 아마 영혼이란 것을 많이 마주한 것은 임고 공부할 때 서양 중세 윤리 정도..? 그만큼이나 영혼은 나의 삶과 별개의 무엇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서는 조금 달라진 것 같다. 내가 당황하면서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그 많은 인간의 각양각색을 영혼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러하다. 나의 영혼 또한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새롭게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나는 그토록 달랐구나. 그래서 부딪히고 내가 영혼이 맞는 그 누군가를 찾아 헤매는 거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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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것에서 시선을 돌려 내면을 바라볼 때도 우리가 보고 있는 게 무엇인지 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결국 사고라는 폐쇄된 공간 속에 기억된 이미지들이 세상에 관한 지식으로 변하는 것이니까.[각주:1]



그림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부동감은 그녀가 다른 사람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화가와 관객이 함께 사진사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 이 그림의 특별한 위트다. 바로 우리가, 이 그림 안의 모든 것이 정지해야 하는 진짜 이유인 것이다. 우리가 그림 안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힘이고, 그림이 예우해주는 특별한 경우인 것이다. 우리가 소외당한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은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재촉하는 사람도 없다. 이 순간은 우리의 것이다. 여행을 멈춘 정적 안에서 우리는 다시 멈춰 있다.[각주:2]



<도시의 여름>, 1949

한참을 들여봤던 그림.

나중의 내가 볼 땐 또 어떤 느낌이려나, 어떤 기분이려나. 궁금해서 적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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