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름
수이와 함께 있을 때 이경은 자신이 다른 몸으로 태어난 것 같았다. 눈으로 볼 수 있는 풍경과 코로 들이마시는 숨과 피부에 닿는 공기의 온도까지도 모두 다르게 느껴졌다. 모든 감각기관이 한 꺼풀 벗겨진 느낌이었다. 수이를 만나기 전의 삶이라는 것이 가난하게만 느껴졌다. 1
그 이전의 삶이 가난하게 느껴진다. 정말 예쁜 문장이다. 다시 말해 지금의 삶은 충만하다는 것.
사랑에 빠진 사람의 감정과 느낌을 정말 사랑스럽게도 묘사했다 이 작가.
수이와의 연애는 삶의 일부가 아니었다. 수이는 애인이었고, 가장 친한 친구였고, 가족이었고, 함께 있을 때 가장 편하게 숨쉴 수 있는 사람이었다. 수이와 헤어진다면 그 상황을 가장 완전하게 위로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수이일 것이다. 그 가정은 모순적이지만 가장 진실에 가까웠다. 그런 수이에 비하면 은지는 얼마나 가볍게 잊을 수 있는 사람인가.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과 부드러운 말투는 얼마나 쉽게 지울 수 있는 허상에 가까운가. 2
애인이자, 친한 친구이자, 가족이자, 곁에 있을 때 편하게 숨쉴 수 있는 사람.
그와 헤어진다면 그 상황을 가장 완전히 위로해줄 수 있는 사람은 그.
사랑에는 정말 다양한 모양이 있나보다. 나는 하나만 있는 줄 알았는데, 그리고 그게 맞다고 생각했는데. 여러 모양이 있고 또 여러가지 정답도 있겠구나.
601, 602
엄마는 거짓말을 했어. 엄마는 늘 친구를 도와야 한다고 했지. 옳은 일을 해야 한다고. 나는 슬픔 속에서도 엄마의 반응에 분노를 느꼈다. 외로움이 서린 분노였다. 3
옳은 일을 가르치고, 강요하는 나에게 혹시 우리 아이들 중 누군가는 외로움을 느끼진 않았을런지. 내가 늘 일관적이었을런지..
지나가는 밤
"언니, 내가 잘못했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윤희에게 주희는 다시 말했다.
"내가 잘못했어, 언니. 내일은 나랑 놀아줄거지? 그러기다. 응?"
윤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럴 때면 그런 주희가 짐처럼 느껴졌다. 또래나 언니들과 놀고 싶은데 자기에게 꼭 붙어 있으려 하고, 덜어지기 싫어하는 모습이.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주희는 윤희에게도 가장 가까운 친구였다. 4
내가 정아에게 갖는 부채감을 여기서 만났다. 괜히 미안한 마음이 매번 드는 건, 그리고 특히 눈을 볼 때 속상한 건.
모든 첫째들이 갖는 동생에 대한 마음일까? 나만 유달리 강하게 느끼는 것일까.
어린 시절은 다른 밀도의 시간 같다고 윤희는 생각했다. 같은 십 년이라고 해도 열 살이 되기까지의 시간은 그 이후 지나게 되는 시간과는 다른 몸을 가졌다고. 어린 시절에 함께 살고 사랑을 나눈 사람과는 그 이후 아무리 오랜 시간을 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끝끝내 이어져 있기 마련이었다. 현실적으로 서로 아무 관계 없는 사람들로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5
그래서 내가 더 슬퍼했던 거야.
모래로 지은 집
네가 뭘 알아, 네가 뭘. 그건 마음이 구겨져 있는 사람 특유의 과시였다. 6
처음 내가 들었던 때의 충격을 잊지 못한다. "니가 멀 알아" 그 애의 카톡에서 나는 머리가 쿵. 그렇다 정말 내가 뭘 안다고. 할 말이 없어졌고, 그 애의 슬픔과 속상함이 배가되는 것 같았다. 그건 그렇고, 정말 이건 마음이 구겨져 있는 사람 특유의 과시이다. 였다.
구김살 없는 사람. 쉽게 말해 꼬이지 않은 사람. 해가 거듭될수록 만나기가 드물다.
나는 이제 서른다섯이고 그때의 일을 자주 떠올리지는 않는다. 이 특별할 것도 없는 이야기를 누구에게 해본 적도 없다. 누구나 살면서 몇 개의 다리를 건너듯이, 그때의 나도 공무와 모래와 함게 어떤 길고 흔들리는 다리를 건넜는지도 모른다. 다리의 끝에서 각자의 땅에 발을 내디뎠고, 삶의 모든 다리가 그렇듯이 그 다리도 우리가 땅에 발을 내딛자마자 사라져버렸다. 다리 위에서 우리가 지었던 표정과 걸음걸이, 우리의 목소리, 난간에 몸을 기댔던 모습들과 함께.
나는 무정하고 차갑고 방어적인 방법으로 모래를 사랑했고, 운이 좋게도 내 모습 그대로 사랑받았다. 사랑만큼 불공평한 감정은 없는 것 같다고 나는 종종 생각한다. 아무리 둘이 서로를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언제나 더 사랑하는 사람과 덜 사랑하는 사람이 존재한다고. 누군가가 비참해서도, 누군가가 비열해서도 아니라 사랑의 모양이 그래서. 7
살면서 누구나 몇 개의 다리를 건넌다 라는 말을 어떻게 생각하는걸까. 너무너무 아름다운 문장.
사랑의 모양 그 자체가 그러하다. 씁쓸하지만 공감이 되는 일.
고백
셋이란 이런 거구나. 미주는 종종 자신이 주나와 진희의 특별한 관계에 딸린 부록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둘의 관계에는 미주가 개입할 수 없는 단단한 지점이 있었다. 그 마음을 이야기했을 때 진희는 자기야말로 그런 생각을 했다고 대답했다. "그렇잖아. 너희 둘은 허물이 없다고 해야 하나. 편해 보여. 내가 낄 수 없을 때가 있어." "아니지. 내가 깍두기지. 너희끼리 책 빌려 읽고 얘기하고 그러잖아. 그럴 때 난 할말 없었어." 주나까지 이렇게 말했을 때 셋은 싱긋이 웃었다. 셋이라는 숫자 안에서 모두가 소외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 이야기를 나누면서 조금은 가볍게 느껴져서였다. 8
"네가 날 피했었잖아." 겨우 꾹꾹 욱여넣었던 서운함이 억울함으로 터져나왔다. 자신의 심장이 뛰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보기 싫었으니까. 네 얼굴." 주나가 미주를 쏘아보며 말했다. 울음이 치받쳤지만 지고 싶지 않아서 미주는 주나가 상처받을 만한 말을 머릿속에서 고르기 시작했다. 9
손길
그렇게 여자를 미워하던 시간도 지나갔다. 이제 혜인에게 여자는 아낌없이 사랑을 줬던 큰사람만도 , 작별 인사도 하지 않은 채로 자신을 떠났던 잔인하고 비겁한 사람만도 아니었다. 여자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생각하면 제대로 아는 것이 별로 없기도 했다. 여자는 그저 좋기만 한 사람도, 미칠 듯이 미운 사람도, 가족도 친구도, 그렇다고 아주 모르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녀는 혜인의 마음속에서 완전히 죽어버렸다가도 어느 순간이면 다시 살아나는 오래된 타인이었다. 10
고모의 말을 들으면서, 엄마와 함께 거실 한구석에서 접은 다리를 끌어안고 혜인은 누워 있었다. 어른들은 서로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같이 증오할 사람 하나를 필요로 하는 것 같았다. 숙모와 제대로 대화 한번 해본 적도 없으면서, 숙모가 얼마나 웃기고 재미있는지도 모르면서, 삼촌이랑 어마나 즐겁게 사는지 보고도 못 본 척하면서 숙모가 삼촌 인생을 망쳤다고 했다.
그들은 삼촌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제대로 바라보려고 하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혜인이 아는 한 그런 말을 했던 사람 중에 삼촌보다 더 행복한 이는 없었으니까. 겪어보지 못한 일을 상상할 수 없는 무능력으로, 그들은 자신들이 경험한 삶에 기대어 삼촌의 불행을 어림짐작했다. 11
무능력하기 싫다. 겪어보지 못한 일을 상상할 수 있고 싶다. 타인의 불행을 어림짐작 하고 싶지 않다.
산다는 건 이상한 종류의 마술 같다고 혜인은 생각했다. 기대하지 않았던 존재가 나타나 함께하다 한순간 사라져버린다. 검고 텅 빈 상자에서 흰 비둘기가 나왔다가도 마술사의 손길 한 번으로 사라지듯이. 보통의 마술에서는 마술사가 사라진 비둘기를 되살려내지만, 삶이라는 마술은 그런 역행의 놀라움을 보여주지 않았다. 한 방향으로만 진행되는 마술. 그건 무에서 유로, 유에서 무로는 가지만 다시 무에서 유로는 가지 않는 분명한 법칙을 따랐다. 그 룰을 알고 있는 이상 그저 꽃이 필 때 웃고 비둘기가 마술사의 손등에 앉아 있을 때 감탄할 일이었다. 12
그때의 여자의 나이가 되어 혜인은 생각한다. 여자는 어쩌면 자신에게 삶의 무거움을 미리 알려주려고 하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고, 자신이 세상과 인간에 대해 미리부터 겁을 집어먹지 않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생각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농담과 웃음과 천연덕스러운 행동으로 자기를 지켜오고 관계를 맺어왔다면, 그저 그런 방법으로밖에 혜인을 대할 수 없었으리라고.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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