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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스트는 위고를 열심히 읽었다. 그는 <되찾은 시간>에서 "풀은 자라야 하고 아이들은 죽어야 한다"는 위고의 말을 인용한 뒤 덧붙인다. 예술의 잔인한 법칙은 존재들이 죽어야 하고 우리 자신도 고통이란 고통은 다 겪고 죽어야 하는 것이라고. 진실하지만 서늘한 말이다. 좋은 작가는 아첨하지 않는다. 오랜 친구처럼 우리에게 진실의 차가운 냉기를 깊이 들이마시라고 무심한 얼굴로 짧게 말한다. (9) 

 

실비아 플라스도 똑같은 불만을 토로했다. "도로 인부들, 선원과 군인들, 술집의 단골손님들과 어울리고 싶은 이 목마른 갈망ㅡ이름 없이, 귀 기울여 들으며, 기록하며, 난장판의 일원이 되고 싶은 갈망이ㅡ이 모든 게 내가 여자아이라는 사실 때문에 망가져버리고 만다. 공격당하고 포격당할 위험이 상존하는 여성이기 때문에. 남자들과 그들에 대한, 온 마음을 사로잡는 이런 관심은 그들을 유혹하고자 하는 욕망이나 은밀한 관계로 유인하는 도발로 곡해되는 일이 흔하다. 아, 제기랄, 그렇다. 나는 가능한 한 모든 사람들과 최대한 깊은 대화를 나누고 싶다. 야외에서 잠을 자고, 서부로 여행을 하고, 밤에 마음껏 자유롭게 나다닐 수 있다면 좋겠다." (30)

 

버지니아는 우리에게, 아니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네 안에 사랑받지 못할 어떤 결핍, 열등함이 존재하는 게 아니다. 그저 너의 사샤는 자신의 인생을 찾아 떠나갔을 뿐이야. (34)

 

그들은 근사한 목재를 얻은 목수처럼 외친다. 하지만 아이가 제 욕구를 드러내며 짜놓은 계획표대로 움직이지 않을 때 그들은 존재의 복수성plurality을 절감한다. '얘는 나와 다른 존재구나. 대화가 필요해!' (43)

 

과잉 생산되고 과잉 소비되는 사물은 인간에게 유용하지 않다. 생산성에만 유용할 뿐. 더 많은 소비를 외치는 열망은 더 많은 노동을 외치는 열망의 다른 얼굴이다. 이 열망은 다른 동료 인간들에게서 행위와 사유의 가능성을 빼앗고, 그들을더 많은 노동, 더 위험한 노동으로 내몬다. <인간의 조건> 마지막 장에서 아렌트는 탄식하는 어조로 이를 "노동하는 동물의 승리"라고 표현했다.  (45)

 

하지만 죽음 자체는 체험되지 않는다.  죽음이 덮쳐와 그를 '다른 누군가'로 만들 뿐이다. 블랑쇼는 이것을 '비인칭의 죽음'이라고 보른다. 나(1인칭)와 너(2인칭)도 아니고 그/그녀(3인칭)도아닌 누군가의 죽음이기 때문이다. '존재했었으나 지금은 없는' 아무도 아닌 누군가는 비인칭이라 할 수 없다. (59) 

 

카프카가 '문학적 전복'에 관해 친구 오스카 폴락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를 읽어보자. "만일 우리가 읽는 책이 주먹질로 두개골을 깨우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책을 읽는단 말인가? (...)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고통을 주는 재앙 같은, 우리가 우리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누군가의 죽음 같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멀리 숲속으로 추방된 것 같은, 자살 같은 느낌을 주는 그런 책들이지, 책이란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해." 위대한 책들의 타격 아래서 우리는 번번이 죽고 또 번번이 다른 존재로 태어난다. 문학의 공간이란 그런 곳이다. (61)

 

사람을 멀리하는 외로운 사람, 괴짜라는 일부 설명과 달리 에밀리 디킨슨의 시들은 다정하고 심오하다. 그녀는 다른 사람의 영혼을 찾아다니는 이의 모습은 "음악을 다 연주할 때까지/ 건반을 더듬는 연주가"를 닮았다고 쓴다.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그/녀의 여러 건반을 하나하나 눌러보고 그 소리를 들으며 그/녀를 알게 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에밀리는 친구들에게 천 통이 넘는 편지를 보냈고 특히 여자 친구들과 깊은 우정을 나눴다. (85)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누군가 내게 편지로 물었다.
이것은 내가 바로 그 사람에게 묻고 싶었던
질문이었다. 
- <20세기의 마지막 문턱에서>에서

쉽고 명징하지만 마음을 울리는 시구다. 21세기를 시작하는 문턱에서 우리는 이메일이나 디엠으로 똑같은 질문을 하고, 100년이나 200년 뒤에는 어떠면 목성에 있는 한 도시에서 역시 이 물음을 던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시를 읽지 않았다면 우린 묻도록 허용된 숱한 실용적인 질문 대신 이런 막연한 질문이나 반복하고 있는 자신을 부끄러워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또다시, 늘 그래왔던 것처럼,/ 앞에서 언급했듯이,/ 순진하기 짝이 없는 질문들보다/ 더 절박한 질문들은 없다"로 끝나는 시의 마지막 연을 읽고 나면, 이 질문이 어리숙한 나만의 것이 아니라 모두의 것이라는 사실에 위로를 받게 된다. 스무 살의 한 친구가 편지에 적어 보낸 이 질문을 받고 우물쭈물했던 사람이 나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92)    

 

"고통이나 비참함 앞에서 달아나지 마라. 덧없는 이익들, 특권들, 일시적인 명예들 때문에 네 자신 안에서 네가 그리도 잘 느끼고 있는 것의 가장 작은 조각까지도 양보하지 마라." 이렇게 말했던 루오는 노년에 발표한 판화집 <메제레레>로 많은 이에게 감동을 주었다. '미제레레miserere'는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miserere mei Deus'라는 라틴어 성경 구절에서 온 제목이다. (107)

 

미국의 심리치료사 메리 파이퍼는 난민들과 상담하는 중에 그들에게 용기 있게 행동한 기억이 있는지 물었다. 모두 전쟁으로 가족과 집을 잃고 미국으로 온 피해자들이었지만, 그들의 이야기에 약간의 변화를 주면 정체성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보스니아에서 온한 젊은 여성은 군인들이 몰려왔을 때 자신이 여동생을 문 뒤로 밀어 넣어 동생이 강간당하지 않게 보호했다고 말했다. 이 기억을 떠올리며 그녀는 자신이 더럽혀졌다고 느끼는 대신 고결하다고 느끼게 된 것 같았다고 파이퍼는 전한다. 새롭게 기억하는 일을 통해 이 여성은 자기 삶의 폐허 같던 장면에서 살아갈 용기와 싸울 힘을 얻은 것이다. 기억은 "일종의 갱신/ 심지어/ 어떤 시작, 기억이 여는 공간은 새로운/ 장소여서.". 시 쓰기를 통해 삶은 늘 새롭게 기억되어야 한다. 시인이란 그렇게 믿는 존재이다. (123)   

 

프랑스 철학자 피에르 자위는 <드러내지 않기>에서 우주 창조를 설명하는 모델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그리스 사상에서 기원하는 '유출' 모델로, 이 세계가 신 또는 무한자의 선한 자기표현으로부터 만들어졌다고 보는 입장에서 나왔다. 전능한 존재가 자기 밖으로 흘러넘치면서 자기를 드러내는 활동에서 모든 게 생겨났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유대교의 카발라 사상에서 나온 '침춤tsimtsoum' 또는 '수축' 모델이다. 무한자가 세계를 창조하면서 유한자가 거처할 공간을 마련해주기 위해 만물에게 가운데 자리를 내주고 자신은 가장자리로 물러났다는 것이다. 어느 쪽이 더 설득력 있는지를 따지는 것은 신학자와 철학자의 일이다. 그러나 평범한 이들에게는 종교적 태도란 두 가지 모두를 뜻한다. 신성해진다는 것은 다른존재를 위해 사랑을 흘러넘치게 표현하는 일인 동시에 타자를 위해 물러서며 자신을 한껏 움츠리는 일이다. (127) 

 

나의 전부를 비밀 없이 상대와 나누고 싶고, 또 상대의 전부를 알고 싶다는 욕망은 사랑을 막 시작한 연인들에게 종종 발견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끝없이지속될 경우에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밀란 쿤데라는 이 투명성이 오래된 유토피아(신이 내 모든 슬픔과 고통을 하나도 빠짐없이 알고 계시는 곳)의 특징이면서 현대적 삶의 가장 무시무시한 양상이라고 말한다. 투명성의 법칙에 따르면 국가적인 일들은 점점 불투명해지는 반면 사적 개인들은 자신의 건강 상태, 재정 상태, 가족 상황을 남들에게 제공하는 일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매스미디어가 그렇게 하기로 결정내리기만 하면 그는 심지어 사랑, 질병, 죽음에서조차도 은밀한 순간이라곤 단 한 순간도 찾을 수 없게 된다." (128)     

 

고대 그리스인들은 억압 속에서도 용기 내어 진실을 말하는 것을 '파레시아parrhesia'라고 불렀는데, 획일적인 무대에서 퇴장하는 것, 강요된 발언을 거부하고 침묵하는 것 또한 파레시아만큼이나 용감한 행위이다. (130) 

 

뒤셀도르프는 산업이 흥성한 서독의 대표적인 부자 도시이다. 그곳에서 시인은 이른바 '팔꿈치 사회'를 목격한다. 그것은 자기가 앞서기 위해 타인을 팔꿈치로 밀쳐내야만 하는 경쟁사회를 말한다. 이런 사회에서 드러내기란 얼마나 비싼 것을 먹고 입는지, 얼마나 비싼 데 사는지를 과시하는 일, 소유와 소비의 경쟁적 과시와 동의어가 된다. 
피에르 자위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나 인정을 받기 위한 끝없는 싸움에 휘말리지 않고" 다른 존재들을 사랑하고 연대감을 느끼는 유일한 방법은 "존재들에게 자리를 내주는 드러내지 않는 처신뿐"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다른 존재에게 공간과 시간의 일부를 내어주며 그를 돌볼 때 그 역시 우리를 돌본다. 시인은 한 지인이 키우는 반려견에게서 이런 진실을 새삼 발견한다. 인간이 작은 개에게 자기 곁을 내어주면서 요청한다. "작은 개는 위험을 무릅쓰고/ 몸을 던지거라, 허공에서/ 빙그르 돌며/ 제 주인이/ 곁으로 뛰어와 주기를 기다리며// 보여주거라/ 작은 개는 공감을/ 그리고한 인간을/ 사랑하거라." 시인은 이 사랑을 받기 위해서 "주인이 치르는 대가"는 "그 작은 개의 개가 되는 것"이라고 노래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작은 개가 그 곁을 내주며 돌봐주는 반려동물일 뿐이다. 이 동물이 작은 개에게 간절히 희망하는 것은 한 가지다. "뛰어올라주었으면, 친구, 작은 개여/ 외로움의/ 목젖까지". (131)       

 

"무겁지만 한결같은 걸음걸이로, 아무리 해도 끝장을 볼 수 없을 고뇌를 향해 다시 걸어 내려오는 (...) 그 순간순간 시지프는 자신의 운명보다 우월하다. 그는 그의 바위보다 강하다." (141) 

 

친구 귀스타브 티봉이 베유 사후에 단상을 모아 출간한 <중력과 은총>을 평온하게 읽기는 어렵다. 마치 심장 속의 먹물주머니를 터뜨리는 것 같다. 가령 "달걀 한 알을 얻기 위해 새벽 한 시부터 아침 여덟 시까지 꼼짝 안 하고 서 있을 수 있지만,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기는 힘들다"라는 문장에서처럼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강력한 힘은 고급한 동기보다 저급한 동기에 있다는 신랄한 주장을 만날 때 그렇다. 부정하고 싶지만 사실 일상에는 그런 장면들이 즐비하지 않은가? 베유는 저급한 동기의 에너지가 중력처럼 인간을 아래로 끌어당길 때, 은총만이 그를 상승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147)

 

슬픔에 빠진 아이는 늘 구석에 가서 웅크린다. 겁에 질린 동물들이 찾는 곳도 구석이다. 세상에서 버려진 기분이 들 때 우리는 구석으로 숨는다. 바슐라르에 따르면 구석이야말로 안전에 대한 몽상을 충족시켜주는 진정한 집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편안하게 거주한다고 말할 수 있는 곳은 상처받는 순간에 숨을 수 있고 비밀의 은신처가 될 수 있어야 하니까. 어쩌면 집은 "세계 안의 우리들의 구석"이라고 표현하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물론 이 시적 정의에 반감이 생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모두에게 집이 안전한 곳은 아니기 때문이다. 욕설과 폭력은 없었다고 해도 상처 없이 유년을 보내는 운 좋은 아이는 드물다. 열일곱 살에 대학에 입학할 만큼 우수해서 어린 시절 내내 부모에게 사랑만 받았을 것 같은 비평가 수전 손택도 자신의 유년기를 이렇게 정의했다. '징역형'. 그래서 우리는 집을 떠난다. 새로운 집을 찾아서! "태어난 집에 대립하여 이번에는 꿈꾸는 집의 이미지가 나타나는 것이다. 삶에서 때늦게, 그러나 물리칠 수 없는 용기로써 우리들은 여전히 이렇게 말한다. 이루지 못한 것을 이제 이루리라. 집을 지을 것이다." (156)

 

암몬조개의 화석을 보자. 이 조개껍질의 신비는 그저 다채롭고 화려한 형태에 있는 것이 아니다. 형태를 취하려는 순간, 연체동물이 삶에 관한 중요한 선택과 결정을 해야 한다는 것. 이 연약한 동물은 고뇌한다. 왼쪽으로 감길 것인가, 오른쪽으로 감길 것인가. 최초의 소용돌이를 결정하는 결정들, 그 뒤로 무늬를 만들어내는 연속적인 결정들이 그의 껍데기를 신비롭게 한다. 늘 "자기 종種의 회전 방식을 어기는" 조개들의 의지 덕분에 무한하게 다양한 무늬의 집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158) 

 

살림살이뿐만 아니라 모든 일에서 가능한 한 짧은 시간에 최대한 많은 결과를 내야 한다는 생산성의 논리에 철저히 반대하는 것이 몽상의 논리다. 몽상은 여유 없는 곳에서는 생겨나지 않는다. (162)

생산성과 몽상, 여유. 
근래 곰곰히 생각하던 것들. 

 

몽상가는 어떻게 정성스러운 손길과 새로운 눈길을 가지게 되는가? 무엇보다 습관적이고 기계적인 행동을 제거해야 한다. 정성스러움에는 능숙한 몸짓으로 일을 처리하기, 부지런함, 성실함으로 환원되지 않는 것이 있다. 아무리 능숙하더라도 일을 하는 사람이 한없이 지루하게 느끼며 그 활동에서 어떤 기쁨도 느끼지 못할 때 그에게 정성스러움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기계적으로, 다만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그 일을 수행할 뿐이다.
바슐라르는 우리가 우리의 삶에 한결 더 깊이 참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인간이 어떻게 사물들에 스스로를 주고 스스로에게 사물들을 줌으로써 그것들의 아름다움을 완성할 수 있는지를 느낄 수 있다." 살림살이의 영역이든 또 다른 노동의 영역이든 우리가 장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바로 이러한 느낌 속에서 일한다. 그렇다면 새로운 눈길이란 무엇인가. 몽상가의 새로운 눈길은 사물에 대한 깊은 몽상을 통해서 그가 새로운 이미지를 살(체험)게 되었을 때 생겨난다. (164)  

 

지성적 안정법 이외에도 우리가 자유로워질 수 있는 또 다른 안정법이 있다. 몽상가의 방식이다. 우리는 다르게 사유할 뿐만 아니라 다르게 느낄 수 있다. 사물들에 대한 몽상을 통해 우리는 다른 이미지 속에서 살아간다. 바슐라르는 이것을 "이미지의 안정법"이라고 표현한다. 의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지만 받아들이기 힘든 일들이 존재한다. 그럴 때 우리를 돕는 것은 '다르게 느끼는 일'이다. 네덜란드의 현상학자 판덴베르흐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들은 성찰로써는 해결의 희망이 없는 문제들의 해결을 계속해 살고 있는 것이다." 소소한 골칫거리로부터 인생의 중대한 문제들에 이르기까지 여러 종류의 고통을 맛보게 되고 그것들을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깨달음에 다가가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깨닫기 전에도 그 순간들을 살아야만 한다. 또 고통의 참된 인과관계를 파악했다고 믿지만 여전히 고통을 느낄 때가 있다. 어떤 문제들 앞에서는 고통의 원인을 따지기보다는 다르게 느껴보려고 하는 게 더 낫다. (167)  

 

존 버거의 소설 <A가 X에게>에서 A는 정치범으로 감옥에 갇힌 무기수인 연인에게 편지를 쓴다. A는 X를 처음 만나던 해에 그들이 함께 훈련용 비행기를 탔던 일을 상기시킨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낙하산 줄의 길이를 맞춰주고, 말아서 접은 다음 버클을 채워주는 그 일은, 이상하게도, 사랑하는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의 단추를 풀고, 지퍼를 내리고, 옷을 벗기는 일과 그리 다르지 않았어요." 엄혹한 정치적 현실 속에서 연인들을 부드러운 애무로 젖어드는 시간을 즐기는 대신 투쟁에 쓸모가 될 기술을 익힌다. 그러나 X에게 그것은 어려운 현실 속에서 데이트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던 가여운 연애의 기억이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높은 곳에서 떨어진다. 삶은 늘 추락하는 순간을 품고 있다. 그러나 사랑하는 이가 나에게 안전한 추락을 위한 옷, 낙하산을 입혀주고 있다. 이제 추락은 없고 낙하만이 존재할 것이다. 떨어짐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 당신과 함께라면 그것은 안전하다. 그녀는 그렇게 느낀다. 침대의 황홀경 속에서 연인의 부드러운 손길로 높이 떠오른 육체의 기쁨이 다시 낮은 고도로 빠르게 떨어져 내리듯 말이다. (169)    

 

역사학자 미슐레는 콜레주드프랑스(프랑스의 유서 깊은 대중 교육기관)에서 파면됐을 때 학생들로부터 이런 말을 듣고 큰 위로를 받았다고 한다. "우리는 당신의 강의에서 아무 것도 배우지 않았습니다. 단지 사라졌던 영혼이 우리 안으로 다시 돌아왔을 뿐입니다." (180)

 

어머니는 푼크툼(남들은 무심코 지나치는 세부 사항이 말을 걸며 나만 아는 기억 속으로 나를 데려가는 경우가 있다. 사진의 한 부분에서 '마치 화살처럼' 날아와 나를 꿰뚫고 내 마음을 물들이는 요소가 푼크툼이다)을 말하는 데 특별히 적합한 물질적 존재다. 우리는 그녀의 품에서 잠들었고 그녀를 안았고 그녀를 만졌다. 몸으로 만나는 최초의 타인이었기에 그 존재가 있었다는 확신을 다른 어떤 대상들보다 강렬히 불러일으킨다. 또한 바로 그 이유로 우리가 만질 그 몸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상실감이 폭력적일 만큼의 고통을 주는 것이다. 강력한 부재의 고통은 바로 그 사람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내 가슴속에서 무성하게 자라난다. 씨앗을 심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자라나는 나무처럼. (184)  

 

'백인식 소유자white man keeper'는 "재산을 돌고 도는 선물의 순환 고리에서 빼내 창고나 박물관에 두는" 사람이다. 선물은 정확히 이러한 백인 소유자의 본성에 반대한다. 우리가 받은 것은 우리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에게 나눠 주는 것이 선물의 원리이다. 그런데 인디언식 선물은 서로 주고받는 게 아니다. 대체로 받은 것은 제삼자에게 건네지고 그에 의해 또 다음 사람에게 건네진다. 이처럼 선물이 대가 없이 건네질 때마다 사람들 사이에는 느낌과 생기가 생겨난다. 수건돌리기가 놀이의 공동체를 만들어내듯 선물은 계속 돌아가며 사람들 사이에 결속감을 부여하고 느낌의 공동체를 만들어낸다. (194)  

 

1971년 미국의 포드사는 소형 자동차 핀토를 출시했는데, 가벼운 후방 충돌에도 연료탱크에 불이 날 위험이 있었다. 안전장치가 없으면 매년 180명이 죽고 180명이 다칠 거라 예상되었지만, 국가고속도로교통안전국이 계산한 1인당 인명 손실 비용이 20만 달러였기에 포드사는 이 장치를 달지 않기로 했다. 사망, 상해 보상에다 부서진 찻값을 다 물어줘도 안전장치 총 설치비용 1억 3750만 달러의 절반도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출시 이후 차량 화재로 500명 이상이 죽었지만 방침은 달라지지 않았다. 1980년 인디애나주에서 소녀 세 명이 핀토 사고로 불에 타 숨졌을 때도 배심원들은 포드사의 무죄를 선언했다. 그러다가 비슷한 시기 캘리포니아주의 한 재판에서 배심원단이 생산자 책임을 물으며 포드사가 차량 소유주에게 1억 2500만 달러를 지급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포드사는 리콜을 실행했다. 두 명만 죽어도 배상금이 리콜 비용을 초과하기 때문이었다. 이런 계산법을 우리는 상품경제의 합리성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195)   

 

이사야 벌린의 <고슴도치와 여우>는 제목 덕분에 많은 이들에게 알려진 책이다. 이 제목은 "여우는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고슴도치는 하나의 큰 것을 알고 있다"는 그리스 시인 아르킬로코스의 말에서 따온 것이다. 여우는 영리한 짐승이지만 고슴도치는 바늘 같은 가시를 우는 것 말고는 특별히 재주는 부릴 줄 모른다. 그러나 여우가 온갖 꾀를 내어도 고슴도치의 확실한 호신법 하나를 당해낼 수 없다. (200) 

 

미국 작가 손더스는 <작가는 어떻게 읽는가>에서 브레후노프의 '단순한 몸짓'을 설명하기 위해 자신이 겪은 일화를 소개한다. 한번은 그가 탄 비행기의 엔진이 고장 나 15분간 추락의 공포를 겪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는 평소 이런 상황이 오면 자신은 지나온 삶에 대해 잠시 감사한 후 차분하게 일어나 다른 승객들을 쿰바야(영적 합일)의 분위기로 이끌 거라고 상상해왔다. 그러나 실제 상황이 닥치자 정신은 마비되고 오줌을 지릴 것 같은 공황에 빠졌다. 그때 옆 좌석에 있던 어린 소년이 겁에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아저씨, 원래 이러기로 되어 있는 거예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는 자신의 심장이 아이에게로 나가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심장이 ~에게로 나간다one's heart goes out to'라는 표현은 누군가를 가엾게 여긴다는 뜻의 관용구이다. 손더스는이렇게 덧붙인다. "무언가 특별한 일처럼 들리지만 그게 우리 심장이 늘 하려고 하는 일이다. 누군가에게로 나가는 것." 그건 가장 절박한 순간에도 우리를 찾아오는 단순하고 불가피한 몸짓이다. 손더스는 정신을 차리고 거짓말을 했다. "그래 맞아."
끝까지 품위를 유지하는 어른으로 남겠다는 고상한 결단 뒤에 한 행동이 아니었다. 그저 오랜 세월 부모 노릇, 가르치는 교사 노릇을 하며 누군가를 진정시키고 안심시키려고 했던 습관이 그렇게 되었다. 손더스는 자신의 에너지가 신경증적으로 안으로 향하는 게 아니라 아이를 향해, 내 바깥의 타자를 향해 나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브레후노프도 늘 하던 대로 했을 거라고 말한다. 다만 "오랫동안 오직 자신만을위해 사용되었던 타고난 에너지의 방향이 바뀐다." (204)    

 

니체는 춤추는 별을 언급한 다음, 행복을 찾아 다니는 것은 비천한 인간의 일이라고 덧붙인다. 행복이 현대인을 지배하는 새로운 신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이다. 사라 아메드는 <행복의 약속>에서 우리가 행복이라는 관념 아래 특정한 삶의 방식을 강요당한다고 말한다. 행복이 지배의 기술이 되었다는 것이다. 행복은 이제 우리가 따라야 할 절대적으로 올바른 길로 간주된다. 이를 확인해주는 기본 지표들도 있는데, 결혼이나 안정된 가족 같은 것들이다. 그래서 많은 부모가 이렇게 말한다. '얘야, 우리가 바라는 것은 너의 행복뿐이다. 그러니 네가 뭘 하고 싶든 좋은 학교에 입학하고 대기업에 취직해라. 때 맞춰 결혼하고 행복한 주부, 행복한 가장이 되어라. 빨리 안정을 이루어라...' 
그러나 세상의 아이들아, 정해진 궤도에서 이탈하는 삶은 불행할 거라는 협박에 굴하지 말고, 혼돈을 기꺼이 맛보며 천천히 네 자신이 되어라. 남이나 스스로에게 자신의 성과를 증명하려고 서두르지 마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다만 나 자신을 기다리는 것을 배웠을 뿐이다." 점점 조급해지고 불안해지는 우리를 향한그의 다정한 전언이다. (211)  

 

첫 답장에서는 일종의 신원확인이 이루어졌다. 물론 카푸스가 어디 사는 누구인지, 혹은 누구의 아들인지를 확인한 것은 아니다. 릴케는 그가 정말 시인이 맞는지를 묻는다. "무엇보다도 먼저, 당신이 맞는 밤의 가장 고요한 시간에 '나는 쓰지 않으면 안 되는가'라고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 이 진지한 물음에 굳세고도 단순하게 '나는 쓰지 않을 수 없다'는 말로 대답할 수가 있다면, 그때에는 당신의 생활을 이 필연성에 따라 구축하십시오." 카푸스는 자신의 시가 괜찮은지를 물었지만, 릴케는 물음의 순서를 바꿔보는 게 어떻겠냐고 답한 것이다. 결과물이 어떤지는 쓸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단하는 일에 부차적이다. 가령 좋은 가수가 되지 못할 바에는 가수가 되지 않겠다고 결정하는 것은 확실히 생존에 유리하다. 하지만 그것은 '노래하는 사람'이라는 존재의 필연성을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작가라는 곤경, 가수라는 곤경, 화가 혹은 배우라는 곤경. 필연성은 하나의 이름 아래 주어질 모든 곤경에도 불구하고 오직 그 이름으로 불리기를 원하는 사람에게만 생겨나는 위대한 속성이다. (215) 

 

이런 당부들도 인상적이지만 한 편지 말미에 적힌 릴케의 문장은 더욱 눈길을 끈다. "당신을 위로하려고 애쓰는 자가 때때로 당신을 기쁘게 하는 단순하고 조용한 말 그늘에서 아무런 고생도 없이 살고 있다고는 생각지 마시기를. 그의 삶도 많은 고생과 슬픔에 차 있고, 당신보다 훨씬 뒤져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그러한 말을 찾아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217)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가 절실한 지혜를 담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것은 릴케 역시 젊은 시인이라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시의 길을 완주한 뒤 얻은 지혜의 엑기스를 전하는 게 아니다. 릴케는 카푸스처럼 시의 모험을 나선 중이다. 그래서 그가 시인에게는 늘 고독이 필요하며 이 고독을 아주 평범하고 값싼 결합과 교환하고 싶은 때가 있을지라도 견뎌야 한다고 썼을 때, 이 문장들은 카푸스를 향할뿐만 아니라 릴케 자신을 향하고 있기도 하다. 특히나 이렇게 말할 때 그렇다. "당신 마음속의 해결되지 않은 모든 것에 대해서 인내를 가져주십시오. 그리고 물음 그 자체를 닫혀 있는 방처럼, 아주 낯선 말로 쓰인 책처럼 사랑해주십시오." 아직 <말테의 수기>의 집필이 시작되기 전이고 <두이노의 비가> 같은 걸작의 구상과 집필은 단초조차 보이지 않던 1903년, 그 막막한 시절의 편지에서 릴케는 스스로를 다독이며 인내를 가져야 한다고 썼다. 젊은 예술가들은 얼마나 많은 날을 인내해야 할까? (219)   

 

다만 당신이 정말 원하는 것을 배우려 할 때 이 무능력(나는 할 수 없다, 나는 이해를 잘 못 한다)이라는 속임수를 마음에서 떨쳐내라. "이해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 이야기할 것만 있다." 이제, 용기를 가지고 그 이야기를 시작하라. (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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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불황'이라는 말이 있다. '경제활동이 전반적으로 침체되는 상태'를 가리키는 '불황'을 원용한 개념으로, 사람들 사이의 교류와 소통이 줄어드는 현상을 가리킨다. 지금 세상에서는 사회적 불황이 경제적 불황 못지않게 문제가 되고, 그 둘이 서로 맞물려 악순환의 고리에 빠지기 쉽다. 가난이 외로움을 낳고, 소외가 깊어지면 경제활동도 힘들어진다. 예전에는 물질적으로 쪼들려도 가족이나 이웃 간의 유대로 삶을 지탱했다면, 이제는 빈곤 계층일수록 고립이 심하고 그로 인해 더 가난해지는 것이다. 일거리를 구하는 연결망이 끊기고 일상의 소소한 도움을 주고받는 이웃이 사라지면서 살림살이가 팍팍해지기 떄문이다. 아이들도 마찬가지여서, 저소득층일수록 '나 홀로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 소통 능력이 감퇴하고 학력도 저하된다.
이것은 한국만의 상황이 아니다. 사회학자 로버트 D. 퍼트넘이 신자유주의 물결 속에서 원자화되어가는 미국인들의 삶을 묘사한 책 <나 홀로 볼링Bowling alone>(2000)에서 잘 드러나듯이, 사회적 단절과 커뮤니티의 붕괴는 많은 선진국에서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다. 영국도 2018년 정부에 외로움 담당 부서를 설치하고 고위급 책임자minister(한국에서는 흔히 '장관'으로 잘못 번역되는데, 실제로는 장관secretary of state 밑에 있는 여러 부장관 가운데 한 명이다)도 임명하여 신선한 화제가 된 바 있다. 사람들 사이의 유대가 해체되는 것은 개인적 삶뿐 아니라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요인으로도 지적된다. (7)

 

비가시화는 사실상 성원권의 박탈로 이어진다. 다른 한편 미디어가 첨단화되면서 정보와 이미지가 폭주하게 되는데, 특정 집단에 대한 편견이 그를 통해 증폭되는 경향이 있다. 직접 대면하지 못하는 타자일수록 엉뚱한 모습으로 왜곡되기 쉬운 것이다. (9)

 

온몸이 젖어서 짜증 날 수 있는 경험을 일종의 축제처럼 승화시키는 힘은 서로를 든든하게 지켜주는 관계에서 생겨나는 것이리라. 삶의 토대가 점점 위태로워지는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 가운데 하나는 '안전 기지'다. 사랑과 자유가 공존하고 너와 내가 상생하는 우정의 마당이다. 사람이 사람을 살리는 관계에 대한 기억 또는 소망을 불러내면서 세상을 조금씩 '새로 고침'해나갈 수 있다면, 우리의 일상에 생기가 스며들 것이다. (13)

 

그런데 아쉬운 점이 있다면 원격 근무나 유연 근무가 전문직, 관리직, 사무기술직 등 일부 직종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의료진, 돌봄 노동자, 배달업자, 소방관 등 이른바 필수 노동자들은 재난 상황에서도 변함없이 사람들과 접촉했다. 필수 노동자란 미국의 로버트 라이시 교수가 코로나19에 의해 새로운 계급 분열이 일어났다면서 내놓은 개념*으로, 실직의 위험은 적지만 팬데믹 상황에서도 업무를 수행하느라 감염 위험에 노출된 직종을 말한다. 미국에서는 필수 노동자를 'The Essentials', 영국에서는 'key workers'라고 부른다. 코로나19는 사회가 유지되고 일상이 영위되는 데 핵심이 되는 일이 무엇인지, 그들에 대한 인식과 처우가 합당한지를 새삼 질문하게 해주었다. (27)

* 라이시 교수에 따르면,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사회가 '신카스트 시대'에 접어들었는데 원격 노동자The Remotes, 필수 노동자The Essentials, 무임금 노동자The Unpaid, 잊힌 사람들The Forgotten의 네 계급으로 나뉘게 되었다.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코로나19가 계속되며 불황이 지속되는 가운데 여성 실직자가 늘어나면서 남편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졌고, 폭력을 당해도 피신하기 어려워진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이런 현상을 가리켜 '섀도우 팬데믹shadow pandemic'이라고 하는데, 코로나 기간 동안 폐쇄된 가정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이 늘어난 것을 가리킨다. (30)

 

표정이 감정을 유발한다는 것, 그래서 보톡스 주사나 신경계통 질환으로 얼굴 근육이 마비되면 감정이 둔해진다는 것이 흥미롭다. 마음이 울적할 때 억지로라도 웃으면 기분이 나아지는 것도 마찬가지 원리로 설명할 수 있겠다. 결국 표정은 상대방뿐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한데, 얼굴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의 파동이 자신에게도 감지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화 중에 그 기운을 주고받으면서 서로가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얼굴은 그 자체로 하나의 언어라고 할 수 있다. (43)

 

지금 우리는 각종 미디어를 통해 엄청난 볼거리를 접할 수 있지만, 세상과 맞닿는 접촉면은 오히려 점점 비좁아지는 듯하다. 특정 부류의 사람들이 시야에서 사라져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blind spot가 여기저기에 생겨난다. 눈에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은 무의미하고 하찮은 존재로 주변화되는 것이고, 투명인간으로 취급되면서 사회의 성원권이 박탈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비대면에 수반되는 비인간화, 타인이 자신과 동등한 인격체가 아니라 사물로 대상화되는 것은 양극화가 심화되는 우리 사회의 중대한 도전이다. 점점 깊어지는 소외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48)

 

무엇보다 두드러지는 것은 이용 시간이다. 2021년 글로벌 가상사설망 VPN서비스 기업 노드VPN이 연구 조사 기관인 신트에 의뢰해 18~54세 성인 인터넷 사용자를 조사한 결과, 한국인이 일생 동안 인터넷 사용에 쓰는 시간은 34년으로 아시아 국가 중 가장 긴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수치일 뿐 아니라 세계에서도 두번째로, 1주일에 평균 51시간을 온라인에서 보낸다. 그 가운데 18시간은 업무 관련이며 33시간은 다른 활동으로 사용하는데, 유튜브나 OTT를 통한 영상 감상에 주 20시간 이상을 쓰는 것으로 조사됐다. 
한국인이 온라인에서 생활하는 34년은 기대 수명 83세를 기준으로 보면 40퍼센트에 달하는 시간이다. 그런데 이것은 잠자는 시간까지 포함한 수치다. 하루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수면 시간을 빼고 계산하면 60퍼센트가 된다.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고 식사하고 몸을 씻는 시간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시간을 온라인에서 보낸다고 볼 수 있다. 여행지를 선택할 때 와이파이가 잘 터지는가가 중요한 고려 사항이 될 정도로, 이제 인터넷은 우리 삶과 사회의 모든 부분에서 절대적인 인프라가 되었다. 인터넷이 없었던 시대에 우리가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를 떠올려보면, 인류가 전혀 다른 세상으로 넘어왔음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89)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의 전치형 교수는 2년 동안 온라인 수업을 하면서 학습 공동체의 본질에 대해 깨닫게 된 점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온라인 수업에서 우리가 놓친 것, 테크놀로지가 아직 제공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각자 다른 경로로 한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바깥 세계의 위험을 견뎌내는 가운데 뭔가 중요한 질문에 함께 매달리고 있다는 감각이다. 그 감각을 일깨워 작은 학습 공동체들을 다시 꾸리는 것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대면 수업의 기술이다." 어떤 공통의 과제를 중심으로 마음이 이어지는 것, 무엇인가를 함께 탐구하면서 내면이 확장되는 감각은 교유깅 결코 놓칠 수 없는 실재감이 아닐까. (116)

 

자기 삶에 내재되어 있는 타자성을 일깨워주는 타인을, 사회학자 엄기호는 '손님'이라고 칭한다. 주인이 손님을 맞이하면서 깨닫게 되는 것은, 자신이 태초부터 주인이 아니라 그 집 혹은 그 땅의 첫번째 손님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그것을 알아차리면 '환대'로써 감사를 표한다고 한다. 물론 자신의 타자성을 받아들이지 못할 수도 있는데, 그때는 환대가 아닌 적대감을 드러낸다. 엄기호 교수의 말을 들어보자.

자신의 타자성을 발견하는 데서 오는 환대와, 자신의 타자성을 부정하고 싶을 때 나타나는 적의가 동일한 어원을 갖는 것은 특히 의미심장하다. 환대는 'hospitality'이고 적의는 'hostility'다. 이 두 가지 말은 'host'라는 같은 어원을 지니며 여기서 host는 '주인'이자 '손님'이라는 뜻을 동시에 지닌다. 즉, 자신의 타자성을 발견하는 두 가지 태도에서 정반대의 행동이 나타날 수 있다. 환대는 자신의 타자성을 깨닫게 해준 것에 대해 감사해하며 첫번째 손님이라는 위치로 돌아올 때 발생한다. 반면 적의는 내가 주인 노릇 잘하고 있는데 괜히 나의 타자성을 발견하게끔 하고 대면하게 하는 상대방을 제거하여 그 사실을 영원히 감추고 싶을 때 생겨난다*. (134)

* 엄기호, <단속사회>, 창비, 2014, 271~272쪽.

 

오늘날 우리는 옆에 사람을 두고 노골적으로 휴대폰과 바람을 피우며, 어찌 된 일인지 이러한 부정을 다 같이 수용하기에 이르렀다.
- 노리나 허츠, <고립의 시대>에서 (142)

 

모처럼 가족이나 친구들이 모인 자리에서 각자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느라 서로를 홀대하는 일 또한 흔하다. 강의를 듣거나 회의에 참석하면서도 집중하지 못한다. 영어에서는 그런 행동을 가리키는 신조어로 'phubbing'이 생겨났는데 무시하다, 냉대하다, 거절하다는 뜻의 'snub'에 'phone'을 합성한 단어다. 상대방을 무시하거나 냉대할 의도는 없다. 시선이 화면에 가 있고 신경이 그쪽으로 쏠려 있어서 마음을 다하지 못할 뿐이다. 즉, 주의가 흐트러져서 무심해진 것이다. (143)

 

한림대 강남성심병원 이홍석 교수는 더 포괄적인 차원에서 문제를 지적한다. "사람의 뇌는 예측할 수 없는 대상과 오감을 통한 상호작용에서만 고르게 발달한다. 이때 뇌의 회로가 촘촘하게 엮이고 기능이 강화된다. 그런데 스마트폰은 사람과의 접촉이 아니다. 뇌의 수만 개 회로 중 스마트폰이 전달하는 일방적인 영상을 받아들이는 단 하나의 회로만 움직인다. 그동안 다른 회로는 쓰지 못해 점점 퇴화한다. (...) 스마트폰 속에는 일방적인 사물의 움직임만 있을 뿐이다. 자신의 말이나 행동에 다른 사람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는다." (150)

 

그런데 주의력은 도구적인 역량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수전 손택은 이렇게 말한다. "도덕적 인간이 된다는 것은 모종의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며, 그럴 의무를 진다는 것이다. (...) 도덕적 판단은 본질적으로 주의를 기울이는 능력에 달려 있다. 이 능력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한계의 범위는 확장될 수 있다." (167)

 

이른바 '관심 경제attention economy'(주목 경제라고도 번역된다)의 영역이 빠르게 확장되고 있다. '관심 자본'이라는 개념도 등장했다. 김곡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오늘날 관심interest은 곧 이익interest이다. 관심을 주고받는 것은 노동이 되었다. 관심이 가치다.*" (171)

* 김곡, <관종의 시대>, 그린비, 2020, 114쪽

 

이 프로그램을 창안한 메리 고든은 그 경험을 이렇게 풀이한다.

'공감의 뿌리'에 참여하는 학생과 프로그램 진행에 도움을 주는 어른들은 '아기의 지혜'라는 중요한 지혜를 배운다. 아기는 행동과 감정이 꾸밈없고 순수하다. (...) 아기에게는 교실 안 모든 학생이 새로운 경험이다. 아기는 학생 한 명 한 명과 만날 준비가 되어 있다. 아기의 눈에는 인기 많은 학생도 없고 말썽꾸러기 문제아도 없다. 다만 침울하거나 근심에 싸인 학생이 자꾸 눈에 들어올 뿐이다. 아기는 대개 이런 학생에게 손을 내민다. 늘 소외당하고 따돌림당하던 학생은 아기와 공감 관계를 형성하면서 사회적 포용 영역으로 들어간다. (...) 아기는 경계나 규정에 얽매이지 않고 직관에 따라 골고루 사랑을 나눠준다*. (181)

* 메리 고든, <공감의 뿌리>, 샨티, 2010, 27~28쪽.

 

그림을 보는 눈과 환자를 보는 눈은 많은 점에서 상응하는 것이다. (185)

 

허먼은 <우아한 관찰주의자>의 저자로, 책의 원제는 'Visual Intelligence'(시각적 지능)다. '시각적 지능'이란, 보이는 것을 넘어 본질을 꿰뚫어 보는 관찰력을 의미한다. (188)

 

이러한 훈련을 통해 주의력이 신장되면 인지능력의 향상에 도움이 되는 것은 물론, 예술적 감수성 또한 고양된다. '아름답다'는 말의 어원이 '알음+답다'라는 견해가 있다. 무엇을 제대로 알고 나면 아름다움을 느낀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는 만큼 느낀다'라는 말과도 상통한다. 심미적 감각은 섬세한 관찰력을 요구한다. 눈으로 빤히 보면서도 놓치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제대로 보아야 한다. 깊이 들여다보면 새로운 것이 드러나면서 발상과 혁신의 실마리가 된다. 인공지능으로 대신할 수 없는 것 가운데 하나가 '안목'이다. 주의 깊은 관찰을 창의성의 토대를 이루고, 행복한 삶의 원천이 된다. (191)

 

외로운 사람들이 많아지면 사회가 어떻게 달라질까. 나치즘의 광기를 몸소 체험하면서 인간의 실존에 대해 사유한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가 발흥하는 토양에 외로움이 자리 잡고 있음을 간파했다. 고립은 개인의 문제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이다. (206)

 

테레사 수녀에게 기자가 질문했다. "수녀님은 기도를 많이 하시는데, 하나님께 무슨 말씀을 드리세요?" 테레사 수녀가 대답했다. "저는 아무 말씀도 드리지 않아요. 그냥 듣고만 있어요." 기자가 말했다. "아, 그러시군요.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무슨 말씀을 하시나요?" 테레사 수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분도 아무 말씀을 하지 않으세요. 저와 마찬가지로 그냥 듣기만 하신답니다." 즉, 하나님과 인간이 서로를 경청하는 것이 기도하는 말이다. (212)

 

이야기의 미덕은 무엇인가. 불쾌하고 화나는 경험도 누군가에게 에피소드로 들려주면, 감정을 내려놓고 상황을 객관화하면서 자아를 성찰할 수 있다. 밤에 '이불 킥'을 하느라 잠 못이룰 만큼 부끄러웠던 기억도 친구와 만나 수다를 떨다 보면, '유체 이탈' 화법을 구사하면서 즐거운 해프닝으로 웃어넘길 수 있다.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거기에 귀 기울여주는 사람이 있을 때, 우리는 좀더 너그러운 마음으로 힘든 현실을 견딜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안전 기지 또는 전환 장치가 없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온라인에서 극단적인 언사로 분노를 배설하게 된다. 그런 지경으로 내몰리지 않기 위해서는, 가까이 있는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정서적 안식처를 마련해야 한다. 
자신의 이야기가 온전하게 경청되는 공간은 무너진 삶을 수습하고 자아를 회복하는 길을 열어준다. (215)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어 일체감을 느낄 때 생명의 힘이 배가된다. 
그것을 입증하는 흥미로운 실험이 있다. 오랫동안 인간관계를 연구해온 진화심리학자 로빈 던바는 수십 명의 자원자에게 비디오를 보여주며 디스코형의 네 가지 기본 춤동작을 배우게 했다. 그는 자원자들을 그룹으로 나눠 춤을 추도록 했는데, 어떤 그룹에게는 같은 음악을 듣고 정확하게 같은 동작으로 동시에 춤을 추라고 지시하고, 다른 그룹에게는 각각의 멜로디에 맞춰 모두 다르게 몸을 흔들라고 했다. 디스코가 끝난 후, 팔에 혈압 측정 장치를 두르고 장치를 팽창시켜 그 압박을 어느 정도까지 견딜 수 있는지를 측정했더니, 동시에 같은 춤을 춘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훨씬 더 잘 견딜 수 있었다고 한다. 자신이 혼자가 아님을 온몸으로 느낄 때, 자연 진통제인 엔도르핀이 분비되어 통증에 대한 역치를 높여준 것이다*. (221)

* 마르타 자라스카, <건강하게 나이 든다는 것>, 어크로스, 2020, 246~247쪽. 

 

"나는 그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니 그 사람에 대해 좀 더 많이 알아야겠다." - 링컨(231)

 

그러한 이치는 생태학에서도 확인된다. 생태계를 움직이는 원리 가운데 하나로 '가장자리 효과edge effect'가 있다. 땅과 바다, 숲과 평원처럼 둘 이상의 생물군의 서식지가 맞붙어 있는 경우, 그 경계를 이루는 지역에 종 다양성과 밀도가 높아지는 것을 가리킨다. 각각의 서식지에 깃들어 있는 생태적 자원들이 뒤섞이면서 풍부한 환경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공간에 작은 서식지들 여러 개가 공존하고 있다면, 경계가 그만큼 늘어나고 가장자리 효과도 더 뚜렷하게 나타나게 된다. (232)

 

베르브너가 일하는 <디 차이트>는 그러한 경험을 토대로 2017년 '독일이 말한다' 프로젝트를 출범시켰다. 온라인상에서 극단화되는 정치적 대립과 소수자에 대한 편견 등을 극복하고자 기획한 행사인데, 사회적으로 민감한 사안들에 대해 정반대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끼리 짝을 지어 의견을 주고받는 형식이다. 참가자들은 '경청한다, 경험을 바탕으로 말한다, 상대를 존중한다'는 원칙을 함께 읽고, 가벼운 이야기부터 출발해 토론에 들어간다. 두 시간 정도 대화를 끝내고 나면 참가자의 절반 이상이 색안경을 끼고 보았던 상대가 평범한 이웃임을 깨닫고, 전체의 20퍼센트 정도는 상대방의 말에도 몇 가지 설득력이 있음을 인정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수정하게 된다고 한다. 극단적인 생각을 누그러뜨리고 공통분모를 찾아가는 이 대화 마당에는 매년 2~3만 명이 참여하고, 유럽의 여러 나라와 미국에서도 '유럽이 말한다' '미국이 말한다'라는 이름으로 대면 토론이 열리고 있다*. (243)

* 바스티안 베르브너, <혐오 없는 삶>, 판미동, 2021, 240쪽. 

 

미국 MIT공과대학교 경영대학원의 에드거 H. 샤인과 피터 샤인 교수는 그런 식으로 소통할수록 조직은 상투적인 대답과 어색한 침묵 속에서 경직될 뿐만 아니라 생산성도 떨어진다고 지적하며, 그 대안으로 '겸손한 질문humble inquiry'을 제안한다.
여기서 '겸손함'이란, 형식적으로 자기를 낮추는 자세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질문할 때 자기가 정말로 그 문제에 대해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상대방에게도 그런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 중요하다. 자기 능력만으로는 복잡한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한계를 정직하게 받아들이면서 함께 배우려는 마음이 되어야 한다. (중략)
물리학자 데이비드 봄은 대화의 핵심을 이렇게 짚은 바 있다. "참된 대화는 둘 또는 그 이상의 사람들이 서로가 자신의 확실성을 기꺼이 보류하려고 하는 것이다." 확신은 진실로 나아가는 데 걸림돌이 된다. 확신을 내려놓고, 명료함을 구해야 한다*. (247)

* 미래학자 밥 조핸슨Bob Johansen은 <Full-Spectrum Thinking: How to Escape Boxes in a Post-Catergorical Future>이라는 책에서 "명료함Clarity에는 보상이 따르고 확신Certainty에는 처벌이 따른다", "확신의 유혹에 저항하면서, 가능성의 비탈을 가로질러 명료함을 구하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고 말한다. 

 

보통 '희귀 질환'이라고 말하는데, '희귀하다'는 단어는 '드물고 귀하다'라는 뜻이라서 질환에는 맞지 않는 수식어다. 대신 '희소 질환'이라 표현할 수 있다. (250)

 

이러한 상황에서는 모두가 모두의 능력과 지식을 활용하고, 사안에 따라 유기적인 도움을 주고받아야 한다. 이는 교육의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바꿔놓고 있다. 지식이 일부에게 독점되고 교육의 기회가 제한되어 있던 시대에는 교사의 가르침이 절실했다. 그러나 정보와 지식이 폭증하고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된 지금, 그 무한한 자료들 가운데 필요한 것을 선별하고 조합하여 자기 나름의 지성을 쌓아가는 역량이 점점 중요해지고 있따. 에리카 다완과 사지-니콜 조니는 그것을 '연결지능'이라는 개념으로 제시하는데, 그 의미는 '세계의 다양하면서도 이질적인 사람들과 복잡한 정보 관계망, 여러 분야의 지식과 경험, 자원 등을 결합하고 연결해 통합을 이루어나감으로써, 다가오는 인류의 미래를 결정하는 가치와 의미를 창출하고 난관 타개의 돌파구를 발견하는 재능*이라고 말한다. (253)

* 에리카 다완, 사지-니콜 조니, <연결지능>, 위너스북, 2016, 18쪽.

 

보이는 것들이 보는 것을 가로막는다.
보여지는 것들이 보아야 하는 것들을 뒤덮는다.
보란 듯이.
보인다. 보여진다. 보인다. 본다.
보인다. 보이지 않는다. 보인다.
보지 못한다.
- 윤해서, <홀>* (264)

* 윤해서, <코러스크로노스>, 문학과 지성사, 2017

 

한글 프로그램에는 한글과 영어의 자동 변환 기능이 있다. '한/영' 키를 일일이 누르지 않아도, 철자의 조합이 한글인지 영어인지를 분간해서 단어를 띄워준다. 그런데 그 기능이 오히려 귀찮을 때가 있다. 입력한 영어 단어가 신조어라서 아직 등록되어 있지 않고, 마침 그 철자의 조합으로 한국어가 있어서 자동 변환될 때다. 그 가운데 하나가 'SNS'인데, 그 문자 키는 '눈'과 동일하다. 영어 키보드로 설정해놓고 'SNS'를 타이핑해도, '눈'으로 바꿔서 띄워준다. 그래서 각 철자를 한 칸씩 띄어서 입력하고 다시 이어붙이는 번거로움을 감수해야 한다. 키보드에서 'SNS'와 '눈'이 같은 문자 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우연의 일치다. 우리의 눈이 SNS에 속박된 일상을 깨우치는 것일까. (265)

 

'고독'이라는 단어에는 상이한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그 두 글자에 각각 '립'자를 붙여보자. '고립'과 '독립'이 된다. 근대 들어 등장한 개인은 '독립'을 통해 자유를 추구했고, 자기만의 인생을 향유하려 했다. 그런데 그것이 타인과의 관계를 배제하는 방향으로 흐를 때 '고립'에 이르고 만다. 거기에서 벗어나 관계를 맺어보려 하지만, 상대방을 통해 자신의 결핍을 채우려는 에고 때문에 비틀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더욱 단절되고 고립된다. 내면의 중심이 분명하게 세워진 사람만이 인간관계에서 자기중심성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다. 모처럼 주어진 '고독'의 시간이 '고립'으로 내몰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독립'을 훈련할 수 있다면 타인과의 만남도 한결 충실해진다. 자족의 넉넉함과 공생의 기쁨으로 상대방을 기꺼이 맞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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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념과 달리 윤리학은 착하게 사는 법을 족집게처럼 알려주는 학문이 아니다. 그건 오히려 도덕적 직관이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를 분해하는 작업에 가깝다. 귀찮다는 이유로 부상자를 무시하려는 사람을 상상해보자. 이 사람이 잘못하고 있다는 건 당연해 보인다. 그런데 왜 잘못된 걸까? 당연히 잘못된 태도이기 때문에? (22)

 

이것만이 합당한 대응인가?  혹시 나는 개인적인 분노를 정의감과 혼동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무엇보다도, 악인처럼 보이는 누군가에게 분노를 표출하고 공격성을 드러내는 것이 그 자체로 정의로운 일인가?
철학자 오언 플래너건은 달라이 라마를 만났을 때 홀로코스트를 멈추기 위해 히틀러를 죽이겠냐는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달라이 라마의 대답은 이렇다. 
"누군가는 히틀러를 죽여야 합니다. 하지만 화를 내서는 안 됩니다."
히틀러를 상대할 때가 아니더라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분노하지 않더라도 선행을 하거나 악을 막을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의분으로 인해 악해지기도 한다. (29)

 

선은 악에 분노하고 악인을 벌하는 것 이상의 복잡함으로 이루어진다는 것. 타인의 결점에 과한 관심을 쏟는 건 악질적인 스포츠일 뿐이지 선행이 아니라는 것. (30)

 

교도소 수감자조차 판사와 변호사를 탓하고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변명의 여지를 남겨둔다.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거나, 오해였다거나,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다거나 하고. 형량이 결정된 후에도 똑같은 주장을 관철하는 것은 진심의 증거일 것이다. 그러면서도 동료 재소자의 한탄을 내심 비웃고, 자신이 피해자가 되면 도덕과 정의의 문제에 신경을 곤두세운다. 스티븐 핑커가 도덕화 간극Moralization gap이라부른 현상이다. (46)

 

제본스의 역설Jevons paradox*이 지적한 것처럼, 세탁기와 청소기가 가사 부담을 획기적으로 줄일 것이란 전망과 달리 실제로는 가사의 기준을 높였던 것처럼, 에너지 효율이 높아질수록 저력 사용량이 더불어 증가하는 것처럼, 발전과 혁신은 새로운 욕망을 빚어낸다. 그리고 이따금 욕망은 개선과 해결을 막는다. (58)

*석탄 에너지의 효율이 증가할 경우 에너지 가격이 하락하고, 이로 인해 신규 자본이 유입되어 결과적으로는 석탄 사용량이 증가하는 반동효과Rebound effect가 나타난다.

 

물론 '서비스가 공짜라면 바로 당신이 상품이다'라는 격언처럼 디코럼의 컨설팅에는 보이지 않는 비용이 숨어 있다. (67)

 

영원한 성장이란 공허한 수사학에 불과하다.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것은 시작과 끝이지 영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71)

 

뉴욕대학교 사회문화연구대학 교수인 앤드루 로스가 지적한 것처럼 필수적인 사회재를 부채로 조달하게끔 하는 경제는 비도덕적*이다. 취직을 위해 대학에 가야 하며, 대학에 가기 위해 학자금 대출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그 일례다. (73)

*크레디토크라시 

 

수레바퀴는 이런 일들에 까다로운 태도를 보여준다. 필요한 행동이 아니라면 자제하라는 것이다. 잘못된 점을 지적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걸 빌미로 으스대서는 안 되고, 퉁명스러운 직원을 만난 뒤 친구에게 푸념을 털어놓는 건 괜찮지만 방송 출연자에게 욕설 댓글을 남겨서는 안 된다. 그 사람이 실제로 사악하고 멍청해서 결코 가까이 지내고 싶지 않은 부류여도 마찬가지다. 악인을 비난하는 게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행위일지라도 모든 악인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비난할 필요는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98)

 

심술궂은 말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이런 태도는 일반적으로 권장되는 것이다. 실제로 수레바퀴 대응 센터의 행동 지침은 다음과 같은 권유 사항으로 이루어져 있다.

- 타인의 잘못을 찾아다니거나 깎아내리며 자부심을 느끼지 마세요. 다양한 가능성을 고려하세요.
- 타인이 언짢은 이야기를 한다면 그 언짢음의 이유를 천천히 점검한 후, 사실관계와 논리만을 침착하게 반박하세요. 감정적으로 휩쓸리지 마세요. 조롱하거나 으스대거나 과도하게 분노하지 마세요. 혹은 무관심이야말로 가장 큰 공격임을 떠올리세요.
- 실질적인 피해가 있다면 변호사를 고용하거나 경찰을 부르세요. 급한 상황에서는 정당방위도 허용됩니다.
- 그 밖의 문제에 대해서는 항상 이 사실을 떠올리세요, 누군가가 정말로 악한 일을 하고 있다면 지옥에 갈 겁니다. 지옥에 함께 따라 들어가지 마세요. 여기에 남아 있으세요. (104)

 

물론 그런 악덕이 오로지 개인의 소관이라 볼 수는 없다. 고통과 역경은 인간을 단련시키기 전에 꺾어놓기 때문이다. 사회적 거부를 겪은 사람은 거짓말과 탐욕이 많아지고, 각박해지고, 분란을 일으키는 경향이 있다. 가해자가 될 확률도 크다. 그러다가도 건강한 관계를 맺는 데 성공하면 도리어 보통 사람들보다 우호적이고 긍정적인 못브은 보여준다는 연구는 수레바퀴의 의지를 뒷받침하는 것처럼 보인다. <레 미제라블>에서 미리엘 주교가 장발장의 도둑질을 용서한 것처럼, 장발장이 회개한 것처럼 우리가 맺는 관계도 그래야만 한다는 것이다. (111)

 

하지만 타인을 조롱하는 건 선행이 아니고, 열등감이 부끄러운 것이라면 우월감도 부끄러운 것이어야만 한다. 최소한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둘 모두를 버려야 한다. 수레바퀴가 요구하는 것은 타인을 용서하고, 자신의 잘못을 직시하고, 모두에게 도움이 되려 하는 태도이지 다른 무엇이 아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옛 기억이 얽힌 문제들은 제3자가 함부로 말을 얹을 수 없는 경우가 대다수다. (124)

 

존재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인간을 품에 안았다는 이유만으로 당연히 짊어져야 하는 의무들이 있다. (156)

 

인간은 통계상의 수치보다도 내러티브에 더 이끌리는 경향이 있다. 인식 가능한 피해자 효과Identifiable victim effect라 불리는 현상이자 수레바퀴 컨설턴트들이 결연을 권장하는 이유다. 지구 반대편에 또 다른 아들딸이 있다면, 자신의 상실이 그 아이에게는 축복이 된다면 거부감을 누그러뜨릴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167)

 

글라우콘은 기게스의 예시를 통해 "이처럼 불의를 행하더라도 아무런 불이익을 받지 않는 사람은 마음껏 사익을 추구할 것이며, 따라서 정의 자체에는 구속력이 없다"는 논변을 펼칩니다. 그리고 이런 문제 제기는 시간이 흐르며 도덕성의 정당화Justification for morality 문제라는 이름을 얻습니다. 무엇이 정의이고 도덕인지는 알겠으니, 거기에 실제적인 구속력을 부여하는 요인이 무엇인지 설명해보라는 것입니다. 아무도 없는 운동장에서 큰 돈을 주웠다고 가정할 경우, 그냥 챙겨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 분명한데도 주인을 찾으려 애쓸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까다롭게 만드는 것은, "그것이 정의로운 일이기 때문에 정의롭게 행동해야 한다"는 주장이 순환논증이라는 사실입니다. 자기 자신을 근거로 삼는 논증은 건전하지 않지요. 따라서 스터바James P. Sterba는 도덕성의 정당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선결문제 요구의 오류를 범하지 않는 논증이, 도덕과 무관한 외부적인 이유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193)

 

 

단요, 단요. 숱하게 들어온 작가였어서 그런지 대출해 놓고도 쉽게 펴지 않았던 책. 
그런데 정말 충격적이었다.

봄 부장님의 말이 떠오른다. 

"김동식 작가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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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임신 중단 수술을 받았고, 수술비는 그가 부담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그렇게라도 그에게 책임을 지우고 싶었다. 나에게 평생 잊히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 그에게는 단숨에 잊힐까 두려웠다. 한때 나는 이런 생각이 찌그러진 마음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그의 마음이 전혀 찌그러지지 않은 채로 온전한 것. 그것이 문제였다. 석주야, 마땅한 기회를 줘서 고마워. 삼 년이 지나 형석은 정말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돈을 내어주었다. 삼 년 전에는 몇십만원이라는 돈이 그렇게나 큰 돈이었는데. 무사히 대기업에 취직한 형석에게는 이제 가뿐하게 내어줄 수 있는 돈이 되었다. (21)

 

"근데 넌 지금 혼자 있고 싶지 않을 뿐이야."
맹지가 조용히 말했다.
"아니야."
"그럼?"
내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맹지가 덧붙였다. 너는 너를 돌봐야 해. 좀처럼 항변할 수 없었다.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나를 돌보려면 나를 돌아보아야 하는데, 나는 나를 돌아보는 데 미숙했다. 일은 졸렬하게 하지만, 누군가를 좋아할 때는 손쓸 수 없을 만큼 좋아했다. 사랑에 있어서는 늘 나를 함부로 대하고 선을 넘어버렸다. (33) 

 

어쩌면 한 사람의 역사를 알면 그 사람을 쉬이 미워하지 못하게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227)

 

그런데 병원 생활이라는 게 그랬다. 개인의 모든 식생에 집중하게 되었고 작은 변화 하나에도 심장이 내려앉거나 자그마한 희망을 품게 되었다. (235)

 

그렇게 생각하니 발걸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이런 식으로 사는 걸 버텨왔지 싶었다. 내일과 내일모레의 일을 생각하며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그러다보니 저절로 살아졌지. (257)

 

살아갈수록 연을 맺은 생명이 늘어갔다. 어쩌면 그 무게로 인해 모든 존재가 늙어가는 게 아닐까. 참 무턱대고 많은 생명을 키웠다. (279)

 

정선이가 배를 퉁퉁 두드렸을 때, 정말 그저 뱃살이 나왔을 뿐이란 걸 믿게 되었을 때, 나는 내가 은근히 정선이의 삶이 내 생각대로 나아가길 바라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내가 누구보다 남의 불행을 소비하면서 스스로를 멸시하는 사람이라는 것도. 왜냐하면, 나는 그런 식으로 멋대로 남을 판단하고 그사람의 최악을 상상하며 내가 사회에서 받은 온갖 모욕을 감수하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331) 

 

제가 태어났을 때 손가락이 여섯 개였대요. 그래서 태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제거 수술을 받았어요. 그런데도 제 오빠는 늘 저를 육손이라고 불렀어요. 사람들은 가끔 무슨 짓을 해도 우리의 형태가 바뀌지 않는 것처럼 굴어요. (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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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무에 치이다 퇴근해 찾은 술집과 카페들은 얼마나 그럴 듯하고 멋진지. 쾌적한 테이블 간격, 근사한 조명과 인테리어, 편안한 공기. 업무 보고나 긴 회의도 없고 어딘가 불편하지만 웃으며 매일 인사를 나눠야 하는 사람도 없는 곳. 확실히 그즈음의 나는 어떻게든 회사생활을 정리하면 삶의 질이 달라질 거라는 허무맹랑한 생각으로 중국 호떡처럼 부풀어 있었다. 덩치가 크지만 안이 텅 비어 있어 한입 베어 물면 푹 하고 부서지는 허무한 그 빵 자체였다. 돌이켜보면 사회생활 경험이라곤 회사에 출퇴근하는 것이 전부였기에 품을 수 있었던 생각들이다. 일은 방식이 어떻든 누구에게나 전쟁인 것을 지금은 안다.(27)

 

여러모로 엉성했다. 그러나 홈페이지는 이제 막 출발하는 사람들의 등을 가볍게 밀어준다고 생각한다. 올릴만한 작업이 없다 싶어도 만드는 것이 좋다. 주소를 선점하고 간단한 문구라도 걸어두면 준비가 되어 있다는 느낌을 준다. (36)

 

불운은 나의 사정을 봐주지 않고 잔혹할 정도로 포개어질 수도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불운이라 부르는 것이었다. (108)

 

어딘가 무너져 내리고 있을 때 듣는 말들은 내 주변 어딘가를 머물 뿐 바로 귀에 들어오진 않았다. 하지만 그저 어떤 말이라도 건네려고 하는그 마음을 알아서 고마웠다. 한강이와 걷던 길, 한강이가 있던 장소에서 다시 하루하루를 보내는 건 끔찍하면서도 다행인 일이었다. (108) 

 

먼저 태어나는 것은 거추장스러운 일이 아닐까 생각했다. 장녀의 장점도, 단점도 있지만 그 어느 쪽으로도분류할 수 없는 성가시고 귀찮은 느낌이 내내 있었다. 뭐든 미리 겪어본다는 것은 좀 어려웠다. 어떠한 조언이나 사례 없이 매 순간이 처음일 때, 언니가 있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조금씩 센스가 남다른 친구들은 늘 언니가 있는 친구들이었다. (112)  

 

나름의 노력을 기울일 정도로 나는 자연스러운 사진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조금 더 부연하자면, 자연스럽게 사진을 찍으러 나가고 싶어지는 사진도 무척 좋아한다. 나에게 좋은 창작물의 기준은 노래 부르고 싶어지는 노래, 글 쓰고 싶어지는 글, 그림 그리고 싶어지는 그림 같은 것이다. 자연스럽게 그러한 마음들이 불러 일으켜지는 누군가의 결과물들을 좋아한다. 비상하고, 위대하고, 감히 범접도 할 수 없는 스케일의 창작물도 누군가는 만들어내야 하고 너무나도 대단하다고 생각하며 소비하지만 즐기는 것으로 만족한다. 반면 나는 역시 작은 세계를 만들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맞다. 압도하는 무언가보다는 가능하다면 "나도 뭔가 해보고 싶다"라는 마음이 순환되는 창작을 하고 싶다. 여백이 있어서 잠시 머물 수 있는 사진, 가볍게 카메라를 들고 산책이라도 나가고 싶게 하는 사진이 지금까지는 나의 목표다. 잔잔한 무언가를 별 탈 없이, 오래 오래 만들어내길 바란다. (263) 

 

무섭고 긴 밤이면 스티븐 스필버그가 영화를 만드는 과정 중 가장 싫은 순간에 대한 질문에 '차에서 내릴 때'라고 답변했다는 일화를 떠올린다. 차에서 내리면 현장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그 순간부터 촬영장을 진두지휘해야 하니까. <죠스>와 <ET>의 아버지, <환상 특급>과 <백 투 더 퓨처>의 감독,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거장조차도 그 중압감에서 벗어나기는 힘든 모양이다. 그러면 마음이 한결 편해지는 것이다. 저 대단한 사람도 통과할 수밖에 없는 감정인데 나 같은 범인이 비켜갈 수 있을 리 없다고. 그가 TED에서 '창의적인 사람이 되기 위한 10가지 방법' 같은 타이틀을 달고 강연을 한들 저 한마디만큼 내게 위로가 될까. 다큐멘터리 <스코어>에 나온 작곡가 한스 짐머의 명언 "어떻게 할지 전혀 감이 안 잡히는데, 그냥 다시 전화해서 다른 사람 쓰라고 할까..."를 생각하며 창작자들 각자의 공포와 두려움을 떠올려본다. 
힘 빼고 즐기며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최후의 최후까지 고통스러워하며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있다. 천재도 거물도 무엇도 아닌 나는 결국 후자에 감정 이입을 하게 된다. 결국은 모두가 불안과 공포를 모래주머니처럼다리에 묶고 무게를 이겨가며 터벅터벅 걸어 나가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면 어쩐지 꺾이는 무릎으로라도 한발 한발 용기를 내서 나아가고 싶어지는 것이다. (270)  

 

늘 많이 찍고 오래 찍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지만 많이 찍는 것보다는 오래 찍는 사람에게 점점 더 무게를 싣게 된다. 왜냐면 오래 찍으려면 여러 가지를 섬세하게 조절하는 방법을 배워야 함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재능도, 근력도, 기개도, 운도. 그래서 무리하는 습관을 조정하고 조금씩 더 쉬고, 덜 찍으며 가려고 한다. 철저하게 계획해서 오래오래 찍고 싶기 때문에. 반세기전의 기세 좋은 사진가처럼, 때로는 욕망을 숨기지 않으며. 흑백 사진 속에서 마가렛 버크화이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 인생과 경력은 우연이 아니었다. 철저히 숙고했다." (292) 

 

언제나 거대한 led 전광판의 마음으로 살고 있다. 누군가는 지나가다 고개를 들어 발견할 것이라는 마음으로 뭔가를 전송한다. 이제는 특별히 노력하지 않아도 만족스러울 정도로 업무 의뢰가 들어온다 해도, 그 양과 별개로 내가 해온, 또 하고 있는 일을 알리는 것도 중요한 일이므로 흐름을 놓치지 않으려 작업물을 올리는 편이다. 중요한 건 계속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리듬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포트폴리오 업데이트는 그 자체로 나의 중요한 궤적이 되기도 하기 때문에 습관을 들이는 게 중요하다. 함께 일해보고 싶은 업체에 먼저 메일을 보내거나 하는 적극적인 성격이 아니라면, 스스로의 자취를 단단히 만들어두는 데에 공을 들이는 것도 괜찮다. 잘 모아두고 분류해두면 누구든 알아보게 되어 있다. (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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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는 곧 깨달았다. 면도도 잘 안 하고 후줄근해 보이는 이 말라깽이 청년은 자신을 위해 철저히 반자본주의적인 새로운 시스템을 발명했다. 그는 사람들의 인성을 믿었다. 그는 은행에 적금을 넣는 것보다 이 작은 도시의 거의 모든 사람의 마음에 도덕적 의무라는 유동자산을 저축하기를 더 좋아했다. 그는 자신이 가진 약간의 재산을 눈에 보이지 않는 자산에 투자한 것이었다. 제아무리 완고하고 의심이 많은 사람이라도 기술이나 노동을 돈벌이 수단으로 거래하지 않고 부탁받은 모든 일을 당연한 듯 흔쾌히 처리한 후 즉각적인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마음의 빚을 진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16)  

 

패배나 굴욕의 수치심으로 영혼을 다친 사람에게 다가가는 일이 절대 쉽지 않음을 잘 알지만, 이때의 경험을 통해 나는 누군가를 돕고 싶은 첫 번째 충동에 주저 없이 순종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웠다. 공감의 말과 행위는 도움이 가장 절실한 순간에만 참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33)

 

평범하지 않은 사건들이 사방에서 벌어지더라도 일상생활은 평범하게 계속 이어진다.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이런 동시성을 나는 한 신문에 실린 항공사진을 보고 명확히 이해했다. 사진에는 살인적인 폭격이 쏟아지는 참호와 옆 들판에서 일하는 농부가 같이 담겼는데, 농부는 아무일 없다는 듯 말을 끌며 밭을 갈고, 콩코르드 광장에서 왕이 처형될 때 센강의 낚시꾼들이 했던 것과 똑같이 폭격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러므로 역사적 시대의 모든 낭만적 상상을 진실에 맞게 지우면, 역사적 사건이 벌어지는 바로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사건을 경험하고 그에 참여하기보다 오히려 그것을 잊으려 애쓴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55)   

 

과도한 긴장은 일종의 마비를 일으킨다. 2000년 전에 이미 그리스 극작가들은 이것을 비극의 법칙으로 알고 있었다. 소포클레스와 아이스킬로스는 극의 길이를 두 시간, 길어야 세 시간으로 제한해야 하는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비극이 한없이 길어지면, 그것에 몰두하는 능력의 오히려 감소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모두 이 숙명적 비율을 체감하고 있다. 세계의 극이 길어질수록 점점 더 끔찍해지고, 사건이 자극적일수록 그것을 진심으로 연민하는 능력이 더욱 줄어든다. 전쟁에 대한 끊임없는 생각은 마음을 파괴하고, 시대가 우리에게 연민을 더 많이 요구할수록, 우리의 지친 영혼이 느낄 수 있는 연민은 더 줄어든다. (56) 

 

전쟁이 발발하고 1년이 지난 지금, 수천 명의 죽음에서 느끼는 감정은 이전에 수백 명의 죽음에서 느꼈던 감정보다 훨씬 약해졌다. 신문 보도는 아무 감흥도 불러일으키지 않고, 뇌에만 도달할 뿐, 피로한 상상력과 과로에 지친 피곤한 심장에는 닿지 않는다. 그리고 지금 내가 무엇을 가장 깊이 괴로워하는지 자문하면, 목숨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의 고통에 연민을 느끼는 공감 능력까지 죽이는 이 엄청난 고통의 시대에, 모든 일에 연민을 느낄 여력이 더는 남아 있지 않은 것이락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한때 몹시 경멸했던 센강의 낚시꾼들을 문득문득 떠올리게 된다. 그들을 경멸한 것이 어쩌면 너무 부당했던 게 아닐까? (59) 

 

그는 계속 고치고 다듬었다. 그는 다시 고치고, 가까이에서 보고, 물러나서 확인하고, 작업대를돌리고, 중얼거렸다. 목에서 꿀꺽대는 이상한 소리가 났고, 이내 눈빛이 빛났고, 다시 화를 내며 눈썹을 찌푸렸다. 그는 점토 한 줌을반죽하여 작품에 덧입히고 거기서 다시 조금씩 긁어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작업을 시작하고 말았다.
그렇게 시작된 작업은 30분, 한 시간, 한 시간 반이 지나도 끝나지 않았다. 그는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내가 거기 있다는 사실조차 완전히 잊었고, 나는 그런 모습에 충격과 감동을 동시에 받았다. 그는 자기가 초대한 손님이 뒤에서 보고 있다는 것을 전혀 감지하지 못했고, 낮인지 밤인지조차 몰랐으며, 시간도 장소도 잊었다. 그는 오로지 자신의 작품과 그 너머에 보이지 않게 존재하는, 그가 성취하고자 했던 더 높고 더 진실한 형태만 응시했다. 그의 육중한 몸이 가볍게 움직였고, 어떤 깨달음이 흡사 술에 취한 듯한 그의 존재를 감쌌다.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인식하지 못한 채, 마치 천지창조 첫날의 신처럼 홀로 창조 작업에 전념했다. 시간과 공간과 세상을 그토록 완벽하게 잊을 수 있다니, 젊은 나로서는 처음 경험하는 큰 충격이었다. 그 한 시간에 나는 세상의 모든 예술과 성과의 궁극적 비밀을 확실히 이해했다. 그것은 바로 집중이었다. 크든 작든 어떤 작업이든, 수행하기 전에 마음을 가다듬어야 한다. 너무 자주 수백 가지 사소한 일에 분산되고 쪼개지는 의지를 진정으로 원하는 한 가지에 집중하는 영혼의 결단이 있어야만, 오직 그런 결단력으로만 진정으로 일할 수 있다. 손님에게 무례일 수도 있지만, 그는 나를 완전히 잊었고, 그렇게 나는 없는 사람처럼 위대한 대가 뒤에 숨을 죽이고 주변의 대리석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그 한 시간에, 나는 지금까지 내게 없었던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완벽을 향한 의지로 모든 것을 잊는 열정! 크든 작든 자기 일에 완전히 몰입할 수 있는 사람만이 그일을 제대로 해낼 수 있다. 다른 마법은 없다. 나는 그 한 시간에 이것을 깨달았다. (75) 

 

어쩌면 선함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드물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자연의 많은 것들이 그렇듯, 알폰소 에르난데스 카타가 실천하며 살았던 그런 고귀한 형태의 선함은 매우 드물 것입니다. 흔히 선함은 약한 마음, 다른 사람의 강한 요구에의 굴복, 수동적 태도, 심지어 약점으로 취급됩니다. 하지만 알폰소 에르난데스 카타의 선함은 미덕이자 힘이었습니다. 그의 선함은 능동적이었고, 치유와 격려의 힘을 신비하게도 늘 균일한 규모와 강도로 발산한다는 의미에서 나는 그의 선함을 심지어 방사능 같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자신을 더 많이 내어줄수록 그는 더욱 그 자신으로 남았습니다. 그것은 늘 활동하는 깨어 있는 선함, 그에게 중요한 모든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선함이었습니다. 그것은 그저 한 인간의 선함이 아니라, 한 시인의 선함이자 상상력이 풍부한 본성에서 나오는 선함, 가장 귀중한 작은 감탄을 끊임없이 자아내는 생산적인 선함, 의식적으로 고안된 지적인 선함, 언제나 대상이 명확한 선함이었습니다. (85)

 

그것은 마치 큰 충격을 받고 높은 곳에서 추락했다가 다시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며 자문하는 것과 같았다. 
"여긴 어디지? 지금이 20세기 맞아?"
그러나 세상에서는 곧 진정시키는 목소리가 들렸다.
"신중해지자. 이것은 독일인만의 내부 문제다. 독일인들이 자기네 나라에서 뭘 하든, 하고 싶은 대로 하게 그냥 두자. 독일인들이 서로 잘 알아서 할 것이다. 국경을 넘지 않는 한,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다."
심각한 착오다! 어떤 판단을 내릴 때, 내 나라냐 남의 나라냐를 기준으로 삼는 경우 어쩔 수 없이 늘 같은 형태로 발생하는 착오다. 모든 인간은 권리와 신성한 의무를 지닌 불가분의 통일체고 어떤 깃발과 이름과 이념으로 저질러지든 범죄는 범죄라는 사실을 망각할 때 발생하는 착오다. (100)  

 

그러나 동료 여러분, 인류가 짐승이 된 명백한 퇴행 때문에 우리는 믿음과 낙관을 잃어버렸지만, 그 대신 이 시련에서 얻은 것도 한 가지 있습니다. 나는 오늘날 우리 각자가 정신적 자유의 필수성과 신성함을 그 어느 때보다 새롭고 절절하게 인식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지금 우리는 삶의 가장 신성한 가치를 아주 특이한 방식으로 체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밝은 대낮에 별을 보지 못하듯, 삶의 신성한 가치가 살아 있을 때는 그것을 망각하고, 삶이 평온할 때는 삶의 가치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영원한 별들이 얼마나 찬란하게 하늘에 떠 있는지 알려면, 먼저 어두워져야 합니다.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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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으로 살풍경한 연립주택들이 드문드문 주황빛 전등들을 밝히고 있다. 아직 잎이 나지 않은 어린 활엽수들은 검고 깡마른 가지들의 윤곽을 어둠 속에 숨기고 있다. 그 황량한 풍경을, 거구의 대학원생의 겁먹은 얼굴을, 희랍어 강사의 핏기 없는 손목을 그녀는 묵묵히 응시한다. (18)

 

당신의 얼굴은 어머니 쪽을 더 닮았지요.
질끈 묶은 검은 머리채와 다갈색 피부도 보기 좋았지만, 가장 아름다운 것은 눈이었습닌다. 고독한 노동으로 단련된 사람의 눈. 진지함과 장난스러움, 따스함과 슬픔이 부드럽게 뒤섞인 눈. 무엇이든 섣불리 판단하지 않고 일단 들여다보겠다는 듯, 커다랗게 열린 채 무심히 일렁이는 검은 눈. (35)

 

잘 보이지 않으면 가장 먼저 소리가 잘 들릴 거라고 사람들은 생각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가장 먼저 감각되는 것은 시간입니다. 거대한 물질의 느리고 가혹한 흐름 같은 시간이 시시각각 내 몸을 통과하는 감각에 나는 서서히 압도됩니다. (39)

 

인간의 모든 고통과 후회, 집착과 슬픔과 나약함들을 참과 거짓의 성근 그물코 사이로 빠져나가게 한 뒤 사금 한줌 같은 명제를 건져올리는 논증의 과정에는 늘 위태하고 석연찮은 데가 있기 마련입니다. 대담하게 오류들을 내던지며 한 발 한 발 좁다란 평균대 위를 나아가는 동안, 스스로 묻고 답한 명철한 문장들의 그물 사이로 시퍼런 물 같은 침묵이 일렁이는 것을 봅니다. (44)

 

kalepa ta kala.
칼레파 타 칼라.

아름다움은 아룸다운 것이다.
아름다움은 어려운 것이다.
아름다움은 고결한 것이다. 

세 번역이 모두 그르지 않은 것은, 고대 희랍인들에게 아름다움과 어려움과 고결함이 아직 분절되지 않은 관념이었기 때문이다. 모국어에서 '빛'이 처음부터 밝음과 색채라는 두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69)

 

동향이라 더 춥다고 어머니는 불평하시곤 했지만 난 그게 더 좋았어. 새벽에 깨어서 거실로 나오면 모든 가구들이 푸른 헝겊에 싸여 있는 것 같았지. 파르스름한 실들이 쉴새 없이 뽑아져나와 싸늘한 공기를 그득 채우는 것 같은 광경을, 내복 바람으로 넋 없이 바라보며 서 있곤 했어. 마치 황홀한 환각 같던 그 광경이 약한 시력 때문이었다는 걸 그땐 알지 못했지. (73)

 

'수난을 겪다'는 뜻의 동사와 '배워 깨닫다'는 뜻의 동사입니다. 거의 흡사하지요? 그러니까 지금 이 부분에서, 소크라테스는 일종의 언어유희로 두 가지 행위가 비슷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85)

 

왜 일 년 동안 까만 옷만 입어야 돼?
덤덤한 목소리로 그녀는 대답했다.
마음이 밝아질까봐 그런 거 아닐까.
마음이 밝아지면 안 돼?
죄스러우니까.
할머니한테? ... 그치만 할머닌 엄마가 웃으면 좋아하잖아.
그제야 그녀는 아이를 돌아보고 웃었다. (89)

 

인간의 몸은 슬픈 것이라는 걸. 오목한 곳, 부드러운 곳, 상처 입기 쉬운 곳으로 가득한 인간의 몸은. 팔뚝은. 겨드랑이는. 가슴은. 샅은. 누군가를 껴안도록, 껴안고 싶어지도록 태어난 그 몸은. (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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