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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환한 날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작지만 분명한 놀라움이 그녀의 늙고 지친 몸 깊은 곳에서부터 서서히 번져나갔다. 수없이 많은 것을 잃어온 그녀에게 그런 일이 또 일어났다니. 사람들은 기어코 사랑에 빠졌다. 상실한 이후의 고통을 조금도 알지 못하는 것처럼. 그리고 그렇게 되고 마는 데 나이를 먹는 일 다위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36)
빛이 다가올 때
게다가 달궈진 불판 위에 올려놓은 듯 마음이 늘 요란하게 달싹이던 당시의 나와 달리 언니는 얼마나 한결같이 차분해 보였던지. 나는 얼어붙은 겨울호수처럼 고요한 언니의 어른스러움을 항상 동경했다. (42)
하지만 언젠가부터 나는 그곳을 매우 비좁다고 느끼기 시작했고, 그곳에 앉아 "오경등영조잔장/욕어별리선단장/낙월반정추호출/행화소영만의상" 따위으 엄마 아빠가 해석할 줄 모르는 한시를 내가 읽고 있다는 것, 누군가에게 편지를 쓸 때마다 '잘 지네고 있냐?'라고 쓰는 아빠나 포스트잇에 '시게 약 살 것'이라고 적는 엄마는 내게 설명해 줄 수 없는 to 부정사와 동명사의 차이를 내가 배우고 있다는 사실을 아주 예민하게 느끼기 시작했을 것이다. 밖에 소나기가 떨어지거나 눈송이가 날리기 시작하면 나는 세탁소의 유리문 너머를 영화 스크린 보듯 바라보며 조용히 it's starting to rain이라거나 it starts snowing이라고 발음해보곤 했다. 묘한 슬픔이 뒤섞인 우월감을 느끼며. 많은 이들이 그렇게 자기의 부모를 딛고, 새로운 세계를 향해 앞으로 나아갔다. (52)
눈이 내리네
이따금 선배들이 무리 속에 섞이기도 했다. 그때 함께하는 건 대체로 한 학번 차이가 나는 남자 선배들이었다. 대단히 어른인 척하고, 외국 맥주 브랜드에 대해 알려주고, 성적에 후한 교수들의 정보를 주던. 선배들은 답사할 장소에 대한 스터디를 주도하고 동아리 내 규율을 강조했는데, 동기 중 재수한 남자애들은 그들이 선배 행세를 할 때마다 뒤에서 비웃었지만 다혜는 남녀가 섞여 늦게까지 어울린다는 사실만으로 은근히 흥분해 있었다. 유쾌한 분위기, 떠들썩한 소음. 이상주의적인 가치와 낭만적인 몽상의 범람. (184)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러고 나서 주미는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에 대해 최악을 상상하며 얼마나 쓸데없이 인생을 낭비하며 살고 있는지 마침내 깨달았다고 덧붙였다. 어떤 얼굴로 다가올지 짐작할 수조차 없는 미래와 끝에 대해서 대비할 능력이 마치 우리에게 있는 것처럼 헛되게 믿으면서. 그렇게 말한 후 우리는 주미의 이제 일곱 살이 된 아이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한없이 잔혹한 인생이 얼마나 변덕스러운 방식으로 우리에게 또다시 기쁨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해 조금 더 말했다. (245)
해설
너무 조용하고 평화로운 일상은 불순물이 제거된 삶의 한 양태일 수 있다. 허전함과 쓸쓸함의 이면일 수 있고, 허무의 가면일 수도 있다. 허무는 텅 빈 마음의 공터, 기대가 자랄 수 없는 말라버린 땅, 바라는 것을 이루기 위해 움직이는 과정이 아니라 충분히 이루었다고 생각되는 반환점 이후부터 침입해오는 인생 뒷면의 감정이다. 이게 전부인 걸까. 더는 없는 걸까.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모습으로 살고 있을 때 허무라는 불청객이 찾아올 수 있다. 허무가 무기력에 앞서 동반하는 것은 캄캄한 상실감이다. 의미를 나눌 수 있는 대상이 사라질 때, 조용하고 평화로운 길목이야말로 허무를 위해 마련된 지름길이다. (중략) 분명 아무 일도 없는데, 심지어 모든 것이 괜찮은데, 도통 좋은 것이 없다. 그러다 평화로운 겉모습과 공허한 속마음이 충돌하는 순간이 온다. 그 순간 돌출되는 어긋남은 안정된 허무 속에서 목격되는 기이함의 정체다. 백수린의 소설은 별일 없이 산다는 말의 장막을 살며시 들춘다. 그런 뒤 사소해 보이지만 결국엔 중요해지고마는 결핌들과 가만히 눈 맞춘다. (249)
앵무새가 떠난 후 여자는 삶의 다른 길목에 서게 될 것이다. 현재로 넘쳐 온 과거의 기억들을 대면하고 살까.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마음의 서랍 속에 넣어두고 잊어버린 채 살가. 인생이 그렇듯 소설에도 답이 없다. 답은 알 수 없지만, 다시 사랑한 대가로 다시 상실의 아픔을 겪고 있는 그녀, 옥미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삶에 쉽게 만족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허무에 적응하기 위해 최적화된 스케줄을 칼같이 지키며 성실하게 살고 있으면서도 정작 인생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은 한마디도 떠오르지 않는 하루보다는, 식탁 위에 멍하니 앉아 이런저런 잡념 속에서 서술어를 고치며 눈물 흘리는 하루가 더 '사랑'에 가까운 날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코 '작은' 차이가 아니다. (253)
허무는 현재를 간과한다. 특별하지 않은 현재 속에서 지금 이 순간은 점점 더 멀어지고 희미해져간다. (253)
지난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다. 서로를 할퀴었던 상처도 사라지지 않는다. 개의 다리가 보여주듯 상처가 없었던 지난 시간은 결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두 사람이 그 개의 활기를 보고 환해졌던 것은, 되돌아가지 않아도 괜찮아질 수 있게 하는 사랑의 힘을 봤기 때문이다. 회복이란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과거 지향이 아니라 상처를 안고 새로운 상태로 나아가는 현재 지향이다. 검은 개의 셋뿐인 다리는 매일 같이 함께 산책하는 부부의 사랑 속에서 더 튼튼해졌을 것이다. 세 개의 다리는 없는 한개의 다리를 보여주는 빈자리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사랑을 증명하는 충만한 자리다. (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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