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SMALL
요즘 창작자들에게는 여느 때보다 '뛰어남' 혹은 '유명세'가 요구되는 듯싶습니다. 이러한 요구는 창작자로 하여금 시작조차 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7)

 

저마다의 새롭고, 지루하고, 따분하고, 긴장되며, 징그럽고, 끝없이 계속되는 출발 앞에서 느끼는 당연한 두려움에 대한 이야기다. 당연한 의연함 역시 없음을 말하는 대화이다. (9)

 

무언가 새로운 일을 앞두고 있을 때면 여전히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두렵고 초조하다. (10)

 

당장의 그가 너무나 빛나 보였던 나머지, 그의 처음 같은 것을 상상해보려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18)

 

약간 미치겠는 거예요. (웃음) 그날 엄청나게 긴장했던 기억이 있어요. 그런데 실수 없이 잘 끝났습니다.

어떻게 대처하셨어요?

그냥 해야죠, 뭐. (29)

나에게 부족한 것은 맹목과 단순함일지도. 

 

그런데 일을 줄이는 것 자체가 또 다른 불안으로 다가오지 않았나요?

(바로) 불안하죠. 되게 불안하죠. (40)

 

다른 인터뷰에서 "영상과 글에 있어서만큼은 자책하지 않는다."라고 하신 걸 보았어요. 저는 그게 매우 인상적이었는데요. 왜냐하면, 저는 완전 자책하는 스타일이거든요. (웃음) 그러면서 "못하는 게 안 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라고 덧붙이기도 하셨어요. 저도 동의해요. 완전 전적으로 동의하고 알지만...

(웃는다)

알지만... 잘 안 되더라고요.

잘 안 돼요.

자책의 굴레를 극복할 때 스스로에게 자꾸 주문을 걸었다고 하셨는데, 그 주문에 대해서 자세히 말씀 좀 해주세요. 왜냐하면 저 같은 분들이 되게 많을 거예요.

(잠시 머뭇거리더니) 내가 만든 거, 너무 형편없잖아요. (웃음) 그런데 이렇게 계속하면 아무것도 안 되겠는 거예요. 내 마음에 안 든다고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으면 어떻게 내 길을 만들겠어요. 피드백도 받아야 하는 거고요. 그러니 나의 못남을 좀 견뎌야 하는 거죠. 어쨌든 못하는 게 안 하는 거보다는 결과적으로 나의 발전에 도움이 많이 된다고 생각하고, 실제로도 그랬고요. 그런 조언을 저도 봤었어요. 그런 거 있죠, 미완성 곡이나 글을 두 편 쓰는 것보다, 못났지만 완성된 하나를 만드는 게 훨씬 더 많이 성장하게 한다는 말이요. 그런 조언을 보면서 많이 다짐했죠. 진짜 별로인 거라도 하나 완성하자, 그래서 하나하나 쌓아가자. 어쨌든 다음에 더 잘하면 되잖아요. 뭔가를 계속 쌓아 나가는 일이 결국 스스로에게 더 도움이 될 거고, 아무리 '이건 완벽하게 만들겠어.' 해봤자 그걸 나 혼자 가지고 있으면 누가 어떻게 볼 수 있겠어요. 그래서 그런 말을 많이 했었죠. "어쩔 수 없다."

내가 이렇게 하는 건 별수 없다.

영원히 완벽해지지 않아요. 누구든지 포기하는 순간을 맞이해야 해요. '여기서 포기다. 타협해야겠다.'는 순간을 맞이해야만 노출이 가능하기 때문에, 그냥 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요. <유튜브로 책 권하는법>에도 그런 구절을 썼는데, 언제든 무마할 시간이 남아 있다고 생각해야 해요. 내가 지금 개떡같이 했어도, 이걸 무마할 시간이 남아 있다는 걸, 내 인생에 아직 무엇이든 무마할 시간이 남아 있다고 믿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46)  

 

그런데 아까 말씀해주신 것처럼, 창작의 완성은 노출이잖아요. 하지만 세상에 나의 것을 내보이는 일에는 만드는 것과 별개로 엄청난 용기와 대범함이 필요한 것 같아요. 나를 드러내 보이는 일을 잘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저는 딱 두 가지라고 생각하는데요. 더 잘하고 싶다는 마음과 내가 별로라는 인정. (64)

 

너무 두려워하지 마세요. 누구나 다 못하는 시절이 있어요. (65)

 

수년간 단련된 그의 근육에 질문이 무색해질 때가 많았다. 어떻게 하는지, 버티는지, 쉬는지, 그리고 다시 시작하는지 묻는 때에 그랬다. 그것도 자주. 왠 훈련에 익숙해진 선수처럼, "그냥 한다."고 말하는 그를 보면서 알 수 없는 강인함을 느꼈다. (71)

 

그런데 목표를 이루고 나서는 그런 게 없으니까 처음엔 조금 재미가 없는 거예요. 이다음 무언가가 있어야 재미있을 것 같은데. 그런데 '다양한 경험을 쌓는 마케터'가 되어야겠다고 마음을 바꾸니까, 그때그때 재밌는 일이 들어오면 하고 지루하면 안 하게 되었어요.(82)

 

저도 뭔가를 많이 하잖아요. 상대적이긴 하지만 그렇게 보이는 이유도, 많이 올리니까 그래요. 하나를 해도 막 열 번씩 말하니까. 그런데 저는 참새 님을 비롯한 분들을 보면 확실히 콘텐츠의 힘을 믿게 돼요. 아무것도 안 하는 것도 좋지만, 이것저것 하면서 스트레스도 받아보고, 자기의 매력을 막 뿜어내는 시기가 저마다 있는 것 같아요. 정작 본인은 스트레스받을지라도요. (88)

 

그래도 제일 조심하려고 하는 부분은, 누군가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하지 않는 거예요. 저도 취향이 있으니까 어떤 게 별로일 수 있잖아요. 그런데 별로인 건 절대 어디에 올리거나 평하지 않아요. (95)

 

당시에는 제가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너무 갑자기 큰 사랑을 받아서 감당하지 못했던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다시 생각 해보면, 애초에 완벽한 준비는 없는 것 같아요. 준비가 안 되어서 힘들었다기보다는 처음 해보는 거니까 당연히 힘들었던 거라고 생각해요. (138)

 

그런데 저는 이걸 딱 멈추게 된 계기가 있었는데요. 이런 생각 회로를 '자해'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저를 해치는 거죠.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평가하고 이야기하고 하는 부분에서 휩쓸리는 게, (143)

 

어떻게 보면 '깊이에의 강요'는 실체가 없는 두려움이거든요. 내가 잘하고 싶고,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데 근거가 없으니까 흔들리는 거라고 생각해요. 아직 보여준 게 없으니까요. 그런데 차곡차곡 하나씩 쌓아올리다 보니까, 그 부분에 대한 명확한 근거가 생긴 거죠. 그래서 깊이에 대해서는 예전만큼 고민하지는 않는 것 같아요. 그리고 초반엔 스스로의 자격이나 능력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면, 지금은 그것보다는 '성실함'과 일에 대한 '진실함'이 더 중요한 것 같아요. 그런 마음가짐을 가지고 결과물과 시간이 쌓이면, 나머지 재능은 그냥 따라오게 된다고 생각해요. 근거가 자연스럽게 쌓이게 되는 거죠. 시간이 해결해주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처음 시작할 때 느끼는 막연함이나 두려움 중에서 어떤 부분은, 계속해서 자연스럽게 해결되는 지점이 있는 것 같아요. (146)

 

어릴 때는 예술적 능력이 있어야 무언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에는 그냥 오래 하는 사람이 ... 최고다. (147)

 

그래서 뭔가 어떤 자극을 받았을 떄, '내가 한다면' 어떤 방식으로 하면 좋을지를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리고 사실 기획이라는 게, 생각은 누구나 하잖아요. 사적인서점 처음했을 때도, 저희 서점 인터뷰가 나가면 무조건 있었던 댓글이 "아, 이거 내가 하려고 했던 건데."

나도 생각했던 건데!

정말 많았었거든요. 기획은 누구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걸 실현하느냐 마느냐의 문제인 거죠. (151)

 

첫 번째는, 이게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거예요. 전부가 아니라고요. 선택 앞에서 절박해지는 이유가, 여기서 망하면 끝장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거든요. 그러다 보면 안전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움직이거나 시도하는 게 아니라요. 잘 못하면 끝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도전이나 모험을 할 수 없게 된다고 생각해요. (170)

 

내가 싫어하는 무언가와 맞바꾼 거잖아요. 자유라는 것과 안정감을 맞바꾼 거죠. 사실 자유는 너무 크고 귀한 건데, 이미 갖고 있는 거니까 당연하게 생각해요. 그러니까 내가 갖고 있는 건 못 보고 나에게 없는 것, 부족한 것만 크게 보는 거죠. 그걸 잊지 않으려고 해요. (172)

 

맞아요, 공포가 있었죠. 매일 글 쓰는 거는, (한숨) 별로 안 어려워요. 매일 많은 사람한테 보여주는 게 어렵죠. 일기를 쓰는 건 쉽잖아요. (207)

이슬아도 무섭다는데.

 

용기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해요. 왜냐하면 창작자가 용기를 잃으면 끝장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오만과는 또 다른 것인데, 일말의 용기 없이는 아무것도 만들 수가 없잖아요. (209)

 

문학작품을 보면 진짜 다양한 사람의 온갖 구질구질한 삶이 있지 않습니까. 조금 먼 시선에서 보면, 사람들이 되게 애처롭고 귀엽잖아요. 그래서 어쨌거나 글을 쓸 때 다른 사람들도 나만큼 치사하고 힘들고, 음, 그리고 변태 같다는 것을 잊지 않고 쓰거든요. 그러면 용기가 나는 것 같아요. (210)

 

그래도 너무 ... 좋은 글 쓰고 싶잖아요. (웃음) 너무 잘하고 싶잖아요.

맞아... 너무 잘하고 싶지.

그래서인지 언제나 초조하고 아쉽고 그렇지만, 이 모든 생각을 하면 한 자도 쓸 수 없기 때문에 생각을 별로 안 하는 편이에요. (221)

 

제가 감히 미슬 님께 한 말씀 올려보겠습니다. 미슬 님께서는 저보다 현명한 존재이실 거라고 생각하고요. 저는 미슬이가 두 가지 함정에 빠질까 봐 걱정이에요. 너무 많은 사람들 얘기 듣다가 겁쟁이가 되거나 너무 오만해지고 고집스러워져서 사람들 말 안 듣는 미슬이가 될까 염려돼요. 그러니까 겁쟁이도 아니고 잘난척쟁이도 아닌 사람으로 재밌고 좋은 것을 쓰기를 바라고 있어요. (236)

 

용감해지렴. 용기야말로 생명의 열쇠니까. 결코 자신을 비하하지 마. 너의 자랑스러운 모습을 언제나 당당히 기억하기를.

고우야, 외롭니. 고독은 너와 나보다 훨씬 더 훌륭한 사람들에게 주어진 운명이란다.

건강하렴.

너의 친구로부터

<슬픈 인간>, 나쓰메 소세키 외 (250)
반응형
LIST
반응형
SMALL
순덕 님은 "사는 게 너무 고달팠어요"라고 말한 뒤 "그래서 더 힘든 사람을 생각했어"라고 덧붙였다. 나는 이두 문장이 나란히 이어지는 게 기적처럼 느껴진다. (48) 

 

내가 신지한테 맨날 그래. 주는 게 주는 것이 아니라고. 주는 게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꾸 베풀라고. 금을 쥐고 있다고 해도 영원히 내 거는 아닌 기야. 불난 일 겪고 나서는 나도 자꾸 더 베풀고 싶어져. (96)

 

제가 신지 언니 책 읽으며 너무 놀랐던 부분이 또 있어요. 스트레스에 관한 인숙 씨의 대사였죠.

어느 날 퇴근길의 버스에서 인숙 씨의 전화를 받았다. 
"딸, 어디."
"버스. 이제 집에 가."
"아홉 시 넘었는데 인제 퇴근했나?"
"어. 야근했어."
"목소리에 기운이 없네."
"저녁도 못 먹었어. 요새 일이 너무 많아. 아, 스트레스 받아..."
"어마야. 니 스트레스를 왜 받나. 그거 안 받을라 하믄 안 받제."
"..."
아니 무슨 스트레스가 전화인가. 안 받을라 하믄 안 받게.
- 김신지, <평일도 인생이니까>, 17쪽 

감정이 올라올 때도 있지만 빨리빨리 잊어버리려고 해. 스트레스를 안고 꿍해있으면 나 자신이 너무 상해버리잖아. 새 마음을 먹는 거지. 자꾸자꾸 새 마음으로 하는 거야. (97)

 

나는 손님 옷 버린 적이 없어.

비결이 뭐예요?

충분히 시간을 들여서 일해. 서둘러서 대충하지 않아. 손이 빠르니까 두세 시간 만에 완성할 수도 있지만 그것보다 여유 있게 일정을 잡고 시작해. 그럼 편안한 마음으로 완벽하게 할 수 있잖아. 손님이 찾으러 왔을 때 자신이 있어. 자신 있게 입어보라고 할 수 있어. (249)

 

가끔은 가만히 있어도 머릿속에서 내 삶이 필름처럼 돌아가

주마등처럼요?

응. 젊어서부터 지금까지 촤악 스쳐 가는 거야. 젊었을 땐 남편이랑 바람 피우고 살림 차린 젊은 여자도 참 미워했고, 우리 시어머니도 미워했어. 이제는 아무도 밉지가 않아.

왜 안 미우세요?

몰라. 어느새 이해가 돼. 안 미워. 그 여자들도 안쓰러워. 그들도 그렇게 살고 싶었던 게 아닐 거야. 그 사람들 삶도 기가 막혀. 그래서 안 밉더라고. (267)

 

 

이슬아의 인터뷰집은 언제나 좋다. 

반응형
LIST
반응형
SMALL
실상은, 우리가 각자 살면서 나눠본 대화 중에 가장 흡족한 대화를 나누고, 우리 둘 다 그걸 단 일주일이라도 포기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토록 강렬하게 이끌리는대화를 나눈다는 것, 그게 우리가 우리 자신을 느끼는 방식이니까. (7) 

 

이런 여정에선 걸으면 걸을수록 시공간의 성격이 자꾸만 바뀌었고 '시간'이란 개념도 증발해버렸다. 거리는 기다란 리본처럼 한없이 펼쳐졌고 우리 앞을 가로막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시간은 자꾸만 확장되어 어린 시절에 그랬듯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언제나 빠듯하고 언제나 촉박한, 정서적 안정을 위한 덧없는 척도일 뿐인 지금의 시간과는 달리. (24)

 

자기 최선의 자아. 이는 몇백 년간 우정의 본질을 정의할 때면 반드시 전제되는 핵심 개념이었다. 친구란 자기 내면의 선량함에 말을건네는 선량한 존재라는 것. 치유의 문화에서 자란 아이들에게 이런 개념은 얼마나 낯선가! 오늘날 우리는 서로 최선의 자아를 긍정하기는커녕 그것을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우정이라는 결속을 만들어내는 것은 오히려 우리 자신의 감정적 무능ㅡ공포, 분노, 치욕ㅡ을 인정하는 솔직함이다. (28) 

 

콜리지와 워즈워스가 두려워했던 그런 식의 자기폭로를 오늘날 우리는 아주 좋아한다. 우리가 원하는 건 상대에게 알려졌다는 느낌이다, 결점까지도 전부. 그러니까 결점은 많을수록 좋다. 내가 털어놓는 것이 곧 나 자신이라는 생각, 그것은 우리 문화의 대단한 착각이다. (28)

 

순간 우리 셋은 눈을 마주치고, 곧 한꺼번에 깔깔 웃어젖힌다. 웃음이 멈추자 다 같이 빙그레 미소를 짓는다. 수행은 다 같이 했고 수용은 각자가 했다. (34)

이 책은 진짜 죽비같다.

 

나는 성욕이 강한 사람이지만 성욕이 제일 중요한 사람은 아니며, 오르가슴으로 천국을 맛보기는 했어도 지구가 흔들리지는 않았고, 반년 남짓 진이 빠지도록 성적 쾌락에 탐닉할 수는 있어도 늘 그 말초적 자극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는 중이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한마디로, 사랑을 나누는 일은 숭고했지만 거긴 내 거처가 아니었다. 그 뒤로 나는 더 많은 걸 깨달았다. (36)

 

우정에는 두 가지 범주가 있다. 하나는 서로에게 활기를 불어넣는 관계고, 다른 하나는 활기가 있어야만 같이 있을 수 있는 관계다. 전자는 함께할 자리를 미리 마련해두지만, 후자는 일정 중에 빈 자릴 찾는다. (43)

 

이제 미드타운 6번 애비뉴 쪽으로 걸어가는데 문득ㅡ이유는 모르겠다, 어쩌면 그 극작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도ㅡ배터리파크시티 해안 공원 난간 살에 철로 활자를 만들어 주욱 끼워놓았던 프랭크 오하라의 근사한 문구가 떠올랐다. "녹음을 만끽하겠다고 뉴욕의 경계를 벗어날 필요가 전혀 없다. 요 앞 지하철이든 레코드 가게든, 뭐가 됐든 사람들이 인생을 송두리째 후회하진 않는다는 신호를 확인하지 않고서는 풀 한 포기도 마음 놓고 감상할 수 없으니." (55)

 

엄마는 어둠침침한 방 소파에 누워 한 팔은 이마에 걸치고 다른 팔은 가슴에 올려놓은 채 "외로워!"라고 울부짖었다. 그러면 사방팔방에서 여자들은 물론이고 남자들까지 달려와 동네에서 잘난 사람 취급을 받던 이 영혼의 괴로움을 달래보겠다고 쩔쩔맸다. 하지만 엄마는 정신을 놓아버린 듯한 불만 속에서 눈을 질끈 감은 채 등을 돌렸다. 엄마가 바란 건 거기 있는 누구도 건네지 못할 영혼의 위로였다. 그 사람들은 임자가 아니었다. 엄마 주변에는 그런 사람이 없었다. 한때 딱 한 사람 있었지만, 이제 그는 죽고 없다. 
엄마는 사랑을 성배의 자리에 올려둔 상태였다. 사랑을 찾는다는 건 단지 성적인 희열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우주에서 머물 자리를 잡는 일이었다. 엄마는 아빠와 결혼했을 때 영혼에서 모호함이라는 먹구름이 걷혔다고 했다. 엄마는 그렇게 표현했다, 모호함이라는 먹구름. 너희 아버진 마술 같은 사람이었지. 눈길, 손길, 그리고 날 이해해주는 게 그랬어. 엄마는 이 문장을 끝맺을 때쯤 몸을 앞으로 숙였다. 이해는 부적 같은 단어였다. 엄마 말로는, 이해를 받지 못하면 당신이 살아 있는 건지 알 길이 없었고 이해를 받으면 마음이 정돈되며 세상에 존재한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아빠 곁에서 엄마는 당신에게 있었는지도 몰랐던 깊이로 반응했다. 시든, 정치든, 음악이든, 섹스든 모든 것에. 감정에 북받친 듯 엄마는 눈을 감았다. 모든 것.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 엄마는 말했다. "모든 것"이 아빠와 함께 가버렸다고. 엄마 영혼에 드리웠던 구름이 다시 나타났고, 이번엔 그 어느 때보다 검었다. (63)

 

나는 자라서 영락없는 엄마의 딸이 되었다. 꼬마 때부터 똑 부러지는 반응이 돌아오지 않으면 도통 흥미를 못 느꼈다. 내 마음과 주파수가 딱 맞는 사람들이 필요했지만 주변의 어떤 누구도 내가 꼭 듣고 싶어하는 그 말을 돌려주지 않았다. (64)

 

한참 전부터 나는 부르짖고 다녔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엄마가 느끼던 종류의 그 결핍감에 나 역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마치 태어나자마자 '이상적인 친구'를 빼앗기는 바람에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 결핍을 겉으로 드러내는 것만 남은 사람처럼. (65)

 

엄마가 심장 수술을 받았다. 수술을 받고 나온 엄마는 평온한 상태를 유지했는데, 나는 그때까지 엄마에게 그런 구석이 있는지 전혀 몰랐다. 목소리에선 비판과 불평이, 얼굴에서는 불만이 사라졌다. 엄마에게는 모든 게 흥미로운 일이 되었다. 버스에 무사히 올라타고, 두 뺨에 햇살이 비치는 것, 입에 빵을 넣는 것까지도. (95)

 

이것이 볼턴에게 "미쳐 돌아가는 일들이 줄줄이 밀려드는 와중에도 뚜벅뚜벅 걸어나가본 적이 있는 가장 고독한 개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준 외로움이었다. 
다음 순간 볼턴은 역설적인 상황을 맞닥뜨린다. "세상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혼자 됨을 얼마나 사랑했던가. (...) 우리가 베풀지 못한 건, 우리 자신을, 우리의 고독한 영혼을 위해 움켜잡고 낚아채고 그러모을 것들이 뻗으면 닿을 거리에 널려 있었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쓸 당시 볼턴은 칠순이 다 됐었다. 번잡한 도시의 아름다운 단절 속에 비친 현대의 삶ㅡ말로 다 못 할 엄청난 자유가 있는 그 삶이 다른 시대가 한 적 없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우리 자신을 보여주었다는 걸 알 만큼 오래 산 것이다. 볼턴 역시 프로이트가 알았던 걸 알고 있다. 외로움은 우리에게 고통을 안겨주지만 불가해하게도 우리는 그 외로움을 포기하길 망설인다. 심리적 시간 속에서 우리는 단 한 순간도 모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야말로 갈등 간의 갈등이다. 이것이 볼턴의 통찰이자 유일한 깨달음이었다. (105)

 

그곳에 입소하고 몇 달이 지났을 무렵 의자에 풀썩 주저앉아 있는 앨리스의 모습이 너무 기진맥진해 보여서 나는 덜컥 겁이 났더랬다. 그래도 맞은편 의자에 얼굴을 마주 보고 앉아서 안부도 건너뛴 채 그와 이야기를 시작하곤 했다. 내 목소릴 몇 분쯤 듣노라면 그의 얼굴, 몸, 손짓에 다시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내 책과 뉴스 헤드라인과 지인들에 관한 대화를 언제나처럼 신나게 나누었지만, 언쟁을 벌이는 일은 없었다. 그 기적 같은 변환의 광경을 영영 잊지 못할 것 같다. 고도의 지성이 작동하자, 반송장 같던 사람이 생생한 활기를 되찾는 모습을 본다는 건 그야말로 마법이나 다름없는 변신을 목격하는 기분이 드는 일이었다.
"여긴 대화가 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어요?" 한번은 내가 그렇게 물었다.
"없지 그럼." 그러면서 앨리스는 덧붙였다. "잡담이야 되지. 잡담은 많이 나눠요. 하지만 대화? 없어요. 그런 건. 지금 우리가 나누는 이런 대화는 당연 없고말고." 
앨리스는 매일같이 귓속을 채우는 잡담 때문에 자기가 죽어간다고 했다. 침묵만도 못해, 훨씬 못해, 그렇게 말했다. (115)

매일같이 귓속을 채우는 잡담 때문에 자기가 죽어간다니. 침묵만도 못하지 정말.

 

좋은 대화란 공통된 이해관계나 계급의식이나 공유된 이상 따위보다는 기질에 달린 문제다. "그게 대체 뭔 소린데?"라고 따지기보다는 "뭔 말인지 딱 알지"하며 자기도 모르게 반색하게 되는 기질. 그런 공통의 기질이 있으면 대화는 자유로우면서도 거침없는 흐름을 어지간해선 잃지 않는다. 하지만 그게 없으면 언제나 살얼음판을 걷기 마련이다. 
언쟁이 항상 과열되면 나는 이런 말로 스스로를 다독이려 안간힘을 쓴다. "잘 봐, 그냥 서로 주파수가 어긋난 거야, 그게 다라고, 주파수가 안 맞는 거야." (127)

 

나대로 탐색할 수 있어야 마땅했던 것에 대해 설명을 해야 할 때마다, 나는 점점 방어적으로 변해갔고 고립된 채 닫혀버린 사람이 된 기분을 느꼈다. (128)

 

나는 세상 사람 모두가 알면서도 늘 잊고 지내는 게 무언지 깨달아가기 시작했다. 성적으로 사랑받는 것은 실제 자기 자신으로서 사랑받는 게 아니라 서로의 내적 욕망을 자극하는 능력으로 사랑받는 것이란 걸. 매니가 욕망했던, 내게 할당됐던 그 권력이 오래가지 않으리라는 건 기정사실이었다. 누군가를 영원토록 매혹할 수 있는 건 오직 사람의 머릿속 생각이나 영혼의 직관뿐인데, 내가 품은 그것들을 매니는 사랑하지 않았다. 매니에겐 그런 것들이 필요치 않았다. 이렇게 누군가와 감각으로만 연결된다는 건, 결국 내가 나 자신에게 감당이 안 될 정도로 내던져져서, 취약해지다 못해 곧 자기회의에 빠져 죽어갈 거라고 느끼게 된다는 걸 의미했다. (129)

 

이 사안의 진실은 울슨도 제임스도 우정이라는 과업을 감당할 능력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둘 다 그 관계를 소중하게 여기기는 했지만, 그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마음을 사로잡혔던 건 신경증적 우울이었고, 각자가 그 감옥에 갇혀 있었다. 자기를 위해서도 못 하는 일을 상대방을 위해 해낼 순 없는 노릇이었다. (134)

 

믿거나 말거나, 젊고 약삭빠른 여러분 가운데 내 얘기를 믿는 사람이 있거든 나를 불쌍히 여겨주기를. 이 나이 먹도록 아직도 '뭐가 되고 싶은지' 도통 모르겠으니. (...) 
우리 위층에 있는 그 푸닥진 델리에서 나는 열세 살 때와 다를 바 없이 무궁무진한 가능성에 열려 있다. (...)
나와 비슷해 보이는 저 수많은 사람도 영혼의 폭동에 어울리는 전문적인 외피를 끝끝내 찾아내지 못한 신세다. 많은 이가 영영 찾지 못할 것이다. (...) 이건 추측이라기보단 상처와 별들이 내는 목소리다. 나도 그런 삶을 살아왔고 아마 앞으로도 계속 살아낼 것이다. 그러다 결국 사람들이 내 핫도그[재주]마저 채가겠지. (...)
그러나 만일 당신이 이 사회에서 당당하고도 탐구심 넘치는 '실패자'이고, 우리 같은 사람이 무수히 많다는 사실에서 모순적인 위안이라도 얻을 수 있다면, 무엇을 시도했고 지금은 왜 취약해졌는지 안다는 건 현명하고도 명예로운 일이다. 한때 빛나는 포부를 망토처럼 두른 당신을 보았지만 지금은 그저 흐린 날 어수선한 이부자리와 거친 나무 탁자에 놓인 더러운 컵들밖에 보지 못하는 이들이 주는 충격에 왜 이토록 취약해졌는지를. (143)

 

내 친구들도 만화경 같은 매일의 경험을 잘 흔들어 섞어야만 친밀함에서 오는 고통, 공공장소의 활기, 낯선 이들의 터무니없는 간섭 따위를 적당히 희석될 만하게 배치할 수 있었던 것이다. (146)

 

그 모든 일 중 무엇 하나라도 잘해낸다는 건 별생각 없이 삶과 관계 맺는 일, 다시 말해 내 두려움을 사랑했던 것 이상으로 삶을 사랑하는 일이었을 텐데, 그것이야말로 내가 할 줄 모르는 일이었다. 내가 확실히 할 줄 아는 건 몽상으로 세월 흘려보내기였다. 그저 '상황'이 달라져서 나도 달라지기를 간절히 바라고만 있는 것. (165)

 

특히나 엄마는 내게 가슴속 맺힌 한을 풀어놓느라 여념이 없다. 어떤 의미에선 이런 이웃이 우리 엄마 같은 뉴요커를 만든 셈이었고, 다른 한편으론 엄마가 한세상 내가 알아온 바로 그 여자, 고집스레 인생에 화를 내는 여자로 남아 있단 뜻이기도 했다. (168)

 

아이들이 필요로 하는 만큼의 관심을 건넬 만한 시간도 심적 여유도 없는 노동자 계급 이민자들의 자녀였던 우리는, 거리에 나와 서로가 서로에게서 끌어내는 반응 속에서 자기 존재를 감지하는 일에 온통 정신이 팔려 있었다. 우리의 놀이는 사실 진짜 놀이였다기보다 우리에게 유일하게 중요했던 그 사회의 가치와 존중이란 위계 속에서 힘과 요령, 술수와 기발함으로 매일 각자가 설 자리를 정하는 연습에 가까웠다. 길바닥 아이들의 놀이란 그런 것이었다. (174)

 

외로움이라는 습관은 질기다. 레너드 말로는 외로움을 쓸모 있는 고독으로 바꿔내지 않는 이상 난 영영 엄마의 딸일 거란다. 물론 그 말도 맞기는 하다. 사람은 이상화된 타자의 부재로 인해 외롭지만, 그 쓸모 있는 고독 속에 스스로를 상상의 동반자 삼아 침묵에 생명을 불어넣고 지각 있는 존재라는 증거를 방 안 가득 채워 넣는 '내'가 있다. 이런 통찰의 기틀을 마련하는 법은 에드먼드 고스로부터 배웠다. 그는 탁월한 회고록 <아버지와 아들>에서 아버지의 거짓을 발견한 여덟 살 아이가 내면의 혼란에 빠져드는 과정을 묘사한다. 아이는 속으로 질문한다. 아빠라고 모든 걸 아는 게 아니라면, 아빠가 아는 건 대체 뭐지? 사람들이 하는 말이랑 그 사람이랑은 무슨 관계일까? 뭘 믿고 뭘 믿지 않을지 어떻게 결정할까? 이런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아이는 문득 자기에게 말을 걸고 있단 걸 깨닫는다. (185)

외로움을 쓸모 있는 고독으로 바꿔내는 일인 독립. 

 

로다의 화법에 담긴 열정과, 피와 살이 있는 현실이 요구하는 바 사이에는 시험해본 적 없는 신념이라는 미지의 중간지대가 놓여 있다. 될 대로 되라지! 그렇게 화난 목소리로 외치기란ㅡ로다는 물론이고 우리에게도ㅡ얼마나 쉽던가! 반면에 이런 반항적 단순함을 지속적으로 약화시키는 통제할 수 없는 감정의 위력을 경험한다는 건 얼마나 호된 시련인지. 실패의 순간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가는 과정에서 로다는 그야말로 이론과 실제의 간극을 상징하는 인물이 된다. 우리 중 수많은 사람도 수시로 놓이게 되는 그 간극. (191)

 

반응형
LIST
반응형
SMALL
피아니스트의 삶이 얼마나 수련과 절제의 연속이어야 겨우 유지되는지, 그럼에도 언제라도 사다리에서 내려와야 하는 상황으로 내몰릴 수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 당신이 들려준 피아니스트의 삶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가혹했어. 아주 중요한 일이 아니면 사람 만나는 걸 자제하고 오로지 피아노 연습만 한다고 했지. 틈이 나면 악보를 공부하거나 자거나 책을 읽는 정도가 다였어. 손을 다칠가 봐 격한 운동도 제대로 하지 않았잖아. (85) 

 

사랑에 보태진 연민이라는 감정은 사람을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들어. 섬세한 당신과 기 싸움을 해서 당신을 피로하게 하고 싶지 않았어. 혹자는 내가 당신의 시무룩함을 신경 쓰고, 눈치를 보고 맞추려는 게 다 휘둘리는 거라고 손가락질하겠지. 하지만 상대에게 연민을 느낀느 순간 이미 지는 거잖아. 그렇잖아. (86)

 

'바쁘다'라는 단어를 당신이 처음 썼던 날을 기억해. (97)

 

나는 당신이 언제 시간이 날지, 아니 시간을 내줄지 알 수 없어서 그동안 출장 준비도 틈틈이 미리 해왔는데. 그래서 남아서 야근을 얼마나 했는데. 당신의 연주회, 당신의 연습에 비해 나의 일이 얼마나 밀려나 있었는데... 같은 말들이 입 안에서 감돌기만 하고 밖으로 나가진 못하고 있었어. 엄밀히 따지면 누가 그러라고 시킨 건 아니니까. (101)

 

내 바람대로 아침까지 내 곁에 있어주었음에도 나는 놀라울 정도로 황량한 기분이 들었어. 그래서 불편하게 자는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홀로 남겨진 기분을 느낀 나를 위해서 다시는 이런 무리한 부탁을 하지 말자고 다짐했지. 그런데 무리한 요구를 하지 못하는 관계는 그것대로 또 얼마나 쓸쓸할까. (114)

 

나를 잃어버리지 않는 사랑이라는 게 가능하기나 한가? (121)

 

"미안해요."

화를 내는 사람에게 미안하다는 말로 대응하면 화를 내는 이유가 없어져. 상대가 나한테 원하는 게 있을 때만 화내는 것이 효력을 발휘해. 하지만 상대가 나한테 바라는 게 더 이상 없다면 화내는 사람은 더 비참해지기만 하지. (144)

 

나를 향한 당신의 일시적인 몰입은 패배감과 불안감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함이었던 것. 마주하고 싶지 않은 시간을 다른 무언가에 몰두해서 메우고 싶었던 것. (153)

 

인간의 자기 보존 능력은 참 대단해. 그리워하는 감정이 너무 강렬해서 몸이 부서져버릴 것 같으면, 완전히 무너져 내리는 것만은 막으려고 마음이 스스로에게 이런저런 말을 걸더라.

어쩌면 나는 당신이 아니라, 사랑을 사랑한 게 아니었을까. (하지만 그 사랑은 당신이 야기한 것이지.)
 
당신은 사랑할 만한 사람이었을까. 잘 알지도 못하면서 머릿속에 그려낸 당신의 이상화된 모습을 사랑했던 것은 아닐까. (하지만 누군가가 사랑할 만해서 사랑하는 건 또 아니지 않나.)

나는 당신이 돌아오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을까. 막상 돌아오면 기쁨보다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 더 크지는 않을까. 최고의 시간은 두 번 다시 찾아오기 힘들잖아. (여우와 신 포도의 정신 승리!)

지금 이렇게 미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은 당신을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내 통제 욕구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래, 집착 말이야. 나야말로 권태로운 주변 환경으로부터 현실도피를 하기 위해 당신을 이용했는지도 몰라. 나의 공허함을 당신에게 몰입하는 것으로 메꾸려고 한 것. (사랑과 통제 욕구가 혼동되는 감정인 건 사실이지만 그렇게 내 탓으로 돌린들 뭐가 달라질까.) (158)

 

"많이 힘들었죠...?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세상의 무게가 어깨에 느껴지는 게 당연해요." 

그 여자는 내가 늘어놓은, 주관이 다분히 섞인 상황에 대해서 그 무엇도 자기 의견을 보태지 않았어. 마치 그런 건 요만큼도 중요하지 않다는 듯이.

"어떤 괴로움도 공부가 돼요. 잃는 건 없어요." (173)

 

흐릿한 희망 고문이 선명한 이별로 결론 나면 후련할 줄 알았는데, 날카로운 비수에 찔린 심장에선 콸콸 피가 쏟아져 나왔어. 당분간 만나지 말자는 말의 모호한 가능성을 끌어안고 있는 편이 더 고통스러운지, 아니면 더 이상 보지 말자는 이별을 정확하게 선고받는 쪽이 더 고통스러운지 점점 더 알 수가 없었어. (187)

 

자기 마음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내가 상대를 덜 사랑할 때만 가능한 일이 아닐까. 내가 상대를 많이 좋아하면 어쩐지 내가 늘 더 그를 좋아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고, 그러다 보면 그 앞에서 한없이 작아진다. 하고 싶지만 못 하는 말이 생기고, 하기 싫지만 해야 하는 말을 의식하기 시작한다. 진심을 드러내는 일은 불가능한 모험처럼 여겨지고, 도중에 상처를 작게라도 한번 받으면 자발적으로 눌변이 되어간다. (212)

 

그렇다 해도 사랑에는 가해자도 피해자도 없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 조금 더 혹은 덜 사랑한 사람이, 조금 먼저 사랑하기를 그만두거나, 사랑하는 마음을 멈추는 데 시간이 좀 더 걸리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213)

 

이 마음이야말로 어쩌면 사랑의 마음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사랑으로 행복했던 것만큼 사랑으로 고통을 받으면 그 낙차에 놀라서 그곳에서 빠져나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막상 그 고통이 사라지면 마냥 기분이 좋지만도 않다. 상처가 회복되기를 바라면서도 완전히 회복되어서 기억조차 남지 않는 건 또 원치 않는 것이다. 세상에, 마음 아픈 것을, 힘겹고 고통스러웠던 감각을 그리워하다니! (215)

 

 

오랜만의 임경선.
지난 언젠가 정말 내가 했던 생각과 행동 모두 그대로여서, 높이서 이전의 나를 관조하는 것 같기도 했고 또 어딘가 부끄럽기도 했다. 

오늘 퇴근하면서 앙보에게 가져다 주어야지. 

반응형
LIST
반응형
SMALL
지긋지긋한 유학 생활을 마쳐갈 때쯤 되뇌는 생각이 있다.

- 지식은 모르는 사람들과 나누는 것
- 재산은 부족한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
- 기회는 필요한 사람들에게 주는 희망
-  사랑은 대가를 바라지 않고 주는 것

이것이 지성인이라면 기본적으로 이행해야 할 의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57)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감정 병목현상에 도달했다면 당장 일시적으로 처리량을 줄이는 방법이 있다. '중요도'와 '우선순위'를 생각하여 지금 짊어진 짐 중에서 내려놓을 수 있는 것들을 포기하는 것이다. 어쩌면 병목현상이 오기까지 거절을 하지 못해서 혹은 포기하는 방법을 몰라서 계속 받아들이다 보니 처리해야 할 책임이 고조에 오른 것일 수도 있다. 거절과 포기는 연습이 필요하다. (59) 

 

솔직히 시간을 빼앗겨서 짜증이 나는 진짜 이유는 빼앗긴 시간 자체가 아까워서가 아니다. 시간이 부족하여 내 스케줄에 차질이 생기는 것이 진짜 원인이다. 낮에 해결하지 못한 일을 저녁에 잠을 줄여가며 해야 한다든지 주말에까지 일을 하게 되면서 스트레스가 쌓이게 되면 우울 모드가 축적이 된다. (71)

 

그래서 기다리는 시간을 빼앗겼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예상치 못했던 자투리 시간을 보너스로 얻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73)  

 

제니퍼가 말하듯이 나도 "그냥 힘드니까" 지금 당장 어디론가 훌쩍 떠나버리고 싶은 마음이다. 떠나면 짓눌려 있던 무게가 스프링처럼 다시 살아날 것만 같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희망사항일 것이다. 일시적인 도피를 하려다 해결의 기회를 상실할 수도 있다. 사람의 무게를 완전히 내려놓지 못하고 마음 한편에 계속 간직한 채로 살아갈 수도 있다는 말이다. 
물건에도 제자리가 있듯이, 모든 일은 결국 옳은 이치대로 돌아갈 것을 믿는다. 사람의 무게에도 제자리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도피 대신에 먼저 현실을 마주하기로 했다. (146)

 

브리아나가 매니저라는 타이틀을 그냥 얻은 게 아니듯, 무슨 일이든 처음부터 그냥 잘하는 사람은 없을것이다. 지금무엇인가 잘 안돼서 힘들다면, 그래서 포기하고 싶다면, 혹시 내가 그냥 잘되기를 바라지는 않았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그냥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냥이란 없기 때문이다. (158)  

 

그 문을 두드리기까지 망설였던 이유는 완벽히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생각해 보니 준비 과정에 완벽이란 없다. 준비는 준비일 뿐 완성을 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완벽함을 추구하려다 영원히 준비만 하다가 말것이다. (189) 

 

가끔 포기하고 싶을 때 이날 여행가방 끌어안고 울었던 날을 회상한다. 그리고 내가 정말 한계에 도달한 것인지 아직 더 해볼 여지가 있는지를 생각해 본다. 한계가 어디쯤인지 모를 때는 최악의 상황을 그려본다. 러닝머신 위에서 뛰다가 그만두고 싶으면 멈추는 순간, 뒤에서 입 벌리고 있는 악어에게 잡아먹힌다는 황당한 상상을 해본다. 그러면 잡혀먹히기 싫어서라도 조금 더 뛰게 만든다. 
정말 하기 싫은 일을 해야만 할 때는 지금 내가 납치되어 수용소에 있다고 상상해 본다. 누군가 총을 들고 지켜보는 상황에서 이 일을 꼭 해야만 한다면 어떨까. 가끔 이러한 얼토당토않은 최악의 상황에 처한 나를 상상할 때면 한계를 뛰어넘어 더 한 것도 하게 된다. 그러고는 깨닫는다. 나의 한계는 내가 정한 거였구나. 충분히 할 수 있는 거였네. 생각대로 되네? (193)

 

아무리 쉬운 일도 못할 것이라 생각하면 정말 충분히 가능한 일도 포기하게 된다. 주변에서 애들 데리고 공부를 한다는 것은 너무 힘들고 불가능하다고 하는 말에 내가 동조할 필요는 없다. '너는 못해도 나라면 할 수 있다'라고 생각하니 정말할 수 있을 것만 같이 힘이 솟앗다. 왠지 나만이 해낼 수 있는 특별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 같았다. 무언가를 포기하고 싶은 것은 진짜 한계에 다 달아서 그런 게 아니라 할 수 있는 내 능력을 의심하기 때문이다. (194)  

 

그때는 교수가 되라고 하는 남편이 정말 미웠다. 그래도 내가 교수가 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 그 신념이 참 큰 힘이 되었다. 그래서 움츠리고 있는 기간에도 높은 지점을 바라보며 뛰어오를 준비를 할 수 있었다. (214) 

 

내가 공부를 시작하니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많은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대부분 유학생 배우자였고 동반비자의 한계를 느낀 상태에서 찾아왔다. 나보다 나은 사람들이었다. 최소한 그들은 날개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최대한 진심을 담아 상담해 주고 서슴없이 자료를 공유했다. 안타깝게도 막상 공부에 도전한 사람은 없었다. 나이, 집안, 육아, 재정이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꿈이 있다면 잠시 접어두었던 날개를 다시 펴서 날갯짓을 해보길 응원한다. (227) 

 

하고싶은 게 없을 때 무기력해지게 되기 마련이다. 사실 둘러보면 늘 해야할 일들이 있다. 단지 우울모드에 들어가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고 해야 할 이유도 찾지 못한다. 그래서 평소에 매우 단순한 일이 생각날 때마다 수첩에 적어놓는다. 그리고 잠시 무기력해질때면 이때다 싶어 적어두었던 단순하고 사소한 일들을 실천한다. 가령 전등 닦기, 물 다섯 잔 마시기, 스트레칭 10분하기, 책상 서랍 정리, 창문 블라인드 달기, 문짝 손잡이 교체, 핸드폰 사진 정리, 이메일 샂게, 창틀 닦기, 화장실 서랍 저일, 두 명의 친구에게 안부문자 보내기... 
 적어두었던 일들을 보면 의욕이 생기고 움직이게 된다. 작은 일이지만 완성했을 때 느끼는 자부심이 매일 조금씩 축적된다. 여기서 배운 점이 있다. 대단한 목표만을 세울 필요는 없다. 단기간에 실천이 가능한 목표를 많이 세울 수록 목표를 달성하기가 쉽다. 그럴수록 성취감을 느끼는 빈도수가 잦기때문에 자주 기분이 좋아지고 행복해진다. 조금 더 행복해지려면 행동도 생각도 더욱 단순해질 필요가 있다. (255)

 

학생들에게, 내 아이들에게, 영상을 통해 개인적으로 연락해 오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칭찬을 하고 나면 어느새 나의 에너지가 소진되고 마는 것을 느끼게 된다. 감정 노동으로 피곤해진 상태를 영어로 'I am drained"라는 표현을 쓴다. 배수라는 뜻의 'drain'에서처럼 내 몸에서 모든 기가 다 빠져나가듯 몹시 탈진한 상태를 뜻한다. 이럴 때 급속 충전이 필요하다. "Be kind to yourself!" 나를 조금 더 돌아보며 챙겨주고, 아껴주고, 존중해주고, 칭찬해 주고, 남들에게 하는 것만큼 나에게도 친절해 보기로 했다. (중략) 그래서 주기적으로 상기시켜 줄 수 있게 알람을 맞춰놓았다.

- 6:00 굿모닝! 오늘도 잘할 거야.
- 6:30 운동하면 몸도 마음도 건강해져.
- 7:00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뭐라고 평가하든 그건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야.
- 7:30 괜찮아. 난 잘하고 있다.
- 15:30 나를 사랑하는 딸들 데리러 가기. (260)
반응형
LIST
반응형
SMALL
토니는 매일매일 내 옆에서 같이 걸으며 나에게 용기를 주려고 애썼다. 부모님은 나를 달래서 학교에 보내는 것을 이미 오래전에 포기했지만 토니는 내가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고 끊임없이 말해주었어. 그 시절에는 그런 사람이 아무도 없었단다, 용기를 주고 응원해주는 사람 말이야. 정해진 길을 가라고 윽박지르기만 했지.하지만 토니가 해준 말 덕분에 나는 매일 학교에 가서 그 암흑을 견딜 수 있었다. 답을 몰라 머릿속은 텅 빈 느낌이었지만 말이다. 짐작하겠지만, 난 토니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어. 나도 내가 정말 멍청하다는 걸 잘 안다고 토니에게 알릴 수는 없었어. (51)

 

"곧 와요, 금방 올 거예요." 그러면 어머니는 만족스럽게 등을 기대고 앉았지만 이초가 지나면 또 물었지. "토니는 어디 있니?" 어머니를 더 일찍 데려가는 게 더 자비로운 처사였을 거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제정신으로 지냈던 세월 동안 어머니가 남편의 죽음을 어떻게 견뎠을까 궁금하구나. 나는 가장 가까운 사람을 잃고 어떻게 견디느냐고 어머니에게 한 번도묻지 않았어. 어머니라는 사람을, 어머니의 인간적 단점을 전부 받아들여준 사람을. 어머니를 조건 없이 사랑했던 사람을. 언제나 팔을 뻗으면 손을 잡을 수 있었던 사람을. 물어봤으면 좋았을 걸 그랬다. (85)  

 

"음주는 상실에 대처하는 방법이 못 돼요, 해니건 씨." 그가 대답했지.
상실ㅡ그 의사가 그것에 대해 뭘 알겠냐? 세상에, 테일러는 이제 겨우 기저귀를 뗐어. 그가 겪은 상실에 가장 가까운 경험은 아마 동정을 잃은 거겠지, 그럴 나이는 됐나 모르겠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기 전까지는 아무도, 정말 아무도 상실을 몰라. 뼈에 달라 붙고 손톱 밑으로 파고드는 마음 깊이 우러나는 사랑은 긴 세월에 걸쳐 다져진 흙처럼 꿈쩍도 안 한다. 그런데 그 사랑이 사라지면... 누가 억지로 뜯어간 것 같아. 아물지 않은 상처를 드러낸 채 빌어먹을 고급 카펫에 피를 뚝뚝 흘리며 서 있는 거야. 반은 살아 있고 반은 죽은 채로, 한 발을 무덤에 넣은 채로 말이다. (264)  

 

또다시 외로움, 우리 유한한 인간에게 난동을 부리는 그 빌어먹을 외로움. 외로움은 그 어떤 질병보다도 나빠서 자는 동안에는 뼈를 갉아먹고 깨어 있을 때는 우리 마음을 괴롭힌다. (297)
반응형
LIST

'::: >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 하지 못한 말 :: 임경선  (1) 2024.04.16
나에게 솔직해질 용기 :: 박성옥  (0) 2024.04.15
적당한 실례 :: 양다솔  (0) 2024.04.11
이처럼 사소한 것들 :: 클레어 키건  (0) 2024.03.10
삶의 발명 :: 정혜윤  (3) 2024.03.06
반응형
SMALL
시간이 갈수록 맛이 좋아지지만, 단순히 시간만 지난다고 해서 맛있어지지는 않는다. 적절한 환경에서 충분한 시간을 견딘 차는 빛을 발하지만, 안 좋은 환경에서 보관한 차들은 그렇지 못하다.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당연히 훌륭한 어른이 되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마치 사람처럼 스물부터 예순까지 가장 맛있게 무르익고, 이후엔 맛이 떨어지기 시작해 백 년이 넘은 차는 마시지 않는다. 또 하나의 흥미로운 사실은 너무 적은 양의 차를 따로 오래 보관하면 그 맛과 생명력을 잃어버린다는 점이다. 하물며 차도 혼자 떨어져 있으면 살 수 없다는 것이다. (27)

 

오른손잡이가 왼손으로 그린 그림처럼 엉망이었다. 쓰면 쓸수록 내가 실패하고 있다는 것만 제대로 알게 될 뿐이었다. 나를 쓰는 일도 자꾸 실패하는데 남은 어련할까. 그러니 계속 쓰려는 마음은 실패를 맞이할 수밖에 없다.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전제한다. (33)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만 마을 하나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풍요로운 삶을 위해 누구에게나 마을이 필요하다. 한 지붕 아래서 큰일이 나면 뛰쳐나갈 다른 지붕이, 함게 먹고 입고 사는 사사로운 이야기를 나눌 말벗이, 위험을 헤쳐 나가고 문제의 대안을 고민할 팀이 필요하다. (47)

 

종일 한 글자도 못 썼는데 잠이 올 리가 없다. 빈 화면을 앞에 두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다. 떠오르는 문장이 모두 지루하고 낡게만 느껴진다. 문자들이 모래처럼 부서지고, 화면이 폭포수처럼 쏟아지고, 미래는 폭풍우처럼 휘몰아친다. 당장 한 글자도 쓰기 어려운데 앞으로는 어떤 걸 쓸 수 있을까. 빈 문서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모두 보이는 것 같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산에 숨어 살고 싶다. 스르르 잠에 들어서 영원히 깨고 싶지 않다. 그렇게 온몸의 세포가 격동하고 있는데도 겉으로는 땀 한 방울 나지 않는다. 여전히 아무것도 해내지 못한 사람이다. (50) 

 

한번 쌓인 내공과 요령은 배신하는 법이 없었다. 일이 완전히 몸에 익으면 몸은 일하게 두고 영혼은 어디로든 떠날 수 있었다. 일과가 끝나면 몸은 피곤했지만 마음은 깔끔했다. 밥도 맛있었고 잠도 달았다.
그러한 신성한 반복이 글에서는 종말과 같은 것이었다. 어제의 나를 반복하는 것은 어떤 것보다 경계해야 할 일, 동어 반복은 작가가 할 수 있는 최악의 것이었다. 매번 백지 앞에서 길을 헤맸다. 헤매는 것 자체가 글의 본질이었다. 종일을 매달려도 개운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몸이 자유로워도 마음은 어딘가에 결박된 듯이 초조했다. (51)  

 

침대에 누운 채로 멍하니 천정을 바라보았다. 가장 먼저 떠오른 얼굴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것은 친구도 아니요, 엄마도 아니었다. 바로 친구의 엄마였다. 나에겐 아주 작은 힘이 필요했다. 꿉꿉한 방에 창문을 열어 환기를 하듯 타인이 가져다주는 산뜻함이 필요했다. 너무 지쳐서 말 한마디 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을 땐 누군가 어깨를 톡 건드려주는 것만으로도 다시 고개를 들고 몸을 일으킬 힘이 생기곤 했으니까. (87) 

 

맛있다는 것은 때로 몸과 마음을 삶으로 완전히 불러냈다. 그럴 수 있을 만큼 강했다. 내 손이 그런 밥상을 차릴 수 있다는 것이 때로는 무적처럼 느껴졌다. 내 속을 채우고 데우는 음식을 만들고, 나를 살려내는 것이 여전히 가능했다. 어렵고 힘들 때일수록 부엌에 있었다. 그곳에서 가장 단순해졌다. 나는 살고 싶고, 그것도 아주 맛있게 살고 싶어서 거기 있었다. (중략) 배가 든든하게 불러오고 등줄기로 땀 한 줄기가 훅 흘러내릴 즈음, 얼굴은 새것처럼 반질반질 윤이 날 것이다. (89) 

 

수백 번 달려나갔을 마음과 한없이 더디기만 한 몸, 순간에 벌어졌다가 사라지는 문의 틈새 같은 것이 눈앞에 떠올랐다 사라진다. 
"하루 종일 문이 열리길 기다린 사람이 그걸 놓쳤을 때 눈빛이란, 도저히 쳐다볼 수가 없어." 
말을 하는 엄마의 목소리가 꼭 그 눈을 앞에 둔 것처럼 무너진다. (138)

 

"어떤 사람은 지금 집에 세 살짜리 애가 혼자 있다고, 자기가 얼른 가서 봐줘야 한다고. 막 다급해. 빨리 가야 하니까 어서 문 열어달라고."
엄마는 뜸을 들인다. "그 애가 세 살이었던 때의 기억만 머릿속에 살아 있는 거지."
엄마는 조금 더 천천히 말한다. 우리는생각에 잠긴 듯 잠시 말이 없다. 나는 어떤 기억은 살고, 어떤 기억은 죽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아, 그런데 매일 문 앞에서 기다리던 그 아저씨가 이제는 침대에 누워만 있어."
침대 위에 수평으로 포개어진 한 늙은 남자의 몸을 떠올린다. 그것은 절망의 모양과 비슷할까. 그것을 방 안에 앉아 있는 내 모습과 나란히 두어본다. 아저씨가 그토록 원하는 밖으로 나가서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일까. 밖이 있다는 확인일까. 밖으로 갈 수 있다는 확인일까. 
나는 묻는다. "엄마는 어떤 기억이 살아남을 것 같아?" 
노인과 대화를 하다 보면 깨닫는 사실이 있다. 이 이야기를 열 번 정도 더 들은 적이 있다는 것. 그러나 여전히 노인의 얼굴은 생생하기만 하다. 영화처럼, 돌림노래처럼 정해진 레퍼토리와 멜로디가 반복되는 동안, 나는 훗날 내가 어떤 이야기를 돌려 부르게 될까 상상해 보고는 했다. 지금 이 순간 나에게 과거는 지나간 것일 뿐이고, 어떤것이 특별히 크거나 작다고 느끼지 않는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어떤 시기를 그토록 강렬하게 기억하게 될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140)   

 

엄마와 내가 이렇게 다른지 몰랐다. 불쑥 불쑥 엄마와 불통하는 순간, 가장 자주 들었던 감정은 놀랍게도 '귀찮음'이었다. 
바야흐로 좋아하는 것만 보고 살 수 있는 세상이다. 이제 나와 다른 존재를 마주치지 않아도 된다. 알고리즘은 입안의 혀처럼 내가 원하는 것을 알려준다. '말하지 않아도' 나보다 내가 원하는 것을 더 잘 파악한다. 기분 나쁘고, 다르고, 불편한, '보기 싫은' 것들은 손가락으로 '관심 없음', '싫어요'를 누루는 것으로 쉽게 치울 수 있다. 시선은 초 단위로 나뉘어 기록되고, 클릭 몇 번은 다음을 결정하는 근거가 된다. 결정할 것은 점점 더 줄어든다. 하나의 거대하고 확고한 선호를 만든다. '눈빛만 봐도' 알 수 있게 된다. 나와 다른 언어를 쓰고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을 만나는 불편함, 갈등은 사라진다. 어쩌다 나와 완전히 다른 언어를 가진 사람을 만나면 문득 말문이 막힌다. 나와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을 좀처럼 마주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이 평소에 당연하게 생각해 온 신념, 사용해 온 언어들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타인이 이 세상에 가득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럼 어디서부터 말하기 시작해야 할까. (162) 

 

가끔 궁금했다. 길을 걷다가 오줌이 마려우면 그 자리에서 바지를 내리고 쌀 수 있는 삶이. 웃통을 벗으면 등목을 해주고, 아랫춤을 벗어던져도 모든 사람이 이해하고 타이르는 삶이. 노팬티나 노브라로 밖에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수많은 고민과 자기검열에 휩싸이는 친구들을 보며 생각했다. 우리와 그들은 얼마나 다른 세계에 사는가 하고. 길에서 아무렇지 않게 오줌을 싸는 상상을 했다. 온 세상이 나의 화장실이라니. (218) 

 

오래전 일인데도 어제 겪은 것처럼 끔찍하게 생생했다. 슬픔에 뿌리를 둔 것들은 그랬다. (224)

 

엄마의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 희망이었다는 사실을 하나씩 확인할 때마다 나는 헛웃음이 났다가 나중엔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삶은 아주 작은 몇 가지 변수만으로도 쉽게 무너져 내릴 수 있음을 목격하고 있엇다. 어떤 사람은 하루에 버스가 두 번 오거나, 재봉틀이 너무 크고 무겁거나, 옷에 구멍이 나지 않거나, 몇 년 일찍 태어났다는 이유 정도로 망할 수 있었다. 그런 사소한 변수들로도 지각변동을 맞을 수 있는 것이 가난이었다. (227)

 

무대 위 코미디언의 말이란 오래 길들인 무사의 칼처럼 날카롭게 반짝인다. 말함으로써 다시 생을 다짐하는 강인한 생명력이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그가 지금 막 떠오른 것을 마구 떠드는 것처럼 보일 테지만 말이다. (270)

 

그렇게 노래 두 곡을 들고 오는 대신 무언가를 두고 왔다. '왜 보잘것없는 저 따위를 보러 오셨나요'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 같은 것을. 그것이 나를 낮추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나를 보러 온 사람마저 낮추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283)

 

넓고 넓은 유튜브에서 이런 수상한 영상을 함께 보다니. 이순와 나는 깔깔 웃는다. 이런 의외의 공통 시청 기록을 발견하는 것은 21세기의 우정이 누릴 수 있는 작은 기쁨이었다. 모두 각자의 취향과 알고리즘 안에 꼭꼭 숨어 사는 시대의 흔치 않은 우연이었다. 이 감정을 반가움이라고만 불러야하나 아리송했다. 반가움과 기쁨 사이 어딘가에 이를 위한 새로운 단어가 필요했다. (293) 
반응형
LIST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