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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본질은 불가능을 '실현'하는 일이 아니라 '시도'하는 일이라 믿는다. 보여지지 않았던 것을 보이게 하는 것, 말해지지 않았던 것을 말하게 하는 것은 글을 쓰면서 품게 된 꿈이다. (10)

 

'평범하지 않음'은 '특별함'이나 '비범함'일 수도 있고 '비보편성'이나 '소수성'일 수도 있다. 딸이 평범하게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에는, 선구적이고 투쟁적인 사람으로서 질투와 공격의 대상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과 소수자로서 차별과 배제의 대상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공존하는 듯하다. 평범해지고 싶은 소망, 혹은 스스로가 평범하다는 믿음의 기저에는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삶에 대한 갈망, 정상성과 표준성에 대한 강박, 비주류에 대한 두려움, 심지어 혐오가 자리하는지 모른다. (39)

 

다 포기하자, 다 내려놓자, 그렇게 생각하니까 평상심을 유지할 수 있었어. 그전에는 하루에도 열두 번식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기분이었거든. 내가 상처받지 않으려고 무심해진 건데 사람들은 몰라. 그저 좋은 며느리, 좋은 아내인 줄 알아. 사실은 내가 살려고 애정도, 관심도, 기대도 다 놓아버린 건데. (63)

 

후일에야 내가 겼은 일들의 '이름'을 알았지만 당시에는 이름을 몰랐으므로 이해하지 못했고, 이해하지 못했으므로 제대로 저항하거나 거부하지도 못했다. 리베카 솔닛은 말했다. "무언가를 정확한 이름으로 부르는 행위는 무대책, 무관심, 망각을 눈감아주고, 완충해주고, 흐리게 하고, 가장하고, 회피하고, 심지어 장려하는 거짓말들을 끊어낸다. 명명은 해방의 첫 단계다." (75)

 

감정적인 것을 여성의 영역으로 여기는 사회에서 남성은 여성보다 무감각하게 사회화된다. 타인에게 침묵할 뿐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본연의 자아에 대해 침묵한다. 남성다움에 사로잡힌 이가 생각과 감정을 자신에게든 타인에게든 '구구절절하게' 이야기하지 않는 이유는 내면을 드러내는 것이 나약함, 즉 여성성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가부장적 사회에서 남성은 나약함을 통제당하지만, 캐럴 길리건이 간파했다시피 "한때 여성의 것이었던 연약함은 인간의 특성"이다. 약함은 여성다움이 아니라 인간다움이다. (84)

 

여자에게 불리하거나 위험한 세상은 잘못되었다는 생각, 성별로 한계를 규정지으면 안 된다는 생각. 그러면서도 너희가 딸이라서 '걱정'스러웠고 늘 '조심'시켰지. 여자가 여자를 키우는 데에는 그런 모순이 있는 것 같아. (93)

 

요즘은 텔레비전에 나오는 육아 프로그램을 자주 봐. 반성하고 또 반성해. 너무 무지했구나. 너희는 어른이 되었고 나는 노인이 되었어. 이제 나는 너희를 키우지 않지. 그래도 육아 프로그램은 자주 보고 있어. 지금이라도 알아야지. 좋은 엄마가 되어야지. 다시 너를 키운다면 네 이야기를 더 많이 들어주고, 칭찬해주고, 안아줄 텐데. 잘하고 있다고 자신감을 북돋워줄 텐데... 산다는 건, 세상과 부딪친다는 건 자신감이 점점 꺾이는 일인데... 네가 피기도 전에 내가 꺾어버린 것 같아. (96)

 

얼마 전에 통화하다가 네가 10대 시절에 힘들었던 일을 이야기한 적이 있지. 나는 왜 그 당시에 이야기하지 않았느냐고 물었지만, 사실은 알아. 네가 어떻게 나를 믿을 수 있었겠니. 나를 신뢰하며 네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었겠니. 너는 엄마를 강요하고 지시하고 야단치는 사람으로 여겼을 거야.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야. 나쁜 일이 생겼을 때, 상의할 사람이 필요했을 때, 그 순간을 혼자 감당하며 외로웠을 너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다. (106)

 

엄마가 분노했던 진짜 이유는 내가 남자아이를 만났기 때문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분노의 핵심은 딸에 대해 모르고 있다는 사실, 딸이 자신이 알던 그 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이었으므로, 엄마는 배신감에 휩싸인 채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라는 말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다만 내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그 아이'가 사라졌다는 상실이 왜 하필 "배신감"으로 나타났는가 하는 점이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시몬 드 보부아르의 글에서 단서를 찾았다. 

다행스럽게도 사내아이는 (어머니의) 이런 지배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다. 풍습이나 사회가 이를 격려한다. 어머니 자신도 체념한다. 그녀는 남자에 대항한 싸움이 승산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녀는 비애의 어머니 역할을 하거나, 자기를 이기는 한 명의 승리자를 낳았다는 자존심을 되새기면서 자신을 위로한다. 여자아이는 그보다 더 전적으로 어머니에게 넘겨진다. 그 때문에 어머니의 주장은 강해진다. 그녀들의 관계는 훨씬 더 극적인 성격을 띤다. 어머니는 딸에게서 선택된 계급의 일원 같은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분신'을 찾는다. 그리고 자기 자신과의 관계의 모호성을 딸에게 모두 투사한다. '이 분신의 이타성이 확립되면 그녀는 배신당했다고 느낀다.' (109)

한참을 읽었던 부분. 나도 엄마도, 그랬다. 

 

더는 나의 말과 몸을 실패작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여전히 그랬다면 나의 실패를 엄마의 실패(또는 엄마가 실행한 양육의 싪채)로 바꿔치기했을 것이다. 세상은 한 사람의 성패를 자주 어머니의 공과로 치환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명문대에 입학한 자식의 어머니에게 비결을 듣고 싶어 한다. 반면 어떤 의미로든 패배했다고 여겨지는 이의 어머니는 이야기할 수 없을뿐더러 실패의 책임을 떠안는다. 엄마는 나의 콤플렉스에 책임감을 느낀다. "그때 병원에만 안 데려갔어도..." "발레만 안 시켰어도..." 내가 우울증이 심해지면 엄마는 갑자기 태교 이야기를 한다. "임신 기간 동안 스트레슬르 너무 많이 받아서..." 내가 자신감을 잃으면 엄마는 오래전 나를 질책했던 일을 떠올린다. "너를 너무 억눌러서..." 엄마는 과거에 옳다고 믿었던 양육 방식이 지금은 비판받고 있다는 데 자책하고, 나의 문제가 자신에게서 비롯했다고 생각하며, 이제라도 '더 나은 엄마'가 되겠다고 다짐한다. (123)

 

우리는 세계의 실패를 직시하는 대신 그 실패를 어머니라는 개인에게 떠넘김으로써 근본적 원인을 은폐한다. 어머니도 다른 모든 이와 마찬가지로 실패하는 존재임에도 부룩하고. 나처럼, 모든 사람처럼, 한때는 미숙했고 영원히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한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125)

 

자식에게 상처를 주는 어머니가 있다는 사실과 별개로 '어머니다움'에 대한 정의는 일종의 신성이다. "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기에 어머니를 만들었다."라는 말처럼 이상적 어머니상은 신에 필적하기에 모든 어머니는 실패한다. 반드시 실패한다. 어머니가 '실패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우리는 어머니에게 불가능한 요구를 계속할 것이다.
엄마와 나, 모성과 사회의 관계에 대해 조금이나마 이해하려고 엄마가 나에게 요구한 것과 더불어 내가 엄마에게 요구한 것을 돌아본다. 나는 엄마가 '언제나' 나를 사랑하기를 원했다. '무조건' 지지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나도 엄마를 '언제나' 사랑하지는 않았다. '무조건' 지지하지도 않았다. 누구도 타인을 '언제나' 사랑하거나 '무조건' 지지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엄마는 나의 10대 시절에 관해 이야기하며 몇 번이나 사과했다. 엄마가 가장 미안해하는 것은 나를 미워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진실은 다음과 같은 구절에 있다. "엄마도 아이를 사랑한다. 하지만 핵심은 이것이다. 증오도 사랑의 일부다." 엄마의 이야기가 죄책감에 대한 회고로서 고해성사의 성격을 띠는 것은 우리가 단일한 모성 신화의 세계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 신화의 세계에서 엄마는 '언제나' 아이를 사랑하고 헌신하고 희생한다. 그곳에는 미워하는 어머니도, 실패하는 어머니도 없다. (128)

 

일반적으로 성폭력을 전쟁이라고 부르지 않지만, 이 폭력의 본질은 국경을 침범하고 영토를 강탈하는 전쟁과 같다. "강간이란 어떤 남자의 공간적 권리가 어느 여자의 몸 내부까지 미친다고 주장하는 일이 아니겠는가?" (152)

 

장소는 공평하지 않다. 누군가가 범죄의 가능성을 떠올리는 곳에서 누군가는 아무것도 상상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곳에서 해야 하는 본연의 행위만을 생각한다. 배설, 이동, 걷기처럼. (153)

 

아름다움의 신화가 등장한 것은 여성을 가정 안에 묶어놓으려는 여성성의 신화가 기세를 잃었을 때, 그리하여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활발해졌을 때다. 아름다움의 신화가 여성성의 신화를 대체한 셈이다. 신화는 대체될 뿐 사라지지 않는다. (157)

 

울프의 말을 빌려 이제라도 그의 주장에 반박하자면 아름다움은 사랑, 섹스, 연애, 예술과 상관없이 "원래 여성의 영역을 구성하는 요소인 양 가장하고 나타난, 다른 어떤 것들보다 여성을 가두기에 좋은 사회적 허구"다. 그것은 진화와도 무관하다.(159)

 

베티 프리던이 20세기 중반의 미국 여성이 겪고 있다고 지적했던 문제를 21세기 초반 50대에 들어선 한국의 가정주부가 겪고 있던 문제에 대입할 수 있을까? 미국 교외의 멋진 주택에 사는 여성들. 서너 명의 아이를 키우며 인테리어, 가정용 가전, 빵 굽는 법에 관심을 쏟는 여성들. 건강과 아름다움, 남편과 아이, 살림과 사교 모임이 중요한 화제인 여성들. 남편의 출근길을 배웅하고 스테이션왜건이 아이들을 태워 학교에 데려다주는 여성들... 1950년대 미국에서는 이 같은 이미지가 완벽한 여성상으로 유표되고, 심지어 영속적 여성상으로 믿어졌다. 그러나 같은 시기, 이 여성상에 부합하는 수많은 여성이 원인 모를 불안감과 우울함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들은 이토록 완벽한 생활에 만족하지 못하는 자신들에게 잘못이 있다고 생각했기에, 무엇이 문제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기에, 이런 속내를 입 박에 꺼내는 순간 여성성이 의심받을 것을 염려했기에 이 화두는 오랫동안 그들의 내면에 묻혀 있었다. 프리던은 이 문제를 '이름 붙일 수 없는 문제'라고 이름 붙였다. (201)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가끔 엄마가 스스로에 대해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어버렸다고 말할 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씁쓸한 표정으로 "이 나이가 되도록 이룬 게 하나도 없어."라고 말할 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엄마 세대의 많은 여성(또한 내 세대의 여성)이 겪는 '이름 붙일 수 없는 문제'는 교육을 많이 받아서도 아니고 가사노동이 너무 힘들어서도 아니다. 구속하는 시어머니, 바깥일로 바쁜 남편, 떠나버린 자식만이 허탈감과 억울함과 상실감을 주는 것도 아니다. 여기에는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2005)

 

수많은 어머니가 딸에게 하는 조언, "너는 엄마처럼 살지마.", 수많은 딸이 어머니를 보며 하는 다짐, "나는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말은 '내면의 목소리를 들으라'는 구호처럼 들린다. 또한 전형적 여성상에서 벗어나려는 딸이 가장 먼저 부정하는 대상이 어머니라는 의미로, 어머니도 자신에 대한 딸의 평가 절하를 묵인한다는 의미로 들린다. 나는 엄마처럼 살지 않기를 다짐하면서, 엄마처럼 살기를 소망한다. 전자의 다짐은 엄마가 처했던 현실을 계승하지 않겠다는 의미이고, 후자의 소망은 그 현실에서 고유성을 지키려 애썼던 엄마의 정신을 상속하겠다는 의미다. (211)

 

나의 일상은 그 끊임없는 반복성 속에 위치하지만, 엄마의 정신적 상속자로서 나는 상처를 언어화하면서 강해진다. "힘든 순간을 어떻게 극복했어?"라는 질문에 "살아가는 거야, 극복하는 게 아니라."라고 대답하는 엄마에게서 상처를 극복하지 않고 살아갈 가능성을 발견한다. 극복의 서사가 승리하는 자, 성공하는 자의 이야기라면 우리의 이야기는 극복하지 않고도 살아가는 자, 상처에 의해, 상처와 함께 살아가는 자의 이야기일 것이다. (213)

 

엄마가 떠나고 알았어, 시어머니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없는데 엄마에 대해서는 아는 게 거의 없다는 걸... 엄마와 딸은 서로를 잘 알 수 없는 것 같아. 두 사람이 같이 지내는 건 딸이 어리거나 젊을 땐데, 그 시절엔 엄마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거든. 자기 문제에 몰두하는 시기니까. (중략) 딸들은 자기가 보는 엄마밖에 몰라. (233)

 

한동안은 엄마가 없구나, 생각해도 많이 슬프지 않았어. 몇년 동안 고생하셨으니 차라리 돌아가신 다음이 더 편하지 않을까 싶고. 엄마와 살았던 기간이 유년의 몇 년밖에 안 돼서 그런지도 모르지. 이제 나는 너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만, 엄마와는 그랬던 적도 없고 앞으로도 그럴 수 없어. 내가 슬픈 건 엄마와의 추억이 떠오를 때가 아니야. 추억할 게 없다는 걸 깨달을 때야. 나는 엄마가 어떤 사람인지조차 몰라. 엄마에 대해 기억나는 것도, 이야기할 수 있는 것도 없어. 돌아가셨을 때는 별로 슬프지 않았는데, 요즘은 엄마를 생각하면 너무 슬퍼서 눈물이 나. 내가 엄마에 대해 이야기하지 못하면 누가 엄마에 대해 이야기할까? 엄마의 이야기가 남아있지 않으면 누가 엄마를 기억해줄까? (236)

 

여성 건강 전문가인 크리스티안 노스럽은 "완경기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의 엄마 역할을 하는 시기"라고 말하고, (251)

 

노년 여성은 성 이데올로기의 측면에서 무성으로 간주되는 동시에, 노동의 영역에서는 여전히 강력한 여성성을 수행한다. 이 양가적 정체성은 현실에서 안전과 돌봄의 문제로 직결된다. (251)

 

노년에 이르러서도 여성이 해방될 수 없는 것은 돌봄의 책무다. 그것은 자녀를 양육하고 부모-시부모를 봉양하고도 돌봄노동이 여전히 끝나지 않았음을, 손주를 돌보고 남편을 돌보고 종국에는 홀로된 자신까지 돌본 뒤에야 죽음과 함께 이 노동이 끝나리라는 의미처럼 들린다. (253)

 

질병을 불운한 일, 개인적 문제, 예외적 사건으로 여길 때 늙고 아픈 이는 공동체에서 추방되어 고립된다. 늙음과 질병은 대다수에게 예견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모두에게 언젠가는 도래할 미래라는 자명한 사실은 잊힌다. (255)

사회적 약자 수업에서 사용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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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당신이 심연으로 추락하는 것처럼, 나는 고립으로 추락한다. 어둡고 비자발적인 추락은 가속이 붙어, 내가 저지하기 거의 불가능한 상태가 된다. 나는 혼자 있기를 선택하고, 그 선택을 연속 열 번이나 열다섯 번이나 스무 번쯤 하고 나면, 더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16)

 

친구는 중얼거렸다. "늘 혼자 있다니. 얼마나 즐거울까." 
글쎄,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내가 누리는 이런 수준의 고독이 즐거운 것은 사실이다. 사치와 안도감이 있다는 것도, 엄청난 자유가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친구가 잠시 벗어난 시간과 혼자 있는 시간을, 쉴 시간과 빈 시간을, 고독과 고립을 헷갈리고 있다는 것도 안다. 마치 내가 일하지 않는 동안은 만면에 미소를 띠고 집 안을 어슬렁 거리며, 빵을 굽고, 끝도 없이 거품 목욕을 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친구는 이 시간에서 끝없는 평온과 고요만을 보았다. 나로 말하면, 이 시간에서 그보다 좀 더 걱정스러운 것, 그보다 분명 더 어려운 것을 본다. 내가 이렇게 많은 시간을 혼자 보내는 것은 그 시간을 늘 혹은 틀림없이 즐기기 때문이 아니다. 내게 그런 시간이 필요한 것 같기 때문이다. (17)

 

고독은 우리를 보호해주는 형제, 아니면 연상의 친한 친구와 같다. 너무 잘 알기에 침묵조차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다. 고독은 기분 좋은 메시지를 속삭이며 우리를 달랜다. '여기 앉아, 긴장 풀어, 정신없는 일에서 잠시 벗어나렴. 넌 그래도 돼.' 그러나 고립은 고독의 사악한 쌍둥이, 아니면 못된 친척이다. 그것은 예고도 없이 들이닥쳐서 우리를 비난하기 시작한다. (21)

 

혼자 있는다는 것, 그 모든 다양한 형태는ㅡ혼자 살거나, 싱글이거나, 배우자나 가족이나 친구들과 떨어져 지내는 시간을 갖거나ㅡ연습이 필요한 기술이다. 고독은 어려운 일이다. 자신을 돌볼 의욕이 있어야 하고, 자신을 달래고 즐겁게 하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사교적인 생활을 가꾸는 것도 역시 어려운 일이다. 위험을 감수해야 하고, 기꺼이 취약해질 줄 알아야 한다. (25)

 

그리고 침묵을 메우는 데는ㅡ한가한 잡담을 나누든 진심으로 관계를 맺는 대화를 나누든ㅡ노력이 든다. (37)

 

웬디는 조용한 삶과 공허한 삶을 잘 구별하지 못하고, 내 생활 양식이 심란하다고 여긴다. 내가 주말 계획을 얼버무리면, 웬디는 마치 내가 48시간 동안 세상과 단절되어 슬프게 지낼 거라고 예상하는 듯이 은근히 불편해하는 표정을 떠올린다. (중략) 나는, 홀로 걸어가며 속으로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는 나는, '우리의 나라'에서 살아가는 외톨이 은둔자다. (44)

 

홀로 있는 상태는 개성의 온상이고, 나는 홀로 있는 상태가 그렇게 변덕을 맘껏 발산하도록 해준다는 점이 좋다. (47)

 

하지만 이런 수준의 친밀감에는 대가도 따른다. 예를 들면, 우리는 둘 다 다른 인간 관계들이 완벽하지 못한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나는 모든 우정이 리베카와의 우정처럼 깊게 연결된 느낌이리를 바라고, 모든 애인이 리베카처럼 내 마음의 기복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리기를 바라는 경향이 있다. 나는 남자친구들에게 아주 가혹하다. 뭐? 내 마음을 읽는 법을 몰라? 꺼져! (59)

 

요즘은 레이다가 더 나아졌고, 불만족의 문턱값도 훨씬 더 낮아졌다. 잘되지 않는다 싶으면ㅡ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던 사람이 알고 보니 나와 너무 다르다면, 서로의 가치와 감수성과 욕구와 목표가 너무 상이하다면ㅡ나는 그를 목록에서 지워버린다. 그런 결정을 늘 엄청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건 아니지만, 우정에 대한 기준이 예전보다 훨씬 더 명확해졌으며 우정에 대해서 내가 좀 더 시니컬해졌다. 우정은 아주 어려울 수도 있고 아주 덧없을 수도 있다. 영혼의 짝을 찾아내고 그 사람에게 헌신하는 데는ㅡ관계를 성장시키고, 어려운 시기를 견디고, 필연적인 실망을 극복하는 데는ㅡ 시간 면에서나 감정 자원 면에서나 적잖은 투자가 든다. (70)

 

그런데도 환상은 남아 있다. 완벽한 사랑. 완벽한 친밀감. 합일과 독립성과 성애와 우정이 하나로 합쳐진 관계. (74)

 

사랑받는 느낌이란ㅡ진정으로 사랑받는 느낌이란ㅡ일종의 균형이 필요한 일이다. 그 느낌은 상대와 내게서 절반씩 생겨나야 한다. 사랑은 솟구쳤다가 가라앉았다가 하는 역동적인 감정이다. 가끔씩 밀려드는 의문과 실망과 애매함의 파도는 사랑의 자연스러운 물결에 반드시 있기 마련인 그 일부이다. (81)

 

내가 그런 언쟁에 대해서 놀라는 점은, 가벼운 짜증이나 약간의 의견 차이를 표현하는 것만으로도 파국적 결과가 올 수 있다는 듯이 그런 것이 위협적으로 느껴진다는 점이다. 어쩌면 여자들의 관계에는 어머니의 사랑을 연상시키는 무언가가 작동하는 게 아닌가 싶다. 여자친구들 사이의 친밀감과 따스함과 애정은 최초의 중요한 유대감이었던 어머니와의 유대감에 필적하는 것을 넘어서 그것을 능가할 수도 있는 듯싶다. 우정에는 우리가 어머니와 나눴던 친밀감보다 더 평등하고 어쩌면 더 풍성할지도 모르는 친밀감을 안겨줄 가망이 있기 때문이다. (100)

 

아무리 똑똑하고 강한 여자라도, 이성과의 관계는 '중요하지만' 동성과의 우정은 부수적일 뿐이라는 생각,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공허를 채우고 존재 가치를 입증해 주는 건 연애 관계의 사랑이라는 생각을 스스로 바로잡는 데 기나긴 세월이 걸릴 수도 있다. (102)

맞아!!!! 

 

다 큰 여자 둘이서 세상을 함께 걸어나갈 때 드는 놀랍도록 따뜻하고 자유로운 기분, 그것이 선물이었다. (103)

 

이런 두려움은 이해할 만하다. 부모가 죽음을 생각하면서 자기 자신의 두려움을, 자신이 무섭게도 '고아'가 되리라는 데 대한 두려움을 함게 떠올리지 않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죄책감은 왜 드는 걸까? 내 친구들이 자기 부모가 약해지는 것을 (혹은 슬퍼하거나 외로워하거나 아파하는 것을) 보게 될 가망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들의 얼굴에는 거의 늘 자신이 방금 범죄를 저질렀다가 붙잡히기라도 한 양 경악한 표정이 떠올라 있다. 
이런 죄책감의 일부는 이기적 충동에서 나올 것이다. 부모가 아픈 상황을 떠올리다 보면 부모가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상황이 떠오르는 법이고, 역사상 가장 오냐오냐 떠받들리며 자란 세대라고 할 수 있는 우리 세대에게는 그 상황이 그렇게 간단히 여겨지지 않는다. 솔직히 우리는 미래를 그릴 때 자신이 어떨지 상상하는 데 익숙하지, 남들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 상상한느 데는 익숙하지 않다. 
따라서, 아프거나 혼자된 부모가 자신의 미래 계획에 깔끔하게 맞아 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우리는 기분이 나빠진다. (121)

 

우리가 가까운 사람이 죽었을 때 맨 처음 알게 되는 사실 중 하나가 바로 이것, 다른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 문화는 죽음을 끔찍하게ㅡ지독하게ㅡ잘못 다룬다. 상을 당한 사람에게 주는 휴가는 보통 사흘. 그 후에도 6주쯤은 사람들이 당신을 조심조심 대하고, 너무 많은 걸 바라지 않으면서 부드럽게 대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당신에게 공식적으로 주어진 애도 기간은 끝난다. 이후에는 사무실에서 멍하니 앉아 있거나 하루에 세 번씩 빨개진 눈으로 화장실에서 나오는 것이 부적절하게 느껴진다. 다시 정상적으로 행동하고 정상적으로 느껴야 할 듯한 압박이 든다. (130)

 

나는 그 방에 들어갈 때마다 가방을 보고 몸서리친다. 모든 것이 죽음의 상징이 된다. 저기 가방이 있네, 엄마는 돌아가셨지. 저기 엄마가 부엌에서 차를 담아두던 통이 있네, 엄마는 돌아가셨지. 저기 엄마의 뜨개질 가방이, 수표책이, 3월에 작성하신 장거리 목록이 있네, 엄마는 돌아가셨지. (131)

 

그러다가 미꾸라지처럼 대화에서 빠져나갔고, 전화를 끊고는 내가 못됐고 배은망덕하고 이기적이고 참을성 없고 제 일만 우선시하는 딸이라고 말해주는 듯한 죄책감이 묵직하게 찾아드는 것을 느꼈다. (중략) 이제와서 하는 말이지만, 내가 어머니를 대하기 어려웠던 순간, 괴롭거나 죄책감이 들었던 순간은 종종 내게 많은 걸 가르쳐주는 순간이었다. (148)

 

외로움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말 걸 사람이 아무도 없는 파티에 있을 때 느껴지는 단절의 외로움도 있고, 사람과 접촉하지 않은 채 내리 몇 시간이나 며칠을 보내면 생겨나는 고립의 외로움도 있다. 그런데 내가 제일 잘 아는 외로움은 일요일 오전의 그리움이다. 이것은 종종 사전 경고도 그럴 만한 이유도 없이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듯한 외로움이다. 일단 이 외로움이 들이닥치면, 이 크나큰 외로움을 극복하기란 영영 불가능하리라는 기분이 든다. 만약 우리가 가게에서 외로움을 살 수 있다면, 일요일의 외로움은 커다란 상자에 담겨 있을 테고 그 위에 이런 딱지가 붙어 있을 것이다. '취급 주의ㅡ초강력'.  (184)

 

어릴 때 어느 봄날에 내 방에 앉아서 창밖에서 살랑거리는 나뭇잎들을 보며 당신에는 너무 어려서 이름 붙이지 못했던 어떤 기분을 느꼈던 일이 지금도 기억난다. 그것은 세상에 참여하지 못하는 기분이었던 것 같다. 세상은 저 창밖에서 나 없이 분주히 돌아가고 있는데 나는 거기 참여할 능력이 없거나 의지가 없다고 여겨지는 기분이었다. 내가 친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나는 늘 친구가 있었고 지금도 있고 그것도 많다. 하지만 내가 겪는 외로움은 현실의 상황이나 논리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내 안에 산다. 작고 끈질긴 악마 같은 그것은 가장 고요한 순간에, 그러니까 계획 없는 전겨이나 일요일 아침 같은 때 활개를 친다. 그것은 공허감이다. (184)

 

이 모든 전략은 어느 정도 소용이 있었다. 특히 나쁜 남자와 연애하는 것이 그랬다. 집착적인 연애만큼 사람의 얼을 빼놓는 일은 또 없는 데다가, 만약 나쁜 연애 때문에 외롭다면 최소한 그 감정을 남 탓으로 돌릴 수 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집착하더라도(혹은 술을 마시거나 쇼핑을 하거나 청소기를 돌리더라도) 그 감정을 깨끗이 지워낼 수 없다. 외로움은 늘 돌아온다. 그래서 이제 나는 그것을 적이라기보다는 지인처럼 여기게 되었다. 흔쾌히 환영하진 못하더라도 존중할 필요가 있는 존재처럼. (185)

 

나는 개를 쓰다듬으면서 생각했다. 우리는 각자의 부모에 대해서 오랫동안 남몰래 환내다. 부모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사람이 아닌지, 우리는 그들이 어떤 사람이기를 바라는지, 우리가 어떤 실망과 단절을 겪었는지, 그들이 우리를 키운 방식이 왜 이렇게 꼬여 있었는지, 이 모두에 대해서 화낸다. 이 괴로움을 놓아버리는 일은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고, 자기 인식과 성숙함과 시간이 절묘한 비율로 섞여야 가능한 일이다. 어떻게 혹은 왜 그 일이 가능해지는지, 부모에 대한 복잡한 감정에서 가장 아픈 모서리들이 깎여 나가는지,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 (192)

 

우리가 술을 마셔서ㅡ혹은 굶어서, 먹어서, 도박을 해서, 살을 찌워서ㅡ감정을 몰아낼 때, 우리는 그 감정을 이해할 기회를 스스로 박탈하는 셈이다. 자신의 두려움과 자기 의심과 분노를 이해해볼 기회를, 마음속에 묻혀 있는 감정의 지뢰들과 제대로 한번 싸워볼 기회를. 중독은 우리를 보호해줄지 몰라도 성장을 저지한다. 사람을 한층 더 성숙시키는 인생의 여러 두려운 경험들을 우리가 온전히 겪지 못하도록 막는다. 중독을 포기하면, 그래서 그런 힘든 순간들을 온전히 겪기 시작하면, 우리는 자신이 갖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근육들을 구부리게 된다. 자라게 된다. 
(중략) 중독은 즐거움과 기쁨과 놀라움을 마비시킨다. 우리가 진정한 친밀감, 진짜 웃음, 진실된 통찰에 다가가지 못하도록 붙잡는다. 마취제를 버릴 때, 우리는 자신의 인간성에서 가장 의미 있는 측면들을 되찾을 기회를 스스로에게 주는 셈이다. 삶을 살 기회를 스스로에게 주는 셈이다. (225)

 

내가 이런 생각을 곰곰이 한 것은, 좀 이상하지만, 요전에 남자 친구와 다른 친구 둘과 함께 피자를 앞에 두고 두 시간짜리 <멜로즈 플레이스> 시즌 최종회를 시청한 날이었다. 더없이 평범한 저녁이었다. 네 사람이 모여서 텔레비전에 나오는 조와 제이크와 킴벌리에게 야유하고, 음식과 우정과 웃음이라는 동지애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들 속으로 느긋하게 빠져들어 두어 시간을 보내는 저녁. 특별할 것이라곤 전혀 없는 시간이었지만, 어느 순간에 나는 진심으로 사랑하는 세 사람을 바라보면서 나 같은 인간에게는 드문 감정인 깊은 만족감을 느꼈다.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이 모두 그 방에 있다는 느낌이었다. 그저 내가 그것들을 알아보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발버둥 칠 필요도, 시험을 통과할 필요도 없었다. 그냥 평범한 안락과 기쁨이었다. 
그냥 나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할까? 그냥 특별할 것 없는 보통의 여자가 되면 안 되는 걸가? 나는 평생 이런 질문들과 씨름해왔는데, 그날 저녁에 문득 그 답은 너무나 단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히 괜찮다. (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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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모든 사람과 모든 사물의 옆에서 다정하게 존재할 줄 알았다. 이것이 그의 가장 신비로운 점이었다. 그가 옆에 있으면 모두들 커다란 날개를 펼치는 새처럼 우아해 보였다. 그가 옆에 있으면 모두 조금씩 눈동자가 빛나고 입가는 부드러워지고 분노로 가득했던 마음이 누그러졌다. 모두 그에게 친절해지는 동안 자기 자신에게도 친절해졌다. (13)

 

내가 왕후를 사랑하는 만큼 왕후도 나를 사랑할까? 사랑의 확신을 갈망하는 왕은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젊은이나 다를 바 없었다. 왕은 사랑을, 오직 사랑만을 원한다는 것은 고통이란 것을 알기 시작하던 참이었다. (24)

 

몇 년 전부터 우리는 먹는 것에 집요하게 매달리고 있었다. 우리에게는 어디서 뭘 먹었는지 외에는 이야깃거리가 별로 남지 않게 되었다. 그동안 입이 하던 세 가지 기능, 즉 먹는 것, 말하는 것, 사랑하는 것 중 한 가지만 남은 셈이었다. 내 글 속에서는 집요한 먹방 시대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사람들이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점점 더 알지 못하게 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극심한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다. 모두들 MBTI 같은 성격유형 검사나 점술에 매달렸고 서둘러 자기 자신과 타인을 이했다. "응, 그래서 그렇다는군." "네가 그래서 그래." (37)

 

우리는 운명을 마스크, 백신, 청결제 등에 맡겨놓았다. (중략) 우리의 상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것보다 할 힘이 없는 것에 더 가까웠다. 피할 수 없어서 고통스러운 불행이 아니라 피할 수 있어서 고통스러운 불행이 우리 불행의 패턴이다. 우리 인류는 지금 이 모습으로 사느라 지쳐버렸다. 우리는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더 이상 할 일이 없다고 느꼈다. (41)

 

내가 제일 좋아하는 표정으로 무사가 말했다. 무사는 뭔가에 푹 빠질 때 아련하게 눈이 빛났다. 그럴 때 무사의 눈은, 잊고 있었지만 그리운 것을 담고 있는 거울 같았다. (44)

 

"사람들이 미래에 대해서 말할 때 질문을 던지지 않는 것이 있어." 
"뭐지?"
"미래에 우리는 어떤 인간이 돼 있을까? 어떤 인간들과 같이 살게 될까?"
"어떤 인간일 거라 생각해?"
무사는 현재도 외롭고, 그리고 미래에도 변함없이 외로울 것을 아는 사람 특유의 초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외면하는 인간." (64)

 

한번 본 아름다움은 잊히지 않고 마음속에 남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인류는 꽃이 피는 이야기를 사랑한다. 꽃 핀 그늘 아래서 이야기와 사랑이 영원히 다시 시작된다.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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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 문제는 훨씬 복잡했다. 남편이 살아 있었을 때만 해도 그것은 내가 신경쓸 문제가 아니었다. 텔레비전 보는 일은 남편이 꾸준히 도맡아주었기에 나는 그 부역 같은 일은 안 해도 되었던 것이다. 현관 입구에 울려퍼지는 온갖 세상사 소음만으로도 사회적 위계질서 놀이는 유지되었다. 그런데 남편 뤼시앵이 저세상 사람이 되자 그 겉모양이라도 유지하기 위해 나는 머리를 쥐어짜내야 했다. 남편이 살아서는 내가 하지 않아도 되었던 일인데, 세상을 뜨며 타인들의 의혹을 막아주던 필수적인 방벽인 무교양까지 가지고 가버렸으니 내가 대신 그 일을 하게 된 것이다. (21)

 

누가 이의를 제기해도 상처받지 않고 자기 심지가 굳어 남들 다 아는 라벨 붙은 귀족부인 따위는 웃어넘긴다. 귀부인이란 무엇인가? 저속한 것들 속에 있어도 그 어떤 저속함으로도 건드릴 수 없는 사람, 그런 여인이다. (37)

 

사물의 외양을 언어로 묘사하는 데 그토록 재능이 많은데 정작 사물을 보는 데는 그토록 재능이 없을까. 왜 그렇게 눈이 멀었을까? 그가 그 큼지막하고 거만한 매부리코를 달고 내 앞을 지나갈 때마다 난 속으로 그렇게 묻는다. 물론 그럴 수 있다. 사물을 보면서도 그속의 생명과 숨결을 못 보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그런 이들은 인간에 대해 일장연설을 하지만 거의 기계적으로 하는 것이며, 사물에 대해서 장황하게 묘사를 하지만 자기 주관적 영감에 따라 말해질 수 있는 것만 말할 뿐 묘사된 사물에는 어떤 영혼도 없다. (40)

 

세계의 아름다움이란, 생의 운동 속에서 우리를 자라게 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따라서 '세계 운동에 관한 고찰'은 사람들과 신체의 운동, 정 말할 게 없으면 사물들, 삶에 어떤 가치를 줄 만큼 미적인 어떤 것, 우아함, 아름다움, 조화, 강렬함 등을 발견해보려는 노력이 될 것이다. 만일 그것을 발견한다면, 난 내 선택을 재고해볼 것이다. 정신을 위한 미적 개념이 없으면, 그것 비슷한 신체의 아름다운 운동이라도 혹시 발견하게 된다면 삶은 그래도 살아볼 만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47)

 

우리집에서 취향의 부재는 허무와 다름없었다. 어떤 것도 나에게 말이 되지 않았고, 어떤 것도 나를 일깨우지 않았다. 알 수 없는 파도에 휘말려 떠다니는 허약한 지푸라기 같았다. 이런 삶을 끝내버리겠다는 욕구조차 알지 못했다. (55)

 

그럴 바에야 우리의 불완점함을 함께 나누는 것이 훨씬 낫지 않나? 완두콩, 비타민 C가 동물에게 영양은 공급할지언정 인생을 깨닫게 하지도 정신을 살찌우지도 않으니까. (107)

 

게다가 분별력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애가 어찌된 영문인지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게 소음이라는 건 알고 있다. 우연히 알아챘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침묵이 필요할 수 있다는 생각이 그애 머릿속에 바로 떠올랐을 리 없다. 침묵이란 내면으로 가는 길로, 외부를 향한 삶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 침묵은 아주 필수적인데, 그것을 나의 언니가 이해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의 내면 자체가 거리의 소음만큼이나 어지럽고 시끄럽기 대문이다. (중략) 내가 정말 싫어하는 게 있다면, 그건 사람들이 자기 무능력 혹은 정신이상을 자기 소신으로 바꿔버리는 것이다.  (115)

 

"그럼 어떻게 치료해요?" 
"사람하고 똑같아요." 올랭프는 웃으며 말했다. "프로작(우울증 치료제)을 처방해줘요." 
"정말요?" 내가 말했다.
"정말요." 올랭프가 대답했다.
거봐, 내가 그러지 않았나. 우리는 동물이고, 동물로 남을 것이라고. 부잣집 암고양이가 문명화된 여성과 똑같은 고통을 겪고 있다니. 동물들이 학대받고 있다고, 인간이 순수 애완동물을 오염시키고 있다고 외쳐댈 일은 아니다. 급한대로 우리가 같은 동물적 운명으로 엮여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며 깊은 연대감을 느끼는 거다. 우리는 같은 욕구 때문에 살고, 같은 아픔으로 고통받는다. (163)

 

우리가 행복을 만끽하는 것은 바로 이런 순간들이다. 마음의 바닷속을 유영하며 결정하고 의도해야 하는 부담감을 벗어버리고 다양한 동작을 하면서 타자의 행위인 듯 무의지성에 자신을 내맡기는 것이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풀을 베듯 글을 쓰는 것이지, 늙어빠진 수위의 이 가소로운 일기에 무슨 다른 이유가 있을까? 내가 쓴 행들이 자기 스스로 조물주가 된다. 나도 모르게 기적처럼 내 의지를 벗어나는 문장들이 종이 위에서 탄생하는 것을 보며, 내가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 것을 배운다. 고통 없는 출산, 노동도 확신도 아닌 그저 경이로운 행복감. 알아서 나를 데려가는 펜을 그대로 따라가며 난 미리 협의된 것 없는 확실성을 기꺼이 즐긴다. 
충만한 확실성과 '나'라는 피륙 속에서 나 자신을 망각하며 황홀경에 가까운 것을 느낀다. 이런 방관자적 의식을 통해 행복한 고요를 맛본다. (171)

 

둘 다 나한테 안 들리는 줄 알았을 거다. 나한테 하는 말이 아닌 말들은 더 잘 들린다. (174)

 

콜롱브는 서둘러 잊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늙는다는 게 자기하고는 아주 먼 이야기니까. 그 시간이 결코 자기한테는 안 올 줄 알았겠지. 내일을 생각하지 않기 위해 너무나 바쁘고, 마감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현재에 너무나 탐욕적인 주변 어른들을 보면서 난 인생을 눈 깜빡할 새 지나간다는 걸 이미 깨달았다. 내일이 의심스러운 것은 현재를 건설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재를 건설할 줄 몰라서 내일 할 수 있을 것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내일은 또다른 오늘이 되어버리고 결국 아무것도 안 된다. 안 그런가? 
따라서 이 모든 걸 잊으면 안 된다. 우린 늙을 것이고, 그건 아름답지도 않고, 좋지도 않고, 유쾌하지도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살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지금이다. 지금, 무엇이든 건설해야 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온 힘을 다해. 매일 자신을 초월하고, 하루하루를 불멸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양로원을 늘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한다. 자기만의 에베레스트 산에 한 발씩 오르면, 그 한 발 한 발이 조금은 영원한 것이 된다. 
미래는 살아 있는 자들의 진정한 계획들로 현재를 건설하는 데 쓰이는 것이다. (179)

 

우릴 관통하는 괴로움 속에 우리도 모르게 소스라치게 놀라며 서로의 당황한 모습을 그만 포착하고 말았으니. 뭐시기 씨는 아까와는 전혀 다른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185)

 

"예. 아주 행복한 집안이었어요." 안달이 난 로장 부인이 나 대신 대답했다.
"행복한 가정은 다 고만고만하죠." 난 대화에서 얼른 빠져나오려고 혼자 중얼거리듯 말했다. 사실 더 할 말도 없었다. 
"하지만 불행한 가족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죠." 그 뭐시기 씨가 갑자기 나를 묘한 눈길로 쳐다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순간 나는 또 한번 소스라치게 놀랐다. (186)

 

미셸 부인을 흠, 뭐랄까, 그래, 지성이 살아 있다. 그런데 평범한 수위처럼 행동하기 위해, 일부러 아둔해 보이려고 스스로 애를 쓰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난 미셸 부인이 장 아르탕스에게 말 할 때, 디안의 등뒤에서 넵튄에게 말할 때, 또 인사도 없이 자기 앞을 지나가는 건물 부인네들을 쳐다볼 때 이미 간파했다. 미셸 부인에겐 고슴도치의 우아함이 있다. 겉은 진짜 철옹성 같은 가시로 뒤덮여 있지만, 안은 부드럽고 섬세하다. 무딘 듯하나 무디지 않고 몹시도 고독하고 더없이 우아한 작은 짐승, 고슴도치처럼. (200)

 

따라서 오늘 나의 심오한 사고는 이것이다. 사람을 탐색하는 누군가를 나는 처음으로 만났다. 다시 말해, 보이는 것 그 너머를 보는 사람을 처음 만났다. 이 문제가 시시해 보일 수도 있지만 이건 아주 심오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린 절대 우리의 확신 너머를 보지 못한다. 더 심각한 것은 그 확신 너머와 마주하는 것을 포기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하고만 만날 뿐이다. 늘 따라다니는 거울 속에서는 알아보지 못하면서. (201)

 

나는 문법이란 아름다움에 다가가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말하고 읽고 쓸 때 아름다운 문장을 읽거나 내가 직접 아름다운 문장을 만들게 되면 기분이 좋아진다. (219)

 

그는 내 말에 찬성이나 반대를 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넌 누구니? 나랑 말하고 싶니? 너랑 함게 있어 정말 기쁘다"하고 말하는 듯 나를 바라본다. 예절이란 이런 것이다. 상대방에게 '내가 당신을 위해 있다'는 인상을 주는 태도. (234)

 

가쿠로 씨는 자작나무에 대해 이야기했고, 덕분에 나는 정신 분석가들과 지식 가공밖에 할 줄 모르는 지식인들을 잊은 채 더없이 위대한 아름다움을 포착할 수 있을 정도로 내가 부쩍 자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235)

 

내 생애 이렇게 마음이 편한 적이 없었다. 정말 이걸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어떤 사람에게 처음으로 난 전적인 신뢰를 느꼈다. 마뉘엘라에게 내 삶을 털어놓는 것과는 조금 다른, 서로 이해하고, 서로 이해받고 있다는 확신에서 생겨난 절대적 안정감이었다. 인생을 털어놓는다는 게 영혼을 내맡기는 건 아니다. 내가 마뉘엘라를 동생처럼 좋아하긴 하지만, 나라는 엉뚱한 존재가 우주에서 캐낸 약간의 의미와 감동을 그녀와 오롯이 나눌 수는 없었다. (314)

 

우는 아줌마를 보면서, 특히 나에게 그 모든 이야기를 다 해주며 한결 좋아진 아줌마를 보면서 나는 어떤 것을 절절히 느끼게 되었다. 나는 내 주변 사람들을 위해 무언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었기 때문에 고통받았다는 걸 깨달았다. 아빠한테, 엄마한테, 특히 콜롱브한테 그렇게 해주고 싶었지만, 난 그들에게 쓸모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을 위해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니까. 그들의 병은 너무 깊었고, 난 너무나 나약했다. 난 그들 병의 징후를 잘 안다. 하지만 그들을 치료해줄 능력이 없다. 그래서 나를 아프게 하는 것만큼 그들을 아프게 했는데, 난 그걸 몰랐다. 그런데 미셸 아줌마의 손을 잡으며 난 나 역시 아프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쨌든 확실한 것은, 내가 치료해줄 수 없는 사람을 벌주면서 날 치료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408)

 

날 치유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치료 가능한' 다른 사람을, 구원될 수 있는 사람을 치료해야 한다는 것을. 다른 사람을 구할 수 없다고 불안에 빠져 있지 말고. 그러면 나는 의사가 되어야 하나? 아니면 작가가? 그건 약간 비슷하다. 안 그런가? 
그러면 미셸 아줌마에게는 치유해줘야 할 얼마나 많은 콜롱브가, 얼마나 많은 불쌍한 티베르가 있는가? (409)

 

"날 알아보지 못했어요." 
팔 위에 여전히 내 손을 얹은 채 그 역시 걸음을 멈췄다.
"당신을 한 번도 제대로 보지 않았을 테니까요. 어떤 상황에서든 저는 당신을 알아볼 겁니다." (425)

 


자생트 로장과 안엘렌 뫼리스를 생각하니 시선은 움직이는 물을 움켜쥐려는 손과 같다는 생각이 더욱 뚜렷하게 들며 전율이 일었다. 그렇다, 눈은 자각한다. 그러나 탐색하지는 않는다. 믿는다, 그러나 의문을 품지 않는다. 받아들인다, 그러나 찾아나서지는 않는다. 욕망은 텅 비고, 배고픔도 십자군도 없다. (426)

 

마음의 귀족성은 전염성인지 넌 날 우정을 베풀 수 있는 여자로 만들었어. ... 만일 네가 매주 신성한 다례를 통해 마음을 내게 주며 나와 함께 희생하지 않았다면, 내 초라한 갈증을 예술에 대한 환희로 바꿀 수 있었을까? 푸른 도자기 다기, 살랑대는 분재 이파리들, 창백한 동백, 세기 속의 이 영원한 모든 보석들, 끝없이 도란거리는 강물 속의 이 모든 소중한 진주들에 반할 수 있었을까? 
벌써 네가 그립구나. 오늘 아침 죽는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이해했다. (중략)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을 더는 볼 수 없다. 그리고 만일 죽는 게 이런 거라면 사람들이 말하듯 이건 정말 비극이다. (447)

 

내 인생 처음으로 '다시는'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절감했다. 끔찍하다. 하루에도 수백 번 이 단어를 발음하지만 진짜 '영원히 다시는'이라는 것과 대면하기 전에는 이 말의 의미를 잘 모른다. 닥칠 일을 조절할 수 있다고 착각한다. 정말 결정적인 것은 우리에겐 없는 것 같다. (456)

 

오늘 저녁 졸여진 심장과 짓이겨진 위를 생각하며 난 속으로 말했다. 그래, 아마 이게 인생일 거야. 숱한 절망, 그러나 그 순간에도 시간이 더이상 같지 않은 아름다운 순간들이 있다고. 음악의 음들이 시간 속에 일종의 괄호를, 일종의 휴지를 만드는 것처럼, 여기인데도 저기를, '다시는' 안에 '늘'을 만드는 것처럼.
그래 그거다. '결코 다시는' 안에 '늘'. 
걱정하지 마세요, 르네. 난 자살하지 않을 거예요. 난 아무것도 불지르지 않을 거예요.
당신을 위해 이제부터는 '다시는' 속에서 '늘'을 찾을 거니까. 
세계의 아름다움은 그것이니까. (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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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진심 :: 안보윤 

유란은 여전히 진심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어떤 진심은 왜 그렇게 빨리 변질될까. 이서는 다른 씨앗보다 금세 발아했다. 떡잎이 아닌 넝쿨에 가까운 것을 내밀어 유란을 휘감아왔다. 유란은 그런 이서의 의존과 맹목이 부담스러웠다. 그것은 마치, 진심 같았다. 유란은 쓰고 있던 글자들을 서둘러 지웠다. 어떤 진심은 진심이라서 한심했다. 어떤 진심은 유통기한이 지난 통조림 속 복숭아처럼 쇠 냄새를 풍기며 삭았다. 어떤 진심은 추해졌고 어떤 진심은 다만 견뎌내는 삶으로 전락했다. (23)

 

 


바늘 끝에서 몇 명의 천사가 :: 안보윤

경찰이 흥얼대며 남자의 어깨를 툭 쳤다. 이상하게 친근하고 이상하게 여유로워 보이는 행동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기이한 공조가 하진을 주눅 들게 만들었다. 같이 출동한 경찰이 뭐라고 입을 열려는 찰나 남자가 말했다. 
-잘못했습니다.
남자가 훌쩍거리며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하진이 아니라 경찰을 향해서였다.
-정말 잘못했습니다. 깊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그래, 젊은 사람이 말이야. 진짜 이러면 안 되는 거야. 경찰이 남자를 다독이고, 남자가 경찰의 훈계에 고개를 끄덕이며 굽신대는 모습을 하진은 기가 막힌 채 바라보았다. 경찰이 왜 남자의 사랑을 대변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게다가 남자는 왜 자신이 아닌 처음 보는 경찰에게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받고 있을까. 하진의 집에 불법 침입이 일어났고 하진이 신고해 범인을 잡았음에도 모든 처리 과정에서 정작 하진만이 배제된 느낌이었다. (37)

 

남자가 여기, 이 침대에 앉아서 울었나? 
여기 누워서 텔레비전을 보았나? 저 의자에 발을 얹고 누워 고함을 질렀을까? 방 안의 모든 사물이 돌연 낯설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어딘가에 남자의 흔적이, 체액이, 지문과 체온과 축축한 숨 같은 것이 남아 집요하게 하진을 노려보는 것 같았다. 하진은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어느 곳에도 몸을 숨길 수 없었다. 남자가 여전히 이곳에 있었다. 하진의 집 안 모든 곳에.
현장을 잡겠다는 오기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곳은 현장 같은 게 아니라 하진의 공간이었다. 하진이 무방비하게 몸을 펼친 채 시간을 부리고 일상을 누비던, 하진과 완전히 밀착된 삶의 공간이었다. 하진은 온몸을 짓누르는 공포 속에서 깨달았다. 남자의 침입으로 인해 하진은 자신만의 내밀한 공간을 상실했다. 남자는 아무것도 부수지 않는 방식으로 하진의 공간을 완전히 훼손했던 것이다. 그의 말대로라면 딱 한 번만의 침입만으로. (40)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인데도 자꾸 자신이 없어졌다. 남자는 조교직에서 해임되면 그뿐이었다. 징계위원회가 열린다 해도 기껏해야 경고일 게 뻔했다. 그것에 비해 하진이 각오해야 할 것들은 너무 많았다. 무엇보다 남자는, 하진의 집을 알고 있었다. (56)

 

표정 없이 견고해진 얼굴이 구운 도자기 같았다. 매끈하고 단단해 보이지만 터무니없이 쉽게 깨지는 흙색의 도자기 가면. 하진은 구운 호떡을 들고 조금씩 베어 먹었다. 잠깐 사이 안에 든 설탕이 미지근하게 굳어 서걱거렸다. 
그런 건 용서가 아니야. 하진은 엄마에게 말했다. 10년이 지나고서야 겨우 말할 수 있었다. 
엄마, 내 침묵은 용서가 아니야. 내 침묵은 나를 위한 거였어. 나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방어가 지금까지는 침묵밖에 없었던 것뿐이야. 나는 계속, 계속. 하진이 호떡을 씹을 때마다 서걱서걱 소리가 났다. 나는 계속, 늘, 엄마가 두려웠어요. 정말이지 엄마가 끔찍했어. (59)

 

 


내 할머니의 모든 것 :: 문진영

배정심 여사가 고양이와 닮았다면, 나의 친할머니는 마치 골든레트리버 같았다. 실제로 그녀는 나를 '내 강아지'라고 불렀다. 나는 그녀에게서 조건 없는 환대와 사랑을 받았다. 그녀에게 안기면 푹신하고 따듯했다. 할머니가 나를 싫어할지도 모른다거나, 나를 떠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었다. 그런 상상조차 할 필요가 없는 안전한 관계. 그런 관계는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77)

지형에게서 내가 누리고 있는 마음이기도 하다. 

 

이삿날 저녁, 우리는 식탁에 마주 보고 앉아 계약서를 썼다. 나의 조건을 이러했다. 사생활에 일절 간섭하지 말 것. 즉, 서로를 하우스메이트처럼 대할 것. 엄마는 가만히 듣고 있다가 말했다. 좋아, 그럼 나도 조건을 걸지. 모든 공과금과 식비의 절반을 낼 것. 엄마는 매달 말일 내가 지불해야 할 액수를 포스트잇에 적어 내 방문에 붙여놓았다. 다른 조건도 있었다.
과거를 인용해 엄마를 비난하지 않을 것.
각자의 불행은 각자가 책임질 것.
엄마는 그동안 자신의 불행을 내게 전염시킨 것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했고, 앞으로는 그러지 않겠다고 했다. (75)

 

 


쿠쿠, 나의 반려밥솥에게 :: 박지영

무언가를 하는 데도 비용이 지불되지만 하지 않는 데에도 비용이 지불된다는 것, 때로는 하지 않는데에 더 큰 가치가 매겨진다는 것을 강선동은 알게 되었다. (101)

 

 


엉킨 소매 :: 이서수

시간이 한참 지난 다음에 만날 걸 그랬다. 그땐 이런 얘기가 화제에 오를 리 없고, 나는 끊임없이 다른 얘기를 할 텐데. 하지만 그걸 인식하는 순간 편안함은 사라질 것이다. 그러므로 솔직하게 말하고 계속 얼굴을 보기로 한 것인데, 그런 선택이 자꾸 이렇게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주영 씨가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나는 너한테 솔직하고 싶어. 속이는 거 없이 만나고 싶어.
나도 그래.
... 나도 그랬어. 근데 그게 좋은 건 아닌 것 같아.
해정의 말에 우리는 길게 침묵했다. (151)

 

 


압구정 현대를 사지 못해서 :: 윤보인

왜 하필 사랑이라는 건 그렇게 젊을 때 찾아오는 것인지, 훗날 자리 잡았을 때 오는 게 아니라, 부서질 것같이, 죽을 것같이 위태로운 시기에, 미칠 것 같은 시기에 찾아와 나를 괴롭히는 것인지 알지 못해서, 그 시절 나는 자취방으로 돌아와 울곤 했다. (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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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아사다 아키라는 그의 책 <도주론>에서 인간을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눈다. 과거의 모든 일을 짊어지고 적분처럼 통합하는 편집증형 인간과 매번 새로운 제로 시점에서 미분의 차이를 가지는 분열증형 인간. 아사다 아키라에 따르면, 편집증형 인간은 축적, 정주, 중심, 다수, 전체를 추구하며 길들여지는 것을 거부하지 않는다. 반면에 분열증형 인간은 도박, 주변, 소수, 야성, 잡종의 성질에 가깝다. (7)

 

다른 강호인들이 무림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갈등하고 안절부절못하는 동안 '놀이'를 선택해서 온몸을 흔들어 웃어젖히는 주백통처럼, 아더르의 흐느낌도 세상의 규칙과 속도와 상관없이 '떨어지고 사라지기'로 선택한 것에 대한 책임과 자신의 실존을 표현한 것이리라. (20)

 

강도가 흑인이었다는 내 증언에 용의자 측 변호사는 "어떤 피부색의 흑인이었나요?"라고 물었다. 흑인이라는 표현이 이미 특정한 피부색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변호사의 질문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당황한 나머지 "검은색이었다니까요. 그냥 흑인이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 변호사는 흑인도 커피 갈색, 옅은 갈색, 진한 검은색, 푸른 검은색, 혹은 회색에 가까운 검은색 등 피부색이 다양하다고 말하면서 '그냥 흑인'은 없다고 지적했다. (중략) 모두가 똑같다는 생각은 조금 다른 사람을 밀어내는 잘못된 구실이 된다. 세상에 '그냥 흑인'은 없다. 존중받아야 할 각기 다른 색의 개별 인격체들이 있을 뿐. (28)

 

나는 새로운 대통령을 원한다. 

두 명 중 덜 악랄한 자가 아닌 다른 대통령을 원한다.

자본과 권력의 비열한 사기꾼들을 나는 더 이상 대통령으로 원하지 않는다.

나는 레즈비언 대통령을 원한다. (35)

 

박이소의 밥솥 퍼포먼스는 서구 중심의 미술계를 주변국인 한국의 작가로서 자신만의 속도와 보폭으로 건너가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담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투박하고 미미함며 느릴지라도 묵묵히 걸어가겠다는 작가의 단단한 선언이다. (38)

 

로만 온닥의 <좋은 때 좋은 기분>도 일상적 상황을 살짝 뒤튼 퍼포먼스다. 온닥은 퍼포머들을 고용하여 런던 프리즈 아트 페어의 VIP실 앞에 줄 세워놓는다. 줄 서는 문화가 익숙한 런던에서 이 퍼포먼스는 매일의 풍경과 다를 바 없다. 퍼포머들은 평범한 옷을 입고 있고, 그 어떤 예술적 행동도 하지 않는다. 그냥 줄만 서고 있다. 그런데 그 점이 무섭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줄도 전혀 줄어들지 않고, 시간만 억겁처럼 느껴진다. 
'두려움'은 분명히 익숙한 것인데, 어딘가 약간 달라졌기 때문에 불안과 공포를 느끼는 심리 상태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어쩐지 다르고 왠지 부자연스러운 상황이 주는 심리적인 혼란과 충격은, 사건의 본질을 파악하고자 하고 잘못된 원인을 찾으려 하는 인지의 단계로 이어진다. (중략) 온닥의 작품에서도 관객들은 불편과 혼란, 공포를 느끼다가 결국 깨닫게 된다. 정말 무서운 것은 퍼포먼스에 예술적 구성이 없다는 사실이 아니라, 아무리 줄을 서 있어도 VIP실에 못 들어간다는 사실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미술 퍼포먼스가 아니라, 자신들의 현실이라는 소름 끼치는 사실이라는 것을. 작가는 일상적인 상황을 미술 안으로 슬며시 가져옴으로써 관객에게 자본에 따른 계급의 위계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50)

 

너무 거대한 이야기와 너무 반짝이는 작품이 좋은 환기의 순간을 만들어내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익숙한 것이 살짝 어긋나는 지점에서 생기는 두려움은 흥미로운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새로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 (51)

 

오스카 산틸란의 <침략자>에서도 관념의 세계와 실제 세계가 만나는 순간이 있다. 산틸란은 영국에서 제일 높은 산에 올라가 대략 3센티미터 크기의 돌을 하나 주워와서는 영국을 아주 미세하게 줄였다고 말했다. 이 작은 제스처는 영국에서 상당한 반감을 불러일으켰는데, 그 부정적 반응의 원인은 작가가 자연을 훼손했다라기보다는 감히 영국의 크기를 줄였다는 데 있었던 것 같다. 산틸란은 전시장을 폭파시키겠다는 전화까지 받았다고 한다. 이 작품에서 산틸란이 주워온 돌은 매우 작지만 아주 무겁게 받아들여진다. 관념의 세계가 실제 세계로 침입하면서 지각의 균열을 만들어낸다. 작은 돌 하나를 가져오는 제스처가 한 국가의 실제 면적을 줄였고, 그 나라의 정신과 권위에 도전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실재가 되면서 드러나는 상황이 상당히 모순적이다. 아메리카 대륙을 실컷 침략했던 유럽인들이 반대로 에콰도르 작가가 영국을 3센티미터 줄였다는 것에 견딜 수 없는 분노를 느낀다는 사실에, 어쩔 수 없이 실소가 터져 나온다. (61)

 

우창이 읽는 글은 열네 살 때 자폐증 진단을 받은 후 자폐증 환자의 인권을 위해 활동하는 미국 사회운동가 어맨다 백스가 유튜브에 올린 <나의 언어>에서 가져온 것이다. 8분 길이의 이 영상 전반부에서 백스는 반복적으로 낮은음을 읊조리기도 하고 사물을 계속 만지는 등 일반적으로 자폐증 환자의 병리적 증상으로 인식되는 행동들을 보여준다. 그러나 영상 후반부에서 백스는 자신의 행동을 친절하게 번역해주면서 우리의 안일한 편견을 뒤엎는다. 세상에는 '말' 이외에 다양한 생각과 사고방식,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이 있는데, 그러한 방법을 '비정상'이라고 부르며 그렇게 소통하는 사람들을 아프거나 정상적이지 않은 사람으로 취급하는 것을 비판한다. (65)

 

오노 요코와 우창의 퍼포먼스, 그리고 어맨다 백스의 비디오가 보여주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과 폭력'이라는 공통된 주제는 지금의 페미니즘이 왜 다양한 소수자 및 주변부와 함께 이해할 수밖에 없는 개념인지 설명해준다. 사회 구조의 중심과 주변을 읽어낸다는 것은 다른 지형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여성주의에 대한 이해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는 중요한 시작이다. (67)

 

이 작품의 제목은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하는데, 장영혜중공업은 이 문장을 작품에 반대로 적용한다. (한국의) 불행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다고. 서로에 대한 애정과 관심보다 돈과 성공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가정은 모두 불행하다로 읽힌다. 
다른 비디오 작품 <삼성의 뜻은 죽음을 말하는 것이다>는 삼성 병원에서 태어나 삼성 전자제품을 쓰고, 삼성 아파트에 살기 위해 평생을 일하고, 삼성 보험에 미래를 설계당하고, 삼성 장례식장에서 죽는 '삼성 인생' 이야기다. 태어난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삼성을 위해 돈을 벌고 삼성을 위해 쓰게 되는 구조가 새삼 섬뜩하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의 인생이 처음부터 끝까지 거대 자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이 상당히 공포스럽다. 심지어 모든 것이 탈탈 털리는 이러한 착취 구조 안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물질과 자본만을 절실히 욕망한다는 것이 제일 끔찍하다. (93)

 

쿠르디의 사진은 분명히 시리아 내전과 난민에 대한 의미 있는 관심과 반응을 만들어냈다. 그것이 임시적일지언정 비극적인 이미지가 불러일으키는 환기의 기능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관심이 사그라든 지금, 여전히 시리아의 상황은 끔찍하고, 더 많은 아이들이 매일 죽어가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은 시리아로부터 멀고 안전하다. 이것은 비극적인 이미지를 통해 타인을 엿보고, 그들의 고통에 연민을 느끼고 마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102)

 

귀신은 우리의 역사다. 외계인과 사뭇 다르다. 귀신은 국가 권력과 사회적 폭력으로 죽임을 당하고 밀려난 우리의 조상이며 이웃이다. 따라서 귀신을 자꾸 이야기하고, 이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중요하다. 이 보이지 않는 타자들에게 공감하고 이들과 화해를 시도하는 것은, 우리의 지금 상황과 문제를 알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다. 귀신을 무서워하지 않으면 다른 것이 보인다. 이들이 왜 억울하게 귀신이 되었는지, 무엇이 정말 무서운 것인지가 보인다. (118)

 

미국도 전쟁을 아름답게 표현하곤 한다. 2017년 북한과 미국 간에 긴장이 고조됐을 때, 주한 미국인들 사이에서는 <화이트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려 퍼지면 전쟁 시작이라는 소문이 농담처럼 돌았다고 한다. 이 노래는 미군이 베트남 전쟁에서 철수할 때 실제로 작전 신호로 쓰였다. 전쟁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크리스마스 캐럴이라니, 미국의 군사 신호는 퍽이나 로맨틱하다. 
파괴와 살상을 농담이나 은유로 전달하는 태도와 관점이 섬뜩하다. 얀 보의 작품처럼 예술로 전쟁과 폭력을 비판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하지만 잔인함과 참혹함을 가리기 위해 전쟁을 예술적으로 표현하려는 시도는 상당히 끔찍하다. (126)

 

기대와 애정이 있는 만큼 이전보다 더 다양한 목소리들이 들린다. 그리고 다른 목소리들이 잘 들리는 만큼 해결하기 쉽지 않은 문제들도 더 많이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춤을 추기 때문에 더 많이 부딪히고 더 자주 어긋난다. 당연히 '낯설고 친밀한' 타인들과 춤을 추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중략) 하지만 우리는 지금 헤드폰을 쓰고 혼자 춤을 추는 것이 아니라, 같은 음악을 들으며 같은 시간 속에서 여러 사건들을 함께 경험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서로 사랑할 수 없더라도, 사실 너무 달라서 많이 낯설고 불편하더라도, 하산 칸의 비디오 속 두 남자처럼, 이집트 국민들처럼, 새로운 역사 줄기 안에서 여전히 우리가 함께 춤추는 중이라는 것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133)

 

함께 춤을 출 때는 상대방의 동작을 지켜보고 기다리면서 유연하게 반응할 수 있어야 한다. 서로의 호흡을 느끼며 자신의 스텝을 뒤로 물리기도 하고, 손을 잡아 다른 방향으로 이끌 수도 있어야 한다. 완벽한 통제가 필요한 매스게임이 아니기 때문에 서로 자유로운 움직임을 좀 더 지켜보고 더 많이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증오와 분열을 동력으로 삼았던 지난 정권의 시간과 달리, 서로의 아픔을 다독이고 내 몫을 같이 나누며, 열린 마음으로 다른 목소리와 대화하려고 노력한다면, 우리는 꽤 근사한 춤을 계속 함께 출 수 있지 않을까? (134)

 

 

요즘 서점에서 많이 보이는 결의 제목 때문에, 가벼운 책일 거라 지레 짐작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훨씬 아름다운 책이었고, 그래서 봄부장님께도 선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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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슴벌레식 문답

진지하게 묻는다, 준희야. 너한테 나는 뭐냐? 정원이하고 경애는 뭐냐? 너는 진짜 술 먹으면 궁중 비화에 나오는 이상한 내시나 상궁들 있지, 딱 그렇다. 갈등과 암투만 먹고 사는 인간 같다. 거기에 상관없는 우리까지 휘몰아 넣는다. 준희 너도 다 알면서 그런다. 어렸을 때 아무도 안 받아줘서 뒤늦게 응석 부리는 건 알겠는데, 한 일 년 반 했으면 됐지, 우리 이제 곧 3학년이 될 텐데 더 질질 끌래? 그래, 너도 뭐 언젠가는 질릴 날이 오겠지. 난 그래서 별로 네 걱정은 안 한다. 너는 잘 살 거다. (16)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하다가 문득 그럴 수도 있지, 한다. 인간의 자기 합리화는 타인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비합리적인 경로로 끝없이 뻗어나가기 마련이므로, 결국 자기 합리화는 모순이다. 자기 합리화는 자기가 도저히 합리화될 수 없는 경우에만 작동하는 기제이니까. (36)

 

언제까지 질질 끌래, 부영이 묻고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직시하지 않는 자는 과녁을 놓치는 벌을 받는다. (40)

 

 


하늘 높이 아름답게

성당 안뜰 파라솔 아래에 앉아 베르타는 곧 참회해야 할 생각을 끊임없이 되풀이하고 있었다. 도대체 이 사람들은 이렇게 해서 뭐가 만족스러운 걸까. 쉬지 않고 떠들어대면서 이들이 얻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88)

 

이제 베르타를 괴롭히는 의문은 자신이 왜 이들과 계속 만남을 이어가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도대체 이들은 이렇게 해서 뭐가 만족스러운 건가, 베르타는 신음하듯 생각했다. 아무도 귀담아듣지 않는 말을 떠들어대면서 도대체 어떤 기쁨을 느끼는 걸까. 가만히 듣는 것보다 열심히 말하는 게 뭔가 하는 것 같아서? 그나마 그게 더 살아 있는 것 같아서? (92)

 

그날 새벽 내내 잠을 설친 탓에 베르타는 마리아와의 약속을 취소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일단 몸부터 일으키자 하니 일어나졌고 일어나니 이내 침대에서 내려오게 되었다. 욕실로 가자 하니 욕실 쪽으로 발이 움직였다. 신기하게도 마리아의 말대로였다.
몸이란 게 움직이자 달래면 움직여져요, 사모님. (103)

 

 


어머니는 잠 못 이루고

익아, 너 원채가 뭔지 아니?
어머니가 물었다. 어떤 말은, 특정 음식이 인체에 계속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듯, 정신에 그렇게 반복적인 부작용을 일으킨다고 오익은 생각했다. 말의 독성은 음식보다 훨씬 치명적이었다.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킨 음식은 기피할 의지만 있다면 그럴 수 있지만, 부정적인 반응을 일으킨 말은 아무리 기피하려 해도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니, 기피하려는 의지가 강하면 강할수록 점점 더 그 말에 사로잡혀 꼼짝달싹도 할 수 없게 된다. 원채는 다 갚기 전에는 절대 안 없어진다고, 죽어도 안 끝나고 죽고 또 죽어서도 갚아야 하는 빚이 원채라고 어머니는 말했다. 오익은 그게 바로 사는 일 같다고 생각했다. 기피 의지와 기피 불가능성이 정비례하는, 그런 원채 같은 무서운 말과 일들이 원채처럼 쌓여가는. (172)

 

 


기억의 왈츠

하지만 원래 그렇더라도 놀라운 건 놀라운 것이다. 내가 손쓸 수 없는 까마득한 시공에서 기이할 정도로 새파랗게 젊은 내가 지금의 나로서는 결코 원한 적 없는 방식으로, 원하기는커녕 가장 두려워해 마지않는 방식으로 살았다는 사실이, 내게는 부인할 수도 없지만 믿을 수도 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이런 게 놀랍지 않다면 무엇이 놀라울까. 시간이 내 삶에서 나를 이토록 타인처럼, 무력한 관객처럼 만든다는 게. (204)

 

자다 가끔 경련을 일으키며 깨어날 때가 있다. 누구나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는 최소한 받아들일 만한 수준으로 만들기 위해 그 처참한 비열함이라든가 차디찬 무심함을 어느 정도 가공하기 마련인데, 나 또한 그렇게 했다. 경서와 내가 멀어지게 된 데 특별한 이유나 계기는 없었다고 생각했으니까. (230)

 

내가 그 수박을 먹은 기억은 없다. 그 비싼 수박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쭈박, 쭈박, 하고 울면서 내가 원한 건 무엇이었을까. 어처구니없는 걸 요구해서 상대를 끝내 시험에 들게 해 그걸 얻어내고 말겠다는, 결국 이겨먹고 말겠다는 그 악착한 마음은 어디서 왔을까. 그리고 선물을 헌신짝 버리듯 쉽게 잊고 그 선물을 준 사람마저 이겨먹었으니까, 먹어버리듯 이겼으니까 까맣게 잊고 마는 그 잔혹한 무심함은. (233)

 

 


영원회귀의 노래 :: 권희철

질문하는 사람에게 상대를 비난하려는 의도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질문이라는 형식 자체가 상대방을 따져보는 시선 아래 노출시키고 해명하는 입장에 처하게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는 것들이다. 질문에 특별히 뾰족한 구석이 없는데도 또 거기에 대답할 말이 없는 것도 아닌데도 때때로 우리가 질문을 받고 맥락 없이 불안이나 모욕을 느끼는 데 근거가 없지 않은 것이다. (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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