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SMALL
실상은, 우리가 각자 살면서 나눠본 대화 중에 가장 흡족한 대화를 나누고, 우리 둘 다 그걸 단 일주일이라도 포기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토록 강렬하게 이끌리는대화를 나눈다는 것, 그게 우리가 우리 자신을 느끼는 방식이니까. (7) 

 

이런 여정에선 걸으면 걸을수록 시공간의 성격이 자꾸만 바뀌었고 '시간'이란 개념도 증발해버렸다. 거리는 기다란 리본처럼 한없이 펼쳐졌고 우리 앞을 가로막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시간은 자꾸만 확장되어 어린 시절에 그랬듯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언제나 빠듯하고 언제나 촉박한, 정서적 안정을 위한 덧없는 척도일 뿐인 지금의 시간과는 달리. (24)

 

자기 최선의 자아. 이는 몇백 년간 우정의 본질을 정의할 때면 반드시 전제되는 핵심 개념이었다. 친구란 자기 내면의 선량함에 말을건네는 선량한 존재라는 것. 치유의 문화에서 자란 아이들에게 이런 개념은 얼마나 낯선가! 오늘날 우리는 서로 최선의 자아를 긍정하기는커녕 그것을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우정이라는 결속을 만들어내는 것은 오히려 우리 자신의 감정적 무능ㅡ공포, 분노, 치욕ㅡ을 인정하는 솔직함이다. (28) 

 

콜리지와 워즈워스가 두려워했던 그런 식의 자기폭로를 오늘날 우리는 아주 좋아한다. 우리가 원하는 건 상대에게 알려졌다는 느낌이다, 결점까지도 전부. 그러니까 결점은 많을수록 좋다. 내가 털어놓는 것이 곧 나 자신이라는 생각, 그것은 우리 문화의 대단한 착각이다. (28)

 

순간 우리 셋은 눈을 마주치고, 곧 한꺼번에 깔깔 웃어젖힌다. 웃음이 멈추자 다 같이 빙그레 미소를 짓는다. 수행은 다 같이 했고 수용은 각자가 했다. (34)

이 책은 진짜 죽비같다.

 

나는 성욕이 강한 사람이지만 성욕이 제일 중요한 사람은 아니며, 오르가슴으로 천국을 맛보기는 했어도 지구가 흔들리지는 않았고, 반년 남짓 진이 빠지도록 성적 쾌락에 탐닉할 수는 있어도 늘 그 말초적 자극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는 중이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한마디로, 사랑을 나누는 일은 숭고했지만 거긴 내 거처가 아니었다. 그 뒤로 나는 더 많은 걸 깨달았다. (36)

 

우정에는 두 가지 범주가 있다. 하나는 서로에게 활기를 불어넣는 관계고, 다른 하나는 활기가 있어야만 같이 있을 수 있는 관계다. 전자는 함께할 자리를 미리 마련해두지만, 후자는 일정 중에 빈 자릴 찾는다. (43)

 

이제 미드타운 6번 애비뉴 쪽으로 걸어가는데 문득ㅡ이유는 모르겠다, 어쩌면 그 극작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도ㅡ배터리파크시티 해안 공원 난간 살에 철로 활자를 만들어 주욱 끼워놓았던 프랭크 오하라의 근사한 문구가 떠올랐다. "녹음을 만끽하겠다고 뉴욕의 경계를 벗어날 필요가 전혀 없다. 요 앞 지하철이든 레코드 가게든, 뭐가 됐든 사람들이 인생을 송두리째 후회하진 않는다는 신호를 확인하지 않고서는 풀 한 포기도 마음 놓고 감상할 수 없으니." (55)

 

엄마는 어둠침침한 방 소파에 누워 한 팔은 이마에 걸치고 다른 팔은 가슴에 올려놓은 채 "외로워!"라고 울부짖었다. 그러면 사방팔방에서 여자들은 물론이고 남자들까지 달려와 동네에서 잘난 사람 취급을 받던 이 영혼의 괴로움을 달래보겠다고 쩔쩔맸다. 하지만 엄마는 정신을 놓아버린 듯한 불만 속에서 눈을 질끈 감은 채 등을 돌렸다. 엄마가 바란 건 거기 있는 누구도 건네지 못할 영혼의 위로였다. 그 사람들은 임자가 아니었다. 엄마 주변에는 그런 사람이 없었다. 한때 딱 한 사람 있었지만, 이제 그는 죽고 없다. 
엄마는 사랑을 성배의 자리에 올려둔 상태였다. 사랑을 찾는다는 건 단지 성적인 희열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우주에서 머물 자리를 잡는 일이었다. 엄마는 아빠와 결혼했을 때 영혼에서 모호함이라는 먹구름이 걷혔다고 했다. 엄마는 그렇게 표현했다, 모호함이라는 먹구름. 너희 아버진 마술 같은 사람이었지. 눈길, 손길, 그리고 날 이해해주는 게 그랬어. 엄마는 이 문장을 끝맺을 때쯤 몸을 앞으로 숙였다. 이해는 부적 같은 단어였다. 엄마 말로는, 이해를 받지 못하면 당신이 살아 있는 건지 알 길이 없었고 이해를 받으면 마음이 정돈되며 세상에 존재한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아빠 곁에서 엄마는 당신에게 있었는지도 몰랐던 깊이로 반응했다. 시든, 정치든, 음악이든, 섹스든 모든 것에. 감정에 북받친 듯 엄마는 눈을 감았다. 모든 것.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 엄마는 말했다. "모든 것"이 아빠와 함께 가버렸다고. 엄마 영혼에 드리웠던 구름이 다시 나타났고, 이번엔 그 어느 때보다 검었다. (63)

 

나는 자라서 영락없는 엄마의 딸이 되었다. 꼬마 때부터 똑 부러지는 반응이 돌아오지 않으면 도통 흥미를 못 느꼈다. 내 마음과 주파수가 딱 맞는 사람들이 필요했지만 주변의 어떤 누구도 내가 꼭 듣고 싶어하는 그 말을 돌려주지 않았다. (64)

 

한참 전부터 나는 부르짖고 다녔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엄마가 느끼던 종류의 그 결핍감에 나 역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마치 태어나자마자 '이상적인 친구'를 빼앗기는 바람에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 결핍을 겉으로 드러내는 것만 남은 사람처럼. (65)

 

엄마가 심장 수술을 받았다. 수술을 받고 나온 엄마는 평온한 상태를 유지했는데, 나는 그때까지 엄마에게 그런 구석이 있는지 전혀 몰랐다. 목소리에선 비판과 불평이, 얼굴에서는 불만이 사라졌다. 엄마에게는 모든 게 흥미로운 일이 되었다. 버스에 무사히 올라타고, 두 뺨에 햇살이 비치는 것, 입에 빵을 넣는 것까지도. (95)

 

이것이 볼턴에게 "미쳐 돌아가는 일들이 줄줄이 밀려드는 와중에도 뚜벅뚜벅 걸어나가본 적이 있는 가장 고독한 개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준 외로움이었다. 
다음 순간 볼턴은 역설적인 상황을 맞닥뜨린다. "세상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혼자 됨을 얼마나 사랑했던가. (...) 우리가 베풀지 못한 건, 우리 자신을, 우리의 고독한 영혼을 위해 움켜잡고 낚아채고 그러모을 것들이 뻗으면 닿을 거리에 널려 있었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쓸 당시 볼턴은 칠순이 다 됐었다. 번잡한 도시의 아름다운 단절 속에 비친 현대의 삶ㅡ말로 다 못 할 엄청난 자유가 있는 그 삶이 다른 시대가 한 적 없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우리 자신을 보여주었다는 걸 알 만큼 오래 산 것이다. 볼턴 역시 프로이트가 알았던 걸 알고 있다. 외로움은 우리에게 고통을 안겨주지만 불가해하게도 우리는 그 외로움을 포기하길 망설인다. 심리적 시간 속에서 우리는 단 한 순간도 모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야말로 갈등 간의 갈등이다. 이것이 볼턴의 통찰이자 유일한 깨달음이었다. (105)

 

그곳에 입소하고 몇 달이 지났을 무렵 의자에 풀썩 주저앉아 있는 앨리스의 모습이 너무 기진맥진해 보여서 나는 덜컥 겁이 났더랬다. 그래도 맞은편 의자에 얼굴을 마주 보고 앉아서 안부도 건너뛴 채 그와 이야기를 시작하곤 했다. 내 목소릴 몇 분쯤 듣노라면 그의 얼굴, 몸, 손짓에 다시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내 책과 뉴스 헤드라인과 지인들에 관한 대화를 언제나처럼 신나게 나누었지만, 언쟁을 벌이는 일은 없었다. 그 기적 같은 변환의 광경을 영영 잊지 못할 것 같다. 고도의 지성이 작동하자, 반송장 같던 사람이 생생한 활기를 되찾는 모습을 본다는 건 그야말로 마법이나 다름없는 변신을 목격하는 기분이 드는 일이었다.
"여긴 대화가 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어요?" 한번은 내가 그렇게 물었다.
"없지 그럼." 그러면서 앨리스는 덧붙였다. "잡담이야 되지. 잡담은 많이 나눠요. 하지만 대화? 없어요. 그런 건. 지금 우리가 나누는 이런 대화는 당연 없고말고." 
앨리스는 매일같이 귓속을 채우는 잡담 때문에 자기가 죽어간다고 했다. 침묵만도 못해, 훨씬 못해, 그렇게 말했다. (115)

매일같이 귓속을 채우는 잡담 때문에 자기가 죽어간다니. 침묵만도 못하지 정말.

 

좋은 대화란 공통된 이해관계나 계급의식이나 공유된 이상 따위보다는 기질에 달린 문제다. "그게 대체 뭔 소린데?"라고 따지기보다는 "뭔 말인지 딱 알지"하며 자기도 모르게 반색하게 되는 기질. 그런 공통의 기질이 있으면 대화는 자유로우면서도 거침없는 흐름을 어지간해선 잃지 않는다. 하지만 그게 없으면 언제나 살얼음판을 걷기 마련이다. 
언쟁이 항상 과열되면 나는 이런 말로 스스로를 다독이려 안간힘을 쓴다. "잘 봐, 그냥 서로 주파수가 어긋난 거야, 그게 다라고, 주파수가 안 맞는 거야." (127)

 

나대로 탐색할 수 있어야 마땅했던 것에 대해 설명을 해야 할 때마다, 나는 점점 방어적으로 변해갔고 고립된 채 닫혀버린 사람이 된 기분을 느꼈다. (128)

 

나는 세상 사람 모두가 알면서도 늘 잊고 지내는 게 무언지 깨달아가기 시작했다. 성적으로 사랑받는 것은 실제 자기 자신으로서 사랑받는 게 아니라 서로의 내적 욕망을 자극하는 능력으로 사랑받는 것이란 걸. 매니가 욕망했던, 내게 할당됐던 그 권력이 오래가지 않으리라는 건 기정사실이었다. 누군가를 영원토록 매혹할 수 있는 건 오직 사람의 머릿속 생각이나 영혼의 직관뿐인데, 내가 품은 그것들을 매니는 사랑하지 않았다. 매니에겐 그런 것들이 필요치 않았다. 이렇게 누군가와 감각으로만 연결된다는 건, 결국 내가 나 자신에게 감당이 안 될 정도로 내던져져서, 취약해지다 못해 곧 자기회의에 빠져 죽어갈 거라고 느끼게 된다는 걸 의미했다. (129)

 

이 사안의 진실은 울슨도 제임스도 우정이라는 과업을 감당할 능력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둘 다 그 관계를 소중하게 여기기는 했지만, 그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마음을 사로잡혔던 건 신경증적 우울이었고, 각자가 그 감옥에 갇혀 있었다. 자기를 위해서도 못 하는 일을 상대방을 위해 해낼 순 없는 노릇이었다. (134)

 

믿거나 말거나, 젊고 약삭빠른 여러분 가운데 내 얘기를 믿는 사람이 있거든 나를 불쌍히 여겨주기를. 이 나이 먹도록 아직도 '뭐가 되고 싶은지' 도통 모르겠으니. (...) 
우리 위층에 있는 그 푸닥진 델리에서 나는 열세 살 때와 다를 바 없이 무궁무진한 가능성에 열려 있다. (...)
나와 비슷해 보이는 저 수많은 사람도 영혼의 폭동에 어울리는 전문적인 외피를 끝끝내 찾아내지 못한 신세다. 많은 이가 영영 찾지 못할 것이다. (...) 이건 추측이라기보단 상처와 별들이 내는 목소리다. 나도 그런 삶을 살아왔고 아마 앞으로도 계속 살아낼 것이다. 그러다 결국 사람들이 내 핫도그[재주]마저 채가겠지. (...)
그러나 만일 당신이 이 사회에서 당당하고도 탐구심 넘치는 '실패자'이고, 우리 같은 사람이 무수히 많다는 사실에서 모순적인 위안이라도 얻을 수 있다면, 무엇을 시도했고 지금은 왜 취약해졌는지 안다는 건 현명하고도 명예로운 일이다. 한때 빛나는 포부를 망토처럼 두른 당신을 보았지만 지금은 그저 흐린 날 어수선한 이부자리와 거친 나무 탁자에 놓인 더러운 컵들밖에 보지 못하는 이들이 주는 충격에 왜 이토록 취약해졌는지를. (143)

 

내 친구들도 만화경 같은 매일의 경험을 잘 흔들어 섞어야만 친밀함에서 오는 고통, 공공장소의 활기, 낯선 이들의 터무니없는 간섭 따위를 적당히 희석될 만하게 배치할 수 있었던 것이다. (146)

 

그 모든 일 중 무엇 하나라도 잘해낸다는 건 별생각 없이 삶과 관계 맺는 일, 다시 말해 내 두려움을 사랑했던 것 이상으로 삶을 사랑하는 일이었을 텐데, 그것이야말로 내가 할 줄 모르는 일이었다. 내가 확실히 할 줄 아는 건 몽상으로 세월 흘려보내기였다. 그저 '상황'이 달라져서 나도 달라지기를 간절히 바라고만 있는 것. (165)

 

특히나 엄마는 내게 가슴속 맺힌 한을 풀어놓느라 여념이 없다. 어떤 의미에선 이런 이웃이 우리 엄마 같은 뉴요커를 만든 셈이었고, 다른 한편으론 엄마가 한세상 내가 알아온 바로 그 여자, 고집스레 인생에 화를 내는 여자로 남아 있단 뜻이기도 했다. (168)

 

아이들이 필요로 하는 만큼의 관심을 건넬 만한 시간도 심적 여유도 없는 노동자 계급 이민자들의 자녀였던 우리는, 거리에 나와 서로가 서로에게서 끌어내는 반응 속에서 자기 존재를 감지하는 일에 온통 정신이 팔려 있었다. 우리의 놀이는 사실 진짜 놀이였다기보다 우리에게 유일하게 중요했던 그 사회의 가치와 존중이란 위계 속에서 힘과 요령, 술수와 기발함으로 매일 각자가 설 자리를 정하는 연습에 가까웠다. 길바닥 아이들의 놀이란 그런 것이었다. (174)

 

외로움이라는 습관은 질기다. 레너드 말로는 외로움을 쓸모 있는 고독으로 바꿔내지 않는 이상 난 영영 엄마의 딸일 거란다. 물론 그 말도 맞기는 하다. 사람은 이상화된 타자의 부재로 인해 외롭지만, 그 쓸모 있는 고독 속에 스스로를 상상의 동반자 삼아 침묵에 생명을 불어넣고 지각 있는 존재라는 증거를 방 안 가득 채워 넣는 '내'가 있다. 이런 통찰의 기틀을 마련하는 법은 에드먼드 고스로부터 배웠다. 그는 탁월한 회고록 <아버지와 아들>에서 아버지의 거짓을 발견한 여덟 살 아이가 내면의 혼란에 빠져드는 과정을 묘사한다. 아이는 속으로 질문한다. 아빠라고 모든 걸 아는 게 아니라면, 아빠가 아는 건 대체 뭐지? 사람들이 하는 말이랑 그 사람이랑은 무슨 관계일까? 뭘 믿고 뭘 믿지 않을지 어떻게 결정할까? 이런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아이는 문득 자기에게 말을 걸고 있단 걸 깨닫는다. (185)

외로움을 쓸모 있는 고독으로 바꿔내는 일인 독립. 

 

로다의 화법에 담긴 열정과, 피와 살이 있는 현실이 요구하는 바 사이에는 시험해본 적 없는 신념이라는 미지의 중간지대가 놓여 있다. 될 대로 되라지! 그렇게 화난 목소리로 외치기란ㅡ로다는 물론이고 우리에게도ㅡ얼마나 쉽던가! 반면에 이런 반항적 단순함을 지속적으로 약화시키는 통제할 수 없는 감정의 위력을 경험한다는 건 얼마나 호된 시련인지. 실패의 순간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가는 과정에서 로다는 그야말로 이론과 실제의 간극을 상징하는 인물이 된다. 우리 중 수많은 사람도 수시로 놓이게 되는 그 간극. (191)

 

반응형
LIST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