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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의 삶이 얼마나 수련과 절제의 연속이어야 겨우 유지되는지, 그럼에도 언제라도 사다리에서 내려와야 하는 상황으로 내몰릴 수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 당신이 들려준 피아니스트의 삶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가혹했어. 아주 중요한 일이 아니면 사람 만나는 걸 자제하고 오로지 피아노 연습만 한다고 했지. 틈이 나면 악보를 공부하거나 자거나 책을 읽는 정도가 다였어. 손을 다칠가 봐 격한 운동도 제대로 하지 않았잖아. (85) 

 

사랑에 보태진 연민이라는 감정은 사람을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들어. 섬세한 당신과 기 싸움을 해서 당신을 피로하게 하고 싶지 않았어. 혹자는 내가 당신의 시무룩함을 신경 쓰고, 눈치를 보고 맞추려는 게 다 휘둘리는 거라고 손가락질하겠지. 하지만 상대에게 연민을 느낀느 순간 이미 지는 거잖아. 그렇잖아. (86)

 

'바쁘다'라는 단어를 당신이 처음 썼던 날을 기억해. (97)

 

나는 당신이 언제 시간이 날지, 아니 시간을 내줄지 알 수 없어서 그동안 출장 준비도 틈틈이 미리 해왔는데. 그래서 남아서 야근을 얼마나 했는데. 당신의 연주회, 당신의 연습에 비해 나의 일이 얼마나 밀려나 있었는데... 같은 말들이 입 안에서 감돌기만 하고 밖으로 나가진 못하고 있었어. 엄밀히 따지면 누가 그러라고 시킨 건 아니니까. (101)

 

내 바람대로 아침까지 내 곁에 있어주었음에도 나는 놀라울 정도로 황량한 기분이 들었어. 그래서 불편하게 자는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홀로 남겨진 기분을 느낀 나를 위해서 다시는 이런 무리한 부탁을 하지 말자고 다짐했지. 그런데 무리한 요구를 하지 못하는 관계는 그것대로 또 얼마나 쓸쓸할까. (114)

 

나를 잃어버리지 않는 사랑이라는 게 가능하기나 한가? (121)

 

"미안해요."

화를 내는 사람에게 미안하다는 말로 대응하면 화를 내는 이유가 없어져. 상대가 나한테 원하는 게 있을 때만 화내는 것이 효력을 발휘해. 하지만 상대가 나한테 바라는 게 더 이상 없다면 화내는 사람은 더 비참해지기만 하지. (144)

 

나를 향한 당신의 일시적인 몰입은 패배감과 불안감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함이었던 것. 마주하고 싶지 않은 시간을 다른 무언가에 몰두해서 메우고 싶었던 것. (153)

 

인간의 자기 보존 능력은 참 대단해. 그리워하는 감정이 너무 강렬해서 몸이 부서져버릴 것 같으면, 완전히 무너져 내리는 것만은 막으려고 마음이 스스로에게 이런저런 말을 걸더라.

어쩌면 나는 당신이 아니라, 사랑을 사랑한 게 아니었을까. (하지만 그 사랑은 당신이 야기한 것이지.)
 
당신은 사랑할 만한 사람이었을까. 잘 알지도 못하면서 머릿속에 그려낸 당신의 이상화된 모습을 사랑했던 것은 아닐까. (하지만 누군가가 사랑할 만해서 사랑하는 건 또 아니지 않나.)

나는 당신이 돌아오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을까. 막상 돌아오면 기쁨보다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 더 크지는 않을까. 최고의 시간은 두 번 다시 찾아오기 힘들잖아. (여우와 신 포도의 정신 승리!)

지금 이렇게 미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은 당신을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내 통제 욕구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래, 집착 말이야. 나야말로 권태로운 주변 환경으로부터 현실도피를 하기 위해 당신을 이용했는지도 몰라. 나의 공허함을 당신에게 몰입하는 것으로 메꾸려고 한 것. (사랑과 통제 욕구가 혼동되는 감정인 건 사실이지만 그렇게 내 탓으로 돌린들 뭐가 달라질까.) (158)

 

"많이 힘들었죠...?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세상의 무게가 어깨에 느껴지는 게 당연해요." 

그 여자는 내가 늘어놓은, 주관이 다분히 섞인 상황에 대해서 그 무엇도 자기 의견을 보태지 않았어. 마치 그런 건 요만큼도 중요하지 않다는 듯이.

"어떤 괴로움도 공부가 돼요. 잃는 건 없어요." (173)

 

흐릿한 희망 고문이 선명한 이별로 결론 나면 후련할 줄 알았는데, 날카로운 비수에 찔린 심장에선 콸콸 피가 쏟아져 나왔어. 당분간 만나지 말자는 말의 모호한 가능성을 끌어안고 있는 편이 더 고통스러운지, 아니면 더 이상 보지 말자는 이별을 정확하게 선고받는 쪽이 더 고통스러운지 점점 더 알 수가 없었어. (187)

 

자기 마음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내가 상대를 덜 사랑할 때만 가능한 일이 아닐까. 내가 상대를 많이 좋아하면 어쩐지 내가 늘 더 그를 좋아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고, 그러다 보면 그 앞에서 한없이 작아진다. 하고 싶지만 못 하는 말이 생기고, 하기 싫지만 해야 하는 말을 의식하기 시작한다. 진심을 드러내는 일은 불가능한 모험처럼 여겨지고, 도중에 상처를 작게라도 한번 받으면 자발적으로 눌변이 되어간다. (212)

 

그렇다 해도 사랑에는 가해자도 피해자도 없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 조금 더 혹은 덜 사랑한 사람이, 조금 먼저 사랑하기를 그만두거나, 사랑하는 마음을 멈추는 데 시간이 좀 더 걸리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213)

 

이 마음이야말로 어쩌면 사랑의 마음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사랑으로 행복했던 것만큼 사랑으로 고통을 받으면 그 낙차에 놀라서 그곳에서 빠져나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막상 그 고통이 사라지면 마냥 기분이 좋지만도 않다. 상처가 회복되기를 바라면서도 완전히 회복되어서 기억조차 남지 않는 건 또 원치 않는 것이다. 세상에, 마음 아픈 것을, 힘겹고 고통스러웠던 감각을 그리워하다니! (215)

 

 

오랜만의 임경선.
지난 언젠가 정말 내가 했던 생각과 행동 모두 그대로여서, 높이서 이전의 나를 관조하는 것 같기도 했고 또 어딘가 부끄럽기도 했다. 

오늘 퇴근하면서 앙보에게 가져다 주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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