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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갈수록 맛이 좋아지지만, 단순히 시간만 지난다고 해서 맛있어지지는 않는다. 적절한 환경에서 충분한 시간을 견딘 차는 빛을 발하지만, 안 좋은 환경에서 보관한 차들은 그렇지 못하다.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당연히 훌륭한 어른이 되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마치 사람처럼 스물부터 예순까지 가장 맛있게 무르익고, 이후엔 맛이 떨어지기 시작해 백 년이 넘은 차는 마시지 않는다. 또 하나의 흥미로운 사실은 너무 적은 양의 차를 따로 오래 보관하면 그 맛과 생명력을 잃어버린다는 점이다. 하물며 차도 혼자 떨어져 있으면 살 수 없다는 것이다. (27)

 

오른손잡이가 왼손으로 그린 그림처럼 엉망이었다. 쓰면 쓸수록 내가 실패하고 있다는 것만 제대로 알게 될 뿐이었다. 나를 쓰는 일도 자꾸 실패하는데 남은 어련할까. 그러니 계속 쓰려는 마음은 실패를 맞이할 수밖에 없다.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전제한다. (33)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만 마을 하나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풍요로운 삶을 위해 누구에게나 마을이 필요하다. 한 지붕 아래서 큰일이 나면 뛰쳐나갈 다른 지붕이, 함게 먹고 입고 사는 사사로운 이야기를 나눌 말벗이, 위험을 헤쳐 나가고 문제의 대안을 고민할 팀이 필요하다. (47)

 

종일 한 글자도 못 썼는데 잠이 올 리가 없다. 빈 화면을 앞에 두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다. 떠오르는 문장이 모두 지루하고 낡게만 느껴진다. 문자들이 모래처럼 부서지고, 화면이 폭포수처럼 쏟아지고, 미래는 폭풍우처럼 휘몰아친다. 당장 한 글자도 쓰기 어려운데 앞으로는 어떤 걸 쓸 수 있을까. 빈 문서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모두 보이는 것 같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산에 숨어 살고 싶다. 스르르 잠에 들어서 영원히 깨고 싶지 않다. 그렇게 온몸의 세포가 격동하고 있는데도 겉으로는 땀 한 방울 나지 않는다. 여전히 아무것도 해내지 못한 사람이다. (50) 

 

한번 쌓인 내공과 요령은 배신하는 법이 없었다. 일이 완전히 몸에 익으면 몸은 일하게 두고 영혼은 어디로든 떠날 수 있었다. 일과가 끝나면 몸은 피곤했지만 마음은 깔끔했다. 밥도 맛있었고 잠도 달았다.
그러한 신성한 반복이 글에서는 종말과 같은 것이었다. 어제의 나를 반복하는 것은 어떤 것보다 경계해야 할 일, 동어 반복은 작가가 할 수 있는 최악의 것이었다. 매번 백지 앞에서 길을 헤맸다. 헤매는 것 자체가 글의 본질이었다. 종일을 매달려도 개운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몸이 자유로워도 마음은 어딘가에 결박된 듯이 초조했다. (51)  

 

침대에 누운 채로 멍하니 천정을 바라보았다. 가장 먼저 떠오른 얼굴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것은 친구도 아니요, 엄마도 아니었다. 바로 친구의 엄마였다. 나에겐 아주 작은 힘이 필요했다. 꿉꿉한 방에 창문을 열어 환기를 하듯 타인이 가져다주는 산뜻함이 필요했다. 너무 지쳐서 말 한마디 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을 땐 누군가 어깨를 톡 건드려주는 것만으로도 다시 고개를 들고 몸을 일으킬 힘이 생기곤 했으니까. (87) 

 

맛있다는 것은 때로 몸과 마음을 삶으로 완전히 불러냈다. 그럴 수 있을 만큼 강했다. 내 손이 그런 밥상을 차릴 수 있다는 것이 때로는 무적처럼 느껴졌다. 내 속을 채우고 데우는 음식을 만들고, 나를 살려내는 것이 여전히 가능했다. 어렵고 힘들 때일수록 부엌에 있었다. 그곳에서 가장 단순해졌다. 나는 살고 싶고, 그것도 아주 맛있게 살고 싶어서 거기 있었다. (중략) 배가 든든하게 불러오고 등줄기로 땀 한 줄기가 훅 흘러내릴 즈음, 얼굴은 새것처럼 반질반질 윤이 날 것이다. (89) 

 

수백 번 달려나갔을 마음과 한없이 더디기만 한 몸, 순간에 벌어졌다가 사라지는 문의 틈새 같은 것이 눈앞에 떠올랐다 사라진다. 
"하루 종일 문이 열리길 기다린 사람이 그걸 놓쳤을 때 눈빛이란, 도저히 쳐다볼 수가 없어." 
말을 하는 엄마의 목소리가 꼭 그 눈을 앞에 둔 것처럼 무너진다. (138)

 

"어떤 사람은 지금 집에 세 살짜리 애가 혼자 있다고, 자기가 얼른 가서 봐줘야 한다고. 막 다급해. 빨리 가야 하니까 어서 문 열어달라고."
엄마는 뜸을 들인다. "그 애가 세 살이었던 때의 기억만 머릿속에 살아 있는 거지."
엄마는 조금 더 천천히 말한다. 우리는생각에 잠긴 듯 잠시 말이 없다. 나는 어떤 기억은 살고, 어떤 기억은 죽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아, 그런데 매일 문 앞에서 기다리던 그 아저씨가 이제는 침대에 누워만 있어."
침대 위에 수평으로 포개어진 한 늙은 남자의 몸을 떠올린다. 그것은 절망의 모양과 비슷할까. 그것을 방 안에 앉아 있는 내 모습과 나란히 두어본다. 아저씨가 그토록 원하는 밖으로 나가서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일까. 밖이 있다는 확인일까. 밖으로 갈 수 있다는 확인일까. 
나는 묻는다. "엄마는 어떤 기억이 살아남을 것 같아?" 
노인과 대화를 하다 보면 깨닫는 사실이 있다. 이 이야기를 열 번 정도 더 들은 적이 있다는 것. 그러나 여전히 노인의 얼굴은 생생하기만 하다. 영화처럼, 돌림노래처럼 정해진 레퍼토리와 멜로디가 반복되는 동안, 나는 훗날 내가 어떤 이야기를 돌려 부르게 될까 상상해 보고는 했다. 지금 이 순간 나에게 과거는 지나간 것일 뿐이고, 어떤것이 특별히 크거나 작다고 느끼지 않는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어떤 시기를 그토록 강렬하게 기억하게 될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140)   

 

엄마와 내가 이렇게 다른지 몰랐다. 불쑥 불쑥 엄마와 불통하는 순간, 가장 자주 들었던 감정은 놀랍게도 '귀찮음'이었다. 
바야흐로 좋아하는 것만 보고 살 수 있는 세상이다. 이제 나와 다른 존재를 마주치지 않아도 된다. 알고리즘은 입안의 혀처럼 내가 원하는 것을 알려준다. '말하지 않아도' 나보다 내가 원하는 것을 더 잘 파악한다. 기분 나쁘고, 다르고, 불편한, '보기 싫은' 것들은 손가락으로 '관심 없음', '싫어요'를 누루는 것으로 쉽게 치울 수 있다. 시선은 초 단위로 나뉘어 기록되고, 클릭 몇 번은 다음을 결정하는 근거가 된다. 결정할 것은 점점 더 줄어든다. 하나의 거대하고 확고한 선호를 만든다. '눈빛만 봐도' 알 수 있게 된다. 나와 다른 언어를 쓰고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을 만나는 불편함, 갈등은 사라진다. 어쩌다 나와 완전히 다른 언어를 가진 사람을 만나면 문득 말문이 막힌다. 나와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을 좀처럼 마주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이 평소에 당연하게 생각해 온 신념, 사용해 온 언어들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타인이 이 세상에 가득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럼 어디서부터 말하기 시작해야 할까. (162) 

 

가끔 궁금했다. 길을 걷다가 오줌이 마려우면 그 자리에서 바지를 내리고 쌀 수 있는 삶이. 웃통을 벗으면 등목을 해주고, 아랫춤을 벗어던져도 모든 사람이 이해하고 타이르는 삶이. 노팬티나 노브라로 밖에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수많은 고민과 자기검열에 휩싸이는 친구들을 보며 생각했다. 우리와 그들은 얼마나 다른 세계에 사는가 하고. 길에서 아무렇지 않게 오줌을 싸는 상상을 했다. 온 세상이 나의 화장실이라니. (218) 

 

오래전 일인데도 어제 겪은 것처럼 끔찍하게 생생했다. 슬픔에 뿌리를 둔 것들은 그랬다. (224)

 

엄마의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 희망이었다는 사실을 하나씩 확인할 때마다 나는 헛웃음이 났다가 나중엔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삶은 아주 작은 몇 가지 변수만으로도 쉽게 무너져 내릴 수 있음을 목격하고 있엇다. 어떤 사람은 하루에 버스가 두 번 오거나, 재봉틀이 너무 크고 무겁거나, 옷에 구멍이 나지 않거나, 몇 년 일찍 태어났다는 이유 정도로 망할 수 있었다. 그런 사소한 변수들로도 지각변동을 맞을 수 있는 것이 가난이었다. (227)

 

무대 위 코미디언의 말이란 오래 길들인 무사의 칼처럼 날카롭게 반짝인다. 말함으로써 다시 생을 다짐하는 강인한 생명력이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그가 지금 막 떠오른 것을 마구 떠드는 것처럼 보일 테지만 말이다. (270)

 

그렇게 노래 두 곡을 들고 오는 대신 무언가를 두고 왔다. '왜 보잘것없는 저 따위를 보러 오셨나요'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 같은 것을. 그것이 나를 낮추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나를 보러 온 사람마저 낮추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283)

 

넓고 넓은 유튜브에서 이런 수상한 영상을 함께 보다니. 이순와 나는 깔깔 웃는다. 이런 의외의 공통 시청 기록을 발견하는 것은 21세기의 우정이 누릴 수 있는 작은 기쁨이었다. 모두 각자의 취향과 알고리즘 안에 꼭꼭 숨어 사는 시대의 흔치 않은 우연이었다. 이 감정을 반가움이라고만 불러야하나 아리송했다. 반가움과 기쁨 사이 어딘가에 이를 위한 새로운 단어가 필요했다. (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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