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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은 '나는 남들과 다르다'고 믿는 데서 출발한다. (14)

 

자기가 하는 일을 정당화하기 위해 상대방을 악마화하기 시작하지. 자기 맞은편에 서 있는 인간은 동등하게 대우할 존재가 아니라고, 그러니 내 맘대로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네. 검은 눈으로 보면 모든 게 검게 보이는 거랄까. (25)

 

흑화한 다음에 하는 말들도 다들 비슷하다네. 후배들에게 마치 후일담처럼 말하지. "그때 많이 배웠다"고. '그때'는 자신이 승진 명단에서 누락돼썩나, '조직의 쓴맛'을 봤을 때를 말하네. 그럼, '많이 배웠다'는 건 무슨 뜻일까? 자신이 흑화한 것이 아니라 성장한 것이라고 말하는 거라네. 진정한 '프로 직업인'으로 거듭났다는 거지. (26)

 

생존자. 범죄의 고통에 갇힌 피해자가 아니라 그 고통을 이겨낸 생존자다. 생존자라는 말과 함께 그동안 견뎌낸 한순간 한순간이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33)

 

나는 성폭행을 당한 순간 피해자가 되었고 지금까지도 여러 이름을 갖고 있디만 그 사실에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렇게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으나 현재 나는 '생존자'보다는 '피해자'를 선호한다. 일어난 일의 엄중함을 깎아내리고 싶지 않다. 희망의 여정을 걸어와 승리를 쟁취한 척하고 싶지 않다. 모든 것이 무사한 척하고 싶지 않다.(록산게이, <헝거> 중) (34)67_곤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빈곤함이 그리고 빈곤의 재생산 구조가 이들 삶의 조건이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조은, <사당동 더하기 25>) (39)

 

소현은 고개 들어 저항하지 않는다. 모호한 대답으로 피해가려 한다.
"그냥 잘 모르겠어요." "그냥 제가 잘못했어요."
'그냥'은 자기 세계가 뚜렷하지 않음을 나타내는 부사다. (54)

 

젊은 세대의 기억이 비슷하다는 것은 자기소개서에서도 드러납니다. 신입사원 공채에 참여했던 한 전형위원의 소감을 들어볼까요? 그는 '자기소개서'가 아닌 '우리소개서'가 아니냐고 말합니다. (65)

 

그렇습니다. 모든 건 당신이 결정할 몫입니다. 다만, 의미 있는 삶이 되려면 누구에게도,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는 자신만의 기억을 갖기 위해 세상과 마주 서야 하지 않을까요. 상황이 불안하고 두렵더라도. 정확하게는 상황이 불안하고 두려울수록 말입니다. 잊지 마세요. 당신이 직접 경험하고, 느끼고, 기뻐하고, 고통받은 만큼만 진실입니다. 그것만이 진실입니다. (67)

 

어떻게 성공하느냐보다 어떻게 실패하느냐가 때로는 더 중요하다. 그것은 비단 실패한 원인을 알아야 다음에 실패하지 않는다는 실패학의 차원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가 실패에 주목하는 이유는 성공했을 때보다 실패했을 때 휴머니티, 인간의 본질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69)

 

단지 말하고 싶은 것은-진리가 아니라-'사랑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다. 진정한 사랑은 사람을 속박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하고, 성장하게 한다. 사랑도 결국은 자유의 이야기, 성장의 이야기다. 진정한 사랑은 러브 스토리를 넘어선다. 세바스찬과 미아는 만남을 통해 성장했고, 그 성장한 마음으로 서로의 꿈을 격려하고 서로의 자유를 지지했다. 상대가 진정 원하는 걸 이루길 바라는 마음을 잃지 않았다. (85)

 

그때 그 기자들은 왜 겉늙었던 것일까. 기자들은 연식이 좀 돼 보이는 게 취재에 도움이 되기 때문일까. 그것은 기자가 되어 접해본 직업들, 그러니까 판사나 검사, 정치인도 다르지 않았다. 나이 든 척 발언하고 행동했다. (104)

 

그 서열의 고리 속에서 젊지도, 늙지도 않은 인간형들이 차고 넘친다. 젊지만 나이 든 척 행동하는 '애 늙은이'와 나이 들었지만 철들지 않은 '늙은 애'들이 공생하고 있다. '애 늙은이'들은 조직의 문제점에 패기 있게 도전하지 않는다. 기존 체제에 기민하게 적응하려고만 한다. '늙은 애'들은 욕망을 자제하지 못한 채 냄새만 맡으면 무섭게 달려든다. 이 '애 늙은이'와 '늙은 애'들의 세상에서 어른다운 어른은 보이지 않는다. (106)

 

이렇듯 작은 사회에서 아웅다웅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직역이기주의의 늪에 빠져든다. 기자들은 기자들 사회에, 검사들은 검사들 사회에, 의사들은 의사들 사회에 갇혀 산다. 그 세상이, '자기들만의 리그'가 전부인 줄 안다. 기자가 최고인 줄 알고, 검사가 최고인 줄 안다. 자신들이 가장 고생하는 양 집단적으로 자기연민에 빠진다. (142)

 

하기야 나도 부아가 치밀 때가 있다. 예를 들어 막말은 참아도 감각 후진 것은 정말 못 참겠다. 그렇다고 머릿속 생각을 입 밖으로 옮기지는 않는다. 그거야말로 감각이 후졌음을 증명하는 것이므로. (147)

 

영화 <기생충>의 박 사장은 냄새에 극도로 민감하다. "냄새가 선을 넘지." "왜, 지하철 타면 나는 냄새 있잖아?" 그는 냄새가 싫어서 코를 막다가 죽음을 맞는다. 그는 왜 역겨움을 참지 못한 것일까. 그건 역겨움을 표현하는 것도 습관이기 때문이다. (176)

 

케빈 카터라는 사직작가가 있었다. 그는 굶주림에 죽어가는 아프리카 소녀와 그 옆에서 소녀가 죽기를 기다리는 독수리의 모습을 촬영했다. 기아 문제의 심각성을 알린 카터의 사진은 퓰리처상을 받았다. 촬영 후 카터는 독수리를 멀리 쫓았지만 그는 거센 비판에 직면해야 했다. "왜 그 아이를 곧바로 구하지 않았느냐." "사진을 찍는 게 아이보다 중요했느냐." 그는 괴로워하다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190)

 

미국 역사학자인 티머시 스나이더 예일대 교수는 <폭정: 20세기의 스무가지 교훈>(52)에서 직업윤리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재판 없는 처형은 없다는 규범을 법률가들이 따랐다면, 동의없는 수술은 없다는 규정을 의사들이 받아들였다면, 노예 노동 금지를 기업가들이 지지했다면, 살인과 관련된 서류 작업의 처리를 관료들이 거부했다면, 나치 정권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잔혹 행위를 실행에 옮기기가 훨씬 더 어려웠을 것이다. (195)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사람이 변하는 건 큰 병을 앓았거나 내면이 부서지는 좌절을 경험했을 때다. 자기 자신에게 걸려 넘어졌을 때 자신이 누구인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생각하게 된다. 그동안은 마주하지 못했던 본질적인 질문 앞에 서게 된다. (208)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은 다시 쓰여야 한다. "하나의 유령이 전 세계를 배회하고 있다. '긱 이코노미'라는 유령이."
'긱 이코노미'가 무서운 건 스스로를 착취하게 만들기 땜누이다. 나를 고용한 사용자도 나고, 내가 고용한 근로자도 나다. '디지털 기기나 스마트폰 앱을 이용해 자신이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만큼 일하고, 프로젝트별로 수수료를 받는다.' 자유롭게 일하는 것 같지만 전혀 자유롭지 않다. 사실상 강제적으로 이뤄지는 저임금 중노동일 따름이다. (250)

 

그 과정에서 내가 얻은 교훈은 이것이다. 힘든 일이라고, 중요한 일이라고 꼭 인상을 찌푸리며 할 필요는 없다. 늘 눈앞을 가로막는 적은 자기연민이다. 나중 일은 나중에 고민하고, 뒷담화는 남들에게 맡기고, 성큼성큼 즐거운 마음으로 가면 된다. 내가 가보고 싶은 대로 가보면 된다. (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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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의 복수는 곧 사적 복수다. 법으로는 금지된 것. 그러나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 관객들은 복수가 성공하기를 숨죽여 지켜본다. 저 자를 반드시 죽여야 해. 현실에서는 허용되지 않는 생각이 폭발한다. (31)

 

어디에나 사람이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느슨하던 마음이 이내 선연해진다. 수료증이 나와서 나중에 면접같은데서 활용하기 좋을 거야!나는 왜 여기서 태어난 게 아닐까. 여기서 태어난 사람은 왜 내가 아닐까. 그는 아침에 일어나 제일 먼저 무슨 생각을 할까. 그는 무엇에 행복하고 무엇에 불행할까. 나처럼 은행에서 돈을 빌렸을까. 자주 일기를 쓰고 텔레비전을 보다 잠이 들까. 말 못할 비밀을 가졌을까. 누군가에게 괴롭힘을 당했을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까. 부모와는 사이가 좋을까. 지금은 어디에 있을까. (45)

 

나를 가여워하거나 불행히 여기지 않는 것이 지금까지 살면서 내가 만들어낸 것 중 가장 좋은 것이다. 이것은 내 것이다. (56)

 

자다 깨면 나는 분노와 살의에 가득차서 소송과 관련해 해야 할 일들 그러나 하기 싫은 일들 끝이 보이지 않는 일들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은 일들에 대해 생각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엄두도 내질 못했다. 나는 소송의 끝인 선고를 듣자마자 하노이로 떠났다. 나는 재판에서 모두 이겼고 상대는 내게 허위적시 명예훼손으로 손해배상을 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하노이에 도착해서 반나절을 걷다가 맨 처음 알아차린 것은 이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아무도 모르는 일 때문에 육 년을 시달리며 살았다니. 기분이 이상했다. 아무도 모르는 일 때문에 수천만 원을 들여가며 몸과 마음이 피폐해지는 일에 매달렸다니. 이렇게 아무도 모르는데. 나는 그저 모른 척하고 지나갈 수는 없었나? 수천만 원의 돈을 들일 만큼 내게 중요한 일이었나? (63)

 

바딘구나 서호에 갔다가 뜨랑 띠엔 쁠라자가 있는 거리로 돌아올 때의 안도감. 집으로 돌아왔다는 기분. 이제 몸을 씻고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거나 글을 쓰면 되는 밤의 편안한 기분을 나는 뜨랑 띠엔이라는 글자를 통해 여전히 느낄 수 있다. (67)

2021년 겨울이 떠오른다. 비나스와도 이야기하지만 종종 그때가 그립다. 

 

저녁이 오면 사람들은 막대기를 조심스럽게 거두어들이며 빨래를 걷는다. 나는 숙소에 들어가 속옷을 빨아 발코니 난간에 널어둔다. 살아 있는 사람이 해야 하는 일. 빨래. 설거지. 밥 먹기. 잠 자기. 친구와 이야기하기. 고백하기. 어떤 것은 비밀로 간직하기. 울음을 참기. 마침내 울음을 터뜨리기. 웃기. 속상해하기. 억울해하기. 노력하기. 포기하기. 용기를 갖기. 실패하기. 성공하기. 묵묵히 살아가기. 소리지르기. 가슴을 치기. 다독이기. 위로하기. 외면하기. 잊어버리기. 잃어버리기. 어느 날 떠올리기. 안도하기. 한숨 쉬기. 악몽에서 깨어나기. 그리하여 죽기. (80)

 

슬픈은 사랑을 먹고 자란다. 슬픔은 충만한 사랑을 알아본다. 사랑을 먹고 자란 슬픔은 이내 충만해진다. 

나는 슬픔이 없는 사람을 경멸한다. 아니, 슬픔을 모르는 사람을 경멸한다. 슬픔을 모르는 사람은 매사에 무례하다. 슬픔을 모르기 때문이다. 슬픔을 모르는 사람은 매사에 자신이 옳다. 슬픔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슬픔은 중요하다. 슬픔이 있는 사람은 무례하지 않다. 슬픔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틀림을 가늠해본다. 슬픔이 있는 사람은 모든 말을 내뱉지 않는다. 슬픔이 있는 사람은 적절히 타인과 거리를 둔다. 슬픔이 있는 사람은 타인을 해하지 않는다. 슬픔이 있는 사람은 매사에 조심한다. 슬픔이 있는 사람은 공감할 줄 안다. 그래서 슬픔이 있는 사람은 조용히 타인을 위로한다.

사람들은 각자의 슬픔을 품고 살아간다. 슬픔은 없애버려야 할 것이 아니다. 상처는 낫고 슬픔은 머문다. 우리는 우리에게 머물기로 한 슬픔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 슬픔은 삶을 신중하게 한다. 그것이 슬픔의 미덕이다. (92)

이 책의 정수. 

 

살아있다는 생각도 그만 하고 싶었다. 그냥 살고 싶었다. 삶과 죽음에 대해 잠시만이라도 생각을 멈추고 그냥 살아 있고 싶었다. 

살아있다는 것을 의식하는 일이 얼마나 피로한 일인지 공감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말없이 그를 안아주고 싶다. (101)

 

도착해서는 숙소에 짐을 풀고 텅 빈 방안을 둘러보는데 슬픈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나는 가만히 서 있는데 발목을 적시더니 이내 무릎까지 차오르다가 턱 아래에서 찰박였다. 떠나왔기 때문일까? 혼자 덩그러니 호텔 방에 남겨져서일까? 나는 슬픔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당장은 알 수 없는 슬픔에 대하여 곱씹어보며 그 근원을 찾는 일을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걸까? 죽을 때까지? 슬픔은 머리 꼭대기까지 차오르지 않는다. 까치발을 하고서 허우적거릴 만큼만 차오른다. (105)

 

고통은 어째서 저절로 물러나지 않을까. 이렇게 애를 써야만 저만치 물러서서 나로부터 작별을 고하는 걸까. 힘든 일들이 끝나면 그걸로 끝이면 안 되는 거야? 꼭 그것과 내가 분리될 수 있도록 어떤 수고로움이든 스스로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인간은 참 이상하기도 하다. 이렇게 복잡하게 지어진 생물이라니. 나는 불평을 하면서도 닌빈에 두고 온 나의 과거에 또 찔끔 눈물이 났다. 

닌빈은 아름다웠고, 아름다운 닌빈은 나의 고통을 흔쾌히 받아주었다.

여기에 두고 가면 돼.

넓은 땅이 내게 말해주었다. (127)

 

밤 사이 쏟아지던 폭우가 아침 내 이어졌다. 새벽에는 천둥 소리에 몇 번 잠에서 깨기도 하였다. 나는 딱 일주일만 더 이렇게 빗소리를 들으며 다리 사이에 이불을 둘둘 말고서 잠들었다가 깨기를 반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여행자만이 생각할 수 있는 천연덕스러움인지 모른다. (129)

 

화를 내며 사는 일의 고단함. 저기 저 사람도 화가 나 있구나. 화가 난 나는 화가 난 사람을 알아본다. (133)

 

불행이 저절로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나는 불행이 대단히 악질적이라 생각한다. 하나의 사건에서 파생된 불행이 사건의 종결과 함께 끝이 난다면 인간은 좀더 단순하고 가뿐하게 이 삶을 살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은 반드시 남는다. 불행을 낳은 사건이 끝난 뒤에도 불행은 남아서 마음을 갉아먹으며 자라난다. 불행은 마음속에 담겨 있는 언어를 배우고 감정을 배우고 바깥 세상을 익힌다. 성숙한 불행은 인간에게 말을 걸고 감정을 조종하고 바깥 세상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속삭인다. 성숙한 불행은 환청이자 환각이 되어 나와 함께 살아간다. 

불행은 내게 말한다. 저기엔 아무것도 없어. 불행은 눈앞의 것을 지워버린다. 불행은 하늘을 지우고 구름을 지우고 산을 지우고 나무를 지우고 강을 지우고 철 따라 피어나는 꽃들을 지운다. 인생이 아무 대가 없이 인간에게 주는 행복을 보지 못하게 한다. 그런 뒤 자신만을 보라고 불행은 속삭인다. (136)

유진목의 불행론. 

 

어쩜 감쪽같이 잊고 있었을까.

언니. 내가 언니한테 전화해서 운 적이 있지 않아요? 

언니는 그렇다고 했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했다. 죽기 전에 한 번은 내가 너에게 전화해서 우는 날이 있을 게다. 

그말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142)

 

 

하노이에 가보고 싶어 졌다. 
이번 겨울방학에 가는 베트남에서, 하노이는 아닐지라도, 유진목이 느꼈던 천연덕스러운 나른함을 느끼게 된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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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젊은 사람들이 그렇듯 나도 젊었을 때는 젊은 나이에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 안에 너무나 많은 젊음, 너무나 많은 시작이 있었으므로 끝이란 것은 좀처럼 가늠이 안 되는 것이었고 또 아름답게만 생각되었다. (9)

 

내 연인과 브라키오사우루스 외에는 생각하고 싶은 것이 많지 않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나는 잊고 싶은 것을 기억하지 않는 법을 배웠다. 왜 많은 사람들이 체험할 가치조차 없었던 사소한 사건들을 기억 속에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는 마치 사용된 인생의 증거로서 쓸모가 있다는 듯 백 번도 넘게 다시 그것을 뒤져 보여주는 것인지도 이해할 수 없다. (15)

 

하지만 어쩌면 내가 그 이전부터 스스로 질문을 제기하고 나 자신이 그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어떤 신호만을 기다렸을지도 모르겠다. 그 질문은 '만일 그날 저녁의 발작이 내 죽음을 가상실험한 것으로 끝나지 않고 정말로 그때 내가 죽었다면 내가 놓쳤던 것이 무엇이었을까'라는 것이었다. 인생에서 놓쳐서 아쉬운 것은 사랑밖에 없다. 그것이 대답이었고, 그 문장을 마침내 말로 꺼내 얘기하기 오래전부터 이미 나는 그 대답을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20)

 

나는 사랑이 안으로 침입하는 것인지 밖으로 터져 나오는 것인지조차도 아직 알지 못한다. 가끔은 사랑이 어떤 다른 존재처럼 우리 안으로 침입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몇 달 동안, 심지어 몇 년 동안이나 주위에 숨어 우리를 엿보다가 어느 때인가 기억이나 꿈들의 방문을 받고 우리가 갈망하며 숨구멍을 열 때, 그때 그것이 숨구멍을 통해서 순식간에 밀고 들어와 우리의 피부를 감싸고 있는 모든 것과 뒤석인다.
사랑은 바이러스처럼 침입하기도 한다. 그것은 우리 안에 틀어박혀 조용히 머물러 있다가 어느 날엔가 우리가 충분히 저항력이 떨어지고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고 생각될 때, 그때 불치의 병이 되어 터져 나온다. 그러나 또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사랑이 죄수처럼 우리 내부에 살고 있는 것이라고 상상할 수도 있다. 사랑이 해방되어 우리들 자신인 감옥을 부수고 나오는 데 성공하는 일은 가끔씩 일어난다. 사랑이 감옥을 부수고 나온 종신형 죄수라고 상상해보면, 얼마 안 되는 자유의 순간들에 사랑이 왜 그렇게 미쳐 날뛰는 것인지, 왜 그렇게 무자비하게 우리를 괴롭히고 온갖 약속 안으로 우리를 밀어넣었다가 곧바로 온갖 불행 안으로 몰아넣는 것인지를 가장 빠르게 이해할 수 있다. 마치 우리가 사랑을 내버려두기만 하면 사랑이 무엇을 줄 수 있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려는 것처럼, 사랑이 지배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벌을 받아 마땅한지를 보여주려는 것처럼 말이다. (25)

 

프란츠에게는 청춘의 사랑이 있었다. 그가 내게 그렇게 얘기했다. 사진 한 장을 보여주기도 했다. 해변 아니면 풀밭에 프란츠가 한 소녀와 함께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서로에게 속해 있다는 승리감의 확신이 빛나고 있었다. 그들이 서로를 위해 태어났다는 것, 영원히 서로의 곁에 머물게 되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48)

 

어떤 사람이 평범하게 성장한 자녀나 손자들까지 두고 있는 나이에,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아지고 심장발작의 위험이 있는 그런 나이에 이제야 놓치고 살았던 청춘의 사랑을 만회하고 있다고 주장했다면, 내가 기억하는 한 내 주변 사람들은 모두 그것을 우스운 일로 여겼을 것이다. 나 자신도 사월 어느 날 저녁 뇌 안에서 양극이 바뀌기 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사랑이라는 것은 공룡과도 같아서, 모든 세상이 그들의 죽음을 즐긴다. 트리스탄과 이졸데, 로미오와 줄리엣, 안나 카레니나, 펜테질레아, 항상 죽음만이 있고, 항상 불가능한 것에 대한 쾌락이 있다. 사람들이 핑계로 삼는 것처럼 그렇게 사랑에 무능력하다고 나는 믿지 않는다. 사람들은 청춘의 사랑이 없는 불행한 영혼들에 의해서, 언제였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너무 일찍 죽음의 공포 속에서 소리치면서 그들의 사랑을 몸 밖으로 내보냈던 불행한 영혼들에 의해서 그렇게 믿도록 설득을 당하는 것이었다. (49)

 

나는 자기 부모의 자손이라는 것을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을 많이 알지 못한다. 부모를 닮고 싶어 하는 사람은 더더욱 적다. 그와 반대로, 내가 알게 된 사람들 거의 모두가 부모와 닮아간다는 당연한 위협에 대해 기겁을 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은 물려받은 특성들을 피해가는 회전활강과 비슷했고 그런 식으로 결국 운명적으로 삶이 이루어졌다. (61)

 

카린과 클라우스는 학창시절부터 알던 사이였다. 그들은 내가 결코 갖지 못했던 것, 즉 청춘의 사랑이엇다. 청춘의 사랑이 무엇이냐고 누군가가 물었다면 나는 카린과 클라우스라고 말했을 것이다. 청춘의 사랑은 단순히 젊은 시절에 하는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비교가 불가능한 것이다. 청춘의 사랑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사랑을 견주어 잴 수 있을 어떤 것도 아직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사랑은 유일하게 그 사랑 자체를 위해서 존재한다. 그것은 아직 실망을 극복할 필요도 없고 이전의 행복을 능가하지 않아도 되고, 그 무엇도 반박하거나 수정하거나 대체하지 않아도 된다. (중략) 카린과 클라우스를 보고서 그들이 서른, 또는 마흔에는 어떤 모습일지, 또 그들의 아이들에게는 어떤 이름을 지어주고 집을 어떻게 꾸미고 살지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75)

 

나중에 프란츠가 자기 아내는 불행에 단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녀를 떠날 수 없다고 말했을 때 나는 비명을 지르며 발작을 일으켰다. (80)

 

우리가 만났을 때 우리는 아직 늙지 않았었다. 어쨌든 나는 프란츠가 늙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프란츠도 나를 늙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젊은 것도 아니었다. 우리가 젊지 않다는 것은 이야기할 것이 많다는 장점이 있었다. (82)

 

사랑을 하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아직 교화되지 않은 존재, 젊음이다. (90)

 

마치 내가 프란츠 없이 그 도시에서 산 적은 없는 것 같았다. 사랑으로 번민하는 인물의 상투적인 모습을 내가 가소로울 정도로 되풀이하고 있다는 것은 알 만큼 나는 나이가 들었다. 그러나 그저 그 상태에 온전히 빠져드는 것 외에 달리 어찌할 수가 없었다. 희망에 가득 차서 계속 창문 유리에 몸을 부딪치지만 빠져나갈 길은 없는 곤충처럼 나는 무력해진 상태에서 벗어날 길을 찾아다녔다. (105)

 

프란츠가 페를레베르크 선생님 같은 여자와 함께 스코틀랜드로 날아간 토요일에 나는 아테에게 갔다. 아테 생각이 떠오르자 내 안에서 강렬한 그리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것이 아테를 향한 그리움이었다고 주장하고 싶지는 않다. 그것은 오히려 지나간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만성적인 포기 이전의 시절, 모든 이상이 실현 가능한 것으로 보였던 시절, 보통의 출세와 결혼에 대한 기대가 아직은 혐오와 경멸을 불러일으켰던 시절, 절대로 그런 행동을 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그래도 우리가 꼭 원하는 것을 정확하게 알았던, 시작의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116)

 

노년에서 좋은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전혀 아무것도 찾을 수 없다. 노년에 대해 좋게 말하는 것은 모두 어리석은 말이거나 거짓이다. 예를 들어 생생한 몸이 부패하지 않고는 현명해질 수 없다는 듯 노년의 지혜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이 그렇다. 노인은 천천히 청력을 잃고 시력을 잃고 천천히 경직되고 멍청해진다. 이제는 누구와도 교제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그것에 대해 증명하지는 않았지만 나도 멍청해졌다고 생각한다. 노년에 대해서 좋은 말을 할 수 있다면, 다만 두 가지 관점에서 노년이 죽음에 대한 준비로서 쓸모가 있다는 것뿐이다. 우리에겐 담보물들의 나사를 죄어 결국 어느 정도 그럴듯한 전기로 만들 수 있을 때까지 우리의 기억들을 오랫동안 갈고 연마할 시간이 있다. 또한 우리는 지속되는 몰락과 함께 자기 자신이 귀찮아져서, 인생에서 가졌던 것들 가운데 가장 사랑스러운 것인 우리 자신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도록 어느 날엔가 죽음이 다가오기를 고대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멍청해지는 속도보다 부패하는 속도가 더 빠를 경우에만 해당된다. (119)

 

내가 사랑에 대해서 모르는 것은 많지 않아. 사랑은 비극적으로 끝나거나 진부하게 끝나거나 둘 중 하나야. (122)

 

두 사람은 어떤 생일파티에서 알게 되어 사랑에 빠졌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저 희미한 것이기는 했지만 도주에 대한 기대감이 그가 사랑에 빠지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던 것 같다고 라이너는 말했다. 라이너가 말했던 것처럼 그를 동쪽에서 빼내갈 수 있는 능력에 그녀에게 있었다. 최소한 그 능력에 앙케를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아름답게 보이게 하고 그녀의 목소리를 더욱 약속에 찬 소리로 들리게 하고 그녀의 움직임을 더 매력적으로 보이게 했을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나중에 초기의 열정이 약해서 오히려 남매간의 애정으로 변했을 때 라이너의 마음속에서 가끔씩 앙케와 헤어지고 싶다는 소망이 일었지만 그는 그녀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 소망을 억제했다. 앙케가 그를 구해낼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녀를 사랑했던 것은 아닐가라고 생각했던 그의 자기 의혹이 맞는 것이었다면 그거셍 대해 속죄해야 한다는 생각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 기이한 시대가 끝날 때까지 그랬다. 그 이후로는 그녀가 없어도 자유라고, 그 이후의 시간에 대해서는 더이상 그녀에게 빚진 것이 없다고 그는 말했다. 이제 나는 자유로워. (139)

 

프란츠의 살갗은 특별한 온도를, 묘사할 수 없는 무언가를 갖고 있었고 그것이 내게 닿자마자 나를 말없는 환희의 상태로 옮겨놓았다. 내 딸이 갓 태어났을 때 체온과 비슷한 온도의 물에 담그자 즉시 울음을 멈췄다. 그러고 나서 아직 훤히 다 보이지 않는 눈으로 아기는 말없이, 지극히 만족스럽게 세상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분명 어머니의 양수 안에 있던 안온한 시간에 대한 기억이었을 것이다. 프란츠에게 안겨 있을 때 내가 무엇을 기억할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그것은 아마 천국에 대한 기억이었을 것이다. (141)

 

아테에게 전화를 했다. 아테가 내게 전화를 걸었을 수도 있다. 아테는 나에 대해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다면서, 내가 이 남자에게 계속 바라고 있는 것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세상에서는 그것을 그 무엇으로부터도, 그 누구로부터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 역시 프란츠에게 그것을 얻을 수 없다고 아테는 말했다. (143)

 

왜 성인이 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자기를 노예로 만들려고 재촉하는지 궁금하네. 아마 너는 자유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것 같아. (144)

 

미친 사람들, 그리고 사랑에 빠진 사람들과는 싸우지 말라. (144)

 

프란츠가 심연에서 나를 끌어올리기 위해서 그 문장을 밧줄처럼 내게 던졌다는 것을 이해하기는 했지만, 그것 역시 하지 말았어야 할 말이었다. 내게 오기 위해 거짓말이 필요했다는 것, 그리고 거짓말을 요구할 권리를 가진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나는 힘들지만 견뎌냈다. 그러나 그의 거짓말 솜씨에 감탄하면서 프란츠가 그 작은 금발 여자에게 속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라는 것은 내게 요구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147)

 

순수한 감사의 시간은 사랑의 첫 단계이다. 어떤 사랑이나 그럴 것이다. 어떤 사람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데 성공한다. 우리가 원했던, 또는 심지어 우리 안에 파묻혀 깨어나지 않은 채 숨어 있던 특성들이 우리가 사랑에 빠지는 순간 우리가 더불어 사는 데 익숙해 있던 다른 특성들을 몰아낸다. 우리는 스스로를 다시 인식하게 된다. 우리는 더 아름답고 더 부드럽고 현명하다. 우리는 우리의 소심함과 우리의 악의에서 구원된다. 우리는 가장 사악한 적도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우리의 행복으로 모든 나무와 모든 거리와 모든 순간을 환하게 비추고 그때까지 발견하지 못했던 그것들의 아름다움에 대해 경탄한다. 우리는 하늘과 비와 바람과 우리 자신이 하나가 된 것처럼 느낀다. 우리는 마침내 이 세상에 속해 있고 또 마침내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 
(중략) 어떤 일이 일어날 때까지, 사소하고 하찮은 일이지만 그것으로도 우리를 놀라게 하고 우리의 무방비 상태를 인식시키기에는 충분한 어떤 일이 일어날 때까지. 그러다가 이유 없이 약속시간에 늦게 오고 전화가 오지 않고 우연히 사진 한 장이 발견된다. 그것으로 불안의 시간이 시작된다. 우리가 배반당했다고 생각되는 그 한 시간이면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을 파악하기에 충분하다. 어떤 사람은 연필처럼 얇은 산꼭대기에서 거의 바닥에 닿지 못한 채 손으로 하늘을 움켜쥐고 발끝으로 서 있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149)

 

나는 프란츠의 어깨와 목 사이 움푹한 곳에 나의 뭉툭한 짐승코를 파묻었다. 프란츠는 내 호흡의 그늘 안에 숨고 싶은 것처럼 그 안에서 낮게 숨 쉬었다. 우리는 그렇게 말없이 오랫동안 누워 있었다. 나는 이 시간 속에서 죽고 싶었다. (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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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려빚 :: 김지연

그래도 모든 걸 다 말하고 나니 속이 후련했다. 정현은 자신이 망했다는 이야기를 이렇게 맘 편히 털어놓을 사람이 서일 뿐이라는 점에 조금 서글퍼졌다. 서일은 정현이 겪은 모든 일에 책임이 있고 그래서 다 이해해주는 것만 같았다. (32)

 

무언가를 욕망한다는 것은 그것을 내가 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믿어보는 일인 것도 같고, 그래서 그게 좌절되면 무척 괴롭겠지만 욕망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애쓰는 동안에는 살아갈 맛이 나는 것 같아요. 어쩐지 '정현'은 자신이 무엇을 욕망하는지도 잘 모르는 사람이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무언가를 할 수 있다고 믿을 때 행복해지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게 좋지 않은 선택이라고 하더라도요. 가끔 이상한 선택을 하는 사람을 마주치게 되는데 대부분은 자신의 쓸모를 발견하고 믿어주는 쪽을 선택하게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51)

 

그들은 어느 순간이고 욕먹을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에게 자기 검열은 자기 연민보다 훨씬 더 쉬운 자동 반사 같은 일이었다. (63)

 

 


이소 중입니다 :: 이주혜

그러나 사람을 상대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치사한 면이 있기 마련이고 특히 극내향형인 번역가는 영혼을 다치는 일이 빈번해 요즘은 오직 상훈을 위해 버티자는 마음마저 구겨질 때가 많다. (66)

 

아직 성장 중인 아이들은 늘 시인의 마음에 미세한 실금을 그었다. 누구도 이런 말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시인은 아이들이 풍기는 비릿한 풋것의 냄새에서, 묘하게 소매길이나 목둘레가 맞지 않는 어설픈 옷차림에서, 심지어 좌우가 틀어진 머리카락의 비대칭에서 요란한 비난의 아우성을 들었다. 당신은 몰라! 당신은 우리에 관해 아무것도 몰라! 태어나고 자라는 것들에 대해 아는 게 없어! (70)

 

번역가는 소설가도 그 딸도 평생 자립이라는 걸 생각해본 적이 있을까, 두 여자는 너무도 공고한 결탁자가 아닌가 하고 의문했다. (73)

 

어린 새가 이소 중입니다

종이에 그렇게 씌어 있었다. 이소가 뭐야? 소설가가 물었다. 시인은 검색을 위해 휴대폰을 꺼내려다가 주머니가 빈 걸 개닫고 멋쩍게 웃었다. 번역가가 까끌까끌한 모랫바닥에서 숲 가장자리의 보드라운 풀밭 위로 어린 새를 옮겨주었다. 그리고 휴대폰을 꺼내 '이소'를 검색했다. 떠날 이 새집 소. 새의 새끼가 자라 둥지에서 떠나는 일. 어쩌라고? 소설가가 무정하게 말했다. 번역가는 소설가를 향해 번지는 미움을 지그시 누르고 내처 검색한 내용을 읽어주었다. 이소 단계의 어린 새들은 비행 능력이 서툴고 낯선 환경에서 잘 날지 못해 땅에 앉아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런 상황을 잘 모르고 섣불리 새를 구조하면 새들은 생존을 위해 배워야 할 것들을 놓치게 되고 나중에 자연으로 복귀해도 야생에서 살아남기 어려울 수 있다. 번역가는 검색한 문장을 읽으면서 동시에 아직 손에 남은 새의 박동을 감각했다. (81)

 

연대라는 말만큼 해석이 다양한 단어도 없을 거예요. 저마다 생각하는 연대의 방식과 범위가 달라 자칫 앞으로 한 걸음 가려다 뒤로 두 걸음 가기 쉬운 일이기도 하고요. 그만큼 연대란 어느 분야에서든 사실 효율성이 떨어집니다. 연대는 경제의 언어가 아니니까요. 비경제적이고 비효율적인 걸 알면서도 추구하는 것, 그것이 제가 생각하는 연대의 한 면모인데요. (100)

 

내일이 없는 사람들처럼 실컷 웃고 떠들었던 어느 날이 떠오르네요. 우리는 봄꽃이 핀 안산을 올랐고 이소 중인 어린 새들이 열매처럼 나무 가득 매달려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세계가 털갈이 중이었어요. 우리는 바람에 떨리는 나뭇잎을 보고도 까르르, 카메라 앞에 선 친구의 뾰로통한 표정에도 까르르까르르 웃고 또 웃었습니다. 그리고 침묵이 찾아올 때마다 방점을 찍듯이 말했죠. 아, 실컷 웃었어. 내일이 없는 사람들처럼. 그날 우리는 뭔가에 쫓기듯 웃고 떠들었는데, 그것이 무엇이었을까 뒤늦게 생각해봅니다. (103)

 

문학과 인문학의 옳고 아름답고 때로는 전투적인 말들이, 결국 주변의 몇몇 사람하고만 나눌 수 있는 작은 특산품이 되어가는 건 아닐까. 취향, 가치관, 의식, 처지가 비슷한 사람들기리 삼삼오오 나누는 것이 되면서 '인문학'이 소실점을 향해 줄어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104)

 

 


숙희가 만든 실험영화 :: 전하영

윤미는 이제 할머니구나.
숙희는 문득 고개를 들고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아기의 귀여움에 잠시 밀려났던 '할머니'라는 단어가 차차 그 존재감을 드러내며 숙희의 머릿속을 잠식해나갔고, 숙희는 외계에서 온 미스터리한 돌덩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 말에 저만치 거리감을 둔 채 쉬이 다가서지 못하고 부근만을 이리저리 돌아가며 힐긋거릴 뿐이었다. 봉인 해제하면 갑자기 그 돌덩이 안에서 치명적인 바이러스 따위가 튀어나올지 모른다며 경계하듯이.
아직, 아직은 마음의 준비가 안 되었는데. 
숙희는 그것에 대해서는 정말로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여러 번 생각하면서도 그 생각의 구심력으로부터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마주해야만 했다. 감정이 흩날리는 벚꽃처럼 동요됐다. 이제는 인생에서 떨어져나갈 일만 남은 것 같았다. 
이제 겨우 아줌마에 무감해졌건만. (118) 

 

아름답다 느꼈던 많은 것들이 그것을 붙잡는 순간 곤란함이 되어 곁에 남았다. (129)

 

"무슨 책?"
"그냥 일이야."
"숙희 씨는 배 안 고파?"
찬영이 부엌 한가운데 멈춰 서서 그렇게 하면 자기가 귀여워 보이리라 생각하는 듯 아랫배를 문지르며 물었다.
"아, 찬영 씨 배고프구나."
숙희는 상대를 불쌍히 여기는 듯한 표정을 지어주면서도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을 잽싸게 했다. 어쩌라고. 역시 이건 아니었다. 외로움이 간절했다. 자고로 어른이라면 참을성을 길러야 한다, 숙희는 스스로를 탓할 뿐이었다. (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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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부터 아버지는 접힌 사람, 미뤄진 삶만을 지닌 사람이 되었다. 그에 더해 젊은 시절 함께 품었고 사랑을 싹트게 해주었던 목표에 먼저 도달한 아내를 보조하며 아무에게도 내색할 수 없는 끓는 감정들, 한없이 유예되고 멀어지는 꿈에 대한 막막함을 속으로만 삭혀야 했던 사람이기도 했다. (73)

 

내 마음속에 있던 '어머니'라는 팔레트는 셀 수 없이 많은 칸으로 나뉘어 있었고, 거기에는 서로 다른 명도와 채도, 색깔을 지닌 기억들이 물감처럼 담겨 있었다. '나는 행복한 적이 없었어'라는 어머니의 말은 명백하게 새까만 빛깔이 다른 많은 아름다운 빛깔들을 까맣게 삼켰겠지만, 내게 그건 단지 하루의 기억에 불과했고, 결코 그날의 칸 밖으로 나오는 일이 없었으므로 다른 어떤 것도 더럽히지 않았다. 아버지에 대한 내 죄책감은 거기서 비롯되었다. (75)

 

하지만 요즘 안 그런 사람이 어디 있어? 그런 일들을 깊이 떠올리고, 그걸 특별하다고, 비극이라고 여기면서 어떤 기억을 추출해내려고 애쓰는 일이 내게는 수치스럽게 느껴져. 그래서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는 거야. 내가 아는 사람들도, 나도 그래. 말을 할 수가 없어. 말을 하는 사람들은 우선 살아남은 사람들이지. 살아남았고 목소리가 있는 사람들 말이야.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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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역사, 진실, 섭리... 크고 아름다운 말일수록 백만가지 다른 뜻으로 쓰이기 마련이다. (20)

 

인류학자 김현경은 그의 아름다운 책 <사람, 장소, 환대>에서 인간과 사람이라는 개념을 구분하면서 사람이란 구성원들의 환대를 통해 비로소 공동체 안에서 성원권을 갖는다고 설명한다. 어떤 개체가 인간이라면 그 개체는 우리와의 관계 바깥에서도 인간일 것이지만, 어떤 개체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사회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어야 하며, 그에게 자리를 만들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46)

 

인간은 서로에게 상냥할 수 있다. 어쩌면 그래서 인간은 존엄한 것 아닐까. (47)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우리는 매 순간 현재를 산다. 누구든 지금 현재, 자기가 속한 사회 안에서 기준점을 찾을 수밖에 없다.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 인간다운 생활인가, 라는 기준점이다. 시대가 바뀌면서 이 기준점이 올라가는 것은 배부른 소리가 아니라 사회의 발전이다. 아니, 배부른 소리라고 불러도 상관없다. 배부른 소리가 인간사회를 발전시켜왔기 때문이다. 결핍이 변화를 낳는다. 모두가 현재에 만족하고 머무른다면 인간은 아직도 동굴 안에서 나뭇가지 모아 불 피우며 살고 있었을 것이다. (72)

 

대중민주주의 사회에서 다수의 변덕과 횡포로부터 소수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정치권력뿐 아니라, 시민들 사이에도 법치주의에 기반한 사고방식이 뿌리내려 있어야 한다. 이제 법치주의는 단순히 제도여서는 안 된다. 사고방식이어야 하는 것이다. 법치주의는 법이면 뭐든 다 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 누구든 권력을 함부로 행사하지 말고 항상 신중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러한 생각을 시민들이 공유하고 있는 사회가 진정한 법치주의 사회다. (82)

 

이들이 제공하는 플랫폼 덕분에 개개인들도 타인을 24시간 관찰하고 분석할 수 있게 되었다. 엿보기의 쾌락에 탐닉하는 관음증의 시대이기도 하고, 자기만의 도덕적 완장을 차고 타인을 감시하는 새로운 종교 경찰의 시대이기도 하다. 인간의 생각이란 수시로 변화하기 마련이고 어떤 특정한 맥락 속에서 표현되는 것인데 그중 어느 한 부분만을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툭 잘라 이것 보라며 전시하고 조리돌림하고 잊히지 않도록 '박제'하기까지 한다. 종교적 열정에 들떠 십자군전쟁에 나선 기사들처럼. 바야흐로 테크놀로지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마녀사냥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는 것일까. (107)

 

맞는데, 맞긴 맞는데, 나는 절대로 이 설명에 쉽게 고개를 끄덕이고 생각하기를 멈춰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119)

 

인간의 밑바닥이 궁금하면 자기 자신의 솔직한 바닥부터 들여다보면 될 일인데 왜 불특정 다수의 밑바닥을 굳이 접하며 살아야 할까? '밑바닥 페티시즘'인가? 이제는 '알권리'보다 '모를 자유'가 더 중요한 것 아닐까? '인간 다이어트'가 필요한 시대가 아닐까? 제발 좀 남들에게 신경 좀 끄고 각자 좀 살자고 이 연사 외치고 싶을 때가 있다. (128)

 

일하기 싫고 글 쓰기 싫고 만사 지친 순간, 소파에 누워 지웠던 앱을 다시 깔고는 남들의 어리석음과 찌질함, 개념 없음을 전시하는 온갖 게시물들과 거기 달린 조롱과 쌍욕, 혐오로 가득한 댓글들을 굳이 찾아 읽고 있게 된다. 그 결과 남는 건 인간 혐오와, 그보다 더한 자기혐오뿐인데도. 탄수화물 중독처럼 인간 중독도 중독이다. (129)

 

자유는 최대한, 그 제한은 최소한이어야 한다는 명제는 '정치적 공정성'을 명분으로 하는 경우에도 달라져서는 안 된다. 예술의 이름으로 오랫동안 반성 없이 자행되어온 여성 혐오, 소수자 혐오, 인종 혐오에 대하여 반대하고 시정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히 필요한 일이지만, 이를 넘어 '모범답안'을 제시하고 여기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공격 대상으로 삼는 것은 자유에 대한 부당한 억압일 뿐만 아니라, 얻고자 하는 효과도 내지 못한다. 미래는 당위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허구 속에 완벽하게 정의로운 유토피아를 만들어놓고 스스로 감격에 겨워한다고 해서 실제 세상이 바뀔까? 게다가 그 '정의'라는 것에 대해 스스로 성찰하지도 않는다면? (139)

나는 정치적 공정성을 각별히 생각하는 편이라, 이 부분을 오래 읽었다.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보며 충분하지 않은 응보야말로 국가보안법 위반처럼 보아 엄벌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 아닐까. 응보는 단순히 국민 감정에 휘둘리는 사법 포퓰리즘이 아니다. 오히려 사법이 해야 할 본질적인 기능일 수도 있다. (158)

 

위기는 자유를 사치로 느끼게 만든다. 하지만 자유는 위기의 시대일수록 소중히 지켜야 그것을 영영 잃어버리는 비극을 막을 수 있다. 목적이 정당하고, 방법 면에서 매우 효과적이라 할지라도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는 조치는 필요 최소한이라어야 하고 신중해야 한다는 과잉금지 원칙은 개인들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다. (174) 

 

롤스는 차등의 원칙보다 기회 균등 원칙 및 정의의 제1원칙인 기본적 자유와 권리의 보장이 우선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현실에서 발생하는 문제들 대부분은, 최소 수혜자에게 이득을 주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의 자유를 제한해야 할 때(타다와 택시의 분쟁처럼) 일어난다. (203)

 

이것이 발전이다. 자유가 사회를 견인하되, 그 속도가 누군가를 낙오시켜 쓰러지게 만들지 않도록 평등이 제어하는 것. 무조건 달려나가는 것이 아니라 아직은 시기가 아니라면 잠시 멈출 줄도 아는 것. 어쩌면 그 망설임의 순간이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어려운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일지도 모르겠다. (205)

 

그런데 시험을 통한 경쟁만이 공정하고 시장경제에 맞는 거라고? 내가 왜 당신의 '노오력'에 대해 보상해야 되는데? 그거 '감성팔이' 아냐? '떼법' 아닌가?
... 대답이 어렵다면 시장 논리만으로 답을 하려 했기 때문일 것이다. 
대신 답하자면, '공공성' 때문이다. 그렇다. 겉은 자유경쟁 및 결과에 대한 승복으로 포장되어 마치 냉정한 시장 논리에 부합하는 것 같지만 시험을 통한 자원 배분 역시 효유성의 요구보다는 공공성의 요구가 더 큰 배경을 이루고 있다. 이윤 극대화를 위해서는 훨씬 효율적인 수단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개 채용, 그것도 '블라인드' 공개 채용을 기업에게 요구하는 것은 영업의 자유에 대한 제한이다. 다만 그것이 '공공복리'에 부합하기에 정당화된다. 시험 만능을 주장하는 당신 역시 일종의 '사회적 배려' 대상자인 것이다. 
당신이 죽어라 외우고 있는 평생 한 번 쓸지 안 쓸지 모르는 영어 단어나 시사 상식이 실제 업무 능력을 보려주는 지표여서가 아니라, 성실하게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기회가 돌아가는 사회가 우연히 타고난 금수저만 기회를 독식하는 사회보다 다수에게 행복할 기회를 줄 수 있기에, 그리고 노력에 사회적으로 가치를 부여하는 사회가 그렇지 않은 사회보다 생산적이고 안정적이기에 사회는 시험을 통한 취업이라는 시스템을 채택하고 있다. (215)

 

노력도 능력도 그 자체로 당연히 보상받아야 되는 가치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의미 있기에 보상받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한발 더 나아가볼 수 있다. 사회는 다양한 사람들로 구성된다. 그중 특정 계층, 특정 인종, 특정 성별에게 기회가 집중되어 있고 나머지는 소외되어 있다고 하자. 지금 현재로서는 그 특정 사람들의 능력이 더 뛰어난 것이 맞다고 치자. 그렇다고 그들만 기회를 독점하도록 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더 나은 길일까? 앞에서 노력에 대해 사회가 보상하는 이유는 단지 효율성 때문이 아니라 누구나 노력하면 보상받는 사회가 그렇지 않은 사회보다 생산적이고 안정적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어린애들조차 소꿉놀이를 계속하고 싶으면 친구에게 자기가 좋아하는 인형을 양보한다. 친구들이 삐져서 가버리면 혼자 인형을 들고 있어봤자 놀이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놀이를 계속하려면 양보와 배려가 필요하다.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배려의 혜택은 결국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돌아간다. 판이 깨지는 것을 막고 생태계를 순환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218)

 

앞에서 언급한 '시험 근본주의'는 '경쟁 근본주의' 관점에서 보면 뻔뻔한 논리다. 대학입시, 공무원 시험, 대기업 공채시험 한 방으로 정규직이 되어 평생 남들과의 경쟁을 면제받고 지대를 얻으며 무임승차하겠다는 파렴치한 주장이기 때문이다. 경쟁은 계속되어야 한다. 
(중략) 어떤가. 완벽하게 공정하지 않은가? 어떠한 특혜도 반칙도 기득권도 불로소득도 없다.
... 그런데 이런 사회에 살고 싶은가? (중략) 이상하다. 분명히 공정한 경쟁은 좋은 것인데, 끝까지 밀어붙이니 왠지 숨이 막힌다. (221)

 

지금 당장의 불공정을 시정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자칫 무한경쟁만이 정의라고 착각하는 것은 곤란하다. 누구 좋으라고. 노력, 능력, 경쟁, 공정, 모두 중요한 가치다. 하지만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느 한 가지 가치만 추구할 수 없다. 공정 역시 결국에는 공존을 위한 수단 중의 하나인 것이다. (224)

 

이러한 시대적 배경하에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사회주의 사상이 퍼져나가고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나기에 이르자, 유럽 국가들은 혁명에 의한 체제의 파괴를 막기 위해 사회적 정의의 이념을 헌법 안으로 수용하기 시작했다. 선거권을 확대하고 노동3권을 보장하며 복지 정책을 확대하는 등 일련의 변화들을 통해 '사회국가 원리'가 현대 민주주의 국가 헌법의 기본 원리 중 하나로 자리잡기에 이른 것이다. (227)

자유주의와 자본주의의 궁여책이었던 사회정의.

 

공산주의식 발상이라는 반발이 주로 고연령층에서 나온다면, 젊은층에서 나오는 반발은 보다 문화적인 영역에서 발견되곤 한다. 정치적 공정성에 대한 피로증을 호소하는 반응의 하나라고 볼 수도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이른바 '언더도그마'에 대한 반발감이다.
'언더도그마'라는 용어 자체가 반발감에 기초하여 만들어진 신조어다. 미국의 극우 세력인 티파티 논객 마이클 프렐이 2011년 저서 <언더도그마>에서 처음 사용한 이 말은 약자를 의미하는 언더도그와 독단적 신념을 뜻하는 도그마의 합성어다. '약자는 무조건 선하고 강자는 무조건 악하다고 인식하는 사회적 현상 또는 오류'를 뜻한다고 한다. (229)

 

사람들은 미지의 문제에 부딪히면 우선 과거의 경험들에서 실마리를 얻기 시작한다. 요즘 유력한 대안으로 활발히 논의 되고 있는 기본소득제도도 그 기원을 거슬러올라가면 2000년 전인 로마제국 시대에 이른다. 정복전쟁으로 노예가 대폭 증가하자 평범한 로마 시민들은 값싼 노예 노동력에 밀려 일자리를 잃게 된다. 사회 불안이 고조되자 로마는 시민들에게 매달 30킬로그램의 밀을 주고 공공 서비스를 무상 제공했다. (239)

또한 민법상의 유류분 제도도 마찬가지다. 

빌 게이츠가 도입을 주장한 '로봇세'도 롤스의 <정의론>에 부합하는 제도다. 로봇과 인공지능으로 인해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게 되므로 노동자를 대체한 로봇에게도 노동자들과 비슷한 수준의 과세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로봇을 소유한 기업에 대해 과세해 기본소득의 재원으로 사용하자는 주장이다. 인간 노동을 대체하는 기술혁신은 그로 인하여 일자리를 잃는 최소 수혜자에게도 이득이 되어야 한다는 발상이다. 
인공지능 시대의 글로벌 기업들에게도 인간은 계속 필요하다. 상품을 소비해줄 사람들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삶 전체에서 끊임없이 빅 데이터를 제공해주는 존재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빅 데이터를 통한 강화 학습이 필요한 인공지능에게는 인간이 생산하는 데이터가 곧 철광석이고 석유다. 산업의 쌀이다. 여기서 사회적 대타협의 여지가 생긴다. 로봇세나 기본소득을 제안하고 지지하는 사람들이 빌 게이츠, 마크 저커버그, 일론 머스크 등 글로벌 IT 기업가들인 데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241)

 

타임뱅킹이란 사람들이 자기 시간을 들여 여러 봉사활동을 하며 공동체 내에서 신용 포인트를 쌓은 뒤 그 포인트, 즉 시간을 교환하는 제도로, 빈곤퇴치 운동가로 활동하던 에드거 칸 교수가 시작하여 현재 미국 여러 지역에서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다. 처지가 어려운 싱글맘이 지역 타임뱅크에 요청을 올리면 솜씨 좋은 누군가가 찾아와 벽에 난 구멍을 막아주고 부엌을 수리해준다. 수리해준 사람에게는 해당 시간만큼의 포인트가 적립되어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할 때 사용할 수 있다. 싱글맘은 짬이 날 때 아이를 봐주거나 요리를 해주고 아이들은 마을 가든파티에서 악기를 연주해서 포인트를 적립한다. 
앤드루 양은 이를 더욱 확장하여 실제 금전적 가치까지 얻을 수 있는, 중앙정부가 후원하는 강화된 타임뱅킹 제도를 제안하고 있다. 디지털 사회신용Digital Social Credit, DSC이라는 새로운 통화를 만들자는 것이다. 타인을 돌보고 돕는 일, 환경을 개선하는 일 등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일을 할 때마다 정해진 DSC를 획득할 수 있도록 플랫폼을 구축하고, 이 포인트는 현금처럼 사용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부동산 부자는 욕을 먹지만 DSC 부자는 존경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사람들의 자기 실현 욕구, 인정 욕구를 사회적 가치가 있는 일로 유도하는 넛지 효과가 생겨날 수 있다. (246)

타임뱅킹. 

 

윤가은 감독의 영화 <우리들>에서 주인공 '선'은 다섯 살 남동생 '윤'이 밤낮 친구 연오에게 맞으면서도 또 언제 싸웠냐는 듯 다시 같이 노는 꼴을 보니 열불이 난다. 그래서 채근한다.

선: 야, 이윤, 너 바보야? 그리고 같이 놀면 어떡해?
윤: 그럼 어떡해?
선: 다시 때렸어야지.
윤: 또?
선: 그래, 걔가 다시 때렸다며. 또 때렸어야지.
윤: 음... 그럼 언제 놀아?
선: 어?
윤: 연오가 때리고 나도 때리고, 연오가 또 때리고, 그럼 언제 놀아? 나 그냥 놀고 싶은데.

천진난만한 다섯 살 아이 윤이의 말이 어쩌면 헌법의 핵심일지도 모르겠다. 헌법은 결국 공존을 위한 최소한의 선의다. (253)

찢었다. 
언제나 경탄하게 하는 문유석 작가님.

 

나의 2017년을 <개인주의자 선언>으로 지켜주셨다면, 2023년까지 <최소한의 선의>로 채워주시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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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본질은 불가능을 '실현'하는 일이 아니라 '시도'하는 일이라 믿는다. 보여지지 않았던 것을 보이게 하는 것, 말해지지 않았던 것을 말하게 하는 것은 글을 쓰면서 품게 된 꿈이다. (10)

 

'평범하지 않음'은 '특별함'이나 '비범함'일 수도 있고 '비보편성'이나 '소수성'일 수도 있다. 딸이 평범하게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에는, 선구적이고 투쟁적인 사람으로서 질투와 공격의 대상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과 소수자로서 차별과 배제의 대상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공존하는 듯하다. 평범해지고 싶은 소망, 혹은 스스로가 평범하다는 믿음의 기저에는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삶에 대한 갈망, 정상성과 표준성에 대한 강박, 비주류에 대한 두려움, 심지어 혐오가 자리하는지 모른다. (39)

 

다 포기하자, 다 내려놓자, 그렇게 생각하니까 평상심을 유지할 수 있었어. 그전에는 하루에도 열두 번식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기분이었거든. 내가 상처받지 않으려고 무심해진 건데 사람들은 몰라. 그저 좋은 며느리, 좋은 아내인 줄 알아. 사실은 내가 살려고 애정도, 관심도, 기대도 다 놓아버린 건데. (63)

 

후일에야 내가 겼은 일들의 '이름'을 알았지만 당시에는 이름을 몰랐으므로 이해하지 못했고, 이해하지 못했으므로 제대로 저항하거나 거부하지도 못했다. 리베카 솔닛은 말했다. "무언가를 정확한 이름으로 부르는 행위는 무대책, 무관심, 망각을 눈감아주고, 완충해주고, 흐리게 하고, 가장하고, 회피하고, 심지어 장려하는 거짓말들을 끊어낸다. 명명은 해방의 첫 단계다." (75)

 

감정적인 것을 여성의 영역으로 여기는 사회에서 남성은 여성보다 무감각하게 사회화된다. 타인에게 침묵할 뿐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본연의 자아에 대해 침묵한다. 남성다움에 사로잡힌 이가 생각과 감정을 자신에게든 타인에게든 '구구절절하게' 이야기하지 않는 이유는 내면을 드러내는 것이 나약함, 즉 여성성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가부장적 사회에서 남성은 나약함을 통제당하지만, 캐럴 길리건이 간파했다시피 "한때 여성의 것이었던 연약함은 인간의 특성"이다. 약함은 여성다움이 아니라 인간다움이다. (84)

 

여자에게 불리하거나 위험한 세상은 잘못되었다는 생각, 성별로 한계를 규정지으면 안 된다는 생각. 그러면서도 너희가 딸이라서 '걱정'스러웠고 늘 '조심'시켰지. 여자가 여자를 키우는 데에는 그런 모순이 있는 것 같아. (93)

 

요즘은 텔레비전에 나오는 육아 프로그램을 자주 봐. 반성하고 또 반성해. 너무 무지했구나. 너희는 어른이 되었고 나는 노인이 되었어. 이제 나는 너희를 키우지 않지. 그래도 육아 프로그램은 자주 보고 있어. 지금이라도 알아야지. 좋은 엄마가 되어야지. 다시 너를 키운다면 네 이야기를 더 많이 들어주고, 칭찬해주고, 안아줄 텐데. 잘하고 있다고 자신감을 북돋워줄 텐데... 산다는 건, 세상과 부딪친다는 건 자신감이 점점 꺾이는 일인데... 네가 피기도 전에 내가 꺾어버린 것 같아. (96)

 

얼마 전에 통화하다가 네가 10대 시절에 힘들었던 일을 이야기한 적이 있지. 나는 왜 그 당시에 이야기하지 않았느냐고 물었지만, 사실은 알아. 네가 어떻게 나를 믿을 수 있었겠니. 나를 신뢰하며 네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었겠니. 너는 엄마를 강요하고 지시하고 야단치는 사람으로 여겼을 거야.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야. 나쁜 일이 생겼을 때, 상의할 사람이 필요했을 때, 그 순간을 혼자 감당하며 외로웠을 너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다. (106)

 

엄마가 분노했던 진짜 이유는 내가 남자아이를 만났기 때문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분노의 핵심은 딸에 대해 모르고 있다는 사실, 딸이 자신이 알던 그 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이었으므로, 엄마는 배신감에 휩싸인 채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라는 말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다만 내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그 아이'가 사라졌다는 상실이 왜 하필 "배신감"으로 나타났는가 하는 점이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시몬 드 보부아르의 글에서 단서를 찾았다. 

다행스럽게도 사내아이는 (어머니의) 이런 지배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다. 풍습이나 사회가 이를 격려한다. 어머니 자신도 체념한다. 그녀는 남자에 대항한 싸움이 승산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녀는 비애의 어머니 역할을 하거나, 자기를 이기는 한 명의 승리자를 낳았다는 자존심을 되새기면서 자신을 위로한다. 여자아이는 그보다 더 전적으로 어머니에게 넘겨진다. 그 때문에 어머니의 주장은 강해진다. 그녀들의 관계는 훨씬 더 극적인 성격을 띤다. 어머니는 딸에게서 선택된 계급의 일원 같은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분신'을 찾는다. 그리고 자기 자신과의 관계의 모호성을 딸에게 모두 투사한다. '이 분신의 이타성이 확립되면 그녀는 배신당했다고 느낀다.' (109)

한참을 읽었던 부분. 나도 엄마도, 그랬다. 

 

더는 나의 말과 몸을 실패작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여전히 그랬다면 나의 실패를 엄마의 실패(또는 엄마가 실행한 양육의 싪채)로 바꿔치기했을 것이다. 세상은 한 사람의 성패를 자주 어머니의 공과로 치환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명문대에 입학한 자식의 어머니에게 비결을 듣고 싶어 한다. 반면 어떤 의미로든 패배했다고 여겨지는 이의 어머니는 이야기할 수 없을뿐더러 실패의 책임을 떠안는다. 엄마는 나의 콤플렉스에 책임감을 느낀다. "그때 병원에만 안 데려갔어도..." "발레만 안 시켰어도..." 내가 우울증이 심해지면 엄마는 갑자기 태교 이야기를 한다. "임신 기간 동안 스트레슬르 너무 많이 받아서..." 내가 자신감을 잃으면 엄마는 오래전 나를 질책했던 일을 떠올린다. "너를 너무 억눌러서..." 엄마는 과거에 옳다고 믿었던 양육 방식이 지금은 비판받고 있다는 데 자책하고, 나의 문제가 자신에게서 비롯했다고 생각하며, 이제라도 '더 나은 엄마'가 되겠다고 다짐한다. (123)

 

우리는 세계의 실패를 직시하는 대신 그 실패를 어머니라는 개인에게 떠넘김으로써 근본적 원인을 은폐한다. 어머니도 다른 모든 이와 마찬가지로 실패하는 존재임에도 부룩하고. 나처럼, 모든 사람처럼, 한때는 미숙했고 영원히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한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125)

 

자식에게 상처를 주는 어머니가 있다는 사실과 별개로 '어머니다움'에 대한 정의는 일종의 신성이다. "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기에 어머니를 만들었다."라는 말처럼 이상적 어머니상은 신에 필적하기에 모든 어머니는 실패한다. 반드시 실패한다. 어머니가 '실패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우리는 어머니에게 불가능한 요구를 계속할 것이다.
엄마와 나, 모성과 사회의 관계에 대해 조금이나마 이해하려고 엄마가 나에게 요구한 것과 더불어 내가 엄마에게 요구한 것을 돌아본다. 나는 엄마가 '언제나' 나를 사랑하기를 원했다. '무조건' 지지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나도 엄마를 '언제나' 사랑하지는 않았다. '무조건' 지지하지도 않았다. 누구도 타인을 '언제나' 사랑하거나 '무조건' 지지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엄마는 나의 10대 시절에 관해 이야기하며 몇 번이나 사과했다. 엄마가 가장 미안해하는 것은 나를 미워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진실은 다음과 같은 구절에 있다. "엄마도 아이를 사랑한다. 하지만 핵심은 이것이다. 증오도 사랑의 일부다." 엄마의 이야기가 죄책감에 대한 회고로서 고해성사의 성격을 띠는 것은 우리가 단일한 모성 신화의 세계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 신화의 세계에서 엄마는 '언제나' 아이를 사랑하고 헌신하고 희생한다. 그곳에는 미워하는 어머니도, 실패하는 어머니도 없다. (128)

 

일반적으로 성폭력을 전쟁이라고 부르지 않지만, 이 폭력의 본질은 국경을 침범하고 영토를 강탈하는 전쟁과 같다. "강간이란 어떤 남자의 공간적 권리가 어느 여자의 몸 내부까지 미친다고 주장하는 일이 아니겠는가?" (152)

 

장소는 공평하지 않다. 누군가가 범죄의 가능성을 떠올리는 곳에서 누군가는 아무것도 상상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곳에서 해야 하는 본연의 행위만을 생각한다. 배설, 이동, 걷기처럼. (153)

 

아름다움의 신화가 등장한 것은 여성을 가정 안에 묶어놓으려는 여성성의 신화가 기세를 잃었을 때, 그리하여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활발해졌을 때다. 아름다움의 신화가 여성성의 신화를 대체한 셈이다. 신화는 대체될 뿐 사라지지 않는다. (157)

 

울프의 말을 빌려 이제라도 그의 주장에 반박하자면 아름다움은 사랑, 섹스, 연애, 예술과 상관없이 "원래 여성의 영역을 구성하는 요소인 양 가장하고 나타난, 다른 어떤 것들보다 여성을 가두기에 좋은 사회적 허구"다. 그것은 진화와도 무관하다.(159)

 

베티 프리던이 20세기 중반의 미국 여성이 겪고 있다고 지적했던 문제를 21세기 초반 50대에 들어선 한국의 가정주부가 겪고 있던 문제에 대입할 수 있을까? 미국 교외의 멋진 주택에 사는 여성들. 서너 명의 아이를 키우며 인테리어, 가정용 가전, 빵 굽는 법에 관심을 쏟는 여성들. 건강과 아름다움, 남편과 아이, 살림과 사교 모임이 중요한 화제인 여성들. 남편의 출근길을 배웅하고 스테이션왜건이 아이들을 태워 학교에 데려다주는 여성들... 1950년대 미국에서는 이 같은 이미지가 완벽한 여성상으로 유표되고, 심지어 영속적 여성상으로 믿어졌다. 그러나 같은 시기, 이 여성상에 부합하는 수많은 여성이 원인 모를 불안감과 우울함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들은 이토록 완벽한 생활에 만족하지 못하는 자신들에게 잘못이 있다고 생각했기에, 무엇이 문제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기에, 이런 속내를 입 박에 꺼내는 순간 여성성이 의심받을 것을 염려했기에 이 화두는 오랫동안 그들의 내면에 묻혀 있었다. 프리던은 이 문제를 '이름 붙일 수 없는 문제'라고 이름 붙였다. (201)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가끔 엄마가 스스로에 대해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어버렸다고 말할 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씁쓸한 표정으로 "이 나이가 되도록 이룬 게 하나도 없어."라고 말할 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엄마 세대의 많은 여성(또한 내 세대의 여성)이 겪는 '이름 붙일 수 없는 문제'는 교육을 많이 받아서도 아니고 가사노동이 너무 힘들어서도 아니다. 구속하는 시어머니, 바깥일로 바쁜 남편, 떠나버린 자식만이 허탈감과 억울함과 상실감을 주는 것도 아니다. 여기에는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2005)

 

수많은 어머니가 딸에게 하는 조언, "너는 엄마처럼 살지마.", 수많은 딸이 어머니를 보며 하는 다짐, "나는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말은 '내면의 목소리를 들으라'는 구호처럼 들린다. 또한 전형적 여성상에서 벗어나려는 딸이 가장 먼저 부정하는 대상이 어머니라는 의미로, 어머니도 자신에 대한 딸의 평가 절하를 묵인한다는 의미로 들린다. 나는 엄마처럼 살지 않기를 다짐하면서, 엄마처럼 살기를 소망한다. 전자의 다짐은 엄마가 처했던 현실을 계승하지 않겠다는 의미이고, 후자의 소망은 그 현실에서 고유성을 지키려 애썼던 엄마의 정신을 상속하겠다는 의미다. (211)

 

나의 일상은 그 끊임없는 반복성 속에 위치하지만, 엄마의 정신적 상속자로서 나는 상처를 언어화하면서 강해진다. "힘든 순간을 어떻게 극복했어?"라는 질문에 "살아가는 거야, 극복하는 게 아니라."라고 대답하는 엄마에게서 상처를 극복하지 않고 살아갈 가능성을 발견한다. 극복의 서사가 승리하는 자, 성공하는 자의 이야기라면 우리의 이야기는 극복하지 않고도 살아가는 자, 상처에 의해, 상처와 함께 살아가는 자의 이야기일 것이다. (213)

 

엄마가 떠나고 알았어, 시어머니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없는데 엄마에 대해서는 아는 게 거의 없다는 걸... 엄마와 딸은 서로를 잘 알 수 없는 것 같아. 두 사람이 같이 지내는 건 딸이 어리거나 젊을 땐데, 그 시절엔 엄마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거든. 자기 문제에 몰두하는 시기니까. (중략) 딸들은 자기가 보는 엄마밖에 몰라. (233)

 

한동안은 엄마가 없구나, 생각해도 많이 슬프지 않았어. 몇년 동안 고생하셨으니 차라리 돌아가신 다음이 더 편하지 않을까 싶고. 엄마와 살았던 기간이 유년의 몇 년밖에 안 돼서 그런지도 모르지. 이제 나는 너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만, 엄마와는 그랬던 적도 없고 앞으로도 그럴 수 없어. 내가 슬픈 건 엄마와의 추억이 떠오를 때가 아니야. 추억할 게 없다는 걸 깨달을 때야. 나는 엄마가 어떤 사람인지조차 몰라. 엄마에 대해 기억나는 것도, 이야기할 수 있는 것도 없어. 돌아가셨을 때는 별로 슬프지 않았는데, 요즘은 엄마를 생각하면 너무 슬퍼서 눈물이 나. 내가 엄마에 대해 이야기하지 못하면 누가 엄마에 대해 이야기할까? 엄마의 이야기가 남아있지 않으면 누가 엄마를 기억해줄까? (236)

 

여성 건강 전문가인 크리스티안 노스럽은 "완경기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의 엄마 역할을 하는 시기"라고 말하고, (251)

 

노년 여성은 성 이데올로기의 측면에서 무성으로 간주되는 동시에, 노동의 영역에서는 여전히 강력한 여성성을 수행한다. 이 양가적 정체성은 현실에서 안전과 돌봄의 문제로 직결된다. (251)

 

노년에 이르러서도 여성이 해방될 수 없는 것은 돌봄의 책무다. 그것은 자녀를 양육하고 부모-시부모를 봉양하고도 돌봄노동이 여전히 끝나지 않았음을, 손주를 돌보고 남편을 돌보고 종국에는 홀로된 자신까지 돌본 뒤에야 죽음과 함께 이 노동이 끝나리라는 의미처럼 들린다. (253)

 

질병을 불운한 일, 개인적 문제, 예외적 사건으로 여길 때 늙고 아픈 이는 공동체에서 추방되어 고립된다. 늙음과 질병은 대다수에게 예견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모두에게 언젠가는 도래할 미래라는 자명한 사실은 잊힌다. (255)

사회적 약자 수업에서 사용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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