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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임신 중단 수술을 받았고, 수술비는 그가 부담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그렇게라도 그에게 책임을 지우고 싶었다. 나에게 평생 잊히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 그에게는 단숨에 잊힐까 두려웠다. 한때 나는 이런 생각이 찌그러진 마음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그의 마음이 전혀 찌그러지지 않은 채로 온전한 것. 그것이 문제였다. 석주야, 마땅한 기회를 줘서 고마워. 삼 년이 지나 형석은 정말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돈을 내어주었다. 삼 년 전에는 몇십만원이라는 돈이 그렇게나 큰 돈이었는데. 무사히 대기업에 취직한 형석에게는 이제 가뿐하게 내어줄 수 있는 돈이 되었다. (21)
"근데 넌 지금 혼자 있고 싶지 않을 뿐이야."
맹지가 조용히 말했다.
"아니야."
"그럼?"
내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맹지가 덧붙였다. 너는 너를 돌봐야 해. 좀처럼 항변할 수 없었다.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나를 돌보려면 나를 돌아보아야 하는데, 나는 나를 돌아보는 데 미숙했다. 일은 졸렬하게 하지만, 누군가를 좋아할 때는 손쓸 수 없을 만큼 좋아했다. 사랑에 있어서는 늘 나를 함부로 대하고 선을 넘어버렸다. (33)
어쩌면 한 사람의 역사를 알면 그 사람을 쉬이 미워하지 못하게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227)
그런데 병원 생활이라는 게 그랬다. 개인의 모든 식생에 집중하게 되었고 작은 변화 하나에도 심장이 내려앉거나 자그마한 희망을 품게 되었다. (235)
그렇게 생각하니 발걸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이런 식으로 사는 걸 버텨왔지 싶었다. 내일과 내일모레의 일을 생각하며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그러다보니 저절로 살아졌지. (257)
살아갈수록 연을 맺은 생명이 늘어갔다. 어쩌면 그 무게로 인해 모든 존재가 늙어가는 게 아닐까. 참 무턱대고 많은 생명을 키웠다. (279)
정선이가 배를 퉁퉁 두드렸을 때, 정말 그저 뱃살이 나왔을 뿐이란 걸 믿게 되었을 때, 나는 내가 은근히 정선이의 삶이 내 생각대로 나아가길 바라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내가 누구보다 남의 불행을 소비하면서 스스로를 멸시하는 사람이라는 것도. 왜냐하면, 나는 그런 식으로 멋대로 남을 판단하고 그사람의 최악을 상상하며 내가 사회에서 받은 온갖 모욕을 감수하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331)
제가 태어났을 때 손가락이 여섯 개였대요. 그래서 태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제거 수술을 받았어요. 그런데도 제 오빠는 늘 저를 육손이라고 불렀어요. 사람들은 가끔 무슨 짓을 해도 우리의 형태가 바뀌지 않는 것처럼 굴어요. (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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