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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으로 살풍경한 연립주택들이 드문드문 주황빛 전등들을 밝히고 있다. 아직 잎이 나지 않은 어린 활엽수들은 검고 깡마른 가지들의 윤곽을 어둠 속에 숨기고 있다. 그 황량한 풍경을, 거구의 대학원생의 겁먹은 얼굴을, 희랍어 강사의 핏기 없는 손목을 그녀는 묵묵히 응시한다. (18)
당신의 얼굴은 어머니 쪽을 더 닮았지요.
질끈 묶은 검은 머리채와 다갈색 피부도 보기 좋았지만, 가장 아름다운 것은 눈이었습닌다. 고독한 노동으로 단련된 사람의 눈. 진지함과 장난스러움, 따스함과 슬픔이 부드럽게 뒤섞인 눈. 무엇이든 섣불리 판단하지 않고 일단 들여다보겠다는 듯, 커다랗게 열린 채 무심히 일렁이는 검은 눈. (35)
잘 보이지 않으면 가장 먼저 소리가 잘 들릴 거라고 사람들은 생각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가장 먼저 감각되는 것은 시간입니다. 거대한 물질의 느리고 가혹한 흐름 같은 시간이 시시각각 내 몸을 통과하는 감각에 나는 서서히 압도됩니다. (39)
인간의 모든 고통과 후회, 집착과 슬픔과 나약함들을 참과 거짓의 성근 그물코 사이로 빠져나가게 한 뒤 사금 한줌 같은 명제를 건져올리는 논증의 과정에는 늘 위태하고 석연찮은 데가 있기 마련입니다. 대담하게 오류들을 내던지며 한 발 한 발 좁다란 평균대 위를 나아가는 동안, 스스로 묻고 답한 명철한 문장들의 그물 사이로 시퍼런 물 같은 침묵이 일렁이는 것을 봅니다. (44)
kalepa ta kala.
칼레파 타 칼라.
아름다움은 아룸다운 것이다.
아름다움은 어려운 것이다.
아름다움은 고결한 것이다.
세 번역이 모두 그르지 않은 것은, 고대 희랍인들에게 아름다움과 어려움과 고결함이 아직 분절되지 않은 관념이었기 때문이다. 모국어에서 '빛'이 처음부터 밝음과 색채라는 두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69)
동향이라 더 춥다고 어머니는 불평하시곤 했지만 난 그게 더 좋았어. 새벽에 깨어서 거실로 나오면 모든 가구들이 푸른 헝겊에 싸여 있는 것 같았지. 파르스름한 실들이 쉴새 없이 뽑아져나와 싸늘한 공기를 그득 채우는 것 같은 광경을, 내복 바람으로 넋 없이 바라보며 서 있곤 했어. 마치 황홀한 환각 같던 그 광경이 약한 시력 때문이었다는 걸 그땐 알지 못했지. (73)
'수난을 겪다'는 뜻의 동사와 '배워 깨닫다'는 뜻의 동사입니다. 거의 흡사하지요? 그러니까 지금 이 부분에서, 소크라테스는 일종의 언어유희로 두 가지 행위가 비슷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85)
왜 일 년 동안 까만 옷만 입어야 돼?
덤덤한 목소리로 그녀는 대답했다.
마음이 밝아질까봐 그런 거 아닐까.
마음이 밝아지면 안 돼?
죄스러우니까.
할머니한테? ... 그치만 할머닌 엄마가 웃으면 좋아하잖아.
그제야 그녀는 아이를 돌아보고 웃었다. (89)
인간의 몸은 슬픈 것이라는 걸. 오목한 곳, 부드러운 곳, 상처 입기 쉬운 곳으로 가득한 인간의 몸은. 팔뚝은. 겨드랑이는. 가슴은. 샅은. 누군가를 껴안도록, 껴안고 싶어지도록 태어난 그 몸은. (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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