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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실패했다." 로즈가 말했다.
"아니, 아니에요. 엄마는 정말 좋은 어머니였어요."
"난 실패했어." 이번에는 에멀라인처럼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줄리아는 어머니에게서 이런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고, 이런 목소리를 낼 수 있다고 믿지도 않았을 것이다. 줄리아는 어머니 안에 네 딸의 목소리가 전부 살고 있을까 생각했다. 에멀라인의 진지함, 줄리아의 또렷한 지시, 세상을 이루는 색색의 팔레트에 대한 세실리아의 흥분, 실비의 낭만적인 갈망. 어쩌면 로즈가 걸걸한 말투로, 뒤틀린 분노와 실망으로 딸들의 목소리를 감추고 있을 뿐 전부 거기에, 엄마 안에 묻혀 있을지도 몰랐다. (95)
"우리는 우리의 모자와 신발 사이에 갇혀 있지 않다." (109)
난 누구지? 윌리엄은 거울 속에 비친 사람을 알아 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어쩌면 아무도 안 보이는지 몰랐다. 실비는 마지막으로 로즈 앞에 섰을 때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던 것을 떠올렸다. 아버지가 죽은 후 실비는 매 순간 그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실비는 자신을 온전하게 지켜준 것이, 그녀가 실비일 수 있도록 지켜준 것이 아버지의 관심이었으면 어떻게 하나 걱정됐기 때문에 지금 윌리엄에게 크나큰 연민을 느꼈다. 실비는 이런 느낌이 든 지 한 달밖에 안 되었는데도 끔찍했다. 이 원고의 분량, 그리고 한 장 한 장에 담긴 노력은 윌리엄이 그런 느낌을 가진 지 아주 오래되었음을 보여주었다. (120)
그녀는 좋아하지만 사랑하지 않는 누군가와 섹스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마음 깊이 새로운 외로움이 찾아왔다. (181)
"우리가 도울 건 없어?" 에멀라인은 창가에 서 있었다. 어렸을 때 학교가 끝난 뒤 창밖을 내다보며 언니들을 찾았던 것처럼 실비를, 또는 윌리엄을 찾고 있었다. "저녁 만들어줄까? 우리가 여기서 자고 갈까?" (209)
하지만 실비는 줄리아가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향해 달려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새로운 삶을 향해서. 줄리아는 자신을 재구성하고 싶었는데 어렸을 때부터 자신을 아는 사람들이 있으면 그렇게 하기가 힘들었다. (286)
실비는 벽화를 보면서 용감함은 상실과 맺어져 있는 걸까 생각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하면 그 대가를 치러야 했다. (333)
하지만 이제 줄리아는 자신이 꿈꾸었던 미래를 떠올렸다. 그 미래에서 줄리아는 스틸레토힐과 비싼 정장 차림으로 최고 책임자의 책상 뒤에 앉아 있었다. 그 꿈을 이룰 수 있을지 알 수 없었지만 가능할지도 몰랐다. 실비가 윌리엄과 만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어쟀든 일어났다. 분명 인생은 줄리아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유동적이었다. (351)
실비는 그 당시 이야기를 쓰면서 사랑하는 이지가 세상에 나온 날 찰리가 떠난 것을 진정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앨리스가 태어난 날에는 로즈가 시카고를 떠났다.
실비는 자신의 죽음이 무엇을 불러올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일이 연달아 일어날까? (435)
난 그냥 알아, 실비가 생각했다. 그녀는 얼마 전부터 소리 내서 말하는 대신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두 가지가 똑같다는 듯이, 둘 다 똑같은 무게를 가지고 똑같은 거리를 가로지른다는 듯이. (441)
실비는 어렸을 때 친구들이 학교에서 안 좋은 일이 있었거나 좋아하는 남자애한테 무시당해서 기분이 상했을 때 엄마를 보자 마자 눈물을 터뜨리는 것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그런 애들에게는 엄마가 안전한 곳이었고, 따라서 엄마가 곁에 있으면 자기감정을 아주 작은 부분까지 세세하게 느꼈다. 실비에게는 항상 줄리아가 그런 사람이었다. 로즈는 너무 변덕스러웠고, 실비가 너무 어릴 때부터 서로 기질이 잘 맞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서 실비는 항상 엄마를 지나쳐 방으로 들어가 줄리아의 품에 뛰어들었다. 실비가 눈물로 줄리아의 교복을 적시며 모든 것을 털어놓으면 줄리아가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 그런 적이 너무나 많았다. 실비가 자기감정 때문에 혼란스러울 때면 언니의 존재가 명쾌함을 주었다. (456)
그는 부재와 침묵으로 앨리스를 구할 생각이었지만 바로 그 부재로, 그 침묵으로 앨리스를 형성했음을 이제야 깨달았다. 이 깨달음에 충격을 받아 "미안해"라고 소리 내서 말했다. 그의 가정이 틀렸다. 윌리엄은 자신이 또 뭘 틀렸을까 생각했다. (479)
이 소설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또하나는 바로 월트 휘트먼의 세계이다. 제사에서부터 등장하여 찰리와 실비를 통해 계속 언급되는 월트 휘트먼의 시와 그의 시집 <풀잎>은 이 소설의 외연을 넓힌다. 초월주의의 대표적 인물로 손꼽히는 휘트먼은 "나이든 어미들의 하얀 머리에서 비롯"된 풀잎, 즉 죽은 생명체 위에서 자라는 새로운 생명체라는 은유를 통해 삶과 죽음의 순환을 노래한다. 자연에서 죽음과 삶이 계속 겹쳐지며 순환하듯이 이 소설에서도 찰리의 죽음과 손녀의 탄생, 소중한 이의 죽음과 끊어졌던 관계의 회복이 유기적으로 맞물린다. 휘트먼의 시와 찰리가 실비에게 했던 말은 우리가 "내 모자와 신발 사이에 갇히지 않"는 존재, 육체라는 테두리를 넘어 세상과 연결된 존재임을 일깨워준다. 따라서 상처를 주고, 치유하고,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 온전하게 만들어주는 유기적인 관계는 월트 휘트먼을 통해 가족에서 인류로 확장된다. (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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