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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엇이든 빠르게 잊는 편이다. 기쁨이나 분노, 증오나 슬픔 따위의 감정을 오래 품지 못하고, 오래도록 살아온 마을, 몇 년이고 알아온 친구, 사랑하던 사람과 나눈 대화마저 금세 잊어버리고 만다. 머리가 나쁜 것인지 그저 관심이 없던 것인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그런데 수치심만은 좀처럼 잊을 수가 없다. 사소한 부끄러움부터 몸이 떨릴 정도의 치욕까지 크고 작은 수치심을 느낀 순간들이 나의 기억의 대부분을 이룬다. 옛날 일을 떠올리면 수치스러운 장면들이 끝없이 줄지어 걸려 있는 회랑을 걷는 것 같다. (47)
그렇게 조금씩 빗물이 땅에 스미듯이 옷에 향이 배듯이 선생님과의 수업 시간은 저에게 쌓여 있었습니다. 결국 배움이란 그런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지식을 얻는 일이 아니라 자세가 닮아가는 일이 배움이겠지요. (71)
아무튼 다시 여름으로 돌아온다면, 영원한 여름이란 그런 것이다. 영원한 청춘이나 영원한 생명력이면서 성장 불가능의 세계이며 죽음의 세계인 것. 이 여름의 이미지에 영향을 짙게 받은 내게 여름이란 청춘이면서 파국을 품고 있는 것이고, 무한하고 영원한 것이면서 이미 끝나버린 무엇이기도 하다. 바글거리는 생명력과 속절없는 무력감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고 해야 할까. (85)
현관에서 우리는 매일 모종의 감정적 낙차를 느낀다. 이를테면 뜨거운 여름날, 밖에서 더위에 시달리다 현관에 섰을 때 느끼는 서늘함과 안도감이나, 바쁜 일과가 끝나고 겨우 집에 돌아왔을 때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갑자기 느껴지는 노곤함 같은 것들 말이다. 나는 이런 격차를 언제나 흥미롭게 생각해왔다. 운동의 방향이 전환될 때, 순간 힘이 0이 되는 것처럼, 그런 기묘한 진공상태가 현관에는 있는 것이다. 긴장 상태가 항구적으로 지속되는 공간이자 그 긴장이 감춰진 공간이라고 할까. (111)
어깨에 기대어 잠든 이의 머리를 밀어내지 못함
수학여행의 밤, 아이들은 이불을 펴고 누운 채로 잠들지 않는다 어둠 속에서 아이들의 목소리가 공중을 떠돈다
예전에 여기에서 선배가 죽었대
아니야 죽은 게 아니라 자퇴를 한 거래
여기 주인이 교장이랑친구래 그래서 매년 여기로 온대
아이들은 흐린 어둠을 보고 있다 얼굴이 보이지 않으니 더욱 진실한 고백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아무도 고백을 하지는 않고 말들만 떠도는 수학여행의 밤
옆 반 반장이 혼자 우는데 걔네 담임이 안아줬대
매점 아줌마가 원래 이 학교 졸업생이래
아니야 죽은 딸이 여기 학생이었대 그래서 온 거래
저 모든 일이 진실인지 알 수 없지만 어두운 곳에서 작게 속삭인다면, 그것이 고백의 형식을 갖춘다면 그것은 더욱 진실처럼 들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아이의 손가락이 옆에 누운 아이의 손가락에 닿아 있다 실수로 그런 것처럼 (115)
자본 앞에서 한없이 무력하기만 한 시가 자본의 폭력 앞에서 낭독된다면, 그때 시는 다른 곳에서 읽힐 때와는 다른 의미를 품을 수 있었다. 시 한 줄을 읽는 일이 누군가의 삶의 터전을 지키는 힘으로 직접 이어질 수는 없으나, 누군가의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모인 사람들 앞에서 시를 함께 읽고 나누는 일은 작은 힘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그때 알았다. (143)
먼 옛날, 아이가 없는 노부부가 있었다. 그들은 서로를 아끼며 선량하게 잘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나무를 하러 간 할아버지가 우연히 발견한 샘물에서 목을 축였는데, 그러자 젊은 시절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이에 놀란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샘터로 데려가 샘물을 마시게 했고, 둘은 모두 젊은이가 되었다. 그 소문을 들은 옆집에 살던 욕심 많은 노인 또한 샘물에 찾아갔는데, 그는 욕심을 부려 아기가 되고 말았다. 젊어진 부부는 욕심 많은 노인이 보이지 않아 걱정되는 마음에 샘터를 찾아갔고, 거기서 혼자 울고 있는 아기를 발견하였다. 부부는 이를 하늘이 내려준 것이라 여겨 그 아이를 키우기로 하였다. (중략)
그런데 <젊어지는 샘물>에서 욕심 많은 노인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욕심 많은 노인에게는 새로운 인생을 살 기회가 주어진다. 그것도 선량한 부모의 밑에서 자라는 기회가 말이다. 그렇다면 이번의 새로운 인생에서는 욕심 많은 노인이 되지 않을 수도 있으리라. 그것이 내가 이 이야기를 특별하게 생각하는 까닭이다. 새로운 기회를 준다는 것,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분명 대부분의 옛이야기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상상이기 때문이다. (중략)
내가 <젊어지는 샘물>이야기를 통해 흥미롭게 느낀 것도 이런 맥락일것이다. 새로운 인생과 두번째 기회가 주어지는 이야기, 그것도 악인에게 다시 시작할 기회를 주는 그런 이야기가 내 마음을 끈 것이겠지. 무엇보다 이 이야기가 품고 있는 이 여유로움과 너그러움이 마음에 든다. '이번 생은 틀렸어' 운운하는 이야기가 우리 자신에 대한 실망과 절망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젊어지는 샘물> 쪽에는 그러한 절망의 기미가 없지 않은가. 반성할 마음조차 없던 이에게 새롭게 시작할 기회를 주는 이 자비로움은 뭐랄까, 21세기에는 좀처럼 떠올리기 어려운 발상이라는 느낌이다. (155)
그러니 시가 '너'를 그토록 오래도록, 열심히도 불러왔던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너' 없이는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으니까. 그러나 즉물적인 대상으로서의 '너'를 부르는 것만으로는 아직 시에도, 연애시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냥 '너'가 생각나고, '너' 없이 못 살겠다고 말하는 것은 대중가요가 충분히 해오고 있고, 더 잘하고 있으니까.
그렇다면 시는 무엇일까. 시란 멀어지는 것이다. '너'가 선행하지 않으면 '나'가 불가능하듯이, 의미는 차이가 없으면 발생하지 않는 것이다. 시란 동일성의 세계로 편입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차이를 발견하는 것이다. 너를 사랑한다는 것은 너와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180)
'둘만의 세계'까지 분해된 세계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미 세계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사랑의 공동체라거나 두 사람의 공동체라거나 하는 어떤 논의들에 약간의 어색함을 느낀다. 그러한 논의들은 너무 관념화되었고, 너무 실체와 멀어졌고, 너무 이해와 인식에 기대고 있다고 생각한다. 2의 사랑, 2의 다름, 2의 관계는 '의미'를 창출하지만, 의미 자체가 세계는 아니기 때문이다. (184)
그래서 나는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되었다. 너무 많이 말하는 것은 말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중략) 그런 말들을 끝없이 덧붙이면서, 그 실체 없는 말이 나를 뒤덮기를 바라며, 그 쥐떼 같은 말들이 불현듯 찾아오는 허탈함과 자기혐오를 가려줄 수 있기를 바라며.
결국 언어란 무엇인가를 드러내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은폐하는 것에 가깝다는 생각이다. 말을 줄임으로써 숨겨지는 것이 있지만, 드러난 말로 인해 가려지는 것도 있다. (199)
숭고함을 선택하는 인간이란 결국 무엇인가에 두려움을 가진 인간일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는가. 자신의 고통과 슬픔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으나, 동시에 그것을 도저히 말할 수 없다는 두려움이 시인에게도 있었으리라. (201)
언어가 축소되는 시대다. 언어는 넘쳐나는데, 언어에 채 이르지 못하는 말의 조각들뿐인 시대다. 다른 사람들 이야기가 아니고 그 무엇보다 나의 이야기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나 역시 아무것도 말하고 싶지 않아 무엇이든 말하고 있을 따름이니까. 그리고 그렇게 모두가 아무 말이나 하며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일이 거대한 규모로 이뤄지고 있는 시대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욕망 역시 축소되고 있다. 삶에 대한 전망이 급격하게 축소되고 있음에 우려를 표하는 목소리가 등장한 지는 이미 수년이 지났고, 그러한 우려는 견고한 현실이 되어 미래에 대한 우리의 전망을 짓누르고 있다. '나'에 대해 꿈꾸는 일이 어려워지는 만큼, 우리는 '나'에 대해 끝없이 말과 이미지를 덧붙일 수밖에 없다. 자꾸 흘러내리는 그 언어를 다시 덧바르면서, 그러지 않으면 무너져버릴 자신의 모습을 두려워하며. 욕망은 축소되고 언어는 과잉되어 오히려 왜소해지는 시대, 그것이 지금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시대의 모습이다. (202)
누군가는 과거로 돌아가기를 바라고 또 누군가는 먼 미래를 그린다. 그것은 조금도 특이한 일이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돌이킬 수 없는 시간과 가닿을 수 없는 시간에 대해 상상하곤 하니까. 마음이라는 것은 언제나 현재와 조금 어긋난 곳에 위치해 있고, 그렇기에 우리는 자꾸 다른 시간을 그리게 된다. (210)
미래의 책
이제 너에게 비밀을 말해줄게
이 책에는 너의 미래가 적혀 있고
그 일은 모두 다 일어날 거야
언젠가 네가 바닷가에 갔을 때
너는 혼자가 아닐 거야
그때는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고 있을 거야
수면은 빛을 받아 눈부시게 산란하고 있을 거야
두 사람은 바다를 보며 이상한 농담을 던지지
그때 나눈 농담은
몇 번의 계절이 지나고도 계속 되풀이되며
두 사람을 웃음 짓게 할 거야
아침이 오면 식탁 위에 올려둔 꽃의 향기를 맡으며 새로운 아침을 맞을 거고 밤이 오면 포근한 어둠 속에서 낮 동안의 일을 이야기할 거야
그러다 깜빡 잠들어버리겠지
서로의 머리를 맞댄 채로
두 호흡을 교환하며
부드러운 꿈속에 빠져드는 거야
그건 아주 평화로운 밤일 거야
가끔 슬픔이 찾아올 때도 있지
하지만 그때는 결코 혼자가 아닐 거야
갓 구운 빵을 나누며 그 순간 서로가 같은 온기를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겠지 이렇게 작고 사소한 것이 삶의 위로가 된다는 당연한 사실에 놀라며 잠시 서소를 끌어안을 거야
그거면 된 거야
다 괜찮아지는 거야
너에게는 더 많은 기쁨이 있을 거야 딸기밭에 딸기가 매달린 것을 보며 웃을 거고 강아지가 나비를 쫓아 뛰어다니는 것을 보며 웃을 거야
물론 아무 일이 없어도 웃을 수 있지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있다면 말이야
이제 너에게 진실을 말해줄게
지금 마주잡은 두 손이 한 권의 책이 되는 거야
거기 적힌 일은 앞으로 모두 다 일어날 거고
그 책의 가장 첫 줄에는 사랑이라고 적혀 있지
그다음에 적히는 건 무슨 일이든 좋을 거야 시시한 일도 괜찮고, 놀라운 일도 좋겠지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해
그 책에는 기쁨이 가득할 거고
마지막에는 두 사람은 오래도록 행복했다고 커다랗게 아주 커다랗게 적혀 있을 거야 (235)
삶은 항상 우리의 상상과는 다르게 흘러가고야 만다. 그것이 우리 삶의 좋은 점이기도 하리라. 그러나 그 모든 어긋난 상상조차 이미 두 사람의 미래의 책에는 적혀 있으리라고 믿었다. 꼭 바라는 대로만 되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알면서, 가끔은 슬퍼하거나 괴로운 순간이 오리라는 것을 알면서, 그럼에도 더 나은 미래를 함께 꿈꿀 수 있다고 믿는다는 것, 그것이 사랑의 가장 멋진 점 아니겠는가. (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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