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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없는, 그러나 여기저기서 나타날 수많은 시민의 얼굴을 상상하고 있다. 작가 강남규는 저서 <지금은 없는 시민>에서 '시스템주의자'와 '의인'에 관해 이야기한다. 시스템주의자는 "어떤 위기 상황을 극복할 책임은 시스템에 있으니, 자신에겐 뭘 요구하지 말라"고 요구하는 사람이다. 그 반대편에 있는 의인은 "누구도 요구하지 않았지만 위기 상황에서 누구보다 앞서 행동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의인의 이야기를 전해 듣길 좋아하는 동시에 시스템주의자처럼 말하길 좋아한다고 강남규는 통찰한다. 그가 주목하는 건 시스템주의자와 의인 사이의 시민들이다. '시스템이 바뀌어야 한다'는 말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공백의 영역에 시민들이 자리한다. 의인처럼 해낼 여유가 없는 시민들도 문제적인 시스템을 바꾸는 일에 동참할 수는 있다. 선의를 모으고 책임을 나누고 서로의 부담을 덜어줄 수도 있다. 서로에게 좋은 변화의 계기가 되는 시민의 존재와 그들 사이의 연쇄 작용을 희망한다. (18)
내가 가장 좋아하는 덧셈의 장면을 소개하고 싶다. 마그나손은 자신의 아이에게 묻는다. 아직 살아 계신 증조할머니의 나이와, 아이가 증조할머니가 되었을 때의 연도와, 세월이 흘러 아이의 증손녀 역시 증조할머니가 되었을 때의 연도를. 그럼 아이는 종이에 숫자를 적어가며 계산한다. 2008년에 태어난 자신이 아흔네 살이 되고, 자신의 증손녀가 다시 아흔네 살이 되는 미래를 상상하며. 그리고 마그나손은 다시 묻는다. 증조할머니가 태어난 해에서 아이의 증손녀가 증조할머니의 나이가 되는 해까지는 전부 몇 년일지. 덧셈을 마친 아이는 262년이라고 대답한다. 마그나손은 아이에게 말한다.
상상해보렴. 262년이야. 그게 네가 연결된 시간의 길이란다. 넌 이 시간에 걸쳐 있는 사람들을 알고 있는 거야. 너의 시간은 네가 알고 사랑하고 너를 빚은 누군가의 시간이야. 네가 알게 될, 네가 사랑할, 네가 빚어낼 누군가의 시간이기도 하고. 너의 맨손으로 262년을 만질 수 있어. 할머니가 네게 가르친 것을 너는 손녀에게 가르칠 거야. 2186년의 미래에 직접 영향을 줄 수 있다고. (24)
'마리'라는 단위에 대해 <물결> 2021년 여름호에서 한승희는 다음과 같은 대안을 소개한다. 인간 동물에게 적용할 수 없는 단어는 비인간 동물에게도 쓰지 않을 것. '암컷 원숭이 한 마리' 대신 '여성 원숭이 한 명'이라고 쓸 것. 한승희의 글에서 윤나리는 이렇게 말한다. "수를 세는 단위인 '명'은 현재 '名(이름 명)' 자를 쓰지만, 종평등한 언어에서는 이를 '命(목숨 명)'으로 치환해 모든 살아 있는 존재를 아우르는 단위로 확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44)
세상 대부분의 일이 '어차피'와 '최소한'의 싸움이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어차피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이들과 그래도 최소한 이것만은 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이들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말들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절멸하지 않고 싶다는 의지였다. 너도 살고 나도 살자는 소망이었다. (59)
모두 추출주의(extractivism)에 기반하여 되풀이되는 악습들이다. 기후정의 활동가 김선철의 해석에 따르면 "지구와의 비호혜적인 관계, 온전히 취하는 관계"가 추출주의다. 나무와 화석연료를 비롯한 지구의 자원을 내일이 없는 것처럼 사용하는 태도를 가리킨다. 인간의 편의를 위해 자원을 쥐어짜내는 추출주의는 결국 모든 존재를 대상화하고 위계를 만들어낸다. 계속 성장하고 이윤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사람 또한 수단이 되고 모든 것이 시스템으로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결국 추출주의에 대한 비판은 더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을 구분하는 권력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비롯된다. (66)
차별금지법과 무관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누구나 삶의 어떤 순간에는 반드시 소수자가 된다. 생의 숙명이 그렇다. 우리는 모두 젊거나 늙거나 어리다. 우리는 여자이거나 남자이거나 또 다른 성별일 수 있다. 우리는 선택할 수 없었지만 어떤 국가의 어떤 지역에서 어떤 민족으로 태어나, 어떤 피부색을 가지고 어떤 언어를 쓰며 살아간다. 국적을 든든한 울타리처럼 느끼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 우리는 모두 어떤 신체를 가졌다. 우리 중 누군가는 장애인이며, 장애인이 아닌 누군가도 언제든 장애를 갖게 될 수 있다. 또한 언제든 다치거나 아플 수 있다. 우리는 혼자 살거나 누군가와 함께 산다. 우리는 결혼하거나 결혼하지 않는다. 우리 중 누군가는 임신과 출산을 겪는다. 우리는 원하는 종교를 가질 수 있다. 각자의 사상과 정치적 의견을 가질 수 있다. 우리 중 누군가는 형의 효력이 실효된 전과자일 수 있다. 우리 중 누군가는 정규직이고 누군가는 비정규직이며 다양한 형태로 고용된다. 누군가는 교육받을 기회가 충분했고 누군가에겐 그 기회가 없었다. (116)
무엇이 차별인지에 대한 합의는 역사의 흐름에 따라 끊임없이 재정비되어왔다. 스스로를 차별주의자라고 자처하는 사람은 드물다. 하지만 차별에 관한 기준을 계속해서 새롭게 알아가지 않는다면 구시대적인 차별 발언과 행동을 무심코 저지르기 쉽다. 차별에 대한 감수성이 섬세해질수록, 억울하게 배제되는 시민의 수가 줄어든다. 차별금지법은 이를 위해 최소한의 기준을 마련하는 제도다. (118)
사람들은 차별받은 사람과 저항하는 사람을 같은 존재라고 여기거나 차별받았으므로 저항하는 게 당연하다고 쉽게 연결 지었다. 하지만 나는 차별받은 존재가 저항하는 존재가 되는 일은 전혀 자연스럽지 않으며 오히려 순리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차별받으면 주눅 들고 고통받으면 숨죽여야 한다.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복종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그러라고 하는 게 차별인 것이다. 모두가 침묵하고 굴종할 때 차별은 자연현상이 된다(홍은전, 그냥 사람, 2020; 25). (120)
11월 9일 교육부는 2022 개정 교육과정 행정예고안을 공개했다. 그에 따르면 2025년부터는 초,중,고등학교 교과서에서 쓰이는표현이 바뀐다. 우선 '민주주의'가 '자유민주주의'로 수정됐다. 자유민주주의는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이 내걸었던 단어이기도 하다. 윤석열 정부가 즐겨 쓰는 '자유'란 주로 시장과 기업과 자본가와 노동시장 상층부를 장악한 사람들을 향해 있다. 노동시장의 하층부, 빈곤층, 장애인, 성소수자, 여성, 어린이 등의 자유에 대한 무관심은 노골적일 지경이다. 노동하는 사람을 능동적 주체로 인정하는 '노동자'라는 말도 개정안에서 사라졌다. '성평등'과 '성소수자'도 사라졌다. 자유와 평등을 위한 그간의 치열한 투쟁을 지우는 변화다. 이를 두고 인권위는 인권 담론을 후퇴시킨다며 우려했으며 전국역사교사모임 소속 교사 천여 명이 반대 의견을 표명했다. 그러나 결정권은 국가교육위원회로 넘어갔다. 근 미래의 교과서는 세계의 커다란 일부를 의도적으로 누락시킨 필독서가 될 터다. (139)
김행숙 시인의 시 <눈과 눈>의 한 구절이었다.
너는 눈이좋구나, 조심하렴, 더 많이 보는 눈은 비밀을 가지게 된다
아이들은 내가 쓴 문장을 받아 적었다. 나는 말했다. 더 많이 보는 사람의 황홀과 고통에 대해. 그리고 비밀을 가진 사람의 불안과 아름다움에 대해. 우리를 괴롭히는 동시에 구원하기도 할 다양한 비밀들에 대해. 부디 글쓰기라는 작업이, 그 비밀을 혼자 품느라 너무 크게 다치지 않도록 도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다시 못 볼 수도 있는 아이들에게 하나의 이야기만을 전해야 한다면 이 말을 하고 싶었다. 글쓰기를 통해 스스로를 지킬 수 있다는 말. 그러다 보면 더 많은 걸 수호할 수도 있게 된다는 말. (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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