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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기 아빠는 어디 갔대? 언제나, 돌아서기도 전에 어른들은 아이가 눈에 안 보이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아니 그애가 보이긴 보이는데 반쯤만 보이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소리 낮춰 쉬쉬하며. 쯧쯧 혀를 차며. 아이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 척 어른들 이야기를 주워듣는다. 눈먼 이야기들을 훔쳐온 오늘은 평소보다 호주머니가 무겁다. 그애는 도둑질을 좋아한다. 왜냐하면 그 일은 자신만의 비밀을 갖는 일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 비밀은 어른들도 친구들도 경찰들도 결코 알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144) 

 

나는 사장 아들의 결혼식 답례품으로 쓰일 물건을 만들고 그것을 포장하면서, 직원들 모두가 군말 없이 결혼식 안내를 맡거나 뒷일 하는 모습을 보면서, 사장이 오십 인분자리 케이크를 검도하듯 큰 칼로 썰어나갈 때 관객처럼 박수치는 우리를 보면서, 다음날 아침이면 어제를 잊은 듯 만원 지하철에 몸을 싣고 있는 자신을 보면서, 통근 버스를 기다리며 줄 서 있을 때 스마트폰 화면을 응시하거나 자기 발끝만을 내려다보는 사람들 뒷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완전한 각자라고 느낀다. 돈을 번다는 것, 이 사회에서 돈을 번다는 것은 각자라는 고독을 철저히 견디는 일임을 느낀다. (181)

 

우리는 부재가 채워지기를 열망하지만, 정작 빈자리가 채워진 뒤엔 그것이 우리가 원하던 것은 아님을 알게 된다. 아버지는 딸이 중학생이 되던 해 집으로 잠시 돌아왔는데, 건넌방을 쓰기 시작한 그 남자가 오자 내가 기다리던 나의 아버지는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187) 

 

그래서 결국은 어떻게 됐나. 생각 있는 애들은 다 거리로 나오고 별것 아닌 것들이 죄 보신해 한자리씩 차지했지. 그것들이 지금 젊은 사람들 윗사람이 되어버렸고. 그게 큰 실수였어. 우리 중 누구도 그렇게 멀리 내다볼 안목은 없었고. (202)

 

그 비닐하우스 어딘가에서 그들은 왔다. 종점에서 회차하는 이 버스 안에 탄 젊은 사람은 오직 먼 곳에서 온 그들뿐이었다. 버스 운전사나 그곳 출신일 늙은 승객들에게 외국인 남자들은 익숙한 존재처럼 보였다. 떠나간 아들딸의 빈자리를 대신하는 검은 유령들. (222)

 

빛은 잘 들어옵니까.
바람은 불어옵니까.

커튼을 젖혔습니다. 찬란한 햇빛이 쏟아질 줄 알았는데 커튼을 열어도 사방 어둠뿐이었던 반지하의 실내에서 나는 이 집의 주인을 돌아보고 있었습니다. 

언제나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세입자가 집주인에게, 우리가 죄수에게 묻는 질문이 동일하다는 것은.
우리가 가둘 수 없는 것의 안부를 묻는 일은. (267) 

 

한 남자의 뒷모습을 보았다.
철교 위 열차 안으로 겨울 햇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왼손에 낡은 갈색 서류가방을 든 채, 그는 자기 앞에 놓인 유리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쉴새없이 풍경이 흘러갔다. 미래로부터 과거를 향해 한 사람이 복사되고 있는 것처럼. (272) 

 

그녀는우리가 글 쓸 때, 사진가가 피사체를 마주하는 것과 같은 윤리 의식이 필요하다 했다. 이야기를 타인에게서 가져오는 것이기도 하니까. 또한 모든 소설은 얼마간 자전적이며 많은 작가의 초기 작품은 자기 이야기에서 출발한다고 했다. 그러니, 자신에게서 가장 가까운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해보세요. (277)

 

진심으로 말한다는 것은 그만큼의 강도로 누군가 듣고 있음을 믿음으로써 가능하다. 진심으로 듣는다는 것 역시 그와 같은 강도로 상대가 말하고 있음을 믿음으로써 가능하다. 화자는 청자를 향해 말함으로써, 청자는 화자를 향해 귀를 기울임으로써 서로의 존재를 나타나게 한다. 장은 그렇게 생겨나며 그때 표현은 표현으로서 성립한다. (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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