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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본질은 불가능을 '실현'하는 일이 아니라 '시도'하는 일이라 믿는다. 보여지지 않았던 것을 보이게 하는 것, 말해지지 않았던 것을 말하게 하는 것은 글을 쓰면서 품게 된 꿈이다. (10)
'평범하지 않음'은 '특별함'이나 '비범함'일 수도 있고 '비보편성'이나 '소수성'일 수도 있다. 딸이 평범하게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에는, 선구적이고 투쟁적인 사람으로서 질투와 공격의 대상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과 소수자로서 차별과 배제의 대상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공존하는 듯하다. 평범해지고 싶은 소망, 혹은 스스로가 평범하다는 믿음의 기저에는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삶에 대한 갈망, 정상성과 표준성에 대한 강박, 비주류에 대한 두려움, 심지어 혐오가 자리하는지 모른다. (39)
다 포기하자, 다 내려놓자, 그렇게 생각하니까 평상심을 유지할 수 있었어. 그전에는 하루에도 열두 번식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기분이었거든. 내가 상처받지 않으려고 무심해진 건데 사람들은 몰라. 그저 좋은 며느리, 좋은 아내인 줄 알아. 사실은 내가 살려고 애정도, 관심도, 기대도 다 놓아버린 건데. (63)
후일에야 내가 겼은 일들의 '이름'을 알았지만 당시에는 이름을 몰랐으므로 이해하지 못했고, 이해하지 못했으므로 제대로 저항하거나 거부하지도 못했다. 리베카 솔닛은 말했다. "무언가를 정확한 이름으로 부르는 행위는 무대책, 무관심, 망각을 눈감아주고, 완충해주고, 흐리게 하고, 가장하고, 회피하고, 심지어 장려하는 거짓말들을 끊어낸다. 명명은 해방의 첫 단계다." (75)
감정적인 것을 여성의 영역으로 여기는 사회에서 남성은 여성보다 무감각하게 사회화된다. 타인에게 침묵할 뿐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본연의 자아에 대해 침묵한다. 남성다움에 사로잡힌 이가 생각과 감정을 자신에게든 타인에게든 '구구절절하게' 이야기하지 않는 이유는 내면을 드러내는 것이 나약함, 즉 여성성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가부장적 사회에서 남성은 나약함을 통제당하지만, 캐럴 길리건이 간파했다시피 "한때 여성의 것이었던 연약함은 인간의 특성"이다. 약함은 여성다움이 아니라 인간다움이다. (84)
여자에게 불리하거나 위험한 세상은 잘못되었다는 생각, 성별로 한계를 규정지으면 안 된다는 생각. 그러면서도 너희가 딸이라서 '걱정'스러웠고 늘 '조심'시켰지. 여자가 여자를 키우는 데에는 그런 모순이 있는 것 같아. (93)
요즘은 텔레비전에 나오는 육아 프로그램을 자주 봐. 반성하고 또 반성해. 너무 무지했구나. 너희는 어른이 되었고 나는 노인이 되었어. 이제 나는 너희를 키우지 않지. 그래도 육아 프로그램은 자주 보고 있어. 지금이라도 알아야지. 좋은 엄마가 되어야지. 다시 너를 키운다면 네 이야기를 더 많이 들어주고, 칭찬해주고, 안아줄 텐데. 잘하고 있다고 자신감을 북돋워줄 텐데... 산다는 건, 세상과 부딪친다는 건 자신감이 점점 꺾이는 일인데... 네가 피기도 전에 내가 꺾어버린 것 같아. (96)
얼마 전에 통화하다가 네가 10대 시절에 힘들었던 일을 이야기한 적이 있지. 나는 왜 그 당시에 이야기하지 않았느냐고 물었지만, 사실은 알아. 네가 어떻게 나를 믿을 수 있었겠니. 나를 신뢰하며 네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었겠니. 너는 엄마를 강요하고 지시하고 야단치는 사람으로 여겼을 거야.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야. 나쁜 일이 생겼을 때, 상의할 사람이 필요했을 때, 그 순간을 혼자 감당하며 외로웠을 너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다. (106)
엄마가 분노했던 진짜 이유는 내가 남자아이를 만났기 때문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분노의 핵심은 딸에 대해 모르고 있다는 사실, 딸이 자신이 알던 그 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이었으므로, 엄마는 배신감에 휩싸인 채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라는 말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다만 내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그 아이'가 사라졌다는 상실이 왜 하필 "배신감"으로 나타났는가 하는 점이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시몬 드 보부아르의 글에서 단서를 찾았다.
다행스럽게도 사내아이는 (어머니의) 이런 지배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다. 풍습이나 사회가 이를 격려한다. 어머니 자신도 체념한다. 그녀는 남자에 대항한 싸움이 승산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녀는 비애의 어머니 역할을 하거나, 자기를 이기는 한 명의 승리자를 낳았다는 자존심을 되새기면서 자신을 위로한다. 여자아이는 그보다 더 전적으로 어머니에게 넘겨진다. 그 때문에 어머니의 주장은 강해진다. 그녀들의 관계는 훨씬 더 극적인 성격을 띤다. 어머니는 딸에게서 선택된 계급의 일원 같은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분신'을 찾는다. 그리고 자기 자신과의 관계의 모호성을 딸에게 모두 투사한다. '이 분신의 이타성이 확립되면 그녀는 배신당했다고 느낀다.' (109)
한참을 읽었던 부분. 나도 엄마도, 그랬다.
더는 나의 말과 몸을 실패작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여전히 그랬다면 나의 실패를 엄마의 실패(또는 엄마가 실행한 양육의 싪채)로 바꿔치기했을 것이다. 세상은 한 사람의 성패를 자주 어머니의 공과로 치환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명문대에 입학한 자식의 어머니에게 비결을 듣고 싶어 한다. 반면 어떤 의미로든 패배했다고 여겨지는 이의 어머니는 이야기할 수 없을뿐더러 실패의 책임을 떠안는다. 엄마는 나의 콤플렉스에 책임감을 느낀다. "그때 병원에만 안 데려갔어도..." "발레만 안 시켰어도..." 내가 우울증이 심해지면 엄마는 갑자기 태교 이야기를 한다. "임신 기간 동안 스트레슬르 너무 많이 받아서..." 내가 자신감을 잃으면 엄마는 오래전 나를 질책했던 일을 떠올린다. "너를 너무 억눌러서..." 엄마는 과거에 옳다고 믿었던 양육 방식이 지금은 비판받고 있다는 데 자책하고, 나의 문제가 자신에게서 비롯했다고 생각하며, 이제라도 '더 나은 엄마'가 되겠다고 다짐한다. (123)
우리는 세계의 실패를 직시하는 대신 그 실패를 어머니라는 개인에게 떠넘김으로써 근본적 원인을 은폐한다. 어머니도 다른 모든 이와 마찬가지로 실패하는 존재임에도 부룩하고. 나처럼, 모든 사람처럼, 한때는 미숙했고 영원히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한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125)
자식에게 상처를 주는 어머니가 있다는 사실과 별개로 '어머니다움'에 대한 정의는 일종의 신성이다. "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기에 어머니를 만들었다."라는 말처럼 이상적 어머니상은 신에 필적하기에 모든 어머니는 실패한다. 반드시 실패한다. 어머니가 '실패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우리는 어머니에게 불가능한 요구를 계속할 것이다.
엄마와 나, 모성과 사회의 관계에 대해 조금이나마 이해하려고 엄마가 나에게 요구한 것과 더불어 내가 엄마에게 요구한 것을 돌아본다. 나는 엄마가 '언제나' 나를 사랑하기를 원했다. '무조건' 지지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나도 엄마를 '언제나' 사랑하지는 않았다. '무조건' 지지하지도 않았다. 누구도 타인을 '언제나' 사랑하거나 '무조건' 지지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엄마는 나의 10대 시절에 관해 이야기하며 몇 번이나 사과했다. 엄마가 가장 미안해하는 것은 나를 미워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진실은 다음과 같은 구절에 있다. "엄마도 아이를 사랑한다. 하지만 핵심은 이것이다. 증오도 사랑의 일부다." 엄마의 이야기가 죄책감에 대한 회고로서 고해성사의 성격을 띠는 것은 우리가 단일한 모성 신화의 세계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 신화의 세계에서 엄마는 '언제나' 아이를 사랑하고 헌신하고 희생한다. 그곳에는 미워하는 어머니도, 실패하는 어머니도 없다. (128)
일반적으로 성폭력을 전쟁이라고 부르지 않지만, 이 폭력의 본질은 국경을 침범하고 영토를 강탈하는 전쟁과 같다. "강간이란 어떤 남자의 공간적 권리가 어느 여자의 몸 내부까지 미친다고 주장하는 일이 아니겠는가?" (152)
장소는 공평하지 않다. 누군가가 범죄의 가능성을 떠올리는 곳에서 누군가는 아무것도 상상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곳에서 해야 하는 본연의 행위만을 생각한다. 배설, 이동, 걷기처럼. (153)
아름다움의 신화가 등장한 것은 여성을 가정 안에 묶어놓으려는 여성성의 신화가 기세를 잃었을 때, 그리하여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활발해졌을 때다. 아름다움의 신화가 여성성의 신화를 대체한 셈이다. 신화는 대체될 뿐 사라지지 않는다. (157)
울프의 말을 빌려 이제라도 그의 주장에 반박하자면 아름다움은 사랑, 섹스, 연애, 예술과 상관없이 "원래 여성의 영역을 구성하는 요소인 양 가장하고 나타난, 다른 어떤 것들보다 여성을 가두기에 좋은 사회적 허구"다. 그것은 진화와도 무관하다.(159)
베티 프리던이 20세기 중반의 미국 여성이 겪고 있다고 지적했던 문제를 21세기 초반 50대에 들어선 한국의 가정주부가 겪고 있던 문제에 대입할 수 있을까? 미국 교외의 멋진 주택에 사는 여성들. 서너 명의 아이를 키우며 인테리어, 가정용 가전, 빵 굽는 법에 관심을 쏟는 여성들. 건강과 아름다움, 남편과 아이, 살림과 사교 모임이 중요한 화제인 여성들. 남편의 출근길을 배웅하고 스테이션왜건이 아이들을 태워 학교에 데려다주는 여성들... 1950년대 미국에서는 이 같은 이미지가 완벽한 여성상으로 유표되고, 심지어 영속적 여성상으로 믿어졌다. 그러나 같은 시기, 이 여성상에 부합하는 수많은 여성이 원인 모를 불안감과 우울함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들은 이토록 완벽한 생활에 만족하지 못하는 자신들에게 잘못이 있다고 생각했기에, 무엇이 문제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기에, 이런 속내를 입 박에 꺼내는 순간 여성성이 의심받을 것을 염려했기에 이 화두는 오랫동안 그들의 내면에 묻혀 있었다. 프리던은 이 문제를 '이름 붙일 수 없는 문제'라고 이름 붙였다. (201)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가끔 엄마가 스스로에 대해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어버렸다고 말할 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씁쓸한 표정으로 "이 나이가 되도록 이룬 게 하나도 없어."라고 말할 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엄마 세대의 많은 여성(또한 내 세대의 여성)이 겪는 '이름 붙일 수 없는 문제'는 교육을 많이 받아서도 아니고 가사노동이 너무 힘들어서도 아니다. 구속하는 시어머니, 바깥일로 바쁜 남편, 떠나버린 자식만이 허탈감과 억울함과 상실감을 주는 것도 아니다. 여기에는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2005)
수많은 어머니가 딸에게 하는 조언, "너는 엄마처럼 살지마.", 수많은 딸이 어머니를 보며 하는 다짐, "나는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말은 '내면의 목소리를 들으라'는 구호처럼 들린다. 또한 전형적 여성상에서 벗어나려는 딸이 가장 먼저 부정하는 대상이 어머니라는 의미로, 어머니도 자신에 대한 딸의 평가 절하를 묵인한다는 의미로 들린다. 나는 엄마처럼 살지 않기를 다짐하면서, 엄마처럼 살기를 소망한다. 전자의 다짐은 엄마가 처했던 현실을 계승하지 않겠다는 의미이고, 후자의 소망은 그 현실에서 고유성을 지키려 애썼던 엄마의 정신을 상속하겠다는 의미다. (211)
나의 일상은 그 끊임없는 반복성 속에 위치하지만, 엄마의 정신적 상속자로서 나는 상처를 언어화하면서 강해진다. "힘든 순간을 어떻게 극복했어?"라는 질문에 "살아가는 거야, 극복하는 게 아니라."라고 대답하는 엄마에게서 상처를 극복하지 않고 살아갈 가능성을 발견한다. 극복의 서사가 승리하는 자, 성공하는 자의 이야기라면 우리의 이야기는 극복하지 않고도 살아가는 자, 상처에 의해, 상처와 함께 살아가는 자의 이야기일 것이다. (213)
엄마가 떠나고 알았어, 시어머니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없는데 엄마에 대해서는 아는 게 거의 없다는 걸... 엄마와 딸은 서로를 잘 알 수 없는 것 같아. 두 사람이 같이 지내는 건 딸이 어리거나 젊을 땐데, 그 시절엔 엄마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거든. 자기 문제에 몰두하는 시기니까. (중략) 딸들은 자기가 보는 엄마밖에 몰라. (233)
한동안은 엄마가 없구나, 생각해도 많이 슬프지 않았어. 몇년 동안 고생하셨으니 차라리 돌아가신 다음이 더 편하지 않을까 싶고. 엄마와 살았던 기간이 유년의 몇 년밖에 안 돼서 그런지도 모르지. 이제 나는 너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만, 엄마와는 그랬던 적도 없고 앞으로도 그럴 수 없어. 내가 슬픈 건 엄마와의 추억이 떠오를 때가 아니야. 추억할 게 없다는 걸 깨달을 때야. 나는 엄마가 어떤 사람인지조차 몰라. 엄마에 대해 기억나는 것도, 이야기할 수 있는 것도 없어. 돌아가셨을 때는 별로 슬프지 않았는데, 요즘은 엄마를 생각하면 너무 슬퍼서 눈물이 나. 내가 엄마에 대해 이야기하지 못하면 누가 엄마에 대해 이야기할까? 엄마의 이야기가 남아있지 않으면 누가 엄마를 기억해줄까? (236)
여성 건강 전문가인 크리스티안 노스럽은 "완경기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의 엄마 역할을 하는 시기"라고 말하고, (251)
노년 여성은 성 이데올로기의 측면에서 무성으로 간주되는 동시에, 노동의 영역에서는 여전히 강력한 여성성을 수행한다. 이 양가적 정체성은 현실에서 안전과 돌봄의 문제로 직결된다. (251)
노년에 이르러서도 여성이 해방될 수 없는 것은 돌봄의 책무다. 그것은 자녀를 양육하고 부모-시부모를 봉양하고도 돌봄노동이 여전히 끝나지 않았음을, 손주를 돌보고 남편을 돌보고 종국에는 홀로된 자신까지 돌본 뒤에야 죽음과 함께 이 노동이 끝나리라는 의미처럼 들린다. (253)
질병을 불운한 일, 개인적 문제, 예외적 사건으로 여길 때 늙고 아픈 이는 공동체에서 추방되어 고립된다. 늙음과 질병은 대다수에게 예견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모두에게 언젠가는 도래할 미래라는 자명한 사실은 잊힌다. (255)
사회적 약자 수업에서 사용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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