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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부터 아버지는 접힌 사람, 미뤄진 삶만을 지닌 사람이 되었다. 그에 더해 젊은 시절 함께 품었고 사랑을 싹트게 해주었던 목표에 먼저 도달한 아내를 보조하며 아무에게도 내색할 수 없는 끓는 감정들, 한없이 유예되고 멀어지는 꿈에 대한 막막함을 속으로만 삭혀야 했던 사람이기도 했다. (73)

 

내 마음속에 있던 '어머니'라는 팔레트는 셀 수 없이 많은 칸으로 나뉘어 있었고, 거기에는 서로 다른 명도와 채도, 색깔을 지닌 기억들이 물감처럼 담겨 있었다. '나는 행복한 적이 없었어'라는 어머니의 말은 명백하게 새까만 빛깔이 다른 많은 아름다운 빛깔들을 까맣게 삼켰겠지만, 내게 그건 단지 하루의 기억에 불과했고, 결코 그날의 칸 밖으로 나오는 일이 없었으므로 다른 어떤 것도 더럽히지 않았다. 아버지에 대한 내 죄책감은 거기서 비롯되었다. (75)

 

하지만 요즘 안 그런 사람이 어디 있어? 그런 일들을 깊이 떠올리고, 그걸 특별하다고, 비극이라고 여기면서 어떤 기억을 추출해내려고 애쓰는 일이 내게는 수치스럽게 느껴져. 그래서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는 거야. 내가 아는 사람들도, 나도 그래. 말을 할 수가 없어. 말을 하는 사람들은 우선 살아남은 사람들이지. 살아남았고 목소리가 있는 사람들 말이야.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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