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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역사, 진실, 섭리... 크고 아름다운 말일수록 백만가지 다른 뜻으로 쓰이기 마련이다. (20)
인류학자 김현경은 그의 아름다운 책 <사람, 장소, 환대>에서 인간과 사람이라는 개념을 구분하면서 사람이란 구성원들의 환대를 통해 비로소 공동체 안에서 성원권을 갖는다고 설명한다. 어떤 개체가 인간이라면 그 개체는 우리와의 관계 바깥에서도 인간일 것이지만, 어떤 개체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사회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어야 하며, 그에게 자리를 만들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46)
인간은 서로에게 상냥할 수 있다. 어쩌면 그래서 인간은 존엄한 것 아닐까. (47)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우리는 매 순간 현재를 산다. 누구든 지금 현재, 자기가 속한 사회 안에서 기준점을 찾을 수밖에 없다.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 인간다운 생활인가, 라는 기준점이다. 시대가 바뀌면서 이 기준점이 올라가는 것은 배부른 소리가 아니라 사회의 발전이다. 아니, 배부른 소리라고 불러도 상관없다. 배부른 소리가 인간사회를 발전시켜왔기 때문이다. 결핍이 변화를 낳는다. 모두가 현재에 만족하고 머무른다면 인간은 아직도 동굴 안에서 나뭇가지 모아 불 피우며 살고 있었을 것이다. (72)
대중민주주의 사회에서 다수의 변덕과 횡포로부터 소수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정치권력뿐 아니라, 시민들 사이에도 법치주의에 기반한 사고방식이 뿌리내려 있어야 한다. 이제 법치주의는 단순히 제도여서는 안 된다. 사고방식이어야 하는 것이다. 법치주의는 법이면 뭐든 다 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 누구든 권력을 함부로 행사하지 말고 항상 신중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러한 생각을 시민들이 공유하고 있는 사회가 진정한 법치주의 사회다. (82)
이들이 제공하는 플랫폼 덕분에 개개인들도 타인을 24시간 관찰하고 분석할 수 있게 되었다. 엿보기의 쾌락에 탐닉하는 관음증의 시대이기도 하고, 자기만의 도덕적 완장을 차고 타인을 감시하는 새로운 종교 경찰의 시대이기도 하다. 인간의 생각이란 수시로 변화하기 마련이고 어떤 특정한 맥락 속에서 표현되는 것인데 그중 어느 한 부분만을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툭 잘라 이것 보라며 전시하고 조리돌림하고 잊히지 않도록 '박제'하기까지 한다. 종교적 열정에 들떠 십자군전쟁에 나선 기사들처럼. 바야흐로 테크놀로지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마녀사냥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는 것일까. (107)
맞는데, 맞긴 맞는데, 나는 절대로 이 설명에 쉽게 고개를 끄덕이고 생각하기를 멈춰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119)
인간의 밑바닥이 궁금하면 자기 자신의 솔직한 바닥부터 들여다보면 될 일인데 왜 불특정 다수의 밑바닥을 굳이 접하며 살아야 할까? '밑바닥 페티시즘'인가? 이제는 '알권리'보다 '모를 자유'가 더 중요한 것 아닐까? '인간 다이어트'가 필요한 시대가 아닐까? 제발 좀 남들에게 신경 좀 끄고 각자 좀 살자고 이 연사 외치고 싶을 때가 있다. (128)
일하기 싫고 글 쓰기 싫고 만사 지친 순간, 소파에 누워 지웠던 앱을 다시 깔고는 남들의 어리석음과 찌질함, 개념 없음을 전시하는 온갖 게시물들과 거기 달린 조롱과 쌍욕, 혐오로 가득한 댓글들을 굳이 찾아 읽고 있게 된다. 그 결과 남는 건 인간 혐오와, 그보다 더한 자기혐오뿐인데도. 탄수화물 중독처럼 인간 중독도 중독이다. (129)
자유는 최대한, 그 제한은 최소한이어야 한다는 명제는 '정치적 공정성'을 명분으로 하는 경우에도 달라져서는 안 된다. 예술의 이름으로 오랫동안 반성 없이 자행되어온 여성 혐오, 소수자 혐오, 인종 혐오에 대하여 반대하고 시정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히 필요한 일이지만, 이를 넘어 '모범답안'을 제시하고 여기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공격 대상으로 삼는 것은 자유에 대한 부당한 억압일 뿐만 아니라, 얻고자 하는 효과도 내지 못한다. 미래는 당위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허구 속에 완벽하게 정의로운 유토피아를 만들어놓고 스스로 감격에 겨워한다고 해서 실제 세상이 바뀔까? 게다가 그 '정의'라는 것에 대해 스스로 성찰하지도 않는다면? (139)
나는 정치적 공정성을 각별히 생각하는 편이라, 이 부분을 오래 읽었다.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보며 충분하지 않은 응보야말로 국가보안법 위반처럼 보아 엄벌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 아닐까. 응보는 단순히 국민 감정에 휘둘리는 사법 포퓰리즘이 아니다. 오히려 사법이 해야 할 본질적인 기능일 수도 있다. (158)
위기는 자유를 사치로 느끼게 만든다. 하지만 자유는 위기의 시대일수록 소중히 지켜야 그것을 영영 잃어버리는 비극을 막을 수 있다. 목적이 정당하고, 방법 면에서 매우 효과적이라 할지라도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는 조치는 필요 최소한이라어야 하고 신중해야 한다는 과잉금지 원칙은 개인들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다. (174)
롤스는 차등의 원칙보다 기회 균등 원칙 및 정의의 제1원칙인 기본적 자유와 권리의 보장이 우선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현실에서 발생하는 문제들 대부분은, 최소 수혜자에게 이득을 주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의 자유를 제한해야 할 때(타다와 택시의 분쟁처럼) 일어난다. (203)
이것이 발전이다. 자유가 사회를 견인하되, 그 속도가 누군가를 낙오시켜 쓰러지게 만들지 않도록 평등이 제어하는 것. 무조건 달려나가는 것이 아니라 아직은 시기가 아니라면 잠시 멈출 줄도 아는 것. 어쩌면 그 망설임의 순간이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어려운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일지도 모르겠다. (205)
그런데 시험을 통한 경쟁만이 공정하고 시장경제에 맞는 거라고? 내가 왜 당신의 '노오력'에 대해 보상해야 되는데? 그거 '감성팔이' 아냐? '떼법' 아닌가?
... 대답이 어렵다면 시장 논리만으로 답을 하려 했기 때문일 것이다.
대신 답하자면, '공공성' 때문이다. 그렇다. 겉은 자유경쟁 및 결과에 대한 승복으로 포장되어 마치 냉정한 시장 논리에 부합하는 것 같지만 시험을 통한 자원 배분 역시 효유성의 요구보다는 공공성의 요구가 더 큰 배경을 이루고 있다. 이윤 극대화를 위해서는 훨씬 효율적인 수단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개 채용, 그것도 '블라인드' 공개 채용을 기업에게 요구하는 것은 영업의 자유에 대한 제한이다. 다만 그것이 '공공복리'에 부합하기에 정당화된다. 시험 만능을 주장하는 당신 역시 일종의 '사회적 배려' 대상자인 것이다.
당신이 죽어라 외우고 있는 평생 한 번 쓸지 안 쓸지 모르는 영어 단어나 시사 상식이 실제 업무 능력을 보려주는 지표여서가 아니라, 성실하게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기회가 돌아가는 사회가 우연히 타고난 금수저만 기회를 독식하는 사회보다 다수에게 행복할 기회를 줄 수 있기에, 그리고 노력에 사회적으로 가치를 부여하는 사회가 그렇지 않은 사회보다 생산적이고 안정적이기에 사회는 시험을 통한 취업이라는 시스템을 채택하고 있다. (215)
노력도 능력도 그 자체로 당연히 보상받아야 되는 가치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의미 있기에 보상받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한발 더 나아가볼 수 있다. 사회는 다양한 사람들로 구성된다. 그중 특정 계층, 특정 인종, 특정 성별에게 기회가 집중되어 있고 나머지는 소외되어 있다고 하자. 지금 현재로서는 그 특정 사람들의 능력이 더 뛰어난 것이 맞다고 치자. 그렇다고 그들만 기회를 독점하도록 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더 나은 길일까? 앞에서 노력에 대해 사회가 보상하는 이유는 단지 효율성 때문이 아니라 누구나 노력하면 보상받는 사회가 그렇지 않은 사회보다 생산적이고 안정적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어린애들조차 소꿉놀이를 계속하고 싶으면 친구에게 자기가 좋아하는 인형을 양보한다. 친구들이 삐져서 가버리면 혼자 인형을 들고 있어봤자 놀이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놀이를 계속하려면 양보와 배려가 필요하다.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배려의 혜택은 결국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돌아간다. 판이 깨지는 것을 막고 생태계를 순환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218)
앞에서 언급한 '시험 근본주의'는 '경쟁 근본주의' 관점에서 보면 뻔뻔한 논리다. 대학입시, 공무원 시험, 대기업 공채시험 한 방으로 정규직이 되어 평생 남들과의 경쟁을 면제받고 지대를 얻으며 무임승차하겠다는 파렴치한 주장이기 때문이다. 경쟁은 계속되어야 한다.
(중략) 어떤가. 완벽하게 공정하지 않은가? 어떠한 특혜도 반칙도 기득권도 불로소득도 없다.
... 그런데 이런 사회에 살고 싶은가? (중략) 이상하다. 분명히 공정한 경쟁은 좋은 것인데, 끝까지 밀어붙이니 왠지 숨이 막힌다. (221)
지금 당장의 불공정을 시정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자칫 무한경쟁만이 정의라고 착각하는 것은 곤란하다. 누구 좋으라고. 노력, 능력, 경쟁, 공정, 모두 중요한 가치다. 하지만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느 한 가지 가치만 추구할 수 없다. 공정 역시 결국에는 공존을 위한 수단 중의 하나인 것이다. (224)
이러한 시대적 배경하에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사회주의 사상이 퍼져나가고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나기에 이르자, 유럽 국가들은 혁명에 의한 체제의 파괴를 막기 위해 사회적 정의의 이념을 헌법 안으로 수용하기 시작했다. 선거권을 확대하고 노동3권을 보장하며 복지 정책을 확대하는 등 일련의 변화들을 통해 '사회국가 원리'가 현대 민주주의 국가 헌법의 기본 원리 중 하나로 자리잡기에 이른 것이다. (227)
자유주의와 자본주의의 궁여책이었던 사회정의.
공산주의식 발상이라는 반발이 주로 고연령층에서 나온다면, 젊은층에서 나오는 반발은 보다 문화적인 영역에서 발견되곤 한다. 정치적 공정성에 대한 피로증을 호소하는 반응의 하나라고 볼 수도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이른바 '언더도그마'에 대한 반발감이다.
'언더도그마'라는 용어 자체가 반발감에 기초하여 만들어진 신조어다. 미국의 극우 세력인 티파티 논객 마이클 프렐이 2011년 저서 <언더도그마>에서 처음 사용한 이 말은 약자를 의미하는 언더도그와 독단적 신념을 뜻하는 도그마의 합성어다. '약자는 무조건 선하고 강자는 무조건 악하다고 인식하는 사회적 현상 또는 오류'를 뜻한다고 한다. (229)
사람들은 미지의 문제에 부딪히면 우선 과거의 경험들에서 실마리를 얻기 시작한다. 요즘 유력한 대안으로 활발히 논의 되고 있는 기본소득제도도 그 기원을 거슬러올라가면 2000년 전인 로마제국 시대에 이른다. 정복전쟁으로 노예가 대폭 증가하자 평범한 로마 시민들은 값싼 노예 노동력에 밀려 일자리를 잃게 된다. 사회 불안이 고조되자 로마는 시민들에게 매달 30킬로그램의 밀을 주고 공공 서비스를 무상 제공했다. (239)
또한 민법상의 유류분 제도도 마찬가지다.
빌 게이츠가 도입을 주장한 '로봇세'도 롤스의 <정의론>에 부합하는 제도다. 로봇과 인공지능으로 인해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게 되므로 노동자를 대체한 로봇에게도 노동자들과 비슷한 수준의 과세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로봇을 소유한 기업에 대해 과세해 기본소득의 재원으로 사용하자는 주장이다. 인간 노동을 대체하는 기술혁신은 그로 인하여 일자리를 잃는 최소 수혜자에게도 이득이 되어야 한다는 발상이다.
인공지능 시대의 글로벌 기업들에게도 인간은 계속 필요하다. 상품을 소비해줄 사람들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삶 전체에서 끊임없이 빅 데이터를 제공해주는 존재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빅 데이터를 통한 강화 학습이 필요한 인공지능에게는 인간이 생산하는 데이터가 곧 철광석이고 석유다. 산업의 쌀이다. 여기서 사회적 대타협의 여지가 생긴다. 로봇세나 기본소득을 제안하고 지지하는 사람들이 빌 게이츠, 마크 저커버그, 일론 머스크 등 글로벌 IT 기업가들인 데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241)
타임뱅킹이란 사람들이 자기 시간을 들여 여러 봉사활동을 하며 공동체 내에서 신용 포인트를 쌓은 뒤 그 포인트, 즉 시간을 교환하는 제도로, 빈곤퇴치 운동가로 활동하던 에드거 칸 교수가 시작하여 현재 미국 여러 지역에서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다. 처지가 어려운 싱글맘이 지역 타임뱅크에 요청을 올리면 솜씨 좋은 누군가가 찾아와 벽에 난 구멍을 막아주고 부엌을 수리해준다. 수리해준 사람에게는 해당 시간만큼의 포인트가 적립되어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할 때 사용할 수 있다. 싱글맘은 짬이 날 때 아이를 봐주거나 요리를 해주고 아이들은 마을 가든파티에서 악기를 연주해서 포인트를 적립한다.
앤드루 양은 이를 더욱 확장하여 실제 금전적 가치까지 얻을 수 있는, 중앙정부가 후원하는 강화된 타임뱅킹 제도를 제안하고 있다. 디지털 사회신용Digital Social Credit, DSC이라는 새로운 통화를 만들자는 것이다. 타인을 돌보고 돕는 일, 환경을 개선하는 일 등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일을 할 때마다 정해진 DSC를 획득할 수 있도록 플랫폼을 구축하고, 이 포인트는 현금처럼 사용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부동산 부자는 욕을 먹지만 DSC 부자는 존경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사람들의 자기 실현 욕구, 인정 욕구를 사회적 가치가 있는 일로 유도하는 넛지 효과가 생겨날 수 있다. (246)
타임뱅킹.
윤가은 감독의 영화 <우리들>에서 주인공 '선'은 다섯 살 남동생 '윤'이 밤낮 친구 연오에게 맞으면서도 또 언제 싸웠냐는 듯 다시 같이 노는 꼴을 보니 열불이 난다. 그래서 채근한다.
선: 야, 이윤, 너 바보야? 그리고 같이 놀면 어떡해?
윤: 그럼 어떡해?
선: 다시 때렸어야지.
윤: 또?
선: 그래, 걔가 다시 때렸다며. 또 때렸어야지.
윤: 음... 그럼 언제 놀아?
선: 어?
윤: 연오가 때리고 나도 때리고, 연오가 또 때리고, 그럼 언제 놀아? 나 그냥 놀고 싶은데.
천진난만한 다섯 살 아이 윤이의 말이 어쩌면 헌법의 핵심일지도 모르겠다. 헌법은 결국 공존을 위한 최소한의 선의다. (253)
찢었다.
언제나 경탄하게 하는 문유석 작가님.
나의 2017년을 <개인주의자 선언>으로 지켜주셨다면, 2023년까지 <최소한의 선의>로 채워주시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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