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SMALL
반려빚 :: 김지연
그래도 모든 걸 다 말하고 나니 속이 후련했다. 정현은 자신이 망했다는 이야기를 이렇게 맘 편히 털어놓을 사람이 서일 뿐이라는 점에 조금 서글퍼졌다. 서일은 정현이 겪은 모든 일에 책임이 있고 그래서 다 이해해주는 것만 같았다. (32)
무언가를 욕망한다는 것은 그것을 내가 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믿어보는 일인 것도 같고, 그래서 그게 좌절되면 무척 괴롭겠지만 욕망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애쓰는 동안에는 살아갈 맛이 나는 것 같아요. 어쩐지 '정현'은 자신이 무엇을 욕망하는지도 잘 모르는 사람이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무언가를 할 수 있다고 믿을 때 행복해지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게 좋지 않은 선택이라고 하더라도요. 가끔 이상한 선택을 하는 사람을 마주치게 되는데 대부분은 자신의 쓸모를 발견하고 믿어주는 쪽을 선택하게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51)
그들은 어느 순간이고 욕먹을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에게 자기 검열은 자기 연민보다 훨씬 더 쉬운 자동 반사 같은 일이었다. (63)
이소 중입니다 :: 이주혜
그러나 사람을 상대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치사한 면이 있기 마련이고 특히 극내향형인 번역가는 영혼을 다치는 일이 빈번해 요즘은 오직 상훈을 위해 버티자는 마음마저 구겨질 때가 많다. (66)
아직 성장 중인 아이들은 늘 시인의 마음에 미세한 실금을 그었다. 누구도 이런 말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시인은 아이들이 풍기는 비릿한 풋것의 냄새에서, 묘하게 소매길이나 목둘레가 맞지 않는 어설픈 옷차림에서, 심지어 좌우가 틀어진 머리카락의 비대칭에서 요란한 비난의 아우성을 들었다. 당신은 몰라! 당신은 우리에 관해 아무것도 몰라! 태어나고 자라는 것들에 대해 아는 게 없어! (70)
번역가는 소설가도 그 딸도 평생 자립이라는 걸 생각해본 적이 있을까, 두 여자는 너무도 공고한 결탁자가 아닌가 하고 의문했다. (73)
어린 새가 이소 중입니다
종이에 그렇게 씌어 있었다. 이소가 뭐야? 소설가가 물었다. 시인은 검색을 위해 휴대폰을 꺼내려다가 주머니가 빈 걸 개닫고 멋쩍게 웃었다. 번역가가 까끌까끌한 모랫바닥에서 숲 가장자리의 보드라운 풀밭 위로 어린 새를 옮겨주었다. 그리고 휴대폰을 꺼내 '이소'를 검색했다. 떠날 이 새집 소. 새의 새끼가 자라 둥지에서 떠나는 일. 어쩌라고? 소설가가 무정하게 말했다. 번역가는 소설가를 향해 번지는 미움을 지그시 누르고 내처 검색한 내용을 읽어주었다. 이소 단계의 어린 새들은 비행 능력이 서툴고 낯선 환경에서 잘 날지 못해 땅에 앉아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런 상황을 잘 모르고 섣불리 새를 구조하면 새들은 생존을 위해 배워야 할 것들을 놓치게 되고 나중에 자연으로 복귀해도 야생에서 살아남기 어려울 수 있다. 번역가는 검색한 문장을 읽으면서 동시에 아직 손에 남은 새의 박동을 감각했다. (81)
연대라는 말만큼 해석이 다양한 단어도 없을 거예요. 저마다 생각하는 연대의 방식과 범위가 달라 자칫 앞으로 한 걸음 가려다 뒤로 두 걸음 가기 쉬운 일이기도 하고요. 그만큼 연대란 어느 분야에서든 사실 효율성이 떨어집니다. 연대는 경제의 언어가 아니니까요. 비경제적이고 비효율적인 걸 알면서도 추구하는 것, 그것이 제가 생각하는 연대의 한 면모인데요. (100)
내일이 없는 사람들처럼 실컷 웃고 떠들었던 어느 날이 떠오르네요. 우리는 봄꽃이 핀 안산을 올랐고 이소 중인 어린 새들이 열매처럼 나무 가득 매달려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세계가 털갈이 중이었어요. 우리는 바람에 떨리는 나뭇잎을 보고도 까르르, 카메라 앞에 선 친구의 뾰로통한 표정에도 까르르까르르 웃고 또 웃었습니다. 그리고 침묵이 찾아올 때마다 방점을 찍듯이 말했죠. 아, 실컷 웃었어. 내일이 없는 사람들처럼. 그날 우리는 뭔가에 쫓기듯 웃고 떠들었는데, 그것이 무엇이었을까 뒤늦게 생각해봅니다. (103)
문학과 인문학의 옳고 아름답고 때로는 전투적인 말들이, 결국 주변의 몇몇 사람하고만 나눌 수 있는 작은 특산품이 되어가는 건 아닐까. 취향, 가치관, 의식, 처지가 비슷한 사람들기리 삼삼오오 나누는 것이 되면서 '인문학'이 소실점을 향해 줄어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104)
숙희가 만든 실험영화 :: 전하영
윤미는 이제 할머니구나.
숙희는 문득 고개를 들고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아기의 귀여움에 잠시 밀려났던 '할머니'라는 단어가 차차 그 존재감을 드러내며 숙희의 머릿속을 잠식해나갔고, 숙희는 외계에서 온 미스터리한 돌덩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 말에 저만치 거리감을 둔 채 쉬이 다가서지 못하고 부근만을 이리저리 돌아가며 힐긋거릴 뿐이었다. 봉인 해제하면 갑자기 그 돌덩이 안에서 치명적인 바이러스 따위가 튀어나올지 모른다며 경계하듯이.
아직, 아직은 마음의 준비가 안 되었는데.
숙희는 그것에 대해서는 정말로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여러 번 생각하면서도 그 생각의 구심력으로부터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마주해야만 했다. 감정이 흩날리는 벚꽃처럼 동요됐다. 이제는 인생에서 떨어져나갈 일만 남은 것 같았다.
이제 겨우 아줌마에 무감해졌건만. (118)
아름답다 느꼈던 많은 것들이 그것을 붙잡는 순간 곤란함이 되어 곁에 남았다. (129)
"무슨 책?"
"그냥 일이야."
"숙희 씨는 배 안 고파?"
찬영이 부엌 한가운데 멈춰 서서 그렇게 하면 자기가 귀여워 보이리라 생각하는 듯 아랫배를 문지르며 물었다.
"아, 찬영 씨 배고프구나."
숙희는 상대를 불쌍히 여기는 듯한 표정을 지어주면서도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을 잽싸게 했다. 어쩌라고. 역시 이건 아니었다. 외로움이 간절했다. 자고로 어른이라면 참을성을 길러야 한다, 숙희는 스스로를 탓할 뿐이었다. (139)
반응형
LIST
'::: >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슬픔을 아는 사람 :: 유진목 (1) | 2023.10.27 |
---|---|
슬픈 짐승 :: 모니카 마론 (1) | 2023.10.21 |
개인적 기억 :: 윤이형 (0) | 2023.10.19 |
최소한의 선의 :: 문유석 (1) | 2023.10.19 |
나는 결코 어머니가 없었다 :: 하재영 (2) | 2023.10.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