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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젊은 사람들이 그렇듯 나도 젊었을 때는 젊은 나이에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 안에 너무나 많은 젊음, 너무나 많은 시작이 있었으므로 끝이란 것은 좀처럼 가늠이 안 되는 것이었고 또 아름답게만 생각되었다. (9)
내 연인과 브라키오사우루스 외에는 생각하고 싶은 것이 많지 않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나는 잊고 싶은 것을 기억하지 않는 법을 배웠다. 왜 많은 사람들이 체험할 가치조차 없었던 사소한 사건들을 기억 속에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는 마치 사용된 인생의 증거로서 쓸모가 있다는 듯 백 번도 넘게 다시 그것을 뒤져 보여주는 것인지도 이해할 수 없다. (15)
하지만 어쩌면 내가 그 이전부터 스스로 질문을 제기하고 나 자신이 그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어떤 신호만을 기다렸을지도 모르겠다. 그 질문은 '만일 그날 저녁의 발작이 내 죽음을 가상실험한 것으로 끝나지 않고 정말로 그때 내가 죽었다면 내가 놓쳤던 것이 무엇이었을까'라는 것이었다. 인생에서 놓쳐서 아쉬운 것은 사랑밖에 없다. 그것이 대답이었고, 그 문장을 마침내 말로 꺼내 얘기하기 오래전부터 이미 나는 그 대답을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20)
나는 사랑이 안으로 침입하는 것인지 밖으로 터져 나오는 것인지조차도 아직 알지 못한다. 가끔은 사랑이 어떤 다른 존재처럼 우리 안으로 침입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몇 달 동안, 심지어 몇 년 동안이나 주위에 숨어 우리를 엿보다가 어느 때인가 기억이나 꿈들의 방문을 받고 우리가 갈망하며 숨구멍을 열 때, 그때 그것이 숨구멍을 통해서 순식간에 밀고 들어와 우리의 피부를 감싸고 있는 모든 것과 뒤석인다.
사랑은 바이러스처럼 침입하기도 한다. 그것은 우리 안에 틀어박혀 조용히 머물러 있다가 어느 날엔가 우리가 충분히 저항력이 떨어지고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고 생각될 때, 그때 불치의 병이 되어 터져 나온다. 그러나 또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사랑이 죄수처럼 우리 내부에 살고 있는 것이라고 상상할 수도 있다. 사랑이 해방되어 우리들 자신인 감옥을 부수고 나오는 데 성공하는 일은 가끔씩 일어난다. 사랑이 감옥을 부수고 나온 종신형 죄수라고 상상해보면, 얼마 안 되는 자유의 순간들에 사랑이 왜 그렇게 미쳐 날뛰는 것인지, 왜 그렇게 무자비하게 우리를 괴롭히고 온갖 약속 안으로 우리를 밀어넣었다가 곧바로 온갖 불행 안으로 몰아넣는 것인지를 가장 빠르게 이해할 수 있다. 마치 우리가 사랑을 내버려두기만 하면 사랑이 무엇을 줄 수 있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려는 것처럼, 사랑이 지배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벌을 받아 마땅한지를 보여주려는 것처럼 말이다. (25)
프란츠에게는 청춘의 사랑이 있었다. 그가 내게 그렇게 얘기했다. 사진 한 장을 보여주기도 했다. 해변 아니면 풀밭에 프란츠가 한 소녀와 함께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서로에게 속해 있다는 승리감의 확신이 빛나고 있었다. 그들이 서로를 위해 태어났다는 것, 영원히 서로의 곁에 머물게 되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48)
어떤 사람이 평범하게 성장한 자녀나 손자들까지 두고 있는 나이에,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아지고 심장발작의 위험이 있는 그런 나이에 이제야 놓치고 살았던 청춘의 사랑을 만회하고 있다고 주장했다면, 내가 기억하는 한 내 주변 사람들은 모두 그것을 우스운 일로 여겼을 것이다. 나 자신도 사월 어느 날 저녁 뇌 안에서 양극이 바뀌기 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사랑이라는 것은 공룡과도 같아서, 모든 세상이 그들의 죽음을 즐긴다. 트리스탄과 이졸데, 로미오와 줄리엣, 안나 카레니나, 펜테질레아, 항상 죽음만이 있고, 항상 불가능한 것에 대한 쾌락이 있다. 사람들이 핑계로 삼는 것처럼 그렇게 사랑에 무능력하다고 나는 믿지 않는다. 사람들은 청춘의 사랑이 없는 불행한 영혼들에 의해서, 언제였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너무 일찍 죽음의 공포 속에서 소리치면서 그들의 사랑을 몸 밖으로 내보냈던 불행한 영혼들에 의해서 그렇게 믿도록 설득을 당하는 것이었다. (49)
나는 자기 부모의 자손이라는 것을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을 많이 알지 못한다. 부모를 닮고 싶어 하는 사람은 더더욱 적다. 그와 반대로, 내가 알게 된 사람들 거의 모두가 부모와 닮아간다는 당연한 위협에 대해 기겁을 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은 물려받은 특성들을 피해가는 회전활강과 비슷했고 그런 식으로 결국 운명적으로 삶이 이루어졌다. (61)
카린과 클라우스는 학창시절부터 알던 사이였다. 그들은 내가 결코 갖지 못했던 것, 즉 청춘의 사랑이엇다. 청춘의 사랑이 무엇이냐고 누군가가 물었다면 나는 카린과 클라우스라고 말했을 것이다. 청춘의 사랑은 단순히 젊은 시절에 하는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비교가 불가능한 것이다. 청춘의 사랑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사랑을 견주어 잴 수 있을 어떤 것도 아직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사랑은 유일하게 그 사랑 자체를 위해서 존재한다. 그것은 아직 실망을 극복할 필요도 없고 이전의 행복을 능가하지 않아도 되고, 그 무엇도 반박하거나 수정하거나 대체하지 않아도 된다. (중략) 카린과 클라우스를 보고서 그들이 서른, 또는 마흔에는 어떤 모습일지, 또 그들의 아이들에게는 어떤 이름을 지어주고 집을 어떻게 꾸미고 살지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75)
나중에 프란츠가 자기 아내는 불행에 단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녀를 떠날 수 없다고 말했을 때 나는 비명을 지르며 발작을 일으켰다. (80)
우리가 만났을 때 우리는 아직 늙지 않았었다. 어쨌든 나는 프란츠가 늙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프란츠도 나를 늙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젊은 것도 아니었다. 우리가 젊지 않다는 것은 이야기할 것이 많다는 장점이 있었다. (82)
사랑을 하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아직 교화되지 않은 존재, 젊음이다. (90)
마치 내가 프란츠 없이 그 도시에서 산 적은 없는 것 같았다. 사랑으로 번민하는 인물의 상투적인 모습을 내가 가소로울 정도로 되풀이하고 있다는 것은 알 만큼 나는 나이가 들었다. 그러나 그저 그 상태에 온전히 빠져드는 것 외에 달리 어찌할 수가 없었다. 희망에 가득 차서 계속 창문 유리에 몸을 부딪치지만 빠져나갈 길은 없는 곤충처럼 나는 무력해진 상태에서 벗어날 길을 찾아다녔다. (105)
프란츠가 페를레베르크 선생님 같은 여자와 함께 스코틀랜드로 날아간 토요일에 나는 아테에게 갔다. 아테 생각이 떠오르자 내 안에서 강렬한 그리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것이 아테를 향한 그리움이었다고 주장하고 싶지는 않다. 그것은 오히려 지나간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만성적인 포기 이전의 시절, 모든 이상이 실현 가능한 것으로 보였던 시절, 보통의 출세와 결혼에 대한 기대가 아직은 혐오와 경멸을 불러일으켰던 시절, 절대로 그런 행동을 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그래도 우리가 꼭 원하는 것을 정확하게 알았던, 시작의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116)
노년에서 좋은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전혀 아무것도 찾을 수 없다. 노년에 대해 좋게 말하는 것은 모두 어리석은 말이거나 거짓이다. 예를 들어 생생한 몸이 부패하지 않고는 현명해질 수 없다는 듯 노년의 지혜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이 그렇다. 노인은 천천히 청력을 잃고 시력을 잃고 천천히 경직되고 멍청해진다. 이제는 누구와도 교제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그것에 대해 증명하지는 않았지만 나도 멍청해졌다고 생각한다. 노년에 대해서 좋은 말을 할 수 있다면, 다만 두 가지 관점에서 노년이 죽음에 대한 준비로서 쓸모가 있다는 것뿐이다. 우리에겐 담보물들의 나사를 죄어 결국 어느 정도 그럴듯한 전기로 만들 수 있을 때까지 우리의 기억들을 오랫동안 갈고 연마할 시간이 있다. 또한 우리는 지속되는 몰락과 함께 자기 자신이 귀찮아져서, 인생에서 가졌던 것들 가운데 가장 사랑스러운 것인 우리 자신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도록 어느 날엔가 죽음이 다가오기를 고대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멍청해지는 속도보다 부패하는 속도가 더 빠를 경우에만 해당된다. (119)
내가 사랑에 대해서 모르는 것은 많지 않아. 사랑은 비극적으로 끝나거나 진부하게 끝나거나 둘 중 하나야. (122)
두 사람은 어떤 생일파티에서 알게 되어 사랑에 빠졌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저 희미한 것이기는 했지만 도주에 대한 기대감이 그가 사랑에 빠지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던 것 같다고 라이너는 말했다. 라이너가 말했던 것처럼 그를 동쪽에서 빼내갈 수 있는 능력에 그녀에게 있었다. 최소한 그 능력에 앙케를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아름답게 보이게 하고 그녀의 목소리를 더욱 약속에 찬 소리로 들리게 하고 그녀의 움직임을 더 매력적으로 보이게 했을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나중에 초기의 열정이 약해서 오히려 남매간의 애정으로 변했을 때 라이너의 마음속에서 가끔씩 앙케와 헤어지고 싶다는 소망이 일었지만 그는 그녀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 소망을 억제했다. 앙케가 그를 구해낼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녀를 사랑했던 것은 아닐가라고 생각했던 그의 자기 의혹이 맞는 것이었다면 그거셍 대해 속죄해야 한다는 생각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 기이한 시대가 끝날 때까지 그랬다. 그 이후로는 그녀가 없어도 자유라고, 그 이후의 시간에 대해서는 더이상 그녀에게 빚진 것이 없다고 그는 말했다. 이제 나는 자유로워. (139)
프란츠의 살갗은 특별한 온도를, 묘사할 수 없는 무언가를 갖고 있었고 그것이 내게 닿자마자 나를 말없는 환희의 상태로 옮겨놓았다. 내 딸이 갓 태어났을 때 체온과 비슷한 온도의 물에 담그자 즉시 울음을 멈췄다. 그러고 나서 아직 훤히 다 보이지 않는 눈으로 아기는 말없이, 지극히 만족스럽게 세상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분명 어머니의 양수 안에 있던 안온한 시간에 대한 기억이었을 것이다. 프란츠에게 안겨 있을 때 내가 무엇을 기억할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그것은 아마 천국에 대한 기억이었을 것이다. (141)
아테에게 전화를 했다. 아테가 내게 전화를 걸었을 수도 있다. 아테는 나에 대해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다면서, 내가 이 남자에게 계속 바라고 있는 것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세상에서는 그것을 그 무엇으로부터도, 그 누구로부터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 역시 프란츠에게 그것을 얻을 수 없다고 아테는 말했다. (143)
왜 성인이 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자기를 노예로 만들려고 재촉하는지 궁금하네. 아마 너는 자유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것 같아. (144)
미친 사람들, 그리고 사랑에 빠진 사람들과는 싸우지 말라. (144)
프란츠가 심연에서 나를 끌어올리기 위해서 그 문장을 밧줄처럼 내게 던졌다는 것을 이해하기는 했지만, 그것 역시 하지 말았어야 할 말이었다. 내게 오기 위해 거짓말이 필요했다는 것, 그리고 거짓말을 요구할 권리를 가진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나는 힘들지만 견뎌냈다. 그러나 그의 거짓말 솜씨에 감탄하면서 프란츠가 그 작은 금발 여자에게 속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라는 것은 내게 요구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147)
순수한 감사의 시간은 사랑의 첫 단계이다. 어떤 사랑이나 그럴 것이다. 어떤 사람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데 성공한다. 우리가 원했던, 또는 심지어 우리 안에 파묻혀 깨어나지 않은 채 숨어 있던 특성들이 우리가 사랑에 빠지는 순간 우리가 더불어 사는 데 익숙해 있던 다른 특성들을 몰아낸다. 우리는 스스로를 다시 인식하게 된다. 우리는 더 아름답고 더 부드럽고 현명하다. 우리는 우리의 소심함과 우리의 악의에서 구원된다. 우리는 가장 사악한 적도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우리의 행복으로 모든 나무와 모든 거리와 모든 순간을 환하게 비추고 그때까지 발견하지 못했던 그것들의 아름다움에 대해 경탄한다. 우리는 하늘과 비와 바람과 우리 자신이 하나가 된 것처럼 느낀다. 우리는 마침내 이 세상에 속해 있고 또 마침내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
(중략) 어떤 일이 일어날 때까지, 사소하고 하찮은 일이지만 그것으로도 우리를 놀라게 하고 우리의 무방비 상태를 인식시키기에는 충분한 어떤 일이 일어날 때까지. 그러다가 이유 없이 약속시간에 늦게 오고 전화가 오지 않고 우연히 사진 한 장이 발견된다. 그것으로 불안의 시간이 시작된다. 우리가 배반당했다고 생각되는 그 한 시간이면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을 파악하기에 충분하다. 어떤 사람은 연필처럼 얇은 산꼭대기에서 거의 바닥에 닿지 못한 채 손으로 하늘을 움켜쥐고 발끝으로 서 있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149)
나는 프란츠의 어깨와 목 사이 움푹한 곳에 나의 뭉툭한 짐승코를 파묻었다. 프란츠는 내 호흡의 그늘 안에 숨고 싶은 것처럼 그 안에서 낮게 숨 쉬었다. 우리는 그렇게 말없이 오랫동안 누워 있었다. 나는 이 시간 속에서 죽고 싶었다. (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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