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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을 힘들어한다. 더워서라기보다는 소란스러워서다. 뜨겁게 내리꽂히는 햇빛, 햇빛이 만들어내는 열기, 열기를 품고 왕성해지는 생기, 생기가 돌아 선명하고 또렷한 자연의 색깔, 그 색깔을 따라 같이 알록달록해지는 여름의 옷, 옷들 아래에서 흘러내리는 땀, 땀이 수시로 일깨워주는 살아 있다는 감각, 그 감각이 붕붕 띄우는 마음, 이 모든 것이 나에게는 지나치게 소란하다. (7)

나는 그래서 여름을 좋아한다. 

 

꼭 A의 경우가 아니더라도, 언젠가부터 소위 말하는 '솔직함'이라는 것들에 지쳤다. 솔직함은 멋진 미덕이고, 나 역시 각별히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진실하려고 노력하며, 그런 사람들을 곁에 두곤 하지만, 솔직함을 무기 삼아 해서는 안 되는 말들을 여과 없이 쏟아내는 이들을 볼 때마다 일종의 환멸 같은 게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를테면 매해 4월 16일 전후로 온오프에서 자주 보고 들었던 "세월호 이제 지겹다" 같은 말들. "요즘 같은 시대에 이런 이야기하기 조심스럽지만"으로 시작하는(조심스러우면 하지 마...) 어린이나 난민, 성소수자 같은 사회적 약자를 사회 바깥으로 더 밀어내고 배제하는 말들. '쿨하다'가 한 시대의 정신으로 각광받으면서 윤리적 노팬티 상태가 패션인 양 포장되며 쏟아지는 무례한 독설들. 그런 말들의 부적절함을 지적하면 어김없이 날아오는 위선적이고 가식적이라는 비난과 조롱들. 깨어 있는 사람인 척하는 가식이다, '맞말'하는 걸로 도덕적 우월성을 획득하려는 피시충이다, 약자를 위하는 척하지만 결국 약자를 이용해서 자기만족을 채우는 위선자들이다, 적어도 난 솔직하다... 등등.
어떤 사람들은 '솔직한 나'를 너무나 사랑하고 '솔직한 나'에 대해 너무나 비대한 자의식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생각나는 대로 말하고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는 것만큼 쉬운 일도 없으니, 아무 노력 없이 손쉽게 딸 수 있는 타이틀이 '솔직한 나'여서 그런 것일까. 앞으로도 아무 노력 안 하고 싶고 그냥 기분 내키는 대로 살고 싶은데 이걸 그럴듯하게 포장해줄 타이틀이 '솔직한 나'밖에 없어서 그런 것일까. 말해주고 싶다. 당신의 솔직함, 정말 누구도 바라지 않고 별다른 가치도 없고 하나도 안 중요하니 세상에 유해함을 흩뿌리지 말고 그냥 마음에 넣어두라고. (62)

 

이런 이유들로 나는 언젠가부터 가식을 응원하게 되었다. 물론 그 가식에 타인에게 나쁜 짓을 하려는 악의적인 의도가 없는 한에서. 가식에는 지금보다 더 좋은 사람이 되어보고자 하는 분투가 담겨 있다. '좋은 사람'을 목표로 삼고 좋은 사람인 척 흉내 내며 좋은 사람에 이르고자 하지만 아직은 완전치 못해서 '가식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누군가의 부단한 노력의 과정. 그러니까 내 앞에서 저 사람이 떨고 있는 저 가식은, 아직은 도달하지 못한 저 사람의 미래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저 사람이 가진, 저기서 더 앞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누군가가 "넌 가식적이야"라는 말로 섣불리 가로막을까 봐 지레 초조할 때도 있다. (63)

 

남에게 충고를 안 함으로써 자신이 꼰대가 아니라고 믿지만, 남의 충고를 듣지 않음으로써 자신이 꼰대가 되어가는 걸 모르고 사는 것. 나는 이게 반복해서 말해도 부족할 만큼 두렵다. 내가 보고 싶은 것, 듣고 싶은 것, 입맛에 맞는 것들로만 만들어낸, 투명해서 갇힌 줄도 모르는 유리 상자 안에 갇혀 있을 때, 누군가 이제 거기서 잠깐 나와 보라고, 여기가 바로 출구라고 문을 두드려주길 바란다. 때로는 거센 두드림이 유리 벽에 균열을 내길 바란다. 내가 무조건적인 지지와 격려와 위로로 만들어진 평온하고 따듯한 방 안에서 지나치게 오래 쉬고 있을 때, 누군가 '환기 타임!'을 외치며 창문을 열고 매섭고 차가운 바깥 공기를 흘려 보내주기를 바란다. (75)

 

앤서니 호로비츠가 쓴 소설 <맥파이 살인 사건>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누가 한 말인지는 몰라도 책으로 인생이 바뀌려면 떨어지는 책에 맞는 수밖에 없다고 한다." 출근길 지하철 안에서 웃음을 베어 물며 고개를 끄덕인 것도 잠시, 회사까지 걸어가는 내내 이 말을 조금 진지하게 생각해봤다. (109)

 

똑같은 패턴을 반복해서 얻게 되는 건 근육만이 아니었다. 다정한 패턴은 마음의 악력도 만든다. 그래서 책 제목을 '다정소감'이라고 붙여봤다. '다정다감'을 장난스레 비튼 느낌도 좋았지만, 결국 모든 글이 다정에 대한 소감이자, 다정에 대한 작은 감상이자, 다정들에서 얻은 작고 소중한 감정의 총합인 것 같아서. 내 인생에 나타나준 다정 패턴 디자이너들에게 무한한 감사와 사랑을 보낸다. 디자인에 워낙 재주가 없는 나에게 다정한 부분이 있다면 그건 다 그들의 다정을 되새기고 흉내 내며 얼기설기 패턴을 만들어간 덕분일 것이다. (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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