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SMALL
욕심과 허기가 나를 책 앞으로 데려다 놓았다. 읽는 사람은 자유로웠다. 재능 없음을 탓하지 않아도좋았다. 책장을 펼치면 누적된 지혜가 고스란히 누워 있었다. 행간에 숨기도 하고, 행과 행 사이를 뛰어다니기도 하면서 세상과 몇 번이고 거듭 화해했다. 무언가를 기어코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이 곧 사랑이라는 것도 알게 됐다. 읽으면 읽을수록 모르겠는 일이 많아지는 게 좋았다.경합하는 진실을 따라 나는 기꺼이 변하고, 물들고, 이동하고, 옮겨 갔다. 
책에서 취한 살과 뼈에 내 삶의 많은 부분을 마음대로 이어 붙였다. '읽기'는 자주 '일기'가 되었다. 밑줄을 따라 걷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나는 도무지 해결되지 않는 질문을 들고 책 앞에 서곤 했다. 삶도, 세계도, 타인도, 나 자신조차도 책에 포개어 읽었다. 책은 내가 들고 온 슬픔이 쉴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슬픔의 얼굴은 구체적이었다. "나는 항상 패배자들에 대해 서는 마음이 약하다. 환자, 외국인, 반에서 뚱뚱한 남자애, 아무도 춤추자고 하지 않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보면 심장이 뛴다. 어떤 면에서는 나도 영원히 그들 중 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항상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아프고 다친 채로도 살아갈 수 있는 세계를 원했다. 고통으로 부서진 자리마다 열리는 가능성을 책 속에서 찾았다. 죽고, 아프고, 다치고, 미친 사람들이 즐비한 책 사이를 헤매며 내 삶의 마디들을 만들어 갔다. (10)

 

어떤 아이에게는 '두 명의 엄마'가 필요한 법이다. 엄마를 내가 선택할 수 없었으므로, 나는 실재하는 엄마의 빈 부분을 메워 줄 가상의 엄마가 필요했다. (21)

 

"(생략) 나는 알고 있었다. 내게 '괜찮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정말로 물어오는 것은 자신의 안부라는 것을. 어머니와 나는 구원도 이해도 아니나 입석표처럼 당당한 관계였다."
"나는 내가 진정으로 배곯아 본 경험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어리둥절해진 적이 있다. 궁핍 혹은 넉넉함을 떠나, 말 그대로 누군가의 순수한 허기, 순수한 식욕을 다른 누군가가 수십 년간 감당해 왔다는 사실이 이상하고 놀라웠던 까닭이다."(22)

 

나중에 사회에 나와서 엄마 또래의 교수나 전문직 여성을 만날 때면 늘 처음처럼 신기했다. 자라는 동안 주변에서 그런 직업의 사람을 본 적 없는 탓이었다. (27)

 

한 사람의 도서 목록이야말로 그 사람에 대한 가장 많은 정보를 담고 있다고 믿는다. 게다가 '책 선물'은 무척 까다로운 일이다. 내게 보여 주고 싶은 자신의 모습이 선물로 보낼 책 목록 안에 일정 부분 담기게 되리라 여겼다. 물론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31)

 

꽃을 밟지 않으려 뒷걸음을 치던 너와 부딪혔어
함께 웃음이 나왔어
하늘이 투명해서 너도 빛났지
-이상은 작사, 작곡, <둥글게, 2005

가사를 처음 접했던 날,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이내 그 가사 같은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그리고 내 맞은편에 바로 그 사람이 있었다. (37)

 

우리 앞에 둘러쳐진 지성과 전문성의 휘장 뒤에는 두려움의 대양이 넘실거리고, 열등감의 강물이 흐른다. 마음속에는 항상 보기 싫은 것들의 목록이 길게 펼쳐져 있었다. 나는 그렇게 유약했고, 사람들의 반응에 과민했으며(남들에게 오해를 받으면 내 영혼의 일부가 허물어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근원적인 열등감, 외로움과 두려움에 빠져 있었다. 우리는 온종일 전문성의 가면 뒤에 숨어 지낸다. 그리고 일터를 떠나서 다시 술병 뒤로 숨는다. (40)

 

"그러니까 누군가에게 술은 제2의 따옴표다. 술로만 열리는 마음과 말들이 따로 있다. 바닥에 떨어뜨렸을 때 뾰족한 연필심은 뚝 부러져 나가거나 깨어지지만, 뭉툭한 연필심은 끄떡없듯이, 같이 뭉툭해졌을 때에서야 허심탄회하게 나눌 수 있는 말들이 있다." (46)

 

그렇지만 어른인 내가, 또 우리가 적어도 한 사람 이상의 어린 사람에게 '운'이 되어 주는 일은 어렵지 않을지도 모른다. "가난한 아이들이 정말로 필요로 하는 것은 그들의 삶에 '얼굴을 내밀어 주는' 의지할 만한 어른의 존재다." 너무 빨리 어른인 척해야 했던 스무 해 전 나 같은 사람에게 나는 '곁'이 되어 주고 싶다. 그리고 당신도 그랬으면 좋겠다. 그 방법을 우리가 각자의 자리에서 찾으면 좋겠다. 

십대: 이쁘다고 말해 주고 싶다, 너에게. 그때 그 불만투성이의 노여움과 서러움으로 가득한 내 눈빛을 보고 이쁘다고 해 준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더더욱. (55)

 

"(생략) 어떤 헤어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순간이 아니라 일생이 필요하기도 하답니다." (79)

 

그날 엄마가 밤마다 했다던 기도 내용도 알게 됐다. 예쁘게 자라지 말아 달라고, 그래서 누구 눈에도 띄지 말아 달라고 빌었다고 했다. (94)

 

성범죄 특성상 가해자가 피해자의 수치심과 침묵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피해가 가시화되면 추가 피해를 막을 수도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나의 이야기도 타인을 살리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나를 포함해 많은 여성이 그 깨달음의 폐허 위에서, 각자의 자리에서 지치지 않고 증언을 이어 가고 있다. (96)

 

살아 움직이는 무언가를 기르는 일은 전전긍긍을 동반한다. 그것이 고양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나는 약하고 작은 존재인 아니와 함께 살면서 어린 사람과 함께 사는 타인의 기쁨과 보람과 고단함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됐다. 사랑은 피곤을 동반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기꺼이 감당하는 일임을 배웠다. (109)

 

대학시절 페미니즘을 만나면서 나는 나와 내 주변 여성들에게 벌어진 일에 대해 설명할 언어를 얻었다. 페미니즘은 내게 입이 되어 주고 목소리가 되어 주었다. 그러나 '안다'는 것은 기쁨인 동시에 외면하고 싶은 고통이었다. (132)

 

우리는 여자애들이 야망을 가질 때 세상이 어떤 방식으로 꺾어 버리고 길들여 왔는지 안다. 그 결과물이 바로 우리고 나니까. 나는 유력 정치인과 바람 난 적 없고, 과도한 사이버 불링을 당한 적도 없지만 정도의 차이일 뿐 비슷한 일을 무수히 겪으며 깎여 나가고 작아졌다. 실수나 실패로 내 인생이 끝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닫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페미니즘을 팝니다>의 저자 앤디 자이슬러는 성평등을 이렇게 정의한다. "성평등이란 단순히 여성의 지위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여성에게도 커다란 실패를 허용하는 것이다."  (135)

 

2011년 최저 생계비 취재를 위해 한 달간 서울 달동네에 들어가 살았을 때였다. 
바로 옆방인 노부부의 집에서는 자주 나지막한 찬송가가 들려왔다. 얇디 얇은 벽을 타고 무람없이 공유되는 소리야말로 가난의 맨얼굴이었다. 여름의 끝이었고, 한 달간의 취재가 끝나고 짐을 싸던 내게 할머니는 미숫가루 한 사발을 들고 왔다. "아가씨, 교회 다녀? 교회 다녔으면 좋겠다." 대답 대신 나는 물었다. 엄마에게 묻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할머니는 왜 교회에 다니세요?" 할머니가 지긋이 웃었다. "교회에서는 내가 평생 들어 보지 못했던 예쁜 말만 해 줘." 맥이 풀렸다. 그 할머니도, 어쩌면 엄마도 교회가 아니었다면 삶의 비참을 견딜 수 없었겠구나. 나는 할머니에게 교회에 다니겠다는 약속 대신 "저도 예수를 믿어요"라고 대답했다.
다만 나는 할머니도, 엄마도 아니었기 때문에 삶의 비참을 다르게 견디고 싶었을 뿐이다. (145)

 

"혼란의 한가운데 있기는 쉽지만, 틈새에 있는 건 어렵다"는 문장 앞에서 오래 서성였다. 다름을 이야기하되 또 이해하는 자리를, '틈새'를 만드는 일을 나는, 그리고 우리는 해낼 수 있을까. (169)

 

영국에서는 '5분 대기조'처럼 일하는 사람의 수가 전체 인구의 2% 이상이다. 이른바 '제로 아워' 노동자들인데, 근로 계약서에 별다른 근무 시간을 명시하지 않고 고용주가 원하는 시간에 나와 고용주가 원하는 시간 동안만 일하는 고용 형태를 말한다. 최저 근무 시간 기준이 0시간일 수도 있다는 의미에서 '제로 아워'다. 내가 원할 때가 아니라, 고용주가 원할 때 일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내 시간에 대한 통제권이 있을 리 없다. (182)

 

현대사회가 박탈한 것이 우리의 주체적인 시간, 즉 시간 주권이라면 결국 답도 발 딛고 선 이곳에서 찾아야 한다. (183)

 

한글 이름을 붙여 주고 싶은 단어도 등장한다. 프레젠티즘presentieeism, '회사에 출근은 하지만 몸이 피곤하고 마음이 우울해서 일의 능률이 떨어지는 현상'을 뜻한다. 이 땅의 모든 직장인 역시 앓고 있는 '병' 아닌가. 한국의 프레젠티즘이라면 '월요병'이 있다. 일요일에 출근하면 월요병을 예방할 수 있다는 보도가 나오는 나라에 사는 국민으로서 미국의 노동자들에게 심심한 연대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다. 우리는 누가 더 불행하게 일하는지 경쟁해야 하는 세계에 살고 있는 걸까. (184)

 

만화가 이종범 씨가 쓴 '청소의 요정'이라는 제목의 글을 인상 깊게 읽었다.(<ize>, 2014년 10월 2일) 이씨가 '거지 같은 만화판'에 대한 이야기만 주구장창 듣던 지망생 시절, 선배인 <덴마>의 양영순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만화가가 되면 너무 좋아. 빨리 만화가 해." 그 글을 읽은 이후 나 역시 기자 지망생을 만나면 "기자가 되면 정말 좋아. 빨리 기자 해"라고 말하는 사람으로 살자고 다짐했다. (209)

 

하지만 짝꿍이 온몸의 무게로 나를 지그시 눌러 올 때, 그 무게가 주는 기쁨과 행복이 있었다. 품에 코를 박고서 그의 심장이 팔딱팔딱 뛰는 걸 감각할 때마다, 잠든 모습을 오래 바라보며 눈으로 그의 얼굴을 만질 때마다, 나는 가끔 아이를 원했다. 그러면서도 생리가 조금이라도 늦어지면 손톱을 물어뜯었다. 임신과 관련한 모든 일이 온전히 나의 일이라는 게 부당하다고 날뛰었다. 피임을 해 왔으니 당연한 일인데도, 임신테스트기에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으면 실망했다. 갖고 싶고, 안 갖고 싶었다. 그 마음은 동시에, 또는 시간 차를 두고 솟아났다. 내 마음에는 때때로 불기둥이 솟았다. (214)

 

"우리 사회에는 아이를 낳지 않으면 자녀 양육에 따르는 귀중한 경험의 '기회를 놓친다'는 경고 메시지가 널리 퍼져 있다. 하지만 인생이 제공하는 모든 경험을 전부 해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경험을 선택하고, 놓친 경험에는 크게 마음 쓰지 않고 넘길 수 있어야 한다." (217)

 

나에게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 '우리'의 문제라는 걸 확인하는 경험은 언제나 든든하고 유쾌하다. 그러니까 저이와 함께라면 임신, 출산, 육아가 아주 나쁜 일만은 아닐 거라고 착각하게 되는 순간이 있고, 실제 상황과 별개로 그 순간은 무척 소중해진다. (221)

 

재생산권을 유림 씨는 이렇게 정의했다. "인간이 다음 인간을 이 세계에 데리고 오는 일이잖아요." 나는 그 말을 받아 적다가 잠시 멈췄다.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그 문장에 굵게 밑줄을 긋고, 동그라미를 여러 차례 그렸다. (225)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려 애썼다. 쉽지는 않았다. 모든 게 처음 하는 경험이고 하나같이 어려웠다. 하루에도 환자 수십 명을 봐야 하는 의료진들은 종종 그 사실을 잊었다. 각종 검사 전 이름을 확인하기 위해 무성의하게, 동의 없이 몸에 붙여지는 식별 스티커를 볼 때면 마음 어딘가 작게 부서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사라지고 '환자'만 남았다. (229_

 

"수술이 잘됐다"라든지 앞으로 어떤 치료를 받게 될 것이라는 결과론적 이야기가 아닌, 더 자세한 상태를 알고 싶었다. 결과지를 붙잡고 밤을 꼬박 새운 다음 날, 결국 의사 친구에게 연락했다. 그는 한 줄 한 줄 짚어 가며 내 몸 상태를 친절하게 설명해 줬다. 듣는 내내 어쩐지 부끄러웠다. 한편으로는 왜 이게 '치료 과정'의 일환일 수 없는지 생각했다. 환우회 카페에는 조직검사 결과지를 해석해 달라며 찍어 올리는 이들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개인 의료 정보가 노출되는 걸 감수하고서라도 알고자 하는 마음들이었다. (234)

 

수술 잘 하는 의사만큼이나 만성질환을 가진 환자나, 죽어 가는 환자를 잘 돌보는 의사도 중요하다. (239)

 

'프릴루프츨리브frilufsliv'. 노르웨이어로 '신선한 공기를 마시는 야외 생활'이라는 뜻이다. 신선하다, 공기, 마시다, 야외, 생활을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다니. 글자를 따라 발음하며 작게 감탄했다. "야외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육체와 정신 건강에 필수적이라는 철학"이 담긴 단어라고 했다. (241)

 

나는 선배들을 통해 마음은 정확하게 셈해 갚는 게 아니라 흐르는 것임을 배웠다. 고마워하되 미안해하지 않고, 받은 마음을 아직 서툰 타인을 위해 내어 주는 법도 함께 익혔다. (246)

 

그러나 그 '다 아는 말' 속에는 얼마나 많은 이들의 삶이 들어 있는지. 그리고 그 삶 하나하나는 얼마나 구체적이고 육체적인지. 우리가 지레 빤한 말이라 치부한 그 말이 누군가에는 목숨 줄이고, 실존의 테두리임을 다시 깨닫는다. 그 선이 비단 타인뿐 아니라 나도 지켜 주는 선이었음을 깊이 수긍하면서. (254)

 

 

서문을 읽고는 ㅂ부장님이 생각났고, 반 정도 읽고는 바로 선물해드렸다. 

반응형
LIST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