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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 문제는 훨씬 복잡했다. 남편이 살아 있었을 때만 해도 그것은 내가 신경쓸 문제가 아니었다. 텔레비전 보는 일은 남편이 꾸준히 도맡아주었기에 나는 그 부역 같은 일은 안 해도 되었던 것이다. 현관 입구에 울려퍼지는 온갖 세상사 소음만으로도 사회적 위계질서 놀이는 유지되었다. 그런데 남편 뤼시앵이 저세상 사람이 되자 그 겉모양이라도 유지하기 위해 나는 머리를 쥐어짜내야 했다. 남편이 살아서는 내가 하지 않아도 되었던 일인데, 세상을 뜨며 타인들의 의혹을 막아주던 필수적인 방벽인 무교양까지 가지고 가버렸으니 내가 대신 그 일을 하게 된 것이다. (21)

 

누가 이의를 제기해도 상처받지 않고 자기 심지가 굳어 남들 다 아는 라벨 붙은 귀족부인 따위는 웃어넘긴다. 귀부인이란 무엇인가? 저속한 것들 속에 있어도 그 어떤 저속함으로도 건드릴 수 없는 사람, 그런 여인이다. (37)

 

사물의 외양을 언어로 묘사하는 데 그토록 재능이 많은데 정작 사물을 보는 데는 그토록 재능이 없을까. 왜 그렇게 눈이 멀었을까? 그가 그 큼지막하고 거만한 매부리코를 달고 내 앞을 지나갈 때마다 난 속으로 그렇게 묻는다. 물론 그럴 수 있다. 사물을 보면서도 그속의 생명과 숨결을 못 보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그런 이들은 인간에 대해 일장연설을 하지만 거의 기계적으로 하는 것이며, 사물에 대해서 장황하게 묘사를 하지만 자기 주관적 영감에 따라 말해질 수 있는 것만 말할 뿐 묘사된 사물에는 어떤 영혼도 없다. (40)

 

세계의 아름다움이란, 생의 운동 속에서 우리를 자라게 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따라서 '세계 운동에 관한 고찰'은 사람들과 신체의 운동, 정 말할 게 없으면 사물들, 삶에 어떤 가치를 줄 만큼 미적인 어떤 것, 우아함, 아름다움, 조화, 강렬함 등을 발견해보려는 노력이 될 것이다. 만일 그것을 발견한다면, 난 내 선택을 재고해볼 것이다. 정신을 위한 미적 개념이 없으면, 그것 비슷한 신체의 아름다운 운동이라도 혹시 발견하게 된다면 삶은 그래도 살아볼 만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47)

 

우리집에서 취향의 부재는 허무와 다름없었다. 어떤 것도 나에게 말이 되지 않았고, 어떤 것도 나를 일깨우지 않았다. 알 수 없는 파도에 휘말려 떠다니는 허약한 지푸라기 같았다. 이런 삶을 끝내버리겠다는 욕구조차 알지 못했다. (55)

 

그럴 바에야 우리의 불완점함을 함께 나누는 것이 훨씬 낫지 않나? 완두콩, 비타민 C가 동물에게 영양은 공급할지언정 인생을 깨닫게 하지도 정신을 살찌우지도 않으니까. (107)

 

게다가 분별력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애가 어찌된 영문인지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게 소음이라는 건 알고 있다. 우연히 알아챘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침묵이 필요할 수 있다는 생각이 그애 머릿속에 바로 떠올랐을 리 없다. 침묵이란 내면으로 가는 길로, 외부를 향한 삶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 침묵은 아주 필수적인데, 그것을 나의 언니가 이해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의 내면 자체가 거리의 소음만큼이나 어지럽고 시끄럽기 대문이다. (중략) 내가 정말 싫어하는 게 있다면, 그건 사람들이 자기 무능력 혹은 정신이상을 자기 소신으로 바꿔버리는 것이다.  (115)

 

"그럼 어떻게 치료해요?" 
"사람하고 똑같아요." 올랭프는 웃으며 말했다. "프로작(우울증 치료제)을 처방해줘요." 
"정말요?" 내가 말했다.
"정말요." 올랭프가 대답했다.
거봐, 내가 그러지 않았나. 우리는 동물이고, 동물로 남을 것이라고. 부잣집 암고양이가 문명화된 여성과 똑같은 고통을 겪고 있다니. 동물들이 학대받고 있다고, 인간이 순수 애완동물을 오염시키고 있다고 외쳐댈 일은 아니다. 급한대로 우리가 같은 동물적 운명으로 엮여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며 깊은 연대감을 느끼는 거다. 우리는 같은 욕구 때문에 살고, 같은 아픔으로 고통받는다. (163)

 

우리가 행복을 만끽하는 것은 바로 이런 순간들이다. 마음의 바닷속을 유영하며 결정하고 의도해야 하는 부담감을 벗어버리고 다양한 동작을 하면서 타자의 행위인 듯 무의지성에 자신을 내맡기는 것이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풀을 베듯 글을 쓰는 것이지, 늙어빠진 수위의 이 가소로운 일기에 무슨 다른 이유가 있을까? 내가 쓴 행들이 자기 스스로 조물주가 된다. 나도 모르게 기적처럼 내 의지를 벗어나는 문장들이 종이 위에서 탄생하는 것을 보며, 내가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 것을 배운다. 고통 없는 출산, 노동도 확신도 아닌 그저 경이로운 행복감. 알아서 나를 데려가는 펜을 그대로 따라가며 난 미리 협의된 것 없는 확실성을 기꺼이 즐긴다. 
충만한 확실성과 '나'라는 피륙 속에서 나 자신을 망각하며 황홀경에 가까운 것을 느낀다. 이런 방관자적 의식을 통해 행복한 고요를 맛본다. (171)

 

둘 다 나한테 안 들리는 줄 알았을 거다. 나한테 하는 말이 아닌 말들은 더 잘 들린다. (174)

 

콜롱브는 서둘러 잊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늙는다는 게 자기하고는 아주 먼 이야기니까. 그 시간이 결코 자기한테는 안 올 줄 알았겠지. 내일을 생각하지 않기 위해 너무나 바쁘고, 마감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현재에 너무나 탐욕적인 주변 어른들을 보면서 난 인생을 눈 깜빡할 새 지나간다는 걸 이미 깨달았다. 내일이 의심스러운 것은 현재를 건설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재를 건설할 줄 몰라서 내일 할 수 있을 것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내일은 또다른 오늘이 되어버리고 결국 아무것도 안 된다. 안 그런가? 
따라서 이 모든 걸 잊으면 안 된다. 우린 늙을 것이고, 그건 아름답지도 않고, 좋지도 않고, 유쾌하지도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살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지금이다. 지금, 무엇이든 건설해야 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온 힘을 다해. 매일 자신을 초월하고, 하루하루를 불멸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양로원을 늘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한다. 자기만의 에베레스트 산에 한 발씩 오르면, 그 한 발 한 발이 조금은 영원한 것이 된다. 
미래는 살아 있는 자들의 진정한 계획들로 현재를 건설하는 데 쓰이는 것이다. (179)

 

우릴 관통하는 괴로움 속에 우리도 모르게 소스라치게 놀라며 서로의 당황한 모습을 그만 포착하고 말았으니. 뭐시기 씨는 아까와는 전혀 다른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185)

 

"예. 아주 행복한 집안이었어요." 안달이 난 로장 부인이 나 대신 대답했다.
"행복한 가정은 다 고만고만하죠." 난 대화에서 얼른 빠져나오려고 혼자 중얼거리듯 말했다. 사실 더 할 말도 없었다. 
"하지만 불행한 가족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죠." 그 뭐시기 씨가 갑자기 나를 묘한 눈길로 쳐다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순간 나는 또 한번 소스라치게 놀랐다. (186)

 

미셸 부인을 흠, 뭐랄까, 그래, 지성이 살아 있다. 그런데 평범한 수위처럼 행동하기 위해, 일부러 아둔해 보이려고 스스로 애를 쓰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난 미셸 부인이 장 아르탕스에게 말 할 때, 디안의 등뒤에서 넵튄에게 말할 때, 또 인사도 없이 자기 앞을 지나가는 건물 부인네들을 쳐다볼 때 이미 간파했다. 미셸 부인에겐 고슴도치의 우아함이 있다. 겉은 진짜 철옹성 같은 가시로 뒤덮여 있지만, 안은 부드럽고 섬세하다. 무딘 듯하나 무디지 않고 몹시도 고독하고 더없이 우아한 작은 짐승, 고슴도치처럼. (200)

 

따라서 오늘 나의 심오한 사고는 이것이다. 사람을 탐색하는 누군가를 나는 처음으로 만났다. 다시 말해, 보이는 것 그 너머를 보는 사람을 처음 만났다. 이 문제가 시시해 보일 수도 있지만 이건 아주 심오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린 절대 우리의 확신 너머를 보지 못한다. 더 심각한 것은 그 확신 너머와 마주하는 것을 포기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하고만 만날 뿐이다. 늘 따라다니는 거울 속에서는 알아보지 못하면서. (201)

 

나는 문법이란 아름다움에 다가가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말하고 읽고 쓸 때 아름다운 문장을 읽거나 내가 직접 아름다운 문장을 만들게 되면 기분이 좋아진다. (219)

 

그는 내 말에 찬성이나 반대를 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넌 누구니? 나랑 말하고 싶니? 너랑 함게 있어 정말 기쁘다"하고 말하는 듯 나를 바라본다. 예절이란 이런 것이다. 상대방에게 '내가 당신을 위해 있다'는 인상을 주는 태도. (234)

 

가쿠로 씨는 자작나무에 대해 이야기했고, 덕분에 나는 정신 분석가들과 지식 가공밖에 할 줄 모르는 지식인들을 잊은 채 더없이 위대한 아름다움을 포착할 수 있을 정도로 내가 부쩍 자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235)

 

내 생애 이렇게 마음이 편한 적이 없었다. 정말 이걸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어떤 사람에게 처음으로 난 전적인 신뢰를 느꼈다. 마뉘엘라에게 내 삶을 털어놓는 것과는 조금 다른, 서로 이해하고, 서로 이해받고 있다는 확신에서 생겨난 절대적 안정감이었다. 인생을 털어놓는다는 게 영혼을 내맡기는 건 아니다. 내가 마뉘엘라를 동생처럼 좋아하긴 하지만, 나라는 엉뚱한 존재가 우주에서 캐낸 약간의 의미와 감동을 그녀와 오롯이 나눌 수는 없었다. (314)

 

우는 아줌마를 보면서, 특히 나에게 그 모든 이야기를 다 해주며 한결 좋아진 아줌마를 보면서 나는 어떤 것을 절절히 느끼게 되었다. 나는 내 주변 사람들을 위해 무언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었기 때문에 고통받았다는 걸 깨달았다. 아빠한테, 엄마한테, 특히 콜롱브한테 그렇게 해주고 싶었지만, 난 그들에게 쓸모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을 위해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니까. 그들의 병은 너무 깊었고, 난 너무나 나약했다. 난 그들 병의 징후를 잘 안다. 하지만 그들을 치료해줄 능력이 없다. 그래서 나를 아프게 하는 것만큼 그들을 아프게 했는데, 난 그걸 몰랐다. 그런데 미셸 아줌마의 손을 잡으며 난 나 역시 아프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쨌든 확실한 것은, 내가 치료해줄 수 없는 사람을 벌주면서 날 치료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408)

 

날 치유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치료 가능한' 다른 사람을, 구원될 수 있는 사람을 치료해야 한다는 것을. 다른 사람을 구할 수 없다고 불안에 빠져 있지 말고. 그러면 나는 의사가 되어야 하나? 아니면 작가가? 그건 약간 비슷하다. 안 그런가? 
그러면 미셸 아줌마에게는 치유해줘야 할 얼마나 많은 콜롱브가, 얼마나 많은 불쌍한 티베르가 있는가? (409)

 

"날 알아보지 못했어요." 
팔 위에 여전히 내 손을 얹은 채 그 역시 걸음을 멈췄다.
"당신을 한 번도 제대로 보지 않았을 테니까요. 어떤 상황에서든 저는 당신을 알아볼 겁니다." (425)

 


자생트 로장과 안엘렌 뫼리스를 생각하니 시선은 움직이는 물을 움켜쥐려는 손과 같다는 생각이 더욱 뚜렷하게 들며 전율이 일었다. 그렇다, 눈은 자각한다. 그러나 탐색하지는 않는다. 믿는다, 그러나 의문을 품지 않는다. 받아들인다, 그러나 찾아나서지는 않는다. 욕망은 텅 비고, 배고픔도 십자군도 없다. (426)

 

마음의 귀족성은 전염성인지 넌 날 우정을 베풀 수 있는 여자로 만들었어. ... 만일 네가 매주 신성한 다례를 통해 마음을 내게 주며 나와 함께 희생하지 않았다면, 내 초라한 갈증을 예술에 대한 환희로 바꿀 수 있었을까? 푸른 도자기 다기, 살랑대는 분재 이파리들, 창백한 동백, 세기 속의 이 영원한 모든 보석들, 끝없이 도란거리는 강물 속의 이 모든 소중한 진주들에 반할 수 있었을까? 
벌써 네가 그립구나. 오늘 아침 죽는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이해했다. (중략)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을 더는 볼 수 없다. 그리고 만일 죽는 게 이런 거라면 사람들이 말하듯 이건 정말 비극이다. (447)

 

내 인생 처음으로 '다시는'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절감했다. 끔찍하다. 하루에도 수백 번 이 단어를 발음하지만 진짜 '영원히 다시는'이라는 것과 대면하기 전에는 이 말의 의미를 잘 모른다. 닥칠 일을 조절할 수 있다고 착각한다. 정말 결정적인 것은 우리에겐 없는 것 같다. (456)

 

오늘 저녁 졸여진 심장과 짓이겨진 위를 생각하며 난 속으로 말했다. 그래, 아마 이게 인생일 거야. 숱한 절망, 그러나 그 순간에도 시간이 더이상 같지 않은 아름다운 순간들이 있다고. 음악의 음들이 시간 속에 일종의 괄호를, 일종의 휴지를 만드는 것처럼, 여기인데도 저기를, '다시는' 안에 '늘'을 만드는 것처럼.
그래 그거다. '결코 다시는' 안에 '늘'. 
걱정하지 마세요, 르네. 난 자살하지 않을 거예요. 난 아무것도 불지르지 않을 거예요.
당신을 위해 이제부터는 '다시는' 속에서 '늘'을 찾을 거니까. 
세계의 아름다움은 그것이니까. (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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