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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대통령인 이승만은 반공과 통일을 목표로 단일민족의 혈통과 공동운명을 강조하는 '일민주의' 이념을 세웠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대통령 자신의 부인은 오스트리아 출신의 여성이었다. 부계혈통 가부장제에서 아내가 외국인인 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 같다. 당시 국적법에서 '대한민국의 국민의 처가 된 자'는 자동적으로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혼혈'을 모두 해외로 보내려고 할 정도로 '순혈'을 강조하면서도 남성의 피만을 고려하는 부조화가 그때 한국사회에서는 이상하지 않았나보다. (80)

 

때때로 가장 강력한 차별은 온정적인 얼굴을 하고 다가온다. 태어날 아이의 불행을 예고하는 염려가 자기실현적 예언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출산을 생각하는 사람에게 온정적인 염려와 경고를 보냄으로써, 세상의 차별이 앞으로도 변함없이 계속될 것임을 기정사실화한다. 그리하여 실제로 닥치는 불행은 오롯이 출산을 '선택'한 개인의 책임으로 돌린다. 결국 그렇게 차별을 보존하고 전승하며 어떤 집단의 미래를 영구적으로 불행하게 만드는 행위에 (의도치 않게) '가담'한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어떤 사람들을 이 땅에 오지 못하게 막는 행위는 얼마나 폭력적인가? (91)

 

당시 정부 측은 한센인들이 수술에 동의했다고 항변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이를 '동의'라고 인정하지 않았다. 동의는 "자유롭고 진정한 의사"에 이루어져야 하는데, "사회적 편견과 차별, 열악한 사회, 교육, 경제적 여건 등으로 인하여 어쩔 수 없이" 이루어진 동의는 사실상 공권력에 의한 강제라고 보았다. (93)

 

흔히 한국의 전통으로 떠올려지는 남성 중심의 대가족도 지배계급인 양반이 추구하던 모습일 뿐이다. 예컨대 천민계급인 노비는 소유주인 양반의 필요에 따라 뿔뿔이 흩어져, 실상 1인 가족이 많았다고 한다.
근대에 들면서 한국에서도 '능력 있는 가장'과 쌍을 이루어 '전업주부'라는 이상이 등장하였는데, 이는 장경섭의 표현에 따르면 "가족문화의 귀족화"를 추구한 결과였다. 바꿔 말하면, 모두가 누릴 수 있는 가족모델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105)

 

여성의 경제활동을 당연시하면서도 여전히 성별분업의 이념을 버리지 않는 이율배반이 존재한다. 이런 이율배반 속에서 고용상의 불평등을 계속되고, 여성에겐 일도 가족도 불안한 삶의 조건이 된다. (118)

 

통상 교육이란 학생이 지식을 배우고 관심을 갖고 탐구하게 돕는 과정이다. 하지만 성교육만큼은 성에 관해 두려워하게 하고 호기심을 없애려 했다. 성적 발달이 왕성한 시기지만 성적으로 순진무구한 청소년을 만드는 이 어려운 과업을 성교육이 맡아왔다. 그런데 성을 둘러싼 이 익숙한 공포가 무엇을 지키기 위한 것인지, 생각해본 적 있는가? (126)

 

사실 사람들이 가족을 향해 분노를 표출하면서 머릿속으로 '결혼 가능성'이나 '거래'를 계산하고 있을 리 없다. 다만 알게 모르게 당연하다고 믿어온 오래된 가족질서에서 벗어나는 상황에서 사람들에게 불안의 감정이 덮치는 건 사실이다. 이러한 분노와 배척은 가족제도로부터의 일탈을 통제하는 무력이고, 궁극적으로 가부장제를 유지시키는 정교한 톱니바퀴다. 그러니 단순히 여성의 교육과 고용의 증진으로 가부장제가 간단히 사라질 것이라 생각하면 서툰 기대가 아닐까. 가부장제는 가족이 가족에게 행하는 성적인 통제와 잔인한 폭력을 통해서도 연명하고 있다. (140)

 

동질혼 경향은 전소득계층에서 나타나지만 소득이 낮은 계층에게 동질혼은 불리하게 작용한다. 남편의 소득이 낮으면 여성이 일을 해야 하는데, 이때 여성의 일자리는 주로 비정규직으로 가구소득을 크게 끌어올리지 못한다. 반면 고학력 동질혼을 한 여성은 남편의 소득이 높아서 직장을 다니지 않아도 되는 조건이 생길 수 있다. (157)

 

가족을 통한 계층 세습은 가족기리 재산을 공유하게 돕는 이런 제도와 무관하지 않다. 일반적인 사회관계와 달리 가족 사이에는 부양의 명목으로 돈이 상당히 자유롭게 이동한다. 노동의 대가로 소득을 쟁취하는 치열한 사회에서, 당당하게 불로소득을 요구하는 세계가 가족이다. 이렇게 설계된 제도는 경제적으로 넉넉한 가족에게 더 유리하게 작동한다. 가령 교육비에 지출할 재려이 충분한 가족은, 교육비에 대한 세금도 감면받으며 부모로부터 자식에게로 사회경제적 지위를 대물림할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 부모는 자식에 대한 부양의무를 충실히 수행한 훌륭한 양육자라는 인정도 받는다. 
사람들은 기껏해야 세금을 면제받거나 공제받는 게 무슨 혜택이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통상 국가가 직접 자금을 제공하는 방식만을 지원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때때로 국가는 세금을 감면함으로써 같은 효과를 얻는다. 연말정산에서 부양가족공제를 함으로써 간접적으로 부양비용을 지원하는 효과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이런 후자의 방식은 가진 것이 있는 사람이라야 혜택을 누린다. 그렇지 않은 이는 혜택과 무관하다. 게다가 생활에 필요한 비용을 가족에게 받을 수 없다면 다른 사람에게 얻어야 하는데, 그럼 이자든 세금이든 지출해야 할 수 있다. 가난해서 돈이 더 많이 드는 아이러니다. (162)

 

이런 제도가 가족 간 불평등을 얼마나 해소할 수 있을까? 가족부양을 우선으로 하는 사회보장제도 안에서 국가의 지원을 받는 일은, 마치 가족의 실패를 증명해야 하는 과제를 떠안는 것과 같다. 가족이 있어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임을 끊임없이 증명해야 국가의 지원을 받을 자격을 얻기 때문이다. '가족의 실패'가 사회보장의 전제요건이 되면서, 사회복지제도는 마치 가족이 없는 자들을 위한 낙오된 세계인 것처럼 만들어졌다. 한국전쟁 후의 '고아'와 '미망인'부터 오늘날의 장애인, 노숙인 등 수많은 사람들이 사회복지시설에서 집단적으로 생활한다. 이들은 가족이 없다는 이유로 시설에 오고, 또 시설이 있기에 자유로이 가족을 형성할 수 없는 덫에 빠진다. (165)

 

'가족관계'로써 신분을 증명한다는 말은, '나'라는 신분을 증명하기 위해 가족 구성원의 정보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다른 가족 구성원도 자신의 신분을 증명하면서 내 정보를 공유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183)

 

수많은 아동들이 가족 배경을 이유로 어린 시절부터 차별을 겪는다. 아동이 겪는 온갖 놀림과 괴롭힘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가족 형태, 가족소득, 가족 구성원의 특징 등 가족에 관한 이유 때문인 경우들이 많다. 가족의 상황이 아동들 사이에 권력관계를 만든다. 흔히 그렇게 태어났은 어쩔 수 없다며 운명으로 받아들이곤 하지만, 이는 가장 부정의한 불평등이기도 하다. 어느 가족에게서 태어났는지에 따라 누구는 존중을 받는 반면 누구는 무시를 당하고, 누구는 풍족한 기회를 얻는 반면 누구는 생존도 어렵다면, 벌거벗은 아기 때부터 우리의 몸에 계급이 새겨져 있다는 뜻인 거다. (191)

 

장경섭은 '가족도덕'의 회복을 강조하는 정치적 기조의 이면에, 국가가 사회보장 책임을 축소하면서 이를 합리화하는 의도가 숨어 있다고 보았다. (중략) 한국은 사회보장에 필요한 비용을 아끼고 가족에게 돌봄의 책임을 맡김으로써 노동생산성을 극대화하는 데 주력해왔다. (199)

 

이 모든 불행의 이야기 속에서 거의 언제나 원인은 가족이었다. 가족이란 제도가 아니라, 온전치 못한 그 가족이 문제라는 생각. 그래서 해결을 구하는 지점도 그 '문제적' 가족이었다. 제도나 관습으로서의 가족은 바꿀 수 없는 상수이고, 자의든 타의든 모범가족의 모습을 따르지 못한 개별 가족들이 변화의 대상이었다. 가족의 기능을 정상화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많은 경우 이미 시작부터 실패한 기획이었다. 가족의 기능을 회복시킨다는 건, 애초에 불평등을 만든 바로 그 가족모델을 정당화하고 유지시키는 회로의 일부일 뿐이었으니까. 그러는 사이 경제위기가 몰아치고, 더 많은 가족들이 경제적 어려움을 겪으며 흩어지고 있었다. (205)

 

부모찬스를 비판하던 이들도 가족에게 돌아가 자식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고-자식을 위해 자신이 가진 최대치의 권력을 사용하는 일을 당연하거나 어쩔 수 없거나 숭고하게 여긴다. 단지 각자가 가진 '최대치의 권력' 수준이 다를 뿐, 누구든지 기회가 허락하는 만큼 부모의 능력을 사용하는 사회에서 공정성이란 가치는 얼마나 유효한가. (206)

 

이 책을 쓰며 인용한 문헌들에서 보듯, 이미 수많은 연구자와 활동가들이 가족제도를 비판적으로 연구해왔다. 놀랍도록 풍부한 연구들을 감탄하며 읽고 정리하면서 생각했다. 가족제도에 대한 논의는 왜 정치적으로 중요한 이슈가 되지 못하는가? 가족 생활이 국가의 가장 중요한 의제가 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일까? 한국사회에서 경제, 국방, 교육 등 다른 의제보다 가족을 덜 중요하게 다루는 관념 자체가 말해주는 현실이 있다. 가족은 여전히 국가를 위해 유용한 인력을 생산하는 수단이며, 헌법이 요구하는 가족생활의 보장은 아직도 국가의 목표가 아니라는 것. 
합계출산율 1명 미만의 시대는 이토록 부조리하고 불평등한 사회에 아이를 낳으라는 불가능한 요구와 함께 계속되고 있다. 지금 한국사회의 저출생이 국가적 위기라면, '인구'가 줄어서가 아니다. 웬만해서는 사람이 태어나 살 수 없는 땅이 아니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돌봄의 공동체가 시간과 마음을 나누며 행복하게 살아가기 어려운 사회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인구정책은 가족정책이 아닌데, 이 두가지가 어떻게 다른지 모르는 사회를 또 반복하며 우리 삶의 시간은 흘러간다. 그래서 묻고 싶다. 
이제 우리, 가족각본을 벗어날 때도 되지 않았나요? (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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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은 '나는 남들과 다르다'고 믿는 데서 출발한다. (14)

 

자기가 하는 일을 정당화하기 위해 상대방을 악마화하기 시작하지. 자기 맞은편에 서 있는 인간은 동등하게 대우할 존재가 아니라고, 그러니 내 맘대로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네. 검은 눈으로 보면 모든 게 검게 보이는 거랄까. (25)

 

흑화한 다음에 하는 말들도 다들 비슷하다네. 후배들에게 마치 후일담처럼 말하지. "그때 많이 배웠다"고. '그때'는 자신이 승진 명단에서 누락돼썩나, '조직의 쓴맛'을 봤을 때를 말하네. 그럼, '많이 배웠다'는 건 무슨 뜻일까? 자신이 흑화한 것이 아니라 성장한 것이라고 말하는 거라네. 진정한 '프로 직업인'으로 거듭났다는 거지. (26)

 

생존자. 범죄의 고통에 갇힌 피해자가 아니라 그 고통을 이겨낸 생존자다. 생존자라는 말과 함께 그동안 견뎌낸 한순간 한순간이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33)

 

나는 성폭행을 당한 순간 피해자가 되었고 지금까지도 여러 이름을 갖고 있디만 그 사실에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렇게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으나 현재 나는 '생존자'보다는 '피해자'를 선호한다. 일어난 일의 엄중함을 깎아내리고 싶지 않다. 희망의 여정을 걸어와 승리를 쟁취한 척하고 싶지 않다. 모든 것이 무사한 척하고 싶지 않다.(록산게이, <헝거> 중) (34)67_곤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빈곤함이 그리고 빈곤의 재생산 구조가 이들 삶의 조건이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조은, <사당동 더하기 25>) (39)

 

소현은 고개 들어 저항하지 않는다. 모호한 대답으로 피해가려 한다.
"그냥 잘 모르겠어요." "그냥 제가 잘못했어요."
'그냥'은 자기 세계가 뚜렷하지 않음을 나타내는 부사다. (54)

 

젊은 세대의 기억이 비슷하다는 것은 자기소개서에서도 드러납니다. 신입사원 공채에 참여했던 한 전형위원의 소감을 들어볼까요? 그는 '자기소개서'가 아닌 '우리소개서'가 아니냐고 말합니다. (65)

 

그렇습니다. 모든 건 당신이 결정할 몫입니다. 다만, 의미 있는 삶이 되려면 누구에게도,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는 자신만의 기억을 갖기 위해 세상과 마주 서야 하지 않을까요. 상황이 불안하고 두렵더라도. 정확하게는 상황이 불안하고 두려울수록 말입니다. 잊지 마세요. 당신이 직접 경험하고, 느끼고, 기뻐하고, 고통받은 만큼만 진실입니다. 그것만이 진실입니다. (67)

 

어떻게 성공하느냐보다 어떻게 실패하느냐가 때로는 더 중요하다. 그것은 비단 실패한 원인을 알아야 다음에 실패하지 않는다는 실패학의 차원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가 실패에 주목하는 이유는 성공했을 때보다 실패했을 때 휴머니티, 인간의 본질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69)

 

단지 말하고 싶은 것은-진리가 아니라-'사랑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다. 진정한 사랑은 사람을 속박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하고, 성장하게 한다. 사랑도 결국은 자유의 이야기, 성장의 이야기다. 진정한 사랑은 러브 스토리를 넘어선다. 세바스찬과 미아는 만남을 통해 성장했고, 그 성장한 마음으로 서로의 꿈을 격려하고 서로의 자유를 지지했다. 상대가 진정 원하는 걸 이루길 바라는 마음을 잃지 않았다. (85)

 

그때 그 기자들은 왜 겉늙었던 것일까. 기자들은 연식이 좀 돼 보이는 게 취재에 도움이 되기 때문일까. 그것은 기자가 되어 접해본 직업들, 그러니까 판사나 검사, 정치인도 다르지 않았다. 나이 든 척 발언하고 행동했다. (104)

 

그 서열의 고리 속에서 젊지도, 늙지도 않은 인간형들이 차고 넘친다. 젊지만 나이 든 척 행동하는 '애 늙은이'와 나이 들었지만 철들지 않은 '늙은 애'들이 공생하고 있다. '애 늙은이'들은 조직의 문제점에 패기 있게 도전하지 않는다. 기존 체제에 기민하게 적응하려고만 한다. '늙은 애'들은 욕망을 자제하지 못한 채 냄새만 맡으면 무섭게 달려든다. 이 '애 늙은이'와 '늙은 애'들의 세상에서 어른다운 어른은 보이지 않는다. (106)

 

이렇듯 작은 사회에서 아웅다웅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직역이기주의의 늪에 빠져든다. 기자들은 기자들 사회에, 검사들은 검사들 사회에, 의사들은 의사들 사회에 갇혀 산다. 그 세상이, '자기들만의 리그'가 전부인 줄 안다. 기자가 최고인 줄 알고, 검사가 최고인 줄 안다. 자신들이 가장 고생하는 양 집단적으로 자기연민에 빠진다. (142)

 

하기야 나도 부아가 치밀 때가 있다. 예를 들어 막말은 참아도 감각 후진 것은 정말 못 참겠다. 그렇다고 머릿속 생각을 입 밖으로 옮기지는 않는다. 그거야말로 감각이 후졌음을 증명하는 것이므로. (147)

 

영화 <기생충>의 박 사장은 냄새에 극도로 민감하다. "냄새가 선을 넘지." "왜, 지하철 타면 나는 냄새 있잖아?" 그는 냄새가 싫어서 코를 막다가 죽음을 맞는다. 그는 왜 역겨움을 참지 못한 것일까. 그건 역겨움을 표현하는 것도 습관이기 때문이다. (176)

 

케빈 카터라는 사직작가가 있었다. 그는 굶주림에 죽어가는 아프리카 소녀와 그 옆에서 소녀가 죽기를 기다리는 독수리의 모습을 촬영했다. 기아 문제의 심각성을 알린 카터의 사진은 퓰리처상을 받았다. 촬영 후 카터는 독수리를 멀리 쫓았지만 그는 거센 비판에 직면해야 했다. "왜 그 아이를 곧바로 구하지 않았느냐." "사진을 찍는 게 아이보다 중요했느냐." 그는 괴로워하다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190)

 

미국 역사학자인 티머시 스나이더 예일대 교수는 <폭정: 20세기의 스무가지 교훈>(52)에서 직업윤리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재판 없는 처형은 없다는 규범을 법률가들이 따랐다면, 동의없는 수술은 없다는 규정을 의사들이 받아들였다면, 노예 노동 금지를 기업가들이 지지했다면, 살인과 관련된 서류 작업의 처리를 관료들이 거부했다면, 나치 정권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잔혹 행위를 실행에 옮기기가 훨씬 더 어려웠을 것이다. (195)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사람이 변하는 건 큰 병을 앓았거나 내면이 부서지는 좌절을 경험했을 때다. 자기 자신에게 걸려 넘어졌을 때 자신이 누구인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생각하게 된다. 그동안은 마주하지 못했던 본질적인 질문 앞에 서게 된다. (208)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은 다시 쓰여야 한다. "하나의 유령이 전 세계를 배회하고 있다. '긱 이코노미'라는 유령이."
'긱 이코노미'가 무서운 건 스스로를 착취하게 만들기 땜누이다. 나를 고용한 사용자도 나고, 내가 고용한 근로자도 나다. '디지털 기기나 스마트폰 앱을 이용해 자신이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만큼 일하고, 프로젝트별로 수수료를 받는다.' 자유롭게 일하는 것 같지만 전혀 자유롭지 않다. 사실상 강제적으로 이뤄지는 저임금 중노동일 따름이다. (250)

 

그 과정에서 내가 얻은 교훈은 이것이다. 힘든 일이라고, 중요한 일이라고 꼭 인상을 찌푸리며 할 필요는 없다. 늘 눈앞을 가로막는 적은 자기연민이다. 나중 일은 나중에 고민하고, 뒷담화는 남들에게 맡기고, 성큼성큼 즐거운 마음으로 가면 된다. 내가 가보고 싶은 대로 가보면 된다. (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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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의 복수는 곧 사적 복수다. 법으로는 금지된 것. 그러나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 관객들은 복수가 성공하기를 숨죽여 지켜본다. 저 자를 반드시 죽여야 해. 현실에서는 허용되지 않는 생각이 폭발한다. (31)

 

어디에나 사람이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느슨하던 마음이 이내 선연해진다. 수료증이 나와서 나중에 면접같은데서 활용하기 좋을 거야!나는 왜 여기서 태어난 게 아닐까. 여기서 태어난 사람은 왜 내가 아닐까. 그는 아침에 일어나 제일 먼저 무슨 생각을 할까. 그는 무엇에 행복하고 무엇에 불행할까. 나처럼 은행에서 돈을 빌렸을까. 자주 일기를 쓰고 텔레비전을 보다 잠이 들까. 말 못할 비밀을 가졌을까. 누군가에게 괴롭힘을 당했을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까. 부모와는 사이가 좋을까. 지금은 어디에 있을까. (45)

 

나를 가여워하거나 불행히 여기지 않는 것이 지금까지 살면서 내가 만들어낸 것 중 가장 좋은 것이다. 이것은 내 것이다. (56)

 

자다 깨면 나는 분노와 살의에 가득차서 소송과 관련해 해야 할 일들 그러나 하기 싫은 일들 끝이 보이지 않는 일들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은 일들에 대해 생각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엄두도 내질 못했다. 나는 소송의 끝인 선고를 듣자마자 하노이로 떠났다. 나는 재판에서 모두 이겼고 상대는 내게 허위적시 명예훼손으로 손해배상을 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하노이에 도착해서 반나절을 걷다가 맨 처음 알아차린 것은 이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아무도 모르는 일 때문에 육 년을 시달리며 살았다니. 기분이 이상했다. 아무도 모르는 일 때문에 수천만 원을 들여가며 몸과 마음이 피폐해지는 일에 매달렸다니. 이렇게 아무도 모르는데. 나는 그저 모른 척하고 지나갈 수는 없었나? 수천만 원의 돈을 들일 만큼 내게 중요한 일이었나? (63)

 

바딘구나 서호에 갔다가 뜨랑 띠엔 쁠라자가 있는 거리로 돌아올 때의 안도감. 집으로 돌아왔다는 기분. 이제 몸을 씻고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거나 글을 쓰면 되는 밤의 편안한 기분을 나는 뜨랑 띠엔이라는 글자를 통해 여전히 느낄 수 있다. (67)

2021년 겨울이 떠오른다. 비나스와도 이야기하지만 종종 그때가 그립다. 

 

저녁이 오면 사람들은 막대기를 조심스럽게 거두어들이며 빨래를 걷는다. 나는 숙소에 들어가 속옷을 빨아 발코니 난간에 널어둔다. 살아 있는 사람이 해야 하는 일. 빨래. 설거지. 밥 먹기. 잠 자기. 친구와 이야기하기. 고백하기. 어떤 것은 비밀로 간직하기. 울음을 참기. 마침내 울음을 터뜨리기. 웃기. 속상해하기. 억울해하기. 노력하기. 포기하기. 용기를 갖기. 실패하기. 성공하기. 묵묵히 살아가기. 소리지르기. 가슴을 치기. 다독이기. 위로하기. 외면하기. 잊어버리기. 잃어버리기. 어느 날 떠올리기. 안도하기. 한숨 쉬기. 악몽에서 깨어나기. 그리하여 죽기. (80)

 

슬픈은 사랑을 먹고 자란다. 슬픔은 충만한 사랑을 알아본다. 사랑을 먹고 자란 슬픔은 이내 충만해진다. 

나는 슬픔이 없는 사람을 경멸한다. 아니, 슬픔을 모르는 사람을 경멸한다. 슬픔을 모르는 사람은 매사에 무례하다. 슬픔을 모르기 때문이다. 슬픔을 모르는 사람은 매사에 자신이 옳다. 슬픔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슬픔은 중요하다. 슬픔이 있는 사람은 무례하지 않다. 슬픔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틀림을 가늠해본다. 슬픔이 있는 사람은 모든 말을 내뱉지 않는다. 슬픔이 있는 사람은 적절히 타인과 거리를 둔다. 슬픔이 있는 사람은 타인을 해하지 않는다. 슬픔이 있는 사람은 매사에 조심한다. 슬픔이 있는 사람은 공감할 줄 안다. 그래서 슬픔이 있는 사람은 조용히 타인을 위로한다.

사람들은 각자의 슬픔을 품고 살아간다. 슬픔은 없애버려야 할 것이 아니다. 상처는 낫고 슬픔은 머문다. 우리는 우리에게 머물기로 한 슬픔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 슬픔은 삶을 신중하게 한다. 그것이 슬픔의 미덕이다. (92)

이 책의 정수. 

 

살아있다는 생각도 그만 하고 싶었다. 그냥 살고 싶었다. 삶과 죽음에 대해 잠시만이라도 생각을 멈추고 그냥 살아 있고 싶었다. 

살아있다는 것을 의식하는 일이 얼마나 피로한 일인지 공감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말없이 그를 안아주고 싶다. (101)

 

도착해서는 숙소에 짐을 풀고 텅 빈 방안을 둘러보는데 슬픈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나는 가만히 서 있는데 발목을 적시더니 이내 무릎까지 차오르다가 턱 아래에서 찰박였다. 떠나왔기 때문일까? 혼자 덩그러니 호텔 방에 남겨져서일까? 나는 슬픔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당장은 알 수 없는 슬픔에 대하여 곱씹어보며 그 근원을 찾는 일을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걸까? 죽을 때까지? 슬픔은 머리 꼭대기까지 차오르지 않는다. 까치발을 하고서 허우적거릴 만큼만 차오른다. (105)

 

고통은 어째서 저절로 물러나지 않을까. 이렇게 애를 써야만 저만치 물러서서 나로부터 작별을 고하는 걸까. 힘든 일들이 끝나면 그걸로 끝이면 안 되는 거야? 꼭 그것과 내가 분리될 수 있도록 어떤 수고로움이든 스스로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인간은 참 이상하기도 하다. 이렇게 복잡하게 지어진 생물이라니. 나는 불평을 하면서도 닌빈에 두고 온 나의 과거에 또 찔끔 눈물이 났다. 

닌빈은 아름다웠고, 아름다운 닌빈은 나의 고통을 흔쾌히 받아주었다.

여기에 두고 가면 돼.

넓은 땅이 내게 말해주었다. (127)

 

밤 사이 쏟아지던 폭우가 아침 내 이어졌다. 새벽에는 천둥 소리에 몇 번 잠에서 깨기도 하였다. 나는 딱 일주일만 더 이렇게 빗소리를 들으며 다리 사이에 이불을 둘둘 말고서 잠들었다가 깨기를 반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여행자만이 생각할 수 있는 천연덕스러움인지 모른다. (129)

 

화를 내며 사는 일의 고단함. 저기 저 사람도 화가 나 있구나. 화가 난 나는 화가 난 사람을 알아본다. (133)

 

불행이 저절로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나는 불행이 대단히 악질적이라 생각한다. 하나의 사건에서 파생된 불행이 사건의 종결과 함께 끝이 난다면 인간은 좀더 단순하고 가뿐하게 이 삶을 살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은 반드시 남는다. 불행을 낳은 사건이 끝난 뒤에도 불행은 남아서 마음을 갉아먹으며 자라난다. 불행은 마음속에 담겨 있는 언어를 배우고 감정을 배우고 바깥 세상을 익힌다. 성숙한 불행은 인간에게 말을 걸고 감정을 조종하고 바깥 세상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속삭인다. 성숙한 불행은 환청이자 환각이 되어 나와 함께 살아간다. 

불행은 내게 말한다. 저기엔 아무것도 없어. 불행은 눈앞의 것을 지워버린다. 불행은 하늘을 지우고 구름을 지우고 산을 지우고 나무를 지우고 강을 지우고 철 따라 피어나는 꽃들을 지운다. 인생이 아무 대가 없이 인간에게 주는 행복을 보지 못하게 한다. 그런 뒤 자신만을 보라고 불행은 속삭인다. (136)

유진목의 불행론. 

 

어쩜 감쪽같이 잊고 있었을까.

언니. 내가 언니한테 전화해서 운 적이 있지 않아요? 

언니는 그렇다고 했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했다. 죽기 전에 한 번은 내가 너에게 전화해서 우는 날이 있을 게다. 

그말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142)

 

 

하노이에 가보고 싶어 졌다. 
이번 겨울방학에 가는 베트남에서, 하노이는 아닐지라도, 유진목이 느꼈던 천연덕스러운 나른함을 느끼게 된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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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젊은 사람들이 그렇듯 나도 젊었을 때는 젊은 나이에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 안에 너무나 많은 젊음, 너무나 많은 시작이 있었으므로 끝이란 것은 좀처럼 가늠이 안 되는 것이었고 또 아름답게만 생각되었다. (9)

 

내 연인과 브라키오사우루스 외에는 생각하고 싶은 것이 많지 않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나는 잊고 싶은 것을 기억하지 않는 법을 배웠다. 왜 많은 사람들이 체험할 가치조차 없었던 사소한 사건들을 기억 속에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는 마치 사용된 인생의 증거로서 쓸모가 있다는 듯 백 번도 넘게 다시 그것을 뒤져 보여주는 것인지도 이해할 수 없다. (15)

 

하지만 어쩌면 내가 그 이전부터 스스로 질문을 제기하고 나 자신이 그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어떤 신호만을 기다렸을지도 모르겠다. 그 질문은 '만일 그날 저녁의 발작이 내 죽음을 가상실험한 것으로 끝나지 않고 정말로 그때 내가 죽었다면 내가 놓쳤던 것이 무엇이었을까'라는 것이었다. 인생에서 놓쳐서 아쉬운 것은 사랑밖에 없다. 그것이 대답이었고, 그 문장을 마침내 말로 꺼내 얘기하기 오래전부터 이미 나는 그 대답을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20)

 

나는 사랑이 안으로 침입하는 것인지 밖으로 터져 나오는 것인지조차도 아직 알지 못한다. 가끔은 사랑이 어떤 다른 존재처럼 우리 안으로 침입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몇 달 동안, 심지어 몇 년 동안이나 주위에 숨어 우리를 엿보다가 어느 때인가 기억이나 꿈들의 방문을 받고 우리가 갈망하며 숨구멍을 열 때, 그때 그것이 숨구멍을 통해서 순식간에 밀고 들어와 우리의 피부를 감싸고 있는 모든 것과 뒤석인다.
사랑은 바이러스처럼 침입하기도 한다. 그것은 우리 안에 틀어박혀 조용히 머물러 있다가 어느 날엔가 우리가 충분히 저항력이 떨어지고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고 생각될 때, 그때 불치의 병이 되어 터져 나온다. 그러나 또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사랑이 죄수처럼 우리 내부에 살고 있는 것이라고 상상할 수도 있다. 사랑이 해방되어 우리들 자신인 감옥을 부수고 나오는 데 성공하는 일은 가끔씩 일어난다. 사랑이 감옥을 부수고 나온 종신형 죄수라고 상상해보면, 얼마 안 되는 자유의 순간들에 사랑이 왜 그렇게 미쳐 날뛰는 것인지, 왜 그렇게 무자비하게 우리를 괴롭히고 온갖 약속 안으로 우리를 밀어넣었다가 곧바로 온갖 불행 안으로 몰아넣는 것인지를 가장 빠르게 이해할 수 있다. 마치 우리가 사랑을 내버려두기만 하면 사랑이 무엇을 줄 수 있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려는 것처럼, 사랑이 지배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벌을 받아 마땅한지를 보여주려는 것처럼 말이다. (25)

 

프란츠에게는 청춘의 사랑이 있었다. 그가 내게 그렇게 얘기했다. 사진 한 장을 보여주기도 했다. 해변 아니면 풀밭에 프란츠가 한 소녀와 함께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서로에게 속해 있다는 승리감의 확신이 빛나고 있었다. 그들이 서로를 위해 태어났다는 것, 영원히 서로의 곁에 머물게 되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48)

 

어떤 사람이 평범하게 성장한 자녀나 손자들까지 두고 있는 나이에,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아지고 심장발작의 위험이 있는 그런 나이에 이제야 놓치고 살았던 청춘의 사랑을 만회하고 있다고 주장했다면, 내가 기억하는 한 내 주변 사람들은 모두 그것을 우스운 일로 여겼을 것이다. 나 자신도 사월 어느 날 저녁 뇌 안에서 양극이 바뀌기 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사랑이라는 것은 공룡과도 같아서, 모든 세상이 그들의 죽음을 즐긴다. 트리스탄과 이졸데, 로미오와 줄리엣, 안나 카레니나, 펜테질레아, 항상 죽음만이 있고, 항상 불가능한 것에 대한 쾌락이 있다. 사람들이 핑계로 삼는 것처럼 그렇게 사랑에 무능력하다고 나는 믿지 않는다. 사람들은 청춘의 사랑이 없는 불행한 영혼들에 의해서, 언제였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너무 일찍 죽음의 공포 속에서 소리치면서 그들의 사랑을 몸 밖으로 내보냈던 불행한 영혼들에 의해서 그렇게 믿도록 설득을 당하는 것이었다. (49)

 

나는 자기 부모의 자손이라는 것을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을 많이 알지 못한다. 부모를 닮고 싶어 하는 사람은 더더욱 적다. 그와 반대로, 내가 알게 된 사람들 거의 모두가 부모와 닮아간다는 당연한 위협에 대해 기겁을 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은 물려받은 특성들을 피해가는 회전활강과 비슷했고 그런 식으로 결국 운명적으로 삶이 이루어졌다. (61)

 

카린과 클라우스는 학창시절부터 알던 사이였다. 그들은 내가 결코 갖지 못했던 것, 즉 청춘의 사랑이엇다. 청춘의 사랑이 무엇이냐고 누군가가 물었다면 나는 카린과 클라우스라고 말했을 것이다. 청춘의 사랑은 단순히 젊은 시절에 하는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비교가 불가능한 것이다. 청춘의 사랑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사랑을 견주어 잴 수 있을 어떤 것도 아직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사랑은 유일하게 그 사랑 자체를 위해서 존재한다. 그것은 아직 실망을 극복할 필요도 없고 이전의 행복을 능가하지 않아도 되고, 그 무엇도 반박하거나 수정하거나 대체하지 않아도 된다. (중략) 카린과 클라우스를 보고서 그들이 서른, 또는 마흔에는 어떤 모습일지, 또 그들의 아이들에게는 어떤 이름을 지어주고 집을 어떻게 꾸미고 살지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75)

 

나중에 프란츠가 자기 아내는 불행에 단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녀를 떠날 수 없다고 말했을 때 나는 비명을 지르며 발작을 일으켰다. (80)

 

우리가 만났을 때 우리는 아직 늙지 않았었다. 어쨌든 나는 프란츠가 늙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프란츠도 나를 늙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젊은 것도 아니었다. 우리가 젊지 않다는 것은 이야기할 것이 많다는 장점이 있었다. (82)

 

사랑을 하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아직 교화되지 않은 존재, 젊음이다. (90)

 

마치 내가 프란츠 없이 그 도시에서 산 적은 없는 것 같았다. 사랑으로 번민하는 인물의 상투적인 모습을 내가 가소로울 정도로 되풀이하고 있다는 것은 알 만큼 나는 나이가 들었다. 그러나 그저 그 상태에 온전히 빠져드는 것 외에 달리 어찌할 수가 없었다. 희망에 가득 차서 계속 창문 유리에 몸을 부딪치지만 빠져나갈 길은 없는 곤충처럼 나는 무력해진 상태에서 벗어날 길을 찾아다녔다. (105)

 

프란츠가 페를레베르크 선생님 같은 여자와 함께 스코틀랜드로 날아간 토요일에 나는 아테에게 갔다. 아테 생각이 떠오르자 내 안에서 강렬한 그리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것이 아테를 향한 그리움이었다고 주장하고 싶지는 않다. 그것은 오히려 지나간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만성적인 포기 이전의 시절, 모든 이상이 실현 가능한 것으로 보였던 시절, 보통의 출세와 결혼에 대한 기대가 아직은 혐오와 경멸을 불러일으켰던 시절, 절대로 그런 행동을 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그래도 우리가 꼭 원하는 것을 정확하게 알았던, 시작의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116)

 

노년에서 좋은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전혀 아무것도 찾을 수 없다. 노년에 대해 좋게 말하는 것은 모두 어리석은 말이거나 거짓이다. 예를 들어 생생한 몸이 부패하지 않고는 현명해질 수 없다는 듯 노년의 지혜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이 그렇다. 노인은 천천히 청력을 잃고 시력을 잃고 천천히 경직되고 멍청해진다. 이제는 누구와도 교제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그것에 대해 증명하지는 않았지만 나도 멍청해졌다고 생각한다. 노년에 대해서 좋은 말을 할 수 있다면, 다만 두 가지 관점에서 노년이 죽음에 대한 준비로서 쓸모가 있다는 것뿐이다. 우리에겐 담보물들의 나사를 죄어 결국 어느 정도 그럴듯한 전기로 만들 수 있을 때까지 우리의 기억들을 오랫동안 갈고 연마할 시간이 있다. 또한 우리는 지속되는 몰락과 함께 자기 자신이 귀찮아져서, 인생에서 가졌던 것들 가운데 가장 사랑스러운 것인 우리 자신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도록 어느 날엔가 죽음이 다가오기를 고대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멍청해지는 속도보다 부패하는 속도가 더 빠를 경우에만 해당된다. (119)

 

내가 사랑에 대해서 모르는 것은 많지 않아. 사랑은 비극적으로 끝나거나 진부하게 끝나거나 둘 중 하나야. (122)

 

두 사람은 어떤 생일파티에서 알게 되어 사랑에 빠졌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저 희미한 것이기는 했지만 도주에 대한 기대감이 그가 사랑에 빠지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던 것 같다고 라이너는 말했다. 라이너가 말했던 것처럼 그를 동쪽에서 빼내갈 수 있는 능력에 그녀에게 있었다. 최소한 그 능력에 앙케를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아름답게 보이게 하고 그녀의 목소리를 더욱 약속에 찬 소리로 들리게 하고 그녀의 움직임을 더 매력적으로 보이게 했을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나중에 초기의 열정이 약해서 오히려 남매간의 애정으로 변했을 때 라이너의 마음속에서 가끔씩 앙케와 헤어지고 싶다는 소망이 일었지만 그는 그녀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 소망을 억제했다. 앙케가 그를 구해낼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녀를 사랑했던 것은 아닐가라고 생각했던 그의 자기 의혹이 맞는 것이었다면 그거셍 대해 속죄해야 한다는 생각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 기이한 시대가 끝날 때까지 그랬다. 그 이후로는 그녀가 없어도 자유라고, 그 이후의 시간에 대해서는 더이상 그녀에게 빚진 것이 없다고 그는 말했다. 이제 나는 자유로워. (139)

 

프란츠의 살갗은 특별한 온도를, 묘사할 수 없는 무언가를 갖고 있었고 그것이 내게 닿자마자 나를 말없는 환희의 상태로 옮겨놓았다. 내 딸이 갓 태어났을 때 체온과 비슷한 온도의 물에 담그자 즉시 울음을 멈췄다. 그러고 나서 아직 훤히 다 보이지 않는 눈으로 아기는 말없이, 지극히 만족스럽게 세상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분명 어머니의 양수 안에 있던 안온한 시간에 대한 기억이었을 것이다. 프란츠에게 안겨 있을 때 내가 무엇을 기억할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그것은 아마 천국에 대한 기억이었을 것이다. (141)

 

아테에게 전화를 했다. 아테가 내게 전화를 걸었을 수도 있다. 아테는 나에 대해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다면서, 내가 이 남자에게 계속 바라고 있는 것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세상에서는 그것을 그 무엇으로부터도, 그 누구로부터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 역시 프란츠에게 그것을 얻을 수 없다고 아테는 말했다. (143)

 

왜 성인이 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자기를 노예로 만들려고 재촉하는지 궁금하네. 아마 너는 자유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것 같아. (144)

 

미친 사람들, 그리고 사랑에 빠진 사람들과는 싸우지 말라. (144)

 

프란츠가 심연에서 나를 끌어올리기 위해서 그 문장을 밧줄처럼 내게 던졌다는 것을 이해하기는 했지만, 그것 역시 하지 말았어야 할 말이었다. 내게 오기 위해 거짓말이 필요했다는 것, 그리고 거짓말을 요구할 권리를 가진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나는 힘들지만 견뎌냈다. 그러나 그의 거짓말 솜씨에 감탄하면서 프란츠가 그 작은 금발 여자에게 속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라는 것은 내게 요구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147)

 

순수한 감사의 시간은 사랑의 첫 단계이다. 어떤 사랑이나 그럴 것이다. 어떤 사람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데 성공한다. 우리가 원했던, 또는 심지어 우리 안에 파묻혀 깨어나지 않은 채 숨어 있던 특성들이 우리가 사랑에 빠지는 순간 우리가 더불어 사는 데 익숙해 있던 다른 특성들을 몰아낸다. 우리는 스스로를 다시 인식하게 된다. 우리는 더 아름답고 더 부드럽고 현명하다. 우리는 우리의 소심함과 우리의 악의에서 구원된다. 우리는 가장 사악한 적도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우리의 행복으로 모든 나무와 모든 거리와 모든 순간을 환하게 비추고 그때까지 발견하지 못했던 그것들의 아름다움에 대해 경탄한다. 우리는 하늘과 비와 바람과 우리 자신이 하나가 된 것처럼 느낀다. 우리는 마침내 이 세상에 속해 있고 또 마침내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 
(중략) 어떤 일이 일어날 때까지, 사소하고 하찮은 일이지만 그것으로도 우리를 놀라게 하고 우리의 무방비 상태를 인식시키기에는 충분한 어떤 일이 일어날 때까지. 그러다가 이유 없이 약속시간에 늦게 오고 전화가 오지 않고 우연히 사진 한 장이 발견된다. 그것으로 불안의 시간이 시작된다. 우리가 배반당했다고 생각되는 그 한 시간이면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을 파악하기에 충분하다. 어떤 사람은 연필처럼 얇은 산꼭대기에서 거의 바닥에 닿지 못한 채 손으로 하늘을 움켜쥐고 발끝으로 서 있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149)

 

나는 프란츠의 어깨와 목 사이 움푹한 곳에 나의 뭉툭한 짐승코를 파묻었다. 프란츠는 내 호흡의 그늘 안에 숨고 싶은 것처럼 그 안에서 낮게 숨 쉬었다. 우리는 그렇게 말없이 오랫동안 누워 있었다. 나는 이 시간 속에서 죽고 싶었다. (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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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려빚 :: 김지연

그래도 모든 걸 다 말하고 나니 속이 후련했다. 정현은 자신이 망했다는 이야기를 이렇게 맘 편히 털어놓을 사람이 서일 뿐이라는 점에 조금 서글퍼졌다. 서일은 정현이 겪은 모든 일에 책임이 있고 그래서 다 이해해주는 것만 같았다. (32)

 

무언가를 욕망한다는 것은 그것을 내가 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믿어보는 일인 것도 같고, 그래서 그게 좌절되면 무척 괴롭겠지만 욕망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애쓰는 동안에는 살아갈 맛이 나는 것 같아요. 어쩐지 '정현'은 자신이 무엇을 욕망하는지도 잘 모르는 사람이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무언가를 할 수 있다고 믿을 때 행복해지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게 좋지 않은 선택이라고 하더라도요. 가끔 이상한 선택을 하는 사람을 마주치게 되는데 대부분은 자신의 쓸모를 발견하고 믿어주는 쪽을 선택하게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51)

 

그들은 어느 순간이고 욕먹을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에게 자기 검열은 자기 연민보다 훨씬 더 쉬운 자동 반사 같은 일이었다. (63)

 

 


이소 중입니다 :: 이주혜

그러나 사람을 상대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치사한 면이 있기 마련이고 특히 극내향형인 번역가는 영혼을 다치는 일이 빈번해 요즘은 오직 상훈을 위해 버티자는 마음마저 구겨질 때가 많다. (66)

 

아직 성장 중인 아이들은 늘 시인의 마음에 미세한 실금을 그었다. 누구도 이런 말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시인은 아이들이 풍기는 비릿한 풋것의 냄새에서, 묘하게 소매길이나 목둘레가 맞지 않는 어설픈 옷차림에서, 심지어 좌우가 틀어진 머리카락의 비대칭에서 요란한 비난의 아우성을 들었다. 당신은 몰라! 당신은 우리에 관해 아무것도 몰라! 태어나고 자라는 것들에 대해 아는 게 없어! (70)

 

번역가는 소설가도 그 딸도 평생 자립이라는 걸 생각해본 적이 있을까, 두 여자는 너무도 공고한 결탁자가 아닌가 하고 의문했다. (73)

 

어린 새가 이소 중입니다

종이에 그렇게 씌어 있었다. 이소가 뭐야? 소설가가 물었다. 시인은 검색을 위해 휴대폰을 꺼내려다가 주머니가 빈 걸 개닫고 멋쩍게 웃었다. 번역가가 까끌까끌한 모랫바닥에서 숲 가장자리의 보드라운 풀밭 위로 어린 새를 옮겨주었다. 그리고 휴대폰을 꺼내 '이소'를 검색했다. 떠날 이 새집 소. 새의 새끼가 자라 둥지에서 떠나는 일. 어쩌라고? 소설가가 무정하게 말했다. 번역가는 소설가를 향해 번지는 미움을 지그시 누르고 내처 검색한 내용을 읽어주었다. 이소 단계의 어린 새들은 비행 능력이 서툴고 낯선 환경에서 잘 날지 못해 땅에 앉아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런 상황을 잘 모르고 섣불리 새를 구조하면 새들은 생존을 위해 배워야 할 것들을 놓치게 되고 나중에 자연으로 복귀해도 야생에서 살아남기 어려울 수 있다. 번역가는 검색한 문장을 읽으면서 동시에 아직 손에 남은 새의 박동을 감각했다. (81)

 

연대라는 말만큼 해석이 다양한 단어도 없을 거예요. 저마다 생각하는 연대의 방식과 범위가 달라 자칫 앞으로 한 걸음 가려다 뒤로 두 걸음 가기 쉬운 일이기도 하고요. 그만큼 연대란 어느 분야에서든 사실 효율성이 떨어집니다. 연대는 경제의 언어가 아니니까요. 비경제적이고 비효율적인 걸 알면서도 추구하는 것, 그것이 제가 생각하는 연대의 한 면모인데요. (100)

 

내일이 없는 사람들처럼 실컷 웃고 떠들었던 어느 날이 떠오르네요. 우리는 봄꽃이 핀 안산을 올랐고 이소 중인 어린 새들이 열매처럼 나무 가득 매달려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세계가 털갈이 중이었어요. 우리는 바람에 떨리는 나뭇잎을 보고도 까르르, 카메라 앞에 선 친구의 뾰로통한 표정에도 까르르까르르 웃고 또 웃었습니다. 그리고 침묵이 찾아올 때마다 방점을 찍듯이 말했죠. 아, 실컷 웃었어. 내일이 없는 사람들처럼. 그날 우리는 뭔가에 쫓기듯 웃고 떠들었는데, 그것이 무엇이었을까 뒤늦게 생각해봅니다. (103)

 

문학과 인문학의 옳고 아름답고 때로는 전투적인 말들이, 결국 주변의 몇몇 사람하고만 나눌 수 있는 작은 특산품이 되어가는 건 아닐까. 취향, 가치관, 의식, 처지가 비슷한 사람들기리 삼삼오오 나누는 것이 되면서 '인문학'이 소실점을 향해 줄어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104)

 

 


숙희가 만든 실험영화 :: 전하영

윤미는 이제 할머니구나.
숙희는 문득 고개를 들고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아기의 귀여움에 잠시 밀려났던 '할머니'라는 단어가 차차 그 존재감을 드러내며 숙희의 머릿속을 잠식해나갔고, 숙희는 외계에서 온 미스터리한 돌덩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 말에 저만치 거리감을 둔 채 쉬이 다가서지 못하고 부근만을 이리저리 돌아가며 힐긋거릴 뿐이었다. 봉인 해제하면 갑자기 그 돌덩이 안에서 치명적인 바이러스 따위가 튀어나올지 모른다며 경계하듯이.
아직, 아직은 마음의 준비가 안 되었는데. 
숙희는 그것에 대해서는 정말로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여러 번 생각하면서도 그 생각의 구심력으로부터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마주해야만 했다. 감정이 흩날리는 벚꽃처럼 동요됐다. 이제는 인생에서 떨어져나갈 일만 남은 것 같았다. 
이제 겨우 아줌마에 무감해졌건만. (118) 

 

아름답다 느꼈던 많은 것들이 그것을 붙잡는 순간 곤란함이 되어 곁에 남았다. (129)

 

"무슨 책?"
"그냥 일이야."
"숙희 씨는 배 안 고파?"
찬영이 부엌 한가운데 멈춰 서서 그렇게 하면 자기가 귀여워 보이리라 생각하는 듯 아랫배를 문지르며 물었다.
"아, 찬영 씨 배고프구나."
숙희는 상대를 불쌍히 여기는 듯한 표정을 지어주면서도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을 잽싸게 했다. 어쩌라고. 역시 이건 아니었다. 외로움이 간절했다. 자고로 어른이라면 참을성을 길러야 한다, 숙희는 스스로를 탓할 뿐이었다. (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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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부터 아버지는 접힌 사람, 미뤄진 삶만을 지닌 사람이 되었다. 그에 더해 젊은 시절 함께 품었고 사랑을 싹트게 해주었던 목표에 먼저 도달한 아내를 보조하며 아무에게도 내색할 수 없는 끓는 감정들, 한없이 유예되고 멀어지는 꿈에 대한 막막함을 속으로만 삭혀야 했던 사람이기도 했다. (73)

 

내 마음속에 있던 '어머니'라는 팔레트는 셀 수 없이 많은 칸으로 나뉘어 있었고, 거기에는 서로 다른 명도와 채도, 색깔을 지닌 기억들이 물감처럼 담겨 있었다. '나는 행복한 적이 없었어'라는 어머니의 말은 명백하게 새까만 빛깔이 다른 많은 아름다운 빛깔들을 까맣게 삼켰겠지만, 내게 그건 단지 하루의 기억에 불과했고, 결코 그날의 칸 밖으로 나오는 일이 없었으므로 다른 어떤 것도 더럽히지 않았다. 아버지에 대한 내 죄책감은 거기서 비롯되었다. (75)

 

하지만 요즘 안 그런 사람이 어디 있어? 그런 일들을 깊이 떠올리고, 그걸 특별하다고, 비극이라고 여기면서 어떤 기억을 추출해내려고 애쓰는 일이 내게는 수치스럽게 느껴져. 그래서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는 거야. 내가 아는 사람들도, 나도 그래. 말을 할 수가 없어. 말을 하는 사람들은 우선 살아남은 사람들이지. 살아남았고 목소리가 있는 사람들 말이야.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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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역사, 진실, 섭리... 크고 아름다운 말일수록 백만가지 다른 뜻으로 쓰이기 마련이다. (20)

 

인류학자 김현경은 그의 아름다운 책 <사람, 장소, 환대>에서 인간과 사람이라는 개념을 구분하면서 사람이란 구성원들의 환대를 통해 비로소 공동체 안에서 성원권을 갖는다고 설명한다. 어떤 개체가 인간이라면 그 개체는 우리와의 관계 바깥에서도 인간일 것이지만, 어떤 개체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사회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어야 하며, 그에게 자리를 만들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46)

 

인간은 서로에게 상냥할 수 있다. 어쩌면 그래서 인간은 존엄한 것 아닐까. (47)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우리는 매 순간 현재를 산다. 누구든 지금 현재, 자기가 속한 사회 안에서 기준점을 찾을 수밖에 없다.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 인간다운 생활인가, 라는 기준점이다. 시대가 바뀌면서 이 기준점이 올라가는 것은 배부른 소리가 아니라 사회의 발전이다. 아니, 배부른 소리라고 불러도 상관없다. 배부른 소리가 인간사회를 발전시켜왔기 때문이다. 결핍이 변화를 낳는다. 모두가 현재에 만족하고 머무른다면 인간은 아직도 동굴 안에서 나뭇가지 모아 불 피우며 살고 있었을 것이다. (72)

 

대중민주주의 사회에서 다수의 변덕과 횡포로부터 소수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정치권력뿐 아니라, 시민들 사이에도 법치주의에 기반한 사고방식이 뿌리내려 있어야 한다. 이제 법치주의는 단순히 제도여서는 안 된다. 사고방식이어야 하는 것이다. 법치주의는 법이면 뭐든 다 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 누구든 권력을 함부로 행사하지 말고 항상 신중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러한 생각을 시민들이 공유하고 있는 사회가 진정한 법치주의 사회다. (82)

 

이들이 제공하는 플랫폼 덕분에 개개인들도 타인을 24시간 관찰하고 분석할 수 있게 되었다. 엿보기의 쾌락에 탐닉하는 관음증의 시대이기도 하고, 자기만의 도덕적 완장을 차고 타인을 감시하는 새로운 종교 경찰의 시대이기도 하다. 인간의 생각이란 수시로 변화하기 마련이고 어떤 특정한 맥락 속에서 표현되는 것인데 그중 어느 한 부분만을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툭 잘라 이것 보라며 전시하고 조리돌림하고 잊히지 않도록 '박제'하기까지 한다. 종교적 열정에 들떠 십자군전쟁에 나선 기사들처럼. 바야흐로 테크놀로지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마녀사냥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는 것일까. (107)

 

맞는데, 맞긴 맞는데, 나는 절대로 이 설명에 쉽게 고개를 끄덕이고 생각하기를 멈춰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119)

 

인간의 밑바닥이 궁금하면 자기 자신의 솔직한 바닥부터 들여다보면 될 일인데 왜 불특정 다수의 밑바닥을 굳이 접하며 살아야 할까? '밑바닥 페티시즘'인가? 이제는 '알권리'보다 '모를 자유'가 더 중요한 것 아닐까? '인간 다이어트'가 필요한 시대가 아닐까? 제발 좀 남들에게 신경 좀 끄고 각자 좀 살자고 이 연사 외치고 싶을 때가 있다. (128)

 

일하기 싫고 글 쓰기 싫고 만사 지친 순간, 소파에 누워 지웠던 앱을 다시 깔고는 남들의 어리석음과 찌질함, 개념 없음을 전시하는 온갖 게시물들과 거기 달린 조롱과 쌍욕, 혐오로 가득한 댓글들을 굳이 찾아 읽고 있게 된다. 그 결과 남는 건 인간 혐오와, 그보다 더한 자기혐오뿐인데도. 탄수화물 중독처럼 인간 중독도 중독이다. (129)

 

자유는 최대한, 그 제한은 최소한이어야 한다는 명제는 '정치적 공정성'을 명분으로 하는 경우에도 달라져서는 안 된다. 예술의 이름으로 오랫동안 반성 없이 자행되어온 여성 혐오, 소수자 혐오, 인종 혐오에 대하여 반대하고 시정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히 필요한 일이지만, 이를 넘어 '모범답안'을 제시하고 여기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공격 대상으로 삼는 것은 자유에 대한 부당한 억압일 뿐만 아니라, 얻고자 하는 효과도 내지 못한다. 미래는 당위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허구 속에 완벽하게 정의로운 유토피아를 만들어놓고 스스로 감격에 겨워한다고 해서 실제 세상이 바뀔까? 게다가 그 '정의'라는 것에 대해 스스로 성찰하지도 않는다면? (139)

나는 정치적 공정성을 각별히 생각하는 편이라, 이 부분을 오래 읽었다.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보며 충분하지 않은 응보야말로 국가보안법 위반처럼 보아 엄벌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 아닐까. 응보는 단순히 국민 감정에 휘둘리는 사법 포퓰리즘이 아니다. 오히려 사법이 해야 할 본질적인 기능일 수도 있다. (158)

 

위기는 자유를 사치로 느끼게 만든다. 하지만 자유는 위기의 시대일수록 소중히 지켜야 그것을 영영 잃어버리는 비극을 막을 수 있다. 목적이 정당하고, 방법 면에서 매우 효과적이라 할지라도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는 조치는 필요 최소한이라어야 하고 신중해야 한다는 과잉금지 원칙은 개인들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다. (174) 

 

롤스는 차등의 원칙보다 기회 균등 원칙 및 정의의 제1원칙인 기본적 자유와 권리의 보장이 우선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현실에서 발생하는 문제들 대부분은, 최소 수혜자에게 이득을 주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의 자유를 제한해야 할 때(타다와 택시의 분쟁처럼) 일어난다. (203)

 

이것이 발전이다. 자유가 사회를 견인하되, 그 속도가 누군가를 낙오시켜 쓰러지게 만들지 않도록 평등이 제어하는 것. 무조건 달려나가는 것이 아니라 아직은 시기가 아니라면 잠시 멈출 줄도 아는 것. 어쩌면 그 망설임의 순간이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어려운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일지도 모르겠다. (205)

 

그런데 시험을 통한 경쟁만이 공정하고 시장경제에 맞는 거라고? 내가 왜 당신의 '노오력'에 대해 보상해야 되는데? 그거 '감성팔이' 아냐? '떼법' 아닌가?
... 대답이 어렵다면 시장 논리만으로 답을 하려 했기 때문일 것이다. 
대신 답하자면, '공공성' 때문이다. 그렇다. 겉은 자유경쟁 및 결과에 대한 승복으로 포장되어 마치 냉정한 시장 논리에 부합하는 것 같지만 시험을 통한 자원 배분 역시 효유성의 요구보다는 공공성의 요구가 더 큰 배경을 이루고 있다. 이윤 극대화를 위해서는 훨씬 효율적인 수단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개 채용, 그것도 '블라인드' 공개 채용을 기업에게 요구하는 것은 영업의 자유에 대한 제한이다. 다만 그것이 '공공복리'에 부합하기에 정당화된다. 시험 만능을 주장하는 당신 역시 일종의 '사회적 배려' 대상자인 것이다. 
당신이 죽어라 외우고 있는 평생 한 번 쓸지 안 쓸지 모르는 영어 단어나 시사 상식이 실제 업무 능력을 보려주는 지표여서가 아니라, 성실하게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기회가 돌아가는 사회가 우연히 타고난 금수저만 기회를 독식하는 사회보다 다수에게 행복할 기회를 줄 수 있기에, 그리고 노력에 사회적으로 가치를 부여하는 사회가 그렇지 않은 사회보다 생산적이고 안정적이기에 사회는 시험을 통한 취업이라는 시스템을 채택하고 있다. (215)

 

노력도 능력도 그 자체로 당연히 보상받아야 되는 가치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의미 있기에 보상받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한발 더 나아가볼 수 있다. 사회는 다양한 사람들로 구성된다. 그중 특정 계층, 특정 인종, 특정 성별에게 기회가 집중되어 있고 나머지는 소외되어 있다고 하자. 지금 현재로서는 그 특정 사람들의 능력이 더 뛰어난 것이 맞다고 치자. 그렇다고 그들만 기회를 독점하도록 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더 나은 길일까? 앞에서 노력에 대해 사회가 보상하는 이유는 단지 효율성 때문이 아니라 누구나 노력하면 보상받는 사회가 그렇지 않은 사회보다 생산적이고 안정적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어린애들조차 소꿉놀이를 계속하고 싶으면 친구에게 자기가 좋아하는 인형을 양보한다. 친구들이 삐져서 가버리면 혼자 인형을 들고 있어봤자 놀이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놀이를 계속하려면 양보와 배려가 필요하다.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배려의 혜택은 결국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돌아간다. 판이 깨지는 것을 막고 생태계를 순환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218)

 

앞에서 언급한 '시험 근본주의'는 '경쟁 근본주의' 관점에서 보면 뻔뻔한 논리다. 대학입시, 공무원 시험, 대기업 공채시험 한 방으로 정규직이 되어 평생 남들과의 경쟁을 면제받고 지대를 얻으며 무임승차하겠다는 파렴치한 주장이기 때문이다. 경쟁은 계속되어야 한다. 
(중략) 어떤가. 완벽하게 공정하지 않은가? 어떠한 특혜도 반칙도 기득권도 불로소득도 없다.
... 그런데 이런 사회에 살고 싶은가? (중략) 이상하다. 분명히 공정한 경쟁은 좋은 것인데, 끝까지 밀어붙이니 왠지 숨이 막힌다. (221)

 

지금 당장의 불공정을 시정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자칫 무한경쟁만이 정의라고 착각하는 것은 곤란하다. 누구 좋으라고. 노력, 능력, 경쟁, 공정, 모두 중요한 가치다. 하지만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느 한 가지 가치만 추구할 수 없다. 공정 역시 결국에는 공존을 위한 수단 중의 하나인 것이다. (224)

 

이러한 시대적 배경하에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사회주의 사상이 퍼져나가고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나기에 이르자, 유럽 국가들은 혁명에 의한 체제의 파괴를 막기 위해 사회적 정의의 이념을 헌법 안으로 수용하기 시작했다. 선거권을 확대하고 노동3권을 보장하며 복지 정책을 확대하는 등 일련의 변화들을 통해 '사회국가 원리'가 현대 민주주의 국가 헌법의 기본 원리 중 하나로 자리잡기에 이른 것이다. (227)

자유주의와 자본주의의 궁여책이었던 사회정의.

 

공산주의식 발상이라는 반발이 주로 고연령층에서 나온다면, 젊은층에서 나오는 반발은 보다 문화적인 영역에서 발견되곤 한다. 정치적 공정성에 대한 피로증을 호소하는 반응의 하나라고 볼 수도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이른바 '언더도그마'에 대한 반발감이다.
'언더도그마'라는 용어 자체가 반발감에 기초하여 만들어진 신조어다. 미국의 극우 세력인 티파티 논객 마이클 프렐이 2011년 저서 <언더도그마>에서 처음 사용한 이 말은 약자를 의미하는 언더도그와 독단적 신념을 뜻하는 도그마의 합성어다. '약자는 무조건 선하고 강자는 무조건 악하다고 인식하는 사회적 현상 또는 오류'를 뜻한다고 한다. (229)

 

사람들은 미지의 문제에 부딪히면 우선 과거의 경험들에서 실마리를 얻기 시작한다. 요즘 유력한 대안으로 활발히 논의 되고 있는 기본소득제도도 그 기원을 거슬러올라가면 2000년 전인 로마제국 시대에 이른다. 정복전쟁으로 노예가 대폭 증가하자 평범한 로마 시민들은 값싼 노예 노동력에 밀려 일자리를 잃게 된다. 사회 불안이 고조되자 로마는 시민들에게 매달 30킬로그램의 밀을 주고 공공 서비스를 무상 제공했다. (239)

또한 민법상의 유류분 제도도 마찬가지다. 

빌 게이츠가 도입을 주장한 '로봇세'도 롤스의 <정의론>에 부합하는 제도다. 로봇과 인공지능으로 인해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게 되므로 노동자를 대체한 로봇에게도 노동자들과 비슷한 수준의 과세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로봇을 소유한 기업에 대해 과세해 기본소득의 재원으로 사용하자는 주장이다. 인간 노동을 대체하는 기술혁신은 그로 인하여 일자리를 잃는 최소 수혜자에게도 이득이 되어야 한다는 발상이다. 
인공지능 시대의 글로벌 기업들에게도 인간은 계속 필요하다. 상품을 소비해줄 사람들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삶 전체에서 끊임없이 빅 데이터를 제공해주는 존재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빅 데이터를 통한 강화 학습이 필요한 인공지능에게는 인간이 생산하는 데이터가 곧 철광석이고 석유다. 산업의 쌀이다. 여기서 사회적 대타협의 여지가 생긴다. 로봇세나 기본소득을 제안하고 지지하는 사람들이 빌 게이츠, 마크 저커버그, 일론 머스크 등 글로벌 IT 기업가들인 데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241)

 

타임뱅킹이란 사람들이 자기 시간을 들여 여러 봉사활동을 하며 공동체 내에서 신용 포인트를 쌓은 뒤 그 포인트, 즉 시간을 교환하는 제도로, 빈곤퇴치 운동가로 활동하던 에드거 칸 교수가 시작하여 현재 미국 여러 지역에서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다. 처지가 어려운 싱글맘이 지역 타임뱅크에 요청을 올리면 솜씨 좋은 누군가가 찾아와 벽에 난 구멍을 막아주고 부엌을 수리해준다. 수리해준 사람에게는 해당 시간만큼의 포인트가 적립되어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할 때 사용할 수 있다. 싱글맘은 짬이 날 때 아이를 봐주거나 요리를 해주고 아이들은 마을 가든파티에서 악기를 연주해서 포인트를 적립한다. 
앤드루 양은 이를 더욱 확장하여 실제 금전적 가치까지 얻을 수 있는, 중앙정부가 후원하는 강화된 타임뱅킹 제도를 제안하고 있다. 디지털 사회신용Digital Social Credit, DSC이라는 새로운 통화를 만들자는 것이다. 타인을 돌보고 돕는 일, 환경을 개선하는 일 등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일을 할 때마다 정해진 DSC를 획득할 수 있도록 플랫폼을 구축하고, 이 포인트는 현금처럼 사용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부동산 부자는 욕을 먹지만 DSC 부자는 존경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사람들의 자기 실현 욕구, 인정 욕구를 사회적 가치가 있는 일로 유도하는 넛지 효과가 생겨날 수 있다. (246)

타임뱅킹. 

 

윤가은 감독의 영화 <우리들>에서 주인공 '선'은 다섯 살 남동생 '윤'이 밤낮 친구 연오에게 맞으면서도 또 언제 싸웠냐는 듯 다시 같이 노는 꼴을 보니 열불이 난다. 그래서 채근한다.

선: 야, 이윤, 너 바보야? 그리고 같이 놀면 어떡해?
윤: 그럼 어떡해?
선: 다시 때렸어야지.
윤: 또?
선: 그래, 걔가 다시 때렸다며. 또 때렸어야지.
윤: 음... 그럼 언제 놀아?
선: 어?
윤: 연오가 때리고 나도 때리고, 연오가 또 때리고, 그럼 언제 놀아? 나 그냥 놀고 싶은데.

천진난만한 다섯 살 아이 윤이의 말이 어쩌면 헌법의 핵심일지도 모르겠다. 헌법은 결국 공존을 위한 최소한의 선의다. (253)

찢었다. 
언제나 경탄하게 하는 문유석 작가님.

 

나의 2017년을 <개인주의자 선언>으로 지켜주셨다면, 2023년까지 <최소한의 선의>로 채워주시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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