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불황'이라는 말이 있다. '경제활동이 전반적으로 침체되는 상태'를 가리키는 '불황'을 원용한 개념으로, 사람들 사이의 교류와 소통이 줄어드는 현상을 가리킨다. 지금 세상에서는 사회적 불황이 경제적 불황 못지않게 문제가 되고, 그 둘이 서로 맞물려 악순환의 고리에 빠지기 쉽다. 가난이 외로움을 낳고, 소외가 깊어지면 경제활동도 힘들어진다. 예전에는 물질적으로 쪼들려도 가족이나 이웃 간의 유대로 삶을 지탱했다면, 이제는 빈곤 계층일수록 고립이 심하고 그로 인해 더 가난해지는 것이다. 일거리를 구하는 연결망이 끊기고 일상의 소소한 도움을 주고받는 이웃이 사라지면서 살림살이가 팍팍해지기 떄문이다. 아이들도 마찬가지여서, 저소득층일수록 '나 홀로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 소통 능력이 감퇴하고 학력도 저하된다.
이것은 한국만의 상황이 아니다. 사회학자 로버트 D. 퍼트넘이 신자유주의 물결 속에서 원자화되어가는 미국인들의 삶을 묘사한 책 <나 홀로 볼링Bowling alone>(2000)에서 잘 드러나듯이, 사회적 단절과 커뮤니티의 붕괴는 많은 선진국에서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다. 영국도 2018년 정부에 외로움 담당 부서를 설치하고 고위급 책임자minister(한국에서는 흔히 '장관'으로 잘못 번역되는데, 실제로는 장관secretary of state 밑에 있는 여러 부장관 가운데 한 명이다)도 임명하여 신선한 화제가 된 바 있다. 사람들 사이의 유대가 해체되는 것은 개인적 삶뿐 아니라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요인으로도 지적된다. (7)
비가시화는 사실상 성원권의 박탈로 이어진다. 다른 한편 미디어가 첨단화되면서 정보와 이미지가 폭주하게 되는데, 특정 집단에 대한 편견이 그를 통해 증폭되는 경향이 있다. 직접 대면하지 못하는 타자일수록 엉뚱한 모습으로 왜곡되기 쉬운 것이다. (9)
온몸이 젖어서 짜증 날 수 있는 경험을 일종의 축제처럼 승화시키는 힘은 서로를 든든하게 지켜주는 관계에서 생겨나는 것이리라. 삶의 토대가 점점 위태로워지는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 가운데 하나는 '안전 기지'다. 사랑과 자유가 공존하고 너와 내가 상생하는 우정의 마당이다. 사람이 사람을 살리는 관계에 대한 기억 또는 소망을 불러내면서 세상을 조금씩 '새로 고침'해나갈 수 있다면, 우리의 일상에 생기가 스며들 것이다. (13)
그런데 아쉬운 점이 있다면 원격 근무나 유연 근무가 전문직, 관리직, 사무기술직 등 일부 직종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의료진, 돌봄 노동자, 배달업자, 소방관 등 이른바 필수 노동자들은 재난 상황에서도 변함없이 사람들과 접촉했다. 필수 노동자란 미국의 로버트 라이시 교수가 코로나19에 의해 새로운 계급 분열이 일어났다면서 내놓은 개념*으로, 실직의 위험은 적지만 팬데믹 상황에서도 업무를 수행하느라 감염 위험에 노출된 직종을 말한다. 미국에서는 필수 노동자를 'The Essentials', 영국에서는 'key workers'라고 부른다. 코로나19는 사회가 유지되고 일상이 영위되는 데 핵심이 되는 일이 무엇인지, 그들에 대한 인식과 처우가 합당한지를 새삼 질문하게 해주었다. (27)
* 라이시 교수에 따르면,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사회가 '신카스트 시대'에 접어들었는데 원격 노동자The Remotes, 필수 노동자The Essentials, 무임금 노동자The Unpaid, 잊힌 사람들The Forgotten의 네 계급으로 나뉘게 되었다.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코로나19가 계속되며 불황이 지속되는 가운데 여성 실직자가 늘어나면서 남편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졌고, 폭력을 당해도 피신하기 어려워진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이런 현상을 가리켜 '섀도우 팬데믹shadow pandemic'이라고 하는데, 코로나 기간 동안 폐쇄된 가정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이 늘어난 것을 가리킨다. (30)
표정이 감정을 유발한다는 것, 그래서 보톡스 주사나 신경계통 질환으로 얼굴 근육이 마비되면 감정이 둔해진다는 것이 흥미롭다. 마음이 울적할 때 억지로라도 웃으면 기분이 나아지는 것도 마찬가지 원리로 설명할 수 있겠다. 결국 표정은 상대방뿐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한데, 얼굴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의 파동이 자신에게도 감지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화 중에 그 기운을 주고받으면서 서로가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얼굴은 그 자체로 하나의 언어라고 할 수 있다. (43)
지금 우리는 각종 미디어를 통해 엄청난 볼거리를 접할 수 있지만, 세상과 맞닿는 접촉면은 오히려 점점 비좁아지는 듯하다. 특정 부류의 사람들이 시야에서 사라져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blind spot가 여기저기에 생겨난다. 눈에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은 무의미하고 하찮은 존재로 주변화되는 것이고, 투명인간으로 취급되면서 사회의 성원권이 박탈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비대면에 수반되는 비인간화, 타인이 자신과 동등한 인격체가 아니라 사물로 대상화되는 것은 양극화가 심화되는 우리 사회의 중대한 도전이다. 점점 깊어지는 소외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48)
무엇보다 두드러지는 것은 이용 시간이다. 2021년 글로벌 가상사설망 VPN서비스 기업 노드VPN이 연구 조사 기관인 신트에 의뢰해 18~54세 성인 인터넷 사용자를 조사한 결과, 한국인이 일생 동안 인터넷 사용에 쓰는 시간은 34년으로 아시아 국가 중 가장 긴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수치일 뿐 아니라 세계에서도 두번째로, 1주일에 평균 51시간을 온라인에서 보낸다. 그 가운데 18시간은 업무 관련이며 33시간은 다른 활동으로 사용하는데, 유튜브나 OTT를 통한 영상 감상에 주 20시간 이상을 쓰는 것으로 조사됐다.
한국인이 온라인에서 생활하는 34년은 기대 수명 83세를 기준으로 보면 40퍼센트에 달하는 시간이다. 그런데 이것은 잠자는 시간까지 포함한 수치다. 하루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수면 시간을 빼고 계산하면 60퍼센트가 된다.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고 식사하고 몸을 씻는 시간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시간을 온라인에서 보낸다고 볼 수 있다. 여행지를 선택할 때 와이파이가 잘 터지는가가 중요한 고려 사항이 될 정도로, 이제 인터넷은 우리 삶과 사회의 모든 부분에서 절대적인 인프라가 되었다. 인터넷이 없었던 시대에 우리가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를 떠올려보면, 인류가 전혀 다른 세상으로 넘어왔음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89)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의 전치형 교수는 2년 동안 온라인 수업을 하면서 학습 공동체의 본질에 대해 깨닫게 된 점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온라인 수업에서 우리가 놓친 것, 테크놀로지가 아직 제공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각자 다른 경로로 한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바깥 세계의 위험을 견뎌내는 가운데 뭔가 중요한 질문에 함께 매달리고 있다는 감각이다. 그 감각을 일깨워 작은 학습 공동체들을 다시 꾸리는 것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대면 수업의 기술이다." 어떤 공통의 과제를 중심으로 마음이 이어지는 것, 무엇인가를 함께 탐구하면서 내면이 확장되는 감각은 교유깅 결코 놓칠 수 없는 실재감이 아닐까. (116)
자기 삶에 내재되어 있는 타자성을 일깨워주는 타인을, 사회학자 엄기호는 '손님'이라고 칭한다. 주인이 손님을 맞이하면서 깨닫게 되는 것은, 자신이 태초부터 주인이 아니라 그 집 혹은 그 땅의 첫번째 손님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그것을 알아차리면 '환대'로써 감사를 표한다고 한다. 물론 자신의 타자성을 받아들이지 못할 수도 있는데, 그때는 환대가 아닌 적대감을 드러낸다. 엄기호 교수의 말을 들어보자.
자신의 타자성을 발견하는 데서 오는 환대와, 자신의 타자성을 부정하고 싶을 때 나타나는 적의가 동일한 어원을 갖는 것은 특히 의미심장하다. 환대는 'hospitality'이고 적의는 'hostility'다. 이 두 가지 말은 'host'라는 같은 어원을 지니며 여기서 host는 '주인'이자 '손님'이라는 뜻을 동시에 지닌다. 즉, 자신의 타자성을 발견하는 두 가지 태도에서 정반대의 행동이 나타날 수 있다. 환대는 자신의 타자성을 깨닫게 해준 것에 대해 감사해하며 첫번째 손님이라는 위치로 돌아올 때 발생한다. 반면 적의는 내가 주인 노릇 잘하고 있는데 괜히 나의 타자성을 발견하게끔 하고 대면하게 하는 상대방을 제거하여 그 사실을 영원히 감추고 싶을 때 생겨난다*. (134)
* 엄기호, <단속사회>, 창비, 2014, 271~272쪽.
오늘날 우리는 옆에 사람을 두고 노골적으로 휴대폰과 바람을 피우며, 어찌 된 일인지 이러한 부정을 다 같이 수용하기에 이르렀다.
- 노리나 허츠, <고립의 시대>에서 (142)
모처럼 가족이나 친구들이 모인 자리에서 각자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느라 서로를 홀대하는 일 또한 흔하다. 강의를 듣거나 회의에 참석하면서도 집중하지 못한다. 영어에서는 그런 행동을 가리키는 신조어로 'phubbing'이 생겨났는데 무시하다, 냉대하다, 거절하다는 뜻의 'snub'에 'phone'을 합성한 단어다. 상대방을 무시하거나 냉대할 의도는 없다. 시선이 화면에 가 있고 신경이 그쪽으로 쏠려 있어서 마음을 다하지 못할 뿐이다. 즉, 주의가 흐트러져서 무심해진 것이다. (143)
한림대 강남성심병원 이홍석 교수는 더 포괄적인 차원에서 문제를 지적한다. "사람의 뇌는 예측할 수 없는 대상과 오감을 통한 상호작용에서만 고르게 발달한다. 이때 뇌의 회로가 촘촘하게 엮이고 기능이 강화된다. 그런데 스마트폰은 사람과의 접촉이 아니다. 뇌의 수만 개 회로 중 스마트폰이 전달하는 일방적인 영상을 받아들이는 단 하나의 회로만 움직인다. 그동안 다른 회로는 쓰지 못해 점점 퇴화한다. (...) 스마트폰 속에는 일방적인 사물의 움직임만 있을 뿐이다. 자신의 말이나 행동에 다른 사람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는다." (150)
그런데 주의력은 도구적인 역량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수전 손택은 이렇게 말한다. "도덕적 인간이 된다는 것은 모종의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며, 그럴 의무를 진다는 것이다. (...) 도덕적 판단은 본질적으로 주의를 기울이는 능력에 달려 있다. 이 능력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한계의 범위는 확장될 수 있다." (167)
이른바 '관심 경제attention economy'(주목 경제라고도 번역된다)의 영역이 빠르게 확장되고 있다. '관심 자본'이라는 개념도 등장했다. 김곡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오늘날 관심interest은 곧 이익interest이다. 관심을 주고받는 것은 노동이 되었다. 관심이 가치다.*" (171)
* 김곡, <관종의 시대>, 그린비, 2020, 114쪽
이 프로그램을 창안한 메리 고든은 그 경험을 이렇게 풀이한다.
'공감의 뿌리'에 참여하는 학생과 프로그램 진행에 도움을 주는 어른들은 '아기의 지혜'라는 중요한 지혜를 배운다. 아기는 행동과 감정이 꾸밈없고 순수하다. (...) 아기에게는 교실 안 모든 학생이 새로운 경험이다. 아기는 학생 한 명 한 명과 만날 준비가 되어 있다. 아기의 눈에는 인기 많은 학생도 없고 말썽꾸러기 문제아도 없다. 다만 침울하거나 근심에 싸인 학생이 자꾸 눈에 들어올 뿐이다. 아기는 대개 이런 학생에게 손을 내민다. 늘 소외당하고 따돌림당하던 학생은 아기와 공감 관계를 형성하면서 사회적 포용 영역으로 들어간다. (...) 아기는 경계나 규정에 얽매이지 않고 직관에 따라 골고루 사랑을 나눠준다*. (181)
* 메리 고든, <공감의 뿌리>, 샨티, 2010, 27~28쪽.
그림을 보는 눈과 환자를 보는 눈은 많은 점에서 상응하는 것이다. (185)
허먼은 <우아한 관찰주의자>의 저자로, 책의 원제는 'Visual Intelligence'(시각적 지능)다. '시각적 지능'이란, 보이는 것을 넘어 본질을 꿰뚫어 보는 관찰력을 의미한다. (188)
이러한 훈련을 통해 주의력이 신장되면 인지능력의 향상에 도움이 되는 것은 물론, 예술적 감수성 또한 고양된다. '아름답다'는 말의 어원이 '알음+답다'라는 견해가 있다. 무엇을 제대로 알고 나면 아름다움을 느낀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는 만큼 느낀다'라는 말과도 상통한다. 심미적 감각은 섬세한 관찰력을 요구한다. 눈으로 빤히 보면서도 놓치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제대로 보아야 한다. 깊이 들여다보면 새로운 것이 드러나면서 발상과 혁신의 실마리가 된다. 인공지능으로 대신할 수 없는 것 가운데 하나가 '안목'이다. 주의 깊은 관찰을 창의성의 토대를 이루고, 행복한 삶의 원천이 된다. (191)
외로운 사람들이 많아지면 사회가 어떻게 달라질까. 나치즘의 광기를 몸소 체험하면서 인간의 실존에 대해 사유한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가 발흥하는 토양에 외로움이 자리 잡고 있음을 간파했다. 고립은 개인의 문제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이다. (206)
테레사 수녀에게 기자가 질문했다. "수녀님은 기도를 많이 하시는데, 하나님께 무슨 말씀을 드리세요?" 테레사 수녀가 대답했다. "저는 아무 말씀도 드리지 않아요. 그냥 듣고만 있어요." 기자가 말했다. "아, 그러시군요.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무슨 말씀을 하시나요?" 테레사 수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분도 아무 말씀을 하지 않으세요. 저와 마찬가지로 그냥 듣기만 하신답니다." 즉, 하나님과 인간이 서로를 경청하는 것이 기도하는 말이다. (212)
이야기의 미덕은 무엇인가. 불쾌하고 화나는 경험도 누군가에게 에피소드로 들려주면, 감정을 내려놓고 상황을 객관화하면서 자아를 성찰할 수 있다. 밤에 '이불 킥'을 하느라 잠 못이룰 만큼 부끄러웠던 기억도 친구와 만나 수다를 떨다 보면, '유체 이탈' 화법을 구사하면서 즐거운 해프닝으로 웃어넘길 수 있다.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거기에 귀 기울여주는 사람이 있을 때, 우리는 좀더 너그러운 마음으로 힘든 현실을 견딜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안전 기지 또는 전환 장치가 없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온라인에서 극단적인 언사로 분노를 배설하게 된다. 그런 지경으로 내몰리지 않기 위해서는, 가까이 있는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정서적 안식처를 마련해야 한다.
자신의 이야기가 온전하게 경청되는 공간은 무너진 삶을 수습하고 자아를 회복하는 길을 열어준다. (215)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어 일체감을 느낄 때 생명의 힘이 배가된다.
그것을 입증하는 흥미로운 실험이 있다. 오랫동안 인간관계를 연구해온 진화심리학자 로빈 던바는 수십 명의 자원자에게 비디오를 보여주며 디스코형의 네 가지 기본 춤동작을 배우게 했다. 그는 자원자들을 그룹으로 나눠 춤을 추도록 했는데, 어떤 그룹에게는 같은 음악을 듣고 정확하게 같은 동작으로 동시에 춤을 추라고 지시하고, 다른 그룹에게는 각각의 멜로디에 맞춰 모두 다르게 몸을 흔들라고 했다. 디스코가 끝난 후, 팔에 혈압 측정 장치를 두르고 장치를 팽창시켜 그 압박을 어느 정도까지 견딜 수 있는지를 측정했더니, 동시에 같은 춤을 춘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훨씬 더 잘 견딜 수 있었다고 한다. 자신이 혼자가 아님을 온몸으로 느낄 때, 자연 진통제인 엔도르핀이 분비되어 통증에 대한 역치를 높여준 것이다*. (221)
* 마르타 자라스카, <건강하게 나이 든다는 것>, 어크로스, 2020, 246~247쪽.
"나는 그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니 그 사람에 대해 좀 더 많이 알아야겠다." - 링컨(231)
그러한 이치는 생태학에서도 확인된다. 생태계를 움직이는 원리 가운데 하나로 '가장자리 효과edge effect'가 있다. 땅과 바다, 숲과 평원처럼 둘 이상의 생물군의 서식지가 맞붙어 있는 경우, 그 경계를 이루는 지역에 종 다양성과 밀도가 높아지는 것을 가리킨다. 각각의 서식지에 깃들어 있는 생태적 자원들이 뒤섞이면서 풍부한 환경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공간에 작은 서식지들 여러 개가 공존하고 있다면, 경계가 그만큼 늘어나고 가장자리 효과도 더 뚜렷하게 나타나게 된다. (232)
베르브너가 일하는 <디 차이트>는 그러한 경험을 토대로 2017년 '독일이 말한다' 프로젝트를 출범시켰다. 온라인상에서 극단화되는 정치적 대립과 소수자에 대한 편견 등을 극복하고자 기획한 행사인데, 사회적으로 민감한 사안들에 대해 정반대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끼리 짝을 지어 의견을 주고받는 형식이다. 참가자들은 '경청한다, 경험을 바탕으로 말한다, 상대를 존중한다'는 원칙을 함께 읽고, 가벼운 이야기부터 출발해 토론에 들어간다. 두 시간 정도 대화를 끝내고 나면 참가자의 절반 이상이 색안경을 끼고 보았던 상대가 평범한 이웃임을 깨닫고, 전체의 20퍼센트 정도는 상대방의 말에도 몇 가지 설득력이 있음을 인정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수정하게 된다고 한다. 극단적인 생각을 누그러뜨리고 공통분모를 찾아가는 이 대화 마당에는 매년 2~3만 명이 참여하고, 유럽의 여러 나라와 미국에서도 '유럽이 말한다' '미국이 말한다'라는 이름으로 대면 토론이 열리고 있다*. (243)
* 바스티안 베르브너, <혐오 없는 삶>, 판미동, 2021, 240쪽.
미국 MIT공과대학교 경영대학원의 에드거 H. 샤인과 피터 샤인 교수는 그런 식으로 소통할수록 조직은 상투적인 대답과 어색한 침묵 속에서 경직될 뿐만 아니라 생산성도 떨어진다고 지적하며, 그 대안으로 '겸손한 질문humble inquiry'을 제안한다.
여기서 '겸손함'이란, 형식적으로 자기를 낮추는 자세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질문할 때 자기가 정말로 그 문제에 대해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상대방에게도 그런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 중요하다. 자기 능력만으로는 복잡한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한계를 정직하게 받아들이면서 함께 배우려는 마음이 되어야 한다. (중략)
물리학자 데이비드 봄은 대화의 핵심을 이렇게 짚은 바 있다. "참된 대화는 둘 또는 그 이상의 사람들이 서로가 자신의 확실성을 기꺼이 보류하려고 하는 것이다." 확신은 진실로 나아가는 데 걸림돌이 된다. 확신을 내려놓고, 명료함을 구해야 한다*. (247)
* 미래학자 밥 조핸슨Bob Johansen은 <Full-Spectrum Thinking: How to Escape Boxes in a Post-Catergorical Future>이라는 책에서 "명료함Clarity에는 보상이 따르고 확신Certainty에는 처벌이 따른다", "확신의 유혹에 저항하면서, 가능성의 비탈을 가로질러 명료함을 구하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고 말한다.
보통 '희귀 질환'이라고 말하는데, '희귀하다'는 단어는 '드물고 귀하다'라는 뜻이라서 질환에는 맞지 않는 수식어다. 대신 '희소 질환'이라 표현할 수 있다. (250)
이러한 상황에서는 모두가 모두의 능력과 지식을 활용하고, 사안에 따라 유기적인 도움을 주고받아야 한다. 이는 교육의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바꿔놓고 있다. 지식이 일부에게 독점되고 교육의 기회가 제한되어 있던 시대에는 교사의 가르침이 절실했다. 그러나 정보와 지식이 폭증하고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된 지금, 그 무한한 자료들 가운데 필요한 것을 선별하고 조합하여 자기 나름의 지성을 쌓아가는 역량이 점점 중요해지고 있따. 에리카 다완과 사지-니콜 조니는 그것을 '연결지능'이라는 개념으로 제시하는데, 그 의미는 '세계의 다양하면서도 이질적인 사람들과 복잡한 정보 관계망, 여러 분야의 지식과 경험, 자원 등을 결합하고 연결해 통합을 이루어나감으로써, 다가오는 인류의 미래를 결정하는 가치와 의미를 창출하고 난관 타개의 돌파구를 발견하는 재능*이라고 말한다. (253)
* 에리카 다완, 사지-니콜 조니, <연결지능>, 위너스북, 2016, 18쪽.
보이는 것들이 보는 것을 가로막는다.
보여지는 것들이 보아야 하는 것들을 뒤덮는다.
보란 듯이.
보인다. 보여진다. 보인다. 본다.
보인다. 보이지 않는다. 보인다.
보지 못한다.
- 윤해서, <홀>* (264)
* 윤해서, <코러스크로노스>, 문학과 지성사, 2017
한글 프로그램에는 한글과 영어의 자동 변환 기능이 있다. '한/영' 키를 일일이 누르지 않아도, 철자의 조합이 한글인지 영어인지를 분간해서 단어를 띄워준다. 그런데 그 기능이 오히려 귀찮을 때가 있다. 입력한 영어 단어가 신조어라서 아직 등록되어 있지 않고, 마침 그 철자의 조합으로 한국어가 있어서 자동 변환될 때다. 그 가운데 하나가 'SNS'인데, 그 문자 키는 '눈'과 동일하다. 영어 키보드로 설정해놓고 'SNS'를 타이핑해도, '눈'으로 바꿔서 띄워준다. 그래서 각 철자를 한 칸씩 띄어서 입력하고 다시 이어붙이는 번거로움을 감수해야 한다. 키보드에서 'SNS'와 '눈'이 같은 문자 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우연의 일치다. 우리의 눈이 SNS에 속박된 일상을 깨우치는 것일까. (265)
'고독'이라는 단어에는 상이한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그 두 글자에 각각 '립'자를 붙여보자. '고립'과 '독립'이 된다. 근대 들어 등장한 개인은 '독립'을 통해 자유를 추구했고, 자기만의 인생을 향유하려 했다. 그런데 그것이 타인과의 관계를 배제하는 방향으로 흐를 때 '고립'에 이르고 만다. 거기에서 벗어나 관계를 맺어보려 하지만, 상대방을 통해 자신의 결핍을 채우려는 에고 때문에 비틀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더욱 단절되고 고립된다. 내면의 중심이 분명하게 세워진 사람만이 인간관계에서 자기중심성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다. 모처럼 주어진 '고독'의 시간이 '고립'으로 내몰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독립'을 훈련할 수 있다면 타인과의 만남도 한결 충실해진다. 자족의 넉넉함과 공생의 기쁨으로 상대방을 기꺼이 맞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2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