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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뜨거운 별에
다른 사람이 알려준 정답과 스스로 고른 오답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당연히 후자다. 사람은 오답을 선택하면서 그 자신이라는 한 인간을 쌓아가는 것이다.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게 해주는 약'을 먹고 올바른 판단을 하게 되더라도, 누군가 몰래 물에 타놓은 그 약을 모르고 먹게 되는 것과 스스로 복용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85)
알래스카의 아이히만
"체험과 공감은 어떻게 다르죠? 박사님의 정의는 무엇입니까?"
"체험은 엄청나게 풍부한 감각 자극들로 이뤄집니다. 그리고 그 중에 디그램 세포체에 남는 정보는 많아야 5퍼센트 정도밖에 되지 않아요. 괴로운 사고실험입니다만, 만약 어떤 사람을 고문한 직후 그 사람의 디그램 세포체를 꺼내 다른 사람에게 이식한다 해도 그 시술을 받은 사람이 통증으로 몸부림치지는 않을 거라는 말입니다. 그런 시술을 받은 사람은 분명히 상당한 충격을 받겠지만, 그 자극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해 어리둥절해할 겁니다. 어쩌면 안도할지 모릅니다. 악몽을 꾸고 깨어난 사람이 꿈 속에서 얼마나 강렬한 경험을 했든 그게 자신의 현실과 관련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처럼요." (117)
아인슈타인 박사는 "타인의 마음은 우리에게 달보다 더 아득히 먼 곳"이라고 말했다. 인간의 삶에서 대부분의 비극은 다른 사람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데에서 오지 않는가. 우리가 다른 사람의 환희와 고통을 바로 그 사람이 느낀 그대로 경험할 수 있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127)
설사 아렌트 박사의 주장을 다 받아들인다 해도, 아이히만에게 어울리는 별명은 '평범한 악'이 아니라 '나약한 악'이라고 벤야민 씨는 말했다. 사람에게는 분명 권위에 복종하는 슬픈 본성이 있다, 그러나 내려온 명령이 수백만 명을 학살하는 것이라면 당연히 거부해야 하며 선량한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그럴 것이라는 게 벤야민 씨의 주장이었다. (139)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태도가 인간 보편 윤리의 어떤 측면과 충돌한다고 막연히 느끼고 있었으나, 그런 생각을 정연하게 풀기 어려웠다. 선악이 그렇게 주관적인 의도에 흔들리고 역시 주관적인 감수성에 따라 달라지는 문제일까?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에게 나쁜 일을 저지르는 것과 무덤덤한 사람에게 같은 짓을 저지르는 걸 구별해야 하는 걸까?
나는 기사를 통해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힌다. 사실 어떤 기사를 쓰건 간에 거기에 모욕을 당했다거나 피해를 입었다는 사람들이 나온다. 개중에는 무고한 희생자도 있다. 범죄자와 범죄를 묘사한 기사가 죄 없는 가족에게 상처가 되고, 기업 입원이 저지른 비리에 대한 기사가 성실한 직원들에게 수치심과 죄책감을 불러일으킨다. 잘못된 신념을 지닌 이들은 그 잘못을 지적받으면 상처를 받는다. 그런 감정들은 부조리하지만 엄연히 실재한다. 그리고 사람들마다 받아들이는 강도가 다르다. 어떤 시대에는 무도회에서 춤을 추자는 요청을 받지 못한 것 때문에 죽을 정도로 괴로워한 사람도 있었다.
고통이 곧 악일까? 때로는 정의와 진실이 사람들을 괴롭고 불편하게 하고, 차라리 악이 달콤하지 않던가? 체험 기계가 일상에 녹아들면,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는 것을 가장 중요한 도덕이라고 여기게 된다면, 이는 비판과 성찰 없이 금기만 넘치는 나르시시스트들의 사회로 이어지지 않을까? 반대로 우리의 자존심을 추켜세우는 악에 대해서는 더 쉽게 굴복하게 되지 않을까? 분노와 증오, 불안과 공포도 공감을 통해 퍼지지 않던가? 우월 의식이나 혐오감만큼 전염되기 쉬운 감정이 있던가? 그렇다면 이건 제2의 괴벨스들이 가장 반길 기계 아닌가? (151)
아이히만의 비명이 들리자 참관인석 앞줄에 앉은 유대인위원회 간부들의 긴장이 풀리는 것이 확연히 느껴졌다. 목과 어깨 근육에서 조금 전과 달리 분노와 증오의 기운이 옅어지고 그 자리에 대신 승리감과 만족감이 깃들었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새삼 인간의 공감 능력이 무섭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얼굴조차 보지 못한 상태에서, 뒷모습만으로도 상대의 기분을 알아차린다.
혹은 그게 다 나의 착각이었을까? 나는 내 감정을 제멋대로 유대인 간부의 뒷모습에 투사한 것일까? 이 역시 체험 기계에 들어가서 확인해야 알 수 있는 일일까? (153)
나는 아인슈타인 박사의 의견만큼이나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에 인생 상담 칼럼을 연재하는 애비게일 밴 뷰런의 말에도 동의한다. 그녀는 이 기계 때문에 상담 칼럼니스트의 일거리가 사라지지 않겠냐는 질문을 받자 이렇게 대답했다.
"상대의 처지를 이해한다고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지는 않는답니다. 거기서부터 새로운 문제가 시작되기도 하지요. 상대의 처지를 이해하는 사람이 자신이 그렇게 이해받지 못하는 데 대해 더 절망할 수도 있고, 반대로 상대의 세계를 이해하기에 그에게 더 잔인한 일을 저리를 수도 있어요." (161)
나무가 됩시다
술에 몹시 취했거나 깊이 잠든 사람을 상대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성폭행하는 일은 나쁜가? 청각장애인에게 욕설을 퍼붓거나 시각장애인의 얼굴 앞에 가운뎃손가락을 세우는 일은 나쁜가? 신경계가 다 자라지 않은 태아를 초음파나 방사선으로 원거리에서 조각조각내는 일은 나쁜가? 나쁘다면 왜 나쁜가? (187)
사이보그의 글쓰기
원고를 읽어보니, 몰입이 깨질까 두려웠던 탓에 다음 문장이 떠오르지 않은 경우에는 '넘어가자'라고 쓰고 건너뛴 대목들이 눈에 띄었다. A4 석 장 분량의 원고에 '넘어가자'라는 문장이 열한 번 나왔다. 나는 웃으며 그 부분을 대체할 문장들을 궁리하기 시작했다. (211)
헤어밴드 없이, 플롯이 있고 조리에 맞는 글을 쓰려고 시도한 적도 물론 있었다. 그러나 헤어밴드를 벗자마자 앞이 턱 막힌다는 사실에 나는 경악하고 좌절했다. 보름 정도 머리를 쥐어 싸매고 고민하다가 결국 포기했다. 에세이나 칼럼은 어찌어찌 쓸 수 있었는데 소설을 써지지가 않았다.
한동안은 헤어밴드를 쓰고 문장들을 쏟아놓은 뒤 헤어밴드를 벗고 지우기를 반복했다. 그런 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달리 방법이 없어서 그렇게 했다. 시시한 글을 쓰고 있다는 생각을 할 때마다 영혼이 침식되는 것 같았다. 술을 마시는 횟수가 늘어났다. 헤어밴드는 짧으면 하루에 네다섯 시간, 길게는 여덟 시간 가까이 착용했다. 술을 마시고 헤어밴드를 착용하는 날이 늘었고, 나중에는 거의 매일 그렇게 했다(지금 이 글도 그렇게 쓰고 있다).
그렇게 팔 개월 동안 꾸역꾸역 썼다가 지웠다가 하며 원고를 단행본 한 권 분량만큼 채웠다. 전에는 '글이 안 써진다'며 자기혐오에 빠졌는데, 이제는 '써도 그만 안 써도 그만인 글'이라는 생각에 자기혐오에 휩싸였다. (220)
몇 가지 반복 작업으로 나뉘는 프로세스, 하지만 지루해서 오래 집중하기 어려운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 기계를 사용할 것 같다. 악기 연주자라거나 운동선수라거나 회계사라거나... 하지만 아주 먼 목표를 향해 느릿느릿 해야 하는 일, 많은 사람 속에 부대껴 복잡한 조율을 해야 하는 작업에는...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 줄어들지도 모르지... (226)
데이터 시대의 사랑
그런 고민을 털어놓자 데이터 마이닝 업체에 다니는 친구가 한 알고리즘을 소개해주었다.
원래 보험회사를 위해 개발한 서비스인데, VIP 고객들에게 비공식적으로 제공하기도 해. 사모펀드 투자자들이라든가, 금융회사 임원들이라든가, 그 자식들이라든가. 친구가 말했다. 부담 가질 거 없어. 우리들끼리는 늘 하는데 뭐. 유명 배우랑 나랑 사귈 확률이 얼마나 될까, 사귀게 되면 얼마나 오래갈까 맞춰보지. 물론 진지하게 사귀는 사람을 상대로도 해보지만.
이것은 생애 주기 예측 분석이라는 신사업의 아주 작은 조각이었다. 연애, 결혼, 임신, 출산, 자녀의 입학이나 졸업, 이사, 본인이나 배우자의 불륜, 부모의 사망, 배우자의 사망 같은 사건을 겪을 때 사람들의 소비 패턴은 크게 바뀐다. 기업들은 이를 알아내기 위해 고객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했다. 더 싸고 더 쉽게 구할 수 있는 적은 양의 정보로 더 정확한 결과를 내는 것이 이 비즈니스의 관건이었다. 통찰이 곧 돈이었다. (367)
송유진이 이유진을 속인 이유는, 이중생활이 만족스러워서가 결코 아니었다. 송유진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젊은 대리와 잠을 자면서, 송유진은 자신이 이유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이유진이 자신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를 역설적으로 깨달았다. 자신이 그녀를 배신했고, 그녀가 곧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 자신을 떠날 거라고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팠다. 그래서 깨져버린 찻잔과 엎질러진 물 앞에 우두커니 서서 엉뚱한 생각을 하는 어린아이처럼 멍하니 하루하루를 보냈다. (381)
그녀를 롤 모델로 삼은 젊은 여자들이 찾아와 일과 삶에 대해 조언을 구했다. 자기 안에 있는 커다란 검은 구멍을 그녀들이 전혀 보지 못한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진로를 설정하고 경력을 관리하는 일에 대해서는 몇 가지 떠들 얘기가 있었지만 사랑, 결혼, 인생에 대해서는 해줄 말이 없었다. (386)
이유진은 상대의 자존심을 다치지 않게 하면서 대화를 더 이어 가고 싶었으나 상황이 너무 복잡했다. 헤어진 다음에도 자주 그를 생각했다고 말하고 싶었고, 그는 어땠는지 묻고 싶었다. 자신들이 함께 보낸 사 년 십일 개월 이십육 일이 시간 낭비였다거나 실패였다고 이제는 여기지 않으며, 다만 그들이 함께하지 못한 날들이 아깝다고, 요즘은 인생에서 실패와 성공을 따지는 것이 괴상한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390)
댄치그는 박사학위 과정중에 강의 시간에 지각했다가 칠판에 적힌 문제가 숙제인 줄 알고 집에 가서 끙끙대며 풀었다. 이번 숙제는 왜 이렇게 어렵지, 하면서. 그는 '숙제'를 며칠 만에 풀어서 제출했는데, 알고 봤더니 그 문제는 그때까지 통계학계에서 풀리지 않는 난제라며 교수가 학생들에게 소개한 것이었다. 댄치그는 그 사실을 몰랐기에 거기에 도전할 수 있었다.
그러면 상대가 누군지도 제대로 모르는 채로 사귀었단 말인가요?
인턴이 물었을 때 이유진은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어차피 오래 사귀어도 상대가 누군지 모르는 건 마찬가지예요, 끝까지 그렇답니다, 라고 말하고 싶기도 했다. 상대가 누군지 몰라야 사귈 수 있지 않나요, 하고 되묻고 싶기도 했다.
이제 이유진은 인간 삶의 기본 조건에 불확실성도 있다고 생각한다. 음식, 의복, 주택, 안전만큼 중대한 문제는 아닐지 몰라도 애정이나 존경, 소속감보다 후순위는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불확실성은 그런 조건의 조건일지도 모른다.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고 미래가 어떨지 몰라야 사랑하고 모험하고 발견하고 결단할 수 있다. (392)
다른 사람이었다면 내심 안도하며 "십 분만 늦었다면 나도..."라고 혼잣말을 했겠지만, 주니퍼 수사에게는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왜 하필 저 다섯 사람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우주에 어떤 계획이 있다면, 인간의 삶에 어떤 패턴이 있다면, 갑자기 중단된 저들의 삶 속에 숨겨진 불가사의한 무언가를 밝혀낼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우리는 우연히 살고 우연히 죽는 것일까, 아니면 계획에 의해 살고 계획에 의해 죽는 것일까. 주니퍼 수사는 그 순간 대기를 가르고 떨어진 그 다섯 명의 숨겨진 삶을 조사하겠다고, 그래서 그들이 그렇게 떠난 이유를 밝혀내겠다고 마음먹었다. (14)
그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단지 그 답을 자신이 선교한 사람들에게 역사적, 수학적으로 증명하고 싶을 뿐. 그 불쌍하고 고집 센 사람들은 자신이 겪는 삶의 고통이 자신을 위한 것임을 좀처럼 믿지 않았다. 사람들은 늘 적절하고 견고한 증거를 요구했다. 심지어 이단심문소에서 사람 눈만 보고도 그 생각을 알아차릴 수 있다는 나라에서조차 의심은 인간의 가슴에서 끊임없이 샘솟기 마련이었다. (16)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도 완벽하게 현명할 수는 없는 법이다. (52)
그러나 그녀는 묵묵히 자신의 임무를 계속했다. 그녀는 달에 닿을 만큼 높은 산을 쌓겠다며 수천 년에 한 번 밀알을 옮기는 우화 속 제비를 닮았다. 그런 사람들은 시대마다 있었다. 그들은 자신만의 밀알을 고집스럽게 옮기며 구경꾼의 코웃음에서 일종의 희열을 느낀다. (53)
훌륭한 인물을 키워내기 위한 교육은 어디서든 어려운 법이지만, 쉽게 상처받고 쉽게 질투하는 소녀들이 모여 있는 수녀원에서는 특히나 기발하고 간접적인 방식으로 이뤄져야 했다. 페피타는 수녀원에서 가장 인기 없는 임무에 배정되었지만, 그 임무를 수행하면서 수녀원 관리의 모든 측면을 파악할 수 있었다. 또한, 달걀 및 채소 관리자의 자격으로나마 수녀원장의 여행에 동행했다. (55)
수녀원장은 동등한 상대를 대하듯 페피타에게 말했다. 그런 식의 이야기는 영특한 아이에게 고민과 흥분을 동시에 안겨주는 법인데, 마리아 델 피라르 수녀원장은 그 방식을 남용했다. 그녀는 페피타에게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해 더 넓은 시각을 갖도록 만들었다. 그 나이의 소녀에게는 버거운 일이었다. 그녀는 제우스가 세멜레에게 그런 것처럼, 경솔하게도 그 소녀에게 이글이글 불타는 자기 모습을 고스란히 노출하고 말았다. 페피타는 자신의 부족함을 느끼고 겁을 먹었지만, 두려움을 숨긴 채 울었다. 수녀원장은 이 소녀를 길고 고독한 훈련 속에 던져 넣었고, 페피타는 자신이 버려졌다고 믿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그리고 이제 고도가 높아서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인 이 이상한 산중의 이 이상한 여관에서, 페피타는 친애하는 존재, 자기 삶에서 유일하게 실재하는 존재가 그리웠다. (66)
커다란 참나무 같은 남자가 계집아이 하나 사라졌다는 이유로 마치 장님이 빈집을 헤매는 마냥 세상을 떠돈다는 것이 너에게는 하찮게 보일 수도 있겠지. 그래, 넌 이해하지 못할 거야. 하지만 사랑하는 내 딸아, 난 이해한단다. 사실 그 생각을 하면 얼굴이 창백해질 정도야. 간밤에 선장은 나와 앉아서 딸에 대해 이야기했지. 그가 손으로 턱을 괴고 화롯불을 들여다보며 이렇게 말했어. '가끔은 딸아이가 멀리 여행 중이고 그 아이를 다시 보게 될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딸아이가 영국에 있을 것만 같아요.' 이런 말 하면 넌 나를 비웃겠지만, 선장은 자신이 늙을 때까지 시간을 흘려보내기 위해 세상을 떠도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드는구나. (113)
쌍둥이 형제는 알바라도 선장을 무척 존경했다. 그들은 잠시 선장 밑에서 일한 적이 있었는데, 자기 자랑과 변명, 미사여구가 난무하는 이 세상에서 세 사람의 과묵함은 작지만 진실된 본질처럼 느껴졌다. (114)
에스테반이 얼굴을 바닥에 묻고 울부짖었다.
"저는 혼자예요. 혼자, 혼자라고요."
그 옆에 서 있는 선장의 크고 넓은 얼굴이 고통으로 잔뜩 일그러지며 잿빛으로 변했다. 지난날의 아픈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선장은 바다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를 제외하면, 세상에서 가장 말주변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때로는 용기를 내어 진부한 말이라도 해야 하는 순간이 있다. 바닥에 쓰러진 형체가 듣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그는 말했다.
"에스테반,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하네. 최대한 밀고 나갈 수밖에 없지.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아. 알잖아. 시간은 계속 흘러가니까. 시간이 얼마나 빨리 지나가는지 알면 자네도 놀랄 거야." (122)
피오 아저씨와 카밀라 페리촐레는 그들보다 앞서 칼데론이 스페인에서 그랬던 것처럼, 천상계 수준의 연극은 페루에서 일궈내려고 스스로를 고문하고 있었다. 걸작이 목표로 하는 대중은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다. (145)
그녀는 전기처럼 강렬한 매력을 뿜어내서, 그녀의 손이 남자 배우의 손에 닿기만 해도 관객들은 감정 이입이 되어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그러나 그런 훌륭한 연기의 빈도는 점점 줄어들었다. 기술이 숙달될수록 성실성은 덜 필요해졌다. 그녀가 얼이 빠져 있어도 관객들은 그 차이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오직 피오 아저씨만 슬퍼할 뿐이었따. (148)
그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생각들을 혼잣말로 계속 되뇌어야 했다.
세상의 부당함과 불행은 불변의 것이다.
진보 이론은 망상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행복을 모르기에 불행에도 둔감하다.
모든 부자들이 그러하듯, 그는 가난한 사람들이 진정으로 고통을 느낄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 모든 교양 있는 사람들이 그러하듯, 광범위한 독서를 한 사람들만이 자신이 불행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 믿었다. (155)
주니퍼 수사는 자신의 연구 대상과 가장 긴밀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정보 공유에 가장 비협조적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마리아 델 필라르 수녀원장은 페피타에 대해 길게 이야기했지만, 본인이 페피타에게 품었던 야심에 대해서는 함구했다. 페리촐레는 처음에는 접근하기 어려웠지만, 이내 주니퍼 수사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녀가 말하는 피오 아저씨의 성격은 그가 다른 곳에서 들은 불미스러운 증언들과는 명백히 상반된 것이었다. 그녀는 아들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하지 않았고, 고통스럽게 마지못해 몇 마디 하는 정도였다. 그리고 그 몇 마디를 끝으로 갑자기 면담이 종료되었다. 알바라도 선장은 에스테반과 피오 아저씨에 대해 자신이 아는 만큼 이야기해 주었다. 이처럼 가장 많이 아는 사람이 가장 입조심을 하는 법이다. (193)
그녀가 자책의 말을 쏟아 내는 동안 피곤한 기색이 사라졌다. 마침내 수녀원장은 그녀에게 페피타와 에스테반에 대해, 그리고 카밀라의 방문에 대해 이야기했다.
"우리는 모두 실패했어요. 그리고 그로 인해 한 사람은 벌을 받으려 하고, 한 사람은 온갖 속죄를 하려 하는군요. 그런데 그거 아시나요? 사랑 안에서는, 평소에는 감히 이런 말을 입에 잘 담지 않습니다만, 사랑 안에서는 우리의 실수조차 오래가지 않는 것 같더군요." (203)
해제 :: 신형철
이 소설의 본론 격에 해당하는 2~4장은 수사의 답만이 아니라 애초에 질문부터가 잘못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수사의 질문에선 '신'이 주어다. 신이 개입한 일인가, 이 개입엔 어떤 의도가 있는가, 그 의도는 선한가 그렇지 않은가. 그렇게 묻는 신은 종잡을 수 없거나 동의하기 어려운 선택을 하는 존재가 되기 십상이고, 어느 쪽을 택해도 지상의 삶은 정당화되기 어렵다. 와일더는 이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고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와일더는 질문 자체를 바꾼다. 더 정확하게는, 질문의 주어를 바꾼다. '신은 왜?'가 아니라 '인간은 왜?'로.
'신은 왜?'라는 질문은 죽음에 대해서(만) 생각하게 한다. 왜 하필 그때 죽였을까? 그런데 우연이건 의도건, 중요한 건 인간이 죽음을 어쩌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죽음의 적절함과 정당함을 따지는 건 과학적으로도 무의미하고 신학적으로도 불경한 것이다. (그러니 주니퍼 수사는 이중으로 틀렸다.) 이때 질문을 '인간은 왜?'로 바꾼다는 건 삶에 대해서(만) 생각한다는 것이다. '(신은) 왜 살려고 결심한 직후에 죽였을까?'가 아니라 '(인간은) 왜 죽기 직전에야 살기 시작할 수 있었을까?'를 묻는 일이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왜 그렇게밖에 못 살았던가. 그래서 세 개의 약전이 필요했다. 답이 거기 있기 때문이고, 삶에 대한 답은 언제나 길다. (214)
첫 번째 이야기. 도냐 마리아 후작 부인이 딸을 '많이' 사랑했지만 '잘' 사랑하는 법을 몰랐다는 건 분명하다. 세상엔 '사랑해'라는 말을 '사랑해 줘'라는 뜻으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 후작 부인은 자기를 충분히 사랑할 수 없었기 때문에 딸의 사랑을 갈구했는데, 이 역전된 요구를 감당할 자식은 세상에 없다. 그 엄마를 나무라기도 어렵다. 자신의 말마따나 그녀 역시 그렇게 길러졌기 떄문이고 당대 여성의 삶은 초개인적인 한계 안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그녀는 신이 그렇듯 딸도 자신이 '소유할 수는 없다'는 성숙한 "체념"을 배우고, 딸보다 더 어린 소녀에게서 진정한 사랑의 출발인 "용기"도 배운다. 그런데 너무 늦었다.
두 번째 이야기. 마누엘과 에스테반이 서로 '많이' 사랑했지만 '잘' 사랑하는 법을 몰랐다는 것 역시 분명하다. 부모의 빈 자리에 상대방이 있었으니 (없는 것보단 낫다는 점에서) 다행이기도 하고 (누구도 상대방에게 부모일 순 없다는 점에서) 둘의 관계는 위험하기도 하다. 그럴 때 둘 중 하나가 제3자와 사랑에 빠지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그들은 몰랐다. 그 결과는 아이러니한 비극이다. 마누엘이 제 사랑을 "희생"했는데 에스테반은 마누엘을 얻기는 커녕 영원히 "상실"한다. 죽어가던 에스테반에게 다행스럽게도 한 손이 내밀어지자, 에스테반 자신도 스스로 타인의 상실을 위로하겠다고 마음먹게 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너무 늦었다.
세 번째 이야기. 피오 아저씨가 카밀라 페리촐레를 '많이' 사랑했지만 '잘' 사랑하는 법을 몰랐다는 것 또한 분명하다. 피오가 페리촐레에게 "피그말리온"이라는 건 거꾸로 말하면 페리촐레가 피오에게 부인도 딸도 될 수 없다는 뜻이다. 피오의 사랑은 "애욕"을 부정하면서(부정당하면서) 비틀리는데 그 경우엔 대개 가학적인 속성을 갖게 된다. 상대가 느끼는 고통으로 자신의 영향력을 실감하고, 그 고통을 인내하는 모습을 보며 충성을 측정하는 식이다. 예술을 위해 그런 "사랑의 고통"이 필요하다는 명분도 그를 오래 미혹해 왔다. 그러다 마침내 미망에서 벗어난 그는 개심한 피그말리온이 되어 두 번째 삶을 꿈꾼다. 그러나 너무 늦었다.
이들은 부모와 자식, 부모가 없어서 결착된 형제, 부녀와 부부의 경계에 놓인 사제다. 그리고 이 사랑의 실패는 닮았다. 이런 시행착오는 1714년에도 1927년에도 2025년에도 있다. 인간의 사랑은 왜 이런 식인가. 핵심은 용기다. "때로는 용기를 내어 진부한 말이라도 해야 하는 순간이 있다." 아니, 그때만큼 더 용기가 필요한 때가 없다. 자신의 감정에 진실해질, 그래서 타인에게 정확해질 용기. 사랑한다고 말할 용기이거나, 반대로 사랑한다는 말로 도망치지 않을 용기. 이런 용기는 적금처럼 만기가 돌아오면 찾아 쓰는 게 아니다. 오늘 당장 용기를 내지 않으면, 내일은 꼭 진실해지자고 다짐하는 평범한 어떤 오늘, 우린 죽는다. (216)
'나는 너를 사랑한다'라는 문장에서 중요한 건 주어나 목적어가 아니라 '사랑한다'라는 동사다. 주어와 목적어는 몹시 중요하다고 반박하고 싶어질 때 그 다음 문장이 우리를 품는다. "모든 사랑의 충동은 그것을 만들어 낸 사랑으로 돌아간다." 신의 사랑이라는 대양에서 인간의 사랑은 서로 섞인다. 더 크게 섞이기 위한 다리는 많을수록 좋을 것이다. 우리에게 신이 필요한 때는 다리가 끊어지는 때가 아니라 그럴 줄 알면서도 그것을 놓는 때다. "오직 사랑만이 남는다. 오직 사랑만이 의미를 지닌다."
(중략) 그래서 '우연인가 의도인가?'라는 질문을 이번엔 인간을 향해 다시 물을 줄 안다. '당신이 그렇게밖에 못 살고 있는 건 우연인가, 아니면 당신은 아마도 부정할 당신의 의도인가.' (218)
어찌 보면 한 치 앞도 모르고 바둥대며 살다가 준비 없이 죽음을 맞이하고, 잠시 기억되다가 영영 잊히는 삶이 허무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은 한동안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의 사랑을 받았다는 것, 그것으로 충분히 살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 (223)
방랑, 파도 :: 이서아
언젠가 만약에 내가 바다에서 놀다가 세상을 뜨더라도, 백을 원망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백은 가정법으로만 노래하기 때문에ㅡ슬픔에 빠진 사람은 언제나 과거에 대한 시뮬레이션을 돌리기 때문에ㅡ 내 뒤에서 몰려오는 파도의 리듬에 맞춰 보드를 힘껏 밀어주었던 그 하루들에 대해 수도 없이 다시 생각할 것이다. (99)
우리의 적들이 산을 오를 때 :: 함윤이
두 사람이 트럭을 타고 떠나는 모습을 입구 옆 벤치에 앉은 노인들이 지켜보았다. 그들은 얇은 코트 혹은 우비만 걸친 채 매일 오후 벤치로 왔고, 날이 저물 때까지 앉아 있었다. 노인들이 무엇을 하러 오는지 노아는 잘 몰랐다. 시간을 때우러 오나 보다, 막연히 추측했을 뿐이었다. 그것은 이 소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가장 자주 하는 일이었다. 느리고 꾸준하게, 표정 없는 얼굴로 시간을 흘려보내는 일. (124)
여름에는 정말 미심쩍다. 시간이 흐르지 않는 게 아닐까. 중지되고 정체되는 감각.
여름을 제일로 사랑했다면 다르게 느꼈을지도. 하지만 여름은 내가 네번째로 사랑하는 계절이다. 세 번을 거쳐 온 마음은 미약하다. 그래도 싫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은 마음.
한껏 사랑할 수 없다면 조금 사랑하면 되지. (42)
그래서일까, 매미가 쐐ㅡ 하고 한꺼번에 울기 시작하면 그 소리는 수백 개의 흔들리는 나뭇잎 틈으로 새는 빛 같다. 우주의 빛을 소리로 변환하는 기술에 대해 들어본 적 있다. 여름의 빛이 매미 소리로 변신했다고 상상한 그날로부터, 그 소리가 환호성으로 들리고 있다. 반짝이는 소리. 여름을 호위하는 소리. (43)
꽃의 둘레가 바짝 탔더라. 꽃잎을 한껏 말고 빈틈없이 새카맣게 되어버린 것도 있더라. 소신하듯, 여름에 공양하듯. 여름꽃이라고 해서 여름이 수월하지는 않은 것이지. (56)
가까이에서 더러 보아왔다. 기억을 잃어가는 것. 내 조부가 그랬고, 내가 돌보던 시설의 여성들이 그랬고, 내가 존경하는 수도승이 그랬고, 이제 내 나이든 고양이가 그렇다. 순간순간 그들의 눈 속에서 빛이 꺼지고 눈동자가 멈추는 것을 목도했다. 그럴 때 그들은 아주 먼 데를보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 시선을 나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기억을 잃으면, 사랑했다는 기억을 잃으면, 끝내 사랑을 잃은 것이라는 사실을 감각할 수 있게 되었다. (64)
하나 여름의 비는 돌림노래다. 길고 되풀이된다. 둑이 허물어지고 지붕이 내려앉고, 세간이 샅샅이 젖고 검푸른 곰팡이꽃이 번지고, 사람과 동물이 다치고 죽는다.
그런 일은 대개 저지대에서 속절없이 일어난다. 슬픔은 단연코 저지대로 모여드는 것이다.
내가 거기 있지 않다고 해서 다행일 수 없다. 거기와 여기는 하나의 세계이다. 거기가 슬픔에 잠겨 있는데 어떻게 여기가 울지 않을 수 있을까. 이 계절에는 빗물과 눈물의 총량이 앞을 다툰다.
비는 일러준다. 빈틈과 구멍을, 기울기와 높이를, 공명과 수호를. 그것들을 미리 재단하여 튼튼한 옷으로 만들어 나눠 입고 싶다.
올해 장마에는 모두 공평히 무사하기를, 예년과 같은 참담한 일이 없기를 바라고 바란다. (79)
나는 처음에 '정주'를 하나의 집 혹은 수도회에서 평생 머무는 것이라 이해했다. 그런데 세세히 찾아보니 그보다 훨씬 깊은 개념이다. 요약하면 이렇다. 정주는 외적 정주와 내적 정주로 구분 지을 수 있다. 외적 정주는 내가 이해한 대로 같은 장소에 몸이 머무르는 것이다. 반면 내적 정주는 보이지 않는 마음이라는 장소의 범주이다. 마음에서 머무른다는 건 무슨 의미인가. 마음을 떠나지 않는다는 것은.
여러 해석이 있지만 그중 안셀름 그륀 신부의 견해에 따르면, 그것은 '자신에게 머무르는 것, 스스로 견디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만족이나 해답이 바깥에 있다는 착각을 이겨내라고. 모자라는 자신 안에서 사랑으로 인내하고 머무르라고. 그것이 정주라고.
그 말에 나는 다 들통난 기분. 그래, 나는 나를 참을 수 없는 것이다. 지긋지긋한 사람들을 통틀어 제일 지긋지긋한 사람은 바로 나인것이다. 먼 데서 유토피아를 찾는 것이다, 아무리 멀리멀리 가도 나를 벗어날 수는 없는데. 나의 유토피아는 나의 폐허에 있는데. (118)
내 부모님께서는 조금 더 고단수의 방법으로 벌을 주셨는데, 말이 아닌 침묵으로 상처를 주었다. 누군가가 나를 말을 붙일 만한, 물어보거나 설명할 만한 존재로 평가하지 않을 때, 그것은 나에게 더욱 큰 정신적인 충격으로 다가왔다. (117)
에메렌츠의 뒤를 쫓아갈까 하다가 비이성적인 수단으로, 규율 없이 드러나는 그녀의 고착된 성향을 바로잡아놔야 한다는 생각이 나를 붙들었다. 그리고 지금은 알고 있지만 그때에는 알지 못했다. 애정은 온화하고 규정된 틀에 맞게, 또한 분명한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누구를 대신해서도 그 애정의 형태를 내가 정의할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118)
폴레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녀가 알았다면, 폴레트의 마음을 되돌리도록 시도해봤는지 에메렌츠에게 물어보았다.
"그런 생각은 들지도 않았어요." 에메렌츠가 말했다. "앉으시겠어요? 앉아서 콩 까는 걸 도와주세요, 이것으로는 우리 네 명에게 부족해요. 가고 싶은 사람은 가야죠. 여기 왜 머물러야 하겠어요. 우리는 그녀의 삶이 원하는 바를 이루게 해준 거예요. 집에서도 그녀는 고통받지 않았으며, 대가 없이 그 허름한 집에서 사는 것도 허락되었지요. 게다가 나는 그녀에게 모임도 주선했어요. 슈투도, 아델도 그리고 나도, 그녀에게는 우리 모두가 충분치 못했지만, 그녀의 그 모든 이상한 고정관념을 좋은 마음으로다 들어주었고 우리가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마저 들어주었어요. 가끔 프랑스어로 말했거든요. 프랑스어로 말해도 우리가 대부분 알아들을수 있었던 것은, 오직 그 얘기만을 갈라진 목소리로 읊어댔기 때문이에요. 그녀가 고독하다는 것을요. 나도 알고 싶은 게, 고독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누군가와 함께 있는 사람도 단지 생각을 하지 못할 따름이에요." (137)
"에메렌츠," 다시금 말을 걸었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세요. 당신은 내가 죽는 걸 허락하겠어요?"
"물론이에요." 메마른 목소리로 대답했다. 눈물은 이미 말라 있었다.
"불쌍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아니요."
"하지만, 내가 그 어떤 것도 구하지 못했더라도, 나중에는 그 모든 게 드러났을 거예요. 생선, 고양이들, 오물."
"어찌 되었든, 그러고는요? 내가 뒈지도록 당신이 놔뒀다면, 그 때에 가서는 그 모든 것이 드러날 수도 있었겠지요. 망자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끼겠어요?" (314)
아주 예리한 칼로 사람의 심장을 찌르면, 그 사람은 바로 쓰러지지 않는다. 에메렌트를 잃었다는 의식이 지금 우리 마음에 바로 영향을 미치지는 않고 차후에 우리를 동요하게 하리라는 것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었다. 심장을 찔린 우리는 나중에 땅으로 쓰러지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유골함처럼 믿기지 않는 형식으로 안장된, 하지만 여전히 그녀를 볼 수 있는 여기에서가 아니라, 이제는 앞으로 절대 그녀가 빗자루질을 하지 않을 그 길에서, 또는 아무도 먹을 것을 주지 않는 상처 입고 고운 발을 가진 고양이들이나 떠돌이 강아지들이 하릴없이 발걸음을 재촉하는 정원에서 우리는 그녀를느낄 것이다. 에메렌츠는 우리 모두의 삶에서 한 조각을 가져갔다. (352)
하루는 '적산온도'에 관한 설명이 이어졌다. 그날은 어린이날 기념 특집으로 꾸려졌는데 어린이들이 보내온 질문에 기자가 답을 건네는 형식이었다. "바람이 불 땐 왜 윙윙, 씽씽 소리가 나요?" "봄에는 왜 꽃과 벌레가 많은 거예요?"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귀여운 질문들이다. 그중 봄에 꽃이 피는 이유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식물마다 꽃이 피기까지 필요한 온도가 있는데 봄이되면 식물들이 몸 안에 온도를 '저금'하기 시작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렇게 저금한 온도가 가득 차면 비로소 꽃이 피게 되는 것이라고. (27)
튤립의 비밀을 말해줄게. 튤립을 사다 꽃병에 꽂으면 꽃송이가 테이블에 닿을 지경으로 축 늘어져버린다? 사람 손에 닿으면 그래(임상 실험으로 몇 번 확인). 최대한 손대지 않고 그대로 두면 물을 머금고 어느새 꼿꼿하게 선다. 그때 예쁘다고 줄기에 손을 대면? 그대로 콱 죽어버리겠다고 결심한 듯 금방 푹 고꾸라져. 겨울 냉기로스스로를 지키고, 꺽인 후에도 아무 도움도 필요 없다는 듯이 구는 튤립을 보면서 혼자 오래 감상에 젖었더랬지. 그래. 너는 그렇게 살고, 그렇게 꽃피우고, 그렇게 시들거라, 응원하게 되더라. 같은 마음으로 네게도 또 한번 응원을 보낼게. (52)
비올라 연주가 리처드 용재 오닐의 그래미 어워드수상 소식이 전해졌다. 세 번의 노미네이트 끝에 '베스트 클래시컬 인스트루멘털 솔로' 부문에서 수상의 쾌거를 이룬 것이다. 화면에 비친 그는 감격스러운 얼굴로 수상 소감을 말하고 있었다.(중략)
그의 수상 소감에는 놀라운 지점이 있었다. 그는 "상을 받게 되어 영광입니다"라고 말하지 않고 "비올라에 있어 위대한 날이에요"라고 말했는데 두 표현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영광스러움과 위대함이라는 단어의 어감이나 의미 자체도 다르지만 그보다는 그러한 영예를 누구의 몫으로 돌리느냐에 있어 확연한 차이가 감지되기 때문이다. 그는 영과으이 주체를 자기 자신이 아닌 비올라에게로 돌렸다. 위대하다면 그건 내가 아니라, 나의 연주가 아니라, 이 모든 것에 앞서 존재하는 비올라의 위대함이라는 듯이. (60)
며칠 뒤 '버력'이라는 단어를 만났다. 광석을 캘 때 광물이 섞여 있지 않아 쉬이 버려지는 돌멩이. 바다에 방파제를 만들 때 기초를 다지기 위해 물속 바닥에 집어넣는 잡다한 돌멩이. 정신이 번쩍 났다. 나의 하루하루가 그렇게 잡다하게 취급되는 돌멩이라면 어쩌지. 학생들 앞에선 늘 깨어 있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나는 녹화된 영상을 반복 재생한 것처럼 관성적으로 살고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71)
신비가 아니라면 씨앗이 품고 있는 독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우리 안의 가장 여린 마음에까지 독이 스며 있다는 사실을. 그때의 독은 악이 아니다. 안간힘이고 사랑이다. 인간이 제아무리 약하다 해도 인간은 저절로 강한 면이 있다. 씨앗이 품은 독이 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리라. 무력한 인간을 번번이 일으키는 일. 주저앉아도 일으키고 주저앉아도 또다시 일으키는 일. (79)
끝날 듯 끝나지 않는 하농 연주 같은 삶에서 매년 찾아오는 새해는 '전조/조바꿈'의 시간일 뿐이다. 대체로 진부하고 아주 가끔 놀라워지는 삶에서 그런 작은 의식마저 없으면 어제와 오늘을, 내일과 모레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그러니 시청역 앞 진주회관에서 콩국수를 먹지 않으면 나의 여름은 시작되지 않아요. 집 앞 담장에 흐드러진 능소화 사진을 찍어야 비로소 7월이지요. 그렇게 나만의 작은 의식의 목록을 늘여가보면 어떨까. 그렇게 나의 달력, 나의 엔딩을 상상하면서. (83)
썩게 하는 힘. 감정이든 사람이든 시간이든 썩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들이 있다. 어떤 마음들은 바로 그 순간에만 말이 된다. 오늘은 비가 왔어. (89)
인간도 인간 나름대로 저것이 진짜 미끼인지 인조 미끼인지 변별하는 능력을 연마해온 역사가 있고 적어도 한 시간쯤은 신의 낚싯대를 피할 수 있다. 그러나 정신의 검은 구멍, 거대한 허기 앞에서는 그것이 가짜임을 알면서도 덥석 미끼를 물어버리고 싶어지는 순간이 왜 없겠는가. 몰라서가 아니라 알면서도, 알기 때문에 엎질러지는 마음을 생각한다. (104)
수전 손택과 조너선 콧의 대담을 읽던 중에 인상적인 구절을 마주쳤다. "내 악마들을 빼앗아가지 말라, 천사들도 함께 떠날 테니까." 릴케의 시구라 했다. (112)
홀로였던 순간의 추위는 영원에 가까운 상흔이다. 가시처럼 박힌 기억은 수시로 따끔거리며 제 존재를 증명하려 들 것이다. (119)
이기는 경우? 물론 없다. 애초에 삶과의 싸움이란 이길 수 있는 성질의 것이아니다.
결국 내가 살아가면서 보다 성실하게 기록해야 할 것은 숱한 '실패담' 사이 간헐적으로 찾아오는 '비김의 순간들'이 아닐까. 한 발 뒤로 물러나 바라보니 이런 일들이 새롭게 다가온다. 술 만드는 공정에서 품질을 높이기 위해 '밑술'에 '덧술'을 섞는 행위. 한 번(1차 공정)으로 그치지 않고 밑술에다 곡물과 누룩을 첨가하는 2차 공정을 거치면 술맛은 더욱 깊어지고 상품 가치도 높아진다. 어느 유명 종갓집 장맛의 비결도 다름 아닌 '덧장'이란다. 오래되어 수분이 날아간 된장이나 간장에 새 장을 뒤섞는 덧장을 하면 맛과 향은 물론 영양가도 높아진다. 따지고 보면 참 단순한 방법이 아닐 수 없다. 뒤섞음! 그게 다 아닌가. 이를 삶에도 적용해본다면 어떨까. 지는 순간과 비기는 순간을 적절히 뒤섞으며 살 수 있다면 그 하루하루들, 그럭저럭 견딜 만한 인생 아닐까. (157)
그럴수록 머릿속은 점점 더 불투명해졌다. <환상의 빛>의 아내 유미코는 별다른 이유 없이, 너무나 평범했던 어느 날 밤 퇴근길, 스스로 극단적인 죽음을 선택한 남편 이쿠오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이유. 유미코에게 간절히 필요했던 것도 바로 그 이유 였으리라. 이유가 분명하고 납득 가능하다면 이렇게까지 힘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용서가 쉬웠을 것이다. 그런데 영화가 끝난 뒤에도 우리는 여전히 이유를 알지 못한다. 영화 바깥의 관객조차도 끝내 이유를 모르는 채남겨진다. '환상의 빛'이라고 에둘러 부를 수밖에 없는 그 불가해함이야말로 삶의 본질이라는 메시지였을까. (166)
'꼭두'는 상여를 장식하는 나무 조각상을 이르는 말로, 이승과 저승, 꿈과 현실을 잇는 존재다. 망자에게 길을 안내하고, 나쁜 기운을 물리치고, 영혼을 위로하는 역할을 한다. 꼭두는 언제나 선두에 있다. 꼭두새벽이 아주 이른 새벽을 부르는 말이듯이 꼭두는 언제나 맨 앞에서 길을 내고 불가능한 문을 열며 나아간다.
선두라는 말에는 겁과 용기가 공평하게 들어 있다. 꼭두도 실은 겁이 나는데 매 순간 겁보다 용기의 크기를 키우며 걷고 있는지도 모른다. 장수(將帥)는 태생이 장수인 것이 아니라 매 순간 결심하기에 장수인 것이라는 나의 시 선생님의 말씀을 기억한다. 나는 그 말을, 자신감은 영원히 생기지 않을 것 같으니 대신 믿음의 크기를 키워보자는 말로 바꿔읽는다. (167)
그때, 어디서 그런 용기가 튀어나왔는지 모르겠다. 선생님, 전 왜 이렇게 무거운 걸가요. 저도 밝고 명랑하고 귀여운 거 하고 싶어요. 어리광을 빙자해 다른 목소리에 대한 갈망을 불쑥 내비친 것이다. 그땐 정말이지 시가 너무 아프고 무거웠다. 울면서 쓰거나 쓰고서 울었다. 이렇게 망가져 있는 세상도 싫고, 세상의 미래가 내 펜에 달린 것마냥 심각했던 마음도 싫었다. 그래서 쉽게 가려고, 손쉬운 위로를 구했던 것인데... K 선생님은 단호하셨다. 그건 잘하는 사람이 따로 있겠지요. 하던 걸 하세요. (178)
'세상 그까짓 것 내가 좀 알거든!' 하는 표정으로 허리 꼿꼿이 세우고 살았으니 무엇도 새롭지 않고 무엇도 재밌지 않은 것이 당연했겠지. 그날의 질문은 나에게 '낮은 문'이 되어주었다. 통과하려면 일단 고개부터 숙여야 한다는 점에서. (237)
글쓰기는 나무 패는 일을 닮았다. 뭔가를 쓰고자 마음먹을 때를 떠올려보라. 처음 생각은 통나무에 가까울 것이다. 그 통나무는 분명 생각의 모태지만 땔감으로 바로 쓸 수는 없다. 땔감이 되려면 우선 통나무를 톱으로 잘라 들어 옮길 수 있는 크기로 만들고, 다시 그것을 여러 번의 도끼질로 쪼개 장작으로 만들어야 한다. 아궁이에 들어갈 만한, 불이 잘 붙을 만한 형식을 갖춰야 한다. 도끼질이 서툴고 능숙하고는 중요하지 않다. 각자가 가진 힘과 믿음의 세기로 내려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이 일련의 과정은 언제나 '모탕'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모탕은 나무를 패거나 자를 때 밑에 받쳐놓는 나무토막을 말한다. 모탕이 있기에 우리의 글쓰기는 토대를 얻는다. 안정감과 탄력을 얻는다. 결국 모탕은 '좋은 질문'에 다름 아니다. (240)
아주 환한 날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작지만 분명한 놀라움이 그녀의 늙고 지친 몸 깊은 곳에서부터 서서히 번져나갔다. 수없이 많은 것을 잃어온 그녀에게 그런 일이 또 일어났다니. 사람들은 기어코 사랑에 빠졌다. 상실한 이후의 고통을 조금도 알지 못하는 것처럼. 그리고 그렇게 되고 마는 데 나이를 먹는 일 다위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36)
빛이 다가올 때
게다가 달궈진 불판 위에 올려놓은 듯 마음이 늘 요란하게 달싹이던 당시의 나와 달리 언니는 얼마나 한결같이 차분해 보였던지. 나는 얼어붙은 겨울호수처럼 고요한 언니의 어른스러움을 항상 동경했다. (42)
하지만 언젠가부터 나는 그곳을 매우 비좁다고 느끼기 시작했고, 그곳에 앉아 "오경등영조잔장/욕어별리선단장/낙월반정추호출/행화소영만의상" 따위으 엄마 아빠가 해석할 줄 모르는 한시를 내가 읽고 있다는 것, 누군가에게 편지를 쓸 때마다 '잘 지네고 있냐?'라고 쓰는 아빠나 포스트잇에 '시게 약 살 것'이라고 적는 엄마는 내게 설명해 줄 수 없는 to 부정사와 동명사의 차이를 내가 배우고 있다는 사실을 아주 예민하게 느끼기 시작했을 것이다. 밖에 소나기가 떨어지거나 눈송이가 날리기 시작하면 나는 세탁소의 유리문 너머를 영화 스크린 보듯 바라보며 조용히 it's starting to rain이라거나 it starts snowing이라고 발음해보곤 했다. 묘한 슬픔이 뒤섞인 우월감을 느끼며. 많은 이들이 그렇게 자기의 부모를 딛고, 새로운 세계를 향해 앞으로 나아갔다. (52)
눈이 내리네
이따금 선배들이 무리 속에 섞이기도 했다. 그때 함께하는 건 대체로 한 학번 차이가 나는 남자 선배들이었다. 대단히 어른인 척하고, 외국 맥주 브랜드에 대해 알려주고, 성적에 후한 교수들의 정보를 주던. 선배들은 답사할 장소에 대한 스터디를 주도하고 동아리 내 규율을 강조했는데, 동기 중 재수한 남자애들은 그들이 선배 행세를 할 때마다 뒤에서 비웃었지만 다혜는 남녀가 섞여 늦게까지 어울린다는 사실만으로 은근히 흥분해 있었다. 유쾌한 분위기, 떠들썩한 소음. 이상주의적인 가치와 낭만적인 몽상의 범람. (184)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러고 나서 주미는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에 대해 최악을 상상하며 얼마나 쓸데없이 인생을 낭비하며 살고 있는지 마침내 깨달았다고 덧붙였다. 어떤 얼굴로 다가올지 짐작할 수조차 없는 미래와 끝에 대해서 대비할 능력이 마치 우리에게 있는 것처럼 헛되게 믿으면서. 그렇게 말한 후 우리는 주미의 이제 일곱 살이 된 아이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한없이 잔혹한 인생이 얼마나 변덕스러운 방식으로 우리에게 또다시 기쁨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해 조금 더 말했다. (245)
해설
너무 조용하고 평화로운 일상은 불순물이 제거된 삶의 한 양태일 수 있다. 허전함과 쓸쓸함의 이면일 수 있고, 허무의 가면일 수도 있다. 허무는 텅 빈 마음의 공터, 기대가 자랄 수 없는 말라버린 땅, 바라는 것을 이루기 위해 움직이는 과정이 아니라 충분히 이루었다고 생각되는 반환점 이후부터 침입해오는 인생 뒷면의 감정이다. 이게 전부인 걸까. 더는 없는 걸까.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모습으로 살고 있을 때 허무라는 불청객이 찾아올 수 있다. 허무가 무기력에 앞서 동반하는 것은 캄캄한 상실감이다. 의미를 나눌 수 있는 대상이 사라질 때, 조용하고 평화로운 길목이야말로 허무를 위해 마련된 지름길이다. (중략) 분명 아무 일도 없는데, 심지어 모든 것이 괜찮은데, 도통 좋은 것이 없다. 그러다 평화로운 겉모습과 공허한 속마음이 충돌하는 순간이 온다. 그 순간 돌출되는 어긋남은 안정된 허무 속에서 목격되는 기이함의 정체다. 백수린의 소설은 별일 없이 산다는 말의 장막을 살며시 들춘다. 그런 뒤 사소해 보이지만 결국엔 중요해지고마는 결핌들과 가만히 눈 맞춘다. (249)
앵무새가 떠난 후 여자는 삶의 다른 길목에 서게 될 것이다. 현재로 넘쳐 온 과거의 기억들을 대면하고 살까.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마음의 서랍 속에 넣어두고 잊어버린 채 살가. 인생이 그렇듯 소설에도 답이 없다. 답은 알 수 없지만, 다시 사랑한 대가로 다시 상실의 아픔을 겪고 있는 그녀, 옥미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삶에 쉽게 만족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허무에 적응하기 위해 최적화된 스케줄을 칼같이 지키며 성실하게 살고 있으면서도 정작 인생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은 한마디도 떠오르지 않는 하루보다는, 식탁 위에 멍하니 앉아 이런저런 잡념 속에서 서술어를 고치며 눈물 흘리는 하루가 더 '사랑'에 가까운 날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코 '작은' 차이가 아니다. (253)
허무는 현재를 간과한다. 특별하지 않은 현재 속에서 지금 이 순간은 점점 더 멀어지고 희미해져간다. (253)
지난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다. 서로를 할퀴었던 상처도 사라지지 않는다. 개의 다리가 보여주듯 상처가 없었던 지난 시간은 결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두 사람이 그 개의 활기를 보고 환해졌던 것은, 되돌아가지 않아도 괜찮아질 수 있게 하는 사랑의 힘을 봤기 때문이다. 회복이란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과거 지향이 아니라 상처를 안고 새로운 상태로 나아가는 현재 지향이다. 검은 개의 셋뿐인 다리는 매일 같이 함께 산책하는 부부의 사랑 속에서 더 튼튼해졌을 것이다. 세 개의 다리는 없는 한개의 다리를 보여주는 빈자리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사랑을 증명하는 충만한 자리다. (2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