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과정이 비단 글씨체에만 일어나는 일일까?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작가들의 문체를 닮고 싶어 했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개성을 훔치고 싶어 했는지. 내가 가질 수 없는 수많은 것들이 얼마나 내 마음에 꼭 들었는지. 수많은 실패 끝에, 나는 오늘도 나밖에 되지 못했다. 어쩌면 당연하게도. 어쩌면 다행스럽게도. 1
그들은 우리가 꾸며 놓은 집을 보는 순간, 단숨에 우리의 선언을 이해했다. 그때 알았다. 원하는 대로, 내 취향대로 살아버리는 것은 그 어떤 말보다 강력한 선언이라는 것을. 내 인생을 선언할 권리는 결국 나에게 있다는 것을.
내 취향대로 살아버리는 것.
정말 밑줄 쫙쫙 긋고 싶었던 구절. 너무너무 맘에 와닿아 두근두근하기까지 하는 말.
내가 정말 마땅히 존중하는 '취향'과 책임감을 오롯이 짊어지며 독립적인 '살아버린다'는 말까지. 어느 하나 안 좋은 곳이 없는 예쁜 말.
그렇다. 우리에겐 언제나 멋진 언니들이 있었다. 물론 우리가 2학년이 되었을 때는 내 친구들을 보며 소리를 지르는 1학년들이 생겨났다. 이해할 순 없었지만, 불과 1년 전의 나를 생각하면 이해 못할 것도 없었다. 여고생들에게는 멋진 언니가 필요했으니까. 멋진 언니들을 보면서 우리는 무심하게 멋 내는 법을 배웠고, 세련되게 말하는 법을 배웠고, 똑부러지게 행동하는 법을 배웠다. 3
나의 대학교 1학년이 조금은 더 슬펐던 이유. 그래도 진은이언니를 만나고 어느 정도는 갈증을 해소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늘 좋은 점은 있기 마련.
이 부분을 읽고 나의 사랑 영아언니가 생각났다. 언니따라 머리도 자르고, 살도 찌고 싶고 등등. 타인이 어떻게 내 마음을 이렇게나 잘 표현해낼 수 있을까.
질문들 앞에 서면 생각이 많아진다. 어떤 나를 골라야 하지? 진짜 나는 어떤 모습이지? 그 모든 나 사이에서 힘겹게 외줄타기를 하며 다들 겨우 '나'로 살고 있으니까 말이다. 4
모두가 나의 조각들인 것이니까.
여러분의 심장을 사랑하십시오. 그것은 여러분이 받은 상이니까요.
학생의 세계에서 직장인의 세계로 옮겨간다는 건 단순히 돈을 버는 세계로 편입한 것이 아니었다. 그 돈이 허용하는 수많은 경험들의 세계로 동시에 입장하는 것이었다. 3천원짜리 학교 앞 밥집에서 1만 2천원짜리 파스타의 세계로, 천원짜리 커피에서 5천원짜리 아메리카노의 세계로 물 흐르듯 입장했다. 못 먹던 것을 먹기 시작했다. 안 보이던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안 들리던 것이 들리기 시작했다. 6
겁이 덜컥 났다. 불과 1~2년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넓어진 취향으로 누군가의 취향도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뾰족해진 취향으로 누군가를 콕콕 찌르는 사람이 되면 어떡하나. 이러다 나중에는 누군가 고수를 못 먹는다고 말하면, 누군가 내가 좋아하는 치즈를 한 입만 먹고 뱉어버리면, 누군가가 내가 좋아하는 브랜드가 별로라고 말하면, 그 사람과 나는 안 맞다, 라고 섣불리 결론 내려버리면 어쩌나. 그러다 결국 "도대체 나와는 맞는 사람이 없어'라고 습관처럼 말하는 사람이 되어버리면 어쩌나. 나는 내가 걱정되었다.
하루라도 마음이 말랑할 때 누군가를 만나면 좋을 것 같았다. 나도 이제 막 고수를 좋아하기 시작했으니, 그 누군가에게 "고수 한번 먹어볼래요? 저도 엄청 겁냈는데, 먹어보니 괜찮더라고요"라고 말할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 서로를 감싸며 취향을 같이 만들어갈 수 있는 어떤 사람. 7
어쩜 이렇게 낭만적인 말이 있을까. 그렇게 서로를 감싸며 취향을 같이 만들어갈 수 있는 어떤 사람. 세상에..
나랑 함께 서로 감싸며 취향을 같이 만들어갈 수 있는 사람..
"우리 부부는 서로 말 거의 안 해. 할 말이 없어"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술 한 잔을 처방으로 내려주고 싶어진다. 평소에 마주앉아 이야기를 안 하기 때문에 더 할 말이 없는 관계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마주앉아야 한다. 술 한 잔을 앞에 두고. 술이 아니라면 차를 앞에 두고. 마주 앉아야 한다. 그리고 별 거 아닌 오늘 하루를 말해야 한다. 당장은 별 거 아닌 것처럼 보일지라도, 쌓이면 견고한 '우리'가 되니까. '우리'는 함께 즐거울 것이다. 함께 어려움을 넘을 것이다. 오해가 쌓일 틈은 없을 것이다. 서운함이 쌓일 겨를도 없을 것이다. 우리가 마주앉아 오늘을 이야기하기 시작한 이상. 8
마주앉아서 오늘을 이야기한다.
소소하고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내 온 몸으로 겪은 오늘의 하루를 타인과 섞는 시간. 크고 작은 일들의 감상이 일치하면서 신뢰도 쌓인다고 생각한다. 차곡 차곡.
싫어하는 사람에 마음 쏟지 말기. 싫어하는 것에 애쓰지 말기. 그것을 싫어하느라 에너지를 낭비하지 말기. 물론 이게 말처럼 쉽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어렵다고 포기해버리기엔 내가 너무 아깝다. 술 마실 때에도,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 있을 때에도, 멍하니 있을 때에도 아깝지 않은 내 인생이지만, 싫어하는 감정에 내 인생을 낭비하는 것만은 참으로 아깝다. 물론 그 사실을 나도 자꾸 까먹고 자꾸 분개하고, 자꾸 화를 내고, 자꾸 발을 동동 구른다. 그때마다 스스로에게 말해준다. 자꾸자꾸 말해준다. '저 사람에겐 마음 한 톨도 아깝다'고. 9
스물여섯 살의 어린 나는 그게 도대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그때는 몰랐다. 어떻게 선배의 남편은 그렇게 말할 수가 있지? 어휴, 선배 힘들겠어요. 그걸로 끝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말의 문제점을 십이지장부터 새끼발톱까지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집안일을 도와준다'는 어휘를 쓰는 사람들을 만나면 한숨부터 나온다. "요즘은 집안일 안 도와주면 큰일 나죠. 남자가 살기 더 힘들다니까요." 혹은 "그래도 우리 남편은 집안일 잘 도와주는 편이에요." 남자도 여자도 일상 속에서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쓰는 말. 그 말에 숨겨진 폭력.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것일까? 10
십이지장부터 새끼발톱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에휴 !!! ㅋㅋㅋㅋㅋ뭘 도와주냐!! 그리고 대체 집안일에 칭찬이 왜 필요하단 말인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단한번도 나는 내가 만든 설거지거리를 설거지를 했다고 칭찬을 받은 적이 없단 말이다~~~~
개인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즐겁다. 이 혼돈의 시기를 살게 되어서. 어쨌거나 이 혼돈의 시기가 다 지나고 난 다음에는 이전과 같지 않을 테니까. 아무도 그 이전의 시기로 다시 돌아가지는 못할 테니까. 그때의 세상은 지금보다는 나을 테니까. 나을 수밖에 없으니까. 그래서 힘들더라도, 답답하더라도, 더디게 보이더라도, 분노가 머리카락 끝까지 뻗쳐오는 날에도 끝까지 즐거울 셈이다. 기를 쓰고 즐거울 셈이다. 보란 듯이 끝까지 즐겁게 싸워볼 셈이다. 11
손에 잡히지 않아서, 이해할 수 없어서, 다 이해되지 않아서, 그래서 아름다운 것들이 세상엔 있다. 효율로만 평가하려고 하는 이 세상에 비효율로 남아 있어서 고마운 것들. 우리를 간신히 인간답게 만드는 것을 사실 그런 비효율들이다. 너무 쉽게, 너무 자주, 너무 무심히, 모든 것에 효율을 들이대는 이 세상에서 누군가는 단 한 번의 심벌즈를 위해 한 시간 넘게 준비하고 있고, 누군가는 단 한순간의 아름다움을 위해 무대를 움직이고 있고, 또 누군가는 0의 존재가능성을 밝히느라, 우주 탄생의 가설을 세우느라, 한 문장으로 우리를 구원하느라 밤을 새우고 있다, 라고 생각하면 마음 어딘가가 편안해진다. 따뜻해진다. 12
"저 사람 완전 부끄러울 것 같지 않아?"
"왜?"
"오늘 우리 앞에서 완전 자기가 무능하다고 다 이야기해버린 셈이잖아."
"아예 그런 생각 자체를 안 하는 사람일걸?"
아예 그런 생각 자체를 안 한다라. 그건 정말 생각해본 적도 없는 옵션이었다. 나의 거울에 대한 믿음은 조금씩 금가기 시작했다. 믿을 수 없게도, 거울이 아예 없는 사람들이 간혹 내 앞에 나타나기도 했던 것이다. 명백한 자기 잘못 앞에서, 자신을 가장 불쌍히 여기는 사람을 보면서는 인간의 자기방어 기제에 대해 탄복했다. 저 상황에서도 자신을 가장 먼저 보호하다니. 인간이란. 13
그렇다. 마침내 여행지에서의 시간이 시작된 것이다. 별 일 없이 흘러가는 일상에서의 시간과 달리, 별의별 게 다 별 일인 여행에서의 시간. 어제의 모양과 오늘의 모양은 완전히 다르다. 내일의 모양은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또 다를 것이다. 일상에서는 아무 고민 없이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갈아 타고, 일을 하고, 점심을 먹고, 또 일을 하고, 아무런 방황도 없이 집에 도착했다. 매일의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리하여 시간은 화살로 갔다. 정신 차려보면 한 달이 후딱 가 있는 경우가 허다했다. 하지만 이제부터 시간은 연결이 아니라 분절이었다. 매 순간, 나의 선택에 따라 제각각의 시간은 제각기 살아 움직일 것이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오롯이 내 것이 될 것이다. 물리적인 거리는 물론이거니와 감정적으로도 나는 아주 먼 곳을 여행하게 될 것이다. 정직한 시간이 될 것이다. 많이 걷고, 많이 말하고, 해와 함께 뜨고 지는 날들이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 기어이 여기까지 온 참이었다. 14
내가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 정말 정직한 시간들. 시간의 흐름이 온 몸을 관통하는 느낌.
결국 이또한 내 취향.
'::: >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게 무해한 사람 :: 최은영 (0) | 2018.09.06 |
---|---|
The Giver :: 로이스 로리 (0) | 2018.09.03 |
달콤한 작은 거짓말 :: 에쿠니 가오리 (0) | 2018.06.04 |
회색 인간 :: 김동식 (0) | 2018.05.31 |
우먼카인드 vol.2 (0) | 2018.05.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