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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껍질 속 사랑

이해심 많은 여인이어야 했다. 절대 질문을 해서는 안 된다. 질문을 해봤자 비참해지는 건 나다. 가게 주인 아주머니에게 바구니를 건네주며 말했다.

"죄송하지만, 이것 좀 그냥 놓고 갈게요."

외국 생활을 오래 했다는 주인아주머니는 친절하고 쿨하게 별일 아니란 듯이 내 바구니를 받아들었다. 그게 나를 더 슬프게 만들었다. 주인아주머니의 직업적인 친절처럼 나도 그에게 애인이라는 직업적 친절을 발휘할 수는 없을까. [각주:1]

 

 

 


열정의 끝

그런 그의 모습에서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살려는, 자기밖에 모르는 남자를 봤다. 그런 남자가 자신을 잊고 잠시나마 여자에게, 아니 나에게 에너지를 쏟았다. 그때의 느낌을 경험해본 여자라면 그것이 얼마나 달콤한 유혹인지 알 거다.

그 저릿한 충만감에 취해 한때 나는 그가 부르면 언제라도 달려갔다. 아무 때나 만날 수 있게 준비한 채 그를 기다렸다. 그의 스케쥴에 맞춰 살고 있는 자신이 바보 같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 일보다, 내 친구보다, 내 미래보다 그가 더 중요했다. 맹목적이고 찰나적인 열정에 도취해 살던 시절이었다. [각주:2]

 

 

 


크리스마스이브에 생긴 일

수현은 이런 남자와 사느니 혼자 사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았다. [각주:3]

ㅋㅋㅋㅋ 자주 곧잘 하는 생각.

본전도 안 될 거라면 하지 말자는 생각. 내가 유독 가장 차갑게 계산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모든 여자들에겐 저마다 필요한 것이 다르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고 호정은 강조했다.[각주:4]

그래서 궁금해진다. 나는 도대체가 포기할 수 없는 단 한가지가 뭘까. 그리고 정말 그것만 있으면 나는 괜찮은걸까.

 

 

수현은 공적으로 접하게 되는 못난 남자들은 어떻게든 밟아야 직성이 풀리면서 사적으로 만나게 되는 못난 남자들은 순순히 받아들였다. 웬일인지 루저 앞에선 한없이 관대해지고 기꺼이 용서해주는 자비로운 여자가 되어갔다. [각주:5]

 

 

우진은 흔히 말하는 '좋은 남자'였다. 그와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동성 친구와 얘기하듯 편했고 늘 마시던 커피도 훨씬 맛있었다. 문제는 즐겁고 기분은 좋은데 설레지 않는다는 것이다. 편안함과 공감보다는 설렘과 낯선 이질감이 수현에게는 더 섹시하게 느껴진다.

(중략) 그렇게 잘해주고 잘 이해해주는데도 수현의 마음은 동하지 않았다. 수현은 진심으로 자신이 우진에게 푹 빠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각주:6]

 

 

 


친구 이상 애인 미만

그 따뜻한 품에 안기면서 마리는 비로소 자신이 돌아갈 곳을 찾은 듯한 안도감을 아주 오랜만에 느낄 수 있었다. 마리는 그동안의 모든 방황이 오로지 요한이 왜 필요한지 깨닫기 위한 학습 과정이었다는 생각에, 또 오버하면 안 되지 하며 마음을 다졌다. [각주:7]

내가 돌아올 곳은 여기구나 하는 안도감을 주는 품. 그 품이 가져다주는 신뢰는 이루 말할 수 없다. 너무 당연하게 돌아오게 되는 집같은 품.

그래서 참 어려웠고 어렵다.

세상이 무너질듯이 힘든 날에는 어김없이 그 품이 떠오르기 때문.

 

 

 


작가의 말

그녀들은 사랑 앞에서 드라마틱했다. 그저 행복해지고 싶을 뿐이라고 하면서 감정과 이성 사이에서, 욕망과 체념 사이에서, 타인의 시선과 자신의 진심 사이에서 흔들렸다. 뜨거운 마음이 차가운 머리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 불안해했고 그것이 드러날까 시니컬하게 자기변호를 했다.

어렵사리 사랑을 시작해놓고는 머지않아 다가올지도 모를 이별을 예감하면서 스스로 알아서 건조해지고 서늘해져갔다. 그렇지만 애써 숨기려 해도 사랑 앞에선 뼛속 깊이 약해지고 낭만적으로 바뀌었다. 이런 그녀들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녀들은 물었다. 사랑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우리들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거냐고. 해답을 알면서 묻는 그녀들에게 나는 아무런 대답을 줄 수가 없었다. 나의 우발적인 충동에 대한 답을 찾아내기 위해 내가 스스로 용기를 내 소설을 쓰기로 한 것처럼, 그녀들도 자리를 털고 일어나 스스로 행동을 일으켜야 한다고 말해주고 싶을 뿐이다.

설렘과 열정이 머물다 지나가고 이별이 찾아오기까지 그 묵직한 시간들을 정면으로 마주해야 한다고. 더 혹은 덜 사랑한 자의 무모함, 잔인함, 치사함, 처연함, 비루함 같은 것들을 온몸으로 겪어내야 한다고.

이 소설은 사랑이라는 거부할 수 없는 삶의 과정을 통해 성장해 나가는 그녀들의 이야기다. 그것은 불완전해서 더 아름다운 나와 그녀들과 당신의 슬픈 자화상이기도 하다. 더불어 우리 사랑스런 남자들도 함께 조금씩 철이 들겠지. [각주:8]

 

 

임경선님을 너무 좋아하다 못해, 예전 작품들까지 전부 읽어버리고 있는 나. ㅋㅋ

이런 나를 아시면 무서워하시려나. 근데 그렇게 해서라도 경선님의 생각을 듣고 싶고 알고 싶고, 그것을 두고 나 스스로도 생각해보고 싶었다.

참 신기하다. 경선님의 책을 읽으면 꼭 언젠가 내가 했던 경험들을 마주하게 되고, 또 언젠가 내가 친구에게 털어놓았던 고민들을 마주하게 된다.

그 이야기들을 세세하게 그려내는 것은 물론, 경선님만의 해답과 생각을 덧붙여주기 때문에 내가 그녀의 글을 사랑하는 것일지도.

 

요즘은 그런 생각이 든다.

어쩌면 나야말로 결혼을 꼭 해야 한다, 라고 생각하는게 아닐까. 하고. 그리고 또 나야말로 결혼을 급하게 바라보는 게 아닐까.

더 늦기 전에 정말 좋은 사람을 만나서 평생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 말이다.

그래서 자주 조급해지고 조급한데에서 서운해지고 서운한데에서 마음이 건조해져 간다.

그렇게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아마 이런 마음인걸까 나? '이사람 아니라면 어서 빨리 다음의 좋은 남자를 만나야 해.'

그래서인건지 점점 줄어드는 것 같다. 내가 상대방을 이해할 시간을, 기회를. 부족하고 미흡한 부분을 다듬어 보완'해나갈' 사람이 아니라, 부족하고 미흡한 부분을 보완'한' 사람을 찾고 있다. 나도 모르게.

그리고 어딘가에는 꼭 그런 사람이 있을 것 같은 생각에.

 

누군가의 말이 정말 맞다.

내가 나를 잘 모르는데, 어떻게 사랑할 사람을 찾고, 알아보느냐고.

맞다 맞아.

그렇다면 내가 나를 잘 아는 게 우선인데. 쉽지 않다. 나는 시시때때로 변하는 것 같으니까 흑흑.

 

오늘 본 영화 <어쩌다 로맨스>에서

주인공 냇의 말과 모습이 반복적으로 떠오른다.

"I.. I... I love.. I love.. ME! I LOVE ME!!!!! YES I LOVE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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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느 날 문득, 지님보다 지니지 않음이 편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든 것을 다 들고 다닐 수는 없으니까 필요한 것을 비교적 고루 들고 다닌다고 생각하기보다 아무것도 없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편이 훨씬 가뿐하지 않은가. [각주:1]

 

내 집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을 때의 그 해방된 느낌과 행복, 평온함은 말로는 다 할 수 없다. 따끈한 물의 질감, 그리고 피어오르는 김의 냄새. 나는 여행을 좋아하지만 어디를 가든 집의 욕실을 그리워한다. [각주:2]

정말 ㅠㅠ

언젠가 나도 꼭 욕조를 살 예정.

몇살때부터인지는 잘 기억이 안나지만, 자연스럽게 욕조 목욕이 좋아졌고 그래서 꼭 여행을 가서는 욕조에서 오래간 목욕을 한다. 온천을 좋아하는 것도 비슷한 이유.

따뜻하고 노곤하고 생각을 정리하기에 정말 제격이라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케이크라는 말에서 환기되는 달콤하고 조촐한 행복의 이미지다. 그리고 그것은 실물로서의 케이크 하나와는 오히려 무관하다.

"뭘 좋아하나요?"

하고 물으면 주저 없이,

"케이크."

하고 대답할 수 있는 그런 단순함으로, 나는 살아가고 싶다. [각주:3]

 

한편 아무리 짧은 여행이라도 반드시 있어야 하는 책과 향수, 목욕할 때 머리를 묶는 핀은 정말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생활을 이런 사소한 것에 의존하고 있구나, 하고 절실하게 생각한다. [각주:4]

ㅋㅋㅋㅋㅋㅋ 격한 공감!

나도 어디를 가더라도 꼭 책과 목욕할 때 머리를 묶는 핀과 앞머리를 고정할 핀을 챙긴다. 충전기를 안챙기거나 지갑을 안 챙긴적은 있어도 이 두개를 깜빡한 적은 없다. ㅋㅋㅋㅋ 정말 생활을 아주 사소한 것들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욕심이 지나쳤다는 생각을 또 한다.

 

 

읽던 책에서 꽃이나 잎이 스르륵 흘러 떨어지면, 정말 놀란다. 상상 이상으로 소스라친다.

책이란 시공을 초월하는 것이므로, 읽는 동안에는 그 세계에 푹 빠져 있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꽃이나 잎은 마치 다른 세계에서 건너온 것처럼 기묘하게 보인다. [각주:5]

이 부분을 읽고 2017년 여름-가을쯤이 생각났다.

여느날처럼 연신내 알라딘의 중고서점에서 책을 샀고, 꽤 시간이 지나 책을 읽으려고 폈는데 잎이 스르륵.

정말 예쁘게 바래있고 말라있던 잎.

꼭 누군가가 내게 준 선물 같았다. 그리고 궁금했다. 주인은 누굴까, 언제 어떤 마음으로 잎을 넣어둔걸까, 잎을 넣어둔걸 알지만 그대로 책을 되판 것일까 등등.

 

 

그런 데다 택시 안이라는 게 또 문제다. 그 협소하고, 생활 감각이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있는 공간. 밤거리를 이동하는 무수한 차들 가운데 한 대. 나와는 전혀 무관한, 운전사란 타인의 인격과 인생. 그리고 운전사와는 아무 관계 없는, 나란 손님의 감정과 그날 하루. [각주:6]

 

프렌치토스트가 주는 행복은 그것이 아침을 위한 먹을거리이며, 아침을 함께할 만큼 소중한 사람이 아니면 같이 먹게 되지 않기 때문이리라. [각주:7]

 

자장가란 참 신기한 것이다. 어른이 된 나는 이제 막 자려는 참에 노래를 불러대면 시끄러워서 잠이 들 것 같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어린아이들에게는 기분 좋게 들린다면, 그것은 역시 어린 아이들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다 기껏 노래를 불러주는데 들어는 줘야지, 하는 공연한 신경을 쓰지 않는 덕분일 것이다. 그런 것을 천진함의 미덕이라 해야 할까. [각주:8]

비슷한 맥락에서, 내가 늘 우리 아이들에게 배우는 이유. 정말 깨끗하고 예쁜 마음이 가득하니까. 매번 그 마음들이 나를 놀라게 하니까.

 

 

문화와 풍경이 다른 외국에 즐겨 나가고, 다르면 다를수록 신선하고 흥미롭다. 그런 한편, 돌아가는 길, 대도시 주변의 드넓은 공항에 도착해 번듯하고 충실한 화장실과 커피숍을 보면 왠지 안도감을 느낀다. 그런 일상적인 안도감이 좋으면 굳이 여행할 게 뭐 있느냐고 나무라고 싶은 마음이 내 안에 조금은 있기에, 공항에서 안도하는 나 자신이 늘 한심스럽다. 그 속을 알 수 없는 장소에 가고 싶어 떠나왔는데, 그 속을 알 수 있는 장소에 도착하자 안도하다니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각주:9]

ㅠㅠ나다. 나는 대도시가 주는 안락함이 좋았고, 그래서 지난 유럽여행도 바르셀로나와 특! 히! 마드리드가 좋았다. 리스본도.

작은 도시도 물론 좋지만, 며칠이 지나면 조금은 갑갑? 답답?하게 느껴졌다.

나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운전면허가 있으니까 지금 당장 핸들을 잡아도 법률 위반이 아니다. 아무도 나에게 뭐라 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는 자신이 놀라워, 거의 어이가 없을 정도다. 놀이 공원에 가서도 미니카 하나 타지 못했던 아이였는데, 그리고 그 무렵의 나와 지금의 내 운동 능력에 별 차이가 없는 듯한데, 40년 가까이를 살다 보니 어쩌다 운전면허를 따고 만 것이다.

케이크 가게에 들어가서도, 진열된 케이크 가운데 어떤 것이나 얼만큼이든 사도 괜찮다고 생각하면, 그때마다 놀랍다. 속에서 기쁨이 뭉글뭉글 피어오른다.

절대 돈의 문제는 아니다. 케이크를 스무 조각씩 사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고,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 주위의 눈치를 살피며 움찔거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 아마도 다른 사람들은, 손님이 꽤나 많이 오는 모양이지, 하고 상상할 것이다.

모르는 사람이 있는 곳에서 움찔거리지 않아도 된다는 건 참 마음 편한 일이다. 자유를 그렇게 정의해도 좋지 않을까 싶을 만큼.

운전을 하든 말든, 케이크를 몇 개 사든, 다 내 마음이란 사실이 때로 놀랍고, 실제로도 놀란다. 아직도 그 사실에 충분히 적응하지 못한 것이다.

이런 말을 당당히 하는 것은 물론 부끄러운 일이리라. 하지만, 역시 아직은 익숙하지 않다.

복잡한 전철을 탔을 때면 간혹 생각한다. 모두들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어른처럼 행동하고 있지만, 사실 과거 어느 때에는 모두 어린애였다. 거짓말을 하고 투정을 부리고 울고 떼를 쓰고 목욕을 싫어하고 잠자다 오줌을 싸고 이를 닦지 않는 어린애였다. 그런 생각을 하면 신기하면서도 끔찍하다. 말이 통하는 어른 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말이 통하지 않는 어린애가 성장했을 뿐이다. 그러니 믿을 수 없다.

어린이에게는 세계가 온통 불합리하다. 내게는 그 시절의 기억이 아직도 절절하게 남아 있다. [각주:10]

내가 이 책을 사길 잘했다는 생각을 하게 한 마지막 글.

그리고 역시 에쿠니 가오리구나 했던 부분이기도 하다.

정말 나는 올해 어엿한 스물 여섯인데, 저엉말 믿기지 않는다. 아니 믿을 수가 없다. 흑흑.....

나는 아직 스물 셋, 혹은 스물 넷 같은데.... (혹은 스물 하나?)

 

유난히 기억이 많았던 나이의 나로 오래 기억되는 것 같다.

 

정말 신기하면서도 끔찍하다. 말이 통하는 어른 같은 얼굴과 행세를 하고 있지만, 나는 그저 말이 통하지 않는 어린애가 성장했을 뿐이다.

 

그래서 또 아이들에게 쉽게 화내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쉽게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또 아이들에게 나이와 직위를 이유로 권위를 부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뭐 적어도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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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것은 황홀하게 나를 바라보던 너의 눈빛을 기억하기 때문이다.[각주:1]

 

해인은 유진과 이마를 맞대고 두 눈의 표정을 읽어보려 했지만 말 안 듣는 아이처럼 그녀는 고개를 저쪽으로 돌려버렸다. 눈 아래의 애교살은 벌겋게 부풀어 올랐다. 유진은 다른 남자에게 지독한 열정을 품었음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각주:2]

 

"해인에게 말하고 나면 이해받는 느낌이야."

"너라면 뭔가 안심이 되고 말하고 나서 마음이 정리가 돼."

"해인은 입이 참 무거워."

나중에 깨달은 사실이지만 이 세상의 여자아이들이란 그저 자기 얘기를 진지하고 참을성 있게 들어주는 사람을 간절히 필요로 할 뿐이었다. 불행하게도 또래의 남자 아이들은 대개 그럴 만한 인내심이 없었다. 착각도 심했고 손도 제자리에 가만히 두질 못했다. [각주:3]

그점에서 네가 어쩌면 내가 생각하기에 여전히 그 누구보다 훌륭한 이유.

 

"너는 정말 단단하고 강한 사람이야. 내가 너의 그런 점들을 얼마나 좋아하고 대단하다고 생각하는지... 모르지?"

해인은 침대 머리맡으로 옮겨 앉아 엄마가 아이에게 하듯 안나의 볼록 튀어나온 이마 위에 손을 갖다 댔다.

"난 약한 곳 투성이야. 네가 그렇게 볼 뿐이지."

"자신의 약한 부분을 인정하니까 강한 건데? 너의 약한 모습, 얼마든지 내게 보여줘. 친구로서... 너를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나 더 깊이 알게 되면 이상한 애일지도 모르는데?"

안나가 눈을 치켜떴다.

"괜찮아. 사람들은 다 조금씩 이상해. 그래도 그 사람을 정말로 좋아한다면 그 사람의 가장 약하고 이상한 부분을 좋아해야 하는 거 아닐까?"

안나는 왠지 가슴이 벅차올라 해인을 자기 품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그의 목을 두 팔로 감아 힘껏 끌어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의 목덜미에서 그리운, 살아 있는 살 냄새가 났다.

"힘 나. 고마워. 잘할게. 좋아해. 많이."

안나는 두 눈을 감고 잠시 그대로, 조금 더, 해인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각주:4]

내가 좋아하는 것.

꼭 안겨서 그사람의 목덜미에서 나는 냄새를 맡는 일.

그래서 안아달라고 나는 많이 말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매번.

 

엄마에게 누구냐고 물으니 그냥 친구라고 둘러댔다. '그냥'이 무슨 뜻이냐고 다시 묻자 '그냥'은 정말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 쓰는 말이라고 했다.[각주:5]

 

"해인아, 아까는 내가 잘못 말한 것 같아. 평소의 너답지 않은 지금의 네가 궁금해. 네가 나한테 했던 말 기억나니? 약하고 이상한 모습 보여줘도 괜찮다고 한 거. 사람을 정말로 좋아한다면 그 사람의 그런 부분을 좋아해야 하는 거라고 했잖아. 그러니까 말해줘, 너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제발 나한테도 물어봐줘,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각주:6]

 

 

결혼과 달리 연애는 언제고 쉽게 떠날 수 있었기에 불안해하는 여자들이 많지만 어차피 어떤 관계도 영원할 수는 없다. 상대가 내 곁을 떠난다 해도 그렇게 한때나마 서로를 깊이 사랑하면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 그 이상 인생에서 무엇을 더 바랄 수 있단 말인가. [각주:7]

 

"다른 딸내미들 보면 친구처럼 엄마한테 힘든 일을 상담하기도 하던데 우리 딸은 너무 똑 부러져서 힘든 일도 없나봐?"

정인이 그렇게 말하면 안나는 그저 빙긋 웃었다.

"엄마는 엄마지 친구가 아니잖아. 정확히 뭘 원하는 거야. 친구? 아니면 엄마?"

정인은 바보처럼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야 자신이 되레 상담하는 딸처럼 굴어서 정작 딸이 자신에게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각주:8]

 

 

 

 

작년 10월쯤인가 11월쯤인가.

임경선님 책이라서 무조건 집어들었다가 혼난 책.

처음에 너무너무 힘든 이야기들로 가득한 이 책을 나는(그때의 나는) 소화하기가 힘들었고, 덮어두었다.

한참 시간이 흐른 오늘에야 다 읽었다.

그땐 이 책을 읽기가 왜 그렇게 버거웠는지.

살아가면서 있을 법한 이야이고, 누구나 겪는 이야긴데,

사실은 인생 대부분의 일들이 그렇다.

누구나 겪는 이야기고, 또 흘러갈 일들.

나의 경우에서만 유달리 의미있고 가치로운게 아닌 일들.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은 힘이 덜어지고 가벼워진다 몸도 마음도.

 

왜 그렇게 진심과 깊이에 집중했냐고 하면, 아마 짧지만 겪었던 나의 경험들 때문이겠지?

적당함에서 주는 위로가 있고 단단함이 있겠지만 그 뒤를 따르는 후회를 나는 지독히도 겪었기 때문.

 

오늘도 여러명의 네가 생각난다.

너는 이제는 정의할 수가 없다. 아마 초반에는 지금과 비슷했던 것 같다. 후반의 너에게서는 절대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지만. 그래도 너라면 시간은 걸려도 깊이 사과했을 것이다. 사실 나는 그 시간들 사이에서 상처받고 더 속상해했었지만, 미안하다는 너의 말에 또.

또 너는 그래도 감정에 솔직했다. 그게 내가 너에게서 가장 최고라고 생각하던 부분이기도 했고. 그래서 그때 그때의 감정을 미뤄두지 않았다. 늘 감정에 충실했고 솔직했다. 그래서 너라면 오늘 같은 일은 절대 하루를 넘길 수 없다며 얼굴을 마주했을 것이다. 그게 너의 큰 장점이었고 우리를 이어주었다.

 

너라면, 이라는 가정이 얼마나 의미없는지.

사실 전혀 다른 사람이기 때문에 같은 행동을 기대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너라면, 가정에는 의미가 없다. 고 하기에는 다른 의미의 어떤 것이 있다.

그건 나의 반응? 나의 행동 양식에 대한 것이겠지.

이런 때, 저런 때 나의 반응들을 되돌아보면서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되고

그때와 비교해 나는 더 나은 사람이 되었는가 판단해보게 되는 것 같다.

 

우선 정말 말을 못됐게하는 것을 혐오한다.

나도 너무 못된 말들을 할 수 있는 사람임을 알기에, 나는 입을 다문다.

그게 내 단점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을테지만, 적어도 주워담을 수 없는 말들을 배설하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입을 닫는다.

그리고 나는 겁쟁이다.

내가 듣고 싶지 않고 알고 싶지 않은 것들을 피하기 위해 꼭 꼭 숨는다.

듣고 싶지도 않고, 보고 싶지도 않게 된다.

아마 이건 나의 엄청난 자기 방어 기제겠지.

어린 아가가 눈 감으면 타인도 자기를 볼 수 없다고 생각하듯, 나도 내가 숨어있으면 그 사실들이 나를 못 찾아낼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그리고 무엇보다

나의  정말 몹쓸 버릇인, 웃음. 직접 말하고 직접 마주하면 또 나는 웃으며 괜찮다고 말할 것 같으니까.

나는 안 괜찮고 너무너무 속상한데, 반사적으로 나는 또 괜찮다고 할테니까.

나는 직접 말하고 마주하는 걸 피하고 싶다.

왜냐하면 나의 마음과 상처는 더 무겁고 크니까. 스스로 작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러고 보니

이번 일과 이번 3월에 내게 온 일에 대한 나의 행동이 닮아있다.

나는 꼭꼭 숨어있고, 내가 숨는 가장 큰 이유는 괜찮다고 말하기 싫어서이다.

아직 나는 괜찮다고 말할 정도로 소화하지 못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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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현수가 그렇게 그렇게 추천한 에리히 프롬의 책을 읽었다.

나의 첫 에리히 프롬.

 

그런데도 그는 본질에 대한 질문을 고리타분하다며 거부할 것이다. 인간의 '본성'이나 '천성' 혹은 진짜 자기 존재 같은 것이 현실에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각주:1]

 

진짜 삶의 기본을 위반한 결과는 장애와 고통이다. 지루하고 무미건조하며 우울하고 공허하고 아무 의욕도 없다. 이런 자기 경험의 부정적 감정들을 추적해 보면 무력감이 모습을 드러낸다. 무력감은 자기 자신의 강인함으로 살아갈 능력이 없을수록 역력해진다.

그런 고통의 상태는 대부분 진짜 삶을 살지 못하고 자기 자신에 대한 더 뛰어난 지식에 더 이상 접근하지 못한다는 고통스러운 지적으로 나타난다. 진짜 삶은 억압되어 꿈에서나 겨우 명확한 언어로 이야기할 뿐이다. 하지만 진짜 삶을 다시 배울 수 있다. 원래의 힘을 생각해 내고 그것에 여지를 주고 그것을 실천한다면 말이다.  [각주:2]

진짜 삶의 기본.

 

인간은 자연의 변덕이다. 유일하게 자기 자신을 자각하는 생명체이다. 인간은 자연에 살면서 동시에 자연을 초월하는 유일한 존재이다. 자기 자신과 자신의 과거, 자신의 미래를 자각한다.

인간은 동물처럼 본능적으로만 살지 않는다. 자연에서 거의 뿌리가 뽑힌 존재로, 태어나는 순간부터 삶이 던지는 질문에 대답해야 하는 문제를 떠안는다. 어떻게 살 것인가? 어디로 가야 할까? 어떤 의미를 삶에 부여할까? [각주:3]

 

인간은 주변 사람들 및 자연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 관계를 맺지 않는 사람은 미친 사람이다. 광기를 바로 그렇게 정의할 수 있다. 광기란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의 상태이다. [각주:4]

 

사랑이란 그 사랑에 관여한 사람들의 온전함과 현실을 둘 다 보존하는 유일한 형태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타인에게 복종하거나 그에게 권력을 휘두르면서도 '사랑'을 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럴 경우 사람은 -상대에게 복종하는 사람이건 상대를 지배하는 사람이건- 자신의 온전함과 독립이라는 인간의 기본 특성을 상실한다. 진정한 사랑에서는 타인과의 연관성과 자신의 온전함이 보존된다. [각주:5]

너무나 맞는 말. 뼈에 새길 것.

 

오늘날에는 모두가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모두가 자기 밖의 목적을 위해 자신을 이용한다. 사물의 생산이라는 한 가지 전능한 목표만이 존재한다. 우리가 입으로 고백하는 목표, 즉 인격의 완벽한 발달, 인간의 완벽한 탄생과 완벽한 성장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각주:6]

 

 

하지만 인간은 사물이 아니다. 스스로 사물이 된다면 자각하건 못 하건 병이 들고 말 것이다. 프랑스인들은 18세기부터 이 병에 대해 아주 많이 알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이 병은 프랑스어 이름만을 가지고 있다. 프랑스어 이름 -ennui, malaise, la mamadie du siecle(세기의 질병)-은 이미 19세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는 이 질병을 권태, 삶이 무의미하다는 느낌, 풍요롭지만 아무 기쁨도 없는 삶이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는 느낌,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당황스럽고 어찌할 바를 모른다는 느낌이라 부른다. [각주:7]

크.. 19세기에도 있었다니 이런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정말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배워야 한다. 나의 문제는 나만의 것이 아니다.

늘 내가 말하는 '살아지는'느낌이라는게 이것과 정말 비슷하다.

작년에 만났었더라면 너무 좋았겠다 싶은 책.

물론 올해라도 만나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아주 구체적으로 인간이란 현존으로 인한 온갖 한계와 약점을 가지고서 특수한 심리적 세계와 사회적 세계에 끌려 들어온 육체적 존재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인간은 자기 자신의 삶을 자각하였고, 자기 자신과 주변 세계에 대한 의식을 꾸준히 키웠으며, 삶을 목표를 가진 열린 길로 만드는 새로운 물질적, 영적 능력의 발전 가능성을 자기 안에 품은 유일한 피조물이다. [각주:8]

 

인간의 본성은 원칙일 뿐 아니라 능력이기도 하다. 즉, 인간은 이성과 사랑의 능력을 발전시키는 만큼 자신의 본질에 도달한다. 인간은 인간이기 때문에 이성과 사랑의 능력이 있으며 그 반대도 가능하다. 다시 말해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사랑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인 것이다. 자신을 자각하고 자신과 자신의 실존적 상황에 대해 진술하는 능력은 인간을 인간으로 만든다. 그리고 바로 그 능력이 인간 본성의 기본 요인이다. [각주:9]

 

따라서 자유는 사실이라기보다 가능성이다. 인간의 진짜 인격의 실현인 것이다.[각주:10]

 

피곤한 사람, 절망에 빠진 사람, 염세주의자는 자유에 도달할 수 없다. 피곤할수록, 절망에 젖어 있을수록, 염세적일수록 얻을 수 있는 자유는 줄어든다. '열정적인 사람'만이 자유로울 수 있다. 심리학적으로, 퇴보에 빠지지 않고 전진하고 진보하려 노력하는 사람만이 자유로울 수 있다. 독립과 동시에 주변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포함하는 진보를 추구하는 사람만이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다. [각주:11]

 

인간은 자각에 이르는 만큼만, 현실을 인식하는 만큼만 자유로워진다. [각주:12]

 

'사람들이 말한다'는 표현을 이용해 우리는 그 누구도 어떤 것을 실제로 책임지지 않는 무의미한 수다의 세계로 들어선다. [각주:13]

 

"나는 내가 누군지 안다." 돈키호테는 말한다. 인생의 의미에 대한 질문은 진짜에 대한 질문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진짜 인간에게는 정신이 중요하다. 진짜가 아닌 인간은 비정신적이다. 특수한 형이상학적 태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각주:14]

 

더 정확히 말하면 포이어바흐와 마차도가 가르친 대로 나의 실존에 이미 함께 주어진 너의 실존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우리 각자는 사회가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타자의 존재 역시 우리 각 개인의 일부이기에 사회가 존재하는 것이다. 인간은 본성상 타인을 위한 존재이다.[각주:15]

내가 내 전공을 사랑하는 이유.

 

게다가 타인의 가장 깊은 내면에 숨은 본질은 그의 침묵 탓에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이런 침묵에는 부정적 면과 긍정적 면이 있다. 그 뒤로 몸을 숨기는 데 일조한다는 점에서는 부정적이지만, 타인이 자기 자아의 복사품이어서는 안 될뿐더러 실제로 내가 알고 존중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우리가 방해하지 말아야 할 사적 공간이 존재한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다. [각주:16]

 

요약하자면 우리는 자신을 이해하고 사랑하고 인식할 수 있을 때에만 타인을 인식하고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다. 하지만 의식적 헌신이 곧 자신의 사적 공간을 포기한다거나 타인의 사적 공간을 침해한다는 뜻은 아니다. [각주:17]

뼈에 새길 것.

 

어린아이들 역시 자발성의 사례를 제공한다. 아이들에게는 진짜 자기 감정을 느끼고 자기 생각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자발성은 아이들의 말과 생각에서, 얼굴에 드러나는 감정에서 나타난다. [각주:18]

 

자발적 활동은 자아의 온전함을 희생하지 않고도 고독의 공포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자아의 자발적 실현을 통해 인간은 새롭게 세상-인간, 자연, 자기 자신-과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이런 자발성의 가장 중요한 요인은 사랑이다. 하지만 자아가 다른 사람 속으로 녹아버리는 그런 사랑이나 다른 사람을 소유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랑은 아니다. 그 사랑은 개인의 자아를 보존하며, 다른 사람을 자발적으로 긍정하고, 다른 사람과 하나가 되는 그런 사랑이다. 사랑의 역동적 성격은 분리를 극복하고 하나가 되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개성을 잃고 싶지 않은 욕망에서 탄생하는 양극성에 있다. [각주:19]

 

자유에 내재하는 근본적인 분열-개성의 탄생과 고독의 고통-이 인간의 자발적 활동을 통해 더 높은 차원에서 해소되는 것이다.

모든 자발적 활동에서 개인은 세계를 자기 안으로 받아들인다. 그 과정에서 개인의 자아는 온전해지고 더 강해지며 더 탄탄해진다. 자아는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만큼 강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힘은 물질의 소유에도, 감정이나 사고 같은 정신적 자질의 소유에도 있지 않다. 물건의 사용이나 사고 같은 정신적 자질의 소유에도 있지 않다. 물건의 사용이나 조작도 힘을 주지 못한다. 우리가 어떤 물건을 이용한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 것이 되지는 않는다. 인간이건 생명 없는 사물이건 창조적 활동을 통해 진정한 관계를 맺는 것만이 우리의 것이다. 우리의 자발적 활동이 낳은 속성들만이 우리의 자아에 힘을 주고, 자아가 온전할 수 있도록 기틀을 닦아준다. [각주:20]

 

자발적으로 행동하지 못하고 진정한 느낌과 생각을 표현하지 못하는 무능력, 그로 인해 타인과 자신에게 가짜 자아를 내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 열등감과 무력감의 뿌리이다. 의식하건 안 하건 자기 자신이 아닌 것보다 더 부끄러운 일은 없으며, 진짜 자기 것을 생각하고 느끼고 말하는 것보다 더 큰 자부심과 행복을 주는 것도 없다. [각주:21]

 

인간은 진정으로 행복을 줄 수 있는 유일한 만족-활동의 순간 체험하는 것-을 잃고서 잡았다고 믿는 순간 실망을 안겨주는 환영과 성공이라는 이름의 가짜 행복의 뒤를 쫓아다닌다. [각주:22]

알고도 늘 당하게 되는.

 

두 유기체가 생리학적으로 다른 것처럼 두 사람의 인격을 이루는 개인적 토대 역시 동일하지 않다. 진정한 자아의 발전은 항상 이런 특수한 토대를 바탕으로 한 성장이다. 이 한 사람에게 고유한, 이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씨앗의 발아, 유기적 성장이다.

유기적 성장은 타인의 자아가 가진 특수성을 자신의 자아가 가진 특수성 못지 않게 최대로 존중해야만 가능하다. 자아의 고유함을 이처럼 존중하고 장려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문화가 이룬 가장 값진 업적이다. 그런데 바로 그것이 오늘날 위험에 처한 것이다. [각주:23]

 

여기서 '독창적'이라는 말은 어떤 생각을 그전에 다른 누구도 해본 적 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 생각의 기원이 그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그 생각이 그의 활동, 그의 생각에서 나왔다는 의미임을 강조하고 싶다. [각주:24]

 

우리 사회에서는 일반적으로 감정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분명 창의적 사고는-다른 창의적 활동과 마찬가지로-감정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지만 감정 없이 생각하고 생활하는 것이 이상적인 태도가 되어버렸다. '감정적'이라는 말은 불균형과 같은 뜻이 되었고, 심지어 정신 장애의 뜻으로 해석된다. 이 기준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심하게 허약해질 것이다. 그의 사고는 빈곤해지고 단조로워질 것이다. [각주:25]

 

하지만 항상 그렇듯 억압하여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웠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각주:26]

내가 2학년 때, 연숙 교수님 강의를 듣던 중 머리가 쿵- 했던 부분.

안보이는 것이지, 모르는 것이지, 그게 없는게 절대 아니다.

 

점점 더 많은 사실들만 기억하면 결국에는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라는 비장한 미신을 섬긴다. 상호 연관 없이 이리저리 흩어진 수많은 개별 지식들을 학생들에게 주입시킨다. 학생들의 시간과 에너지가 점점 더 많은 사실을 배우는 데 쓰이기 때문에 정작 사고를 할 시간은 거의 남지 않는다. 물론 사실의 습득이 없는 사고는 공허하고 허구일 뿐이다. 하지만 '정보'만으로는 너무 적은 정보와 마찬가지로 사고를 가로막는 걸림돌이 될 수 있다. [각주:27]

 

진리는 힘없는 사람들의 가장 강력한 무기 중 하나이다. 하지만 진리는 외부 세계에서 방향을 잡는데에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인간 내면의 강인함은 자신에 대한 진리를 아는지의 여부에 크게 좌우되기 때문이다. 자신에 대한 환상은 지팡이와 같다. 걷지 못하는 사람에게 도움은 되지만 그를 더 약하게 만들 뿐이다. 인간은 자신의 인격을 온전하게 완성할수록, 다시 말해 '자신을 잘 꿰뚫어볼수록' 더 강해진다. "너 자신을 알라." 이것은 인간의 힘과 행복을 목표로 하는 기본 계명이다. [각주:28]

 

이 모든 이유에서 우리는 우리가 듣는 것과 더 이상 진정한 관계를 맺지 못한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감정과 비판적 판단력의 훼손에 흥분하지 않으며,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점점 더 무관심해진다. [각주:29]

 

전제 조건은 진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다. 현대인은 자신이 추구하는 것이 정말로 스스로 원하는 것인지를 고민할 시간을 내지 않는다. 학교에 다닐 때는 좋은 성적을 받고 싶고, 어른이 되어서는 성공의 사다리에 더 높이 오르고 싶고, 돈을 벌고 명성을 얻고 싶고, 더 좋은 차를 사고 여행을 하고 싶다.

하지만 한 번씩 이런 악착같은 노력을 멈출 때면 의문이 밀려들지도 모른다. "정말로 그 자리에 오르면, 더 좋은 차를 사면, 이 여행을 할 수 있으면 그 다음에는? 이 모든 것이 다 무슨 소용일까? 이 모든 것을 원하는 사람이 정말 나일까? 행복해질 것이라고 다들 말하지만 이루고 나면 허망해질 목표를 좇아 달리는 것은 아닐까?" 이런 질문이 떠오르면 사람들은 소스라치게 놀란다. 이 질문이 한 인간의 모든 활동, 즉 그가 원하는 것의 관념을 떠받치는 기틀에 의혹을 제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불안을 조장하는 생각은 최대한 빨리 떨쳐버리려 노력한다. 그런 의문으로 괴로운 것은 그저 피곤하거나 기분이 울적하기 때문이라고 여기고 원래 자기 것이라 여기는 목표를 계속해서 좇아간다. [각주:30]

 

하지만 그 대가는 크다. 자발성과 개성을 포기하면 삶은 좌절한다. 그들은 생물학적으로 아직 살아있지만 그의 감정이나 영혼은 이미 죽었다. 계속 움직이긴 하지만 생명은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각주:31]

 

직접 만든 작품이 자신의 신이 되어버린 것이다. 인간은 여전히 세계의 중심이라는 착각에 빠져 있지만, 옛날 그의 조상들이 신을 생각하며 느꼈던 바로 그 강도 높은 무의미함과 무기력의 감정이 그를 사로잡고 있다. [각주:32]

 

인간은 상품뿐 아니라 자기 자신도 팔면서 스스로를 상품으로 느낀다. 육체노동자는 육체의 힘을 팔고 상인과 의사, 사무직 노동자는 자신의 '인격'을 판다. 생산물이나 서비스를 판매하려면 '하나의 인격'이 되어야만 한다. 이 인격은 상냥해야 하지만 인격의 주인은 그것 말고도 여러 가지 다른 기대들을 더 충족시켜야 한다. 에너지와 솔선수범의 정신도 갖추어야 하고 그밖에 그의 특수한 위치가 요구하는 것들도 구비해야 한다. [각주:33]

ㅇㅔ리히 프롬씨.. 당신.. 정말..

ㅠㅠㅠㅠㅠ내가 작년에 일을 시작하면서 든 생각이랑 똑같다 정말! 내가 에리히 프롬한테 고민상담한줄..

이런 생각이 이어지다가 굉장히 공허함을 느꼈음. 엄청난 가면을 쓰고 일을 한다는 생각때문.

정말로 연예인의 삶이 이런 것인가, 함. 대중이 원하는 모습만을 언제나 하고 있어야 하니까.

물론 나의 경우에서는 아이들이 원하는 모습을 해준다기 보다는, 교사라는 특성상 인격적 모델이 되고 싶은 바람이 더 컸지만. 뭐 대동소이한 것 같다.

 

추상적 고객으로서 그는 중요하지만 구체적 고객으로서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가 백화점에 발을 디딘다고 해도 그 누구도 기뻐하지 않으며 그 누구도 그의 소망에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가 물건을 산다 해도 그것은 우체국에 가서 우표를 사는 행위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각주:34]

 

사람들에게 다른 주제, 예를 들어 정치에 대한 의견을 물어보아도 같은 현상을 목격할 수 있다. 평범한 신문 독자에게 특정 정치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면 그는 자신이 읽은 내용을 상당히 정확하게 들려주면서 그것이 '자신의' 의견이라고 주장할 것이며 -이것이 중요한 지점이다-그가 피력한 의견이 자신이 고민한 결과라고 확신할 것이다. [각주:35]

띵-

 

비판적 사고의 억압은 아주 어릴 때부터 시작된다. 다섯살만 되어도 아이는 벌써 엄마의 거짓을 알아챈다. 예민하게는 엄마가 입으로는 늘 사랑과 친절을 들먹이면서도 실제는 차갑고 이기적이라는 사실을 알아챈다. 그보다는 덜 예민하다면 엄마가 늘 자신의 드높은 도덕적 원칙을 강조하면서도 다른 남자와 부적절한 관계를 갖는다는 사실에서 엄마의 거짓을 눈치챈다. 아이는 모순을 느낀다. 정의와 진리를 바라는 그의 감정이 상처를 입는다. [각주:36]

 

따라서 어떤 주장이 논리적인지의 여부만으로는 그것이 합리화인지 확실히 알 수 없다. 그 사람의 내면에서 작동하는 심리적 동기도 함께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당사자가 무엇을 생각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생각하느냐다. 자신의 적극적 사고에서 나온 생각은 항상 새롭고 독창적이다. [각주:37]

 

그의 자존감은 사랑하고 생각하는 개별 인간으로서의 자기 활동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회, 경제적 역할에서 나온다.

사물이 말을 할 수 있다면 "넌 누구니?"라는 질문에 타자기는 "나는 타자기야."라고 대답할 것이다. 자동차라면 "난 포드야." 혹은 "난 뷰익이야." "난 캐딜락이야."하고 대답할 것이다. 인간에게 "넌 누구니?"라고 물으면 "난 회사원이야." "난 의사야." 혹은 "난 유부남이야." "난 두 아이의 아빠야."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리고 그의 대답은 해당 사물의 대답이 갖게될 의미와 상당히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 이는 스스로를 사랑과 공포와 확신과 의혹을 느끼는 한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사회 시스템에서 특정한 기능을 담당하는 진정한 본성에서 소외된 추상으로서 느끼는 방식이다. [각주:38]

 

무력감을 희미하게 의식은 하면서도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으로 그 뾰족한 가시가 무뎌지는 경우, 무력감을 억압하는 세 번째 반응이 나타난다. 이 경우 무력감은 과보상 행동과 은폐 목적의 합리화로 대체된다. 과보상의 가장 흔한 경우가 분주함이다. 깊은 무력감을 억압한 사람들이 특별히 활동적이고 분주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이 무기력한 인간의 정반대라고 생각할 정도까지 분주하다. 그들은 항상 무슨 일이든 해야 한다. [각주:39]

뜨끔.

지난 내 11월.

 

문제점이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아이를 너무 예뻐하고 응석받이로 키우면서 아이를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 양육 태도 역시 심각하다. 응석받이 아이들은 분명 보살핌과 보호를 받지만 자신의 힘과 자신에게 힘이 있다는 느낌은 마비된 상태나 다름없다. 필요한 것은 전부 넘치도록 얻고, 원하는 모든 것을 바랄 수 있으며, 하고 싶은 모든 말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의 상황은 근본적으로 포로로 붙잡힌 왕자와 같다. [각주:40]

 

얌전하게 말을 잘 들으면 원하는 것을 많이 얻을 수 있지만 그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얻지 못하며, 어른이 개입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부모가 적대적인 모습을 보이고 아이 역시 반항심을 키워 부모로부터 떨어져 나가 독자적인 삶을 시작해야 할 지점에서 부모의 친절이 모든 원칙적 반항심의 발전을 가로막아 아이를 점점 무능하고 무력하게 만든다. 정신분석을 진행하다가 어릴 적 부모가 필요 이상으로 오랫동안 등굣길을 따라다니고 옷 입는 것을 도와주었을 때, 어떤 옷을 입을지, 옷을 많이 겹쳐 입을지 얇게 입을지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었을 때 얼마나 무력한 분노를 느꼈는지 문득 기억을 해내는 경우가 종종 있다. [각주:41]

우리 부모님께 감사했다.

 

다른 사람을 사실대로 본다는 것은 그를 투영 없이, 왜곡 없이 객관적으로 본다는 뜻이며, 이는 투영과 왜곡을 낳는 자기 내부의 신경증적 '악덕'을 극복한다는 의미이다. 내적 현실과 외적 현실을 인식하기 위해 완벽하게 각성한다는 의미이다. 그런 내면의 성숙에 도달한 사람만이, 자신의 투영과 왜곡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는 사람만이 창조적으로 살 것이다. [각주:42]

 

타인에 대한 나의 체험이 있는 그대로의 그를 향하고 나의 응답을 결정하는 것이다.

 

그럴 때 나는 있는 그대로의 상대에게 반응한다. 타인에 대한 나의 체험이 있는 그대로의 그를 향하고 나의 응답을 결정하는 것이다. 나는 머리나 눈이나 귀로 응답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의 내 온 인격으로 응답한다. 내 온몸으로 생각하고 내 가슴으로 본다. 어떤 대상에게 내 안에 존재하는 실제의 힘으로, 그야말로 응답의 능력을 가진 온 힘으로 응답한다면 그 대상은 대상이기를 멈춘다. 나는 그것과 하나가 되어 더 이상 단순한 관찰자가 아니게 된다. 나는 그것의 재판관이 아니다.

이렇게 보고 응답하고 인식하고 인식 대상을 알아보는 감각을 갖추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할까? (진짜 삶의) 첫 번째 조건은 감탄의 능력이다. 아이들은 이 능력을 아직 갖고 있다. 노력을 총동원하여 새로운 세상에서 방향을 찾고 항상 새로운 사물을 붙잡아 알아간다. 당황하고 놀라고 감탄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창조적으로 응답할 수 있다. 하지만 교육과정을 거치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감탄의 능력을 잃는다. 이제 자신은 모르는 것이 없으며, 감탄은 무지의 증거라고 생각한다. 세상은 더 이상 기적으로 가득하지 않고 사람들은 세상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감탄의 능력이야말로 예술과 학문의 모든 창조적 결과를 낳는 조건이다. [각주:43]

감탄의 능력.

감탄이라 칭하지만 전반적인 감정을 아우르는 것 같다. 놀라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오래되진 않았지만 살다보니, 어느 특정한 감정만 잘 배설하는 사람이 있더라..

 

(진짜 삶의) 두 번째 조건은 집중력이다. 서구 문화에서는 희귀한 것이다. 우리는 늘 분주하지만 집중하지 못한다.

다섯 가지 일을 동시에 하면서 그 어떤 일도 제대로 하지 않는다. 여기서 '아무것도 안 한다'는 말은 그 일이 우리 자신의 표현이 아니라는 뜻이다. 진정으로 집중을 할 때는 지금 이 순간에 하는 일이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다. 어떤 사람과 이야리를 나누건, 어떤 글을 읽건, 산책을 하건, 이 모든 일을 집중해서 한다면 나에게는 지금 여기서 내가 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과거나 미래에서 산다. 하지만 실제 경험으로서의 과거나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여기만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인식과 응답은 여기 지금에서만 존재한다. 지금 이 순간 하고 보고 느끼는 것에 전념한다면 말이다. [각주:44]

 

그는 자신이 생각한다고 상상하지만 사실은 '그것이 내 안에서 생각한다'는 표현이 더 옳을 것이다. 그는 레코드플에이어와 같은 착각을 한다. 생각을 할 줄 안다면 레코드플레이어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지금 모차르트의 심포니를 연주해." 하지만 우리 모두는 우리가 레코드판을 턴테이블에 걸었고 그것이 자기 안에 녹음된 음악을 그저 재생할 뿐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각주:45]

 

하지만 자신의 자기와 자아를 진정으로 느끼는 사람은 스스로를 자기 세계의 중심으로, 자기 행동의 진짜 장본인으로 경험한다. 그것이 바로 내가 말하는 독창성이다. 내가 말하는 독창성은 새로운 발견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기원을 두는 경험이다. [각주:46]

 

이런 공포와 순응의 강박은 나 자신을 창의적인 내 행위의 장본인으로 느끼는 '자아' 감정을 키워야만 극복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말이 결코 자기중심적이거나 이기적이 되라는 의미는 아니다. 정반대로 나는 나를 타인과의 관계의 과정에서만 '나'로 느낄 수 있다. [각주:47]

 

우리는 인간종이 누리거나 언젠가 누리게 될 모든 가능성을 대변하지만 짧은 생애 동안 이 가능성 중에서 미미하게 작은 부분밖에는 실현하지 못한다. [각주:48]

인간종이 누리거나 언젠가 누리게 될 모든 가능성을 대변.

ㅠㅠㅠㅠㅠㅠㅠ이렇게 멋있고 맛있는 말이라뇨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진짜 삶을 산다는 것은) 매일 새롭게 태어날 준비를 하는 것이다. 실제로 탄생은 아이가 태아로 존재하기를 포기하고 스스로 숨 쉬기 시작할 때 일어나는 단 한 번의 과정이 아니다. [각주:49]

 

인간은 인간 고유의 이분의 지배를 받는다. 인간은 안전을 의미하는 과거 상태의 포기를 두려워하지만 자신의 힘을 더 자유롭게, 더 완전히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하는 새로운 상태에 도달하고자 한다. 인간은 자궁으로 돌아가고 싶은 소망과 완전히 새로 태어나고 싶은 소망 사이를 항상 이리저리 오간다. 모든 탄생의 행위는 용기를 필요로 한다. 놓아버릴 용기, 자궁을 포기하고 엄마의 가슴과 품을 떠나며 엄마의 손을 놓고 마침내 모든 안전을 버리고 단 하나, 즉 사물을 실제로 인식하고 그것에 응답하는 자신의 힘만을 믿는 용기를 필요로 한다.

태어날 준비 -모든 안전과 착각을 포기할 준비-는 용기와 믿음을 필요로 한다. 안전을 포기할 용기, 타인과 달라지겠다는 용기, 고립을 참고 견디겠다는 용기다.

사고와 감정에서 자기 경험의 현실성을 확신하고 믿고 신뢰할 수 있는 것이 믿음이다.[각주: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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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당장 그 소나타가 나를 부르는데 열여섯 살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할 이유가 무엇이라는 말인가? 음악에는 나이가 없다. 마음과 정신의 성숙함은 달력의 햇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각주:1]

 

청중은 모든 시간을 가지고 너에게 귀를 기울이고 있다. 여유를 가져라! 네 앞에 영원의 시간이 있으니! 너 자신을 마음껏 표현하라! 네가 원하는 대로 음악을 지휘하라! 연주하는 사람은 너니까 너 자신의 주인이 되어라. 너만의 고유한 소리, 너만의 고유한 음악성을 창조하라. 현재를 살라, 앞으로의 시간을 미리 생각하지 말라! 그러기 위해서는 온 힘을 다해서 연습해야 한다! 외적이 아닌 내적으로 표현하라. 외적으로 표현할 경우 건방지고 경박한, 즉 우스꽝스러운 음악이 되고 말 위험성이 있다! [각주:2]

음악을 수업으로 바꾸어본다면?

사실 엄청난 것이었다. 내 앞에는 모든 학생들이 자신의 모든 시간을 가지고 내게 귀를 기울이고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그때 그가 나에게 베풀어준 것은 단순히 한 번 연주하는 기회만이 아니었다. 그는 나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나의 직관을 따라야 하며, 나 자신에게 최대한 충실하고 솔직하게 다가가야 한다는 신념을 확인시켜주었다. 그가 내게 준 것은 새로운 희망이었다.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내가 솔직하게 들려주고 드러냄으로써 이해받을 수 있다는 희망이었다. [각주:3]

나의 직관을 믿기.

경험적으로 말해보건대 정말 나의 직관이란 것은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무서우리만큼 예리한 것이 자신에 대한 자신의 직관.

 

우리들 눈에 보이지 않는 온전하고 완전한 정의는 존재하기 마련이다. 진정한 마음을 보호해주는 법 위의 법. [각주:4]

진정한 마음을 보호해주는 법 위의 법.

내가 막연히 하던 생각을 이렇게 예쁘게 표현한 부분을 보면 너무너무 신난다. 반갑고.

 

그 장소에 나를 응원하는 사람이라고는 한 명도 없었다. 그러나 다른 참가자들과 동행한 부모들이 자신들의 신동 자녀들에게 불어넣는 어마어마한 긴장감을 관찰 중인 나에게 이런 부재는 오히려 그곳이 편안히 숨 쉬는 공간이 되도록 작용했다. [각주:5]

 

오랜 꿈을 이루었는데도 나의 목마름은 여전했다. 그 사실을 막 알아차렸고, 그것은 나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그렇다면 나의 진정한 꿈은 무엇이란 말인가? 갈증을 궁극적으로 해소해줄 샘으로 나를 이끌어줄 꿈은 도대체 무엇일까? [각주:6]

나만이 하는 고민이 아닌 것.

ㅜ_ㅜ 하물며 임현정 피아니스트도 이런데, 나는 오죽했으랴. 가끔 사고실험으로 해보는 '내게 써도 써도 줄지 않는 돈이 생긴다면?'은 이러한 고민에 꽤 도움되는 결론을 준다.

 

나도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육체는 하나의 옷에 불과하며, 죽을 때는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한다는 것을. 내가 아무리 재산이 많다고 해도 그것을 저세상에 가져갈 수 있는가? 나에게는 오히려 영원히 지속되는, 저 세상에서도, 그 어디에서도 함께하는 나의 영원한 본질을 풍성하게 키우는 것이 진정으로 지혜롭고 온당한 것이었다. 내면의 본질적인 아름다움, 보이지 않는 섬세한 아름다움의 영원한 재산. 나는 그 재산을 끊임없이 늘리고 싶었다. [각주:7]

나도 같은 생각. 그치만 임현정씨는 무려 16살에 이런 생각을 했다. 정말 나이는 숫자에 불과할 뿐임.

나도 그 재산을 끊임없이 늘리고 싶다.

 

어느 날 한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소말리아에서 기근으로 죽어가는 아이들에 대해서 나에게 한 말이 기억난다. 그자에 따르면, 그런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은 아무 짝에도 소용이 없단다. 왜냐하면 어차피 그 아이들은 "아무것"도 되지 못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란다. 그런데, 모든 것을 손에 넣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그자야말로, 그런 식으로 그렇게 이야기하는 그자야말로 자기 자신이 말한 그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어버린 것이 아닐까? [각주:8]

 

자아의 소멸은 그 자체로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자아는 환상 속에서 삽니다. 다른 것들로부터 분리된 채 소유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산다는 말이죠. 모든 괴로움과 원망이 거기에서 비롯됩니다. 자아는 스스로를 독립적이라고, 자신의 힘만으로 살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나무들과 마찬가지로 산소와 햇빛, 바람, 흙 등 여러 가지 요소들이 필요합니다. 제 아무리 영리한 사람이라도 혼자서는 살 수 없습니다. 이런 자아-이렇게 보잘것 없는 소자아-를 버림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모든 것과 하나 된 큰 나'를 만나게 됩니다. 어린아이들이 쓰는 말로 하자면 이런 식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두가 나'라고 말입니다. [각주:9]

임용때 공부했던 대아(大我)와 소아(小我)를 여기서 만나다니.

이 책을 읽으면서 불교 경전들을 읽고 필사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앙리 바르다 교수님께서 하신 말을 다시 되새기며 더욱 당당하게 나아갔다.

"넌 열다섯 살이 아니라, 3000살이야, 3000살!"[각주:10]

참 좋다. 제 나이가 아닌 사람. 나도 더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해야지.

 

실패란 존재하지 않는다. 또다른 한 번의 경험을 쌓았을 뿐이고 한 번 더 반복했을 뿐이다. 그리고 오로지 반복이 부족했음을 발견한 위대한 순간이다. 언제나 다시 하면 더 나아지는 법, 포기하지 않는데 어떻게 실패가 존재한단 말인가.[각주:11]

 

내가 그를 바라보고 있는 이곳까지 그 사람의 광대한 내면이 전해졌다. 아무도 모르게 세상을 주유하는 요기같다고 할까. 평범한 인간들의 "고만고만한 공통의 관심사"에서 저만치 비껴서 살고 있는 자유로운 존재라고 할까. [각주:12]

 

퀸 엘리자베스 뮤직채플에서 전개되는 나의 삶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늘 나를 따라다니던 두려움과 불안을 잊어버리고 처음으로 나는 경계심을 내려놓았다. 음악은 아주 까다롭고 절대적인 예술이며, 영감이란 오직 자신의 모든 것을 전적으로 투자하는 자에게만 허용된다는 그 엄중한 진실을 잠시 제쳐두었다. 일종의 편안함이랄까, 하여간 물질적으로나 음악적으로나 어느 정도의 안락함을 즐기면서 그냥 사람들이 나에게 하라고 하는 것을 열심히 했다. 독자성, 그리고 나 자신이 그토록 악착같이 지켜왔던 정신의 독립을 손에 넣기는 어렵지만 잃어버리는 것은 순식간이라는 사실을 아직 난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각주:13]

 

"예술은 사랑이다, 예술은 사랑이다, 예술은 사랑이다..." 나는 이 문장을 세상 사람 모두와 공유하기 위하여 만트라처럼 거듭 되뇌인다. 다시 한번 나는 나의 선택이 옳았음을 확인했다. 나의 본능을, 나의 기질을 따르리라, 그래서 아주 멀리 가리라. [각주:14]

서로 사랑하는 도덕 이라고 내가 내 수업에 붙인 이유

사랑은 정말 정말 크고 위대하다. 모든 것을 품는 것.

 

"어린아이들에게 너무 많은 가르침을 주려는 것은 그 아이들을 빨리 자라라고 억지로 잡아당기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따뜻한 격려가 회초리보다 훨씬 효과적이다. 당신의 아이들에게 절대로 바보라는 말 따위는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말은 긍정적이고 평온한 표정보다 결코 나을 것이 없다"라고 16세기 한국 문필가 퇴계 이황이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믿는다. [각주:15]

문득 교실에서 아이들은 수행평가를 하고, 나는 이 부분을 읽고 있는데 '안전한 교실'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내가 앉아있음으로써 아이들이 안전함을 느끼고 안정됨을 느낀다면, 내가 우리 집에서 우리 부모님 아래에서 느꼈듯이, 그거면 내 소임을 다한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으로 든 생각. 그 안전과 안정 속에서 나는 크고 넓게 자랄 수 있었으니까.

 

열두 살에 한국을 떠나 프랑스로 갔을 때, 자유롭다는 것은 곧 파리 국립고등음악원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했다. 지금은 오직 하나의 자유만이 있다. 바로 내면의 자유이다. 내가 음악을 통해서 찾고자 하는 자유도 그것이다. 이렇듯 나의 추구는 완성되기는 커녕 이제 겨우 시작 단계이다. [각주:16]

이 책을 관통하는 메시지 "자유"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스승님에게 물어보았다.

"진정한 행복은 그 어떤 외부조건에도 상관없이 지금 여기 내 마음이 행복으로 가득 차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나 아닌 것이 없으면 내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깨닫는 순간 이 세상 모든 것과 나는 하나가 됩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모두가 행복할 수 있으려면 내가 진정으로 행복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지요. 내가 행복으로 충만되어 있어야만 다른 이에게 행복을 줄 수 있는 것이지요."[각주:17]

 

스승님은 또 우리가 도와준 덕분에 산다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냉철하게 우리의 삶을 한번 관찰해보라고 하셨다. 즉 자기 자신이 했다고 뽐낼 수 있는 비율은 우리의 삶에서 고작 5퍼센트도 안 된다는 것이다. 스승님은 우리가 95퍼센트 이상은 도움을 받아 살아가는 것을 깨닫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일깨워주셨다. 그때 우리는 "내가 했다, 내가 한다"라고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덕분에 했습니다, 덕분에 합니다"라는 관점으로 바뀌게 된다고 하셨다.

피아니스트로서 생각을 해보자.

어린 시절에 누가 나를 응원했는가?

누가 나를 믿었던가?

무대까지 누가 피아노를 옮기는가?

누가 그 피아노를 만드는가?

누가 연주회를 조직하는가?

누가 음반을 제작하는가?

누가 그 음반들을 듣는가?

누가 음악회장을 찾는가? 누가?

그렇다. 연주자로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내 덕분"이 아닌 "모든 이들의 덕분"이다. [각주: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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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교수로서 하는 이은 가르치는 일이 아니라 배우는 일이다. 정확히 가르치기 위해서는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 되니까 이 직업의 본령은 차라리 배움에 가깝다. 내가 재직 중인 조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학생들에게 배우며 이 글들을 썼다. 내가 제자로 살 때는 선생이 제자를 사랑한다는 말이 거짓말인 줄 알았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게 됐다. [각주:1]

수업을 하는 건 나지만, 늘 배우는 쪽은 오히려 나다. 교사로서 나도 끄덕일 수밖에 없던 곳.

 

 


슬픔에 대한 공부 - 슬픔

 

피해자는 자신이 얼마나 아픈지를 그 양과 질 그대로 알아야 할 사람이 있다면 그게 바로 가해자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가해자 본인의 자발적 역량만으로는 그런 결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가해자의 성품과 노력의 차이는 결과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근원적 무능력, 즉 '타인의 슬픔을 똑같이 느낄 수 없음'이라고 요약될 그것과 관계하는 사태이기 때문이다. 이 점을 고통스럽게 절감할 때 피해자는 가해자를 교육하여 그로 하여금 제 무능력을 뛰어넘게 만들고 싶다는 강렬한 교육열을 느끼게 될 것이다. [각주:2]

인간의 근원적 무능력..

 

"우리가 스스로 야기한 상처에 대해서는 아무런 동정심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야기하지 않은 고통 앞에서는 울 수 있어도 자신이 야기한 상처 앞에서는 목석같이 굴 것이다."(사이먼 메이, <사랑의 탄생>, 문학동네, 2016, 292) 이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자신이 원인을 제공한 슬픔에 더 깊이 공감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행동한다. 이 경우 타인의 슬픔은 내가 어떤 도덕적 자기만족을 느끼며 공감을 시도할 만한 그런 감정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추궁하고 심문하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 슬픔은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 나를 불편하게 할 것이다.[각주:3]

정말 읽으면서 소름돋는 대목이었다. 인간의 민낯을 이렇게 여과없이 알려줘도 되는걸까?

이어서 떠오르는 나의 경험들, 그리고 내가 겪은 상황들.

 

아가멤논과 스티븐과 우리 사이에는 단 하나의 결정적인 공통점이 있어 다른 많은 차이점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자신을 유지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한, 하나의 생명체라는 것. 이것은 거부할 수도 박살낼 수도 없는 인간의 조건이다. <킬링 디어>가 엄밀한 의미에서 '비극'인 것은 이 인간 조건의 비극성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특정한 결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바로 결함이라는 것. 그러므로 인간이 배울 만한 가장 소중한 것과 인간이 배우기 가장 어려운 것은 정확히 같다. 그것은 바로 타인의 슬픔이다. [각주:4]

 

논리를 갖다 댈 영역이 아니라는 느낌 때문이었다. 이 세상의 슬픔 중에서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 것은 많지 않겠으나, 그런 논리들이 그 슬픔에 '위로'가 되지는 못할 것이다. [각주:5]

 

결론을 당겨 말하자면 이렇다. 어떤 책이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으려면 그 작품이 그 누군가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담고 있어야 한다는 것. 위로는 단지 뜨거운 인간애와 따뜻한 제스처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 나를 위로할 수는 없다. 더 과감히 말하면, 위로받는다는 것은 이해받는다는 것이고, 이해란 곧 정확한 인식과 다른 것이 아니므로, 위로란 곧 인식이며 인식이 곧 위로다. 정확히 인식한 책만 정확히 위로할 수 있다. [각주:6]

이 작가님, 정말 꼭꼭 씹어서 주신다. 너무 감사한 분. 이런 분의 책을 읽으면 정말로 행복해진다. "이 책 아껴서 읽는 중이야"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이 달에만 해도 몇 번을 한 말이기도 하다. 또 몇 번을 추천한 책이기도 하고.

 

제대로 아는 사람만이 '제대로 앎' 그 자체로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다. 두 저자가 연출자이고 작가이기 때문에 특별히 슬픔에 대해 연구했으리라. 모르는 것을 표현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각주:7]

 

"순수한 휴식은 슬픔의 고통을 치료해주는 가장 효과적인 치료제다. 그러나 슬퍼하는 사람이 참 하기 어려운 것 가운데 하나도 휴식이다."(<슬픔의 위안>, 김명숙, 현암사, 161) 휴식이 왜 어려운가. 저자들은 "슬픔이 원기를 고갈시키는 것처럼, 좋은 감정 역시 에너지를 무척이나 소진시킨다는 점(165)을 지적한다. 많은 사람들이 내게 와서 따뜻한 위로를 건넨다. 그것은 고마운 일이므로 나는 좋은 감정으로 응대한다. 그러나 그 응대는 그 자체로 나의 감정적 자원을 크게 소모시키는 일이다. 그런 일들이 피곤하다고 느껴지면 고마워할 줄 모르는 나 자신에게 마음이 불편해져서 그것이 또 나를 갉아먹는다.

(중략)

저자들은 이렇게 말을 잇는다. 슬픔에 빠져 있지만 말고 외출도 하고 사람도 만나라고 말하는 이들의 헛소리에 신경 쓰지 말라고. 당신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그저 아무 일도 안 하고 쉬는 것일 뿐이라고. 집안일도 남에게 맡겨버리고 필요하면 수면제도 먹으라고. 수면제 대신 캐머마일 차를 드셔보시라고 말하는 친척의 말은 샌드위치 그만 먹고 도장이나 핥으라는 말과 같으니 과감히 무시하라고. 함게 기도해주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이렇게 말하라고. "기도는 제가 직접 할 테니 설거지나 좀 해주시겠어요?"(168) 이쯤 되면, 정확히 알지 못하면 제대로 위로할 수 없다는 말이 무엇인지 실감할 수 있지 않은가. 문학에서도 그렇고 인생에서도 그렇다.[각주:8]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기도는 제가 직접 할 테니 설거지내 해주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이렇게나 쿨하고 멋질 일이냐구 정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트라우마라는 말의 가장 오래된 뿌리는 '뚫다'라는 듯의 그리스어다. 트라우마에 의해 인간은 꿰뚫린다. 정신분석 사전은 그 꿰뚫림의 순간을 구성하는 요소들로 충격의 강렬함, 주체의 무능력, 효과의 지속성 등을 들고 있다. 그러나 이런 설명으로는 실감이 발생하지 않는다. 그래서 언젠가 다음과 같은 설명을 들었을 때에야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아주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트라우마에 관한 한 우리는 주체가 아니라, 대상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나는 트라우마를...'이라는 문장은 애초에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직 '트라우마는 나를...'이라고 겨우 쓸 수 있을 뿐이다.

한 인간이 어떤 과거에 대해 '주체'가 아니라 '대상'이 되어버리는 이런 고통이 얼마나 참혹한 것인지 당사자가 아닌 이들은 짐작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 많이 공부하고 더 열심히 상상해야 하리라.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대상으로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잊는다. 그걸 잊은 사람들이 그들에게 말한다. 이제는 정신을 차릴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더 이상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지 말라고. 이런 말은 지금 대상으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주체가 될 것을, 심지어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주체가 될 것을 요구하는 말이다. 당신의 고통이 나를 불편하게 한다는 말은 얼마나 잔인한가. 우리가 그렇게 잔인하다.

며칠 전 광주트라우마 센터의 초대를 받아 강연을 했다.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감히 수락한 것은, 내가 부족한 사람임을 인정하고 물러서는 것으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상처와 위로'에 대해 요즘 내가 어떤 공부를 하고 있는지를 말하기 위해 갔다. 강연 중에 '문학은 나태한 정신을 고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상처 입은 마음을 위로 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내용의 말을 하다가 잠시 주춤했다. 누군가에게는 아직도 살아 있는 현실인 '고문'을 비유로 사용하는 일은 이제 그만두어야겠다는 생각을 그 순간 처음으로 했다. 계속 공부해야 한다. 누군가의 터널 속 어둠의 일부가 되지 않기 위해서. [각주:9]

정말 계속 공부해야 한다. 계속 고민해야 하고, 계속 상상해야 한다. 내가 알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 내가 알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모르는 것이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므로.

계속 공부해야한다고 말씀해주셔서 이 교수님이 너무 좋다. ㅠㅠㅠㅠㅠㅠㅠㅠ정말 좋다. 한 번도 뵌적 없지만, 너무 좋다 ㅠㅠㅠㅠㅠㅠㅠ나도 수업듣고 싶어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교수님의 학생이 되고 싶어요...힝

 

이제 그는 한번 알게 되면 다시는 원상태로 돌아갈 수 없는 한 가지 비밀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가장 완벽한 사랑의 경우에서조차 한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덜 깊게 사랑한다는 사실이었다. 똑같이 착한, 똑같이 재능을 타고난, 똑같이 아름다운 두 사람이 있을 수는 있지만, 상대를 똑같이 사랑하는 두 사람은 있을 수 없다.(손턴 와일더,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 샘터, 2010, 97)[각주:10]

 

그 안간힘의 본질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사건은, 그것을 감당해낸 사람만을, 바꾼다. 한수는 제가 저지른 일에서 도망쳐버리고 말았지만, 혜화는 스스로 아이를 낳았고 또 잃었다. 이런 종류의 사건이 한 사람을 어떻게 또 얼마나 변화시키는지,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다 알 수 없으리라. 혜화는 생명의 귀함을 제 육체로 실감하는 사람, 생명의 버려짐을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병들거나 버려진 개를 위해 살기, 그것이 혜화의 두 번째 삶이 되었다. [각주:11]

 

그러므로 한수가 혜화 앞에 다시 나타난 것이 그 자신에게는 나름대로 최소한의 자격과 명분을 갖춘 것으로서 필연적이고 필요한 일이었겠으나 혜화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일단 혜화가 그동안 느낀 절망감과 배신감이 해소되지 않은 데다가, 그 감정을 억누르고 겨우 뿌리내린 삶이 다시 뿌리부터 흔들리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혜화 쪽에서도 그에 상응하는 동기가 마련되지 않는다면 한수의 기도는 제 죄책감을 해소하려는 일방적이고 이기적인 한풀이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만다. [각주:12]

 

이 장면에서 이 영화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닥쳐오는 슬픈 일을 미리 알고 막아낼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그 슬픔을 어떻게 겪어내느냐에 있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한수가 혜화에게 준 가장 큰 상처는, 그가 끝내 그의 모친을 설득하지 못한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혜화가 가장 고통스러울 때 그의 곁에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두 사람이 다시 만나 해야 할 일은, 그들이 함게 만든 아이를 혜화 혼자 떠나보내야 했던 그 순간을 재연해서, 이번에는 함께 그 아이를 떠나보내는 일이다. 그러니까 그들에게 필요한 일은 아이를 '다시 찾는'일이 아니라 아이를 '다시 잃는' 일이었다. [각주:13]

 

상처와 고통의 양을 저울 위에 올려놓는 일이 비정한 일인 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비정한 일은, 네가 아픈 만큼 나도 아프다고, 그러니 누가 더 아프고 덜 아픈지를 따지지 말자고 말하는 일일 것이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실제로 덜 아픈 사람이다. 지배하는 사랑과 미성숙한 사랑의 공통점 중 하나는 저울을 사용할 줄 모르거나 사용하지 않으려 하는 데 있다. [각주:14]

 

우리가 흔히 삶의 진실이라고 부르는 것은 저 인생의 얼굴에 스치는 순간의 표정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 표정을, 어떻게 말로 표현하나. 행복한 가족의 어느 가장이 아내에게 한마디 말도 없이 문득 자살을 감행할 수도 있는 게 삶이라는 것을, 어떻게 설명하나. 그냥 보여줄 수밖에. 그 남자의 뒷모습만을 하염없이 보여줄 수밖에. 비트겐슈타인이 말했다. "세계가 어떻게 있느냐가 신비스러운 것이 아니라 세계가 있다는 것이 신비스러운 것이다."<논리철학논고>(1921)의 후반부다. [각주:15]

 

중년 웨이터는 젊은 동료를 부드랍게 나무라며 그와는 다른 태도를 취한다. "나는 카페에 밤늦게까지 머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 편이야."(<깨끗하고 불빛 환한 곳>, 어니스트 헤밍웨이, 240쪽) 이윽고 노인은 떠나고 젊은이는 서둘러 퇴근한다.[각주:16]

나도 좋아! 카페에서 밤늦게까지 머물기 좋아.

이렇게 밤늦게 까지 카페에서 따뜻한 커피 마시며 머무는 생각을 떠올리면, 대학생때 자주가던 카페 노리가 떠오른다. 노랑 불빛 만연한 그곳은 (당시에 내가 생각했던 촌스러운 청주라는) 세계와 단절된 다른 세상이었다. 가장 서울스러움을 대변해주는 곳이었으니까. 그곳에서 보낸 시간들은 아직까지도 충만한 기억으로 내 어딘가에 남아있다. 고마운 곳, 시간들.

 

"나는 사랑이 안으로 침입하는 것인지 밖으로 터져 나오는 것인지조차도 아직 알지 못한다." 사랑은 바이러스처럼 침입해서 나를 점령해버리는 것인가, 아니면 죄수처럼 갇혀 있다가 나라는 감옥을 뚫고 나오는 것인가. [각주:17]

 

달콤한 고통이 무엇인지를 꿈과 잠의 주체인 우리는 안다. 꿈과 잠에 비유해본다면, 그녀의 문장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한없이 눈물을 흘리다가 탈진한 상태로 깨어나서는 한참을 더 울게 되는 그런 꿈이고, 탈진한 상태로 깨어나서 한참을 더 울다가 사랑하는 사람의 품에 안겨 그 슬픔이 달콤한 안도감으로 서서히 바뀌는 것을 느끼는 순간 다시 찾아오는 그런 잠이다. [각주:18]

한참을 바라본 부분. 어떻게 '달콤한 고통'을 이렇게 표현할 수가 있지?

 

우리는 특정한 순간에만 슬픈 것이 아니라 사실은 대체로 슬프기 때문이 아닌가. 인간은 본래 슬픈 짐승이고 우리는 모두 슬픔의 식민지가 아닌가. [각주:19]

인간은 본래 슬픈 짐승. 대체로 우리는 슬프다.

 

돌아보지 말라고 하면 결국 돌아보게 된다. 이 모티프가 구약의 창세기에서 한국의 민담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발견되는 것은 이 설정이 욕망의 본질(금지가 있는 곳에 위반이 있다)을 드러내는 효과적인 장치이기 때문일 것이다. [각주:20]

 

오르페우스 신화가 비극적인 것은 이것이 사랑하는 연인을 제 손으로 한 번 더 죽인 사람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별의 순간에 연인은 나를 떠남으로써 내게서 한 번 죽는다. 그런데 더 사랑하는 사람은 더 사랑하는 사람의 위치에 서있기 때문에 이별의 순간에 상대방을 질리게 만들 수 있다. 죽은 연인을 살리려는 노력이 외려 그를 한 번 더 죽이게 되는 경우다. 이 경우 떠난 것은 너이지만, 네가 돌아올 수 없게 만든 것은 내가 되고 만다. [각주:21]

 

세상에는 참지 않는 사람들이 있고 참아내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서로 역할을 바꾸는 경우는 거의 없다. 불공평한 일이다. 참지 않는 사람들은 늘 안 참고, 참는 사람들은 늘 참는다. 참지 않는 사람들은 못 참겠다고 말하면서 안 참는다. 그들에게는 늘 '참을 수 없는' 이유가 있다. 그러나 참는 사람들은 그냥 참는다. 그들이 참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봐주고 염려해주는 사람도 없다. [각주:22]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맞아. 아유 못참겠어! 라고 말하면서 안 참지. 읽으면서 웃었던 부분.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당신이 늘 울음을 참아왔으므로 당신과 비슷한 사람을 알아본 것이다. 당신은 보이지도 않는 그 사람의 성대를 들여다보고 있다. 왜 성대인가. 눈물은 눈에서 흐르지만 울음은 목구멍에서 치솟는다. 그래서 울음 참는 일이 '울음을 삼킨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각주:23]

 

다음 시를 보니, 당신은 참을 수 없다고 말하는 또 다른 당신의 말조차 못 들은 척했다. 왜 그 말을, 잘 듣는(effect) 약이 대신 들어야(listen) 하나. 왜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만 말하나. [각주:24]

캬.. 진짜 맛있는 글이다 정말. 이렇게 대구마저 잘 할 일입니까!!!!!!!! 증맬루 교수님 너무 므찌자나요!!!!!!!!!!!!!!!!!!!!!!!!!!!!!!!!!!!!!!!!

 

그러니 이 시는 결국 "그 젊은이는 천진하게 여자에게 웃었다"와 "여자는 그 젊은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라는 두 문장으로 요약된다. 아니, 더 짧게는, "천진하게"와 "물끄러미"의 어긋남에 모든 게 들어 있다. 사내가 창피해했거나 화를 냈거나 혹은 허세라도 부렸다면, 그녀는 희망을 가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사내는 "천진하게" 웃었다. 그녀는 깨달았을 것이다. 이 사내는 바뀌지 않겠구나, 나는 이 천진함을 견디지 못하겠구나, 결국 이 사내를 미워하게 되겠구나. 그러니 그녀의 "물끄러미" 안에는 또 얼마나 많은 슬픔이 있었을까. [각주:25]

 

어떤 자리이건 어떤 장르이건 능란하게 소화해내는 이가 프로일 것이지만, '할 수 없는 것은 할 수 없다'고 말하는 이는 예술가일 것이다. 존재의 필연성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들 말이다. 그들은 말한다. '난 그런 것은 할 수 없어요. 어제는 할 수 있었을 거예요. 내일도 혹시 가능할지 모르겠군요. 그러나 지금은, 지금은 도저히 할 수 없습니다.'[각주:26]

 

그의 고통은 수다스럽지 않다. 진정한 고통은 침묵의 형식으로 현존한다. 고통스러운 사람은 고통스럽다고 말할 힘이 없을 것이다. 없는 고통을 불러들여야 할 때 어떤 가수들은 울부짖고 칭얼댄다. 그는 그럴 필요가 너무 없다. [각주:27]

 

자신의 진실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 채 규정되는 모든 존재들은 억울하다. 이 억울함이 벌써 폭력의 결과다. '폭력'의 외연은 가급적 넓히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이런 정의를 시도해본다. '폭력이란? 어떤 사람/사건의 진실에 최대한 섬세해지려는 노력을 포기하는 데서 만족을 얻는 모든 태도.'[각주:28]

섬세해지려는 노력을 포기하는 데서 만족감을 얻는 모든 태도. 폭력의 사전적 정의가 아닐지라도, 정말 좋다. 내년에 폭력 수업을 하게 되면 이렇게 말해주어야지! 출처를 밝히고!

 

"그 이중성 자체가 학대받은 아이들의 특징이에요." 이 말은 나를 흔들어놓았다. 그와 동시에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학대받은 아이들에 대해서, 나는 잘 모르고, 그 학생은 안다는 것. [각주:29]

 

"저는 불판 위에서 구워지는 고기를 보는 일도 힘겨울 때가 있어요." 바로 이런 사람이기 때문에 오히려 그 소설을 쓸 수 있었으리라. 이것은 '폭력에 대한 감수성'의 문제다. 이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더 민감해져도 좋다고 나는 생각한다. [각주:30]

 

 


삶이 진실에 베일 때 - 소설

 

어딘가에 단편소설은 삶을 가로지르는 미세한 파열의 선 하나를 발견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고 썼었다. 삶의 어딘가에 금이 가고 있는데 인물들은 그것을 모른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고 나서야 그들은 파열을 깨닫는다. [각주:31]

 

내가 타인을 보는 곳 말고 타인이 나를 보는 곳으로 가기, 거기서 내 눈을 버리고 타인의 눈을 얻기, 그리고 마침내 그 타인의 눈으로 나를 보게 되기. [각주:32]

 

나도 따라 울었다. 이별은 슬픈 것이니까. 나의 눈물에 거짓은 없었다. 그러나 졸업식 날 아무리 서럽게 우는 아이도 학교에 그냥 남아 있고 싶어 우는 건 아니다.(<그림움을 위하여>, 문학동네, 2013, 76)[각주:33]

 

화자는 커피숍에서 젊은이들을 바라보며 이토록 솔직하게 질투하고 또 연민한다. 노인이 재현의 대상이 되는 일도 드물지만 그들이 재현의 주체가 되는 일은 더더욱 드물다. 아무래도 재현의 권력은 젊은이들에게 있으니까. 그런 환경에 익숙해져서일까, 가끔 젊은이들은 노인에게는 마치 내면이라는 것이 없다는 듯 행동할 때가 있다. 선생의 소설에는 재현 권력의 통쾌한 역전이 있다. 덕분에 알게 된다. 온 세상이 죄다 젊은이들만을 위한 '멍석'인 세상에서 노년의 내면은 제대로 주목받지도 이해되지도 못했다는 사실을, 재현의 장에서 노인들은 눈과 입을 모두 빼앗겼다는 사실을. [각주:34]

그래서 정말 가끔은 많이 무섭다. 내가 더이상 젊은이가 아닐까봐. 현명하지 못한 걱정인 건 알지만 그래도 때때로 나를 찾아오는 두려움.

 

"창부는 격정의 와중에서도 냉정하고, 언제나 자기가 도발시킨 쾌락의 초연한 관객이며, 남들이 황홀해서 도취에 빠질 때에도 그녀는 고독과 냉담을 느낀다. 요컨대 창부는 예술가의 쌍둥이인 것이다."(<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창비, 1996, 226) 그들은 이런 태도에서 '정신의 귀족주의'를 발견했고 바로 그것에서 따분한 삶의 탈출구를 찾았다. [각주:35]

 

유다를 지배한 것은 '탐욕'이 아니라 '금욕'이라고, 선행과 행복은 신의 것이지 인간의 것이 아니라는 것, 그래서 신의 영광을 드높이기 위해 유다는 스스로 추락했다는 것. 무한한 금욕의 정신으로 천국을 포기하고 지옥으로 갔다는 것. [각주:36]

 

유다의 행위가 '신뢰의 궁극적 형태로서의 배반'이라고 말한다. 어떤 이가 공적 영웅이 되려면 누군가의 배반이 필요한 경우가 있다는 것, 그럴 때는 그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만이 기꺼이 그를 배반할 수 있다는 것. 그렇다면 유다는, 가장 사랑하는 대상을 배반해야만 그 사랑을 완성할 수 있는 상황에 처했던, 비극적인 인물이다. 물론 신학적으로는 터무니없는 오독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문학은 이 오독의 빛에 의지해 인간이라는 심해로 내려간다. [각주:37]

 

소설에서 음악이 흐른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가. 노래는 거기 그대로 있는데 삶에는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 사랑은 식고 재능은 사라지고 희망은 흩어진다. 삶의 그런 균열들 사이로 음악이 흐를 때, 변함없는 음악은 변함 많은 인생을 더욱 아프게 한다. 이 세상을 흐르는 음악이, 흐르면서, 인생을 관찰하는 이야기. 그러니까 인물들이 음악을 듣는 것이 아니라 음악이 인물들의 얘기를 듣는 이야기. 인생은 짧고 음악은 길다. [각주:38]

 

저는 모국어에 갇혀 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역설적이게도 그것이 바로 갇혀 있는 자의 생각이었군요. 세상에는 해답을 알기 전에는 문제가 뭔지조차 알 수 없는 종류의 일이 있습니다. [각주:39]

 

이런 얘기는 좀 쓸쓸하지만 그래도 해볼까. 우리가 어떤 소설을 읽다가 내려놓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독자 각자가 소설에 기대하는 최소한의 어떤 것이 책의 뒷부분에서도 제공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되는 그 순간에 책을 내려놓겠지. [각주:40]

그래서 내가 ㅠㅠ 읽다 만 책이 있다. 정말 슬프게도 경선님의 책이라니. ㅠㅠ 아직 2/3쯤 읽었는데 너무 암울하기만 하다유ㅠㅠㅠㅠㅎ우어어엉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비판적 자각이 정도 이상으로 축적되면, 이라고 소설은 답한다. 여기가 핵심이다. 철거민들이 죽어나가고 동물들이 살육되는 세계에서 죄의식 없이 살려면? 첫째 아무 자각 없이 살아서 분리를 모면하거나, 둘째 분리되더라도 더 윤리적인 쪽을 죽여라. 독한 전언이다. [각주:41]

 

경쾌하게 현대성의 디테일들을 연구한다. 이번에는 영수증이다.

한 장의 영수증에는 한 인간의 소우주가 담겨 있다. ... 술 먹은 다음 날, 화장실 변기에 쏟아놓은 끈적한 토사물처럼 영수증은 우리가 토해낸 일상을 투명하게 반영한다. 몇 개의 숫자, 몇 개의 단어로. 인생이 쓸데없이 길어지는 걸 비웃는, 기이한 미니멀리즘의 세계.(<아주 보통의 연애>, 문학동네, 2011, 10-11)[각주:42]

보면서 웃었던 부분. ㅋㅋ이렇게 재밌게 글을 쓸 수 있다니. 부러운 사람.

 

로버트 펜 워런은 <우리는 왜 소설을 읽는가?>(1962)라는 글에서 이런 대답을 했다. "소설은 우리에게 우리가 원하는 것만을 주지는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소설이 우리에게, 우리가 원하는지조차 몰랐던 것들을 줄 수도 있을 거라는 사실이다."[각주:43]

 

먼저 '쓰기"에 대해. "자신을 비난하지 않고 매일 쓴다고 해서 반드시 글을 잘 쓰게 된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더 나은 인간이 된다는 사실만은 장담할 수 있다. ...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우리의 모습은 달라진다."(<우리가 보낸 순간,소설>, 221-222) 인간은 긍정적인 신호보다 부정적인 신호를 다섯 배 더 강하게 받아들인다는 것, 그러므로 한 번 비난을 받으면 다섯 번 칭찬을 받아야 마음이 원래 상태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것, 글을 쓰는 행위는 자신을 긍정하는 일인 것이어서 그 덕분에 우리 존재가 실제로 바뀔 수 있다는 것 등이 그의 체험적 결론이다.

그리고 '읽기'에 대해. 그는 '무용한 독서'의 소중함을 말하는 와중에 이런 문장을 적었다. "우리가 지금 좋아서 읽는 이 책들은 현재의 책들이 아니라 미래의 책이다. 우리가 읽는 문장들은 미래의 우리에게 영향을 끼친다. 그러니가 지금 읽는 이 문장이 당신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다. '아름다운 문장을 읽으면 당신은 어쩔 수 없이 아름다운 사람이 된다.'" 읽고 쓰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는 후배로서 선배의 결론은 큰 위로와 격려가 된다.[각주:44]

정말 그런 것 같다. 23살, 대학교 4학년 때 내가 그랬다. 독서 교양 강의에서 읽는 책들과, 전공에서 만나는 숱한 원전들을 통해 나는 바뀌었다. '어떻게 바뀌었는데?' 누가 물으면 명쾌하게 대답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나는 그 때를 기점으로 정말 변화했다는 걸 스스로 직감한다.

그래서 끊임없이 읽으려 한다. 특히 마음이 복잡하고 시끄러울 땐 더욱이. 더 책을 놓지않으려한다.

 

"저는 멘토가 될 자격도 능력도 없지만 이것만은 말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꽤 많은 것들이 여러분 뜻대로 안 될 겁니다. 특히 인간관계가 그렇겠죠. 아무리 조심을 해도 분명히 상처를 주거나 받게 될 거예요. 그 난관을, 여러분은 지극히 이기적인 방식으로 돌파하려고 할 것이고, 마침내 돌파할 거예요. 인간이니까. 인간이란 그런 존재이니까. 그리고 훗날 회한과 함께 돌아볼 때가 올 텐데, 바로 그때, 뭔가를 배우게 될 겁니다. 그리고 아주 조금 달라질 거예요. 내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나는 아주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됩니다."

인간은 무엇에서건 배운다. 그러니 문학을 통해서도 배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게서 가장 결정적으로 배우고, 자신의 실패와 오류와 과오로부터 가장 처절하게 배운다. 그때 우리는 겨우 변한다. 인간은 직접 체험을 통해서만 가까스로 바뀌는 존재이므로 나를 진정으로 바꾸는 것은 내가 이미 행한 시행착오들 뿐이다. 간접 체험으로서의 문학은 다만 나의 실패와 오류와 과오가 어떤 종류의 것이었는지를 '파악'하는 데 도움을 주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피 흘릴 필요가 없는 배움은, 이 배움 덕분에 내가 달라졌다고 믿게 할 뿐, 나를 실제로 바꾸진 못한다. 안타깝게도 아무리 읽고 써도 피는 흐르지 않는다.

피 흘려 깨달아도 또 시행착오를 되풀이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생은 반복들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점점 더 좋은 사람이 된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그러나 믿을 수밖에. 지금의 나는 10년 전의 나보다 좀 더 좋은 사람이다. 10년 후의 나는 더 좋아질 것이다. 안 그래도 어려운데 믿음조차 없으면 가망 없을 것이다. 문학은 그 믿음의 지원군이다. 피 흘리지 않으면 진정으로 바뀌지 않는다고는 했지만, 거꾸로 말하면, 피 흘리지 않고 인생을 시뮬레이션 할 수 있는 공간이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각주:45]

 

2010년대 이후 한국 사회는 어쩌면 새로운 계몽의 시대로 접어든 것처럼 보이는데, 이 계몽의 물결은 앞서 인용한 칸트의 저 문장에서 '지성'의 자리에 '감수성'을 넣을 것을 요청한다. 오늘날 '미성숙한'(즉, 계몽되지 못한) 인간이라 불리는 이들이 결여하고 있는 것은 지성이 아니라 감수성이기 때문이다. 성숙한(계몽된) 인간이 갖고 있는 감수성이란, '젠더 감수성'이나 '인권 감수성'이라는 개념에서 그 용례를 찾아볼 수 있는 것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들을 이해하고 행여 그것에 대한 잘못된 지식/믿음(즉 '무지'와 '미신')이 '차별'의 근거로 작동할 수 있는 상황을 예방하거나 비판할 줄 아는 민감함을 의미한다. 이런 감수성은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인 것이 아니다. 나에게 그것이 없다는 것은 내가 누군가에게 상처와 고통을 줄 수 있는 가능성을 상시적으로 품고 있다는 뜻이다. [각주:46]

모르는 게 자랑이 아니며, 핑계가 되지 않는다. 정말 내가 생각하는 부분 그대로!!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이 절대 아니다. 없다는 것은 내가 누군가에게 언제라도 상처와 고통을 줄 수 있다는 것!!

 

타인의 고통에 대한 민감성과 그를 외면하지 못하는 결벽성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길러지는 것이다. 타인에게 열려 있는 통각(痛覺)이 마비돼 있거나 미발달된 이들이 하는 정치는 우리를 고통스럽게 한다. [각주:47]

아마 내가 예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굉장히 이기적이었고(물론 아직도 현저한 부분이 그러하다), 여타의 따뜻한 감정들에 대해서 촌스럽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인간의 깊은 곳까지 내려가서 그 어둠 속에 앉아 있어본 작가는 대낮의 햇살에서도 영혼을 느낄 것이다. 내게 작품의 깊이란 곧 '인간 이해'의 깊이다.[각주:48]

영혼을 느낀다.

 

문제는 이것이다. 어떤 사람이 타인의 고통을 이해할 줄 아는 깊이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가. 내게는 분명한 기준이 있다. 고통의 공감은 일종의 능력인데, 그 능력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자신이 잘 모르는 고통에는 공감하지 못한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한심한 한계다. 경험한 만큼만, 느껴본 만큼만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고통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다고 늘 생각한다. 자의든 타의든 타인의 고통 가까이에 있어본 사람, 많은 고통을 함께 느껴본 사람이 언제 어디서고 타인의 고통에 민감할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곳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보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각주:49]

 

물론 다른 이들도 열심히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열심히 살아서 입신출세한 사람을 선망할 수 있어도 존경까지 할 필요는 없다. 나는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스스로 그 고통을 함께하기로 결심한 사람, 타인의 고통을 덜어주려고 자신의 안락을 포기한 사람들만을 존경한다.

(중략) 성품이 곧 능력이다. 이 판단이 정치적으로는 매우 순진한 것일 수 있음을 안다. 그러나 고집을 부리고만 싶다. [각주:50]

 

오멜라스의 어느 지하실에는 아무 죄도 없는 한 아이가 짐승처럼 묶인 채 굶주림과 외로움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 왜인지는 모르지만 여하튼 그 아이 하나가 그런 고통을 받아야만 오멜라스의 그 풍요로운 행복이 가능하다는 것. 이런 비열한 사회적 계약을 알고도 우리는 계속 이 오멜라스에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가. 그러나 누군가가 당장 그 아이를 구출해내야 한다고 말할 때 다른 누군가는 이렇게 답하리라. 시기상조, 라고. [각주:51]

우리 사회에 만연한 시기상조론을 이렇게 비판해주시는 작가님.

 

나는 그러고 싶다는 유혹을 느끼면서도 그 유혹에 저항하려 애쓰고 있다. 그 대상이 누구건 어떤 이들을 간편하게 '규정'하고 '배제'하는 행위는 그 자체로 폭력일 수 있기 때문이다. [각주:52]

 

나쁜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누구나 무엇을 이용한다. 공허한 삶을 '의미'로 채우기 위해서는 이용할 무엇이 필요하다. 나에게 할 일이 있다는 것, 그 일을 할 때 나는 중요한 사람이 된다는 것, 그러므로 나는 여전히 살 가치가 있다는 것... 그런 느낌이 우리를 사로잡을 때 삶은 얼마나 충만해지는가.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태극기 집회는 정치적 저항이라기보다는 존재론적 축제일지도 모른다. [각주:53]

 

저들을 '괴물'이라고 간주해버리면 마음이 편해진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나를 그들로부터 완벽하게 구별/구원해낼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윤리적 판타지다. [각주:54]

 

이어 그는 '배우란 무엇인가'를 물었다. "배우가 하는 유일한 일은 우리와 다른 사람의 삶 속으로 들어가서 그것이 어떤 느낌인지 관객들에게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메릴 스트립은 작년 최악의 연기로 트럼프가 장애인 기자를 흉내 내던 순간을 꼽았다. 타자에 대한 공감을 유도하는 것이 연기의 본질인데 트럼프의 그것은 정반대의 목적에 기여하는 연기였기 때문이라는 것. 다음과 같이 말할 때 그는 조금 울먹였다. "그 연기는 제 가슴을 무너지게 했고 지금도 잊히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영화가 아니라 실제였으니까요."[각주:55]

연기 그리고 배우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유명인을 향한다고 해서 조롱이 풍자로 변하지는 않는다. 오늘날의 매체 환경 속에서 실명이 노출된 유명인과 익명의 보호를 받는 네티즌 중에서 누가 더 강자인가. 유명인이라면 감수해야 할 고통이라는 것이 있다는 말은 가학을 합리화하는 궤변이다. [각주:56]

 

비판은 언제나 가능하다. 풍자는 특정한 때 가능하다. 그러나 조롱은 언제나 불가능하다. 타인을 조롱하면서 느끼는 쾌감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저급한 쾌감이며 거기에 굴복하는 것은 내 안에 있는 가장 저열한 존재와의 싸움에서 패배하는 일이다. 이 세상에 해도 되는 조롱은 없다. [각주:57]

 

"근대에 이르러 헤아릴 수 없이 복잡하고도 정교한 방식으로여성이 배치된 원리 그 자체를 가리키는 미소지니의 구조적 측면이 이 용어(여성혐오)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김신현경, <말과활>, 2016년 가을호> 핵심은 '구조적 혐오'에 있는데 그보다 '개인적 혐오'의 층위를 먼저 떠올리게 만든다는 단점이 있다는 것. 그래서 남성들로 하여금 '나는 여성을 혐오하지 않는다'라는 개인적 층위의 반론을 제기하게 만드는 면도 있다는 것. 일각에서는 말을 어떻게 바꿔도 이해할 사람은 하고 안 할 사람은 안 할 것이라는 회의론도 있지만 말이다. [각주:58]

!!!!!!!!!!!

어떤 샘이 페미니스트 여학생에게 했던 정말 순수한 질문을 하는 걸 보았을 때 "그래서 네가 여자로서 받은 차별이 뭐가 있어? 세 가지만 말해봐", 그때 내가 느꼈던 어딘가 잘못된 것 같다는 느낌. 혼자 3일을 고민하다가 내렸던 결론이랑 똑같은 부분을 만났다. 정말 말도 안돼. 이럴 수가.

분명 저 학생이 말하는 차별은 여성으로서의 차별을 말하는 것인데, 개인으로서 ㅁㅅ의 차별을 말하라니 질문이 잘못된 것 아닌가.

미소지니 혹은 여성혐오라는 워딩에 대한 저 논의도 비슷한 맥락이라니. 슬푸당.

 

군사독재 시절과는 달리 이제 국가는 죽음을 방치하는 방식으로 살인을 한다. [각주:59]

 

가르시아 마스케스의 자선전 제목은 '이야기하기 위해 살다'이지만 소설가가 아닌 우리에게는 '살기 위해 이야기하다'라는 말이 더 실상에 가까울 것이다. 우리는 대체로 '나'라는 서사가 어떻게 진행되어왔고 또 진행될 것인지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내가 '나'라는 서사의 주인공인 동시에 작가라고 믿는다. 그러다 어떤 사건이 벌어져서 서사의 흐름에 균열이 오거나 반전이 생기면 '다시 쓰기'를 해서 그 사건을 내 삶 안으로 통합해낸다. 예컨대 예기치 못한 이별을 겪고 나서 '아픈 만큼 성숙해지고'라는 옛 노래 제목을 떠올리는 순간, 당신은 당신의 삶을 '쓰고'잇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각주:60]

 

저런 끔찍한 일이 나에게 닥치지 않았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그러나 그 느낌을 공적으로 발설하는 것은 무례하고 유아적인 행위다. [각주:61]

 

 


시는 없으면 안 되는가

 

필사적인 노력에 신비로운 것이라고는 없다. 노력이란, 시도하고 실패하고 다시 시도하고 다시 실패하는, 처절한 세속의 일이다. 조금도 신비롭지 않은 그 노동이 멈추면 시인도 함께 소멸한다. [각주:62]

처절한 세속의 일.

 

폭력과 싸우는 일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릴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수단과 방법을 세심히 가려야 한다고 믿는다. [각주:63]

 

시 평론가 데이비드 오어가 그의 책 <아름답고 무의미한>에서 보고하기를, 어떤 임의의 X에 대해 '나는 X를 좋아한다'와 '나는 X를 사랑한다'의 구글 검색 결과를 비교해보면, 대체로 '좋아한다(like)'가 '사랑한다(love)'보다 세 배 더 많다고 한다. 예컨대 '나는 음악을 좋아한다'가 '나는 음악을 사랑한다'에 비해 훨씬 많다는 것. X의 자리에 '영화', '미국', '맥주' 등등을 넣어도 역시 마찬가지. 그러나 이상하게도 '시(poetry)'만은 결과가 반대여서 시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두 배 더 많다고 한다. 왜일까? 나로 하여금 좀 더 나은 인간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사람은 내가 '사랑하는'사람들이다. 그리고 훌륭한 시를 읽을 때, 우리는 바로 그런 기분이 된다.[각주:64]

 

생존의 트랙을 정신없이 달리다가 문득 이런 의문을 갖는 때가 오는 것이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의미가 있지?' 가장 성공적인 질주를 하는 것처럼 보이는 인간조차도 가끔 이런 의문에 걸려 넘어진다. 이것은 인간이 의미를 추구하는 동물이라는 또렷한 증거다. 인간은 의미를 잊고 살 수는 있어도 의미를 빼앗긴 채 살 수는 없다. 즉 '진정한 삶'을 사유한다는 것은 곧 '삶의 의미'를 사유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삶의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 더 줄이면 이렇다. '왜 사는가?' [각주:65]

 

우리 시대 서바이벌리즘의 전도사들은 반문하리라. '정답이 없는 질문을 던지는 릴케의 시 따위를 도대체 왜 읽어야 한단 말인가?' 나의 오랜 대답은 이렇다. '왜냐하면 삶이란 의미를 찾기 위해 질문을 던지는 그 순간에만 겨우 의미를 갖기 시작하는 것이니까.' 이 대답은 아직 충분히 강하지 못하다. 그래서 나는 (당신과 함께) 더 많은 시를 더 필사적으로 읽지 않으면 안 된다. [각주:66]

 

"너는 너의 삶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시인을 따라 루브르의 토르소를 상상하며 느긋하게 시를 읽어나가다 보면 이 마지막 구절이 죽비처럼 어깨를 내리친다. 왜인가.

첫째, 바꾸라 했으니 'A에서 B로'라는 지침이 있을 법도 한데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지금 어떤 상태에 있건 당신은 바뀌어야 한다. 지금 자신을 바꾸지 않아도 되는 사람은 없다. 둘째, 언제 이 구절을 읽든 우리는 똑같은 명령을 다시 받기 때문이다. '그동안 바뀌려고 노력했는가? 계속 더 바뀌어야 한다.' 요컨대 아폴론의 불완전하고 미완성인 몸통은, 바로 우리의 삶이 언제나 그처럼 불완전하고 미완성인 상태에 있다고, 그러므로 변화란 '예외도 없고 끝도 없는' 우리 모두의 숙제라고 말한다. 삶이 아주 느린 자살처럼 느껴질 때 나는 이 시를 자주 복용한다. [각주:67]

 

"유명해지기 전에 로댕은 고독했다. 그리고 그에게 명성이 찾아온 뒤에 그는 어쩌면 더 고독해졌는지도 모른다. 명성이란 결국 하나의 새로운 이름 주위로 모여드는 온갖 오해들의 총합일 뿐이기 때문이다." [각주:68]

최근 본 영화 <호밀밭의 반항아>가 생각났다. 명성을 얻고 주인공은 더욱 자기 자신에게 파고들었다.

 

토니 타키타니는 거의 평생을 혼자 살면서도 한 번도 고독하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다. 고독이 깊은 습관이 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 앞에 한 여인이 나타나고 토니는 변한다. 토니는 이렇게 생각한다. "고독이 돌연 알 수 없는 무거운 압력으로 그를 짓누르며 고뇌에 빠지게 했다." 그녀를 만난 후에야 고독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 것이다. 사랑은, 이제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려주면서 지금까지의 삶은 부자연스러운 것이었다고 속삭인다. [각주:69]

 

우리는 '고독이 밀려왔다'라는 표현을 흔히 사용하지만, 고독은 어쩌다가 밀려오는 것이 아니라 늘 그 자리에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고독이 가끔 밀려오는 것이 아니고, 고독하지 않다는 착각의 시간들이 가끔 밀려오는 것이다. [각주:70]

 

그것은 진심이다. 입김은 찬 것을 녹이기도 하지만 뜨거운 것을 식게도 한다. 눈물은 당신을 감동시키기도 하지만 당신을 얼어붙게도 한다. 이처럼 사랑이 변한다는 것은, 동일한 것이, 어느 날 문득 정반대의 의미를 갖게 되는 일이다. 그때 우리는 '최초의 입맞춤'으로 돌아가고 싶어서 가슴을 치며 울고 싶어진다. 그 순간의 진심을, 이 시인은 알고 있는 것 같다. [각주:71]

 

아카시아 가득한 저녁의 교정에서 너는 물었지 대체 이게 무슨 냄새냐고

그건 네 무덤 냄새다 누군가 말하자 모두 웃었고 나는 아무 냄새도 맡을 수 없었어

다른 얘들을 따라 웃으며 냄새가 뭐지? 무덤 냄새란 대체 어떤 냄새일까? 생각을 해봐도 알 수가 없었고

흰 꽃잎은 조명을 받아 어지러웠지 어두움과 어지러움 속에서 우리는 계속 웃었어

너는 정말 예쁘구나 내가 본 것 중에 가장 예쁘다 함께 웃는 너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였는데

웃음은 좀처럼 멈추질 않았어 냄새라는 건 대체 무엇일까? 그게 무엇이기에 우린 이렇게 웃기만 할까?

꽃잎과 저녁이 뒤섞인, 냄새가 가득한 이곳에서 너는 가장 먼저 냄새를 맡는 사람, 그게 아마

예쁘다는 뜻인가 보다 모두가 웃고 있었으니까, 나도 계속 웃었고 그것을 멈추지 않았다

안 그러면 슬픈 일이 일어날 거야, 모두 알고 있었지[각주:72]

(<구관조 씻기기>, 황인찬, 민음사, 2012, <유독> 전문)

스무 살 후로 처음 내가 직접 사 본 시집!

아직은 시가 어렵기만 하다. 나도 척척 읽어내고 싶은데 ㅠㅠ..

 

당신이 한번 포기한 적 있는 대상은, 절대로 포기 못 할 대상이 다시는 될 수 없다. 그것을 포기할 때, 절대로 포기 못 하겠다는 그 마음까지 함께 포기한 것이므로. 그러므로 한번 포기한 대상을 다시 포기하는 일은 처음보다 훨씬 쉬워진다. [각주:73]

 

"우리말의 '같이'는 영어의 'like'와 'with'의 뜻을 함께 갖는다. 뭐든 당신과 '같이' 하면 결국엔 당신'같이' 된다는 뜻일까." 늘 시와 같이 살면 시와 같은 삶이 될까, 안 될까. 우리는 영원히 시를 포기하지 말기. [각주:74]

 

나는 그런 글을 쓰고 나면 내 삶이 조금은 더 가치 있어졌다고 느끼는 부류의 사람이다. 누구에게나 그렇겠지만, 도대체가 시간이 너무 없다. 그 얼마 없는 시간을, 내 삶을 더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어주는 일에 나는 써야 한다. [각주:75]

 

정확하게 말하고 싶다는 이런 욕망은 정확하게 사랑받고 싶다는 다른 욕망과 연결돼 있다. 정확하게 사랑받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부족한 알몸"이 부끄럽다. 그런데 네가 나를 안으려들까 봐, 혹은 내가 너에게 안기고 말까 봐, 했던 말을 하고 또 하면서 딴청을 부려야 했다. 내 알몸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도록, 네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해주면 좋겠다. 그때 나는 정확하게 사랑받고 있다고 느낄 것이다. [각주:76]

 

 


넙치의 온전함에 대하여

욕망과 사랑의 구조적 차이를 이렇게 요약해보려고 한다.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는지가 중요한 것은 욕망의 세계다. 거기에서 우리는 너의 '있음'으로 나의 '없음'을 채울 수 있을 거라 믿고 격렬해지지만, 너의 '있음'이 마침내 없어지면 나는 이제는 다른 곳을 향해 떠나야 한다고 느낄 것이다. 반면,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지 않은지가 중요한 것이 사랑의 세계다. 나의 '없음'과 너의 '없음'이 서로를 알아볼 때, 우리 사이에는 격렬하지 않지만 무언가 고요하고 단호한 일이 일어난다. 함께 있을 때만 견뎌지는 결여가 있는데, 없음은 더이상 없어질 수 없으므로, 나는 너를 떠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나의 없음을 당신에게 줄게요>, <정확한 사랑의 실험>, 마음산책, 2014, 26)[각주:77]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면 당신은 지금 사랑 속에 있는 것이다. '홀로 있을 때가 아니라 그와 함께 있을 때, 나는 더 온전해진다.'[각주:78]

아직까지 나는 너랑만 사랑을 했었나보다. 네 안에서 나는 가장 자유로웠고, 온전했었다.

너라는 사람만이 줄 수 있는 것인지, 혹은 그 긴 시간이 가져다줄 수 있는 것인지. 아직은 그걸 잘 모르겠다 나는. 어려워 여전히.

 

우리가 오늘날에도 사랑이라는 것을 하게 되는 것은 하나일 때보다 둘일 때 우리가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다. 나는, 내가 부족한 인간이라는 사실로 더 이상 고통받지 않아도 되게 해주는 누군가를 만나서, 온전해진다. 다만 그것은 위 신화가 말하는 것처럼 운명적 짝을 다시 만나 이뤄지는 기적이 아니라, 상대방이 나로 인해 더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상호 배려로 성취되는 일일 터이다. [각주:79]

상호 배려.

 

위 대사는, 이런저런 요소들이 내 인생을 구성하고 있는데, 거기에는 당신이라는 요소가 없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읽힐 소지가 있다. 이것은 사랑 속에서 주체가 '온전해지는' 일과는 다르다. 아무리 가장 중요하고 또 가장 소중한 요소라 할지라도 요소는 한낱 요소일 뿐이다. 내가 사랑하는 당신을 채우는 '요소'가 아니라 나를 세우는 '구조'(여야 한)다. 나는 당신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당신 속에서 온전해진다. 결여는 여전히 있되 그 결여가 더는 고통이 되지 않는, 온전한 사람.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나를 그런 사람이 되게 한다. [각주:80]

 

그 글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누구나 결여를 가지고 있고 또 부끄러워 대개는 감춥니다. 그러다가 어떤 결정적인 순간에 서로 상대방의 결여를 발견하고,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 결여 때문에 서로가 서로에게 불가결한 존재가 되는 일이 벌어집니다. 나(너)만이 너(나)의 결여를 이해하고 또 보듬을 수 있다는 확신에 함께 도달하는, 작은 기적 같은 순간 말입니다. [각주:81]

 

왜냐하면 누구나 제 몫의 결여를 갖고 있는 것이 인간이고, 또 그런 인간이 홀로 살아가기에는 너무도 버거운 것이 바로 인생이라는 사실을 언젠가부터 저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사랑이란 궁극적으로 우리가 서로를 살아가게 하는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대체로 이기적인 우리가 다음과 같은 놀라운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사랑 속에 있을 때입니다. '나는 사랑한다, 내가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너를 살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너를 살게 함으로써 나 역시 살 가치가 있게 되기 위해서.'

신이 있다면 그가 우리를 사랑하겠지만, 신이 없다면 우리가 서로를 사랑해야만 한다는 것. 이것이 인간의 연약함이자 위대함이라는 것. 그러므로 사랑에 관한 한, 언제나 이렇게 말할 수밖에요. 곁에 있어줄게. 우리가 온전해지기 위해서. [각주:82]

가장 떠오르는 대상은 우리 애들.

많이 많이 사랑하는 아가들.

 

사랑받는 사람이 되는 가장 정확한 방법은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정확한 길이기는 하지만, 쉽고 빠른 길은 아니다.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타인과의 섬세하고 복잡한 커뮤니케이션에 성공해야 한다. 그 어렵고 느린 길을 걸을 능력도 의지도 없는 이들은 그 대신 권력을 가지려 한다. 권력을 얻어 명령의 주체가 되면 커뮤니케이션을 생략해도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각주:83]

타인과의 섬세하고 복잡한 커뮤니케이션.

맞아 맞아 . 끄덕!!!!

 

인간(과 자연)에 대한 당신의 모든 관계는, 당신의 의지의 대상에 상응하는, 당신의 현실적인 개인적 삶의 '특정한 표현'이어야 한다. 당신이 사랑을 하면서도 되돌아오는 사랑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면, 즉 사랑으로서의 당신의 사랑이 되돌아오는 사랑을 생산하지 못한다면, 그리고 당신이 사랑하는 인간으로서의 당신의 생활 표현을 통해서 당신을 사랑받는 인간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당신의 사랑은 무력하며 하나의 불행이다. [각주:84]

 

그런 비판으로는 아무 것도 바뀌지 않는다. 비판당하는 적은 황당한 불쾌감을, 비판하는 나는 얄팍한 우월감을 느끼게 될 뿐, 그 이후 둘은 '이전보다 더 자기 자신인' 존재가 되고 말 것이다. [각주:85]

 

원래 당신은 하나의 '얼굴'이었다. 적어도 전화가 발명되기 전에는 그랬다. 걸어가서 기다리지 않으면 당신을 만날 수 없었다. 당신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당신의 맞은편에 앉아 당신의 얼굴을 바라본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시선을 감당해내는 일이다. 그리고 표정이 머금고 있는 의미를 해독하는 일이다. 나와 당신이 친밀한 사이가 아니라면 이 일은 만만찮은 에너지가 소모되는 노동이다. 이때 당신은, 내가 잘 알지 못하므로 그만큼 부담스러운, 타인이다. 현대 인문학에서 흔히 '타자'라고 부르니까 그렇게 하자. 이때 당신은 '얼굴-타자'다.[각주:86]

다정하다. 아날로그만이 주는 따뜻함.

 

'당신이 틀렸다'고 말하는 부정문이 아니라 '당신은 전적으로 옳지는 않다'는 부정문으로, 전래동화에서처럼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스스로 옷을 벗게 만드는 것이라는 듯이, 세상의 힘센 주장들에게 자신을 되돌아볼 시간을 준다. 이것은 부정을 확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확신을 부정하기 위한 부정문이다. [각주:87]

 

단호한 승리도 단호한 실패도 없다. 오로지 그렇다는 사실만이 단호할 것이다. [각주:88]

 

개인의 고유성은 그 사람이 사용하는 어휘와 어법에서도 생겨난다. [각주:89]

 

이 대화 직후에 미도리가 말없이 '나'의 품에 안겨 오는 것은 당연하다. 이 정도 성의라면 감동받을 만한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너무'라는 간편하고도 흔해빠진 부사어에 습관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이를 여섯 줄의 문장으로 바꿔낸 성의(물론 이것은 사랑의 힘이다)에 있다. 상대방이 자신에게 클리셰(상투어)를 남발한다는 것은 그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각주:90]

내가 <노르웨이 숲>을 보고! 좋았던 부분인데 교수님도 똑같이 발췌하여 생각을 적어주셨다. ㅠㅠ 봄날의 곰이라니 ㅠㅠㅠㅠ헝

내가 너를 유난히 애틋하게 생각하고, 그저 고마운 마음이 드는 건 이 점에서도 이유가 있겠지?

 

이광수는 동경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있던 아내 허영숙에게 이런 편지를 보냅니다.

"5월부터 매달 학비는 60원 보내리다. 그리고 여름 양복값 보낼 터이니 얼마나 들지 회답하시오. 공부하는 중이니 저금 아니해도 좋소. 학비가 곧 저금이오. 여름옷에는 레인코트 같은 것이 있어야 하겠으니 모두 값을 적어 보내시오." 이 책을 엮은 강인숙 선생은 이렇게 덧붙이셨군요. 1930년대에 남편을 두고 두 번이나 유학을 간 여인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뒷받침해준 남편이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라고. [각주:91]

ㅠㅠㅠㅠㅠ이광수 뭔데 스윗해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오늘부터 정주행갑니다 ^^777777

 

책을 다 읽고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손편지라는 것은 왜 별 내용이 없어도 이렇게 마음을 움직이는 것일까. 편지는 문어체의 공간입니다. 가족에게 보내는 다섯 줄짜리 편지라해도 일단 편지의 세계로 들어가면 그이의 말투는 으레 그래야 한다는 듯이 달라집니다. 그런데 이것이 단지 양식의 문제만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 문어체의 공간 안에서만 비로소, 구어체로는 담을 수 없는 그 자신도 몰랐던 진심이 '발굴'되고 심지어 '생산'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라면 말입니다. 문어체만의 특별한 힘이라고 할까요. [각주:92]

 

물속에 살고 있으면서 정작 물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물고기. 우리도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고 잇는 현실(물)이라는 것은 그 대부분이 엇비슷한 일상과 그것의 권태로운 반복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그것이 너무 익숙하고 진부한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생각이라는 것을 하기가 가장 어려운 대상이라는 것. 그래서 우리는 실제로 그것에 대해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일상과 그 반복이야말로 우리 인생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면, 그것들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사느냐 하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이 아닌가? [각주:93]

 

생각하는 방법이란 곧 선택하는 방법이라는 것. 어떤 현실과 맞닥뜨렸을 때 이를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다른 생각을 의식적으로 선택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늘 같은 방식으로만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상 생각을 하지 않는 것과 같다. [각주:94]

 

삶은 그 자체로 가치 있거나 무의미한 것이 아니며, 어느 쪽이 될 것인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는, 아주 심각한 이야기다. [각주:95]

 

네 번째, 곤란을 겪고 나서도 배우지 않는 사람. 이쯤에서 우리는 속으로 생각한다. '내 비록 태어나면서부터 도를 알지는 못하였고, 또 꾸준히 배움에 힘썼다고 자신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곤란을 겪고 나서는 시행착오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나는 공자가 우리의 이런 속생각을 예측하고 바로 다음과 같은 말을 하기 위해 이 모든 인간유형론을 고안한 게 아닐까 상상해본다. '너는 네 생각과는 달리 3번이 아니라 4번인 것이다.' 나는 내 시행착오가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 이유를 이렇게 납득했다. [각주:96]

 

이를테면 좋은 '멘토'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멘토르'가 되어야 한다는 얘기다. 지혜와 명성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신뢰라는 것. 나를 잘 아는, 내 편인, 그런 사람만이 나를 진정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 [각주:97]

나의 방법이 틀리지 않았어 라고 이야기해주는 것 같았다. 토닥토닥.

 

말하기보다 글쓰기가 더 어렵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만큼 말을 쉽게 해왔다는 뜻일 수 있다. 지금보다 훨씬 미성숙했던 시절, 나는 참 많은 말을 함부로 했던 것 같다. 처음부터 그런 생각을 하며 직업을 택한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내가 글을 쓰는 사람이 된 것이 다행스럽다고 여긴다. 내게 글을 쓴다는 것은 극도로 천천히 말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충분히 생각할 수 있고 잘못을 수정할 수 있으며 오해를 덜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말이 있는 세계에 글도 함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그래서 나는 육체적으로 말하기가, 정신적으로는 글쓰기가 더 편하다. [각주:98]

작년에, 너랑 많은 이야기들을 하며 우리는 그랬지. '말을 아끼자' 혹은 '듣자'라고. 꽤 오래간 잊고 지냈던 것 같다. 그때 우리는 건강한 생각을 한 것 같아. !!

 

모두가 자신만의 매체를 갖게 된 이 시대가 선사한 축복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내 눈에 더 잘 보이는 것은 국민 모두가 언론인이 되면서 발생하기 시작한 명백한 재앙들이다. 언론이 권력이라고 불리는 것이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닌 것은 세상에 뿌려져 회수할 수 없게 되는 문장만큼 끈질기게 살아남는 것이 달리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펜이 칼보다 강하다는 말을 한 치의 의혹도 없이 믿는다. [각주:99]

 

확실히 작품은 사람과 비슷하다. 첫인상이 전부는 아니라는 점에서 말이다. 더 심각하고 진지하게 말하자면, 한 번 보고는 아무것도 제대로 알 수 없다는 점에서 말이다. 이것은 평론가로서 내가 갖고 있는 '직업윤리'이지만, 창작자들에게 기대하는 '작업윤리'이기도 하다. [각주:100]

 

 

정말!! 내가 죽기전에 신형철 교수님 그리고 책들을 알게 되어서 너무 행복하다.

작년의 책이 '모멸감' 그리고 '개인주의자 선언'이었다면 올해의 책은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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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지도 못하게 얘기가 꼬이면서 오는 말에 가는 말로 응수하는 거친 말다툼이 한바탕 이어진 뒤, 지금까지 두 사람을 이어주던 유대감이 치명적으로 손상되고 말았다는 느낌이 있었다. 그녀 안에 돌덩이처럼 딱딱해져서 죽어버린 것이 있었다. [각주:1]

이럴 때 나는 머리에서 하고 소리가 나는 것 같다. 일말의 모든 기대조차 사라지는 소리. 그리곤 입을 닫게 된다.

정말 하루키의 표현처럼 내 안에 돌덩이처럼 딱딱해져서 죽어버린 것이 생긴다.

 

나와 그녀는 우연한 기회에 각자의 스무 살 생일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것이 어떤 하루였는가, 라는 것이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스무 살 생일에 대해 잘 기억하고 있다. [각주:2]

나의 스무 살 생일? 엉엉 울었다. 기숙사 앞에서. ㅋㅋㅋ

슬픈 일이 있었던 게 아니다. 하루 종일 데이트를 했고, 기숙사 앞에서 생일의 마지막 선물과 편지까지 받았다. 그런데 왜 울었을까 나는. 아마 기대했었기 때문이리라. 생일에 받을 편지에 대해, 편지의 내용에 대해, 생일에 듣고 싶은 말들에 대해. 

그리고 다른 모습이지만 또 비슷하게 스무 다섯 살 생일을 보냈다.

 

비가 바람에 휘날려 창유리에 부딪치면서 불규칙한 소리를 울렸다. 침묵이 이어지는 동안, 노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의 눈을 보고 있었다. 그녀의 귓속에서 시간이 불규칙한 고동을 새겼다. [각주:3]

적막이 이는 때를 정말 잘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귓속에서 시간이 불규칙한 고동을 새겼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귓볼을 긁적였다. 예쁜 모양의 귓볼이다. "인간이란 어떤 것을 원하든, 어디까지 가든, 자신 이외의 존재는 될 수 없는 것이구나, 라는 것. 단지 그것뿐이야."[각주:4]

 

"...(중략)... 나이를 먹는다든가 먹지 않는다든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생일이라는 것은 당신에게 일 년에 딱 한 번 밖에 없는 정말로 특별한 날이니까 이건 좀 더 소중하게 여겨야지요. 그리고 유례를 찾기 힘든 그 공평함을 축복해야지요."라고. [각주: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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