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SMALL

 

 

 

내가 교수로서 하는 이은 가르치는 일이 아니라 배우는 일이다. 정확히 가르치기 위해서는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 되니까 이 직업의 본령은 차라리 배움에 가깝다. 내가 재직 중인 조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학생들에게 배우며 이 글들을 썼다. 내가 제자로 살 때는 선생이 제자를 사랑한다는 말이 거짓말인 줄 알았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게 됐다. [각주:1]

수업을 하는 건 나지만, 늘 배우는 쪽은 오히려 나다. 교사로서 나도 끄덕일 수밖에 없던 곳.

 

 


슬픔에 대한 공부 - 슬픔

 

피해자는 자신이 얼마나 아픈지를 그 양과 질 그대로 알아야 할 사람이 있다면 그게 바로 가해자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가해자 본인의 자발적 역량만으로는 그런 결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가해자의 성품과 노력의 차이는 결과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근원적 무능력, 즉 '타인의 슬픔을 똑같이 느낄 수 없음'이라고 요약될 그것과 관계하는 사태이기 때문이다. 이 점을 고통스럽게 절감할 때 피해자는 가해자를 교육하여 그로 하여금 제 무능력을 뛰어넘게 만들고 싶다는 강렬한 교육열을 느끼게 될 것이다. [각주:2]

인간의 근원적 무능력..

 

"우리가 스스로 야기한 상처에 대해서는 아무런 동정심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야기하지 않은 고통 앞에서는 울 수 있어도 자신이 야기한 상처 앞에서는 목석같이 굴 것이다."(사이먼 메이, <사랑의 탄생>, 문학동네, 2016, 292) 이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자신이 원인을 제공한 슬픔에 더 깊이 공감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행동한다. 이 경우 타인의 슬픔은 내가 어떤 도덕적 자기만족을 느끼며 공감을 시도할 만한 그런 감정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추궁하고 심문하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 슬픔은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 나를 불편하게 할 것이다.[각주:3]

정말 읽으면서 소름돋는 대목이었다. 인간의 민낯을 이렇게 여과없이 알려줘도 되는걸까?

이어서 떠오르는 나의 경험들, 그리고 내가 겪은 상황들.

 

아가멤논과 스티븐과 우리 사이에는 단 하나의 결정적인 공통점이 있어 다른 많은 차이점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자신을 유지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한, 하나의 생명체라는 것. 이것은 거부할 수도 박살낼 수도 없는 인간의 조건이다. <킬링 디어>가 엄밀한 의미에서 '비극'인 것은 이 인간 조건의 비극성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특정한 결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바로 결함이라는 것. 그러므로 인간이 배울 만한 가장 소중한 것과 인간이 배우기 가장 어려운 것은 정확히 같다. 그것은 바로 타인의 슬픔이다. [각주:4]

 

논리를 갖다 댈 영역이 아니라는 느낌 때문이었다. 이 세상의 슬픔 중에서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 것은 많지 않겠으나, 그런 논리들이 그 슬픔에 '위로'가 되지는 못할 것이다. [각주:5]

 

결론을 당겨 말하자면 이렇다. 어떤 책이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으려면 그 작품이 그 누군가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담고 있어야 한다는 것. 위로는 단지 뜨거운 인간애와 따뜻한 제스처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 나를 위로할 수는 없다. 더 과감히 말하면, 위로받는다는 것은 이해받는다는 것이고, 이해란 곧 정확한 인식과 다른 것이 아니므로, 위로란 곧 인식이며 인식이 곧 위로다. 정확히 인식한 책만 정확히 위로할 수 있다. [각주:6]

이 작가님, 정말 꼭꼭 씹어서 주신다. 너무 감사한 분. 이런 분의 책을 읽으면 정말로 행복해진다. "이 책 아껴서 읽는 중이야"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이 달에만 해도 몇 번을 한 말이기도 하다. 또 몇 번을 추천한 책이기도 하고.

 

제대로 아는 사람만이 '제대로 앎' 그 자체로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다. 두 저자가 연출자이고 작가이기 때문에 특별히 슬픔에 대해 연구했으리라. 모르는 것을 표현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각주:7]

 

"순수한 휴식은 슬픔의 고통을 치료해주는 가장 효과적인 치료제다. 그러나 슬퍼하는 사람이 참 하기 어려운 것 가운데 하나도 휴식이다."(<슬픔의 위안>, 김명숙, 현암사, 161) 휴식이 왜 어려운가. 저자들은 "슬픔이 원기를 고갈시키는 것처럼, 좋은 감정 역시 에너지를 무척이나 소진시킨다는 점(165)을 지적한다. 많은 사람들이 내게 와서 따뜻한 위로를 건넨다. 그것은 고마운 일이므로 나는 좋은 감정으로 응대한다. 그러나 그 응대는 그 자체로 나의 감정적 자원을 크게 소모시키는 일이다. 그런 일들이 피곤하다고 느껴지면 고마워할 줄 모르는 나 자신에게 마음이 불편해져서 그것이 또 나를 갉아먹는다.

(중략)

저자들은 이렇게 말을 잇는다. 슬픔에 빠져 있지만 말고 외출도 하고 사람도 만나라고 말하는 이들의 헛소리에 신경 쓰지 말라고. 당신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그저 아무 일도 안 하고 쉬는 것일 뿐이라고. 집안일도 남에게 맡겨버리고 필요하면 수면제도 먹으라고. 수면제 대신 캐머마일 차를 드셔보시라고 말하는 친척의 말은 샌드위치 그만 먹고 도장이나 핥으라는 말과 같으니 과감히 무시하라고. 함게 기도해주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이렇게 말하라고. "기도는 제가 직접 할 테니 설거지나 좀 해주시겠어요?"(168) 이쯤 되면, 정확히 알지 못하면 제대로 위로할 수 없다는 말이 무엇인지 실감할 수 있지 않은가. 문학에서도 그렇고 인생에서도 그렇다.[각주:8]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기도는 제가 직접 할 테니 설거지내 해주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이렇게나 쿨하고 멋질 일이냐구 정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트라우마라는 말의 가장 오래된 뿌리는 '뚫다'라는 듯의 그리스어다. 트라우마에 의해 인간은 꿰뚫린다. 정신분석 사전은 그 꿰뚫림의 순간을 구성하는 요소들로 충격의 강렬함, 주체의 무능력, 효과의 지속성 등을 들고 있다. 그러나 이런 설명으로는 실감이 발생하지 않는다. 그래서 언젠가 다음과 같은 설명을 들었을 때에야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아주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트라우마에 관한 한 우리는 주체가 아니라, 대상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나는 트라우마를...'이라는 문장은 애초에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직 '트라우마는 나를...'이라고 겨우 쓸 수 있을 뿐이다.

한 인간이 어떤 과거에 대해 '주체'가 아니라 '대상'이 되어버리는 이런 고통이 얼마나 참혹한 것인지 당사자가 아닌 이들은 짐작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 많이 공부하고 더 열심히 상상해야 하리라.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대상으로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잊는다. 그걸 잊은 사람들이 그들에게 말한다. 이제는 정신을 차릴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더 이상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지 말라고. 이런 말은 지금 대상으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주체가 될 것을, 심지어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주체가 될 것을 요구하는 말이다. 당신의 고통이 나를 불편하게 한다는 말은 얼마나 잔인한가. 우리가 그렇게 잔인하다.

며칠 전 광주트라우마 센터의 초대를 받아 강연을 했다.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감히 수락한 것은, 내가 부족한 사람임을 인정하고 물러서는 것으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상처와 위로'에 대해 요즘 내가 어떤 공부를 하고 있는지를 말하기 위해 갔다. 강연 중에 '문학은 나태한 정신을 고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상처 입은 마음을 위로 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내용의 말을 하다가 잠시 주춤했다. 누군가에게는 아직도 살아 있는 현실인 '고문'을 비유로 사용하는 일은 이제 그만두어야겠다는 생각을 그 순간 처음으로 했다. 계속 공부해야 한다. 누군가의 터널 속 어둠의 일부가 되지 않기 위해서. [각주:9]

정말 계속 공부해야 한다. 계속 고민해야 하고, 계속 상상해야 한다. 내가 알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 내가 알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모르는 것이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므로.

계속 공부해야한다고 말씀해주셔서 이 교수님이 너무 좋다. ㅠㅠㅠㅠㅠㅠㅠㅠ정말 좋다. 한 번도 뵌적 없지만, 너무 좋다 ㅠㅠㅠㅠㅠㅠㅠ나도 수업듣고 싶어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교수님의 학생이 되고 싶어요...힝

 

이제 그는 한번 알게 되면 다시는 원상태로 돌아갈 수 없는 한 가지 비밀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가장 완벽한 사랑의 경우에서조차 한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덜 깊게 사랑한다는 사실이었다. 똑같이 착한, 똑같이 재능을 타고난, 똑같이 아름다운 두 사람이 있을 수는 있지만, 상대를 똑같이 사랑하는 두 사람은 있을 수 없다.(손턴 와일더,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 샘터, 2010, 97)[각주:10]

 

그 안간힘의 본질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사건은, 그것을 감당해낸 사람만을, 바꾼다. 한수는 제가 저지른 일에서 도망쳐버리고 말았지만, 혜화는 스스로 아이를 낳았고 또 잃었다. 이런 종류의 사건이 한 사람을 어떻게 또 얼마나 변화시키는지,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다 알 수 없으리라. 혜화는 생명의 귀함을 제 육체로 실감하는 사람, 생명의 버려짐을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병들거나 버려진 개를 위해 살기, 그것이 혜화의 두 번째 삶이 되었다. [각주:11]

 

그러므로 한수가 혜화 앞에 다시 나타난 것이 그 자신에게는 나름대로 최소한의 자격과 명분을 갖춘 것으로서 필연적이고 필요한 일이었겠으나 혜화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일단 혜화가 그동안 느낀 절망감과 배신감이 해소되지 않은 데다가, 그 감정을 억누르고 겨우 뿌리내린 삶이 다시 뿌리부터 흔들리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혜화 쪽에서도 그에 상응하는 동기가 마련되지 않는다면 한수의 기도는 제 죄책감을 해소하려는 일방적이고 이기적인 한풀이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만다. [각주:12]

 

이 장면에서 이 영화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닥쳐오는 슬픈 일을 미리 알고 막아낼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그 슬픔을 어떻게 겪어내느냐에 있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한수가 혜화에게 준 가장 큰 상처는, 그가 끝내 그의 모친을 설득하지 못한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혜화가 가장 고통스러울 때 그의 곁에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두 사람이 다시 만나 해야 할 일은, 그들이 함게 만든 아이를 혜화 혼자 떠나보내야 했던 그 순간을 재연해서, 이번에는 함께 그 아이를 떠나보내는 일이다. 그러니까 그들에게 필요한 일은 아이를 '다시 찾는'일이 아니라 아이를 '다시 잃는' 일이었다. [각주:13]

 

상처와 고통의 양을 저울 위에 올려놓는 일이 비정한 일인 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비정한 일은, 네가 아픈 만큼 나도 아프다고, 그러니 누가 더 아프고 덜 아픈지를 따지지 말자고 말하는 일일 것이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실제로 덜 아픈 사람이다. 지배하는 사랑과 미성숙한 사랑의 공통점 중 하나는 저울을 사용할 줄 모르거나 사용하지 않으려 하는 데 있다. [각주:14]

 

우리가 흔히 삶의 진실이라고 부르는 것은 저 인생의 얼굴에 스치는 순간의 표정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 표정을, 어떻게 말로 표현하나. 행복한 가족의 어느 가장이 아내에게 한마디 말도 없이 문득 자살을 감행할 수도 있는 게 삶이라는 것을, 어떻게 설명하나. 그냥 보여줄 수밖에. 그 남자의 뒷모습만을 하염없이 보여줄 수밖에. 비트겐슈타인이 말했다. "세계가 어떻게 있느냐가 신비스러운 것이 아니라 세계가 있다는 것이 신비스러운 것이다."<논리철학논고>(1921)의 후반부다. [각주:15]

 

중년 웨이터는 젊은 동료를 부드랍게 나무라며 그와는 다른 태도를 취한다. "나는 카페에 밤늦게까지 머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 편이야."(<깨끗하고 불빛 환한 곳>, 어니스트 헤밍웨이, 240쪽) 이윽고 노인은 떠나고 젊은이는 서둘러 퇴근한다.[각주:16]

나도 좋아! 카페에서 밤늦게까지 머물기 좋아.

이렇게 밤늦게 까지 카페에서 따뜻한 커피 마시며 머무는 생각을 떠올리면, 대학생때 자주가던 카페 노리가 떠오른다. 노랑 불빛 만연한 그곳은 (당시에 내가 생각했던 촌스러운 청주라는) 세계와 단절된 다른 세상이었다. 가장 서울스러움을 대변해주는 곳이었으니까. 그곳에서 보낸 시간들은 아직까지도 충만한 기억으로 내 어딘가에 남아있다. 고마운 곳, 시간들.

 

"나는 사랑이 안으로 침입하는 것인지 밖으로 터져 나오는 것인지조차도 아직 알지 못한다." 사랑은 바이러스처럼 침입해서 나를 점령해버리는 것인가, 아니면 죄수처럼 갇혀 있다가 나라는 감옥을 뚫고 나오는 것인가. [각주:17]

 

달콤한 고통이 무엇인지를 꿈과 잠의 주체인 우리는 안다. 꿈과 잠에 비유해본다면, 그녀의 문장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한없이 눈물을 흘리다가 탈진한 상태로 깨어나서는 한참을 더 울게 되는 그런 꿈이고, 탈진한 상태로 깨어나서 한참을 더 울다가 사랑하는 사람의 품에 안겨 그 슬픔이 달콤한 안도감으로 서서히 바뀌는 것을 느끼는 순간 다시 찾아오는 그런 잠이다. [각주:18]

한참을 바라본 부분. 어떻게 '달콤한 고통'을 이렇게 표현할 수가 있지?

 

우리는 특정한 순간에만 슬픈 것이 아니라 사실은 대체로 슬프기 때문이 아닌가. 인간은 본래 슬픈 짐승이고 우리는 모두 슬픔의 식민지가 아닌가. [각주:19]

인간은 본래 슬픈 짐승. 대체로 우리는 슬프다.

 

돌아보지 말라고 하면 결국 돌아보게 된다. 이 모티프가 구약의 창세기에서 한국의 민담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발견되는 것은 이 설정이 욕망의 본질(금지가 있는 곳에 위반이 있다)을 드러내는 효과적인 장치이기 때문일 것이다. [각주:20]

 

오르페우스 신화가 비극적인 것은 이것이 사랑하는 연인을 제 손으로 한 번 더 죽인 사람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별의 순간에 연인은 나를 떠남으로써 내게서 한 번 죽는다. 그런데 더 사랑하는 사람은 더 사랑하는 사람의 위치에 서있기 때문에 이별의 순간에 상대방을 질리게 만들 수 있다. 죽은 연인을 살리려는 노력이 외려 그를 한 번 더 죽이게 되는 경우다. 이 경우 떠난 것은 너이지만, 네가 돌아올 수 없게 만든 것은 내가 되고 만다. [각주:21]

 

세상에는 참지 않는 사람들이 있고 참아내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서로 역할을 바꾸는 경우는 거의 없다. 불공평한 일이다. 참지 않는 사람들은 늘 안 참고, 참는 사람들은 늘 참는다. 참지 않는 사람들은 못 참겠다고 말하면서 안 참는다. 그들에게는 늘 '참을 수 없는' 이유가 있다. 그러나 참는 사람들은 그냥 참는다. 그들이 참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봐주고 염려해주는 사람도 없다. [각주:22]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맞아. 아유 못참겠어! 라고 말하면서 안 참지. 읽으면서 웃었던 부분.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당신이 늘 울음을 참아왔으므로 당신과 비슷한 사람을 알아본 것이다. 당신은 보이지도 않는 그 사람의 성대를 들여다보고 있다. 왜 성대인가. 눈물은 눈에서 흐르지만 울음은 목구멍에서 치솟는다. 그래서 울음 참는 일이 '울음을 삼킨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각주:23]

 

다음 시를 보니, 당신은 참을 수 없다고 말하는 또 다른 당신의 말조차 못 들은 척했다. 왜 그 말을, 잘 듣는(effect) 약이 대신 들어야(listen) 하나. 왜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만 말하나. [각주:24]

캬.. 진짜 맛있는 글이다 정말. 이렇게 대구마저 잘 할 일입니까!!!!!!!! 증맬루 교수님 너무 므찌자나요!!!!!!!!!!!!!!!!!!!!!!!!!!!!!!!!!!!!!!!!

 

그러니 이 시는 결국 "그 젊은이는 천진하게 여자에게 웃었다"와 "여자는 그 젊은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라는 두 문장으로 요약된다. 아니, 더 짧게는, "천진하게"와 "물끄러미"의 어긋남에 모든 게 들어 있다. 사내가 창피해했거나 화를 냈거나 혹은 허세라도 부렸다면, 그녀는 희망을 가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사내는 "천진하게" 웃었다. 그녀는 깨달았을 것이다. 이 사내는 바뀌지 않겠구나, 나는 이 천진함을 견디지 못하겠구나, 결국 이 사내를 미워하게 되겠구나. 그러니 그녀의 "물끄러미" 안에는 또 얼마나 많은 슬픔이 있었을까. [각주:25]

 

어떤 자리이건 어떤 장르이건 능란하게 소화해내는 이가 프로일 것이지만, '할 수 없는 것은 할 수 없다'고 말하는 이는 예술가일 것이다. 존재의 필연성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들 말이다. 그들은 말한다. '난 그런 것은 할 수 없어요. 어제는 할 수 있었을 거예요. 내일도 혹시 가능할지 모르겠군요. 그러나 지금은, 지금은 도저히 할 수 없습니다.'[각주:26]

 

그의 고통은 수다스럽지 않다. 진정한 고통은 침묵의 형식으로 현존한다. 고통스러운 사람은 고통스럽다고 말할 힘이 없을 것이다. 없는 고통을 불러들여야 할 때 어떤 가수들은 울부짖고 칭얼댄다. 그는 그럴 필요가 너무 없다. [각주:27]

 

자신의 진실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 채 규정되는 모든 존재들은 억울하다. 이 억울함이 벌써 폭력의 결과다. '폭력'의 외연은 가급적 넓히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이런 정의를 시도해본다. '폭력이란? 어떤 사람/사건의 진실에 최대한 섬세해지려는 노력을 포기하는 데서 만족을 얻는 모든 태도.'[각주:28]

섬세해지려는 노력을 포기하는 데서 만족감을 얻는 모든 태도. 폭력의 사전적 정의가 아닐지라도, 정말 좋다. 내년에 폭력 수업을 하게 되면 이렇게 말해주어야지! 출처를 밝히고!

 

"그 이중성 자체가 학대받은 아이들의 특징이에요." 이 말은 나를 흔들어놓았다. 그와 동시에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학대받은 아이들에 대해서, 나는 잘 모르고, 그 학생은 안다는 것. [각주:29]

 

"저는 불판 위에서 구워지는 고기를 보는 일도 힘겨울 때가 있어요." 바로 이런 사람이기 때문에 오히려 그 소설을 쓸 수 있었으리라. 이것은 '폭력에 대한 감수성'의 문제다. 이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더 민감해져도 좋다고 나는 생각한다. [각주:30]

 

 


삶이 진실에 베일 때 - 소설

 

어딘가에 단편소설은 삶을 가로지르는 미세한 파열의 선 하나를 발견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고 썼었다. 삶의 어딘가에 금이 가고 있는데 인물들은 그것을 모른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고 나서야 그들은 파열을 깨닫는다. [각주:31]

 

내가 타인을 보는 곳 말고 타인이 나를 보는 곳으로 가기, 거기서 내 눈을 버리고 타인의 눈을 얻기, 그리고 마침내 그 타인의 눈으로 나를 보게 되기. [각주:32]

 

나도 따라 울었다. 이별은 슬픈 것이니까. 나의 눈물에 거짓은 없었다. 그러나 졸업식 날 아무리 서럽게 우는 아이도 학교에 그냥 남아 있고 싶어 우는 건 아니다.(<그림움을 위하여>, 문학동네, 2013, 76)[각주:33]

 

화자는 커피숍에서 젊은이들을 바라보며 이토록 솔직하게 질투하고 또 연민한다. 노인이 재현의 대상이 되는 일도 드물지만 그들이 재현의 주체가 되는 일은 더더욱 드물다. 아무래도 재현의 권력은 젊은이들에게 있으니까. 그런 환경에 익숙해져서일까, 가끔 젊은이들은 노인에게는 마치 내면이라는 것이 없다는 듯 행동할 때가 있다. 선생의 소설에는 재현 권력의 통쾌한 역전이 있다. 덕분에 알게 된다. 온 세상이 죄다 젊은이들만을 위한 '멍석'인 세상에서 노년의 내면은 제대로 주목받지도 이해되지도 못했다는 사실을, 재현의 장에서 노인들은 눈과 입을 모두 빼앗겼다는 사실을. [각주:34]

그래서 정말 가끔은 많이 무섭다. 내가 더이상 젊은이가 아닐까봐. 현명하지 못한 걱정인 건 알지만 그래도 때때로 나를 찾아오는 두려움.

 

"창부는 격정의 와중에서도 냉정하고, 언제나 자기가 도발시킨 쾌락의 초연한 관객이며, 남들이 황홀해서 도취에 빠질 때에도 그녀는 고독과 냉담을 느낀다. 요컨대 창부는 예술가의 쌍둥이인 것이다."(<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창비, 1996, 226) 그들은 이런 태도에서 '정신의 귀족주의'를 발견했고 바로 그것에서 따분한 삶의 탈출구를 찾았다. [각주:35]

 

유다를 지배한 것은 '탐욕'이 아니라 '금욕'이라고, 선행과 행복은 신의 것이지 인간의 것이 아니라는 것, 그래서 신의 영광을 드높이기 위해 유다는 스스로 추락했다는 것. 무한한 금욕의 정신으로 천국을 포기하고 지옥으로 갔다는 것. [각주:36]

 

유다의 행위가 '신뢰의 궁극적 형태로서의 배반'이라고 말한다. 어떤 이가 공적 영웅이 되려면 누군가의 배반이 필요한 경우가 있다는 것, 그럴 때는 그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만이 기꺼이 그를 배반할 수 있다는 것. 그렇다면 유다는, 가장 사랑하는 대상을 배반해야만 그 사랑을 완성할 수 있는 상황에 처했던, 비극적인 인물이다. 물론 신학적으로는 터무니없는 오독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문학은 이 오독의 빛에 의지해 인간이라는 심해로 내려간다. [각주:37]

 

소설에서 음악이 흐른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가. 노래는 거기 그대로 있는데 삶에는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 사랑은 식고 재능은 사라지고 희망은 흩어진다. 삶의 그런 균열들 사이로 음악이 흐를 때, 변함없는 음악은 변함 많은 인생을 더욱 아프게 한다. 이 세상을 흐르는 음악이, 흐르면서, 인생을 관찰하는 이야기. 그러니까 인물들이 음악을 듣는 것이 아니라 음악이 인물들의 얘기를 듣는 이야기. 인생은 짧고 음악은 길다. [각주:38]

 

저는 모국어에 갇혀 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역설적이게도 그것이 바로 갇혀 있는 자의 생각이었군요. 세상에는 해답을 알기 전에는 문제가 뭔지조차 알 수 없는 종류의 일이 있습니다. [각주:39]

 

이런 얘기는 좀 쓸쓸하지만 그래도 해볼까. 우리가 어떤 소설을 읽다가 내려놓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독자 각자가 소설에 기대하는 최소한의 어떤 것이 책의 뒷부분에서도 제공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되는 그 순간에 책을 내려놓겠지. [각주:40]

그래서 내가 ㅠㅠ 읽다 만 책이 있다. 정말 슬프게도 경선님의 책이라니. ㅠㅠ 아직 2/3쯤 읽었는데 너무 암울하기만 하다유ㅠㅠㅠㅠㅎ우어어엉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비판적 자각이 정도 이상으로 축적되면, 이라고 소설은 답한다. 여기가 핵심이다. 철거민들이 죽어나가고 동물들이 살육되는 세계에서 죄의식 없이 살려면? 첫째 아무 자각 없이 살아서 분리를 모면하거나, 둘째 분리되더라도 더 윤리적인 쪽을 죽여라. 독한 전언이다. [각주:41]

 

경쾌하게 현대성의 디테일들을 연구한다. 이번에는 영수증이다.

한 장의 영수증에는 한 인간의 소우주가 담겨 있다. ... 술 먹은 다음 날, 화장실 변기에 쏟아놓은 끈적한 토사물처럼 영수증은 우리가 토해낸 일상을 투명하게 반영한다. 몇 개의 숫자, 몇 개의 단어로. 인생이 쓸데없이 길어지는 걸 비웃는, 기이한 미니멀리즘의 세계.(<아주 보통의 연애>, 문학동네, 2011, 10-11)[각주:42]

보면서 웃었던 부분. ㅋㅋ이렇게 재밌게 글을 쓸 수 있다니. 부러운 사람.

 

로버트 펜 워런은 <우리는 왜 소설을 읽는가?>(1962)라는 글에서 이런 대답을 했다. "소설은 우리에게 우리가 원하는 것만을 주지는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소설이 우리에게, 우리가 원하는지조차 몰랐던 것들을 줄 수도 있을 거라는 사실이다."[각주:43]

 

먼저 '쓰기"에 대해. "자신을 비난하지 않고 매일 쓴다고 해서 반드시 글을 잘 쓰게 된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더 나은 인간이 된다는 사실만은 장담할 수 있다. ...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우리의 모습은 달라진다."(<우리가 보낸 순간,소설>, 221-222) 인간은 긍정적인 신호보다 부정적인 신호를 다섯 배 더 강하게 받아들인다는 것, 그러므로 한 번 비난을 받으면 다섯 번 칭찬을 받아야 마음이 원래 상태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것, 글을 쓰는 행위는 자신을 긍정하는 일인 것이어서 그 덕분에 우리 존재가 실제로 바뀔 수 있다는 것 등이 그의 체험적 결론이다.

그리고 '읽기'에 대해. 그는 '무용한 독서'의 소중함을 말하는 와중에 이런 문장을 적었다. "우리가 지금 좋아서 읽는 이 책들은 현재의 책들이 아니라 미래의 책이다. 우리가 읽는 문장들은 미래의 우리에게 영향을 끼친다. 그러니가 지금 읽는 이 문장이 당신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다. '아름다운 문장을 읽으면 당신은 어쩔 수 없이 아름다운 사람이 된다.'" 읽고 쓰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는 후배로서 선배의 결론은 큰 위로와 격려가 된다.[각주:44]

정말 그런 것 같다. 23살, 대학교 4학년 때 내가 그랬다. 독서 교양 강의에서 읽는 책들과, 전공에서 만나는 숱한 원전들을 통해 나는 바뀌었다. '어떻게 바뀌었는데?' 누가 물으면 명쾌하게 대답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나는 그 때를 기점으로 정말 변화했다는 걸 스스로 직감한다.

그래서 끊임없이 읽으려 한다. 특히 마음이 복잡하고 시끄러울 땐 더욱이. 더 책을 놓지않으려한다.

 

"저는 멘토가 될 자격도 능력도 없지만 이것만은 말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꽤 많은 것들이 여러분 뜻대로 안 될 겁니다. 특히 인간관계가 그렇겠죠. 아무리 조심을 해도 분명히 상처를 주거나 받게 될 거예요. 그 난관을, 여러분은 지극히 이기적인 방식으로 돌파하려고 할 것이고, 마침내 돌파할 거예요. 인간이니까. 인간이란 그런 존재이니까. 그리고 훗날 회한과 함께 돌아볼 때가 올 텐데, 바로 그때, 뭔가를 배우게 될 겁니다. 그리고 아주 조금 달라질 거예요. 내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나는 아주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됩니다."

인간은 무엇에서건 배운다. 그러니 문학을 통해서도 배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게서 가장 결정적으로 배우고, 자신의 실패와 오류와 과오로부터 가장 처절하게 배운다. 그때 우리는 겨우 변한다. 인간은 직접 체험을 통해서만 가까스로 바뀌는 존재이므로 나를 진정으로 바꾸는 것은 내가 이미 행한 시행착오들 뿐이다. 간접 체험으로서의 문학은 다만 나의 실패와 오류와 과오가 어떤 종류의 것이었는지를 '파악'하는 데 도움을 주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피 흘릴 필요가 없는 배움은, 이 배움 덕분에 내가 달라졌다고 믿게 할 뿐, 나를 실제로 바꾸진 못한다. 안타깝게도 아무리 읽고 써도 피는 흐르지 않는다.

피 흘려 깨달아도 또 시행착오를 되풀이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생은 반복들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점점 더 좋은 사람이 된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그러나 믿을 수밖에. 지금의 나는 10년 전의 나보다 좀 더 좋은 사람이다. 10년 후의 나는 더 좋아질 것이다. 안 그래도 어려운데 믿음조차 없으면 가망 없을 것이다. 문학은 그 믿음의 지원군이다. 피 흘리지 않으면 진정으로 바뀌지 않는다고는 했지만, 거꾸로 말하면, 피 흘리지 않고 인생을 시뮬레이션 할 수 있는 공간이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각주:45]

 

2010년대 이후 한국 사회는 어쩌면 새로운 계몽의 시대로 접어든 것처럼 보이는데, 이 계몽의 물결은 앞서 인용한 칸트의 저 문장에서 '지성'의 자리에 '감수성'을 넣을 것을 요청한다. 오늘날 '미성숙한'(즉, 계몽되지 못한) 인간이라 불리는 이들이 결여하고 있는 것은 지성이 아니라 감수성이기 때문이다. 성숙한(계몽된) 인간이 갖고 있는 감수성이란, '젠더 감수성'이나 '인권 감수성'이라는 개념에서 그 용례를 찾아볼 수 있는 것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들을 이해하고 행여 그것에 대한 잘못된 지식/믿음(즉 '무지'와 '미신')이 '차별'의 근거로 작동할 수 있는 상황을 예방하거나 비판할 줄 아는 민감함을 의미한다. 이런 감수성은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인 것이 아니다. 나에게 그것이 없다는 것은 내가 누군가에게 상처와 고통을 줄 수 있는 가능성을 상시적으로 품고 있다는 뜻이다. [각주:46]

모르는 게 자랑이 아니며, 핑계가 되지 않는다. 정말 내가 생각하는 부분 그대로!!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이 절대 아니다. 없다는 것은 내가 누군가에게 언제라도 상처와 고통을 줄 수 있다는 것!!

 

타인의 고통에 대한 민감성과 그를 외면하지 못하는 결벽성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길러지는 것이다. 타인에게 열려 있는 통각(痛覺)이 마비돼 있거나 미발달된 이들이 하는 정치는 우리를 고통스럽게 한다. [각주:47]

아마 내가 예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굉장히 이기적이었고(물론 아직도 현저한 부분이 그러하다), 여타의 따뜻한 감정들에 대해서 촌스럽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인간의 깊은 곳까지 내려가서 그 어둠 속에 앉아 있어본 작가는 대낮의 햇살에서도 영혼을 느낄 것이다. 내게 작품의 깊이란 곧 '인간 이해'의 깊이다.[각주:48]

영혼을 느낀다.

 

문제는 이것이다. 어떤 사람이 타인의 고통을 이해할 줄 아는 깊이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가. 내게는 분명한 기준이 있다. 고통의 공감은 일종의 능력인데, 그 능력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자신이 잘 모르는 고통에는 공감하지 못한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한심한 한계다. 경험한 만큼만, 느껴본 만큼만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고통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다고 늘 생각한다. 자의든 타의든 타인의 고통 가까이에 있어본 사람, 많은 고통을 함께 느껴본 사람이 언제 어디서고 타인의 고통에 민감할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곳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보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각주:49]

 

물론 다른 이들도 열심히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열심히 살아서 입신출세한 사람을 선망할 수 있어도 존경까지 할 필요는 없다. 나는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스스로 그 고통을 함께하기로 결심한 사람, 타인의 고통을 덜어주려고 자신의 안락을 포기한 사람들만을 존경한다.

(중략) 성품이 곧 능력이다. 이 판단이 정치적으로는 매우 순진한 것일 수 있음을 안다. 그러나 고집을 부리고만 싶다. [각주:50]

 

오멜라스의 어느 지하실에는 아무 죄도 없는 한 아이가 짐승처럼 묶인 채 굶주림과 외로움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 왜인지는 모르지만 여하튼 그 아이 하나가 그런 고통을 받아야만 오멜라스의 그 풍요로운 행복이 가능하다는 것. 이런 비열한 사회적 계약을 알고도 우리는 계속 이 오멜라스에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가. 그러나 누군가가 당장 그 아이를 구출해내야 한다고 말할 때 다른 누군가는 이렇게 답하리라. 시기상조, 라고. [각주:51]

우리 사회에 만연한 시기상조론을 이렇게 비판해주시는 작가님.

 

나는 그러고 싶다는 유혹을 느끼면서도 그 유혹에 저항하려 애쓰고 있다. 그 대상이 누구건 어떤 이들을 간편하게 '규정'하고 '배제'하는 행위는 그 자체로 폭력일 수 있기 때문이다. [각주:52]

 

나쁜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누구나 무엇을 이용한다. 공허한 삶을 '의미'로 채우기 위해서는 이용할 무엇이 필요하다. 나에게 할 일이 있다는 것, 그 일을 할 때 나는 중요한 사람이 된다는 것, 그러므로 나는 여전히 살 가치가 있다는 것... 그런 느낌이 우리를 사로잡을 때 삶은 얼마나 충만해지는가.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태극기 집회는 정치적 저항이라기보다는 존재론적 축제일지도 모른다. [각주:53]

 

저들을 '괴물'이라고 간주해버리면 마음이 편해진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나를 그들로부터 완벽하게 구별/구원해낼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윤리적 판타지다. [각주:54]

 

이어 그는 '배우란 무엇인가'를 물었다. "배우가 하는 유일한 일은 우리와 다른 사람의 삶 속으로 들어가서 그것이 어떤 느낌인지 관객들에게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메릴 스트립은 작년 최악의 연기로 트럼프가 장애인 기자를 흉내 내던 순간을 꼽았다. 타자에 대한 공감을 유도하는 것이 연기의 본질인데 트럼프의 그것은 정반대의 목적에 기여하는 연기였기 때문이라는 것. 다음과 같이 말할 때 그는 조금 울먹였다. "그 연기는 제 가슴을 무너지게 했고 지금도 잊히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영화가 아니라 실제였으니까요."[각주:55]

연기 그리고 배우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유명인을 향한다고 해서 조롱이 풍자로 변하지는 않는다. 오늘날의 매체 환경 속에서 실명이 노출된 유명인과 익명의 보호를 받는 네티즌 중에서 누가 더 강자인가. 유명인이라면 감수해야 할 고통이라는 것이 있다는 말은 가학을 합리화하는 궤변이다. [각주:56]

 

비판은 언제나 가능하다. 풍자는 특정한 때 가능하다. 그러나 조롱은 언제나 불가능하다. 타인을 조롱하면서 느끼는 쾌감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저급한 쾌감이며 거기에 굴복하는 것은 내 안에 있는 가장 저열한 존재와의 싸움에서 패배하는 일이다. 이 세상에 해도 되는 조롱은 없다. [각주:57]

 

"근대에 이르러 헤아릴 수 없이 복잡하고도 정교한 방식으로여성이 배치된 원리 그 자체를 가리키는 미소지니의 구조적 측면이 이 용어(여성혐오)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김신현경, <말과활>, 2016년 가을호> 핵심은 '구조적 혐오'에 있는데 그보다 '개인적 혐오'의 층위를 먼저 떠올리게 만든다는 단점이 있다는 것. 그래서 남성들로 하여금 '나는 여성을 혐오하지 않는다'라는 개인적 층위의 반론을 제기하게 만드는 면도 있다는 것. 일각에서는 말을 어떻게 바꿔도 이해할 사람은 하고 안 할 사람은 안 할 것이라는 회의론도 있지만 말이다. [각주:58]

!!!!!!!!!!!

어떤 샘이 페미니스트 여학생에게 했던 정말 순수한 질문을 하는 걸 보았을 때 "그래서 네가 여자로서 받은 차별이 뭐가 있어? 세 가지만 말해봐", 그때 내가 느꼈던 어딘가 잘못된 것 같다는 느낌. 혼자 3일을 고민하다가 내렸던 결론이랑 똑같은 부분을 만났다. 정말 말도 안돼. 이럴 수가.

분명 저 학생이 말하는 차별은 여성으로서의 차별을 말하는 것인데, 개인으로서 ㅁㅅ의 차별을 말하라니 질문이 잘못된 것 아닌가.

미소지니 혹은 여성혐오라는 워딩에 대한 저 논의도 비슷한 맥락이라니. 슬푸당.

 

군사독재 시절과는 달리 이제 국가는 죽음을 방치하는 방식으로 살인을 한다. [각주:59]

 

가르시아 마스케스의 자선전 제목은 '이야기하기 위해 살다'이지만 소설가가 아닌 우리에게는 '살기 위해 이야기하다'라는 말이 더 실상에 가까울 것이다. 우리는 대체로 '나'라는 서사가 어떻게 진행되어왔고 또 진행될 것인지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내가 '나'라는 서사의 주인공인 동시에 작가라고 믿는다. 그러다 어떤 사건이 벌어져서 서사의 흐름에 균열이 오거나 반전이 생기면 '다시 쓰기'를 해서 그 사건을 내 삶 안으로 통합해낸다. 예컨대 예기치 못한 이별을 겪고 나서 '아픈 만큼 성숙해지고'라는 옛 노래 제목을 떠올리는 순간, 당신은 당신의 삶을 '쓰고'잇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각주:60]

 

저런 끔찍한 일이 나에게 닥치지 않았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그러나 그 느낌을 공적으로 발설하는 것은 무례하고 유아적인 행위다. [각주:61]

 

 


시는 없으면 안 되는가

 

필사적인 노력에 신비로운 것이라고는 없다. 노력이란, 시도하고 실패하고 다시 시도하고 다시 실패하는, 처절한 세속의 일이다. 조금도 신비롭지 않은 그 노동이 멈추면 시인도 함께 소멸한다. [각주:62]

처절한 세속의 일.

 

폭력과 싸우는 일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릴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수단과 방법을 세심히 가려야 한다고 믿는다. [각주:63]

 

시 평론가 데이비드 오어가 그의 책 <아름답고 무의미한>에서 보고하기를, 어떤 임의의 X에 대해 '나는 X를 좋아한다'와 '나는 X를 사랑한다'의 구글 검색 결과를 비교해보면, 대체로 '좋아한다(like)'가 '사랑한다(love)'보다 세 배 더 많다고 한다. 예컨대 '나는 음악을 좋아한다'가 '나는 음악을 사랑한다'에 비해 훨씬 많다는 것. X의 자리에 '영화', '미국', '맥주' 등등을 넣어도 역시 마찬가지. 그러나 이상하게도 '시(poetry)'만은 결과가 반대여서 시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두 배 더 많다고 한다. 왜일까? 나로 하여금 좀 더 나은 인간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사람은 내가 '사랑하는'사람들이다. 그리고 훌륭한 시를 읽을 때, 우리는 바로 그런 기분이 된다.[각주:64]

 

생존의 트랙을 정신없이 달리다가 문득 이런 의문을 갖는 때가 오는 것이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의미가 있지?' 가장 성공적인 질주를 하는 것처럼 보이는 인간조차도 가끔 이런 의문에 걸려 넘어진다. 이것은 인간이 의미를 추구하는 동물이라는 또렷한 증거다. 인간은 의미를 잊고 살 수는 있어도 의미를 빼앗긴 채 살 수는 없다. 즉 '진정한 삶'을 사유한다는 것은 곧 '삶의 의미'를 사유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삶의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 더 줄이면 이렇다. '왜 사는가?' [각주:65]

 

우리 시대 서바이벌리즘의 전도사들은 반문하리라. '정답이 없는 질문을 던지는 릴케의 시 따위를 도대체 왜 읽어야 한단 말인가?' 나의 오랜 대답은 이렇다. '왜냐하면 삶이란 의미를 찾기 위해 질문을 던지는 그 순간에만 겨우 의미를 갖기 시작하는 것이니까.' 이 대답은 아직 충분히 강하지 못하다. 그래서 나는 (당신과 함께) 더 많은 시를 더 필사적으로 읽지 않으면 안 된다. [각주:66]

 

"너는 너의 삶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시인을 따라 루브르의 토르소를 상상하며 느긋하게 시를 읽어나가다 보면 이 마지막 구절이 죽비처럼 어깨를 내리친다. 왜인가.

첫째, 바꾸라 했으니 'A에서 B로'라는 지침이 있을 법도 한데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지금 어떤 상태에 있건 당신은 바뀌어야 한다. 지금 자신을 바꾸지 않아도 되는 사람은 없다. 둘째, 언제 이 구절을 읽든 우리는 똑같은 명령을 다시 받기 때문이다. '그동안 바뀌려고 노력했는가? 계속 더 바뀌어야 한다.' 요컨대 아폴론의 불완전하고 미완성인 몸통은, 바로 우리의 삶이 언제나 그처럼 불완전하고 미완성인 상태에 있다고, 그러므로 변화란 '예외도 없고 끝도 없는' 우리 모두의 숙제라고 말한다. 삶이 아주 느린 자살처럼 느껴질 때 나는 이 시를 자주 복용한다. [각주:67]

 

"유명해지기 전에 로댕은 고독했다. 그리고 그에게 명성이 찾아온 뒤에 그는 어쩌면 더 고독해졌는지도 모른다. 명성이란 결국 하나의 새로운 이름 주위로 모여드는 온갖 오해들의 총합일 뿐이기 때문이다." [각주:68]

최근 본 영화 <호밀밭의 반항아>가 생각났다. 명성을 얻고 주인공은 더욱 자기 자신에게 파고들었다.

 

토니 타키타니는 거의 평생을 혼자 살면서도 한 번도 고독하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다. 고독이 깊은 습관이 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 앞에 한 여인이 나타나고 토니는 변한다. 토니는 이렇게 생각한다. "고독이 돌연 알 수 없는 무거운 압력으로 그를 짓누르며 고뇌에 빠지게 했다." 그녀를 만난 후에야 고독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 것이다. 사랑은, 이제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려주면서 지금까지의 삶은 부자연스러운 것이었다고 속삭인다. [각주:69]

 

우리는 '고독이 밀려왔다'라는 표현을 흔히 사용하지만, 고독은 어쩌다가 밀려오는 것이 아니라 늘 그 자리에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고독이 가끔 밀려오는 것이 아니고, 고독하지 않다는 착각의 시간들이 가끔 밀려오는 것이다. [각주:70]

 

그것은 진심이다. 입김은 찬 것을 녹이기도 하지만 뜨거운 것을 식게도 한다. 눈물은 당신을 감동시키기도 하지만 당신을 얼어붙게도 한다. 이처럼 사랑이 변한다는 것은, 동일한 것이, 어느 날 문득 정반대의 의미를 갖게 되는 일이다. 그때 우리는 '최초의 입맞춤'으로 돌아가고 싶어서 가슴을 치며 울고 싶어진다. 그 순간의 진심을, 이 시인은 알고 있는 것 같다. [각주:71]

 

아카시아 가득한 저녁의 교정에서 너는 물었지 대체 이게 무슨 냄새냐고

그건 네 무덤 냄새다 누군가 말하자 모두 웃었고 나는 아무 냄새도 맡을 수 없었어

다른 얘들을 따라 웃으며 냄새가 뭐지? 무덤 냄새란 대체 어떤 냄새일까? 생각을 해봐도 알 수가 없었고

흰 꽃잎은 조명을 받아 어지러웠지 어두움과 어지러움 속에서 우리는 계속 웃었어

너는 정말 예쁘구나 내가 본 것 중에 가장 예쁘다 함께 웃는 너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였는데

웃음은 좀처럼 멈추질 않았어 냄새라는 건 대체 무엇일까? 그게 무엇이기에 우린 이렇게 웃기만 할까?

꽃잎과 저녁이 뒤섞인, 냄새가 가득한 이곳에서 너는 가장 먼저 냄새를 맡는 사람, 그게 아마

예쁘다는 뜻인가 보다 모두가 웃고 있었으니까, 나도 계속 웃었고 그것을 멈추지 않았다

안 그러면 슬픈 일이 일어날 거야, 모두 알고 있었지[각주:72]

(<구관조 씻기기>, 황인찬, 민음사, 2012, <유독> 전문)

스무 살 후로 처음 내가 직접 사 본 시집!

아직은 시가 어렵기만 하다. 나도 척척 읽어내고 싶은데 ㅠㅠ..

 

당신이 한번 포기한 적 있는 대상은, 절대로 포기 못 할 대상이 다시는 될 수 없다. 그것을 포기할 때, 절대로 포기 못 하겠다는 그 마음까지 함께 포기한 것이므로. 그러므로 한번 포기한 대상을 다시 포기하는 일은 처음보다 훨씬 쉬워진다. [각주:73]

 

"우리말의 '같이'는 영어의 'like'와 'with'의 뜻을 함께 갖는다. 뭐든 당신과 '같이' 하면 결국엔 당신'같이' 된다는 뜻일까." 늘 시와 같이 살면 시와 같은 삶이 될까, 안 될까. 우리는 영원히 시를 포기하지 말기. [각주:74]

 

나는 그런 글을 쓰고 나면 내 삶이 조금은 더 가치 있어졌다고 느끼는 부류의 사람이다. 누구에게나 그렇겠지만, 도대체가 시간이 너무 없다. 그 얼마 없는 시간을, 내 삶을 더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어주는 일에 나는 써야 한다. [각주:75]

 

정확하게 말하고 싶다는 이런 욕망은 정확하게 사랑받고 싶다는 다른 욕망과 연결돼 있다. 정확하게 사랑받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부족한 알몸"이 부끄럽다. 그런데 네가 나를 안으려들까 봐, 혹은 내가 너에게 안기고 말까 봐, 했던 말을 하고 또 하면서 딴청을 부려야 했다. 내 알몸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도록, 네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해주면 좋겠다. 그때 나는 정확하게 사랑받고 있다고 느낄 것이다. [각주:76]

 

 


넙치의 온전함에 대하여

욕망과 사랑의 구조적 차이를 이렇게 요약해보려고 한다.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는지가 중요한 것은 욕망의 세계다. 거기에서 우리는 너의 '있음'으로 나의 '없음'을 채울 수 있을 거라 믿고 격렬해지지만, 너의 '있음'이 마침내 없어지면 나는 이제는 다른 곳을 향해 떠나야 한다고 느낄 것이다. 반면,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지 않은지가 중요한 것이 사랑의 세계다. 나의 '없음'과 너의 '없음'이 서로를 알아볼 때, 우리 사이에는 격렬하지 않지만 무언가 고요하고 단호한 일이 일어난다. 함께 있을 때만 견뎌지는 결여가 있는데, 없음은 더이상 없어질 수 없으므로, 나는 너를 떠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나의 없음을 당신에게 줄게요>, <정확한 사랑의 실험>, 마음산책, 2014, 26)[각주:77]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면 당신은 지금 사랑 속에 있는 것이다. '홀로 있을 때가 아니라 그와 함께 있을 때, 나는 더 온전해진다.'[각주:78]

아직까지 나는 너랑만 사랑을 했었나보다. 네 안에서 나는 가장 자유로웠고, 온전했었다.

너라는 사람만이 줄 수 있는 것인지, 혹은 그 긴 시간이 가져다줄 수 있는 것인지. 아직은 그걸 잘 모르겠다 나는. 어려워 여전히.

 

우리가 오늘날에도 사랑이라는 것을 하게 되는 것은 하나일 때보다 둘일 때 우리가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다. 나는, 내가 부족한 인간이라는 사실로 더 이상 고통받지 않아도 되게 해주는 누군가를 만나서, 온전해진다. 다만 그것은 위 신화가 말하는 것처럼 운명적 짝을 다시 만나 이뤄지는 기적이 아니라, 상대방이 나로 인해 더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상호 배려로 성취되는 일일 터이다. [각주:79]

상호 배려.

 

위 대사는, 이런저런 요소들이 내 인생을 구성하고 있는데, 거기에는 당신이라는 요소가 없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읽힐 소지가 있다. 이것은 사랑 속에서 주체가 '온전해지는' 일과는 다르다. 아무리 가장 중요하고 또 가장 소중한 요소라 할지라도 요소는 한낱 요소일 뿐이다. 내가 사랑하는 당신을 채우는 '요소'가 아니라 나를 세우는 '구조'(여야 한)다. 나는 당신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당신 속에서 온전해진다. 결여는 여전히 있되 그 결여가 더는 고통이 되지 않는, 온전한 사람.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나를 그런 사람이 되게 한다. [각주:80]

 

그 글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누구나 결여를 가지고 있고 또 부끄러워 대개는 감춥니다. 그러다가 어떤 결정적인 순간에 서로 상대방의 결여를 발견하고,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 결여 때문에 서로가 서로에게 불가결한 존재가 되는 일이 벌어집니다. 나(너)만이 너(나)의 결여를 이해하고 또 보듬을 수 있다는 확신에 함께 도달하는, 작은 기적 같은 순간 말입니다. [각주:81]

 

왜냐하면 누구나 제 몫의 결여를 갖고 있는 것이 인간이고, 또 그런 인간이 홀로 살아가기에는 너무도 버거운 것이 바로 인생이라는 사실을 언젠가부터 저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사랑이란 궁극적으로 우리가 서로를 살아가게 하는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대체로 이기적인 우리가 다음과 같은 놀라운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사랑 속에 있을 때입니다. '나는 사랑한다, 내가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너를 살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너를 살게 함으로써 나 역시 살 가치가 있게 되기 위해서.'

신이 있다면 그가 우리를 사랑하겠지만, 신이 없다면 우리가 서로를 사랑해야만 한다는 것. 이것이 인간의 연약함이자 위대함이라는 것. 그러므로 사랑에 관한 한, 언제나 이렇게 말할 수밖에요. 곁에 있어줄게. 우리가 온전해지기 위해서. [각주:82]

가장 떠오르는 대상은 우리 애들.

많이 많이 사랑하는 아가들.

 

사랑받는 사람이 되는 가장 정확한 방법은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정확한 길이기는 하지만, 쉽고 빠른 길은 아니다.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타인과의 섬세하고 복잡한 커뮤니케이션에 성공해야 한다. 그 어렵고 느린 길을 걸을 능력도 의지도 없는 이들은 그 대신 권력을 가지려 한다. 권력을 얻어 명령의 주체가 되면 커뮤니케이션을 생략해도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각주:83]

타인과의 섬세하고 복잡한 커뮤니케이션.

맞아 맞아 . 끄덕!!!!

 

인간(과 자연)에 대한 당신의 모든 관계는, 당신의 의지의 대상에 상응하는, 당신의 현실적인 개인적 삶의 '특정한 표현'이어야 한다. 당신이 사랑을 하면서도 되돌아오는 사랑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면, 즉 사랑으로서의 당신의 사랑이 되돌아오는 사랑을 생산하지 못한다면, 그리고 당신이 사랑하는 인간으로서의 당신의 생활 표현을 통해서 당신을 사랑받는 인간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당신의 사랑은 무력하며 하나의 불행이다. [각주:84]

 

그런 비판으로는 아무 것도 바뀌지 않는다. 비판당하는 적은 황당한 불쾌감을, 비판하는 나는 얄팍한 우월감을 느끼게 될 뿐, 그 이후 둘은 '이전보다 더 자기 자신인' 존재가 되고 말 것이다. [각주:85]

 

원래 당신은 하나의 '얼굴'이었다. 적어도 전화가 발명되기 전에는 그랬다. 걸어가서 기다리지 않으면 당신을 만날 수 없었다. 당신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당신의 맞은편에 앉아 당신의 얼굴을 바라본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시선을 감당해내는 일이다. 그리고 표정이 머금고 있는 의미를 해독하는 일이다. 나와 당신이 친밀한 사이가 아니라면 이 일은 만만찮은 에너지가 소모되는 노동이다. 이때 당신은, 내가 잘 알지 못하므로 그만큼 부담스러운, 타인이다. 현대 인문학에서 흔히 '타자'라고 부르니까 그렇게 하자. 이때 당신은 '얼굴-타자'다.[각주:86]

다정하다. 아날로그만이 주는 따뜻함.

 

'당신이 틀렸다'고 말하는 부정문이 아니라 '당신은 전적으로 옳지는 않다'는 부정문으로, 전래동화에서처럼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스스로 옷을 벗게 만드는 것이라는 듯이, 세상의 힘센 주장들에게 자신을 되돌아볼 시간을 준다. 이것은 부정을 확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확신을 부정하기 위한 부정문이다. [각주:87]

 

단호한 승리도 단호한 실패도 없다. 오로지 그렇다는 사실만이 단호할 것이다. [각주:88]

 

개인의 고유성은 그 사람이 사용하는 어휘와 어법에서도 생겨난다. [각주:89]

 

이 대화 직후에 미도리가 말없이 '나'의 품에 안겨 오는 것은 당연하다. 이 정도 성의라면 감동받을 만한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너무'라는 간편하고도 흔해빠진 부사어에 습관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이를 여섯 줄의 문장으로 바꿔낸 성의(물론 이것은 사랑의 힘이다)에 있다. 상대방이 자신에게 클리셰(상투어)를 남발한다는 것은 그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각주:90]

내가 <노르웨이 숲>을 보고! 좋았던 부분인데 교수님도 똑같이 발췌하여 생각을 적어주셨다. ㅠㅠ 봄날의 곰이라니 ㅠㅠㅠㅠ헝

내가 너를 유난히 애틋하게 생각하고, 그저 고마운 마음이 드는 건 이 점에서도 이유가 있겠지?

 

이광수는 동경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있던 아내 허영숙에게 이런 편지를 보냅니다.

"5월부터 매달 학비는 60원 보내리다. 그리고 여름 양복값 보낼 터이니 얼마나 들지 회답하시오. 공부하는 중이니 저금 아니해도 좋소. 학비가 곧 저금이오. 여름옷에는 레인코트 같은 것이 있어야 하겠으니 모두 값을 적어 보내시오." 이 책을 엮은 강인숙 선생은 이렇게 덧붙이셨군요. 1930년대에 남편을 두고 두 번이나 유학을 간 여인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뒷받침해준 남편이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라고. [각주:91]

ㅠㅠㅠㅠㅠ이광수 뭔데 스윗해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오늘부터 정주행갑니다 ^^777777

 

책을 다 읽고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손편지라는 것은 왜 별 내용이 없어도 이렇게 마음을 움직이는 것일까. 편지는 문어체의 공간입니다. 가족에게 보내는 다섯 줄짜리 편지라해도 일단 편지의 세계로 들어가면 그이의 말투는 으레 그래야 한다는 듯이 달라집니다. 그런데 이것이 단지 양식의 문제만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 문어체의 공간 안에서만 비로소, 구어체로는 담을 수 없는 그 자신도 몰랐던 진심이 '발굴'되고 심지어 '생산'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라면 말입니다. 문어체만의 특별한 힘이라고 할까요. [각주:92]

 

물속에 살고 있으면서 정작 물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물고기. 우리도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고 잇는 현실(물)이라는 것은 그 대부분이 엇비슷한 일상과 그것의 권태로운 반복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그것이 너무 익숙하고 진부한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생각이라는 것을 하기가 가장 어려운 대상이라는 것. 그래서 우리는 실제로 그것에 대해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일상과 그 반복이야말로 우리 인생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면, 그것들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사느냐 하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이 아닌가? [각주:93]

 

생각하는 방법이란 곧 선택하는 방법이라는 것. 어떤 현실과 맞닥뜨렸을 때 이를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다른 생각을 의식적으로 선택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늘 같은 방식으로만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상 생각을 하지 않는 것과 같다. [각주:94]

 

삶은 그 자체로 가치 있거나 무의미한 것이 아니며, 어느 쪽이 될 것인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는, 아주 심각한 이야기다. [각주:95]

 

네 번째, 곤란을 겪고 나서도 배우지 않는 사람. 이쯤에서 우리는 속으로 생각한다. '내 비록 태어나면서부터 도를 알지는 못하였고, 또 꾸준히 배움에 힘썼다고 자신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곤란을 겪고 나서는 시행착오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나는 공자가 우리의 이런 속생각을 예측하고 바로 다음과 같은 말을 하기 위해 이 모든 인간유형론을 고안한 게 아닐까 상상해본다. '너는 네 생각과는 달리 3번이 아니라 4번인 것이다.' 나는 내 시행착오가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 이유를 이렇게 납득했다. [각주:96]

 

이를테면 좋은 '멘토'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멘토르'가 되어야 한다는 얘기다. 지혜와 명성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신뢰라는 것. 나를 잘 아는, 내 편인, 그런 사람만이 나를 진정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 [각주:97]

나의 방법이 틀리지 않았어 라고 이야기해주는 것 같았다. 토닥토닥.

 

말하기보다 글쓰기가 더 어렵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만큼 말을 쉽게 해왔다는 뜻일 수 있다. 지금보다 훨씬 미성숙했던 시절, 나는 참 많은 말을 함부로 했던 것 같다. 처음부터 그런 생각을 하며 직업을 택한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내가 글을 쓰는 사람이 된 것이 다행스럽다고 여긴다. 내게 글을 쓴다는 것은 극도로 천천히 말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충분히 생각할 수 있고 잘못을 수정할 수 있으며 오해를 덜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말이 있는 세계에 글도 함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그래서 나는 육체적으로 말하기가, 정신적으로는 글쓰기가 더 편하다. [각주:98]

작년에, 너랑 많은 이야기들을 하며 우리는 그랬지. '말을 아끼자' 혹은 '듣자'라고. 꽤 오래간 잊고 지냈던 것 같다. 그때 우리는 건강한 생각을 한 것 같아. !!

 

모두가 자신만의 매체를 갖게 된 이 시대가 선사한 축복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내 눈에 더 잘 보이는 것은 국민 모두가 언론인이 되면서 발생하기 시작한 명백한 재앙들이다. 언론이 권력이라고 불리는 것이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닌 것은 세상에 뿌려져 회수할 수 없게 되는 문장만큼 끈질기게 살아남는 것이 달리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펜이 칼보다 강하다는 말을 한 치의 의혹도 없이 믿는다. [각주:99]

 

확실히 작품은 사람과 비슷하다. 첫인상이 전부는 아니라는 점에서 말이다. 더 심각하고 진지하게 말하자면, 한 번 보고는 아무것도 제대로 알 수 없다는 점에서 말이다. 이것은 평론가로서 내가 갖고 있는 '직업윤리'이지만, 창작자들에게 기대하는 '작업윤리'이기도 하다. [각주:100]

 

 

정말!! 내가 죽기전에 신형철 교수님 그리고 책들을 알게 되어서 너무 행복하다.

작년의 책이 '모멸감' 그리고 '개인주의자 선언'이었다면 올해의 책은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이다.

  1. 8 [본문으로]
  2. 23 [본문으로]
  3. 25 [본문으로]
  4. 27 [본문으로]
  5. 35 [본문으로]
  6. 38 [본문으로]
  7. 39 [본문으로]
  8. 40 [본문으로]
  9. 44 [본문으로]
  10. 45 [본문으로]
  11. 48 [본문으로]
  12. 50 [본문으로]
  13. 52 [본문으로]
  14. 53 [본문으로]
  15. 56 [본문으로]
  16. 59 [본문으로]
  17. 68 [본문으로]
  18. 69 [본문으로]
  19. 70 [본문으로]
  20. 74 [본문으로]
  21. 76 [본문으로]
  22. 77 [본문으로]
  23. 78 [본문으로]
  24. 80 [본문으로]
  25. 85 [본문으로]
  26. 86 [본문으로]
  27. 88 [본문으로]
  28. 93 [본문으로]
  29. 96 [본문으로]
  30. 97 [본문으로]
  31. 117 [본문으로]
  32. 120 [본문으로]
  33. 131 [본문으로]
  34. 133 [본문으로]
  35. 144 [본문으로]
  36. 148 [본문으로]
  37. 149 [본문으로]
  38. 153 [본문으로]
  39. 155 [본문으로]
  40. 158 [본문으로]
  41. 172 [본문으로]
  42. 172 [본문으로]
  43. 173 [본문으로]
  44. 175 [본문으로]
  45. 177 [본문으로]
  46. 189 [본문으로]
  47. 191 [본문으로]
  48. 201 [본문으로]
  49. 202 [본문으로]
  50. 203 [본문으로]
  51. 208 [본문으로]
  52. 210 [본문으로]
  53. 211 [본문으로]
  54. 212 [본문으로]
  55. 214 [본문으로]
  56. 216 [본문으로]
  57. 217 [본문으로]
  58. 222 [본문으로]
  59. 235 [본문으로]
  60. 244 [본문으로]
  61. 245 [본문으로]
  62. 261 [본문으로]
  63. 262 [본문으로]
  64. 262 [본문으로]
  65. 264 [본문으로]
  66. 265 [본문으로]
  67. 269 [본문으로]
  68. 270 [본문으로]
  69. 290 [본문으로]
  70. 291 [본문으로]
  71. 298 [본문으로]
  72. 301 [본문으로]
  73. 318 [본문으로]
  74. 322 [본문으로]
  75. 324 [본문으로]
  76. 326 [본문으로]
  77. 332 [본문으로]
  78. 333 [본문으로]
  79. 336 [본문으로]
  80. 339 [본문으로]
  81. 341 [본문으로]
  82. 343 [본문으로]
  83. 344 [본문으로]
  84. 346 [본문으로]
  85. 350 [본문으로]
  86. 352 [본문으로]
  87. 355 [본문으로]
  88. 356 [본문으로]
  89. 358 [본문으로]
  90. 360 [본문으로]
  91. 363 [본문으로]
  92. 364 [본문으로]
  93. 370 [본문으로]
  94. 370 [본문으로]
  95. 371 [본문으로]
  96. 375 [본문으로]
  97. 378 [본문으로]
  98. 385 [본문으로]
  99. 387 [본문으로]
  100. 390 [본문으로]
반응형
LIST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