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현수가 그렇게 그렇게 추천한 에리히 프롬의 책을 읽었다.
나의 첫 에리히 프롬.
그런데도 그는 본질에 대한 질문을 고리타분하다며 거부할 것이다. 인간의 '본성'이나 '천성' 혹은 진짜 자기 존재 같은 것이 현실에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
진짜 삶의 기본을 위반한 결과는 장애와 고통이다. 지루하고 무미건조하며 우울하고 공허하고 아무 의욕도 없다. 이런 자기 경험의 부정적 감정들을 추적해 보면 무력감이 모습을 드러낸다. 무력감은 자기 자신의 강인함으로 살아갈 능력이 없을수록 역력해진다.
그런 고통의 상태는 대부분 진짜 삶을 살지 못하고 자기 자신에 대한 더 뛰어난 지식에 더 이상 접근하지 못한다는 고통스러운 지적으로 나타난다. 진짜 삶은 억압되어 꿈에서나 겨우 명확한 언어로 이야기할 뿐이다. 하지만 진짜 삶을 다시 배울 수 있다. 원래의 힘을 생각해 내고 그것에 여지를 주고 그것을 실천한다면 말이다. 2
진짜 삶의 기본.
인간은 자연의 변덕이다. 유일하게 자기 자신을 자각하는 생명체이다. 인간은 자연에 살면서 동시에 자연을 초월하는 유일한 존재이다. 자기 자신과 자신의 과거, 자신의 미래를 자각한다.
인간은 동물처럼 본능적으로만 살지 않는다. 자연에서 거의 뿌리가 뽑힌 존재로, 태어나는 순간부터 삶이 던지는 질문에 대답해야 하는 문제를 떠안는다. 어떻게 살 것인가? 어디로 가야 할까? 어떤 의미를 삶에 부여할까? 3
인간은 주변 사람들 및 자연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 관계를 맺지 않는 사람은 미친 사람이다. 광기를 바로 그렇게 정의할 수 있다. 광기란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의 상태이다. 4
사랑이란 그 사랑에 관여한 사람들의 온전함과 현실을 둘 다 보존하는 유일한 형태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타인에게 복종하거나 그에게 권력을 휘두르면서도 '사랑'을 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럴 경우 사람은 -상대에게 복종하는 사람이건 상대를 지배하는 사람이건- 자신의 온전함과 독립이라는 인간의 기본 특성을 상실한다. 진정한 사랑에서는 타인과의 연관성과 자신의 온전함이 보존된다. 5
너무나 맞는 말. 뼈에 새길 것.
오늘날에는 모두가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모두가 자기 밖의 목적을 위해 자신을 이용한다. 사물의 생산이라는 한 가지 전능한 목표만이 존재한다. 우리가 입으로 고백하는 목표, 즉 인격의 완벽한 발달, 인간의 완벽한 탄생과 완벽한 성장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6
하지만 인간은 사물이 아니다. 스스로 사물이 된다면 자각하건 못 하건 병이 들고 말 것이다. 프랑스인들은 18세기부터 이 병에 대해 아주 많이 알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이 병은 프랑스어 이름만을 가지고 있다. 프랑스어 이름 -ennui, malaise, la mamadie du siecle(세기의 질병)-은 이미 19세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는 이 질병을 권태, 삶이 무의미하다는 느낌, 풍요롭지만 아무 기쁨도 없는 삶이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는 느낌,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당황스럽고 어찌할 바를 모른다는 느낌이라 부른다. 7
크.. 19세기에도 있었다니 이런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정말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배워야 한다. 나의 문제는 나만의 것이 아니다.
늘 내가 말하는 '살아지는'느낌이라는게 이것과 정말 비슷하다.
작년에 만났었더라면 너무 좋았겠다 싶은 책.
물론 올해라도 만나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아주 구체적으로 인간이란 현존으로 인한 온갖 한계와 약점을 가지고서 특수한 심리적 세계와 사회적 세계에 끌려 들어온 육체적 존재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인간은 자기 자신의 삶을 자각하였고, 자기 자신과 주변 세계에 대한 의식을 꾸준히 키웠으며, 삶을 목표를 가진 열린 길로 만드는 새로운 물질적, 영적 능력의 발전 가능성을 자기 안에 품은 유일한 피조물이다. 8
인간의 본성은 원칙일 뿐 아니라 능력이기도 하다. 즉, 인간은 이성과 사랑의 능력을 발전시키는 만큼 자신의 본질에 도달한다. 인간은 인간이기 때문에 이성과 사랑의 능력이 있으며 그 반대도 가능하다. 다시 말해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사랑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인 것이다. 자신을 자각하고 자신과 자신의 실존적 상황에 대해 진술하는 능력은 인간을 인간으로 만든다. 그리고 바로 그 능력이 인간 본성의 기본 요인이다. 9
피곤한 사람, 절망에 빠진 사람, 염세주의자는 자유에 도달할 수 없다. 피곤할수록, 절망에 젖어 있을수록, 염세적일수록 얻을 수 있는 자유는 줄어든다. '열정적인 사람'만이 자유로울 수 있다. 심리학적으로, 퇴보에 빠지지 않고 전진하고 진보하려 노력하는 사람만이 자유로울 수 있다. 독립과 동시에 주변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포함하는 진보를 추구하는 사람만이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다. 11
'사람들이 말한다'는 표현을 이용해 우리는 그 누구도 어떤 것을 실제로 책임지지 않는 무의미한 수다의 세계로 들어선다. 13
"나는 내가 누군지 안다." 돈키호테는 말한다. 인생의 의미에 대한 질문은 진짜에 대한 질문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진짜 인간에게는 정신이 중요하다. 진짜가 아닌 인간은 비정신적이다. 특수한 형이상학적 태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14
더 정확히 말하면 포이어바흐와 마차도가 가르친 대로 나의 실존에 이미 함께 주어진 너의 실존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우리 각자는 사회가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타자의 존재 역시 우리 각 개인의 일부이기에 사회가 존재하는 것이다. 인간은 본성상 타인을 위한 존재이다. 15
내가 내 전공을 사랑하는 이유.
게다가 타인의 가장 깊은 내면에 숨은 본질은 그의 침묵 탓에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이런 침묵에는 부정적 면과 긍정적 면이 있다. 그 뒤로 몸을 숨기는 데 일조한다는 점에서는 부정적이지만, 타인이 자기 자아의 복사품이어서는 안 될뿐더러 실제로 내가 알고 존중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우리가 방해하지 말아야 할 사적 공간이 존재한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다. 16
요약하자면 우리는 자신을 이해하고 사랑하고 인식할 수 있을 때에만 타인을 인식하고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다. 하지만 의식적 헌신이 곧 자신의 사적 공간을 포기한다거나 타인의 사적 공간을 침해한다는 뜻은 아니다. 17
뼈에 새길 것.
어린아이들 역시 자발성의 사례를 제공한다. 아이들에게는 진짜 자기 감정을 느끼고 자기 생각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자발성은 아이들의 말과 생각에서, 얼굴에 드러나는 감정에서 나타난다. 18
자발적 활동은 자아의 온전함을 희생하지 않고도 고독의 공포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자아의 자발적 실현을 통해 인간은 새롭게 세상-인간, 자연, 자기 자신-과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이런 자발성의 가장 중요한 요인은 사랑이다. 하지만 자아가 다른 사람 속으로 녹아버리는 그런 사랑이나 다른 사람을 소유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랑은 아니다. 그 사랑은 개인의 자아를 보존하며, 다른 사람을 자발적으로 긍정하고, 다른 사람과 하나가 되는 그런 사랑이다. 사랑의 역동적 성격은 분리를 극복하고 하나가 되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개성을 잃고 싶지 않은 욕망에서 탄생하는 양극성에 있다. 19
자유에 내재하는 근본적인 분열-개성의 탄생과 고독의 고통-이 인간의 자발적 활동을 통해 더 높은 차원에서 해소되는 것이다.
모든 자발적 활동에서 개인은 세계를 자기 안으로 받아들인다. 그 과정에서 개인의 자아는 온전해지고 더 강해지며 더 탄탄해진다. 자아는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만큼 강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힘은 물질의 소유에도, 감정이나 사고 같은 정신적 자질의 소유에도 있지 않다. 물건의 사용이나 사고 같은 정신적 자질의 소유에도 있지 않다. 물건의 사용이나 조작도 힘을 주지 못한다. 우리가 어떤 물건을 이용한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 것이 되지는 않는다. 인간이건 생명 없는 사물이건 창조적 활동을 통해 진정한 관계를 맺는 것만이 우리의 것이다. 우리의 자발적 활동이 낳은 속성들만이 우리의 자아에 힘을 주고, 자아가 온전할 수 있도록 기틀을 닦아준다. 20
자발적으로 행동하지 못하고 진정한 느낌과 생각을 표현하지 못하는 무능력, 그로 인해 타인과 자신에게 가짜 자아를 내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 열등감과 무력감의 뿌리이다. 의식하건 안 하건 자기 자신이 아닌 것보다 더 부끄러운 일은 없으며, 진짜 자기 것을 생각하고 느끼고 말하는 것보다 더 큰 자부심과 행복을 주는 것도 없다. 21
인간은 진정으로 행복을 줄 수 있는 유일한 만족-활동의 순간 체험하는 것-을 잃고서 잡았다고 믿는 순간 실망을 안겨주는 환영과 성공이라는 이름의 가짜 행복의 뒤를 쫓아다닌다. 22
알고도 늘 당하게 되는.
두 유기체가 생리학적으로 다른 것처럼 두 사람의 인격을 이루는 개인적 토대 역시 동일하지 않다. 진정한 자아의 발전은 항상 이런 특수한 토대를 바탕으로 한 성장이다. 이 한 사람에게 고유한, 이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씨앗의 발아, 유기적 성장이다.
유기적 성장은 타인의 자아가 가진 특수성을 자신의 자아가 가진 특수성 못지 않게 최대로 존중해야만 가능하다. 자아의 고유함을 이처럼 존중하고 장려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문화가 이룬 가장 값진 업적이다. 그런데 바로 그것이 오늘날 위험에 처한 것이다. 23
여기서 '독창적'이라는 말은 어떤 생각을 그전에 다른 누구도 해본 적 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 생각의 기원이 그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그 생각이 그의 활동, 그의 생각에서 나왔다는 의미임을 강조하고 싶다. 24
우리 사회에서는 일반적으로 감정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분명 창의적 사고는-다른 창의적 활동과 마찬가지로-감정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지만 감정 없이 생각하고 생활하는 것이 이상적인 태도가 되어버렸다. '감정적'이라는 말은 불균형과 같은 뜻이 되었고, 심지어 정신 장애의 뜻으로 해석된다. 이 기준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심하게 허약해질 것이다. 그의 사고는 빈곤해지고 단조로워질 것이다. 25
내가 2학년 때, 연숙 교수님 강의를 듣던 중 머리가 쿵- 했던 부분.
안보이는 것이지, 모르는 것이지, 그게 없는게 절대 아니다.
점점 더 많은 사실들만 기억하면 결국에는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라는 비장한 미신을 섬긴다. 상호 연관 없이 이리저리 흩어진 수많은 개별 지식들을 학생들에게 주입시킨다. 학생들의 시간과 에너지가 점점 더 많은 사실을 배우는 데 쓰이기 때문에 정작 사고를 할 시간은 거의 남지 않는다. 물론 사실의 습득이 없는 사고는 공허하고 허구일 뿐이다. 하지만 '정보'만으로는 너무 적은 정보와 마찬가지로 사고를 가로막는 걸림돌이 될 수 있다. 27
진리는 힘없는 사람들의 가장 강력한 무기 중 하나이다. 하지만 진리는 외부 세계에서 방향을 잡는데에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인간 내면의 강인함은 자신에 대한 진리를 아는지의 여부에 크게 좌우되기 때문이다. 자신에 대한 환상은 지팡이와 같다. 걷지 못하는 사람에게 도움은 되지만 그를 더 약하게 만들 뿐이다. 인간은 자신의 인격을 온전하게 완성할수록, 다시 말해 '자신을 잘 꿰뚫어볼수록' 더 강해진다. "너 자신을 알라." 이것은 인간의 힘과 행복을 목표로 하는 기본 계명이다. 28
이 모든 이유에서 우리는 우리가 듣는 것과 더 이상 진정한 관계를 맺지 못한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감정과 비판적 판단력의 훼손에 흥분하지 않으며,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점점 더 무관심해진다. 29
전제 조건은 진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다. 현대인은 자신이 추구하는 것이 정말로 스스로 원하는 것인지를 고민할 시간을 내지 않는다. 학교에 다닐 때는 좋은 성적을 받고 싶고, 어른이 되어서는 성공의 사다리에 더 높이 오르고 싶고, 돈을 벌고 명성을 얻고 싶고, 더 좋은 차를 사고 여행을 하고 싶다.
하지만 한 번씩 이런 악착같은 노력을 멈출 때면 의문이 밀려들지도 모른다. "정말로 그 자리에 오르면, 더 좋은 차를 사면, 이 여행을 할 수 있으면 그 다음에는? 이 모든 것이 다 무슨 소용일까? 이 모든 것을 원하는 사람이 정말 나일까? 행복해질 것이라고 다들 말하지만 이루고 나면 허망해질 목표를 좇아 달리는 것은 아닐까?" 이런 질문이 떠오르면 사람들은 소스라치게 놀란다. 이 질문이 한 인간의 모든 활동, 즉 그가 원하는 것의 관념을 떠받치는 기틀에 의혹을 제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불안을 조장하는 생각은 최대한 빨리 떨쳐버리려 노력한다. 그런 의문으로 괴로운 것은 그저 피곤하거나 기분이 울적하기 때문이라고 여기고 원래 자기 것이라 여기는 목표를 계속해서 좇아간다. 30
하지만 그 대가는 크다. 자발성과 개성을 포기하면 삶은 좌절한다. 그들은 생물학적으로 아직 살아있지만 그의 감정이나 영혼은 이미 죽었다. 계속 움직이긴 하지만 생명은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31
직접 만든 작품이 자신의 신이 되어버린 것이다. 인간은 여전히 세계의 중심이라는 착각에 빠져 있지만, 옛날 그의 조상들이 신을 생각하며 느꼈던 바로 그 강도 높은 무의미함과 무기력의 감정이 그를 사로잡고 있다. 32
인간은 상품뿐 아니라 자기 자신도 팔면서 스스로를 상품으로 느낀다. 육체노동자는 육체의 힘을 팔고 상인과 의사, 사무직 노동자는 자신의 '인격'을 판다. 생산물이나 서비스를 판매하려면 '하나의 인격'이 되어야만 한다. 이 인격은 상냥해야 하지만 인격의 주인은 그것 말고도 여러 가지 다른 기대들을 더 충족시켜야 한다. 에너지와 솔선수범의 정신도 갖추어야 하고 그밖에 그의 특수한 위치가 요구하는 것들도 구비해야 한다. 33
ㅇㅔ리히 프롬씨.. 당신.. 정말..
ㅠㅠㅠㅠㅠ내가 작년에 일을 시작하면서 든 생각이랑 똑같다 정말! 내가 에리히 프롬한테 고민상담한줄..
이런 생각이 이어지다가 굉장히 공허함을 느꼈음. 엄청난 가면을 쓰고 일을 한다는 생각때문.
정말로 연예인의 삶이 이런 것인가, 함. 대중이 원하는 모습만을 언제나 하고 있어야 하니까.
물론 나의 경우에서는 아이들이 원하는 모습을 해준다기 보다는, 교사라는 특성상 인격적 모델이 되고 싶은 바람이 더 컸지만. 뭐 대동소이한 것 같다.
추상적 고객으로서 그는 중요하지만 구체적 고객으로서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가 백화점에 발을 디딘다고 해도 그 누구도 기뻐하지 않으며 그 누구도 그의 소망에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가 물건을 산다 해도 그것은 우체국에 가서 우표를 사는 행위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34
사람들에게 다른 주제, 예를 들어 정치에 대한 의견을 물어보아도 같은 현상을 목격할 수 있다. 평범한 신문 독자에게 특정 정치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면 그는 자신이 읽은 내용을 상당히 정확하게 들려주면서 그것이 '자신의' 의견이라고 주장할 것이며 -이것이 중요한 지점이다-그가 피력한 의견이 자신이 고민한 결과라고 확신할 것이다. 35
띵-
비판적 사고의 억압은 아주 어릴 때부터 시작된다. 다섯살만 되어도 아이는 벌써 엄마의 거짓을 알아챈다. 예민하게는 엄마가 입으로는 늘 사랑과 친절을 들먹이면서도 실제는 차갑고 이기적이라는 사실을 알아챈다. 그보다는 덜 예민하다면 엄마가 늘 자신의 드높은 도덕적 원칙을 강조하면서도 다른 남자와 부적절한 관계를 갖는다는 사실에서 엄마의 거짓을 눈치챈다. 아이는 모순을 느낀다. 정의와 진리를 바라는 그의 감정이 상처를 입는다. 36
따라서 어떤 주장이 논리적인지의 여부만으로는 그것이 합리화인지 확실히 알 수 없다. 그 사람의 내면에서 작동하는 심리적 동기도 함께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당사자가 무엇을 생각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생각하느냐다. 자신의 적극적 사고에서 나온 생각은 항상 새롭고 독창적이다. 37
그의 자존감은 사랑하고 생각하는 개별 인간으로서의 자기 활동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회, 경제적 역할에서 나온다.
사물이 말을 할 수 있다면 "넌 누구니?"라는 질문에 타자기는 "나는 타자기야."라고 대답할 것이다. 자동차라면 "난 포드야." 혹은 "난 뷰익이야." "난 캐딜락이야."하고 대답할 것이다. 인간에게 "넌 누구니?"라고 물으면 "난 회사원이야." "난 의사야." 혹은 "난 유부남이야." "난 두 아이의 아빠야."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리고 그의 대답은 해당 사물의 대답이 갖게될 의미와 상당히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 이는 스스로를 사랑과 공포와 확신과 의혹을 느끼는 한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사회 시스템에서 특정한 기능을 담당하는 진정한 본성에서 소외된 추상으로서 느끼는 방식이다. 38
무력감을 희미하게 의식은 하면서도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으로 그 뾰족한 가시가 무뎌지는 경우, 무력감을 억압하는 세 번째 반응이 나타난다. 이 경우 무력감은 과보상 행동과 은폐 목적의 합리화로 대체된다. 과보상의 가장 흔한 경우가 분주함이다. 깊은 무력감을 억압한 사람들이 특별히 활동적이고 분주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이 무기력한 인간의 정반대라고 생각할 정도까지 분주하다. 그들은 항상 무슨 일이든 해야 한다. 39
뜨끔.
지난 내 11월.
문제점이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아이를 너무 예뻐하고 응석받이로 키우면서 아이를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 양육 태도 역시 심각하다. 응석받이 아이들은 분명 보살핌과 보호를 받지만 자신의 힘과 자신에게 힘이 있다는 느낌은 마비된 상태나 다름없다. 필요한 것은 전부 넘치도록 얻고, 원하는 모든 것을 바랄 수 있으며, 하고 싶은 모든 말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의 상황은 근본적으로 포로로 붙잡힌 왕자와 같다. 40
얌전하게 말을 잘 들으면 원하는 것을 많이 얻을 수 있지만 그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얻지 못하며, 어른이 개입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부모가 적대적인 모습을 보이고 아이 역시 반항심을 키워 부모로부터 떨어져 나가 독자적인 삶을 시작해야 할 지점에서 부모의 친절이 모든 원칙적 반항심의 발전을 가로막아 아이를 점점 무능하고 무력하게 만든다. 정신분석을 진행하다가 어릴 적 부모가 필요 이상으로 오랫동안 등굣길을 따라다니고 옷 입는 것을 도와주었을 때, 어떤 옷을 입을지, 옷을 많이 겹쳐 입을지 얇게 입을지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었을 때 얼마나 무력한 분노를 느꼈는지 문득 기억을 해내는 경우가 종종 있다. 41
우리 부모님께 감사했다.
다른 사람을 사실대로 본다는 것은 그를 투영 없이, 왜곡 없이 객관적으로 본다는 뜻이며, 이는 투영과 왜곡을 낳는 자기 내부의 신경증적 '악덕'을 극복한다는 의미이다. 내적 현실과 외적 현실을 인식하기 위해 완벽하게 각성한다는 의미이다. 그런 내면의 성숙에 도달한 사람만이, 자신의 투영과 왜곡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는 사람만이 창조적으로 살 것이다. 42
타인에 대한 나의 체험이 있는 그대로의 그를 향하고 나의 응답을 결정하는 것이다.
그럴 때 나는 있는 그대로의 상대에게 반응한다. 타인에 대한 나의 체험이 있는 그대로의 그를 향하고 나의 응답을 결정하는 것이다. 나는 머리나 눈이나 귀로 응답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의 내 온 인격으로 응답한다. 내 온몸으로 생각하고 내 가슴으로 본다. 어떤 대상에게 내 안에 존재하는 실제의 힘으로, 그야말로 응답의 능력을 가진 온 힘으로 응답한다면 그 대상은 대상이기를 멈춘다. 나는 그것과 하나가 되어 더 이상 단순한 관찰자가 아니게 된다. 나는 그것의 재판관이 아니다.
이렇게 보고 응답하고 인식하고 인식 대상을 알아보는 감각을 갖추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할까? (진짜 삶의) 첫 번째 조건은 감탄의 능력이다. 아이들은 이 능력을 아직 갖고 있다. 노력을 총동원하여 새로운 세상에서 방향을 찾고 항상 새로운 사물을 붙잡아 알아간다. 당황하고 놀라고 감탄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창조적으로 응답할 수 있다. 하지만 교육과정을 거치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감탄의 능력을 잃는다. 이제 자신은 모르는 것이 없으며, 감탄은 무지의 증거라고 생각한다. 세상은 더 이상 기적으로 가득하지 않고 사람들은 세상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감탄의 능력이야말로 예술과 학문의 모든 창조적 결과를 낳는 조건이다. 43
감탄의 능력.
감탄이라 칭하지만 전반적인 감정을 아우르는 것 같다. 놀라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오래되진 않았지만 살다보니, 어느 특정한 감정만 잘 배설하는 사람이 있더라..
(진짜 삶의) 두 번째 조건은 집중력이다. 서구 문화에서는 희귀한 것이다. 우리는 늘 분주하지만 집중하지 못한다.
다섯 가지 일을 동시에 하면서 그 어떤 일도 제대로 하지 않는다. 여기서 '아무것도 안 한다'는 말은 그 일이 우리 자신의 표현이 아니라는 뜻이다. 진정으로 집중을 할 때는 지금 이 순간에 하는 일이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다. 어떤 사람과 이야리를 나누건, 어떤 글을 읽건, 산책을 하건, 이 모든 일을 집중해서 한다면 나에게는 지금 여기서 내가 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과거나 미래에서 산다. 하지만 실제 경험으로서의 과거나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여기만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인식과 응답은 여기 지금에서만 존재한다. 지금 이 순간 하고 보고 느끼는 것에 전념한다면 말이다. 44
그는 자신이 생각한다고 상상하지만 사실은 '그것이 내 안에서 생각한다'는 표현이 더 옳을 것이다. 그는 레코드플에이어와 같은 착각을 한다. 생각을 할 줄 안다면 레코드플레이어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지금 모차르트의 심포니를 연주해." 하지만 우리 모두는 우리가 레코드판을 턴테이블에 걸었고 그것이 자기 안에 녹음된 음악을 그저 재생할 뿐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45
하지만 자신의 자기와 자아를 진정으로 느끼는 사람은 스스로를 자기 세계의 중심으로, 자기 행동의 진짜 장본인으로 경험한다. 그것이 바로 내가 말하는 독창성이다. 내가 말하는 독창성은 새로운 발견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기원을 두는 경험이다. 46
이런 공포와 순응의 강박은 나 자신을 창의적인 내 행위의 장본인으로 느끼는 '자아' 감정을 키워야만 극복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말이 결코 자기중심적이거나 이기적이 되라는 의미는 아니다. 정반대로 나는 나를 타인과의 관계의 과정에서만 '나'로 느낄 수 있다. 47
우리는 인간종이 누리거나 언젠가 누리게 될 모든 가능성을 대변하지만 짧은 생애 동안 이 가능성 중에서 미미하게 작은 부분밖에는 실현하지 못한다. 48
인간종이 누리거나 언젠가 누리게 될 모든 가능성을 대변.
ㅠㅠㅠㅠㅠㅠㅠ이렇게 멋있고 맛있는 말이라뇨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진짜 삶을 산다는 것은) 매일 새롭게 태어날 준비를 하는 것이다. 실제로 탄생은 아이가 태아로 존재하기를 포기하고 스스로 숨 쉬기 시작할 때 일어나는 단 한 번의 과정이 아니다. 49
인간은 인간 고유의 이분의 지배를 받는다. 인간은 안전을 의미하는 과거 상태의 포기를 두려워하지만 자신의 힘을 더 자유롭게, 더 완전히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하는 새로운 상태에 도달하고자 한다. 인간은 자궁으로 돌아가고 싶은 소망과 완전히 새로 태어나고 싶은 소망 사이를 항상 이리저리 오간다. 모든 탄생의 행위는 용기를 필요로 한다. 놓아버릴 용기, 자궁을 포기하고 엄마의 가슴과 품을 떠나며 엄마의 손을 놓고 마침내 모든 안전을 버리고 단 하나, 즉 사물을 실제로 인식하고 그것에 응답하는 자신의 힘만을 믿는 용기를 필요로 한다.
태어날 준비 -모든 안전과 착각을 포기할 준비-는 용기와 믿음을 필요로 한다. 안전을 포기할 용기, 타인과 달라지겠다는 용기, 고립을 참고 견디겠다는 용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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