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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런 생각이 든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태어날 곳이 아닌 데서 태어나기도 한다고. 그런 사람들은 비록 우연에 의해 엉뚱한 환경에 던져지긴 했지만 늘 어딘지 모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가지고 산다. 태어난 곳에사도 마냥 낯선 곳에 온 사람처럼 살고, 어린 시절부터 늘 다녔던 나무 우거진 샛길도, 어린 시절 뛰어 놀았던 바글대는 길거리도 한갓 지나가는 장소에 지나지 않는다. 어쩌면 가족들 사이에서도 평생을 이방인처럼 살고, 살아오면서 유일하게 보아온 주변 풍경에도 늘 서먹서먹한 기분을 느끼며 지낼지 모른다. 낯선 곳에 있다는 느낌, 바로 그러한 느낌 때문에 멀리 사방을 헤매는 것이 아닐까. [각주:1]

내가 꽤 오래 생각했던 생각을 마주했다. 반가우면서도 이상한 느낌.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서 내 생각을 들을 때면 반갑다. 꼭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나눌 수 있는 마음과 생각이라니. 그것도 내가 태어나기 한참 이전의 서머싯 몸에게.


그러니 말일세, 머리만 좋다고 되는 게 아닌가 보아. 인격이 중요하지. 아브라함에게는 인격이 없었어.[각주:2]


나는 다시는 이 섬을 보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내 인생의 한 장은 그렇게 끝났고, 나는 피할 수 없는 죽음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 있음을 느꼈다.[각주:3]



앞 쪽에 내가 스티커 붙혀둔 것들은 청주에 있기에.. 이 정도밖에 쓰지 못해 아쉽다. 

대학교 1학년 여름쯤이었던가, 아 아니다 2학년이구나! 그당시 평생사제 티타임 때였던 걸로 기억한다. 원호오빠랑 나 그리고 성태였나.. 누군가 함께 교수님 연구실에 있었다. 루이보스 차를 주셨었지 아마(그 후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차는 루이보스가 됐다). 요즘 뭐하고 있냐는 물음에 원호오빠는 '달과 6펜스'를 읽는다고 했다. 나는 그때까지 동기였지만 원호오빠가 문학소년인 것을 몰랐었다. 정말 나는 지극히 나밖에 모르고, 나라는 우주 안에 갇힌 인간이었다. 교수님 연구실을 나오고, 오빠한테 그 책 재밌냐고 물었었다. 오빠가 말하길 "응 진짜 재밌어. 달은 이상을 의미하고 6펜스는 현실을 의미해." 당시에 나는 스스로는 언젠가 읽어보아야지 하고는 상아에게 어서 읽어보라고 권했다. 그리고 그걸 이제야 읽었다. 대부분의 고전-이라 일컬어지는 것들, 특히나 외국 문학의 경우-은 가독성이 그리 높은 건 아니다. 그런데 이 책은 정말 수월하게 읽혔다. 내가 좋아하는 에쿠니 가오리의 책보다 더. 그리고 몰입도도 상당했다. 정말 재밌었다. 이제야 나는 3년 전 원호오빠가 가진 생각과 감상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야 3년 전의 나보다 조금은 나아진 점 하나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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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고민을 하는 것은 당신 혼자만이 아니다. 다들 속내는 저마다의 사정으로 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을지라도, 프로니까 겉으로는 태연한 척 자신의 일을 이 악물고 해나가고 있을 뿐이다. 그러고는 저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쉬고 있거나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나는 이런 그녀들에게 깊은 연대와 공감을 느낀다. 그녀들의 숨겨진 고민들은 적어도 향후 더 나은 직장여성이 되려고, 더 성숙한 인간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반증이기 대문이다. [각주:1]


누군가로부터 질책을 받거나 비난을 들으면 겉으로는 태연한 척 굴어도 속으로는 끙끙 앓는다. '싫은 소리'에 대한 면역력이 약한 그녀들은 그래서 본인들이 알아서 자신을 혹사시키는 것은 아닐까. [각주:2]


나는 남들보다 이른 나이인 스물 한 살에 대학을 졸업했다. 그래서인지 어느 조직에 있든 '최연소'라는 호칭을 들으며 내심 그렇게 불리는 데 만족했다. 남들보다 시간을 벌어놓고 앞서가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감각에 익숙해진 나는 남들과 늘 거리를 두어야만 직성이 풀렸다. 항상 남들보다 어느 정도 앞서 달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 위해 다소 무리를 해서라도 달리고 또 달렸다. [각주:3]


무의식중에 결혼을 마지막 보루라고 생각하며 '보신 모드'로 적당히 직장생활을 즐기고 말 것이라면 몰라도 진지하게 커리어를 쌓고 일다운 일을 하려면 쉽게 어리광을 부릴 수 있는 함정은 의식적으로 피해야 할 것이다. [각주:4]

요즘의 김현아에게 하고 싶은 말. 이정도면 된 것 같으니 더이상 징징대거나 약한 소리 하지 말 것. 단단해질 것. 


여자들처럼 드러내놓고 싫어하면서 직접 부딪히는 정직하고도 바보 같은 짓은 절대 안 한다. 남자와 여자는 이토록 다르다. 남자처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실속을 챙기라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단지 지나치게 감정에 치우쳐 행동하지 말라는 것이다. 여자들은 나중에 자신의 행동에 대해 후회하면서도 그 이유가 자신들이 감정적으로 대처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할 때가 많다. 지나치게 화낼 필요가 없는 상황에서 너무 민감하게 군 것도 사실이다. 

큰 어려움 없이 인생의 모든 단계를 무사히 거쳐온 한 20대 직장여성이 어렵사리 들어온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했다. 그 이유를 물으니 "상사가 말도 안 되는 얘기만 해서 도저히 그걸 못 봐주겠더라고요."라고 대답한다. 말도 안 되고 상식에 어긋난 행동을 하는 게 원래 인간인데 상사라고 예외일까? 그런 사람에게는 정론으로 반박한다고 해도 소용이 없다. 그 상황에서는 적당히 따르는 시늉만 해주면 되지 일일이 정색을 하고 반발할 필요가 없다. [각주:5]


연애처럼 때로는 적당히 둔감해지는 것이 회사와의 관계를 오래 유지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여자들은 연애에도 직장 일에도 너무 예민하게 올인하는 탓에 스스로 에너지를 소진시키는 우를 범한다. 민감하고 쉽게 상처받는 것보다 둔감하고 조금은 뻔뻔스러운 것이, 소심하게 신경 쓰기보다 대범하게 사는 것이 직장에서 오래 살아남기 위한 비책일 수 있다. [각주:6]


직업에는 귀천이 있는 게 아니라 잘하거나 못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세상의 그 어떤 직업이라도 그 안에는 소수의 탁월한 사람과 대다수의 고만고만하게 일하는 사람, 그리고 소수의 한심한 인간들이 있다는 것이다. 총무부 직원이든, 외과 의사든, 경비 아저씨든, 그 어떤 직업에서든지 말이다. 

중요한 것은 뭐가 되느냐가 아니라 그 일 속에서 어떤 입장을 취할 것이냐이다. 따라서 우리는 소수의 탁월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 [각주:7]


조직생활에서 각 개인마다 서로 다른 생각이나 취향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내 것을 있는 그대로 관철시키기보다는 타인의 불쾌함을 최소화할 수 있는 타협점을 찾는 현명함과 배려가 요구된다. [각주:8]


직장생활을 즐겁게 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뭐든지 재미있어 하는 호기심 가득한 정신이다. 그러한 호기심이 어떤 일에든 주체적으로 관여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 일을 순수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 업무에 개선할 만한 점은 없는지, 더 응용할 만한 건 없는지 생각해보자. 단순 업무에도 분명한 부가가치가 있다. 틀에 박힌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창의적으로 일을 바라보면 그 일이 더이상 귀찮은 단순 업무만은 아닐 것이다. [각주:9]

맞는 말. 3월 새학기 초롱이 시절..ㅋㅋ 뭐든게 재밌고, 얼른 자고 내일 또 학교에 가고 싶었다. 뭐든게 재밌었으니까. 그리곤 뭐든지 내가 맡아서 하고 싶었고, 피곤해하는 동료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렇게 재밌게 돈을 벌 수 있다니.. 양심에 찔리기까지 했었다. 그당시에 일기를 써 남겨놓지 않은게 아쉬울 따름이다. ㅠㅠ 




광고대행사에 다니던 시절 기획안 작성에 대해 사수로부터 좋은 레슨을 받았다. 먼저 A4용지를 반으로 잘라 대략 50장 정도를 준비해놓는다. 그리고 연필로 한 장 한 장 거칠게나마 구상한 내용을 작성해나간다. 그렇게 하다 보면 각 페이지 사이의 연결과 맥락이 맞는지 바로 잡아낼 수 있고 순서를 바꾸는 것도 용이하다. 연필로 하기 때문에 중간에 수정하기도 쉽고 직접 종이에 적는 작업이다 보니 내용에 집중할 수 있는 힘과 창의력도 생긴다. 반면 처음부터 파워포인트 형식에서 작성하기 시작하면 전달하고 싶은 내용에 집중하기 보다는 페이지 모양을 꾸미는 데 집중하느라 형식상 일하는 척만 하게 된다. [각주:10]

오.... 이렇게 성가신 작업을 좋은 레슨이라고 생각한 그녀에게 감탄을. 그리고 읽어보니 정말 맞는 것 같다. 괜한 대칭주의때문에 직각주의때문에 PPT는 열을 맞추는데 많은 시간을 허비한다 자주. ㅠㅠ 뭐랄까. 요령이 없는 게 아니라, 일의 본질과 핵심을 파악하고 그에 맞는 방법을 취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지도안(?), 시나리오(?)를 손으로 짜보자. 하긴 그간을 떠오려보니 손으로 쓰면서 말하면서 이것저것 노닥노닥하며 짰던 시나리오들이 참 좋았던 구상이었던 것 같다. 

뜬금없지만 나는야 감독 ! 


질문하기와 더불어 '자기 의견 얘기하기'도 갖춰야 할 자질 중 하나다. 눈치만 살피며 소신껏 자기 의견을 말하지 못하는 것은 거부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자기 의견을 피력해서 손해 보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각주:11]



[각주:12]나 김현아는 이것을 마르고 닳도록 보거라. 또 내년에 만날 병아리 후배에게도 보여주자. 맘 속에 새기자. 답은 사실 책 속에 있었구나. 



처음부터 김새는 얘기라고 할지 모르지만 저마다 개성이 남달랐던 여러 상사들을 모셔보기도 하고 상사로서 부하직원들도 거느려본 내가 내린 결론은 '적어도 상사에게는 무조건 잘해야 한다.'는 것이다. [각주:13]


부하직원이 우물 안만 보는 제한된 시각으로 상사의 단편적인 무능력만 공격하다 보면 나보다 인생 경험이 많은 어른들의 지혜로움을 알아차리지 못할 수도 있따.

그럼, 자신이 상사보다 낫다고 확신하게 되는 이유는 뭘까?

상사의 한 가지 약점을 발견하고 그것만으로 상사의 모든 점을 과소평가하기 때문이다. 상사가 '약한' 특정 업무에 우연히 내가 '강하면' 자신이 그렇게 잘나 보일 수가 없다. 그런 일이 몇 번 생기면 그때부터는 아예 상사를 무능력자로 낙인 찍어버린느 것이다. 

편의대로 해석된 상사와 미화된 자신을 놓고 오로지 내가 얼마나 아까운 인재이고 그가 얼마나 배울 것 없는 상사인지에 대한 생각에 사로잡혀 객관적으로 상사의 강약점도 냉정히 평가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고 만다. [각주:14]


2할이라는 입장을 부담스러워하는 후배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더없이 간단했다. "어차피 상사한테 편애받으면 동료들로부터 견제를 당하는 건 당연해. 네가 처신을 잘해서 그 동료들에게 직접적으로만 해를 안 입히면 돼. 그리고 자신감 있고 뻔뻔하게 넘어갈 줄도 알아야 해."[각주:15]


한 번이라도 윗사람이 돼본 경험이 있으면 알 것이다. 아랫사람이 내게 싫은 소리 하는 것을 듣는 심정을. 그리고 그게 맞는 말일수록 더욱 못마땅하다. 대부분의 평범한 윗사람들에게는 일이 조금 서툴더라도 자신의 가르침에 순순히 수긍하는 직원들이 훨씬 예쁜 법이다. [각주:16]

이 점에서 내가 존경하는 부장님의 핵이 보이는 듯하다. 첫째로 그녀는 내가 그녀에게 맞는 말을 할 수 있게 분위기를 내어주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내가 아니라고 말한 첫 존재가 되어주었으며, 그것을 끝까지 다 들어주셨다. 둘째로는 이와 같은 일이 있었음에도 그녀는 그이전과 다른 게 없었다. 되려 후에 나의 마음을 챙겨주시기까지 했다. 그때에야 나는 굉장히 부끄러웠고.. 그 분의 커다란 품에 안길 수 있었던 것 같다. 오늘도 역시나 멋있는 우리 부장님.



[각주:17] 김현아는 보아라2. 



자신의 목표가 뚜렷이 서 있지 않는 한, 어딜 가나 3개월만 지나면 대개 회사가 맘에 안 들고 일도 재미없고 회사 동료들도 몇몇을 제외하고는 마음에 안 들 것이기 때문이다. [각주:18]

그렇구나. ㅋㅋ교직이라는 특수한 지루한 상황에서만 그런게 아니구나 했던. 늘 다른 직업들은 매일 재밌고, 여유가 넘실댈 것 같다고 막연히 상상했었다. 근데 그게 아닌가봐! 



무엇보다도 몸은 이유 없이 아프지 않는다. 몸이 주는 메시지를 무시하면 심신의 균형이 깨지면서 더 걷잡을 수 없는 상태가 된다. 나이들어 꾀만 늘어가는 자신의 머리를 믿지 말고 이럴 때는 솔직하고 우직한 몸이 보내는 신호를 믿어야 한다. 두 가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당신은 밤에 잘 자는가? 그리고 당신에겐 식욕이 있는가? [각주:19]


정신과 전문의에 따르면, 의욕을 보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심신이 아프고 지쳐 있으면서도 건강한 척하는 것이 가장 안 좋다. 못하는 것은 못하겠다고 상사에게 솔직히 고백할 줄 아는 것도 자기를 지키기 위한 하나의 능력이라는 말이다. [각주:20]


자신의 직감을 믿고 그에 따라 행동하거나 판단을 내린 적이 있는가? 만약 그런 적이 없다면 당신은 아까운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혼란스러운 일이 닥쳤을 때 여러 가지를 따져봐서 이성적으로 판단했건만, 나중에 결과적으로 뚜껑을 열어보니 '아, 역시 내 직감이 맞았구나.'라고 무릎을 칠 때가 종종 있다. 논리적인 결론을 내렸지만 왠지 찜찜했던 것이 마음에 걸렸으리라. 

직감은 매우 비논리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원래 그것은 본능적으로 우리를 지켜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각주:21]


가령 당신이 33세라고 치자. 당신의 나이는 평생에 걸쳐 하고 싶은 일을 찾고 시작하기에 결코 늦은 나이가 아니다. 하지만 27세와 비교하면 다소 불리할 수 있다. 단지 그뿐이다. [각주:22]

단지 그뿐이다. 그정도의 불편함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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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는 어렸을 때 따돌림당한 적 있어?"

덴고는 어렸을 때를 생각했다. "없을 거야. 혹시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눈치 채지 못했어."

"눈치를 못 챘다면 그건 한 번도 따돌림을 당하지 않았다는 거야. 원래 따돌림이란 상대에게 따돌린다는 것을 알리는 게 첫 번째 목적이니까. 당하는 본인이 눈치를 못 채는 따돌림이라니, 그런 건 없어."[각주:1]


"이건 삶의 방식 자체의 문제예요. 항상 진지하게 자신의 몸을 지키려는 자세가 중요해요. 공격받는 걸 그저 감수하기만 해서는 어떻게도 해결이 안 되죠. 만성적인 무력감은 사람을 야금야금 갉아 먹고 손상시킵니다."[각주:2]


사람이 자유로워진다는 건 어떤 것일까, 그녀는 곧잘 자문했다. 하나의 감옥에서 멋지게 빠져나온다 해도, 그곳 역시 또다른 좀더 큰 감옥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각주:3]


"세계라는 건 말이지, 아오마메 씨, 하나의 기억과 그 반대편 기억의 끝없는 싸움이야."[각주:4]


1



그뒤 오랫동안 덴고는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행동의 결여를 후회했다. 그 소녀에게 했어야 할 말들을 이제는 얼마든지 마음속에 떠올릴 수 있었다. 그녀에게 말하고 싶은 것, 말해야 할 것들이 덴고 안에는 분명하게 있었던 것이다. 또한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녀를 어딘가로 불러내 이야기를 한다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적당한 기회를 만들고 그저 약간의 용기를 내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덴고는 그러지 못했다. 그리고 기회는 영원히 사라져버렸다. [각주:5]


간호사는 말했다. "간호사 교육을 받을 때 한 가지 배운 게 있어요. 명랑한 말은 사람의 고막을 밝게 흔든다는 거예요. 명랑한 말에는 밝은 진동이 있어요. 그 내용이 상대에게 이해되든 안 되든 고막이 물리적으로 밝게 떨린다는 점은 달라지지 않아요. 그래서 우리는 환자분께 들리건 들리지 않건, 아무튼 큰 소리로 명랑한 말을 건네라고 배웠어요. 뭐, 이론이야 어찌 됐거느 그건 틀림없이 도움이 되는 일이니까요. 경험적으로도 그렇게 생각해요."[각주:6]



2



그래서 항상 입을 닫고 있었다. 그리고 남이 하는 말에 -그것이 어떤 말이건- 주의 깊게 귀를 기울이는 것을 습관으로 삼았다. 거기에서 뭔가를 얻으려고 항상 유의했다. 그 습관은 이윽고 그에게 유익한 도구가 되었다. 그는 그 도구를 사용하여 수많은 귀중한 사실을 발견했다. 세상 사람들 대부분은 자신의 머리로 뭔가 생각한다는 걸 아예 하지 못한다 -그것이 그가 발견한 '귀중한 사실' 중 하나였다. 그리고 생각을 하지 못하는 인간일수록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다. [각주:7]


꿈속에서 아오마메의 배는 상당히 불룩해져 있다. 출산이 임박한 모양이다. 그녀는 작은 것의 심장 박동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다. 그녀 자신의 심장 소리와 작은 것의 심장 소리가 한데 섞여 기분 좋은 복합 리듬을 만들어낸다. [각주:8]

왜인지 이 느낌이 친숙하게 느껴졌다. 언젠가 꼭 그랬었던 적이 있었던 것처럼. 그리고 따스하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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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이 글을 통해 많은 말을 전하게 될텐데, 딱 한 가지 하고 싶은 말은 "어른이 되지 않아도 괜찮아요, 다만 당신 자신이 되세요."입니다. 그것이 여러분이 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이니까요. 

아무쪼록 이 말을 새기고 읽어 주세요. [각주:1]


일단 어른이 되고 나면, 모든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어린 시절의 감각이죠. 인생을 헤쳐 나가기 위한 길잡이는 그것밖에 없습니다. 나이가 몇 살이든 직업이 무엇이든 그건 다르지 않아요. 

다만 어린 시절에 체험한 일의 가치와 자신이 원래부터 갖고 있던 것의 중요함은 어른이 되지 않고는 그 의미를 알 수 없으니, 인생이란 참 절묘한 것 같습니다. [각주:2]


하지만 저 역시 그때는 그때는 아직 어른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외로움에 허우적거리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는 상태였어요. 

그런데도 어떻게든 친구를 만들어 하루하루를 헤쳐 나갔습니다. 상당한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나날이었죠. 그래서 온갖 것들이 귀찮아지고, 모든 일에 수동적으로 변하고 말았어요.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기는커녕, 눈앞에 있는 일을 간신히 해 나가기도 힘에 부쳤는지 모르겠군요. [각주:3]


그때, 병원 문 앞에서 불쑥 깨달았습니다.

나만 그랬던 게 아니야. 같이 와 준 이 두사람도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하루였어.

그런데 나를 위해 복도에서 줄곧 기다리고, 같이 결과를 들어주고, 그러느라 내내 서 있었잖아. 난 같이 와 주는 걸 당연하다고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어. 나를 생각해서 같이 와 주었다는 거, 정말 소중한 일이네.

정말 한꺼번에, 고스란히 이해할 수 있었어요. [각주:4]

나도 지금까지 지내오면서 이와 같은 순간이 있었던 것 같다. 갑자기 시야가 확 넓어지는 느낌. 

그것을 분수령으로 전과 후가 크게 나뉘는 것은 살아가면서 때때마다 절감한다. 잘 기억은 안 나지만 그 때에 감사하다. 


"오늘은 정말 감사합니다. 국숫집까지라도 제가 들고 갈게요"

그리고 다 같이 메밀국수를 먹을 때는 검사를 받으면서 짜증스러웠던 기분도 몸이 안 좋다는 사실도 다 잊고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올바르게 행동하면 마음의 응어리가 없어지는구나, 그렇게 느꼈습니다. [각주:5]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내면에서 엉엉 우는 어린아이를 인정하는 것이라고요. 애써서 거기에 없다고 여기지 않는 것이라고요. 그러면 마음 속에 공간이 생겨, 자신을 든든하게 붙잡아 주거든요. 

나이를 얼마나 먹든 그건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즉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린아이인 자신이 살갑게 보듬고 어른으로 살아가는 것이죠. [각주:6]


하지만 모두가 말하는 '어린 시절'이란, 어린아이만이 가질 수 있는 에너지와 풍요로운 공간 아닐까요.

어른이 되면 많은 것들이 이미 익숙한 듯한 기분이 들고, 멍하게 지내는 시간이 줄어들어요. [각주:7]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이 조금이라도 '내 인생은 나의 것, 자유로운 시간은 한정되어 있지만 그 시간만큼은 자유롭게 행동하고 싶다.'하고 생각해 준다면 더없이 기쁠 것 같아요. [각주:8]


굳이 친구를 찾지 않더라도 그런 인간관계에서 도움을 얻는, 여유 있는 마음을 지닌 자신이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또 가까이 있지 않더라도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각주:9]


아무리 정체를 알 수 없어도,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알 수 없어 기분이 영 찝찝하더라도, 직업이 뭔지 말해 주지 않더라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열린 마음으로 밝게 대해주는 사람이 있어요. 그런 사람들은 자기 직장에서 반드시 성공을 했고, 행복한 결혼도 하더군요. [각주:10]


그러니 스스로 목숨을 끊고 싶어지는 시점이 다가왔다고 생각되면 차분하게 생활을 다잡도록 하세요. 아침에는 일정한 시간에 일어나고, 최대한 몸을 움직이고, 잠이 오지 않더라도 일찍 잠자리에 들도록 하세요. 인터넷에 허비하는 시간을 제한하고, 담백하고 질 좋은 음식을 먹고, 번잡한 인간관계와 술, 성욕 같은 것은 잠시 접어 두고 저금통을 다시 채우는 거에요.

그렇게 하면 얼마든지 몸과 마음의 건강을 되찾을 수 있는 날이 올 거에요. [각주:11]


우선 간단하게, 손윗사람은 참 대단하다고 생각하면 많은 것들이 정말 편해집니다. 

아무튼 상대의 나이가 한 살이라도 많으면, 예의 바르게 행동하면서 신나게 얻어먹으세요. 하하. 

그리고 손아랫사람에게는 신나게 한 턱 쏘는 거예요. [각주:12]


그렇다면 사람은 뭘 하기 위해 태어났을까요. 저는 각자가 자기 자신을 끝까지 밀고 나가기 위해 태어났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그렇게 자신을 끝까지 관철하면, 왜 그런지는 몰라도 반드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존재가 되더군요. 인간이란 애당초 그렇게 생겨 먹은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각주:13]


하지만, 작가로 데뷔한 당시 나이가 어린 탓에 인생 경험이 압도적으로 부족하다는 것을 느꼈죠. 취직도 하지 않았고 말이에요. 무슨 수를 써야겠다 싶어서, 다양한 사람도 만나고 여행을 떠나기도 했습니다. 사람을 만나려면 차림새나 행동거지, 예의 등 주의해야 할 점이 많으니, 그런 것들도 배우게 되었죠. 돈이 좀 들기는 했지만요. 하지만 인생의 폭을 넓히기 위한 일이었으니 후회는 없습니다. 

세상은 넓고, 다양한 일과 생각이 존재합니다. 한 사람의 인간이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으니까 다른 사람을 만나 그 사람이 하는 일을 보며, 상상했던 것과는 다르네, 하고 느끼는 순간을 많이 갖는 것이 좋아요. 보러 떠다는 것만 해도 신이 나고, 아는 세계가 넓어지고, 또 겸허해질 수도 있습니다. [각주: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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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이한 것은, 주차장에는 자동차들이 세워져 있고 베란다에는 빨래들이 널려 있지만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마치 다들 재해 대피 훈련이라도 하는 것처럼 풍경 자체에선 생활감이 물씬 풍기는데 정작 그 풍경에 '사람'이 빠져 있다. [각주:1]


제대로 된 노포일수록 나만 빛나면 된다, 나만 눈에 띄면 된다 하는 오만한 태도가 없다. 내가 원조라고 주장하는 법도 없다.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비교하지 않고 자기 가게만의 고유한 색을 지켜나갈 뿐이다. 반짝거리는 새것보다는 어딘지 모르게 낡고 약간 녹슨 듯한 세월의 흔적, 그리고 거기서 비롯하는 향수 어린 감성을 교토는 더 가치 있게 여긴다. [각주:2]


"세월이 좋다거나 오래된 것이 좋다거나 그런 건 없습니다. 좋은 것이 좋은 겁니다. 그리고 좋은 것은 항상 더 좋아질 여지가 있습니다.": [각주:3]


"아, 네. 실내 촬영은 괜찮습니다만 책을 보고 있는 다른 손님들은 찍지 말아주세요."

점원은 친절하지만 단호하게 당부했다. 

자신이 속한 마을 공동체에 대한 예의. 한 공간에 머무는 다른 손님들에 대한 예의. 타인을 존중하는 태도는 나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에서 비롯한다. 타인을 향한 세심한 배려는 내가 언젠가 고스란히 돌려받게 될 호의이기도 하니까. 쾌적한 공존을 위해 우리 모두가 조금씩 더 서로에게 신중할 필요가 있음을, 이 아름다운 동네 서점을 대수롭지 않다는 듯 넌지시 가르쳐주었다. [각주:4]

이처럼 생각해주는 사람이 있긴 하구나. 씁쓸한 미소가 지어진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걸까 이분을. 


엄밀히 따져보면 카페나 다방은 인간의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곳은 아니다. 하지만 무용한 것들이 삶에 윤기를 준다. 그들이 존재하기에 우리는 보다 기분 좋게 일상을 살아나간다. [각주:5]

맞아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나는 청주에서 내가 사랑하던 카페노리를 떠올렸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그곳은 내게 정말 노스탤직하다. 따뜻한 노란 조명 아래서 추운 날은 조금 추운대로, 더운 날은 조금 더운대로, 커피 냄새가 나면 나는대로, 베이글 혹은 빵냄새가 나면 나는 대로 좋았다. 그때 내가 가장 건강했다고 생각한다(아마?). 또 그때 내가 전공에 호기심을 붙이기 시작했었다. 두꺼운 전공책 시작이 무서워 카페로 들고나가면, 나는 노란 형광펜과 함께 한장씩 읽어나갈 수 있었다. 아직도 나는 그곳의 카페모카만큼 맛있는 커피를 마셔본 적이 없다. 기억만으로도(혹은 추억만으로도) 감사해지고 기분이 좋아진다. 숱한 대화, 많은 사람들과 함께한 그 카페는 내게 정말 소중한 곳이다. 

글을 쓰는 지금도 잠깐 거기에 있는 듯한 상상을 해보았다. 

기분이 좋아졌다. 



성공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에 느꼈던 '해보고 싶다'는 감정을 소중히 보살피면서 그것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본다. 그 감정이 강하고 순수할수록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을 넘어서서 계획한 바를 구현해나간다. 그 거침없는 기세가 이윽고 주변 사람들의 관심과 응원을 불러 모은다. 내게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보는 것, 단지 그뿐이다. [각주:6]

맞는 말. 거창할 필요 있을까. 나만 알면 될 것을.


공중 목욕탕은 겨울이라는 계절과 참 잘 어울린다. 추운 겨울 저녁, 기다란 머플러로 목을 칭칭 감고 하얀 입김을 호호 불면서 종종걸음으로 찾아가는 동네 목욕탕의 맛. 두껍게 껴입고 온 옷가지를 탈의실에서 하나하나 허물 벗듯 벗을 때의 엄청난 수고, 겹겹이 보관함에 쑤셔 넣어야 하는 번잡합, 탈의실에서 목욕탕 문을 열고 들어갈 때 시야를 에워싸는 뜨거운 수증기, 목욕을 마치고 나와 다시 한 겹씩 옷가지를 꺼내 입을 때의 끈적거림. 그럼에도 불구, 몸을 정갈하게 하는 일련의 의식을 마치고 건물 바깥으로 나왔을 때 발그스름해진 두 뺨에 닿는, 박하사탕처럼 개운하고 시원한 밤공기. 바깥은 차디차도 몸만큼은 충분히 후끈하게 데워져 있어 든든하다. [각주:7]

이래서 작가인 건가 하는 대목. 어쩜 이렇게 내가 좋아하는 목욕탕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감정들을 무심히 적어내지?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고 상쾌해지는 글이다. 그리고 당장 목욕탕에 가야할 것 같고. 

상아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이 순간 덕분에 우리는 꽤 많이(그리고 즉흥적으로) 목욕탕을 다녔다. 얼른 이번 주말이 오면 나도 새벽 목욕탕을..! 흐흐 



마이코가 게이코 선배들에게 가장 먼저 배우는 덕목이 바로 '입이 무거울 것'. 이는 오차야의 신용과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에 평생 지켜야 할 약속이다. 또한 손님들이 소문에 대해 얘기하거나 이른바 뒷담화를 하고 있을 때도 분위기에 휩쓸려서 같이 맞장구를 치지 않도록 훈련을 받는다. 서로가 오래 알고 지낸 친숙한 사이라 하더라도 절대 질척대지 않도 자신의 품위와 중심을 지킨다. 그것은 손님들에게도, 접대하는 게이코나 마이코들에게도 공히 적용되는 화류가 놀이의 자부심이다. [각주:8]


같은 이야기를 사람에게도 적용할 수 있을 것 같다. 자신의 학벌이나 유명한 회사의 명함, 얼마나 부자이고 많은 걸 가졌는지를 어떻게든 겉으로 드러내려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누가 물어보지 않는 이상 그런 이야기는 함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실상 그들에게 그런 '레테르'는 피상적인 상징에 불과하다. 진짜로 실력이 있다면 품위가 생기고 품위가 있으면 성급하게 자신의 조건들을 드러내며 주장할 필요가 없다. 같은 맥락으로 교토 사람들에겐 직설 이상으로 '자기 자랑'은 금물이다. 대놓고 하는 자기 자랑만큼 창피하고 촌스러운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명예로운 성취라도 자기 입으로는 먼저 밝히지 않는다. 남에게 칭찬을 받으면 겸손하게 부정하는 것이 당연한 예의이기도 하다. [각주:9]

마흔이 넘고, 쉰이 넘었을 때에도 내가 잊지 않았으면 한다. 

'촌스럽다'는 단어가 알차다는 생각이 든다. 촌스럽다. 나만의 언어로 쫌인 모양새. ㅋㅋ 시의적절하다. 촌스럽다. 촌스럽다. 



이토록 침착한 분위기는 이곳 주인과 종업원들의 사려 깊은 서비스 덕분이기도 하다. 그들은 늘 편안한 미소로 자신의 할 일을 하되, 손님들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여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햇다. 손님이 달랑 커피 한 잔만 시켜놓고 오랜 시간 눌어붙어 있어도 싫은 내색 하나 하지 않았다. 그것이 카페의 사명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각주:10]


원래 멋있었던 물건들은 다소 낡더라도 여전히 멋있다. 흡사 사람이 그런 것처럼. 오래된 것들에서만 뿜어져 나오는 깊은 매력을 우리는 더 많이 누릴 자격이 있다. [각주:11]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 변화하는 계절을 가장 먼저 예민하게 감지한다. 쌩쌩 달리다 보면 바람의 온도와 내음으로 그 변화를 느낀다. 거리의 나무들이 꽃을 피우거나 나뭇잎 색이 하루하루 달라져가는 모습을 목격한다. [각주:12]


젊고 예쁜 외모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은 기품 있는 몸의 움직임일 것이다. 서 있는 자세나 걷는 모습, 인사할 때 손과 팔의 동작 등,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이는 가운데 세련미가 풍겨 나온다. 몸 동작이 아름다운 사람들은 화법조차도 우아하다. 평소에도 겸손하고 사려 깊은 언어를 구사한다. 남을 비난하거나 다그치지 않고 그와 반대로 과장되게 치켜세우지도 않는다. [각주:13]

요즘 나의 화두(?)인 '늙고 싶지 않다'에 대한 대답이 아닐까. 물론 정답은 없겠지만.. 이 문장이 내게는 정답이 되어준 것만 같다. 영원히 젋을래, 젊음을 유지할래가 아닌 '멋있게 늙을래'. 

왜 요즘의 나는 늙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던 거지? 지금도 그런 마음이 아예 가신 것을 아니지만, 그래도 왜 그런 생각이 떠오른 걸까? 

젊음이 가져다주는 안온함보다는 우왕좌왕함이 더 크면서. 



"즐거울 때는 종교가 필요 없으니 찾아오지 않으셔도 그건 그것대로 괜찮아요. 이곳을 필요로 하지 않는 상태면 오히려 다행인 것이죠."

스님의 자비로운 말씀이 인상에 남는다. [각주:14]

상아나 희진쌤이 말로 한 적은 없지만, 풍기는 인상이 이와 같다. 

나도 우리 아이들한테 저런 존재가 되어야지, 하는 마음. 나 이외의 관심사가 생겼다고 서운해할 것도, 나랑만 영원히 친해야한다는 고집을 부릴 것도 아니라. 

나도 저렇게나 자비로운 사람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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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을 꿰뚫어보는 것은 아주 쉽다. 하지만 그래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엘리아스 카네티의 말이다. 타인의 흠을 찾아내는 것이 얼마나 쉬운지, 그러나 그것이 또 얼마나 무익한지를 암시하는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면에서는 사람을 꿰뚫어보는 일을 중단하고자 하는 순간적인 의지 때문에 사랑에 빠지는 것이 아닐까-설혹 그 과정에서 눈이 약간 먼다고 하더라도? [각주:1]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희망이 자기 인식에 승리를 거두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에게 있는 것-비겁함, 심약함, 부정직, 타협성, 끔찍한 어리석음 같은 것-을 상대에게서 발견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사랑에 빠진다. 우리는 선택하 사람 주위에 사랑의 방역선을 쳐놓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어떻게 된 일인지 우리가 가진 결함으로부터 자유롭고, 따라서 사랑스럽다고 결정해버린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서 우리 내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완벽함을 찾으며,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합을 통하여 인간 종에 대한 불확실한 믿음을 유지하고 싶어한다. [각주:2]


"어쩌면 그냥 슬픈 얘기일지도 모르죠. 두 사람은 똑같은 기대를 안고 사귀어야 해요. 서로 똑같이 줄 준비가 된 상태에서 말이에요. 한쪽은 그저 한번 즐기고 싶어하고 다른 쪽은 진정한 사랑을 원하면 안 된다는 거죠. 거기서 모든 괴로움이 생기는 것 같아요."[각주:3]


사랑 때문에 나는 클로이의 눈을 상상하고 그 눈을 통하여 나 자신을 보게 되었다. "클로이를 기쁘게 하려면 나는 누가 되어야 하나?" 나는 그렇게 자문했다. 그렇다고 극악한 거짓말을 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저 클로이가 무슨 말을 듣고 싶어할지 계속 미리 예사을 하려 했을 뿐이다. [각주:4]


침묵은 저주스러웠다. 매력적이지 않은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둘 다 입을 다물고 있으면 그것은 상대가 따분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매력적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둘 다 입을 다물고 있으면 따분한 사람은 나 자신이 되고 만다. [각주:5]


나는 다른 사람에게 끌리는 것은 곧 나의 모든 개인적 특징들을 버리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나의 진짜 자아는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발견되는 완벽성과 화해 불가능한 갈등관계에 있으며, 따라서 무가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각주:6]


정신은 이런 미친 상태의 거부를 상징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숨을 헐떡거리는데 불공평하게 혼자 말짱하 상태를 유지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불쾌하게 여겨지는 게 아닐까? [각주:7]


보답받지 못하는 사랑은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안전하게 고통스럽다. 자신 외에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스스로 자초한 달곰씁쓸하고 사적인 고통이다. 그러나 사랑이 보답을 받는 순간 상처를 받는다는 수동적 태도는 버려야 하며, 스스로 남에게 상처를 입히는 책임을 떠안을 각오를 해야 한다. [각주:8]


어쩌면 사랑은 아름답거나 고귀한 존재와 사랑의 동맹을 맺음으로써 우리 자신과 우리의 약점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충동에서 비롯되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우리를 사랑해준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 돌아와 우리를 애초에 사랑으로 몰고 간 것들을 떠올리게 된다. 어떠면 우리가 원했던 것은 사랑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저 믿을 수 있는 어떤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제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우리를 믿게 되었으니 우리가 어떻게 계속해서 그 사람을 믿을 수 있단 말인가? [각주:9]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우리가 똑같은 요구를 공유하고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마음이 끌리는 상태의 핵심에 그 요구가 놓여 있다. 알베르 카뮈는 우리가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것은 그 사람이 밖에서 보기에 매우 온전해 보이고-육체적으로 온전하고 감정적으로 "통합되어"보이고-주관적으로 자신을 보면 몹시 분산되어 있고 혼란스럽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만일 우리 내부에 부족한 데가 전혀 없다면 우리는 사랑을 하지 않겠지만, 상대에게서도 비스사게 부족한 데를 발견하면 불쾌감을 느낀다. 답을 찾기를 기대했지만, 우리 자신의 문제의 복사본만을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각주:10]


클로이와 함께하는 생활이 그렇게 매혹적이었던 것은 이런 일치 때문이었다. 마음의 문제에서 계속 화해 불가능한 차이와 부딪히기만 하다가 마침내 사전 없이도 농담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 기적적으로 내 견해와 흡사해 보이는 견해를 가진 사람, 나와 호오가 일치하기 때문에 수도 없이, "놀라운 일이야, 나도 막 똑같은 이야기를 하려던 참인데 / 생각을 하던 중인데 / 일을 하려고 했었는데..."라고 말하게 하는 사람을 발견한 것이다. [각주:11]

따라서 성숙한 사랑의 이야기에서는 절대 첫눈에 반하는 일이 없다. 맑은 눈으로 물의 깊이와 성질을 완전히 조사할 때까지는 도약을 유보한다. 부모 노릇, 정치, 예술, 과학, 부엌에 비치할 적당한 간식에 관하여 철저하게 의견 교환을 한 뒤에라야 두 사람은 서로를 사랑할 준비가 된 것인지 판단할 수 있다. 성숙한 사라의 이야기에서는 자신의 상대를 진정으로 알 때에만 사랑이 자라날 기회가 주어진다. [각주:12]


그들은 아주 많은 것들에 대해서 의견이 같았기 때문에, 저녁이 되었을 무렵 남자는 자신의 영혼과 결합할 수 있는 영혼을 가진 완벽한 동반자를 만났다고 확신했다. 그들은 목이 말라서 대로 한구석에 있는 화려한 새 카페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남자는 가난한 노동계급 가족이 카페의 유리 너머로 우아한 손님들, 눈부신 흰 벽, 실내의 황금장식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이 가난한 구경꾼들의 눈은 실내의 부와 아름다움에 대한 경이감으로 가득 차 있었고, 화자는 동정심과 더불어 자신이 그런 특권 있는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에 수치를 느꼈다. 남자는 사랑하는 여자의 눈에도 자신의 당혹스러움과 수치감이 반영되어 있기를 바라며 여자를 보았다. 그러나 남자가 영혼의 결합을 준비하고 있던 여자는 생각이 달랐다. 그녀는 눈을 뜨고 물끄러미 바라보는 불쌍한 사람들이 눈에 거슬린다고 야멸차게 말했다. 도대체 그 사람들이 뭘 원하는지 모르겠다면서, 주인한테 이야기해서 그들을 쫓아버리라고 남자에게 말했다. 모든 사랑 이야기에는 이런 순간들이 있지 않을까? 자신의 생각이 반영되기를 기대하면서 상대의 눈을 찾지만, 결국 [희비극적인] 불일치로 끝나버리는 순간-그것이 계급투쟁의 문제이건, 구두 한 켤레의 문제이건.

가장 사랑하기 쉬운 사람은 우리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로맨스는 우리가 오랜 기차 여행을 하다가, 창 밖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아름다운 사람을 몰래 눈여겨보며 상상하는 것처럼 순수하지 않다. 그런 완벽한 러브스토리는 그 아름다운 사람이 다시 열차 안으로 고개를 돌려 옆에 앉은 사람과 기차에서 파는 샌드위치가 너무 비싸다며 따분한 대화를 나누거나, 아니면 손수건에 세차게 코를 푸는 순간 중단되고 만다. [각주:13]


위협적인 차이는 중요한 점[국적, 성, 계급, 직업]에서 쌓여가는 것이 아니라, 취향과 의견이라는 사소한 점에서 쌓여갔다. 왜 클로이는 파스타르 ㄹ몇 분 더 끓여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것일까? 왜 그녀는 매일 아침 침실에서 체조를 하는 것일까?  [각주:14]


저녁에 기차를 타고 런던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몹시 피곤했다. 클로이의 초기 세계와 나의 초기 세계 사이의 모든 차이가 피곤했다. 그녀의 과거 이야기와 배경이 매혹적이기는 했찌만, 동시에 무시무시하고 괴상해보였다. 내가 그녀를 알기 전의 그 모든 세월과 습관들. 그러나 그것도 그녀의 코의 모양이나 눈의 색깔과 마찬가지로 그녀의 일부였다. 모든 관계에 내포된 분열이 눈에 보이면서, 나는 익숙한 환경에 대한 원시적인 노스탤지어를 느끼게 되었다. 새로 배우고, 나 자신을 제시하고, 내가 순응해야 할 완전히 새로운 사람. 어쩌면 그 순간 나는 내가 앞으로 클로이에게서 발견할 모든 차이를 생각하며, 그녀는 그녀고 나는 나일 그 모든 시간, 우리의 세계관이 양립할 수 없는 시간을 생각하며 두려움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창 밖으로 윌트셔의 시골 풍경을 바라보며, 나는 마치 길 잃은 아이처럼 내가 이미 온전히 이해하고 있는 사람, 그 집, 부모, 역사의 특이한 점까지 이미 다 이해하고 있는 사람을 갈망했다. [각주:15]


우리의 말다툼에는 사랑과 자유주의의 역설이 담겨 있었다. 클로이의 구두가 어쨌든 간에 그것이 왜 중요하단 말인가? 클로이에게는 다른 좋은 점이 많으므로, 내가 이 자잘한 일에 눈길을 고정시키는 것은 우리의 게임을 망치는 행동이 아니었을까? 왜 보통 친구들에게 하듯이 예의바르게 거짓말을 하지 않았을까? 나의 유일한 변명은 내가 그녀를 사랑한다는 것, 그녀는 내 이상형이라는 것-구두만 빼면-따라서 나는 이 작은 결함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보통 친구에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일이다. 나는 그녀를 사랑했기 때문에 말을 했다. 이것이 나의 유일한 변명이었다. [각주:16]


매번 유리업를 부르는 일이 발생하지는 않았지만, 비자유주의는 절대 일면적이지 않았다. 나한테도 클로이를 미치게 만드는 면이 수도 없이 많았다. 왜 너는 자면서 이불을 침대 밖으로 밀어내니? 왜 너는 자꾸 베개에 발을 올려놓니? 이 모든 것이 가정이라는 강제 수용소를 구성하는 요소들이며, 상대를 자신의 이상형에 더 가까이 끌어들이려는 일상적 시도들이다. [각주:17]


나와 클로이의 관계가 공포정치 수준에 이르지 않았던 것은 아마 그녀와 내가 사랑과 자유주의 사이의 선택에서 다른 관계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하물며 사랑의 정치인들에게서는 더욱더 찾아보기 어려운 재료를 넣어서 반죽할 수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국가든 남녀든 그 재료만 있다면 불관용에서 벗어나 수 있을 것이다. 그 재료는 다름 아닌 유머 감각이다. [각주:18]


아름다움이 사랑을 낳을까, 아니면 사랑이 아름다움을 낳을까? 클로이가 아름답기 때문에 내가 그녀를 사랑할까, 아니면 내가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녀가 아름다울까? 무한히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사는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전화를 하거나 맞은편 욕조에 누워 있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왜 우리의 욕망이 이 특정한 얼굴, 이 보조개가 우리의 완벽성의 기준에 그렇게 정확하게 응답했는지 묻게 된다. [각주:19]


보는 사람의 눈에서 아름다움을 찾는다면, 보는 사람이 시선을 거둘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러나 어쩌면 그것 역시 클로이의 매력의 한 부분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름다움에 관한 주관적 이론은 기분 좋게도 관찰자를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만들어버리므로. [각주:20]


사랑의 모든 언어는 과도한 사용으로 훼손되었다. 내가 차에서 라디오에 귀를 기울일 때면, 내 사랑은 우연히 흘러 나오는 사랑의 노래들로부터 아주 수월하게 힘을 얻었다. 예를 들면 어떤 흑인 여가수에게서 힘을 얻었다. 나는 그 여가수의 악센트로 노래를 하고, 클로이는 그 가수가 말하는 '그대'가 되었다.


그대를 내 품에 안고

사랑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대여.

그대를 내품에 안고 

오 그대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정말로 할 수 있다면. [각주:21]


그때부터 사랑은, 적어도 클로이와 나에게는, 이제 단순히 사랑이 아니었다. 그것은 입에서 맛있게 녹는, 지름 몇 밀리미터의 달콤하고 말캉말캉한 물체였다. [각주:22]


"그래서 ... 클로이 이야기를 더 해봐. 그 여자에게서 뭘 본 건데?"

내가 그녀에게서 무엇을 보았을까? 그날 저녁 세이프웨이 한가운데에서 클로이가 계산대에 서서 식료품을 비닐 봉투에 요령 있게 꾸려넣는 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을 때 다시 그 질문이 떠올랐다. 나는 그녀의 이런 사소한 동작에서도 매력을 느꼈다. 모든 것을 그녀가 완벽하다는 증거로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녀에게서 무엇을 보았을까? 거의 모든 것을 보았다. [각주:23]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본질적인 평범함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그 광기를 드러낸다. 그래서 방관자 자리에 선 사람들에게는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지겹다. 방관자들은 묻는다. 저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한 인간 외에 무엇을 보는 걸까? 나는 클로이를 향한 내 뜨거움을 친구들과 공유해보려고 했다. 영화, 책, 정치와 관련하여 많은 공통점을 발견한 친구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마치 메시아적 열정에 사로잡힌 사람을 마주한 무신론자들처럼 세속적이고 어리둥정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친구들한테 세탁기 옆의 클로이, 영화관에서의 클로이와 나, 주문을 하려고 기다리는 클로이와 나에 대해서 열 번쯤은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플롯은 없고 액션조차도 거의 없는 이야기, 움직임이 거의 없는 이야기의 중심에 서 있는 중심인물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렇게 이야기를 해보고 나서야 나는 사랑이 외로운 일이라는 것을 받아들였다. [각주:24]


나는 윌의 질문 덕분에 한 사람에게 속해 있는 특질과 연인이 그 사람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특질 사이의 차이를 깨닫게 되었다. 윌은 신중하게도 클로이가 어떤 사람이냐고 묻지 않고, 더 정확하게 내가 그녀에게서 무엇을 보느냐고 물었다. [각주:25]


눈에 보이는 것은 몸뿐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에게 홀린 연인은 영혼 역시 그 껍질과 똑같기를 바라게 된다. 몸이 거기에 어울리는 영혼을 가지고 있기를, 살갗이 표현하는 것이 속에 든 본질이기를 바라게 된다. 나는 몸 때문에 클로이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녀의 본질에 희망을 품게 해주었기 때문에 그 몸을 사랑했다. 그것은 매우 가슴 설레는 희망이었다. [각주:26]


그녀의 독립에 대한 크나큰 열망에도 불구하고, 물건을 떨어뜨리고 가는 일은 생기기 마련이었다. 그것은 칫솔이나 구두가 아니라 그녀 자신의 조각들이었다. 그것은 언어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클로이는 나에게 그녀의 독특한 말투를 남겨두었다. 그녀는 '절대'라는 말 대신 꼭 '두 번 다시'라는 말을 사용했으며, 전화를 끊기 전에는 '몸조심해'라고 인사를 했다. 반대로 그녀는 나의 '완벽해'라는 말과 '네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면'이라는 언어습관을 익혔다. 나도 클로이처럼 침실에서는 완전히 불을 끄게 되었고, 그녀는 나처럼 신문을접게 되었다. 나는 무슨 생각을 할 때에는 소파 주위를 뱅뱅 돌게 되었으며, 그녀는 카펫 위에 눕는 것에 맛을 들였다.

확산 현상과 더불어 친밀성이 생겼다. 우리 사이의 접경지대를 엄격하게 순찰하지 않게 된 것이다. 우리 몸은 이제 상대가 지켜본다거나 판단한다고 느끼지 않았다. 우리는 가끔 침묵의 시간을 가지는 모험도 할 수 있었다. 우리는 이제 편집증적인 수다쟁이들, 고요가 배신처럼 보일까봐 대화를 중단하기를 꺼리는 수다쟁이들이 아니었다. 우리는 상대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믿음을 가지게 되었으며 지속적인 유혹은 이제 낡은 것이 되었다. 

나는 클로이의 의견과 습관만이 아니라, 그녀라는 존재의 더 섬세한 결도 알게 되었다. 옆방에서 전화로 이야기할 때의 음색, 재채기 직전의 표정, 잠을 깰 때의 눈 모양, 빗으로 머리를 빗는 소리. [각주:27]


우리는 둘이 있을 때 다른 사람들의 험담을 하면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우리의 일상적인 상호작용에서는 대부분 정직하게 우리 자신을 표현할 수 없었기 때문에, 우리끼리 우리의 거짓말에 바람을 쐬어주고 우리가 수행한 사회적 예의를 속죄할 수 있었다. 클로이는 친구나 동료에 대한 나의 판단의 최종 저장소가 되었다. 내가 그들에게 느꼈지만 부정하려고 했던 것들을 나에게 공감하고, 심지어 부추기기까지 하는 청중에게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우리는 종종 뒷공론에 탐닉했다. 함께 좋아하는 것을 발견하는 기쁨이 얼마나 큰지 몰라도, 함께 싫어하는 것을 욕하는 친밀함에 비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가끔 우리는 우리가 지금까지 만난 모든 사람에게 심각한 결함이 있으며, 사실 우리가 지구에 남은 다 두 명의 품위 있는 인간이라는 결론을 내릴 지경에 이르렀다. 사랑은 외부자들을 지속적으로 비판하면서 커나간다. 우리가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충성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서로에게 충성한다는 가장 훌륭한 증거였다. [각주:28]


그러한 일화들 자체가 흥미 있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 클로이와 나만이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일화들과 관련된 부수적인 연상들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라이트모티프들은 중요했다. 그것이 우리에게 우리가 서로에게 남이 아니라는 느낌을 주었고, 일들을 함께 겪어가며 산다는 느낌을 주었으며, 함께 끌어낸 의미를 기억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라이프모티프들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고 해도, 그것은 접착제 역할을 했다. 그 라이트모티프들이 만들어낸 친밀성의 언어는 클로이와 내가 둘이서 하나의 세계 비슷한 것을 창조했다는 사실을 기억나게 해주었던 것이다. [각주:29]


어쩌면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아주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하는 말을 이해하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제대로 말을 할 수 없다는 것도. 본질적으로 우리는 사랑을 받기 전에는 온전하게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사살이 없으면 우리는 제대로 된 정체성을 소유할 능력을 상실한다. 사상 안에서 자아가 지속적으로 확인되기 때문이다. 누가 나를 본다는 것은 내가 존재한다고 인정받는 것이다. 우리가 누구인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 우리의 역사를 수도 없이 말해주었는데도 우리가 결혼을 몇 번 했는지, 자식이 몇 명인지, 우리 이름이 브래드인지 빌인지, 카트리나인지 캐서린인지 자꾸 잊어버리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살다가, 마음속에 우리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새겨두고 있는 사람의 품에서, 시야에서 사라질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피난처를 발견한다는 것은 위로가 되는 일이 아닐까?

클로이는 나를 이해하기 때문에 나에 대한 그녀의 행동에는 '나'의 확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요소들이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녀가 내 기분의 많은 부분을 직관적으로 이해하는 것, 그녀가 내 취향을 아는 것, 그녀가 나 자신에 대해서 나에게 이야기해주는 것, 그녀가 나의 일상과 습관을 기억하는 것에는 다양한 '나'의 확인이 수도 없이 포함되어 있었다.  [각주:30]


이것을 보자 다른 사람들에게 낙인 찍는 것은 보통 소리 없는 과정임을 알 수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개적으로 우리에게 어떤 역할을 강요하지 않는다. 자신의 반응을 통해서 그것을 채택하라고 암시할 뿐이다. 은밀하게 우리에게 정해준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다. [각주:31]


심지어 사랑을 받는 것에도 엄청난 편견이 개입되어 있다-기분좋은 왜곡이지만, 어쨌든 왜곡은 왜곡이다. 나르시스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촉촉한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실망을 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어떤 눈도 우리의 '나'를 완전히 담을 수는 없다. 우리 가운데 어느 부분은 절단당하기 마련이다. 그것이 치명상이든 아니든. [각주:32]


클로이의 아메바적인 직선은 무슨 의미일까? 그저 내가 그녀를 다 이해할 수는 없다는 뜻일까?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지만, 냉엄하게 감정이입의 한계를 보여주는 면이기도 하다. 무엇 때문에 내 노력이 좌절을 겪었을까? 내가 그녀를 인간 본성에 대한 나의 기존의 개념들을 통해서만 헤아릴 수밖에 없었다는 한계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녀에 대한 나의 지식은 나 자신의 과거를 통해서 여과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로키 산맥에 가서 '꼭 스위스 같군'하는 식으로 적응하는 유럽인처럼, 나는 클로이가 우울한 상태에 빠졌을 때 '이것은 클로이가 x를 느끼기 때문이야... 내 여동생이 ... 했을 때처럼'하는 식으로 그 원인을 파악할 수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녀를 파악하려고 할 때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이해란 나의 생물학적 특징, 계급, 심리적 역사에 의해 형성된 것이었다. [각주:33]


우리가 우리 짝과 얼마나 행복하든, 그 사랑 때문에 다른 사람을 쫓는 일은 방해를 받을 수밖에 없다. 우리 짝을 진정으로 사랑하는데도 왜 그것이 구속으로 느껴지는 것일까? 짝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기울고 있는 것이 아닌데도, 왜 그것을 아쉬워할까? 사랑의 요구가 해결되었다고 해서 늘 갈망의 요구까지 해결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각주:34]


철학자들이 전통적으로 이성에 따른 삶을 옹호하고 이성의 이름으로 욕망에 의한 삶을 비난해왔다면, 그것은 이성이 지속성의 기초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철학자는 낭만주의자와는 달리 자신의 관심의 방향을 클로이에서 앨리스로, 거기서 다시 클로이로 미친 듯이 바꾸지 않는다. 안정된 이유들이 그들의 선택을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랑에서도 충실하고 지속적일 것이며, 그들의 감정은 날아가는 화살의 탄도처럼 흔들림이 없을 것이다. [각주:35]


두 연인 내부에서 일어나는 태풍은 또 우리 주위 사람들이 우리 관계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안정된 가정들에 의해서 억제되었다. 토요일에 친구들과 커피를 마시러 가기 몇 분 전에 심하게 싸웠던 일이 기억난다. 당시에는 싸움이 너무 심각해서 둘 다 그것 때문에 헤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랑 이야기를 끝낼 가능성은 그런 일을 상상할 수 없는 친구들에 의해서 축소되었다. 친구들은 커피를 마시면서 행복한 한 쌍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그 질문들은 결렬의 가능성을 도외시했으며, 따라서 우리가 결별을 피하는 데에도 도움을 주었다. 다른 사람들이 있음으로 해서 우리의 동요는 완화되었다.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따라서 우리가 누구인지 불확실할 때, 우리는 바깥에 서 있는 사람들, 연속성만을 알고 있는 사람들, 우리의 플롯에 위반할 수 없는 것은 없음을 모르는 사람들의 분석 밑에 숨어 위로를 얻을 수 있었다. 

우리는 미래를 계획하면서 위로를 찾기도 했다. 우리의 사랑은 갑자기 시작되었듯이 갑자기 끝날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공동의 운명에 호소함으로써 현재를 강화하려고 했다. 우리는 어디에 살 것인지, 자식을 몇이나 낳을 것인지, 어떤 식으로 연금을 받으며 살 것인지 꿈을 꾸었다. [각주:36]


오늘은 이 사람을 위해서 무엇이라도 희생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몇 달 후에는 그 사람을 피하려고 일부러 길 또는 서점을 지나쳐버린다는 것은 무시무시하지 않은가. 나는 클로이에 대한 내 사랑이 그 순간의 나의 자아의 본질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그녀에 대한 내 사랑이 한시적인 것으로서 끝을 맺는다는 것은 다름 아닌 내 일부의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각주:37]


행복을 받아들이는 것이 그렇게 무시무시하고 불안을 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클로이와 나는 약간은 무의식적으로 헤도니아(행복)를 기억이나 기대 속에서만 찾으려고 했던 것 같다. 행복의 추구는 중심적 목표로 공공연히 인정되고 있지만, 여기에는 그 실현이 아주 먼 미래에 이루어진다는 암묵적 믿음이 뒤따른다. 그런데 이 믿음이 우리가 아라스 데 알푸엔테에서, 그리고 그보다는 덜하지만 서로의 품에서 발견한 행복의 도전을 받은 것이다. [각주:38]


짧은 순간이기는 하지만, 현재 속에 미래에 들어 있을 모든 것이 다 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 역시 클로이와 마찬가지로 그 병에 걸릴 짓을 했던 것은 아닐까? 무례하게도, 이름 붙일 수 없는 미래의 이름으로 현재의 즐거움을 넘겨버린 일이 많지 않을까? 거의 알아채지 못할 정도였겠지만, 완전히 사랑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않았던 사랑의 이야기가 많지 않을까? 그러면서 마치 불멸의 존재처럼, 언젠가는 잡지에 나오는 남자들처럼 태평하게 즐길 수 있는 다른 연애들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역사가 같은 시간대에 나와 함께 지상에 풀어놓은 사람과 교류하려고 애쓰다가 비참하게 실패한 것을 갚아줄 미래의 사랑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하지 않았을까? [각주:39]


어느 날 거리에서 불행한 여자 옆을 지나다가 클로이가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내가 저 여자처럼 얼굴에 커다란 점이 있었어도 나를 사랑했을 것 같아?" 그 질문에는 "그렇다"는 대답에 대한 갈망이 숨어 있다. 몸이라는 세속적인 표면,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비참하게도 어떻게 바꾸어볼 수 없는 표면보다 높은 곳에 사랑을 놓아달라는 요구이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은 너의 재치나 재능이나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라, 아무런 조건 없이 네가 너이기 때문이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은 너의 눈 색깔이나 다리의 길이나 수표채그이 두께 때문이 아니라 네 영혼의 깊은 곳의 너 자신 때문이다. 

내 소망은 내가 모든 것을 잃고 '나'만 남았다고 해도 사랑을 받고 싶은 것이다. 이 신비한 '나'는 가장 약한, 가장 상처받기 쉬운 지점에 자리잡은 자아로 간주된다. 내가 너한테 약해 보여도 될 만큼 나를 사랑하니? 모두가 힘을 사랑한다. 하지만 너는 내 약한 것 때문에 나를 사랑하니? 이것이 진짜 시험이다. 너는 내가 잃어버릴 수도 있는 모든 것을 벗어버린 나를 사랑하는가? 내가 영원히 가지고 있을 것들 때문에 나를 사랑하는가? [각주:40]


그러나 그녀는 죄를 지은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젊은 벨트슈메르츠의 배를 채워주기 위해서 그동안 준비하지 않았던 아침 시리얼을 사러 동네 슈퍼마켓까지 갔다 오는 수고를 했겠는가? 그녀의 무관심이 아니라 의무감이 그녀를 고발하고 있었다. 창문 선반에 놓인 '스리 시리얼 골드 브란'의 커다란 상자가 너무 눈에 두드러졌다. "왜 그래? 저게 네가 좋아하는 거 아냐?" 클로이는 내가 시리얼을 입에 잔뜩 넣고 말을 제대로 못 하는 것을 보며 물었다. [각주:41]


어떤 사람은 사랑이 난파했음에도 난파의 증거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계속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한다. 사형 평결을 무시하면 죽음을 저지할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실제로 죽음의 기호들은 도처에 널려 있었다. 내가 고통 때문에 문맹이 되지만 않았다면 못 읽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각주:42]


왜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가 하는 질문은 왜 너는 나를 사랑하는가 하는 질문만큼이나 대책 없는 질문이다. 두 경우 모두 우리는 연애의 구조에서 우리가 의식적인 통제를 할 수 없다는 사실에 부딪히게 된다. 바꾸어 말하면 사랑은 우리가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이유들 때문에 받을 자격도 없는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졌다는 사실에 부딪히게 된다. 일단 그런 질문을 하게 되면 우리는 한편으로는 완전한 오만으로 기울거나, 다른 한편으로는 완전한 겸손으로 기울 수밖에 없다. 사랑을 베풀 위치에 있는 사람은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하여 오직 한 가지 대답밖에 할 수가 없다. 네가 너이기 때문에. 답을 듣게 되면 질문을 했던 사람은 자만과 우울 사이에서 위험하게, 예측할 수 없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 [각주:43]


일단 한쪽이 관심을 잃기 시작하면, 다른 한쪽에서 그 과정을 막기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는 것 같다. 구애와 마찬가지로 떠나는 일도 과묵이라는 담요 밑에서 고통을 겪는다 [각주:44]


사랑의 거부가 종종 도덕적 언어, 옳고 그름의 언어, 선과 악의 언어의 틀 안으로 들어온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마치 거부하거나 거부하지 않는 것,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는 것이 당연히 윤리의 한 지류에 속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거부를 하는 사람에게는 악하다는 딱지가 붙고, 거부를 당한 사람은 선의 화신이 되는 일이 많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클로이와 나의 행동 양쪽에도 이런 도덕적 태도가 얼마간 드러났다. 클로이는 자신의 거부를 정리하면서 나를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악과 동일시했고, 내가 그녀를 사랑한다는 것을 선의 증거로 여겼다. 따라서 내가 여전히 그녀를 바란다는 단 한 가지 이유로 나는 그녀에게 '너무 좋은'사람이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그녀는 자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자신은 나에게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윤리적 결론을 내렸다. 그것 때문에 그녀는 나보다 가치가 적은 사람이 되었다. 나는 여전히 그녀를 사랑한다고 느끼기 때문에 마음이 선한 남자였다. 

사랑의 거부가 아무리 불행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사랑을 이타성과 동일시하고 거부를 잔인성과 동일시할 수 있을까? 정말로 사랑을 선과 동일시하고 무관심을 악과 동일시할 수 있을까? 내가 클로이를 사랑하는 것은 도덕적이고, 그녀가 나를 거부하는 것은 비도덕적일까? 그녀가 나를 거부하면서 죄책감을 느낀 것은 사랑을 내가 이타적으로 그녀에게 준 것으로 보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나의 선물에 이기적인 동기가 있었다면, 클로이도 똑같이 이기적인 동기에서 관계를 끝내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사랑의 종말은 이타주의와 이기주의, 도덕성과 비도덕성 사이의 충동이라기보다는 근본적으로 이기적인 두 충동 사이의 충돌로 나타난다. [각주:45]


자신의 미덕에 대한 느낌은 고통이라는 비옥한 토양에서 자연스럽게 자라난다. 고통을 겪으면 겪을수록 덕은 커진다. 예수 콤플렉스는 우월감과 얽혀 있다. 저항할 수 없는 압제와 맹목에 맞서 패배자가 더 큰 덕에 호소하며 느끼는 우월감이다. 나는 사랑하던 여자에게 차이고 난 뒤, 내 고통을 하나의 자질로 고양시켰다. 덕분에 내 슬픔을 흔해빠진 세속적인 낭만적 결별의 결과물로 경험하지 않을 수 있었다. 클로이가 떠나는 바람에 나는 죽을 뻔했다. 그러나 어쨌든 나는 도덕적으로 높은 자리라는 영광스러운 지위에 올라갈 수 있었다. 나는 순교자였다. [각주:46]


그러다가, 불가피하게, 나는 잊기 시작했다. 그녀와 헤어지고 나서 몇 달 뒤, 나는 런던의 그녀가 살던 동네에 갔다가, 그녀에 대한 생각이 전처럼 괴롭지 안핟는 것을 깨달았다. 심지어 내가 그녀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근처 레스토랑에 잡아놓은 약속을 먼저 생각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클로이의 기억이 중화되면서 역사의 일부가 되어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런 망각에는 부재가 아니라, 내가 그녀의 부재에 무관심해진다는 것이었다. 망각은 내가 한때 그렇게 귀중하게 여겼던 것의 죽음, 상실, 그것에 대한 배신을 일깨워주는 것이었다. 

나는 점진적으로 자아를 다시 정복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습관들이 만들어졌고, 클로이 없는 정체성이 형성되었다. [각주:47]


미성숙한 사랑의 논리적 절정은 상징적이든 현실적이든 죽음이다. 성숙한 사랑의 절정은 결혼이며, 일상[일요일 신문, 다리미, 리모컨이 달린 장치들]을 통해서 죽음을 피하려는 시도이다. 미성숙한 사랑은 타협을 용납하지 않으며, 일단 타협을 거부하면 우리는 어떤 종류의 격변으로 가는 길에 올라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각주:48]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았을 수도 있죠. 하지만 그것은 그 시간이 오래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에요. 그 남자가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죠. 당신이 당신 남편을 싫어하는 것은 그 사람이 당신이 하는 모든 말에 귀를 기울이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당신은 편지에 답장을 하는 데에 두 주나 걸리는 그런 남자를 사랑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어요. [각주:49]




사람들이 알랭 드 보통이 똑똑한 사람이라고 했을 때, 그런가보다 했다.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 어어엄청 재밌게-그래서 빨리-읽었지만 똑똑하단 느낌은 없었는데.. 19장 '선악을 넘어서'에서부터는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사람 칸트며 공리주의며 니체며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것을 어렵고 딱딱하게가 아니라 무심하게 소설 속에 녹여내고 있었다. 좋은 책이었다. 이 분의 다른 책들도 읽어봐야지 하나씩 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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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 바보.

어쩐지 읽다 읽다 읽어도, 왠지 다 아는 이야기와 마주한 말들 같더라더니..

내가 대학교 1학년 때 들었던 첫 교양 <여성학>의 주교재였다니..

ㅋㅋㅋㅋㅋㅋ입문서 인정!

열심히 읽었던 터라 다시 읽어도 눈에 익구나. 하
제목을 왜 그렇게 번역했던 거야ㅠㅠ
아니지 그냥 내가 무심코 집어든 게 잘못이지.

무튼 같은 책, 다른 이름으로 다시 읽은 건 또 새로운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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