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을 꿰뚫어보는 것은 아주 쉽다. 하지만 그래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엘리아스 카네티의 말이다. 타인의 흠을 찾아내는 것이 얼마나 쉬운지, 그러나 그것이 또 얼마나 무익한지를 암시하는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면에서는 사람을 꿰뚫어보는 일을 중단하고자 하는 순간적인 의지 때문에 사랑에 빠지는 것이 아닐까-설혹 그 과정에서 눈이 약간 먼다고 하더라도?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희망이 자기 인식에 승리를 거두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에게 있는 것-비겁함, 심약함, 부정직, 타협성, 끔찍한 어리석음 같은 것-을 상대에게서 발견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사랑에 빠진다. 우리는 선택하 사람 주위에 사랑의 방역선을 쳐놓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어떻게 된 일인지 우리가 가진 결함으로부터 자유롭고, 따라서 사랑스럽다고 결정해버린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서 우리 내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완벽함을 찾으며,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합을 통하여 인간 종에 대한 불확실한 믿음을 유지하고 싶어한다.
"어쩌면 그냥 슬픈 얘기일지도 모르죠. 두 사람은 똑같은 기대를 안고 사귀어야 해요. 서로 똑같이 줄 준비가 된 상태에서 말이에요. 한쪽은 그저 한번 즐기고 싶어하고 다른 쪽은 진정한 사랑을 원하면 안 된다는 거죠. 거기서 모든 괴로움이 생기는 것 같아요."
사랑 때문에 나는 클로이의 눈을 상상하고 그 눈을 통하여 나 자신을 보게 되었다. "클로이를 기쁘게 하려면 나는 누가 되어야 하나?" 나는 그렇게 자문했다. 그렇다고 극악한 거짓말을 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저 클로이가 무슨 말을 듣고 싶어할지 계속 미리 예사을 하려 했을 뿐이다.
침묵은 저주스러웠다. 매력적이지 않은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둘 다 입을 다물고 있으면 그것은 상대가 따분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매력적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둘 다 입을 다물고 있으면 따분한 사람은 나 자신이 되고 만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끌리는 것은 곧 나의 모든 개인적 특징들을 버리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나의 진짜 자아는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발견되는 완벽성과 화해 불가능한 갈등관계에 있으며, 따라서 무가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정신은 이런 미친 상태의 거부를 상징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숨을 헐떡거리는데 불공평하게 혼자 말짱하 상태를 유지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불쾌하게 여겨지는 게 아닐까?
보답받지 못하는 사랑은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안전하게 고통스럽다. 자신 외에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스스로 자초한 달곰씁쓸하고 사적인 고통이다. 그러나 사랑이 보답을 받는 순간 상처를 받는다는 수동적 태도는 버려야 하며, 스스로 남에게 상처를 입히는 책임을 떠안을 각오를 해야 한다.
어쩌면 사랑은 아름답거나 고귀한 존재와 사랑의 동맹을 맺음으로써 우리 자신과 우리의 약점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충동에서 비롯되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우리를 사랑해준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 돌아와 우리를 애초에 사랑으로 몰고 간 것들을 떠올리게 된다. 어떠면 우리가 원했던 것은 사랑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저 믿을 수 있는 어떤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제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우리를 믿게 되었으니 우리가 어떻게 계속해서 그 사람을 믿을 수 있단 말인가?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우리가 똑같은 요구를 공유하고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마음이 끌리는 상태의 핵심에 그 요구가 놓여 있다. 알베르 카뮈는 우리가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것은 그 사람이 밖에서 보기에 매우 온전해 보이고-육체적으로 온전하고 감정적으로 "통합되어"보이고-주관적으로 자신을 보면 몹시 분산되어 있고 혼란스럽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만일 우리 내부에 부족한 데가 전혀 없다면 우리는 사랑을 하지 않겠지만, 상대에게서도 비스사게 부족한 데를 발견하면 불쾌감을 느낀다. 답을 찾기를 기대했지만, 우리 자신의 문제의 복사본만을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클로이와 함께하는 생활이 그렇게 매혹적이었던 것은 이런 일치 때문이었다. 마음의 문제에서 계속 화해 불가능한 차이와 부딪히기만 하다가 마침내 사전 없이도 농담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 기적적으로 내 견해와 흡사해 보이는 견해를 가진 사람, 나와 호오가 일치하기 때문에 수도 없이, "놀라운 일이야, 나도 막 똑같은 이야기를 하려던 참인데 / 생각을 하던 중인데 / 일을 하려고 했었는데..."라고 말하게 하는 사람을 발견한 것이다.
따라서 성숙한 사랑의 이야기에서는 절대 첫눈에 반하는 일이 없다. 맑은 눈으로 물의 깊이와 성질을 완전히 조사할 때까지는 도약을 유보한다. 부모 노릇, 정치, 예술, 과학, 부엌에 비치할 적당한 간식에 관하여 철저하게 의견 교환을 한 뒤에라야 두 사람은 서로를 사랑할 준비가 된 것인지 판단할 수 있다. 성숙한 사라의 이야기에서는 자신의 상대를 진정으로 알 때에만 사랑이 자라날 기회가 주어진다.
그들은 아주 많은 것들에 대해서 의견이 같았기 때문에, 저녁이 되었을 무렵 남자는 자신의 영혼과 결합할 수 있는 영혼을 가진 완벽한 동반자를 만났다고 확신했다. 그들은 목이 말라서 대로 한구석에 있는 화려한 새 카페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남자는 가난한 노동계급 가족이 카페의 유리 너머로 우아한 손님들, 눈부신 흰 벽, 실내의 황금장식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이 가난한 구경꾼들의 눈은 실내의 부와 아름다움에 대한 경이감으로 가득 차 있었고, 화자는 동정심과 더불어 자신이 그런 특권 있는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에 수치를 느꼈다. 남자는 사랑하는 여자의 눈에도 자신의 당혹스러움과 수치감이 반영되어 있기를 바라며 여자를 보았다. 그러나 남자가 영혼의 결합을 준비하고 있던 여자는 생각이 달랐다. 그녀는 눈을 뜨고 물끄러미 바라보는 불쌍한 사람들이 눈에 거슬린다고 야멸차게 말했다. 도대체 그 사람들이 뭘 원하는지 모르겠다면서, 주인한테 이야기해서 그들을 쫓아버리라고 남자에게 말했다. 모든 사랑 이야기에는 이런 순간들이 있지 않을까? 자신의 생각이 반영되기를 기대하면서 상대의 눈을 찾지만, 결국 [희비극적인] 불일치로 끝나버리는 순간-그것이 계급투쟁의 문제이건, 구두 한 켤레의 문제이건.
가장 사랑하기 쉬운 사람은 우리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로맨스는 우리가 오랜 기차 여행을 하다가, 창 밖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아름다운 사람을 몰래 눈여겨보며 상상하는 것처럼 순수하지 않다. 그런 완벽한 러브스토리는 그 아름다운 사람이 다시 열차 안으로 고개를 돌려 옆에 앉은 사람과 기차에서 파는 샌드위치가 너무 비싸다며 따분한 대화를 나누거나, 아니면 손수건에 세차게 코를 푸는 순간 중단되고 만다.
위협적인 차이는 중요한 점[국적, 성, 계급, 직업]에서 쌓여가는 것이 아니라, 취향과 의견이라는 사소한 점에서 쌓여갔다. 왜 클로이는 파스타르 ㄹ몇 분 더 끓여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것일까? 왜 그녀는 매일 아침 침실에서 체조를 하는 것일까?
저녁에 기차를 타고 런던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몹시 피곤했다. 클로이의 초기 세계와 나의 초기 세계 사이의 모든 차이가 피곤했다. 그녀의 과거 이야기와 배경이 매혹적이기는 했찌만, 동시에 무시무시하고 괴상해보였다. 내가 그녀를 알기 전의 그 모든 세월과 습관들. 그러나 그것도 그녀의 코의 모양이나 눈의 색깔과 마찬가지로 그녀의 일부였다. 모든 관계에 내포된 분열이 눈에 보이면서, 나는 익숙한 환경에 대한 원시적인 노스탤지어를 느끼게 되었다. 새로 배우고, 나 자신을 제시하고, 내가 순응해야 할 완전히 새로운 사람. 어쩌면 그 순간 나는 내가 앞으로 클로이에게서 발견할 모든 차이를 생각하며, 그녀는 그녀고 나는 나일 그 모든 시간, 우리의 세계관이 양립할 수 없는 시간을 생각하며 두려움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창 밖으로 윌트셔의 시골 풍경을 바라보며, 나는 마치 길 잃은 아이처럼 내가 이미 온전히 이해하고 있는 사람, 그 집, 부모, 역사의 특이한 점까지 이미 다 이해하고 있는 사람을 갈망했다.
우리의 말다툼에는 사랑과 자유주의의 역설이 담겨 있었다. 클로이의 구두가 어쨌든 간에 그것이 왜 중요하단 말인가? 클로이에게는 다른 좋은 점이 많으므로, 내가 이 자잘한 일에 눈길을 고정시키는 것은 우리의 게임을 망치는 행동이 아니었을까? 왜 보통 친구들에게 하듯이 예의바르게 거짓말을 하지 않았을까? 나의 유일한 변명은 내가 그녀를 사랑한다는 것, 그녀는 내 이상형이라는 것-구두만 빼면-따라서 나는 이 작은 결함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보통 친구에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일이다. 나는 그녀를 사랑했기 때문에 말을 했다. 이것이 나의 유일한 변명이었다.
매번 유리업를 부르는 일이 발생하지는 않았지만, 비자유주의는 절대 일면적이지 않았다. 나한테도 클로이를 미치게 만드는 면이 수도 없이 많았다. 왜 너는 자면서 이불을 침대 밖으로 밀어내니? 왜 너는 자꾸 베개에 발을 올려놓니? 이 모든 것이 가정이라는 강제 수용소를 구성하는 요소들이며, 상대를 자신의 이상형에 더 가까이 끌어들이려는 일상적 시도들이다.
나와 클로이의 관계가 공포정치 수준에 이르지 않았던 것은 아마 그녀와 내가 사랑과 자유주의 사이의 선택에서 다른 관계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하물며 사랑의 정치인들에게서는 더욱더 찾아보기 어려운 재료를 넣어서 반죽할 수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국가든 남녀든 그 재료만 있다면 불관용에서 벗어나 수 있을 것이다. 그 재료는 다름 아닌 유머 감각이다.
아름다움이 사랑을 낳을까, 아니면 사랑이 아름다움을 낳을까? 클로이가 아름답기 때문에 내가 그녀를 사랑할까, 아니면 내가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녀가 아름다울까? 무한히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사는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전화를 하거나 맞은편 욕조에 누워 있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왜 우리의 욕망이 이 특정한 얼굴, 이 보조개가 우리의 완벽성의 기준에 그렇게 정확하게 응답했는지 묻게 된다.
보는 사람의 눈에서 아름다움을 찾는다면, 보는 사람이 시선을 거둘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러나 어쩌면 그것 역시 클로이의 매력의 한 부분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름다움에 관한 주관적 이론은 기분 좋게도 관찰자를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만들어버리므로.
사랑의 모든 언어는 과도한 사용으로 훼손되었다. 내가 차에서 라디오에 귀를 기울일 때면, 내 사랑은 우연히 흘러 나오는 사랑의 노래들로부터 아주 수월하게 힘을 얻었다. 예를 들면 어떤 흑인 여가수에게서 힘을 얻었다. 나는 그 여가수의 악센트로 노래를 하고, 클로이는 그 가수가 말하는 '그대'가 되었다.
그대를 내 품에 안고
사랑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대여.
그대를 내품에 안고
오 그대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정말로 할 수 있다면.
그때부터 사랑은, 적어도 클로이와 나에게는, 이제 단순히 사랑이 아니었다. 그것은 입에서 맛있게 녹는, 지름 몇 밀리미터의 달콤하고 말캉말캉한 물체였다.
"그래서 ... 클로이 이야기를 더 해봐. 그 여자에게서 뭘 본 건데?"
내가 그녀에게서 무엇을 보았을까? 그날 저녁 세이프웨이 한가운데에서 클로이가 계산대에 서서 식료품을 비닐 봉투에 요령 있게 꾸려넣는 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을 때 다시 그 질문이 떠올랐다. 나는 그녀의 이런 사소한 동작에서도 매력을 느꼈다. 모든 것을 그녀가 완벽하다는 증거로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녀에게서 무엇을 보았을까? 거의 모든 것을 보았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본질적인 평범함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그 광기를 드러낸다. 그래서 방관자 자리에 선 사람들에게는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지겹다. 방관자들은 묻는다. 저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한 인간 외에 무엇을 보는 걸까? 나는 클로이를 향한 내 뜨거움을 친구들과 공유해보려고 했다. 영화, 책, 정치와 관련하여 많은 공통점을 발견한 친구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마치 메시아적 열정에 사로잡힌 사람을 마주한 무신론자들처럼 세속적이고 어리둥정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친구들한테 세탁기 옆의 클로이, 영화관에서의 클로이와 나, 주문을 하려고 기다리는 클로이와 나에 대해서 열 번쯤은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플롯은 없고 액션조차도 거의 없는 이야기, 움직임이 거의 없는 이야기의 중심에 서 있는 중심인물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렇게 이야기를 해보고 나서야 나는 사랑이 외로운 일이라는 것을 받아들였다.
나는 윌의 질문 덕분에 한 사람에게 속해 있는 특질과 연인이 그 사람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특질 사이의 차이를 깨닫게 되었다. 윌은 신중하게도 클로이가 어떤 사람이냐고 묻지 않고, 더 정확하게 내가 그녀에게서 무엇을 보느냐고 물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몸뿐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에게 홀린 연인은 영혼 역시 그 껍질과 똑같기를 바라게 된다. 몸이 거기에 어울리는 영혼을 가지고 있기를, 살갗이 표현하는 것이 속에 든 본질이기를 바라게 된다. 나는 몸 때문에 클로이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녀의 본질에 희망을 품게 해주었기 때문에 그 몸을 사랑했다. 그것은 매우 가슴 설레는 희망이었다.
그녀의 독립에 대한 크나큰 열망에도 불구하고, 물건을 떨어뜨리고 가는 일은 생기기 마련이었다. 그것은 칫솔이나 구두가 아니라 그녀 자신의 조각들이었다. 그것은 언어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클로이는 나에게 그녀의 독특한 말투를 남겨두었다. 그녀는 '절대'라는 말 대신 꼭 '두 번 다시'라는 말을 사용했으며, 전화를 끊기 전에는 '몸조심해'라고 인사를 했다. 반대로 그녀는 나의 '완벽해'라는 말과 '네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면'이라는 언어습관을 익혔다. 나도 클로이처럼 침실에서는 완전히 불을 끄게 되었고, 그녀는 나처럼 신문을접게 되었다. 나는 무슨 생각을 할 때에는 소파 주위를 뱅뱅 돌게 되었으며, 그녀는 카펫 위에 눕는 것에 맛을 들였다.
확산 현상과 더불어 친밀성이 생겼다. 우리 사이의 접경지대를 엄격하게 순찰하지 않게 된 것이다. 우리 몸은 이제 상대가 지켜본다거나 판단한다고 느끼지 않았다. 우리는 가끔 침묵의 시간을 가지는 모험도 할 수 있었다. 우리는 이제 편집증적인 수다쟁이들, 고요가 배신처럼 보일까봐 대화를 중단하기를 꺼리는 수다쟁이들이 아니었다. 우리는 상대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믿음을 가지게 되었으며 지속적인 유혹은 이제 낡은 것이 되었다.
나는 클로이의 의견과 습관만이 아니라, 그녀라는 존재의 더 섬세한 결도 알게 되었다. 옆방에서 전화로 이야기할 때의 음색, 재채기 직전의 표정, 잠을 깰 때의 눈 모양, 빗으로 머리를 빗는 소리.
우리는 둘이 있을 때 다른 사람들의 험담을 하면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우리의 일상적인 상호작용에서는 대부분 정직하게 우리 자신을 표현할 수 없었기 때문에, 우리끼리 우리의 거짓말에 바람을 쐬어주고 우리가 수행한 사회적 예의를 속죄할 수 있었다. 클로이는 친구나 동료에 대한 나의 판단의 최종 저장소가 되었다. 내가 그들에게 느꼈지만 부정하려고 했던 것들을 나에게 공감하고, 심지어 부추기기까지 하는 청중에게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우리는 종종 뒷공론에 탐닉했다. 함께 좋아하는 것을 발견하는 기쁨이 얼마나 큰지 몰라도, 함께 싫어하는 것을 욕하는 친밀함에 비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가끔 우리는 우리가 지금까지 만난 모든 사람에게 심각한 결함이 있으며, 사실 우리가 지구에 남은 다 두 명의 품위 있는 인간이라는 결론을 내릴 지경에 이르렀다. 사랑은 외부자들을 지속적으로 비판하면서 커나간다. 우리가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충성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서로에게 충성한다는 가장 훌륭한 증거였다.
그러한 일화들 자체가 흥미 있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 클로이와 나만이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일화들과 관련된 부수적인 연상들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라이트모티프들은 중요했다. 그것이 우리에게 우리가 서로에게 남이 아니라는 느낌을 주었고, 일들을 함께 겪어가며 산다는 느낌을 주었으며, 함께 끌어낸 의미를 기억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라이프모티프들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고 해도, 그것은 접착제 역할을 했다. 그 라이트모티프들이 만들어낸 친밀성의 언어는 클로이와 내가 둘이서 하나의 세계 비슷한 것을 창조했다는 사실을 기억나게 해주었던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아주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하는 말을 이해하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제대로 말을 할 수 없다는 것도. 본질적으로 우리는 사랑을 받기 전에는 온전하게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사살이 없으면 우리는 제대로 된 정체성을 소유할 능력을 상실한다. 사상 안에서 자아가 지속적으로 확인되기 때문이다. 누가 나를 본다는 것은 내가 존재한다고 인정받는 것이다. 우리가 누구인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 우리의 역사를 수도 없이 말해주었는데도 우리가 결혼을 몇 번 했는지, 자식이 몇 명인지, 우리 이름이 브래드인지 빌인지, 카트리나인지 캐서린인지 자꾸 잊어버리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살다가, 마음속에 우리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새겨두고 있는 사람의 품에서, 시야에서 사라질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피난처를 발견한다는 것은 위로가 되는 일이 아닐까?
클로이는 나를 이해하기 때문에 나에 대한 그녀의 행동에는 '나'의 확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요소들이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녀가 내 기분의 많은 부분을 직관적으로 이해하는 것, 그녀가 내 취향을 아는 것, 그녀가 나 자신에 대해서 나에게 이야기해주는 것, 그녀가 나의 일상과 습관을 기억하는 것에는 다양한 '나'의 확인이 수도 없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것을 보자 다른 사람들에게 낙인 찍는 것은 보통 소리 없는 과정임을 알 수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개적으로 우리에게 어떤 역할을 강요하지 않는다. 자신의 반응을 통해서 그것을 채택하라고 암시할 뿐이다. 은밀하게 우리에게 정해준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다.
심지어 사랑을 받는 것에도 엄청난 편견이 개입되어 있다-기분좋은 왜곡이지만, 어쨌든 왜곡은 왜곡이다. 나르시스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촉촉한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실망을 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어떤 눈도 우리의 '나'를 완전히 담을 수는 없다. 우리 가운데 어느 부분은 절단당하기 마련이다. 그것이 치명상이든 아니든.
클로이의 아메바적인 직선은 무슨 의미일까? 그저 내가 그녀를 다 이해할 수는 없다는 뜻일까?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지만, 냉엄하게 감정이입의 한계를 보여주는 면이기도 하다. 무엇 때문에 내 노력이 좌절을 겪었을까? 내가 그녀를 인간 본성에 대한 나의 기존의 개념들을 통해서만 헤아릴 수밖에 없었다는 한계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녀에 대한 나의 지식은 나 자신의 과거를 통해서 여과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로키 산맥에 가서 '꼭 스위스 같군'하는 식으로 적응하는 유럽인처럼, 나는 클로이가 우울한 상태에 빠졌을 때 '이것은 클로이가 x를 느끼기 때문이야... 내 여동생이 ... 했을 때처럼'하는 식으로 그 원인을 파악할 수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녀를 파악하려고 할 때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이해란 나의 생물학적 특징, 계급, 심리적 역사에 의해 형성된 것이었다.
우리가 우리 짝과 얼마나 행복하든, 그 사랑 때문에 다른 사람을 쫓는 일은 방해를 받을 수밖에 없다. 우리 짝을 진정으로 사랑하는데도 왜 그것이 구속으로 느껴지는 것일까? 짝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기울고 있는 것이 아닌데도, 왜 그것을 아쉬워할까? 사랑의 요구가 해결되었다고 해서 늘 갈망의 요구까지 해결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철학자들이 전통적으로 이성에 따른 삶을 옹호하고 이성의 이름으로 욕망에 의한 삶을 비난해왔다면, 그것은 이성이 지속성의 기초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철학자는 낭만주의자와는 달리 자신의 관심의 방향을 클로이에서 앨리스로, 거기서 다시 클로이로 미친 듯이 바꾸지 않는다. 안정된 이유들이 그들의 선택을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랑에서도 충실하고 지속적일 것이며, 그들의 감정은 날아가는 화살의 탄도처럼 흔들림이 없을 것이다.
두 연인 내부에서 일어나는 태풍은 또 우리 주위 사람들이 우리 관계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안정된 가정들에 의해서 억제되었다. 토요일에 친구들과 커피를 마시러 가기 몇 분 전에 심하게 싸웠던 일이 기억난다. 당시에는 싸움이 너무 심각해서 둘 다 그것 때문에 헤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랑 이야기를 끝낼 가능성은 그런 일을 상상할 수 없는 친구들에 의해서 축소되었다. 친구들은 커피를 마시면서 행복한 한 쌍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그 질문들은 결렬의 가능성을 도외시했으며, 따라서 우리가 결별을 피하는 데에도 도움을 주었다. 다른 사람들이 있음으로 해서 우리의 동요는 완화되었다.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따라서 우리가 누구인지 불확실할 때, 우리는 바깥에 서 있는 사람들, 연속성만을 알고 있는 사람들, 우리의 플롯에 위반할 수 없는 것은 없음을 모르는 사람들의 분석 밑에 숨어 위로를 얻을 수 있었다.
우리는 미래를 계획하면서 위로를 찾기도 했다. 우리의 사랑은 갑자기 시작되었듯이 갑자기 끝날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공동의 운명에 호소함으로써 현재를 강화하려고 했다. 우리는 어디에 살 것인지, 자식을 몇이나 낳을 것인지, 어떤 식으로 연금을 받으며 살 것인지 꿈을 꾸었다.
오늘은 이 사람을 위해서 무엇이라도 희생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몇 달 후에는 그 사람을 피하려고 일부러 길 또는 서점을 지나쳐버린다는 것은 무시무시하지 않은가. 나는 클로이에 대한 내 사랑이 그 순간의 나의 자아의 본질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그녀에 대한 내 사랑이 한시적인 것으로서 끝을 맺는다는 것은 다름 아닌 내 일부의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행복을 받아들이는 것이 그렇게 무시무시하고 불안을 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클로이와 나는 약간은 무의식적으로 헤도니아(행복)를 기억이나 기대 속에서만 찾으려고 했던 것 같다. 행복의 추구는 중심적 목표로 공공연히 인정되고 있지만, 여기에는 그 실현이 아주 먼 미래에 이루어진다는 암묵적 믿음이 뒤따른다. 그런데 이 믿음이 우리가 아라스 데 알푸엔테에서, 그리고 그보다는 덜하지만 서로의 품에서 발견한 행복의 도전을 받은 것이다.
짧은 순간이기는 하지만, 현재 속에 미래에 들어 있을 모든 것이 다 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 역시 클로이와 마찬가지로 그 병에 걸릴 짓을 했던 것은 아닐까? 무례하게도, 이름 붙일 수 없는 미래의 이름으로 현재의 즐거움을 넘겨버린 일이 많지 않을까? 거의 알아채지 못할 정도였겠지만, 완전히 사랑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않았던 사랑의 이야기가 많지 않을까? 그러면서 마치 불멸의 존재처럼, 언젠가는 잡지에 나오는 남자들처럼 태평하게 즐길 수 있는 다른 연애들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역사가 같은 시간대에 나와 함께 지상에 풀어놓은 사람과 교류하려고 애쓰다가 비참하게 실패한 것을 갚아줄 미래의 사랑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하지 않았을까?
어느 날 거리에서 불행한 여자 옆을 지나다가 클로이가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내가 저 여자처럼 얼굴에 커다란 점이 있었어도 나를 사랑했을 것 같아?" 그 질문에는 "그렇다"는 대답에 대한 갈망이 숨어 있다. 몸이라는 세속적인 표면,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비참하게도 어떻게 바꾸어볼 수 없는 표면보다 높은 곳에 사랑을 놓아달라는 요구이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은 너의 재치나 재능이나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라, 아무런 조건 없이 네가 너이기 때문이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은 너의 눈 색깔이나 다리의 길이나 수표채그이 두께 때문이 아니라 네 영혼의 깊은 곳의 너 자신 때문이다.
내 소망은 내가 모든 것을 잃고 '나'만 남았다고 해도 사랑을 받고 싶은 것이다. 이 신비한 '나'는 가장 약한, 가장 상처받기 쉬운 지점에 자리잡은 자아로 간주된다. 내가 너한테 약해 보여도 될 만큼 나를 사랑하니? 모두가 힘을 사랑한다. 하지만 너는 내 약한 것 때문에 나를 사랑하니? 이것이 진짜 시험이다. 너는 내가 잃어버릴 수도 있는 모든 것을 벗어버린 나를 사랑하는가? 내가 영원히 가지고 있을 것들 때문에 나를 사랑하는가?
그러나 그녀는 죄를 지은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젊은 벨트슈메르츠의 배를 채워주기 위해서 그동안 준비하지 않았던 아침 시리얼을 사러 동네 슈퍼마켓까지 갔다 오는 수고를 했겠는가? 그녀의 무관심이 아니라 의무감이 그녀를 고발하고 있었다. 창문 선반에 놓인 '스리 시리얼 골드 브란'의 커다란 상자가 너무 눈에 두드러졌다. "왜 그래? 저게 네가 좋아하는 거 아냐?" 클로이는 내가 시리얼을 입에 잔뜩 넣고 말을 제대로 못 하는 것을 보며 물었다.
어떤 사람은 사랑이 난파했음에도 난파의 증거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계속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한다. 사형 평결을 무시하면 죽음을 저지할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실제로 죽음의 기호들은 도처에 널려 있었다. 내가 고통 때문에 문맹이 되지만 않았다면 못 읽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왜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가 하는 질문은 왜 너는 나를 사랑하는가 하는 질문만큼이나 대책 없는 질문이다. 두 경우 모두 우리는 연애의 구조에서 우리가 의식적인 통제를 할 수 없다는 사실에 부딪히게 된다. 바꾸어 말하면 사랑은 우리가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이유들 때문에 받을 자격도 없는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졌다는 사실에 부딪히게 된다. 일단 그런 질문을 하게 되면 우리는 한편으로는 완전한 오만으로 기울거나, 다른 한편으로는 완전한 겸손으로 기울 수밖에 없다. 사랑을 베풀 위치에 있는 사람은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하여 오직 한 가지 대답밖에 할 수가 없다. 네가 너이기 때문에. 답을 듣게 되면 질문을 했던 사람은 자만과 우울 사이에서 위험하게, 예측할 수 없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
일단 한쪽이 관심을 잃기 시작하면, 다른 한쪽에서 그 과정을 막기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는 것 같다. 구애와 마찬가지로 떠나는 일도 과묵이라는 담요 밑에서 고통을 겪는다
사랑의 거부가 종종 도덕적 언어, 옳고 그름의 언어, 선과 악의 언어의 틀 안으로 들어온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마치 거부하거나 거부하지 않는 것,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는 것이 당연히 윤리의 한 지류에 속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거부를 하는 사람에게는 악하다는 딱지가 붙고, 거부를 당한 사람은 선의 화신이 되는 일이 많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클로이와 나의 행동 양쪽에도 이런 도덕적 태도가 얼마간 드러났다. 클로이는 자신의 거부를 정리하면서 나를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악과 동일시했고, 내가 그녀를 사랑한다는 것을 선의 증거로 여겼다. 따라서 내가 여전히 그녀를 바란다는 단 한 가지 이유로 나는 그녀에게 '너무 좋은'사람이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그녀는 자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자신은 나에게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윤리적 결론을 내렸다. 그것 때문에 그녀는 나보다 가치가 적은 사람이 되었다. 나는 여전히 그녀를 사랑한다고 느끼기 때문에 마음이 선한 남자였다.
사랑의 거부가 아무리 불행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사랑을 이타성과 동일시하고 거부를 잔인성과 동일시할 수 있을까? 정말로 사랑을 선과 동일시하고 무관심을 악과 동일시할 수 있을까? 내가 클로이를 사랑하는 것은 도덕적이고, 그녀가 나를 거부하는 것은 비도덕적일까? 그녀가 나를 거부하면서 죄책감을 느낀 것은 사랑을 내가 이타적으로 그녀에게 준 것으로 보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나의 선물에 이기적인 동기가 있었다면, 클로이도 똑같이 이기적인 동기에서 관계를 끝내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사랑의 종말은 이타주의와 이기주의, 도덕성과 비도덕성 사이의 충동이라기보다는 근본적으로 이기적인 두 충동 사이의 충돌로 나타난다.
자신의 미덕에 대한 느낌은 고통이라는 비옥한 토양에서 자연스럽게 자라난다. 고통을 겪으면 겪을수록 덕은 커진다. 예수 콤플렉스는 우월감과 얽혀 있다. 저항할 수 없는 압제와 맹목에 맞서 패배자가 더 큰 덕에 호소하며 느끼는 우월감이다. 나는 사랑하던 여자에게 차이고 난 뒤, 내 고통을 하나의 자질로 고양시켰다. 덕분에 내 슬픔을 흔해빠진 세속적인 낭만적 결별의 결과물로 경험하지 않을 수 있었다. 클로이가 떠나는 바람에 나는 죽을 뻔했다. 그러나 어쨌든 나는 도덕적으로 높은 자리라는 영광스러운 지위에 올라갈 수 있었다. 나는 순교자였다.
그러다가, 불가피하게, 나는 잊기 시작했다. 그녀와 헤어지고 나서 몇 달 뒤, 나는 런던의 그녀가 살던 동네에 갔다가, 그녀에 대한 생각이 전처럼 괴롭지 안핟는 것을 깨달았다. 심지어 내가 그녀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근처 레스토랑에 잡아놓은 약속을 먼저 생각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클로이의 기억이 중화되면서 역사의 일부가 되어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런 망각에는 부재가 아니라, 내가 그녀의 부재에 무관심해진다는 것이었다. 망각은 내가 한때 그렇게 귀중하게 여겼던 것의 죽음, 상실, 그것에 대한 배신을 일깨워주는 것이었다.
나는 점진적으로 자아를 다시 정복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습관들이 만들어졌고, 클로이 없는 정체성이 형성되었다.
미성숙한 사랑의 논리적 절정은 상징적이든 현실적이든 죽음이다. 성숙한 사랑의 절정은 결혼이며, 일상[일요일 신문, 다리미, 리모컨이 달린 장치들]을 통해서 죽음을 피하려는 시도이다. 미성숙한 사랑은 타협을 용납하지 않으며, 일단 타협을 거부하면 우리는 어떤 종류의 격변으로 가는 길에 올라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았을 수도 있죠. 하지만 그것은 그 시간이 오래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에요. 그 남자가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죠. 당신이 당신 남편을 싫어하는 것은 그 사람이 당신이 하는 모든 말에 귀를 기울이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당신은 편지에 답장을 하는 데에 두 주나 걸리는 그런 남자를 사랑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어요.
사람들이 알랭 드 보통이 똑똑한 사람이라고 했을 때, 그런가보다 했다.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 어어엄청 재밌게-그래서 빨리-읽었지만 똑똑하단 느낌은 없었는데.. 19장 '선악을 넘어서'에서부터는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사람 칸트며 공리주의며 니체며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것을 어렵고 딱딱하게가 아니라 무심하게 소설 속에 녹여내고 있었다. 좋은 책이었다. 이 분의 다른 책들도 읽어봐야지 하나씩 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