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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상대의 입장이라면 원치 않을 것들을 철저히 배제하기로 다짐했다. 감정이입을 과잉으로 하거나, 현실을 왜곡하면서 위로하거나, 정신 승리로 대충 넘어가거나, '난 이렇게 했는데 넌 왜 못하니'라고 나무라거나, 애매한 낙관론으로 희망을 주는 일만은 피했다. [각주:1]


흔히들 내가 무엇을 진심으로 원하는지 알려면 자기 자신과 깊은 대화를 나누라고 한다. 나의 육체는 항상 나와 함께하기에 대화를 나누는 것은 언제라도 가능하다. 바로 그 점 때문에 나는 스스로를 소외시키며 내 안에 담긴 생각은 화석처럼 굳어 있다. 나의 생각을 끄집어내거나 마주하는 일은 어색하고 쑥쓰럽다.[각주:2]


나는 뭐랄까, 내가 현재 살고 있지 않은 대안의 삶에 멋대로 싸움을 붙인 후 알아서 지고 있었다. 대안의 인생, 그런 건 어디에도 없는데 말이다. 행여 있더라도 분명히 내가 선택하지 않은 '저쪽 인생의 나'도 똑같이 '이쪽 인생의 나'를 시기하고 있을 것이다.[각주:3]


내가 먼저 마음을 담지 않으면, 내가 먼저 발을 푹 담그지 않으면, 그 어떤 일이라도 계속 내 주변에서 겉돌기만 한다.[각주:4]


하루 대부분의 생산적인 시간을 내가 직업으로 하는 일에 투입하는데 내 마음과 열정이 그곳에 없어 빈껍데기처럼 일한다면, 그만큼 충족되지 못한 마음과 열정을 다른 곳에서 어떻게든 해소시켜줘야한다. 그러려면 사생활이 정말 재밌어야만 할 것 같은데 어떻게 보면 사생활을 재미있게 하는 게 더 힘들어 보인다. [각주:5]


진심으로 열망하는 사람들은 이미 그 마음을 참지 못하고 행동을 일으킨다. 소설가 김연수 씨가 산문집 <소설가의 일>에서 소설가가 되려면 소설을 쓰는 게 우선이라고도 말했듯이, 핑계를 대며 돌아가지 않고 정중앙으로 쭉 걸어나간다. 그 일을 하고 싶으면 우선 그 일을 하고 있어야 한다는 아이러니 같은 진리. 누구에게 질문할 필요조차 없고 더더군다나 누가 말린다고 해서 관두지도 않는다.[각주:6]


연애에 '정상'이 어디 있으며 그런 게 있다고 한들 왜 남들이 하는 그대로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나와 남자 친구의 관계가 주변에 어떻게 보일까가 더 신경 쓰인다면 사랑하는 상대를 깊게 바라볼 여유는 언제 생길 수 있을까? [각주:7]


역으로 사랑받기 위해 무리하는 것도 곤란하다. 무리한다는 것은 내가 아닌 내가 되는 것이다. 인간관계에서 무리하면 안 되는 이유는 무리한 대가를 언젠가는 상대에게 딱 그만큼 받아내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겁고 힘든 연애의 서막을 예고한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을 감당하려고 애쓰는 것은 착한 게 아니라 비굴한 것이다. 그것은 그저 갈등이 생기거나 버림받는 것이 두려워서 미리 자신을 상처 입힐 뿐이다. [각주:8]


영화 <500일의 썸머>에서 남자 주인공 톰은 썸머에게 대차게 차인다.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를 '보는' 일인데 언제부턴가 썸머는 '나 피곤해, 나 졸려, 나 바빠'라며 '보지 않으려고'한다. 서로를 좋아한다는 증거는 사실 무척 간단하다. 모든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간절히 보고 또 보려고 노력하는 것인데 누군가 한쪽은 그 노력을 언젠가부터 하질 않게 된다. [각주:9]


단칼에 이별하지 못하기 때문에도 고통은 더 지속된다. 먼저 누군가가 관계를 내려놓으려고 하는 순간부터 이미 관계는 이별에 들어선 거나 다름없지만 관계가 완전한 마침표를 찍기까지는 이래저래 부침을 겪는다. 좀처럼 꺼지지 않는 촛불처럼 불꽃은 피었다 사그라졌다 사람을 헷갈리게 반복한다. 센 척, 약한 척, 괜찮은 척, 미친 척, 진짜 진짜 진짜로 헤어지기 전까지 우리는 얼마나 많은 '척'을 해야 하는지.[각주:10]


어떻게 나같은 애를 좋아할 수가 있지, 라는 순수한 경이로움. 어떤 사랑이든 사랑 그 자체가 내 인생에 찾아온 것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 사랑이 끝났다고 해도 새로운 사랑이 내게 도래할 거라는 믿음. 상처는 아물고 어느새 나는 한 뼘 성장해 있다. 슬픔에 아름다움이 깃드는 순간이다.[각주:11]


자신의 상처를 소중히 하려는 심리가 작동하는 것은 그 상처를 소중히 하지 않으면 그 외에 소중히 할 만한 게 별로 없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사실상 그쯤 되면 그건 부모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인 것이다.[각주:12]

이렇게나 차갑게 말할 수 있나 싶지만, 또 이게 맞는 건가 싶기도 하고. 아직은 정답을 모르니 나는. 그렇다고 작가는 정답을 아실까만은..


봄에는 부쩍 '어떤 상대와 결혼해야 하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최적화된 상대란 없다. 15년간의 결혼 생활을 통해 이 세상엔 내 남자, 내 여자란 존재할 수 없음을 깨닫고 체념했다. 사람을 소유할 수도 없고, 상대를 내 입맛대로 바꿀 수도 없고, 끊임없이 같은 깊이로 사랑할 수도 없다. [각주:13]


이 불평등한 모습이 주는 불쾌한 충격은, 이 모습이 실제로 우리가 현실에서 겪는 것을 보여주기 떄문이다. 가사 분담의 문제는 우리가 머리로는 이론적인 성평등을 외치지만, 현실 생활 속에서는 쉽게 구현하지 못하고 겉으로도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는 예민한 소재다. 

가사 분담 문제가 어려운 이유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적으로 규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갈등으로 마음이 고통스럽기보다 차라리 몸이 피곤한 게 낫겠다 싶어 많은 여자들은 '그냥 내가 하고 말지'라며 체념한다. [각주:14]


"네가 하라는 대로 할게."

마님의 분부만 기다리겠다는 머슴 같은 대사가 그다지 기쁘지 않다. 그 말의 행간에 스스로가 가사일에 대한 주인의식이 없음이 드러난다. 주도권이나 자발성, 책임을 갖지 않겠다는 얄미운 선언처럼도 들린다. 그러니까 자신은 어디까지나 '협조적인' 비관련자의 입장으로 남고 싶다는 거? 뭐 하나 시킬 때마다 사랑과 존중의 마음으로 '부탁'하고 일을 어설프게 끝내놓은 다음에도 반드시 '칭찬'해주는 것, 아, 이것 자체도 피곤한 일이다. [각주:15]

ㅋㅋ나는 남편이 없지만, 동거인은 있다. (시간에 따라 대상은 다르지만) 동거인에 대해 공통적으로 느끼는 심적인 불편함을 잘 집어내는 것 같아 유쾌했다. 그러면서 내심 결혼(만약 하게 된다면) 후에도 이러한 미간이 벌써부터 찌푸려지는 일들이 반복된다면 많이 지칠 것 같다. 것 같은 게 아니라 정말 그러하겠지. 나도 아내를 갖고 싶다. 정말~~~~~~~~~~~~~~


어떤 이들은 남자에게 일을 다 하면 칭찬을 꼭 해줘서 기분 좋게 해 다음에 또 하게 하라는 '칭찬 요법'을 권하지만 나는 그렇게까지는 못하겠다. 아니 하기 싫다! 가사일이 끝났을 때 아무도 그에 대한 고마움이나 고됨을 평해주지 않는 그 적적함과 허탈함을 그도 느껴봐야만 한다. [각주:16]

정말 맞는 말. 적적함과 허탈함, 그러나 하지 않으면 안 될 일. 누군가는 해야하고, 어쩌면 지금도 하고 있을 일. 


어느덧 남편은 '어느 경우에 아내가 자신에게 일을 시킬 것인가'를 사전에 감지하기에 이른다. 이제는 어떤 '징조'가 보이면 내가 시키기 전에 "밥 먹고 내가 설거지할 테니까 놔둬~" 같은 선언을 먼저 함으로써 어린아이처럼 칭찬을 바란다. 물론 나는 "그래, 고마워~"라고 대꾸하지만 뚜껑을 덮어 반찬 통들을 냉장고에 집어넣는 것부터가 설거지임을 깨달을 날이 올 때까지 칭찬은 하고 싶지가 않다. [각주:17]

정말 작가는 이래서 작가인가보다. 일상적이지만 포착하거나 표현하기 어려운 것을 담담하고도 서슴없이 해낸다. 


남들이 단체로 어울려 다니며 신나게 놀 때 나는 주로 1대 1의 인간관계가 주는 조용한 친밀감에 편안함을 느끼며 성장해왔다. [각주:18]


관계는 화학작용이다. 이 사람 앞에서는 내 본연의 모습을 보일 수 있는데 저 사람 앞에서는 자꾸 나답지 않게 어색해지고 같이 있으면 불편하다. 저 사람 앞에서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그저 좋고 편한데 이 사람 앞에서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어느새 하면서 거짓 웃음을 짓고 있다. 

그래서 아무리 그 사람이 객관적으로 좋은 사람이고 나한테 잘해준다고 해도 그 사람과 같이 있을 때 특정하게 반응하는 나의 모습이 뭔가 불편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 관계는 희망이 없다. [각주:19]


여자들은 결혼을 생각할 때쯤 되면 이 질문을 던진다.

"이 남자, 괜찮을까요?"

이 질문은 대개 내가 상대방을 좋아하긴 하는데 그의 조건이 석연치 않을 때 나오는 대사다. 

다시 말하면 그녀들의 가장 큰 두려움은 결혼으로 삶의 질이 지금보다 떨어지는 것이다. 신데렐라까지는 바라지 않아도 현상 유지는 해야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랑이냐 현실이냐, 그것은 사실 중요하지 않다. 개개인의 자유다. 어느 쪽을 택하는 것이 올바른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느 쪽도 '자율적으로' 선택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이 남자가 괜찮냐'는 질문의 포커스는 결국 '그'가 아니라 '나'일 뿐이다. 다시 말해 이것은 '상대'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인 것이다. [각주:20]


이 남자가 나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까요, 를 묻기보다 내가 이 남자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은지, 해줄 수 있을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는 없을까? 언제까지 '이것만 빼면 참 괜찮은 사람인데'라며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것인가. 남자는 당신을 사랑한 것 말고는 아무 죄가 없다. 돈이 문제라면 그 돈, 내가 벌겠다는 생각은 할 수가 없을까. 남자는 의존의 대상이 아니라 애초에 사랑의 대상이었다. [각주:21]


우리가 함께하는 것, 사랑을 나누는 것도 진실이지만 동시에 결국 제 삶의 무게는 혼자서 짊어진다는 것도 진실이다. [각주:22]


회사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 유기적인 생물체와 같다. 컨디션이 좋았다 좋지 않았다 하고 사람 하나에 따라 분위기가 좋게도 나쁘게도 달라진다. [각주:23]


어떤 일을 어디서 하더라도 일의 본질은 같다. 최선을 다해야 하고, 사람들과 조율할 줄 알아야 하고, 규칙을 따라야 하며 스스로를 통제할 줄 알아야 한다. [각주:24]


나는 20대 때 35살 이후의 인생을 단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했다. 35살까지 일하고 그다음엔 '그 후에도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인 줄로만 알았다. 웬걸, 그 후에도 길고 긴 인생이 기다리고 있었다. [각주:25]

그렇다. 내가 그렇다. 내가 아아-주 오래 전부터 바라오던 '어른'은 대체 언제 되는걸까, 10대의 끝자락의 내가 보았을 때 지금의 나는 그 '어른'의 범주에 속하게 될까. 어찌된 게 점점 시간이 흐를 수록 내가 말하는 '어른'의 기준은 멀고 높아만진다.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안 되는 나의 서른 다섯 살이 내가 생각하는 '어른'에 가까운 모습이라 또 생각해보지만, 정말 서른 다섯에의 나는 스스로를 '어른'이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그리고 그 '어른' 이후의 삶은 또 어떨까. 가늠도 안 된다. 


젊을 때 성실하게 애쓰고 노력하는 것은 기초 체력 쌓기 훈련 같은 거라서 몸과 정신에 각인시킬 수 있을 때 해놓지 않으면 훗날 진짜로 노력해야 할 때 노력하지 못하거나 아예 노력하는 방법 자체를 모를 수 있다. 잘될지 잘되지 않을지 모르지만 젊은 시절 최선을 다해 노력했거나 몰두한 경험 없이 성장해버리면 '헐렁한' 어른이 되고, 만약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했을 때 '이건 나의 최선이 아니었으니까'라며 마치 어딘가에 자신의 최선이 있따고 착각하면서 스스로에게 도망갈 여지를 준다. 

노력을 하다 보면 종종 좋은 결과가 나오기도 하고, 그런 성취의 경험이 주는 용기와 힘은 상상 이상으로 크다. 다시 말해 자본에게 착취당하고 착취당하지 않고의 문제 이전에 이것은 개인의 삶의 태도와 한 인간의 기량에 관련된 문제인 것이다. [각주:26]

이렇게 차갑게 말하나 싶지만, 격히 공감하는 부분. 아직까지 나는 왜인지 이런 단정짓는 듯한 말을 하기가 어렵다. 내 경험의 폭이 좁은 탓도 있겠지만 혹여 내가 지내온 세계와 우주가 협소하진 않을까 하는 마음에. 그럼에도 '스스로에게 도망갈 여지를 준다'는 것은 마음에 콩콩콩 와닿는 말. 나의 이십대 초반은 그렇게 여지를 주며, 조금의 숨통을 얻고 헐떡대며 자위하고 지냈지 않았던가. 

나의 실패보다는 그 후의 여지 속에서 연명한 나의 못난 모습이 참 힘들었다. 지금 되돌아보아도 내가 숨막혀했던 부분은 그곳이었던 것 같다.  


인생에서 시범 게임이란 없다. 본 게임에서 실패햇다면 실력이든 노력이든 재능이든 부족한 부분을 키워야지 과정과 경험의 소중함과 아름다움을 논하지 말아야 한다. 나는 실패를 직시하고 어설픈 위로나 정신 승리를 하지 않는 단단한 사람들이 좋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이들은 그 이전에 단 한 번이라도 '이겨본' 경험이 있기에 저런 말을 자신에게도, 남에게도 할 수 있구나 싶다. 이겨봤다고 해서 실패를 단순히 질책하거나 매도하는 게 아니라 지는 것과 이기는 것 사이에는 진 입장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이 존재함을 외면하거나 축소하진 말자는 마음인 것이다. [각주:27]

단단한 사람. 내가 좋아하기도 하고, 내가 되고 싶기도 한 그런 사람. 


자신의 잣대로 세워진 정의감을 앞세워 성금히 타인의 선택을 함부로 재단하며 "넌 이렇게 해야만 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 쉬운 말은 두고 일부러 어려운 단어를 써가며 어렵게 말하는 사람, 그럴싸한 '거대한' 단어들로 선동하는 사람, 평소 말하는 것과 일상생활에서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는 사람이다. 

목소리가 크고 공격적인 사람들을 피하십시오. 그들은 영혼을 괴롭힙니다.


'난 자존감이 없어요'라는 말에 중독되어 있는 사람들을 본다. 그들은 자존감은 타고나는 거라고 생각한다.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아 애정 결핍에 시달리지 않고 자신감 넘치는 외모와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만이 참자존감을 가질 수 있다고 믿는다. 대체 우리 중에 그런 행운을 타고난 사람이 몇이나 될까. 

대부분 사람들은 저마다 겉으로 보이지 않는 문제를 끌어안고 살아간다. 성장기 시절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받았다고 해도 어떻게든 상처받은 '마음 속 아이'를 달래가면서 버텨나간다. 행동함으로써 자존감을 후천적으로 확보해나간다.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면서 타인의 단단한 모습은 '타고난 행운 탓'으로 쉽게 정의하려 든다면 그것은 노력하기 버거워하는 나의 모습을 외면하려는 자기 보호적 태도가 아닐까. [각주:28]


착하려는 마음의 뿌리를 따라가보면 그것은 상처와 갈등을 회피하는 방어적 행동으로 설명이 된다. 내 안의 분노를 드러내면 그들의 사랑을 잃을까 두려워서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 쉽게 말하면 눈치 보는 것이 몸에 배인 것이다. 그럴수록 상대는 나의 진짜 모습을 파악하기 힘들어진다. 

좋은 품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 때문에 무리하는 사라보다 자기에게 솔직해질 수 있는 사람을 좋아한다. 조금만 촉이 예민한 사람이라면 무리하는 게 다 보이고 그게 불편해서 먼저 멀어져가기도 한다. 나 자신을 존중하는 마음이 없다면 상대도 나를 존중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각주:29]


나는 내 안에서 나오는 여러 이글이글한 감정들을 마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도 내 감정이라면 무시하지 말고 인정해야 한다. 그 감정을 계속 끌어안고 억누르며 끙끙거릴 바에야 누가 미우면 미워하는 게 낫다. 누가 질투 나면 속이 쓰린 게 당연하다. [각주:30]


"일이나 해. 인생은 짧아. 가만히 앉아서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해 쓰레기 같은 이야기를 하는 대신에, 진짜 일을 해. 신께서 재능을 주셨지만 살 날은 많지 않으니까."

남에 대한 이야기를 할 시간과 기력으로 나의 일을 하기로 한다. [각주:31]


내가 어느 순간 타인에 대한 비난으로 열을 올린다면 나는 그것을 내 안의 공허함이나 불안함에 시선을 돌리라는 자가 신호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각주:32]


가해자를 비롯 남들 보기에 사소한 문제에 연연하는 내 모습을 보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니다. 치사하고 구차해지는 기분이다. 그러나 나에게 중요한 문제는 크고 작은 게 따로 없다. 사소해도 내게 중요하면 바로잡아야 한다. [각주:33]


작은 것은 흘려보내고 큰 것만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작은 일도 챙겨야 나중에 큰 것도 챙길 수 있는 힘을 가진다. '좋게 좋게' 넘어가자는 담합의 유혹에 내가 설득당할 때, 잘못된 관행은 점점 고착될 수밖에 없다. 잘못된 관행에 감각적으로 경종이 울리면 어떻게든 바로잡고 넘어가고 싶다. 그런 예민함이라면 대환영이다. [각주:34]


밀물과 썰물 사이에서 어느덧 내 곁을 여전히 자연스레 지키고 있는 그 사람이 지금의 내 사랑스러운 벗이다. [각주:35]


역으로 거절을 할 때에는 조금의 여지도 없이, 단칼에 거절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러려면 'NO 반사신경'을 단련시켜야 한다. 몇 가지 거절 멘트 버전을 챙겨놓고 반사적으로 말하는 연습을 해본다.

"미안해, 힘들 것 같아."

"그건 좀 곤란해."

"안 돼."[각주:36]

거절하는 연습. 입에 잘 안 붙는다는 커녕, 타자를 치는 손에조차도 잘 안 붙는다. ㅋㅋㅋㅋㅋㅋㅋ...


남들은 연봉이 얼마냐, 일주일에 며칠 쉬냐, 라며 상한선을 보잖아요? 전 늘 하향선을 정하라고 하거든요. 어떤 부분은 양보할 수 있되 어떤 부분은 절대 양보할 수 없는 부분, 그게 하한선인데 전 그게 침해당하면 그만두라고 얘기해요. [각주:37]


모든 과정이 늘 첫 단추예요. 모든 단추가 첫 단추인 거예요. 

단추라는 개념이 항상 첫걸음인 거에요. 만약에 다음에 안 된다 그러면 다른 단추를, 다른 첫 단추를 끼우면 되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은 늘 실체가 없는 걸 가지고 1부터 10까지 자꾸 만들고 거기에 끼워 맞추려고 하다 보니까 5, 6밖에 안 되네. 이렇게 되거든요. 사실은 처음부터 5도 없고 3도 없고 다 1, 1, 1, 1 개념의 연속인데 말이죠. [각주:38]


'어떤 결정을 해도 애매할 때는, 직장이든 결혼이든 이혼이든 생각할 때는 당신이 룩셈부르크 같은 낯선 데 있다고 가정해보자. 거기선 아무도 당신을 몰라요. 그럼 어떤 결정을 할래요?' 이 말은 뭐냐면, 우린 결국 다른 사람을 의식하고 산다는 뜻이에요. 근데 현실은 아무도 나를 보지 않아요. 내 안에 자기 내면의 눈이 많은 거에요. 내 안의 눈이 너무 많으니 내 안의 눈을 이렇게 조금씩 감추면 되는데. 그게 아직까지는 힘드니까요. 당분간은 유치하지만 상상을 하는 거죠. 나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룩셈부르크 같은 저기 어디 먼 곳에 있다 치자고. [각주:39]


결혼은 연애의 연장에 불과한 거고요. 결혼의 본질은 혼인신고서가 아니라 서로의 교감이에요. 육체적인 관계 조차도 사실은 별거 아니에요. 결국에는 좋아한다는 감정이 다에요. [각주:40]


영어로 표현하자면 admiration(감탄), adoration(흠모)의 느낌이랄까. 너한테 반했어, 당신을 존경해, 정말 근사해, 멋져, 최고야. 이런 느낌을 저는 이성뿐 아니라 동성한테도 받아요.

그냥 매료되는 거. 사람에게 매료되는 기쁨이 있어요. [각주:41]

동성에게 매료되는 것. 

나로 돌아보면, 이성에게 매료될 때에는 아마 콩깍지에 매료되기에 홀딱 반해버린다는 게 가깝겠다. 그런데 동성에게 매료될 때에는 그사람의 됨됨이에 품성에 혹은 나와 비슷한 가치관에 매료된다. 홀딱. 그래서 그런 사람을 만날 때에는 세상의 반쪽을 찾은 듯 기쁘다. 그리고 그만큼 소중하다. 


다만 차선이라고 해서 그것을 홀대하지 않고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차선을 어떻게 하면 최선으로 할 수 있을까 고민했고 최선으로 하려고 노력했어요. 여태까지 그 노력을 해왔던 거밖에는 지금까지도 글을 쓰고 책을 낼 수 있게 된 이유가 없는 것 같아요. [각주:42]

이 글을 읽고 나니 우리 교수님 말씀이 또 떠오른다. "뭘 해야할지를 모르겠을 땐, 주어진 것 그리고 지금 해야 할 것을 하세요." 

지금 나의 상황에 적합한 말이지 않을까. 내가 가는 곳의 길을 알기까지, 적어도 길의 초입에 다다를 때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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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란은 방 안에 뭔가 신경질적인 기류가 흐르는 걸 느꼈고, 몇 해 전 자신이 쑹메이링을 처음 만났던 날이 떠올랐다. 누구나 자기 기분대로 행동할 권리는 있다. 하지만 알란이 생각하기로는, 충분히 그러지 않을 수 있는데도 성질을 내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어리석은 짓이었다. [각주:1]

내가 요즘 많이 느끼는 것. 세상에는 자기가 짓고 싶은 표정을, 내뱉고 싶은 단어를, 찌푸리고 싶은 미간을 원하는 대로 행해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참 인생 편하게 산다- 싶다가 알란 할아버지(그것도 100년 정도 사신 분)께서 그러지 말라고 하는 걸 보면.. 멀리 봤을 때 이게 더 맞다는 거겠지. 

여기서 의문이 드는 건, 왜? 언제부터? 어느순간? 내가 '왜저래'하는 류의 사람들 모습을 나도 모르게 따라하고 있는 것인가. 

나를 지배하는 생각 '저 사람도 저러는데 나라고 왜 못해? 난 바보야?'. 정말 어리석게도 오래간 이 생각을 가지고 지내왔던 것 같다. 나도 모르게. 아니 어쩌면 나도 알지만 모른체하며. 

찬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는 오늘 아침에야 나또한 참 못난 사람이었다는 것을 실감한다. 내가 싫어하는 인간군보다 낫다며 자위해왔는데 나조차 그런 군을 이루는 개체에 불과했었다. 힝.. 



보세는 자신의 대꾸에 대해 베니가 한 대꾸에 내놓을 대꾸가 벌써 준비되어 있는 듯, 다시 입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이때 알란이 두 형제의 말을 끊으면서 말하기를, 자기가 세상을 돌아다니며 한 가지 배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이 지구 상에서 가장 해결하기 힘든 분쟁은 대개 <네가 멍청해! - 아냐, 멍청한 건 너야! - 아냐, 멍청한 건 너라고!>라는 식으로 진행된다는 거였다. [각주:2]

이것도 그렇지만 최근에 상아가 말해준 <불행배틀> 또한 결코 이길 수 없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정말 다시 들어도 웃긴 불행배틀ㅋㅋㅋㅋㅋㅋㅋ

가끔 걸어오시는 분들이 있는데, 그래.. 당신이 더 불행합니다. 좋으시겠어요.. ㅠㅠ 



알란은 두 사람 몫의 일을 하는 것에 큰 불만이 없었다. 반면 그는 규칙을 하나 세웠따. 헤르베르트, 당신은 당신의 비참한 인생에 대해 더 이상 징징대지 말 것. 나는 무슨 얘기인지 충분히 알아들엇고, 또 기억력이 아주 좋으니까. 똑같은 얘기를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일이오.[각주:3]

정말 시원한 할아버지. 담백하면서 심플하게 사신다(이 멀리 내가 보기에는 말이다). 

나에게도 제발 징징대지 말아줬으면.. 또 나도 징징대지말 것을 다시 결심한당.



알란이 연극을 너무도 잘했다고 칭찬하자, 헤르베르트는 얼굴이 빨개지며 손사래를 쳤다. 진짜 바보가 바보 모습을 보이는 것은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하면서. 그러나 알란의 생각은 달랐다. 그가 살아오면서 만난 다른 바보들은 모두가 똑똑한 척하려고 애쓰지 않았던가? [각주:4]

ㅋㅋㅋㅋㅋㅋ이 책을 읽으면서 좋았던 것은 알란 할아버지의 팩폭. 

정말 맞는 말. 역사적으로 현명했던 소크라테스마저도 등에의 논증을 통해 본인은 바보라고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다른 이들은 모두 서로가 제일 진리에 가깝다고 외쳤었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이란 어쩔 수가 없나보다. 

항상 겸손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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틈은 중요하다. 어쩌면 채우고 메우는 일보다 더 중요한지 모르겠다. 다만 틈을 만드는 일이 어렵게 느껴지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매한가지다.[각주:1]


먹는 사과의 당도가 중요하듯, 말로 하는 사과 역시 그 순도가 중요하다.

사과의 질을 떨어뜨리는 단어가 있으니, 바로 '하지만'이다. '~하지만'에는 '내 책임만 있는 게 아니라 네 책임도 있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런 사과는 어쩔 수 없이 하는 사과, 책임 회피를 위한 변명으로 변질되고 만다. 

사과에 '하지만'이 스며드는 순간, 사과의 진정성은 증발한다.[각주:2]


대지에 발을 붙이고 사는 사람치고 사연 없는 이가 없다.

아무리 보잘 것없는 몸뚱어리의 소유자라 할지라도 우주만 한 크기의 사연 하나쯤은 가슴속 깊이 소중하게 간직한 채 살아가기 마련이다. 

다만, 그러한 사정과 까닭을 너그럽게 들어줄 사람이 많지 않은 게 현실인 듯하다. 우리 마음속에 그럴 만한 여유가 없기 때문일까, 아니면 우리 가슴에 그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는 커다란 구멍이 나 있기 때문일까. [각주:3]


그들은 위로를 정제한다. 위로의 말에서 불순물을 걸러낸다고 할까. 단어와 문장을 분쇅디에 넣은 뒤 발효와 숙성을 거친 다음 입 밖으로 조심스레 꺼내는 느낌이다. [각주:4]


그가 자신의 혀로 휘두르는 채찍은 제자들의 귀뿐만 아니라 자존심을 후려친다. 

누군가 내게 "플래처 교수처럼 학생을 극한까지 몰아붙이더라도 잠재력을 끄집어내기만 한다면 뭐 그만아닌가요?"하고 묻는다면, 난 "반대일세"라고 답할 것이다. 노력은 스스로 발휘할 때 가치가 있다. 노력을 평가하는 일도 온당하지 않다. [각주:5]


나이가 들수록 시간에 얽매이고 또 지배당하는 건 나도 마찬가지다. 오늘은 종일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닌 것 같다. "바빠서 못해" "시간이 부족해"같은 어법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오늘은 그 바쁨에 지고 만 것이다. 

그리고 가끔은 뭐가 뭔지 갈피를 못 잡겠다. 정말 바쁜 것인지, 아니면 '바쁘다'는 걸 누군가에게 알리고 싶은 것인지...[각주:6]


아기는 엄마 품에 안기자 울음을 그쳤다. 어머니는 아기를 조심스레 들어 올려 이리저리 살피며 "괜찮아"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괜찮아, 이제 괜찮아"라고.

순간 내 머릿속은 '헤아림'과 '염려' '애틋함'같은 단어로 가득 찼다. 난 별것도 아닌 광경을 한참 동안 지켜봤다.

세상이 시끄럽고 번잡할수록 순수하고 꾸밈없는 광경을 목격하면 좀처럼 시선을 떼기가 어렵다. 이날도 그랬던 것 같다. [각주:7]


"딱 한 번이라도 좋다. 낡은 비디오테이프를 되감듯이 그때의 옛날로 돌아가자. 나는 펜을 내려놓고, 읽다 만 책장을 덮고, 두 팔을 활짝 편다. 너는 달려와 내 가슴에 안긴다. 내 키만큼 천장에 다다를 만큼 널 높이 들어 올리고 졸음이 온 너의 눈, 상기된 너의 뺨 위에 굿나잇 키스를 하는 거다."[각주:8]


'프로'는 프로페셔널의 준말로, 그 어원적 뿌리는 '선언하는 고백'이란 뜻의 라틴어 프로페시오에서 발견할 수 있다.

남들 앞에서 "난 전문가입니다"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할 수 있어야, 그리고 그에 따른 실력과 책임감을 겸비해야 비로소 프로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각주:9]


앞차 꽁무니만 주시하며 핸들을 잡고 있던 나는 환기도 시킬 겸 조수석 창문을 슬며시 열었다. 후덥지근한 열기가 빠져나가자 바통 터치를 하듯 상쾌한 바람이 창을 비집고 들어왔다.

나는 바람에 이끌려 오른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파란 하늘은 어느새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가을의 햇살을 머금은 강줄기가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뭐든 자세히 보면 다른 게 보이는 것 같다.

강물만 해도 그렇다. 버스를 타고 달리다 새카만 한강을 한참 바라보면 알게 된다. 강 위를 떠다니는 게 물만은 아니라는 것을, 바람이 흐르고 있고, 햇살도 내려앉아 있다는 것을.[각주:10]


시인의 말처럼 우린 종종 슬픔에 무릎을 꿇는다. 

그건 패배를 의미하지 않는다. 잠시 고개를 조아려 내 슬픔을, 내 감정의 민낯을 들여다보는 과정일 터다. [각주:11]


만약 밤이 밀려오는 속도가 평소와 다른 것 같고 창으로 스며드는 공기의 서늘함이 전과 다르게 느껴진다면, 누군가에게 마음을 빼앗긴 건지도 모른다. 사랑이 싹틀 때 우린 새로운 풍경이 아닌 새로운 시선을 갖게 되므로... [각주:12]


나는 입은 벌리지 않았지만 귀는 더 크게 열었다. 어르신이 내뱉은 문장과 내쉰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의 사연과 한숨에는 회한과 슬픔과 삶에 대한 애착 같은 것이 복잡하게 뒤섞여 있었다. [각주:13]


흐린 가을이었다. 누군가에 대한 그리움을 꼭꼭 눌어 담아 하늘에 편지를 쓰고 싶은 그런 날이었다. [각주:14]


이정도 읽었는데, 사실 나는 완독하지 못하겠다.

그냥 아직 지금의 나로서는 크게 재밌는(?) 와닿는(?) 책인지 잘 모르겠다..

굳이 다 읽지 않는 것도 내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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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시험 준비하면서 읽을 땐 잘 안 읽혔다.

내 문제만으로도 너무 복잡하고 더이상 내 감정이 요동치지 않았었으면 좋겠으니까.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래서 더 소설을 기피한 탓도 있겠다.

뒷 부분은 너무 궁금한데, 앞부분을 다시 읽자니 예전의 그날들이 떠올라서 또 읽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읽었던 곳 이후로부터 읽느라 어느 부분이 좋았는지 표시해두지 못해 아쉽다. 또 ...... 갑자기 티스토리가.. 업데이트해버려서 인터넷으로 안열린다. 크롬으로 열었더니 임시저장에 내가 몇 구절 적은 부분이 없고.. 그래서 그 부분들까지 블로그에 남겨두지 못해 많이 아쉽다. 


"그래서 말야, 때대로 나는 이 세상을 둘러보면 정말 한심해져. 어째서 이 사람들은 노력을 안 할까, 왜 노력을 않고 불평만 할까하고 말이야."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나가사와 선배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내 눈으로 보면 세상 사람들 모두가 악착같이, 허리가 휘도록 일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제가 잘못 보고 있는 건가요?"

"그건 노력이 아니라 단순한 노동일 뿐이야"하고 나가사와 선배는 간단히 말했다. "내가 말하는 노력이란 그런 게 아냐. 노력이란 좀더 주체적이고 목적을 가지고 하는 걸 말해."

"이를테면 다들 취직이 결정되어 한숨 놓고 있을 때 스페인어 공부를 시작한다든가 그런 거 말인가요?"[각주:1]

요즘 나는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이 꼭 건강하고 옳다는 보장은 없지만, 내게 언젠가부터 명시적인 목적이나 목표라는 것이 없어졌다. 그래서 그냥 하루하루 오는대로 살아내고, 가는대로 보내고 하는 반복들. 이렇게 징징대다니. 정말 싫어하는 인간군의 모습을 지금 내가 하고 있지만, 어쩌겠는가. 정말 답답해서 그런 것을. 

오늘 청주가는 게 미뤄졌을 때(엄밀히 말하면 맨 처음 계획했던 시간처럼 가게 되었을 때) 정말 서운했다. 대상이 없는 서운함이 밀려왔다. 당연한 건데, 나는 어쩌면 평일 낮에 우리 대학을 둘러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기대를 했었나보다. 그러니까 그냥 그렇게 기대했던 내게 서운한 감정이 움튼 것일테지. 아쉬웠다. 특히나 요즘 날씨, 내가 기억하는 장면들과 꼭 닮아있어서 더.


"저, 와타나베. 어떤 사정이 있는지는 몰라도 그런 짓을 네게 어울리지 않고, 너답지도 않다고 보는데 어때?" 하고 하쓰미 씨가 말했다.

그녀는 테이블 위에 손을 올려놓고 내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그래요"하고 내가 말했다. "저 자신도 때때로 그렇게 생각해요."

"그런데 왜 그만두지 못하는 거야?"

"때때로 체온이 그리워지거든요"하고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그런 따스한 살갗의 온기 같은 게 없으면 때때로 견딜 수 없이 외로워지는 겁니다."[각주:2]


식탁이 치워지고 레몬 샤베트와 에스프레소 커피가 나왔다. 나가사와 선배는 어느 쪽에도 조금씩 손만 댔을 뿐, 금방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하쓰미 씨는 레몬 샤베트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나는 샤베트를 말끔히 먹은 다음 커피를 마셨다.

하쓰미 씨는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놓인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쓰미 씨가 몸에 지니고 있는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그 두 손도 세련되고 품위 있었으며 고급스럽게 보였다. 

나는 나오코나 레이코 씨를 생각했다. 그녀들은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나오코는 소파에 누워 책을 읽고, 레이코 씨는 기타로 <노르웨이의 숲>을 연주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내 속에서, 그들이 있는 그 작은 방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격한 그리움이 소용돌이 쳤다. 나는 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것인가?[각주:3]


그녀가 깨끗하게 세트한 머리칼을 훌쩍 뒤로 넘기고, 금귀고리를 반짝이며, 펌프스를 신은 발의 위치를 정하고, 갸름하게 예쁜 손가락을 당구대의 펠트 위에 받친 채 공을 치고 있는 장면을 보고 있자면, 우중충한 당구장의 그곳만은 어느 훌륭한 사교장의 한 귀퉁이처럼 보였다. 

그녀와 단둘이 있어 보긴 처음이었지만 나에게는 멋진 경험이었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내 인생이 한 단계 끌어 올려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각주:4]


외로울 때면 나는 울어 버려. 울 수 있다는 건 좋은 일이라고 레이코 언니는 말해. 하지만 외로움이란 정말 괴로운 거야. 내가 외로워하고 있으면 밤의 어둠 속에서 온갖 사람들이 말을 걸어 오곤 해. 밤에 나무들이 바람결에 사각사각 소리를 내듯 사람들이 내게 말을 걸어 와. 그럴 땐 기즈키나 언니를 상대로 많은 이야기를 해. 그들 역시 외로워서 말상대를 찾고 있는 거야. [각주:5]


하지만 내가 자기에 대해서만 화를 내고 있는 건 아니에요. 난 다만, 다만 외로울 뿐이에요. 오히려 자기는 내게 여러 가지로 친절을 베풀어줬는데, 내가 자기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것 같아서 힘들어요. 자기는 언제나 자기 세계에만 틀어박혀 있어서 아무리 노크를 해도 잠시 눈만 올려떠볼 뿐, 금방 제자리로 돌아가 버리는 것 같아요. [각주:6]


나는 성냥을 그어 담배에 불을 붙여 주었다. 미도리는 입술을 둥글게 오무려 담배 연기를 내 얼굴에다 천천히 내뿜었다.

"내 헤어 스타일 괜찮아?"

"굉장히 좋아."

"얼마나 좋아?"하고 미도리가 다시 물었다.

"온 세계의 숲에 있는 나무가 다 쓰러질 만큼 멋져"하고 나는 대답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정말 그렇게 생각해."

그녀는 잠시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더니 이윽고 오른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잡았다. 나보다도 그녀가 더 마음이 놓인 것처럼 보였다. [각주:7]


문제는 내가 나오코에게 그런 상황 전개를 잘 설명할 수 없다는 데 있었다. 다른 때라면 몰라도 지금의 나오코에게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따위의 말은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나는 나오코 역시 사랑하고 있었다. 어느 과정에서인지 이상한 형태로 비뚤어져버린 방식이긴 했지만, 나는 틀림없이 나오코를 사랑하고 있었고, 내 속엔 나오코를 위한 꽤 넓은 자리가 비어 있었다. [각주:8]


우리는(정상인과 비정상적인 사람을 다 포함한 총칭이야) 불완전한 세계에 살고 있는 불완전한 인간들이야. 자로 길이를 재고, 각도기로 각도를 재서 은행 예금처럼 빡빡하게 살아 나갈 순 없어. 안 그래?

나의 개인적인 감정으로는, 미도리라는 여자는 아주 멋있는 여자인 것 같아. 와타나베가 그녀에게 마음이 끌리고 있다는 건 편지만 봐도 잘 알겠어. 그러면서 동시에 나오코에게도 마음이 끌린다는 것도 잘 알겠어. 그런 건 죄도 아무것도 아니지. 이 드넓은 세계에는 흔히 있는 일이니까! 날씨가 좋은 날 아름다운 호수에 보트를 띄우면 호수도 아름답지만 하늘도 아름답다는 것과 다를 게 없어.[각주:9]


그러나 어떤 식으로 말하든, 어떤 표현을 빌리든, 결국 말해야 할 사실은 한 가지일 뿐이다. 나오코는 죽었고, 미도리는 남아 있는 것이다. 나오코는 흰 재가 되었고, 미도리는 살아 있는 인간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이 더러움으로 가득 차 있는 인간처럼 느껴졌다.[각주:10]


생각해 보면 나오코와 둘이서 도쿄 거리를 함께 걸을 때도, 나는 꼭 같은 생각을 한 것이다. 예전에 나와 나오코가 기즈키라는 죽은 자를 공유하고 있었듯이, 지금 나와 레이코 씨는 나오코라는 죽은 자를 공유하고 있었다. [각주: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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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모든 것은 늘 상상하는 편이 더 근사하고 낭만적인 법이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는 '여행'이 아닌, '생활'을 하러 가기 위해 비행기를 탔기 때문이다. [각주:1]

 

그래도 공항에선 한껏 버티다가 이윽고 비행기 속으로 들어가 그 규격화된 비좁은 공간에서 혼자가 되었다고 느끼면, 비로소 세상에서 가장 건조하고 중립적인 공간에서 한껏 감상적인 기분에 빠졌다. [각주:2]

이 문장을 읽고, 작년에 공부하던 때가 생각났다. 무수한 감정과 생각이 교차하던 때 그래도 공부방 내 자리에-엄밀히 말하면 그 좁은 칸막이 안으로- 있을 때 마음이 편해지곤 했다. 지금도 그 공간이 절실하다. 그리운 내 공간 내 시간.

 

그때 마음을 다스린 후의 이상하게도 비릿한 뒷맛이 '스스로에 대한 실망'의 맛이었음은 한참 후에야 알 수 있었다.

당시 내가 통제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누군가의 감정을 교묘하게 이용했다고 생각한 것도 하찮은 자의식 과잉이었다. 이것은 단지 그가 나의 모든 것에 눈을 감아주었던 것뿐이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에게 이렇게 빚지며 살아간다. [각주:3]

 

호텔을 나와 매서운 찬바람이 부는 메마른 자갈밭 해변을 혼자 거닐었다. 과거의 모습을 전혀 알 길이 없는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어쩐지 내 모습 같았다. 눈을 감으니 바람 냄새가 났다. 비릿하면서도 매운 냄새, 세상 끝의 냄새였다. 나는 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것일까. 내가 이 장소에 있다는 현실이 기이하게 느껴졌다. 너무나 이질적이었지만 여기서 빠져나갈 수는 없었다.

때로는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기도 한다는 진부한 운명론적인 말을 결코 인정하고 싶진 않았다. 그러나 그 겨울과 봄을 거치며 시간의 흐름이 확실히 나를 그 이전과는 다른 장소에 가져다 놓았음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누구에게나 인생에서 그냥 '묵혀 내야'하는 시간이 있다. 살기 위해 죽은 듯이 살아내야 하는 시간. 기다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나는 세월의 흐름이 안겨준 재생력에 겸허히 감사해야만 했다. 스물 두 살의 나로서는 인정하기 싫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지만. [각주:4]

아마 내 열아홉, 스무 살 언저리의 마음이지 않을까? 비릿하면서도 매운 냄새. 그래서 나는 그런 향이 나는 가을이 여전히 무섭다.

 

우아하고 쾌적한 호텔이었지만 그 안에서 하는 일은 거칠었다. 입사하자마자 한 달 만에 팀장은 회사를 그만두고 같은 팀의 동료는 나를 견제했다. 본부장은 하루에 한 번은 업무 진행 상황을 체크한다며 나를 닦달했다. 판촉팀의 한 남자 과장은 내가 일본어를 한다는 이유롷 자기 일을 떠넘기려고 책략을 썼다. [각주:5]

 

그러다가 별 기대 없이 신청한 한국정치사 수업에서 교수님이 대뜸 칠판에 주제를 써놓고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지길래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과거에 경험했던 토론 수업의 희열감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학생들 서너 명이 열심히 자기 의견을 피력했다. 그런데 그 '오프닝 쇼'가 끝나자 교수님은 딱 흐름을 자르더니 이내 자신의 해답(이라고 주장하는 그것)을 우렁차게 설파하기 시작했다. 교수니까 당연히 논리도 그럴싸했고 학생들은 다 기가 죽어 큰 강의실에는 이내 정적이 흘렀다. 교수가 당연하다는 듯 자신의 말을 정답으로 규정하는 것이 너무나 위험하다고 느껴져 절망적인 기분이 들었지만 뭐라고 대꾸할 만큼 아는 것도, 용기도 없었다. [각주:6]

나또한 '오프닝 쇼' 같은 '학생중심수업 쇼'를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아이들이 신나게 힘껏 떠들면 뭐해, 오늘만 해도 다시 '교과서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어' 하고 닫힌 텍스트로 회귀해버렸는데.

 

이쯤 되면 고백할밖에. 나는 '오덕(오타구)' 기질의 남자를 좋아했다. 그리고 대개 좋아하는 타입이라는 것도 습관인지라, 나의 오덕 편애 성향은 그로부터 꽤 오래도록 지속되었다. 그들은 너무나도 독특하고 이상한데, 다른 것도 아닌 그 독특하고 이상한 기질에 중독되었다. 그들에겐 저마다 다른 지점에서 예민하게 작용하는 결핍이 있었는데, 그들이 가진 결핍을 나만 발견할 수 있고 이해하고 사랑해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때로는 그 결핍이야말로 그가 가진 놀라운 장점을 지탱해주는 원동력이기도 했다.

"왜 굳이 그런 남자를 만나니?"

주변에서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만류해도 적어도 나만은 그들의 아픔과 기쁨을, 재능과 결핍을 알아보고 보듬을 수 있다고 감히 생각했다. 나의 결핍과 그의 결핍은 다른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할 저 그늘진 지점에서 만나, 우리가 가진 외양의 모든 피상적인 조건들은 벗어던진 채 서로의 밑바닥에 깔린 진짜 모습을 마침내 알아보고 서로를 부둥켜안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와 내 안에는 과거의 아픔을 채 처리하지 못한 저마다의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혹시나 주변에서 알아차릴가 호흡을 숨기고 있었다. 우리가 서로에게 마음의 문을 열었을 때 우리 안에 수줍고 외롭게 숨어 있던 여자아이와 남자아이는 마침내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은 나 혼자만의 환영이었는지도 모른다. 활짝 열 것처럼 보였던 그 마음의 문은 미약한 상처에도 확 굳게 닫혔고 내가 사랑했던 그의 결핍은 자주 나를 공격하기 위한 도구로 쓰였다. [각주:7]

 

이상한 남자에게 끝까지 두 눈 다 뜨고 코 베이고 휘말려버리는 것, 내가 잘못한 게 없어도 알아서 먼저 비굴해지는 것, 나에게 못 되게 잔인하게 굴어도 불필요하게 관대해지는 것. 그것들이 그의 탓이 아닌 나늬 결정적인 결핍 탓임을 알았을 때 깨달았다. 정작 독특하고 이상한 사람은 사실 나라는 여자였다는 것을.[각주:8]

 

연애가 정말 그렇게 좋은 것일까라는 의심도 함께 들었다. 사실 연애는 위태위태하고 불확실하기만 하다. 연애를 안 하고 있는 사람들은 연애 못한다며 불안해하지만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는 상태가 더 자유롭고 평화롭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통감하고 있다. 연애하는 여자들은 어쩌면 이리도 적응과 변화에 더딜까? 좀 '드라이'하게 살아볼까 다짐해봐도, 다시 말하지만 원래가 그렇게 생겨먹은 것이다. 이것은 놓인 정황에 따라 때로는 축복이 아닌 저주가 된다. 저주임을 알면서도 또 한 번 강을 건너고 만다. [각주:9]

드라이하게 라니..

내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모습 아닌가. 담백하기 혹은 드라이하기.

혹시 나세요.. ㅠ_ㅠ

 

그들의 아버지가 모두 선생님이라는 직업에 종사한다는 점이었다. 보수적 가치가 소박함과 만났을 때 나오는 반듯함과 공정함(부모님의 영향)이 독창성, 자유로움(본인의 자발성)과 함께 섞이면 그거 무척 매력적이었다. 난 그들을 사랑한다기보다 그들에게 반해 있었다. [각주:10]

 

자상하고 애매하고 소심하고 섬세한 남자는 나의 애정사에서 가장 매력적인 이들이었다. '자상'과 '애매'가, '소심'과 '섬세'가 동전의 양면처럼 오락가락했던 남자들이었다. 감수성이 풍부하고 친절하지만 경계선을 건드리면 신경질적이었고, 지적이지만 완고했고, 유머 감각이 있지만 독을 섞으면 가장 고역스러운 비아냥을 내뿜었다. 내 마음을 나보다도 더 잘 아는 듯했지만 그만큼 역으로 나의 무심함을 비난했다. 단순 무식한 마초 남자들의 센 척이 지겹고 우습게 느껴질 때, 그래도 자신의 취약점에 정직한 이런 남자들이 차라리 더 건강하고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각주:11]

 

어둡고 깊은 우물 속에 혼자 다리를 끌어안고 벌서고 있는 것만 같았다. '대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지?' 아무리 그의 결핍을 사랑하고 병적인 면에 끌려도 그 부분이 나를 괴롭히면 감당이 안 되었다. 자기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당해낼 재간이 없다. [각주:12]

 

유부남과 연애하는 여자를 가리키며 흥분하며 욕할 순 있지만, 그런 유혹은 어느 날 불현듯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고 우리는 어쩌면 홀리듯이 감히 사랑이라는 단어를 쓰게 될지도 모른다. 감정은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어느새 상대에게 푹 빠져 있을 수도 있다. 연애 초짜도 아니다. 이토록 잘 맞는 상대를 만난건 하필 난생처음일 수 있다. [각주:13]

 

Fuzzy한 기운이 극대화되면 '쟤랑은 언젠가 자겠구나...'라는 막연한 직감이 스멀스멀 부끄럽게 올라오기도 했다. 신은 가만히 엿듣고 있다가 절묘한 기회를 만들어주기도 했다. 그러나 이윽고 그 영롱하고 따뜻한 느낌이 가시고 시야가 선명해지기 시작하면 다시 혼자가 되어야 할 때임을 알았다. [각주:14]

 

가끔 이런 생각을 했다. 사랑은 얼마나 자의적인가. 사실 사랑이라는 것은 혼자서 겪어나가는 감정에 불과한 것 아니던가.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각자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하고 그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 알고 보면 사랑이란 혼자서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사랑으로 서로를 바꿀 수 있다는 데에 애초에 비관적인 것일가. 그 사람이 그랬던 건 많은 경우 내 탓이 아니었다.

열정적인 연애를 하던 사람은 늘 열정적이었고, 담백한 상대를 골라놓고도 그를 상대로 열정적이었다. 담백한 사람들은 열정적인 상대를 앞에 두고도 늘 담백함 이상의 것을 주지 못했다. 늘 나만, 나 혼자만 그 당연한 사실을 못 보고 있었다.  [각주:15] 

 

나는 칠판 앞에 혼자 서서 삼 분 안에 눈앞에 앉아 있는 저 많은 아이들을 향해 날 부디 내치지 말아달라며 소속감을 구할 때 속수무책으로 혼자구나, 싶었다.  [각주:16]

 

한 시절의 왕따가 또 다른 시절의 스타가 될 수 있는 현실은 다행스럽기도, 가소롭기도 했다. 그러나 히죽 혼자 숨어서 비웃을 수만은 없었다. 호기심 어린 호감이 이질감이나 배타심으로 바뀌는 것은 내 운의 문제였다. [각주:17]

 

바깥에 자리한 자는 많은 것들이 시선 안으로 들어온다. 안에 있는 사람은 시선을 돌려 바깥까지 살피려면 애써야 하지만 바깥에 있는 사람은 싫어도 중심과 주변이 한눈에 들어온다. [각주:18]

 

한국인인 것보다, 여자인 것보다 더 중요한 건 나는 남과 다를 수밖에 없고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개별적인 인격체를 가진 개인으로 태어났다. 그런 우리가 서로와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것을 공히 받아들여야 우리가 다름에도 함께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될 수 있다. 동시에 나의 조금은 쓸쓸한 개인적인 특수성이라고 생각했던 점이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보편적인 것일 수 있음을 확인하는 것도 마음 따뜻해지는 일이었다. [각주:19]

 

모든 사람들이 나를 좋아할 수도, 내가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할 수도 없었다. 제일 억울한 건, 하필 내가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들한테 무리했던 것. 내가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으로부터 사랑 받고 싶은 이상한 심리라니, 생각해보면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인가. [각주:20]

 

어른이 되어서도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깊은 유대감을 느꼈다. 애초에 그들이 책을 사랑하게 된 계기는 짧든 길든 심리적으로 외톨이였던 시절이 있어서일 거라고 생각했다. 또한 외롭지 않을 수 있도록 책의 힘을 빌릴 수 있을 만큼 강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월급날이 되면 그간 사려고 별렸던 책들을 장바구니에 한가득 담아가는 사람들이 참 사랑스럽다. [각주:21]

 

나는 체육을 못하는 편이 아니었지만 체육 시간이라는 존재 자체를 썩 달가워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고등학생에게 있어서 체육 시간은 꽤 날것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후천적 노력으로는 감당이 안 되는 선천적 재능과 매력의 시험대가 되는 시간, 신이 빚어낸 수작과 실패작을 여실히, 가감 없이 보게 되는 시간이다.

마치 아름답게 태어난 여자 아이가 아무도 항의하지 못할, 타고난 힘을 지니게 되는 것처럼. 한데 세상은 웬일로 공평해서 공부 잘하는 D반 아이들은 정말 내가 봐도 한심할 정도로 체육을 못했다. [각주:22]

 

하루는 어설픈 반항기에 방과 후 도서관에서 공부가 너무 하기 싫어 노트에 이렇게 적었다.

오늘은 학교 도서관에서 만화만 봤다.(비밀)

그러자 야마자키 선생님이 빨간 펜으로 이렇게 코멘트를 달아주었다.

어떤 만화인데요? 실은 나도 만화를 정말 좋아한답니다.

그녀의 대답에 마음이 따뜻해져서 그 빨간 문장을 몇 번이고 손으로 만져보았다.

이 노트를 더 소중히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각주:23]

 

나는 그녀로부터 자발성의 소중함을 배웠다. 카리스마 넘치는 선생으로서 그녀는 원한다면 충분히 선을 넘어 학생들을 휘두를 수 있었지만, 늘 적정선에서 멈추고 학생들이 먼저 생각을 일으키기를 바랐다. 혼자 힘으로 끌어올린 관심과 흥분이었기에 수업 후 학생들에겐 늘 충만감 뒤의 잔열이 남았다.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호감을 갖게 된 것은 오로지 뉴욕 외곽의 작은 교실 안에서 내가 생각하는 것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었던 그 경험 때문이었다. [각주:24]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감의 숨 막힘. 이 모든 것이 다 아무 소용없고 궁극에는 우리 모두 서로에게 이별을 고하고 말 거라는 개인주의적인 체념.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정착할 장소와 사람을 찾아 방황을 거듭하는 삶. [각주:25]

 

비단 전학생 과거가 아니라 해도, 사람들은 자신과 같은 상처를 가진 타인을 때로는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 나의 상처를 이해하는 게 아니라 아예 상처 자체가 존재한다는 것을 모르는, 나와는 전혀 다른 해맑고 경쾌하고 산뜻한 존재가 한층 더 위안이 될 때가 많았다. 때로는 모르는 편이 도움 될 수 있었다. 상대의 상처를 알고 이해한다고 해도 사실상 도와줄 수 있는 부분도 별로 없었고 오히려 그것을 빌미로 자신의 불행을 전시하며 이용했다. 자기만의 어둡고 깊은 세계 혹은 동굴에 들어앉으면 그것에 대해선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속수무책으로 가장 먼저 무기력하게 나가떨어져야 했다. [각주:26]

그래서인지 상아가 내게 해준 말이 오래간 맴돌았었다. "현아 니가 있어야 될 곳은 여기야."

여전히 나에게 크게 작용하기도 하고, 문득 문득 떠오르는 말이기도 하다.

 

돌아보면 삶의 크고 작은 성취들은 모두 좋아하는 남자에게 잘 보이기 위해 해낸 것들이었다. 무엇 하나 잔소리하지 않는 부모 손에 자라 대신 '사랑'이 공부나 일의 가장 강력한 동기부여가 된 것이다. 그냥 에너지가 펄펄 끓었다. [각주:27]

 

우리는 처음 본 순간 직감적으로 서로를 좋아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첫눈에 반하는 것을 믿지 않고, 대개는 첫눈에 반하지 않은 남자를 좋아하게 되었던 나로서는 이런 경험이 놀랍고도 신기했다. 아, 지금 이 사람에게 말을 건네지 않으면 안 돼, 라는 본능이 서로에게 동시에 일어나는 근사한 기적이라니. [각주:28]

 

둘 다 식어가는 채소 수프를 앞에 두고 손 댈 생각도 안 했다. 그는 테이블 너머로 쉴 새 없이 내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그가 머리칼을 쓰다듬어주는 것이 정말 좋았는데 그런 걸 보면 그는 나를 길들이는 데에 성공한 것 같았다. [각주:29]

 

가끔 이토록 악감정이나 미움이 안 남는 걸 보면 단 한 번도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한 적이 없는 게 아닐까 의심이 들었다. 남들은 사랑의 상처 때문에 몇 년씩이고 힘들어하고 하물며 다시는 사랑에 빠지지 못할 것 같다는 둥,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다는 둥 사람을 믿지 못하겠다는 얘기를 하지 않던가. 그냥 그 남자가 아니라 연애 감정을 좋아한 것이고 그 감정을 지속적으로 느끼기 위해 남자를 차례차례 이용한 게 아닐까? 심지어 그 남자들을 이렇게 글 소재로 써먹고 있지 않은가.[각주:30]

 

게다가 사람은 대개 과거에 좋아했던 사람의 그림자를 계속 따라가게 되는데, 이렇게 엇비슷한 사람만 좋아하게 되니 계속 비슷한 이유로 차이고, 고로 그 징후들이 절로 학습되어버린 것이다. 그래도 상황은 또 데자뷔처럼 반복.

그가 변한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에게 주었던 시선과 언어들은 예의상 약간 변형은 하되, 고스란히 다른 여자한테 곧 안길 테니까.[각주:31]

 

그런데 몇 번 편지를 주고받고 나서 어느덧 의무감에 회신을 하는 내 모습을 발견했고, 자신의 속내를 '일개' 팬인 나한테 털어놓는 것을 보고 부담감을 느꼈다. 내가 상상했던 사람이 아닌 것 같다고 이제 와 '아, 사람 잘못 봤습니다.'라고 할 수도 없고, 참 그럴 때 내가 나쁜 사람이 된 것만 같아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각주:32]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기로 했다. 이유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중요한 것은 서로에게 이별만이 최선이었다는 것뿐이다.

마음속으로는 다짐을 수도 없이 했건만 실제 이별을 순탄치가 못했다. 머리로는 받아들였지만 몸이 납득을 못했다. 헤어지자고 했으면서도 그 후 몇 번을 더 만났다. 오늘 저녁식사를 끝으로 저 문을 열고 나가면 각자의 삶을 살아야지, 했음에도 밖의 날씨가 너무 추워 정신을 못 차린 건지 함께 택시를 타버렸다. 택시 뒷자리에 같이 탔던 게 우리가 저지른 첫 잘못이었다. 왜, 무엇 때문에 헤어져야 하는지 잠시 기억상실.

정말 웃기지도 않았다. 이젠 진짜 관두자고 해놓고서 만나고 또 만나고.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두 사람의 감정을 더 뜨겁게 달아오르게 했을 수도, 더 격정적인 연애를 하기 위해 이별을 이용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상태는 결코 오래갈 수가 없다. 하루는 이게 정말 마지막이구나, 싶었는데 급기야는 대판 싸우고 말았다. 감정이 남아 있는데도 헤어질 수밖에 없는 현실이 노여워 상대에 대한 증오심이 점차 자리 잡았지만, 표면적으로는 아름답게 이별할 궁리만 했던 것이 무리수였다. 무리에 무리를 거듭하며 아슬아슬해졌을 때 결국 폭발했다.

이 세상에 아름다운 이별이라는 게 정말 있을까? 3월에 휘날리는 눈보라를 멍하니 바라보며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누가 내게 묻는다면 나는 없다고 대답할 것 같다. 세상의 그 어떤 이별도 가슴 아프고 먹먹하기만 했다. 모든 이별에는 어김없이 혼란과 격한 감정이 동반됐다. 물론 그것은 그만큼 사랑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각주:33]

 

나는 스스로의 불행에 대해서는 징징거릴 수 있어도, 감당하기 힘든 불행을 품은 사람을 대하는 방법에는 무지했다. [각주:34]

 

시간이 한참 지나고서야 알았다. 사별한 아내와 상관없이 그저 나를 사랑하지 않았음을. 그의 상실의 깊이가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선을 넘어선 극한의 것이었음을. [각주:35]

 

남자친구나 남편은 물론 사랑하고 좋아한다. 하지만 그와는 다른 친밀감을 공유하는 이성친구가 우리의 기나긴 인생을 따뜻하게 보살펴준다. '속 깊은 이성친구'라고 해서 털털한 남자와 여자가 중성적인 느낌으로 왁자하게 노는 게 아니다. 오히려 남자 지수 혹은 남자 농도, 여자 지수, 여자 농도가 굉장히 높은 사람들끼리 팽팽하게 만나야 유지될 수 있는 것 같다. 왜 더 일찍 만나지 못했을까 아쉬워하고 다른 형식으로 만났으면 어땠을까 상상해보기도 하지만, 그래도 지금의 이런 관계를 충분히 향유하고 보존할 줄 안다. 감정의 저울질도, 타산도 필요 없다. 속 깊은 이성친구가 소중한 이유는 연인이나 남편과는 달리 어떤 의미에선 나를 가장 나다울 수 있게 해주고 내가 누구인가에 대해 더 잘 알게 해주기 때문이다.

여자와 남자가 결코 이해 못할, 서로를 알아가려고 하는 일처럼 세상에서 무모하고 짜릿한 것은 없지만, 성숙하고 자상한 남자와 여자라면 즐거움 이상으로 어느덧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어간다. 대화의 온기, 정보를 나누는 것을 넘어 각자의 성취에는 칭찬을, 슬픔과 좌절엔 위로와 격려를 아낌없이 보낸다. [각주:36]

 

사람은 누구나 '하던 가닥'같은 것이 있어서, 변화를 시도하다가도 어느 순간 자신이 익숙한 곳으로 다시 끌려가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된다. 십여 년에 걸쳐 익숙해진 것으로부터 탈피해서 새로운 일이나 삶의 방식을 나에게 입힌다는 것, 그리고 그 변화를 오롯이 혼자, 타인의 통제 없이 관철하는 것을 상상 이상으로 힘겨웠다. [각주:37]

 

어떨 땐 어느 게 머리의 소리고 어느 게 마음의 하소연인지 분간이 안 되기도 했다. 사실 마음과 머리는 물리적으로 한곳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던가. [각주:38]

 

나는 무언가를 이루고 성취하고 싶었을 때 집착과 몰입, 더불어 이미 그것을 이룬 사람들에 대한 질투심에 깊이 사로잡혀 있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자신의 꿈에 대해 나른하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보면 늘 불가사의했다. "너는 꿈을 꾸고 있다는 그 자체로 만족하는 거 아니야?'라고 찬물을 끼얹는, 자상하지 못한 나였다. [각주:39]

나도 같은 실수를 했었던. 조언에 조언을 거듭하는(사실 조언일지도 의심이 되지만) 쾌감에 나도 모르게 나와버린 마지막 말이었다.

 

사람들은 늘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이 싫다. 벗어나고 싶다고 하면서 인생의 변화를 꿈꾸는 듯 보이지만 의외로 실천은 안 한다. 왜냐하면 '싫다, 싫다'하는 그 상태를 사실은 아주 그렇게 싫어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정말 현재에 놓인 내 상황이 싫으면 무엇보다도 몸이 반응한다. 식욕이 떨어지고 수면 장애를 일으켜서 급기야는 어디엔가 제대로 병이 터진다. 때로는 마음보다 몸이 훨씬 더 정직하다. 사실은 어느 정도 할 만하니까 큰 변화를 스스로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모험하는 것보다는 안 하고 버티는 게 쉽다. [각주:40]

 

내 책을 읽은 그들은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며 자애로운 미소를 보냈다. 이 사람들은 대체 어디서 온 누구길래 이런 따뜻한 시선을 주는 걸까? 박수 소리의 크기와 상관없이 우리는 서로에게 따스한 그림자를 드리우면서 조용히 친밀감을 나누고 있었다.

항상 우리 아이들에게 느끼는 감정이다. 너희는 대체 어디에서 온 천사들이길래 별 것도 아닌 나를 그렇게나 좋아해주는거니. 열심히 듣는 척, 열심히 사랑하는 척하는 나인데 너희들이 주는 진심에 또 반성한다. 그리고 나의 그런 척들을 알아주는 말들에 또 반성한다.

 

짧은 주말 여행이었기에 공항에서 바로 이십여 년 전 다니던 학교로 향했다. 캠퍼스 한가운데에 있는 느티나무 가로수길에 우두커니 서서 아직은 냉기를 머금은 봄바람을 느꼈다. 바람과 공기의 습도는 늘 그 계절에 내가 가지던 어떤 감정을 가장 정확하게 재생해냈다.  [각주:41]

만약 다시 대학생이 되어도 그 특유의 20살 캠퍼스 첫 공기는 (지금도 이 글을 쓰면서 떠올리는 순간 쌉싸름하고도, 살짝 나른한 그 공기가 떠올랐다) 다시 만날 수 없겠지? 아쉬워라.

아름다움의 심리학 수업을 들을 때면 특히나 햇살이 강의실로 잘 들어왔던 것 같다. 내리쬐는 햇살과 밥을 먹으러 혹은 밥을 먹고 사과대를 지나는 학생들 소리는 지금 떠올려도 아득해진다. 이 공간에 있으면서 마치 이 공간에 있는 것 같지 않은 느낌을 그때 처음 받았던 것 같다.

그리고 매일 점심시간이 달랐던 그 시간들도 참 그립다. 작년(4학년)부터는 줄곧 점심시간이 정해져있어서 그런지.. 정말 정말 그리운 것들 중 하나다. 점심시간이 같은 상아나 친구를 찾으며 점심먹자며 뭘 먹을래(이미 내 마음 속에는 뭐가 먹고 싶은지 사실 확고하다) 묻는 그 순간들이 그리워진다.

그때만큼 지금 이 시간들도 그리워지겠지? 머리로는 잘 알지만, 어쩔 수 없이 그때가 너무나 그리운 오늘의 나다. 바보멍청이.

어떻게 이렇게 생생하게 그날의 고민들까지도 기억할까? 그렇게 즐겁지도, 그렇게 힘들지도 않았었는데. 또 여름방학의 날들도 군데군데 기억이 난다. 어쩌면 그 후로는 하루에 오롯이 전념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지금의 나는 어떻게 지내고 있지. 몇년 후에 오늘을 기억할 수 있을까.

 

'상처'라는 단어는 '나 바빠'라는 말만큼이나 내가 금기시하던 것이었다. 스스로를 과대하게 보는 자기중심성처럼 느껴져 민망했기 때문이다. [각주: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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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머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아홉 개가 내 몸 어딘가에 '기록'되어 있다고 믿는다.

음악을 듣고 눈물을 흘렸던 경험에서 내 머리는 그 곡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내 몸에는 그 눈물이 '기록'되어 있다. [각주:1]

 

그 일상은 바람이 살랑 부는 노천카페에서의 커피가 아닌, 한낮 줄을 서서 기다려야 먹을 수 있는 회사 앞 식당의 점심 속에 있다. 그 일상은 서서 스탠드 불 하나 켜놓고 밤새워 쓰는 글이 아니라 창백한 형광등 빛 아래에서 작성하는 문서 안에 있고, 잘 포장된 초콜릿이 아니라 입 냄새를 없애기 위해 사는 껌 속에 있다. 보고 싶은 책보다는 봐야만 하는 서류 더미에 더 많이 할애된 일상, 좋아하는 사람과의 친밀한 소통보다는 의무적으로 만나야만 하는 사람들과의 대화에 더 많이 소모되는 일상, 갓 갈아낸 자몽주스보다는 믹스커피에 더 친숙함을 느끼는 것이 어쨌거나 일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일상을 살아가야만 한다. [각주:2]

 

무엇보다 피곤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해 이토록이나 피곤한 삶이라니! [각주:3]

 

그렇다. 나는 물리적인 공간으로서의 지중해를 만나고 싶었다. 태양과 구릿빛 피부와 풍부한 해산물과 지금 행복한 사람들의 공간을 꿈꾸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결국 도착한 곳은 정신의 지중해였다. 내일의 태양을 기대하지 않는 것. 지금의 이 태양을 남김없이 사는 것. 영원히 굴러 떨어지는 바위를 영원히 언덕 위로 밀어 올리는 형벌을 받았지만, "무겁지만 한결같은 걸음걸이로, 아무리 해도 끝장을 볼 수 없늘 고통을 향하여 다시 걸어 내려오는" 시지프처럼. 자신의 불행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깨어 있으면서 결국 '자신의 운명보다 우월'한 시지프의 공간이 바로 지중해였던 것이다. [각주:4]

 

산다는 건 어쩔 수 없이 선택의 연속이다.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결국 모든 선택에는 '만약'이 남는다. 오늘 점심 메뉴부터 시작해서 인생의 큰 결정까지. '만약'이 배제된 순간은 없다. 하지만 '만약'은 어디까지나 '만약'이다. 가보지 않았기에 알지 못하고, 선택하지 않았기에 미련만 가득한 단어이다. 그 모든 '만약'에 대한 답은 하나뿐이다. '나는 다른 길을 선택했다'라는 답. [각주:5]

 

다만, 여행할 때 우리의 귀는 다른 식으로 열린다는 이야기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평소라면 지나쳐버렸을 어떤 음악이 평생 간직하고 싶은 행운으로 느껴지고, 평소라면 발걸음을 재촉했을 연주자 앞에서 기꺼이 눈물을 흘려버린다. MP3 플레이어에서 우연히 흘러나온 음악 덕분에 눈앞 풍경이 더 아름답게 보이고, 지금 이 음악과 함께 이 풍경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여행은 감각을 왜곡한다. 귀뿐만 아니라 눈과 입과 모든 감각을 왜곡한다. 그리고 우리는 기꺼이 그 왜곡에 열광한다. 그 왜곡을 찾아 더 새로운 곳으로, 누구도 못 가본 곳으로, 나만 알고 싶은 곳으로 끊임없이 떠난다.

그 왜곡의 음악을 듣기 위해 오늘도 여행 계획을 세운다. 그 미세한 음악까지 놓치지 않을 정도로 귀가 열린, 마음이 열린 나를 만나기 위해 오늘도 어쩔 수 없이 여행을 꿈꾼다. [각주:6]

 

60이 되고 싶었다. 그게 꿈이었다. 하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저 늙어가는 것이 꿈이 될 수 있는 건가. 그냥 늙고 싶은 건가. 그건 아니지 않은가. 60살이 된 내 모습을 구체적으로 그려보았다. 고요한 얼굴이고 싶었다. 세상의 어떤 풍파도 감히 박살낼 수 없는 깊고 따뜻한 얼굴이면 좋겠다 싶었다. 그렇다면 그저 늙는 것이 아니라 잘 늙어야 했다. 그때면 얼굴에 모든 것이 다 새겨져 있을 텐데. 지금까지의 시간과 만남과 선ㅅ택과 마음이 모두 새겨져 있을 텐데, 그 얼굴에 책임을 지고 싶었다.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괜찮은 인생이란 생각이 들었다. [각주:7]

 

물론 이제는 안다. 내가 어릴 적 꿈꾸었던 그런 말짱한 나이는 없다는 걸. 60이 되어도 내가 꿈꾸는 것처럼 무심하게 고요할 리 없다는 걸. 오늘은 여기가 아파 우울할 것이고, 내일은 저기가 골칫거리일 것이다. 내가 괜찮은 어떤 날에는 남편이 말썽일 것이다. 그때 내게 일거리가 있다면 그 일이 하기 싫어 몸부림일 것이고, 그때 내가 백수라면 앞으로 남은 세월 동안의 가계가 걱정일 것이다. 전 세계를 여행하고도 남을 시간이 있지만 돈이 없을 수도 있고, 돈이 있더라도 몸이 안 따라줄 수도 있다.

결국은 아무도 모를 일이다. [각주:8]

 

끊임없이 배우고자 하는 열망. 나조차도 알 수 없는 이 열망. 어쨌거나 확실한 것은 뭔가를 배울 때의 나는 확실히 에너지로 가득 차 있다. 사소한 일에도 쉽게 즐거워하고, 바쁘다고 입버릇처럼 말 하지만 기어이 짬을 내서 배우러 달려간다. 그러니 나에게 '배운다'라는 말은 장밋빛 미래를 위한 말이 아니라 장밋빛 현재를 위한 말이 된다. [각주:9]

 

그리고 나는 야구의 팬이 되어버렸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남자친구와 같이 야구를 보는 그 시간의 팬이 되어버린 것이다. [각주: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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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진심으로 반가운 건 첫 재회의 순간뿐이다. 막상 우연이 아닌 인위적인 방법으로 다시 만나야 한다면 부담스럽고 재미없을 것 같다. 현재보다 과거를 공유해야 하는데 거기엔 대화의 한계가 있다. 과거 시절 즐거웠던 에피소드를 하나둘 끄집어내고, 그 시절에 알고 지낸 공통 지인들에 대한 근황을 공유한다. 대화 소재는 머지않아 바닥나기 쉽다. 그렇다고 현재의 생활을 공유하기엔 그만큼 서로에게 이젠 관심이 없거나 공통분모가 없다. 자기 상황을 얘기하다 보면 자칫 자랑이나 자기 연민으로 들리기도 한다. [각주:1]

 

과거에 아무리 오랜 기간 우정과 추억을 나눴던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이 내게 현재 기쁨을 주지 못한다면 무용지물이다. 관계는 현재진행형이다. 늘 처음 만나는 사람들처럼 세심하고 조심스럽게 관계를 다져나가는 성의를 보여주는 사람만이 시간이 흘러 현재의 관계에서도 살아남는다. 그러니 과거에 친분을 맺은 기간이 아무리 길었어도 지금 점차 멀어져가는 사람들에 대해 무리한 책임감이나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다. [각주:2]

 

 

왜 신뢰감을 느끼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상대가 본질적으로 '괜찮은'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해심이 깊고, 포용력이 있고, 입이 무겁고, 편견에서 자유로우며, 인생 경험이 많다. 나이와 상관없이 정신적으로 어른인 사람들이다. 내가 만나본 이런 유형의 사람들은 대부분 독립적인 개인이었고, 자신의 소신이 있는 만큼 타인의 다양한 생각을 존중할 줄 아는 유연한 자유주의자들이었다.

이런 사람들은 그 존재만으로도 든든하고 마음이 따뜻해진다. 그들과의 만남은 어디까지나 양보다 질. 피상적이고 공허한 수다보다 본질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이렇게 신뢰감과 친밀감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을 곁에 두는 일은 분명 행운이다. 그런 소중한 선물을 받기 위해서는 나 역시도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가 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각주:3]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소중하게 생각했던 사람은 바로 얼굴을 알아보는 법이다. 사람이 풍기는 어떤 느낌은 결코 사라지지 않으니까. [각주:4]

 

줌파 라히리는 말한다. 겉으로는 부족함이 없어 보여도 모든 사람은 저마다의 결핍과 고통을 가지고 있고, 최선의 노력으로도 결코 극복할 수 없는 슬픔을 끌어안고 살고 있다고. [각주:5]

 

일반 사회에 나가서는 쉬쉬 숨기고 살아야 하는 감정을 그곳에서는 마음껏 눈치 보지 않고 표현할 수 있었다. 모두가 같은 종류의 고통을 겪었기에 형식적인 위로는 필요가 없었다.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절로 이해하고 이해 받고 있다고 실감했다. [각주:6]

 

 

아이들은 하물며 참 별것도 아닌 일에 쉽게 행복해지는 재능을 타고 난다. 그게 또 전염성이 강하다. 아이가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면 나도 덤으로 행복해진다.

"엄마 오늘 학교에서 좋은 일이 있었어."

학교에서 돌아온 딸아이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내게 말을 꺼냈다. 들어보니 그 '좋은 일' 이라는 게 고작 선생님께 상으로 막대사탕을 하나 받았다거나 친구와 지우개를 바꿔 쓰기로 했다거나 하는, 내 관점에서는 사사롭기 짝이 없는 수준의 것들이라 울컥 느닷없이 감동받게 된다. 소박한 일에 한없는 기쁨을 느낄 줄 아는 마음은 어디로 다 흘러가버렸을까? [각주:7]

 

나는 인간이 내면에 저마다 가지고 살아야만 하는 취약성(vulnerability)을 몹시 애틋하게 생각한다. 평소엔 강한 척, 괜찮은 척 담담하게 살아가다가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음속의 연한 부분을 드러내고야 마는 솔직함도 좋다. [각주:8]

 

그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나와 내 친구를 응대했다. 과도하게 친절하지도, 억지 미소 짓지도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시간을 들여 나무 테이블을 관찰하고 만져볼 기회를 주었다. [각주:9]

 

아무렇지도 않은 척 가면을 쓰고 회사를 다녔지만 속으로는 점점 곪아가고 있었다. 일은 어떻게든 해나가면 되었지만 인간관계는 내 힘만으로는 어쩔 수가 없을 때도 있었다. 어떤 때는 너무 억울하고 힘들어서 회사를 그만 둘 생각을 몇 번이고 했다. [각주:10]

 

차곡히 쌓인 시간의 먼지를 털어내며 이메일 서간집의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 그만 나는 빵 터지고 말았다.

 

1998년 1월 20일

이제 곧 나의 스물여섯 번째 생일이 다가와. 그리고 1월 28일은 너의 스물일곱 번째 생일이지. 우린 이제 이십 대 후반이야. 아아악!

 

세상의 종말이라도 오는 것처럼 친구와 나는 비관했고 비장했다. 이십 대 후반의 나이를 진심으로 두려워하며 그 나이를 넘기면 사랑할 남자도 더 이상 만나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시한폭탄을 안고 사는 기분이었다. 타임머신이라도 있다면 타고 가서 그 시절의 스물다섯 살 임경선에게 말해주고 싶다.

초조해하지 말라고

걱정하지 말라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인생은 이제 겨우 막 시작한 거라고

앞으로도 너에게는 상상 이상으로 많은 일들이 일어날 거라고.

"뭐라구요? 이 지겨운 연애를 또 해야 된다구요?"

곧 스물여섯 살이 될 임경선은 아마도 뒷목 잡으며 입에 거품을 물었을 것 같지만.[각주:11]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나타나면 결혼하고, 그런 마음이 들지 않으면 하지 않으면 된다. 결혼 그 자체가 아니라, 결혼할 상대가 중요한 것이다. [각주:12]

 

'우리는 비굴하게 굴면서까지 제품을 팔 생각은 없다.'

자신을 어필하기 위해 애교를 부리거나 굽신거리지 않는 특유의 당당한 태도는 자아가 단단하지 못하면 불가능한 일이기에 당해낼 수가 없다. [각주:13]

 

여성학자 정희진 선생이 쓴 <한겨례> 카럼의 한 구절이 위로가 되어준다.

"삶은 할 일로 채워지는 것이지 안정과 성취는 실상 존재하지 않는 관념이다."

멈추고 만족하며 안주할 수 있는 지점은 애초에 어디에도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각주: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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