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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진심으로 반가운 건 첫 재회의 순간뿐이다. 막상 우연이 아닌 인위적인 방법으로 다시 만나야 한다면 부담스럽고 재미없을 것 같다. 현재보다 과거를 공유해야 하는데 거기엔 대화의 한계가 있다. 과거 시절 즐거웠던 에피소드를 하나둘 끄집어내고, 그 시절에 알고 지낸 공통 지인들에 대한 근황을 공유한다. 대화 소재는 머지않아 바닥나기 쉽다. 그렇다고 현재의 생활을 공유하기엔 그만큼 서로에게 이젠 관심이 없거나 공통분모가 없다. 자기 상황을 얘기하다 보면 자칫 자랑이나 자기 연민으로 들리기도 한다. [각주:1]

 

과거에 아무리 오랜 기간 우정과 추억을 나눴던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이 내게 현재 기쁨을 주지 못한다면 무용지물이다. 관계는 현재진행형이다. 늘 처음 만나는 사람들처럼 세심하고 조심스럽게 관계를 다져나가는 성의를 보여주는 사람만이 시간이 흘러 현재의 관계에서도 살아남는다. 그러니 과거에 친분을 맺은 기간이 아무리 길었어도 지금 점차 멀어져가는 사람들에 대해 무리한 책임감이나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다. [각주:2]

 

 

왜 신뢰감을 느끼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상대가 본질적으로 '괜찮은'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해심이 깊고, 포용력이 있고, 입이 무겁고, 편견에서 자유로우며, 인생 경험이 많다. 나이와 상관없이 정신적으로 어른인 사람들이다. 내가 만나본 이런 유형의 사람들은 대부분 독립적인 개인이었고, 자신의 소신이 있는 만큼 타인의 다양한 생각을 존중할 줄 아는 유연한 자유주의자들이었다.

이런 사람들은 그 존재만으로도 든든하고 마음이 따뜻해진다. 그들과의 만남은 어디까지나 양보다 질. 피상적이고 공허한 수다보다 본질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이렇게 신뢰감과 친밀감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을 곁에 두는 일은 분명 행운이다. 그런 소중한 선물을 받기 위해서는 나 역시도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가 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각주:3]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소중하게 생각했던 사람은 바로 얼굴을 알아보는 법이다. 사람이 풍기는 어떤 느낌은 결코 사라지지 않으니까. [각주:4]

 

줌파 라히리는 말한다. 겉으로는 부족함이 없어 보여도 모든 사람은 저마다의 결핍과 고통을 가지고 있고, 최선의 노력으로도 결코 극복할 수 없는 슬픔을 끌어안고 살고 있다고. [각주:5]

 

일반 사회에 나가서는 쉬쉬 숨기고 살아야 하는 감정을 그곳에서는 마음껏 눈치 보지 않고 표현할 수 있었다. 모두가 같은 종류의 고통을 겪었기에 형식적인 위로는 필요가 없었다.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절로 이해하고 이해 받고 있다고 실감했다. [각주:6]

 

 

아이들은 하물며 참 별것도 아닌 일에 쉽게 행복해지는 재능을 타고 난다. 그게 또 전염성이 강하다. 아이가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면 나도 덤으로 행복해진다.

"엄마 오늘 학교에서 좋은 일이 있었어."

학교에서 돌아온 딸아이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내게 말을 꺼냈다. 들어보니 그 '좋은 일' 이라는 게 고작 선생님께 상으로 막대사탕을 하나 받았다거나 친구와 지우개를 바꿔 쓰기로 했다거나 하는, 내 관점에서는 사사롭기 짝이 없는 수준의 것들이라 울컥 느닷없이 감동받게 된다. 소박한 일에 한없는 기쁨을 느낄 줄 아는 마음은 어디로 다 흘러가버렸을까? [각주:7]

 

나는 인간이 내면에 저마다 가지고 살아야만 하는 취약성(vulnerability)을 몹시 애틋하게 생각한다. 평소엔 강한 척, 괜찮은 척 담담하게 살아가다가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음속의 연한 부분을 드러내고야 마는 솔직함도 좋다. [각주:8]

 

그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나와 내 친구를 응대했다. 과도하게 친절하지도, 억지 미소 짓지도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시간을 들여 나무 테이블을 관찰하고 만져볼 기회를 주었다. [각주:9]

 

아무렇지도 않은 척 가면을 쓰고 회사를 다녔지만 속으로는 점점 곪아가고 있었다. 일은 어떻게든 해나가면 되었지만 인간관계는 내 힘만으로는 어쩔 수가 없을 때도 있었다. 어떤 때는 너무 억울하고 힘들어서 회사를 그만 둘 생각을 몇 번이고 했다. [각주:10]

 

차곡히 쌓인 시간의 먼지를 털어내며 이메일 서간집의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 그만 나는 빵 터지고 말았다.

 

1998년 1월 20일

이제 곧 나의 스물여섯 번째 생일이 다가와. 그리고 1월 28일은 너의 스물일곱 번째 생일이지. 우린 이제 이십 대 후반이야. 아아악!

 

세상의 종말이라도 오는 것처럼 친구와 나는 비관했고 비장했다. 이십 대 후반의 나이를 진심으로 두려워하며 그 나이를 넘기면 사랑할 남자도 더 이상 만나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시한폭탄을 안고 사는 기분이었다. 타임머신이라도 있다면 타고 가서 그 시절의 스물다섯 살 임경선에게 말해주고 싶다.

초조해하지 말라고

걱정하지 말라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인생은 이제 겨우 막 시작한 거라고

앞으로도 너에게는 상상 이상으로 많은 일들이 일어날 거라고.

"뭐라구요? 이 지겨운 연애를 또 해야 된다구요?"

곧 스물여섯 살이 될 임경선은 아마도 뒷목 잡으며 입에 거품을 물었을 것 같지만.[각주:11]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나타나면 결혼하고, 그런 마음이 들지 않으면 하지 않으면 된다. 결혼 그 자체가 아니라, 결혼할 상대가 중요한 것이다. [각주:12]

 

'우리는 비굴하게 굴면서까지 제품을 팔 생각은 없다.'

자신을 어필하기 위해 애교를 부리거나 굽신거리지 않는 특유의 당당한 태도는 자아가 단단하지 못하면 불가능한 일이기에 당해낼 수가 없다. [각주:13]

 

여성학자 정희진 선생이 쓴 <한겨례> 카럼의 한 구절이 위로가 되어준다.

"삶은 할 일로 채워지는 것이지 안정과 성취는 실상 존재하지 않는 관념이다."

멈추고 만족하며 안주할 수 있는 지점은 애초에 어디에도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각주: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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