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는 자그마한 자기 방에서 불도 켜지 않은 채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자기만의 자그마한 방 - 시험이 지금까지 그에게 가져다준 유일한 축복이었다. 그 안에서 한스는 어느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지배자였다. 여기서 그는 피곤과 졸음, 두통과 싸우며 시저와 크세노폰, 문법과 사전, 그리고 수학 숙제와 씨름하며 기나긴 저녁 나절을 보냈다. 때로는 공명심에 불타 고집을 부리며 끈덕지게 밀어부치기도 했고 때로는 절망감에 빠지기도 했다. 그래도 이 방에서 그는 잃어버린 어린 시절의 즐거움보다 더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는 시간들을 보냈었다. 그것은 자부심과 도취, 승리감에 가득 찬, 꿈과도 같은 기이한 시간들이었다. 그때에 그는 학교나 시험, 그리고 다른 모든 것들을 뛰어 넘어 보다 높은 존재의 영역을 꿈꾸었던 것이다. 정말이지 뺨이 두툼하고 평범한 학교 친구들과는 다르다는, 더 나은 존재라는 예감이 한스를 사로잡았었다. 언젠가는 속세에서 벗어난 높은 고셍서 우쭐대며 이들을 내려다보게 되리라는, 건방지면서도 행복에 겨운 예감이었다. 1
아버지는 슈투트가르트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생기를 되찾았다. 쾌활하고 다정다감한, 만사에 능한 사람처럼 변해버렸다. 주의 수도에 발을 디디고는 2, 3일 정도 머물게 된 소도시인의 감격,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스는 점점 말이 없어지고, 불안해졌다. 시가지를 바라보는 순간부터 답답하고 불안한 기분에 휩싸이고 말았다. 낯선 얼굴들, 뻐기는 듯이 높게 치솟은 휘황찬란한 건물들, 아무리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뻗어 있는 길, 철로 마차 그리고 길거리의 소음이 한스를 겁에 질리게 했을 뿐 아니라 괴롭게 만들었다. 2
집에 돌아온 한스는 곧바로 책상에 앉았다. 그러고는 mi로 끝나는 동사들을 다시 한 번 죽 훑어보았다. 그는 라틴어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심지어 여유를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리스어는 조금 달랐다. 한스는 그리스어에 깊이 빠질 만큼 그 언어를 좋아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단지 그리스어로 된 글을 읽기 위해서였다. 특히 <크세노폰>은 너무나도 아름답고, 감동적이며, 산뜻하게 씌어져 있었다. 모든 것이 맑고, 귀엽고, 힘차게 울려퍼졌다. 거기에는 멋들어진 자유 정신이 담겨 있었다. 3
한스는 거리로 나와 걷기 시작했다. 자신이 마치 벌써 몇 주 동안이나 이곳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또한 더 이상 여기서 도망칠 수 없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고향의 정원과 잣나무가 우거진 푸른 산, 강변의 낚시터가 마치 너무나도 멀리 떨어져 있는 듯했다. 그리고 오래전에 한 번 본 듯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아, 오늘이라도 집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이곳에 머물러야 할 의미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어쨌든 한스는 시험을 망치고 말았다. 4
한스는 반 시간 가량이나 창턱에 걸터앉아 깨끗이 닦여 있는 마룻바닥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리고 신학교나 김나지움이나 대학에 가지 못하게 될 경우에 어떻게 될지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아마 치즈 가게나 사무실의 견습생으로 일하게 될 것이다. 게다가 여지껏 자신이 그토록 경멸하고, 색안경을 기고 바라보았던 바로 그 가련한 여느 사람들 가운데 하나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귀엽고 영특한 소년 한스의 얼굴이 분노와 고뇌로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는 분에 겨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침을 뱉은 뒤에 옆에 놓여 있던 라틴어 시선집을 집어들고, 벽에 힘것 내동댕이쳤다. 그러고는 비를 맞으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5
길가에 늘어선 보리수와 햇살 아래 펼쳐진 시장터가 시야에 들어왓다. 모든 것이 예전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더 아름답고, 의미깊고, 즐겁게 보였다. 그가 시험에 합격하다니! 더군다나 2등으로 말이다! 처음에 느꼈던 기쁨의 소용돌이가 서서히 걷히고, 차츰 감사의 메아리가 울려퍼졌다. 이제 그는 마을 목사를 피하지 않아도 된다! 이제 그는 상급 학교에 올라가 공부를 계속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치즈 가게나 사무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6
한스는 10시에 잠자리에 들었다. 머리와 팔다리가 편하면서도 나른하고 피곤했다. 무척 오랜만에 맛보는 느낌이었다. 아름답고 자유로운 여름날들이 위로와 유혹의 날개를 펴며 한스의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산책이나 헤엄, 낚시질, 그리고 몽상에 젖은 나날들이었다. 단지 1등이 되지 못한 것이 그를 불쾌하게 했다. 7
마을 목사와의 일을 떠올릴 대마다 자신의 결정이 옳았다는 생각이 더욱더 굳어져 갔다. 신학교에서도 다른 학우들보다 앞서기 위해서는 야망과 인내심으로 보다 더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스는 꼭 그렇게 되고 싶었다. 하지만 왜 그래야 하는 걸까? 그것은 한스 자신도 알 수 없었다. 8
학교 선생들을 무정하다거나, 고루하다거나, 혹은 영혼조차 없는 속물이라고 욕하지 마라! 아, 그렇지 않다. 긴 세월에 걸ㅊ펴 아무런 성과 없이 자극에 무덤덤해져 버린 한 아이의 재능이 싹트기 시작할 때, 그 아이가 나무 칼이나 돌팔매질이나 활쏘기와 같은 어리석은 놀이를 그만두고, 앞을 향하여 힘껏 발걸음을 내디딜 때, 멋대로 자라온, 통통한 뺨을 지닌 아이가 진지한 학습을 통하여 섬세하고, 진지한, 거의 금욕적인 아이로 탈바꿈할 때, 그 아이의 얼굴에 연륜과 학식이 더해 가고, 그의 눈망울이 목표를 향하여 더욱 깊어질 때, 그리고 그의 보드라운 손이 점점 더 희어질 때, 학교 선생의 영혼은 기쁨과 자랑에 겨워 활짝 웃음을 터뜨리게 된다. 학교 선생의 의무와 그가 국가로부터 받은 직무는 어린 소년의 내부에 자리잡고 있는 자연의 조야한 정력과 욕망을 길들임과 동시에 송두리째 뽑아버리는 것이다. 또한 그 아이에게 국가적으로 공인된 절제의 평화로운 이상을 심어주는 것이다. 현재 만족스러운 삶을 영위하고 있는 시민이나 임무에 충실한 관료라 할지라도 학교에서의 이런 교육이 없었다면, 마구 날뛰는 난폭한 개혁가나 쓸데없는 상념에 사로잡힌 몽상가가 되었을 것이다! 9
함께 어울리는 동아리들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우정과 반감의 표현이 보다 뚜렷해졋다. 같은 고향에서 온 동향인이나 같은 학교를 다니던 동창생들이 어울리는 경우는 드물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새로운 친구를 찾아 나섰다. 도시 아이들은 시골 아이들과, 산골에 사는 아이들은 평지에 사는 아이들과 사귀려고 했다. 그것은 다양한 만남을 통하여 자신의 부족함을 메꾸려는 은밀한 욕구이기도 했다. 서로를 찾아 나선 젊은 생명체들은 희미하게나마 미지의 세계를 더듬기 시작했다. 평등 의식과 더불어 스스로 일어서려고 하는 강한 의지가 불타올랐다. 그리고 어린 시절의 잠에서 깨어나 처음으로 자기만의 개성을 키워 나갔다. 11
마침내 일행은 국도에 다다랐다. 그리고 황급히 수도원 안으로 들어섰다. 거기서 교장 선생을 앞세우고 모든 교사들이 죽은 힌딩어를 맞이했다. 만일 그가 살아 있었다면, 이러한 명예는 생각도 못할 일이었다. 선생들은 언제나 죽은 학생을 살아 있는 학생과는 전혀 다른 눈으로 바라본다. 잠시나마 돌이킬 수 없는 모든 삶과 젊음에 내재하는 소중한 가치를 가슴 깊이 되새겨보는 것이다.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소년의 가슴에 상처를 입히면서도. 12
금고형에 처해진 뒤로 그에게 강요된 고독은 늘상 누군가에게 말하지 않으면 배겨나지 못하던 그의 예민한 감수성에 쓰라린 상처를 입히고 말았다. 13
학교 선생은 자기가 맡은 반에 한 명의 천재보다는 차라리 여러 명의 멍청이들이 들어오기를 바라게 마련이다. 어진 과제는 무절제한 인간이 아닌, 라틴어나 산수에 뛰어나고, 성실하며 정직한 인간을 키워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가 더 상대방 때문에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겪게 되는가! 선생이 학생 때문인가, 아니면 그 반대로 학생이 선생 때문인가! 그리고 누가 더 상대방을 억누르고, 괴롭히는가! 또한 누가 상대방의 인생과 영혼에 상처를 입히고, 더럽히는가! 이러한 문제를 곰곰이 생각해 볼 대마다 누구나 분노와 수치를 느끼며 자신의 어린 시절을 돌아보게 될 것이다. 14
그럼, 그래야지. 아무튼 지치지 않도록 해야 하네. 그렇지 않으면 수레바퀴 아래 깔리게 될지도 모르니까. 15
누구보다도 분에 겨워 한 사람은 교장 선생이었다. 허영심에 사로잡힌 교장 선생은 자기 시선이 미치는 엄청난 힘에 대하여 커다란 자부심을 느껴오던 터였다. 그래서 그는 무서우리만치 위협적인 눈을 부릅뜨고 한스를 쳐다보았지만, 한스는 언제나처럼 비굴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럴 때마다 교장 선생은 벌컥 화가 치밀어올라 제정신이 아니었다. 한스의 미소가 교장 선생의 신경을 곤두세우고 만 것이다. 16
교장 선생으로부터 아버지, 그리고 교사들과 복습교사들에 이르기까지, 어린 소년들을 키우는 의무에 충실한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바람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한스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이 오기와 타성에 젖은 성향을 억지로라도 다시 올바른 길로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마 그 동정심 많은 복습 교사를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야윈 소년의 얼굴에 비치는 당혹스러운 미소 뒤로 꺼져가는 한 영혼이 수렁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불안과 절망에 싸인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17
교장 선생뿐 아니라, 한스도 자신이 두 번 다시 수도원으로 돌아가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신학교니 학문이니 야심에 찬 희망이니 하는 것들도 이제는 모두 끝나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한스가 그것 때문에 슬퍼하는 것은 아니었다. 한스의 마음은 실망스럽게도 아버지의 바람을 저버렸다는 죄책감 때문에 우울하고 어두워졌다. 지금 한스는 그저 쉬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푹 자고, 마음껏 울고, 한없이 꿈에 잠기고 싶었다. 그리고 이 모든 번민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혼자 있고 싶었다. 하지만 아버지 집에서는 그러한 희망이 실현되지 못하리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18
예전에 신학교 학생이었던 한스는 여전히 창백한 얼굴로 날마다 밖으로 돌아다녔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이웃과 어울릴 수 있었지만, 그는 전혀 내키지도 않았고, 몸도 무척이나 피곤했기 때문에 일부러 교제를 피했다. 의사는 그의 건강을 위해 물약, 간유, 달걀과 냉수욕을 권했다.
두 사람 모두 한참 동안이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그녀가 나지막이 물었다. "너, 무슨 일이지?" "아무것도 아냐" 그녀가 한스에게 <너>라고 불렀을 때, 그는 마치 그녀의 손이 자신의 살갗을 어루만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녀의 나지막한 목소리는 마치 머나먼 밤하늘의 저편에서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나한테 뽀뽀해주겠니?"
그녀의 밝은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가 몸으로 내리누르고 있었기 때문에 울타리를 두른 나뭇가지들이 약간 밖으로 불거져 나왔다. 은은한 향내를 풍기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한스의 이마를 스쳤다. 20
한스는 제법 새까매진 자신의 손을 만족스럽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가 입은 옷은 다른 동료들이 기워 입은 시꺼먼 작업복에 비하면 아직까지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새파랗게 보였다. 한스는 자기 옷도 머지않아 그처럼 다 낡아빠진 옷이 되기를 내심 바라고 있었다. 21
언제 어디서나 듣게 되는 진부한 이야기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몇 번이고 반복해서 듣기를 즐긴다. 왜냐하면 이런 이야기들은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훌륭한 동업조합의 명예를 길이 빛내기 때문이다. 22
그때부터 한없이 들떠 있던 흥겨운 기분도 차츰 가라않기 시작했다. 한스는 자신이 거나하게 취하고 말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술을 마셔대는 것도 더 이상 즐겁지가 않았다. 저 멀리서 온갖 불행이 한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아버지와의 한바탕 말다툼,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 작업장에 출근해야 하는 일. 차츰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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