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머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아홉 개가 내 몸 어딘가에 '기록'되어 있다고 믿는다.
음악을 듣고 눈물을 흘렸던 경험에서 내 머리는 그 곡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내 몸에는 그 눈물이 '기록'되어 있다. 1
그 일상은 바람이 살랑 부는 노천카페에서의 커피가 아닌, 한낮 줄을 서서 기다려야 먹을 수 있는 회사 앞 식당의 점심 속에 있다. 그 일상은 서서 스탠드 불 하나 켜놓고 밤새워 쓰는 글이 아니라 창백한 형광등 빛 아래에서 작성하는 문서 안에 있고, 잘 포장된 초콜릿이 아니라 입 냄새를 없애기 위해 사는 껌 속에 있다. 보고 싶은 책보다는 봐야만 하는 서류 더미에 더 많이 할애된 일상, 좋아하는 사람과의 친밀한 소통보다는 의무적으로 만나야만 하는 사람들과의 대화에 더 많이 소모되는 일상, 갓 갈아낸 자몽주스보다는 믹스커피에 더 친숙함을 느끼는 것이 어쨌거나 일상이다.
그렇다. 나는 물리적인 공간으로서의 지중해를 만나고 싶었다. 태양과 구릿빛 피부와 풍부한 해산물과 지금 행복한 사람들의 공간을 꿈꾸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결국 도착한 곳은 정신의 지중해였다. 내일의 태양을 기대하지 않는 것. 지금의 이 태양을 남김없이 사는 것. 영원히 굴러 떨어지는 바위를 영원히 언덕 위로 밀어 올리는 형벌을 받았지만, "무겁지만 한결같은 걸음걸이로, 아무리 해도 끝장을 볼 수 없늘 고통을 향하여 다시 걸어 내려오는" 시지프처럼. 자신의 불행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깨어 있으면서 결국 '자신의 운명보다 우월'한 시지프의 공간이 바로 지중해였던 것이다. 4
산다는 건 어쩔 수 없이 선택의 연속이다.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결국 모든 선택에는 '만약'이 남는다. 오늘 점심 메뉴부터 시작해서 인생의 큰 결정까지. '만약'이 배제된 순간은 없다. 하지만 '만약'은 어디까지나 '만약'이다. 가보지 않았기에 알지 못하고, 선택하지 않았기에 미련만 가득한 단어이다. 그 모든 '만약'에 대한 답은 하나뿐이다. '나는 다른 길을 선택했다'라는 답. 5
다만, 여행할 때 우리의 귀는 다른 식으로 열린다는 이야기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평소라면 지나쳐버렸을 어떤 음악이 평생 간직하고 싶은 행운으로 느껴지고, 평소라면 발걸음을 재촉했을 연주자 앞에서 기꺼이 눈물을 흘려버린다. MP3 플레이어에서 우연히 흘러나온 음악 덕분에 눈앞 풍경이 더 아름답게 보이고, 지금 이 음악과 함께 이 풍경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여행은 감각을 왜곡한다. 귀뿐만 아니라 눈과 입과 모든 감각을 왜곡한다. 그리고 우리는 기꺼이 그 왜곡에 열광한다. 그 왜곡을 찾아 더 새로운 곳으로, 누구도 못 가본 곳으로, 나만 알고 싶은 곳으로 끊임없이 떠난다.
그 왜곡의 음악을 듣기 위해 오늘도 여행 계획을 세운다. 그 미세한 음악까지 놓치지 않을 정도로 귀가 열린, 마음이 열린 나를 만나기 위해 오늘도 어쩔 수 없이 여행을 꿈꾼다. 6
60이 되고 싶었다. 그게 꿈이었다. 하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저 늙어가는 것이 꿈이 될 수 있는 건가. 그냥 늙고 싶은 건가. 그건 아니지 않은가. 60살이 된 내 모습을 구체적으로 그려보았다. 고요한 얼굴이고 싶었다. 세상의 어떤 풍파도 감히 박살낼 수 없는 깊고 따뜻한 얼굴이면 좋겠다 싶었다. 그렇다면 그저 늙는 것이 아니라 잘 늙어야 했다. 그때면 얼굴에 모든 것이 다 새겨져 있을 텐데. 지금까지의 시간과 만남과 선ㅅ택과 마음이 모두 새겨져 있을 텐데, 그 얼굴에 책임을 지고 싶었다.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괜찮은 인생이란 생각이 들었다. 7
물론 이제는 안다. 내가 어릴 적 꿈꾸었던 그런 말짱한 나이는 없다는 걸. 60이 되어도 내가 꿈꾸는 것처럼 무심하게 고요할 리 없다는 걸. 오늘은 여기가 아파 우울할 것이고, 내일은 저기가 골칫거리일 것이다. 내가 괜찮은 어떤 날에는 남편이 말썽일 것이다. 그때 내게 일거리가 있다면 그 일이 하기 싫어 몸부림일 것이고, 그때 내가 백수라면 앞으로 남은 세월 동안의 가계가 걱정일 것이다. 전 세계를 여행하고도 남을 시간이 있지만 돈이 없을 수도 있고, 돈이 있더라도 몸이 안 따라줄 수도 있다.
끊임없이 배우고자 하는 열망. 나조차도 알 수 없는 이 열망. 어쨌거나 확실한 것은 뭔가를 배울 때의 나는 확실히 에너지로 가득 차 있다. 사소한 일에도 쉽게 즐거워하고, 바쁘다고 입버릇처럼 말 하지만 기어이 짬을 내서 배우러 달려간다. 그러니 나에게 '배운다'라는 말은 장밋빛 미래를 위한 말이 아니라 장밋빛 현재를 위한 말이 된다. 9
그리고 나는 야구의 팬이 되어버렸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남자친구와 같이 야구를 보는 그 시간의 팬이 되어버린 것이다. 10
'::: >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상실의 시대-노르웨이 숲 :: 무라카미 하루키 (0) | 2017.09.01 |
---|---|
나라는 여자 :: 임경선 (0) | 2017.08.28 |
자유로울 것 :: 임경선 (0) | 2017.08.06 |
모멸감 :: 김찬호 (0) | 2017.07.26 |
정희진처럼 읽기 :: 정희진 (0) | 2017.06.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