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SMALL

내가 상대의 입장이라면 원치 않을 것들을 철저히 배제하기로 다짐했다. 감정이입을 과잉으로 하거나, 현실을 왜곡하면서 위로하거나, 정신 승리로 대충 넘어가거나, '난 이렇게 했는데 넌 왜 못하니'라고 나무라거나, 애매한 낙관론으로 희망을 주는 일만은 피했다. [각주:1]


흔히들 내가 무엇을 진심으로 원하는지 알려면 자기 자신과 깊은 대화를 나누라고 한다. 나의 육체는 항상 나와 함께하기에 대화를 나누는 것은 언제라도 가능하다. 바로 그 점 때문에 나는 스스로를 소외시키며 내 안에 담긴 생각은 화석처럼 굳어 있다. 나의 생각을 끄집어내거나 마주하는 일은 어색하고 쑥쓰럽다.[각주:2]


나는 뭐랄까, 내가 현재 살고 있지 않은 대안의 삶에 멋대로 싸움을 붙인 후 알아서 지고 있었다. 대안의 인생, 그런 건 어디에도 없는데 말이다. 행여 있더라도 분명히 내가 선택하지 않은 '저쪽 인생의 나'도 똑같이 '이쪽 인생의 나'를 시기하고 있을 것이다.[각주:3]


내가 먼저 마음을 담지 않으면, 내가 먼저 발을 푹 담그지 않으면, 그 어떤 일이라도 계속 내 주변에서 겉돌기만 한다.[각주:4]


하루 대부분의 생산적인 시간을 내가 직업으로 하는 일에 투입하는데 내 마음과 열정이 그곳에 없어 빈껍데기처럼 일한다면, 그만큼 충족되지 못한 마음과 열정을 다른 곳에서 어떻게든 해소시켜줘야한다. 그러려면 사생활이 정말 재밌어야만 할 것 같은데 어떻게 보면 사생활을 재미있게 하는 게 더 힘들어 보인다. [각주:5]


진심으로 열망하는 사람들은 이미 그 마음을 참지 못하고 행동을 일으킨다. 소설가 김연수 씨가 산문집 <소설가의 일>에서 소설가가 되려면 소설을 쓰는 게 우선이라고도 말했듯이, 핑계를 대며 돌아가지 않고 정중앙으로 쭉 걸어나간다. 그 일을 하고 싶으면 우선 그 일을 하고 있어야 한다는 아이러니 같은 진리. 누구에게 질문할 필요조차 없고 더더군다나 누가 말린다고 해서 관두지도 않는다.[각주:6]


연애에 '정상'이 어디 있으며 그런 게 있다고 한들 왜 남들이 하는 그대로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나와 남자 친구의 관계가 주변에 어떻게 보일까가 더 신경 쓰인다면 사랑하는 상대를 깊게 바라볼 여유는 언제 생길 수 있을까? [각주:7]


역으로 사랑받기 위해 무리하는 것도 곤란하다. 무리한다는 것은 내가 아닌 내가 되는 것이다. 인간관계에서 무리하면 안 되는 이유는 무리한 대가를 언젠가는 상대에게 딱 그만큼 받아내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겁고 힘든 연애의 서막을 예고한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을 감당하려고 애쓰는 것은 착한 게 아니라 비굴한 것이다. 그것은 그저 갈등이 생기거나 버림받는 것이 두려워서 미리 자신을 상처 입힐 뿐이다. [각주:8]


영화 <500일의 썸머>에서 남자 주인공 톰은 썸머에게 대차게 차인다.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를 '보는' 일인데 언제부턴가 썸머는 '나 피곤해, 나 졸려, 나 바빠'라며 '보지 않으려고'한다. 서로를 좋아한다는 증거는 사실 무척 간단하다. 모든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간절히 보고 또 보려고 노력하는 것인데 누군가 한쪽은 그 노력을 언젠가부터 하질 않게 된다. [각주:9]


단칼에 이별하지 못하기 때문에도 고통은 더 지속된다. 먼저 누군가가 관계를 내려놓으려고 하는 순간부터 이미 관계는 이별에 들어선 거나 다름없지만 관계가 완전한 마침표를 찍기까지는 이래저래 부침을 겪는다. 좀처럼 꺼지지 않는 촛불처럼 불꽃은 피었다 사그라졌다 사람을 헷갈리게 반복한다. 센 척, 약한 척, 괜찮은 척, 미친 척, 진짜 진짜 진짜로 헤어지기 전까지 우리는 얼마나 많은 '척'을 해야 하는지.[각주:10]


어떻게 나같은 애를 좋아할 수가 있지, 라는 순수한 경이로움. 어떤 사랑이든 사랑 그 자체가 내 인생에 찾아온 것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 사랑이 끝났다고 해도 새로운 사랑이 내게 도래할 거라는 믿음. 상처는 아물고 어느새 나는 한 뼘 성장해 있다. 슬픔에 아름다움이 깃드는 순간이다.[각주:11]


자신의 상처를 소중히 하려는 심리가 작동하는 것은 그 상처를 소중히 하지 않으면 그 외에 소중히 할 만한 게 별로 없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사실상 그쯤 되면 그건 부모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인 것이다.[각주:12]

이렇게나 차갑게 말할 수 있나 싶지만, 또 이게 맞는 건가 싶기도 하고. 아직은 정답을 모르니 나는. 그렇다고 작가는 정답을 아실까만은..


봄에는 부쩍 '어떤 상대와 결혼해야 하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최적화된 상대란 없다. 15년간의 결혼 생활을 통해 이 세상엔 내 남자, 내 여자란 존재할 수 없음을 깨닫고 체념했다. 사람을 소유할 수도 없고, 상대를 내 입맛대로 바꿀 수도 없고, 끊임없이 같은 깊이로 사랑할 수도 없다. [각주:13]


이 불평등한 모습이 주는 불쾌한 충격은, 이 모습이 실제로 우리가 현실에서 겪는 것을 보여주기 떄문이다. 가사 분담의 문제는 우리가 머리로는 이론적인 성평등을 외치지만, 현실 생활 속에서는 쉽게 구현하지 못하고 겉으로도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는 예민한 소재다. 

가사 분담 문제가 어려운 이유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적으로 규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갈등으로 마음이 고통스럽기보다 차라리 몸이 피곤한 게 낫겠다 싶어 많은 여자들은 '그냥 내가 하고 말지'라며 체념한다. [각주:14]


"네가 하라는 대로 할게."

마님의 분부만 기다리겠다는 머슴 같은 대사가 그다지 기쁘지 않다. 그 말의 행간에 스스로가 가사일에 대한 주인의식이 없음이 드러난다. 주도권이나 자발성, 책임을 갖지 않겠다는 얄미운 선언처럼도 들린다. 그러니까 자신은 어디까지나 '협조적인' 비관련자의 입장으로 남고 싶다는 거? 뭐 하나 시킬 때마다 사랑과 존중의 마음으로 '부탁'하고 일을 어설프게 끝내놓은 다음에도 반드시 '칭찬'해주는 것, 아, 이것 자체도 피곤한 일이다. [각주:15]

ㅋㅋ나는 남편이 없지만, 동거인은 있다. (시간에 따라 대상은 다르지만) 동거인에 대해 공통적으로 느끼는 심적인 불편함을 잘 집어내는 것 같아 유쾌했다. 그러면서 내심 결혼(만약 하게 된다면) 후에도 이러한 미간이 벌써부터 찌푸려지는 일들이 반복된다면 많이 지칠 것 같다. 것 같은 게 아니라 정말 그러하겠지. 나도 아내를 갖고 싶다. 정말~~~~~~~~~~~~~~


어떤 이들은 남자에게 일을 다 하면 칭찬을 꼭 해줘서 기분 좋게 해 다음에 또 하게 하라는 '칭찬 요법'을 권하지만 나는 그렇게까지는 못하겠다. 아니 하기 싫다! 가사일이 끝났을 때 아무도 그에 대한 고마움이나 고됨을 평해주지 않는 그 적적함과 허탈함을 그도 느껴봐야만 한다. [각주:16]

정말 맞는 말. 적적함과 허탈함, 그러나 하지 않으면 안 될 일. 누군가는 해야하고, 어쩌면 지금도 하고 있을 일. 


어느덧 남편은 '어느 경우에 아내가 자신에게 일을 시킬 것인가'를 사전에 감지하기에 이른다. 이제는 어떤 '징조'가 보이면 내가 시키기 전에 "밥 먹고 내가 설거지할 테니까 놔둬~" 같은 선언을 먼저 함으로써 어린아이처럼 칭찬을 바란다. 물론 나는 "그래, 고마워~"라고 대꾸하지만 뚜껑을 덮어 반찬 통들을 냉장고에 집어넣는 것부터가 설거지임을 깨달을 날이 올 때까지 칭찬은 하고 싶지가 않다. [각주:17]

정말 작가는 이래서 작가인가보다. 일상적이지만 포착하거나 표현하기 어려운 것을 담담하고도 서슴없이 해낸다. 


남들이 단체로 어울려 다니며 신나게 놀 때 나는 주로 1대 1의 인간관계가 주는 조용한 친밀감에 편안함을 느끼며 성장해왔다. [각주:18]


관계는 화학작용이다. 이 사람 앞에서는 내 본연의 모습을 보일 수 있는데 저 사람 앞에서는 자꾸 나답지 않게 어색해지고 같이 있으면 불편하다. 저 사람 앞에서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그저 좋고 편한데 이 사람 앞에서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어느새 하면서 거짓 웃음을 짓고 있다. 

그래서 아무리 그 사람이 객관적으로 좋은 사람이고 나한테 잘해준다고 해도 그 사람과 같이 있을 때 특정하게 반응하는 나의 모습이 뭔가 불편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 관계는 희망이 없다. [각주:19]


여자들은 결혼을 생각할 때쯤 되면 이 질문을 던진다.

"이 남자, 괜찮을까요?"

이 질문은 대개 내가 상대방을 좋아하긴 하는데 그의 조건이 석연치 않을 때 나오는 대사다. 

다시 말하면 그녀들의 가장 큰 두려움은 결혼으로 삶의 질이 지금보다 떨어지는 것이다. 신데렐라까지는 바라지 않아도 현상 유지는 해야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랑이냐 현실이냐, 그것은 사실 중요하지 않다. 개개인의 자유다. 어느 쪽을 택하는 것이 올바른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느 쪽도 '자율적으로' 선택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이 남자가 괜찮냐'는 질문의 포커스는 결국 '그'가 아니라 '나'일 뿐이다. 다시 말해 이것은 '상대'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인 것이다. [각주:20]


이 남자가 나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까요, 를 묻기보다 내가 이 남자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은지, 해줄 수 있을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는 없을까? 언제까지 '이것만 빼면 참 괜찮은 사람인데'라며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것인가. 남자는 당신을 사랑한 것 말고는 아무 죄가 없다. 돈이 문제라면 그 돈, 내가 벌겠다는 생각은 할 수가 없을까. 남자는 의존의 대상이 아니라 애초에 사랑의 대상이었다. [각주:21]


우리가 함께하는 것, 사랑을 나누는 것도 진실이지만 동시에 결국 제 삶의 무게는 혼자서 짊어진다는 것도 진실이다. [각주:22]


회사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 유기적인 생물체와 같다. 컨디션이 좋았다 좋지 않았다 하고 사람 하나에 따라 분위기가 좋게도 나쁘게도 달라진다. [각주:23]


어떤 일을 어디서 하더라도 일의 본질은 같다. 최선을 다해야 하고, 사람들과 조율할 줄 알아야 하고, 규칙을 따라야 하며 스스로를 통제할 줄 알아야 한다. [각주:24]


나는 20대 때 35살 이후의 인생을 단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했다. 35살까지 일하고 그다음엔 '그 후에도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인 줄로만 알았다. 웬걸, 그 후에도 길고 긴 인생이 기다리고 있었다. [각주:25]

그렇다. 내가 그렇다. 내가 아아-주 오래 전부터 바라오던 '어른'은 대체 언제 되는걸까, 10대의 끝자락의 내가 보았을 때 지금의 나는 그 '어른'의 범주에 속하게 될까. 어찌된 게 점점 시간이 흐를 수록 내가 말하는 '어른'의 기준은 멀고 높아만진다.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안 되는 나의 서른 다섯 살이 내가 생각하는 '어른'에 가까운 모습이라 또 생각해보지만, 정말 서른 다섯에의 나는 스스로를 '어른'이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그리고 그 '어른' 이후의 삶은 또 어떨까. 가늠도 안 된다. 


젊을 때 성실하게 애쓰고 노력하는 것은 기초 체력 쌓기 훈련 같은 거라서 몸과 정신에 각인시킬 수 있을 때 해놓지 않으면 훗날 진짜로 노력해야 할 때 노력하지 못하거나 아예 노력하는 방법 자체를 모를 수 있다. 잘될지 잘되지 않을지 모르지만 젊은 시절 최선을 다해 노력했거나 몰두한 경험 없이 성장해버리면 '헐렁한' 어른이 되고, 만약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했을 때 '이건 나의 최선이 아니었으니까'라며 마치 어딘가에 자신의 최선이 있따고 착각하면서 스스로에게 도망갈 여지를 준다. 

노력을 하다 보면 종종 좋은 결과가 나오기도 하고, 그런 성취의 경험이 주는 용기와 힘은 상상 이상으로 크다. 다시 말해 자본에게 착취당하고 착취당하지 않고의 문제 이전에 이것은 개인의 삶의 태도와 한 인간의 기량에 관련된 문제인 것이다. [각주:26]

이렇게 차갑게 말하나 싶지만, 격히 공감하는 부분. 아직까지 나는 왜인지 이런 단정짓는 듯한 말을 하기가 어렵다. 내 경험의 폭이 좁은 탓도 있겠지만 혹여 내가 지내온 세계와 우주가 협소하진 않을까 하는 마음에. 그럼에도 '스스로에게 도망갈 여지를 준다'는 것은 마음에 콩콩콩 와닿는 말. 나의 이십대 초반은 그렇게 여지를 주며, 조금의 숨통을 얻고 헐떡대며 자위하고 지냈지 않았던가. 

나의 실패보다는 그 후의 여지 속에서 연명한 나의 못난 모습이 참 힘들었다. 지금 되돌아보아도 내가 숨막혀했던 부분은 그곳이었던 것 같다.  


인생에서 시범 게임이란 없다. 본 게임에서 실패햇다면 실력이든 노력이든 재능이든 부족한 부분을 키워야지 과정과 경험의 소중함과 아름다움을 논하지 말아야 한다. 나는 실패를 직시하고 어설픈 위로나 정신 승리를 하지 않는 단단한 사람들이 좋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이들은 그 이전에 단 한 번이라도 '이겨본' 경험이 있기에 저런 말을 자신에게도, 남에게도 할 수 있구나 싶다. 이겨봤다고 해서 실패를 단순히 질책하거나 매도하는 게 아니라 지는 것과 이기는 것 사이에는 진 입장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이 존재함을 외면하거나 축소하진 말자는 마음인 것이다. [각주:27]

단단한 사람. 내가 좋아하기도 하고, 내가 되고 싶기도 한 그런 사람. 


자신의 잣대로 세워진 정의감을 앞세워 성금히 타인의 선택을 함부로 재단하며 "넌 이렇게 해야만 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 쉬운 말은 두고 일부러 어려운 단어를 써가며 어렵게 말하는 사람, 그럴싸한 '거대한' 단어들로 선동하는 사람, 평소 말하는 것과 일상생활에서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는 사람이다. 

목소리가 크고 공격적인 사람들을 피하십시오. 그들은 영혼을 괴롭힙니다.


'난 자존감이 없어요'라는 말에 중독되어 있는 사람들을 본다. 그들은 자존감은 타고나는 거라고 생각한다.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아 애정 결핍에 시달리지 않고 자신감 넘치는 외모와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만이 참자존감을 가질 수 있다고 믿는다. 대체 우리 중에 그런 행운을 타고난 사람이 몇이나 될까. 

대부분 사람들은 저마다 겉으로 보이지 않는 문제를 끌어안고 살아간다. 성장기 시절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받았다고 해도 어떻게든 상처받은 '마음 속 아이'를 달래가면서 버텨나간다. 행동함으로써 자존감을 후천적으로 확보해나간다.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면서 타인의 단단한 모습은 '타고난 행운 탓'으로 쉽게 정의하려 든다면 그것은 노력하기 버거워하는 나의 모습을 외면하려는 자기 보호적 태도가 아닐까. [각주:28]


착하려는 마음의 뿌리를 따라가보면 그것은 상처와 갈등을 회피하는 방어적 행동으로 설명이 된다. 내 안의 분노를 드러내면 그들의 사랑을 잃을까 두려워서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 쉽게 말하면 눈치 보는 것이 몸에 배인 것이다. 그럴수록 상대는 나의 진짜 모습을 파악하기 힘들어진다. 

좋은 품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 때문에 무리하는 사라보다 자기에게 솔직해질 수 있는 사람을 좋아한다. 조금만 촉이 예민한 사람이라면 무리하는 게 다 보이고 그게 불편해서 먼저 멀어져가기도 한다. 나 자신을 존중하는 마음이 없다면 상대도 나를 존중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각주:29]


나는 내 안에서 나오는 여러 이글이글한 감정들을 마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도 내 감정이라면 무시하지 말고 인정해야 한다. 그 감정을 계속 끌어안고 억누르며 끙끙거릴 바에야 누가 미우면 미워하는 게 낫다. 누가 질투 나면 속이 쓰린 게 당연하다. [각주:30]


"일이나 해. 인생은 짧아. 가만히 앉아서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해 쓰레기 같은 이야기를 하는 대신에, 진짜 일을 해. 신께서 재능을 주셨지만 살 날은 많지 않으니까."

남에 대한 이야기를 할 시간과 기력으로 나의 일을 하기로 한다. [각주:31]


내가 어느 순간 타인에 대한 비난으로 열을 올린다면 나는 그것을 내 안의 공허함이나 불안함에 시선을 돌리라는 자가 신호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각주:32]


가해자를 비롯 남들 보기에 사소한 문제에 연연하는 내 모습을 보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니다. 치사하고 구차해지는 기분이다. 그러나 나에게 중요한 문제는 크고 작은 게 따로 없다. 사소해도 내게 중요하면 바로잡아야 한다. [각주:33]


작은 것은 흘려보내고 큰 것만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작은 일도 챙겨야 나중에 큰 것도 챙길 수 있는 힘을 가진다. '좋게 좋게' 넘어가자는 담합의 유혹에 내가 설득당할 때, 잘못된 관행은 점점 고착될 수밖에 없다. 잘못된 관행에 감각적으로 경종이 울리면 어떻게든 바로잡고 넘어가고 싶다. 그런 예민함이라면 대환영이다. [각주:34]


밀물과 썰물 사이에서 어느덧 내 곁을 여전히 자연스레 지키고 있는 그 사람이 지금의 내 사랑스러운 벗이다. [각주:35]


역으로 거절을 할 때에는 조금의 여지도 없이, 단칼에 거절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러려면 'NO 반사신경'을 단련시켜야 한다. 몇 가지 거절 멘트 버전을 챙겨놓고 반사적으로 말하는 연습을 해본다.

"미안해, 힘들 것 같아."

"그건 좀 곤란해."

"안 돼."[각주:36]

거절하는 연습. 입에 잘 안 붙는다는 커녕, 타자를 치는 손에조차도 잘 안 붙는다. ㅋㅋㅋㅋㅋㅋㅋ...


남들은 연봉이 얼마냐, 일주일에 며칠 쉬냐, 라며 상한선을 보잖아요? 전 늘 하향선을 정하라고 하거든요. 어떤 부분은 양보할 수 있되 어떤 부분은 절대 양보할 수 없는 부분, 그게 하한선인데 전 그게 침해당하면 그만두라고 얘기해요. [각주:37]


모든 과정이 늘 첫 단추예요. 모든 단추가 첫 단추인 거예요. 

단추라는 개념이 항상 첫걸음인 거에요. 만약에 다음에 안 된다 그러면 다른 단추를, 다른 첫 단추를 끼우면 되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은 늘 실체가 없는 걸 가지고 1부터 10까지 자꾸 만들고 거기에 끼워 맞추려고 하다 보니까 5, 6밖에 안 되네. 이렇게 되거든요. 사실은 처음부터 5도 없고 3도 없고 다 1, 1, 1, 1 개념의 연속인데 말이죠. [각주:38]


'어떤 결정을 해도 애매할 때는, 직장이든 결혼이든 이혼이든 생각할 때는 당신이 룩셈부르크 같은 낯선 데 있다고 가정해보자. 거기선 아무도 당신을 몰라요. 그럼 어떤 결정을 할래요?' 이 말은 뭐냐면, 우린 결국 다른 사람을 의식하고 산다는 뜻이에요. 근데 현실은 아무도 나를 보지 않아요. 내 안에 자기 내면의 눈이 많은 거에요. 내 안의 눈이 너무 많으니 내 안의 눈을 이렇게 조금씩 감추면 되는데. 그게 아직까지는 힘드니까요. 당분간은 유치하지만 상상을 하는 거죠. 나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룩셈부르크 같은 저기 어디 먼 곳에 있다 치자고. [각주:39]


결혼은 연애의 연장에 불과한 거고요. 결혼의 본질은 혼인신고서가 아니라 서로의 교감이에요. 육체적인 관계 조차도 사실은 별거 아니에요. 결국에는 좋아한다는 감정이 다에요. [각주:40]


영어로 표현하자면 admiration(감탄), adoration(흠모)의 느낌이랄까. 너한테 반했어, 당신을 존경해, 정말 근사해, 멋져, 최고야. 이런 느낌을 저는 이성뿐 아니라 동성한테도 받아요.

그냥 매료되는 거. 사람에게 매료되는 기쁨이 있어요. [각주:41]

동성에게 매료되는 것. 

나로 돌아보면, 이성에게 매료될 때에는 아마 콩깍지에 매료되기에 홀딱 반해버린다는 게 가깝겠다. 그런데 동성에게 매료될 때에는 그사람의 됨됨이에 품성에 혹은 나와 비슷한 가치관에 매료된다. 홀딱. 그래서 그런 사람을 만날 때에는 세상의 반쪽을 찾은 듯 기쁘다. 그리고 그만큼 소중하다. 


다만 차선이라고 해서 그것을 홀대하지 않고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차선을 어떻게 하면 최선으로 할 수 있을까 고민했고 최선으로 하려고 노력했어요. 여태까지 그 노력을 해왔던 거밖에는 지금까지도 글을 쓰고 책을 낼 수 있게 된 이유가 없는 것 같아요. [각주:42]

이 글을 읽고 나니 우리 교수님 말씀이 또 떠오른다. "뭘 해야할지를 모르겠을 땐, 주어진 것 그리고 지금 해야 할 것을 하세요." 

지금 나의 상황에 적합한 말이지 않을까. 내가 가는 곳의 길을 알기까지, 적어도 길의 초입에 다다를 때까지는. 



반응형
LIST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