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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코의 미소

 

나는 쇼코가 준 세계지도를 내 방 벽에 붙여놓고, 쇼코가 살고 있는 A시와 우리 군에 빨간색 점을 찍었다. 두 점은 한 뼘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가까웠따. 그리고 쇼코가 가고 싶다는 세계의 도시들에도 점을 찍었다 베이징, 하노이, 시애틀, 크라이스트처치, 더블린. 그 작은 점 속에서도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생각하니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각주:1]

가끔 내가 빽빽한 아파트 단지나, 버스를 볼 때에 느끼는 감정을 작가님께서 잘 묘사해주었다. 때로 내가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과 그 무엇을 글로 풀어내주시는 수많은 분들께 감사하다.

 

 

 


씬짜오, 씬짜오

시간이 지나고 하나의 관계가 끝날 때마다 나는 누가 떠나는 쪽이고 누가 남겨지는 쪽인지 생각했다. 어떤 경우 나는 떠났고, 어떤 경우 남겨졌지만 정말 소중한 관계가 부서졌을 때는 누가 떠나고 누가 남겨지는 쪽인지 알 수 없었다. 양쪽 모두 떠난 경우도 있었고, 양쪽 모두 남겨지는 경우도 있었으며, 떠남과 남겨짐의 경계가 불분명한 경우도 많았다.[각주:2]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

마당에 우두커니 서 있던 이모를 처음 봣을 때부터 엄마는 순애 이모가 좋았다. 언니라는 말의 울림이, 그 다정하고도 애틋하게 들리는 말이 엄마는 좋았다. 왜 어린 시절에는 고작 몇 살 위의 언니들이 그다지도 커 보였을까. 엄마는 가슴이 뛰어서 이모에게 먼저 말을 걸 수조차 없었다. [각주:3]

언니라는 말의 울림. 이보다 예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언니에게 느낀 수많은 감정선을 하나의 표현으로 담아낸 예쁜 말.

 

 

엄마는 그날 이후로 말수가 적은 사람이 되었다고 고백했다. 엄마가 그 일에 대해 내뱉었던 그 순진했던 모든 말들과 이상주의에 기댄 세상에 대한 몰이해가 부끄러웠고, 세상의 단단함이,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뚫고 들어갈 수 없는 그 단단한 벽이 엄마를 침묵하게 했다고 했다. [각주:4]

 

엄마는 이모의 등에 붙어서 작은 숨을 쉬는 아이가 이모의 몸 밖에 붙어 있는 심장 같다고 생각했다. [각주:5]

 

사실 엄마는 행복한 편이었지만 조금이라도 그 행복을 드러냈다간 이모가 박탈감을 느낄 것 같아서 그렇게 말했다. 엄마는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런 태도가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을 기만하는 짓이라는 걸 깨달았다. [각주:6]

나에게도 해당되는 말. 어쩌면 내게 하는 말.

 

 

이십대 초반에 엄마는 삶의 어느 지점에서든 소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어린 시절에 만난 인연들처럼 솔직하고 정직하게 대할 수 있는 얼굴들이 아직도 엄마의 인생에 많이 남아 있으리라고 막연하게 기대했다. 하지만 어떤 인연도 잃어버린 인연을 대체해줄 수 없었다. 가장 중요한 사람들은 의외로 생의 초반에 나타났다. 어느 시점이 되니 어린 시절에는 비교적 쉽게 진입할 수 있었던 관계의 첫 장조차도 제대로 넘기지 못했다.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 이 생의 한 시점에서 마음의 빗장을 닫아걸었다. 그리고 그 빗장 바깥에서 서로에게 절대로 상처를 입히지 않을 사람들을 만나 같이 계를 하고 부부 동반 여행을 가고 등산을 했다. [각주:7]

 

 

 


한지와 영주

난 스물일곱이야, 라고 말하면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의 부모도, 내가 여행을 떠나기 직전에 아이를 낳은 언니도 지도교수와 연구실 사람들도 그랬다. 이십대는 어느 때보다 치열해야할 시기였고, 여기서 치열함이란 죽기 살기로 빠른 시간 내에 안전한 경력을 쌓는 것을 의미했다. [각주:8]

나는 치열했다. 위의 기준에서 보자면 어디까지나. 그런데 아직도 나는 나의 슬픔과 혼란함을 삼킬 방법을 알지 못한다.

 

 

그는 언제나 내가 자신을 '만나주는 것'이라고 말했었다. 그 말은 나를 당황하게 했고, 그를 조금 경멸하게 했으며, 무엇보다도 그에 대한 편안함을 느끼게 해줬다. 그는 내가 아닌 다른 누구를 만났더라도 그렇게 이야기했을 것이다. [각주:9]

 

"괜찮아, 영주." 한지가 말했다.

충동적으로 여기에 머물기로 한 것도, 네가 해야 했던 일을 내팽개쳐버린 것도, 수도원 생활도 모두, 괜찮아.[각주:10]

내가 가장 듣고 싶어하는 말이지만, 내가 가장 듣지 못하는 말이기도 한 이것. 괜찮아.

 

 

글쎄요. 하지만 우리가 어떤 상상을 하든 천국은 그 상상을 뛰어 넘는 상태일 겁니다. 천국에는 시간도 공간도 존재하지 않을 테니 천국은 영혼의 상태라고 이야기할 수 있죠.[각주:11]

난생 처음 들은 이야기, '천국은 영혼의 상태이다'라는 것. 그러고보니 천국은 있을 법하고, 또 있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종교에 있어 가장 회의적이었던 천국으로 대변되는 내세를, 이제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되갚아주고 싶은 건가.

아니면 그저 누군가를 자극해서 그 반응을 보고 싶은 건가. 나는 그런 식으로밖에 자신에 대해 안심하지 못하는 그들이 지심으로 가엾게 느껴졌다. 누군가를 조롱하고 차별하면서 기쁨을 느끼는 삶을 얼마나 공허한가. [각주:12]

 

카로는 한지에 대해서 얼마나 아는 걸까, 한지는 자신이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내게 한 만큼의 이야기들을 해왔던 걸까. 나는 궁금해졌다. [각주:13]

 

나는 쓰레기통 앞에 가만히 서서 한지가 조금 전까지 서 있었던 자리를 바라봤다. 한지는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나는 알았다. 한지가 나를 피하는 이유가 무엇이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한지는 이제 나를 피하고 있고, 내가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건 한지를 괴롭히는 일이 될 것이다.

나는 그애를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

내가 어떻게 사과를 하든, 어찌된 일이냐고 따져 묻든 그건 모두 잘못된 일이었다.

사람들은 떠난다. 할머니는 그렇게 말했었다.

그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돼.

나는 나에게 속삭였다. [각주:14]

가끔 세상은 알 수 없는 것들로 가득차곤 하지만, 나는 그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먼 곳에서 온 노래

"소은, 어린애들은요, 어른이 한 말을 다 진짜라고 믿고 받아들여요. 평생 동안 그 말과 함께 살아가는 거지요.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 아버지가 내게 말했어요. 너는 쓸모없는 계집애야. 너는 덩치만 큰 계집애. 눈에 띄고 시지 않았는데도 자꾸만 몸이 커졌습니다. 웅크리면 조금이라고 작아 보일까 해서 구부정하게 다녔지만 소용없었어요. 사라지고만 싶었습니다. ..."[각주:15]

섬뜩하지만, 평생 마음에 새겨야 할 말임을 절감했다. 내가 하는 작은 말들이 한 사람의 평생과 살아가야 한다니, 더욱 신중해지고 조심하게 된다. 지난 해와 더불어 올 한 해도 나로 인해 적어도 한 명의 친구라도 풍요로이 평생을 안고 살 말들을 가져주길. 조금은 이기적인 바람.

 

 

지금 생각해보면 고집불통에 독한 인간이라는 소리를 듣던 선배도 고작 이십대 초반이었을 뿐이다. 여러 사람의 미움을 견디기로 마음먹었다고 하더라도 상처받을 수밖에 없었겠지. 자신을 지지하고 인정해주는 동료가 없는 내부에서의 투쟁이란 대체 얼마만큼의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을까. 그날 로터리 횡단보도 앞에서 스물다섯 선배가 흘렸던 눈물을 분노가 아니라 그때까지 누적된 외로움이었는지도 모른다. [각주:16]

 

자제심이 무너질까봐 그동안 차마 그 노래들을 듣지 못했다. 선배가 죽었던 페테부르크에 발을 딛는 것도 두려웠다. 잘 쌓아올린 접시처럼 내 감정이 흔들려도 무너지지 않기를 바랐다. 그것들이 다 무너져 내 속을 찌르고 어지럽히지 않기를 바랐던 결벽이 있었다. [각주:17]

내가 그를 그리며 하는 생각과 감정들을 닮아있다. 그러고보니 나도 결벽이 있었구나. 아플 수 있겠지만 너무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고, 모든 것이 와르르 무너져 나까지 집어 삼키지 않았으면 하는 결벽. 

종현아 너가 너무도 많이 남은 이 세상에서 나는 너무너무 속상하고 슬프다. 정말 카뮈처럼 너는 가버린걸까. 그렇게 해야만 전할 수 있었던 것이 있었던걸까. 나와 가까운 죽음에 이리도 내가 많이 흔들릴 줄은 몰랐다. 이제 곧 설 명절이야. 좋은 사람들 보러, 맛있는 음식 먹으러 이곳에 오면 좋겠다. 단 한 번이라도 스쳐보지 못한 인연이지만 여전히 너에게 빚진 게 많아.

 

 

 


미카엘라

엄마는 매사가 그런 식이었다. 김치가 잘 익었다고 감사, 돼지고가 가격이 내려 마음껏 먹을 수 있음을 감사, 발가락에 난 사마귀 치료가 잘된 것을 감사, 일을 할 수 있는 건강을 허락해주심에 감사, 외식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 일이 안 풀리면 일이 잘 풀릴 때에 감사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음을 감사.

엄마의 감사 타령 속에서 그녀는 오히려 엄마의 초라한 현실을 봤다. 언제든 외식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굳이 그런 일에 감사할 필요가 없을 테니까. 언제든 양껏 돼지고기를 먹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돼지 고기 가격이 내렸다고 감사할 필요가 없을 테니까. 돈이 있다면, 부유한 부모나 남편이 있다면 통증을 견뎌가며 매일 열 시간씩 서서 일할 수 있음을 감사할 필요가 없을 것이므로. 그녀는 차라리 엄마가 스스로의 처지에 솔직해져서 불평하기를 바랐다. 초라한 현실에 대한 엄마의 감사가 얼마간은 기만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각주:18]

읽다가 웃음이 났던 곳. 놓치 말아야 할 태도로 감사를 꼽는 나임에도 웃음이 지어졌다. 웃프다 라고 할까. 그래도 아직은 전자가 좋은 걸 보니 어린 건지, 어리석은 건지.

 

 

사고가 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부활절을 맞았다. 여자는 일 년 중에 가장 좋아하던 부활절 주간을 예전처럼 보내지 못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기쁜 메시지도 가슴에 닿지 않고 멀리로 부유할 뿐이었다. "기뻐하세요, 자매님. 부활절입니다"라는 말조차도 그들에 대한 애도를 가로막는 폭력처럼 느껴졌다. 여자는 처음으로 부활절 미사에 참례하지 못했다. [각주:19]

 

여자는 옆에 앉아서 꾸벅꾸벅 조는 노인을 바라봤다. 이 노인은 얼마나 여러 번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어버렸을까. 여자는 노인들을 볼 때마다 그런 존경심을 느꼈다. 오래 살아가는 일이란, 사랑하는 사람들을 먼저 보내고 오래도록 남겨지는 일이니까. 그런 일들을 겪고도 다시 일어나 밥을 먹고 홀로 길을 걸어나가야 하는 일이니까. [각주:20]

내가 여전히 겪는 이 슬픔을 앞으로 때때로 느껴야 한다니, 세상은 너무나도 슬픔과 고통으로 점철되어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수가 좋은 것만은 아님을 처음 알게 되었다. 나는 과연 앞으로도 마주할 수많은 죽음과 슬픔들에 잘 견뎌낼 수 있을까. 다시 일어나 밥을 먹고 홀로 길을 걸어나갈 수 있을까.

 

 

 


비밀

말자는 지민이 서러움을 모르는 아이로 살기 바랐다. 흘릴 필요가 없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으면, 겪지 않아도 될 고통을 겪지 않았으면 했다. 삶에 의해 시시때때로 침해당하고 괴롭힘당하지 않기를 바랐다. 지민은 삶을 견디는 사람이 아니라 삶을 기꺼이 누리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야야, 지민아, 너 마음 쓰지 말어."

...

"너가 어른이 되면 남자고 여자고 없다. 너가 여자여서 안 도니다는 소리 듣거들랑 무식한 소리구나 하구 비웃어버려. 넌 뭐든 다 되고 뭐든 다 할 수 있다. 너 땐 남자구 여자구 마음 바른 사람이 잘 살 거여."[각주:21]

하물며 우리 반 내새끼들에게도 느끼는 이 감정을, 손녀에게 오죽 그러하리랴. 내가 겪는 슬픔들을 아아아아무것도 겪지 않고 좋은 일만 있길 바라는 그 마음.

마음 바른 사람.

마음이 바른 사람..

 

이 단편을 읽으며 정말 소리내어 엉엉 울었다. 내가 몸담고 있는 교직에서 만날 수 있는 일이라 그런가? 내가 겪었을지도 모를 이야기여서일까?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세하지 않아서 더 속상하고 슬픈 이야기. 소설이 소설이 아닐 때 슬픔은 극대화되는 것 같다. 모두가 알지만 모두가 지켜주는 비밀, 지민이는 잘 지낼까. 이런 소설에서도 마주하는 죽음에 여전히 그의 생각이 나는 걸 보면, 아직 나는 무뎌지기엔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저 멀리 집배원도 갈 수 없는 곳에 있는 지민씨, 아마 그 누구보다 예쁜 학생들이 그리워할 거예요. 그리고 그게 진짜 선생님인 것 같아요. 아이들 마음에 남아있다면 기관제인지, 기간제인지 무관하게 그게 진짜 선생님인 것 같아요.  

 

아 너무 속상하고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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