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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현수가 그렇게 그렇게 추천한 에리히 프롬의 책을 읽었다.

나의 첫 에리히 프롬.

 

그런데도 그는 본질에 대한 질문을 고리타분하다며 거부할 것이다. 인간의 '본성'이나 '천성' 혹은 진짜 자기 존재 같은 것이 현실에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각주:1]

 

진짜 삶의 기본을 위반한 결과는 장애와 고통이다. 지루하고 무미건조하며 우울하고 공허하고 아무 의욕도 없다. 이런 자기 경험의 부정적 감정들을 추적해 보면 무력감이 모습을 드러낸다. 무력감은 자기 자신의 강인함으로 살아갈 능력이 없을수록 역력해진다.

그런 고통의 상태는 대부분 진짜 삶을 살지 못하고 자기 자신에 대한 더 뛰어난 지식에 더 이상 접근하지 못한다는 고통스러운 지적으로 나타난다. 진짜 삶은 억압되어 꿈에서나 겨우 명확한 언어로 이야기할 뿐이다. 하지만 진짜 삶을 다시 배울 수 있다. 원래의 힘을 생각해 내고 그것에 여지를 주고 그것을 실천한다면 말이다.  [각주:2]

진짜 삶의 기본.

 

인간은 자연의 변덕이다. 유일하게 자기 자신을 자각하는 생명체이다. 인간은 자연에 살면서 동시에 자연을 초월하는 유일한 존재이다. 자기 자신과 자신의 과거, 자신의 미래를 자각한다.

인간은 동물처럼 본능적으로만 살지 않는다. 자연에서 거의 뿌리가 뽑힌 존재로, 태어나는 순간부터 삶이 던지는 질문에 대답해야 하는 문제를 떠안는다. 어떻게 살 것인가? 어디로 가야 할까? 어떤 의미를 삶에 부여할까? [각주:3]

 

인간은 주변 사람들 및 자연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 관계를 맺지 않는 사람은 미친 사람이다. 광기를 바로 그렇게 정의할 수 있다. 광기란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의 상태이다. [각주:4]

 

사랑이란 그 사랑에 관여한 사람들의 온전함과 현실을 둘 다 보존하는 유일한 형태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타인에게 복종하거나 그에게 권력을 휘두르면서도 '사랑'을 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럴 경우 사람은 -상대에게 복종하는 사람이건 상대를 지배하는 사람이건- 자신의 온전함과 독립이라는 인간의 기본 특성을 상실한다. 진정한 사랑에서는 타인과의 연관성과 자신의 온전함이 보존된다. [각주:5]

너무나 맞는 말. 뼈에 새길 것.

 

오늘날에는 모두가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모두가 자기 밖의 목적을 위해 자신을 이용한다. 사물의 생산이라는 한 가지 전능한 목표만이 존재한다. 우리가 입으로 고백하는 목표, 즉 인격의 완벽한 발달, 인간의 완벽한 탄생과 완벽한 성장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각주:6]

 

 

하지만 인간은 사물이 아니다. 스스로 사물이 된다면 자각하건 못 하건 병이 들고 말 것이다. 프랑스인들은 18세기부터 이 병에 대해 아주 많이 알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이 병은 프랑스어 이름만을 가지고 있다. 프랑스어 이름 -ennui, malaise, la mamadie du siecle(세기의 질병)-은 이미 19세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는 이 질병을 권태, 삶이 무의미하다는 느낌, 풍요롭지만 아무 기쁨도 없는 삶이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는 느낌,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당황스럽고 어찌할 바를 모른다는 느낌이라 부른다. [각주:7]

크.. 19세기에도 있었다니 이런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정말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배워야 한다. 나의 문제는 나만의 것이 아니다.

늘 내가 말하는 '살아지는'느낌이라는게 이것과 정말 비슷하다.

작년에 만났었더라면 너무 좋았겠다 싶은 책.

물론 올해라도 만나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아주 구체적으로 인간이란 현존으로 인한 온갖 한계와 약점을 가지고서 특수한 심리적 세계와 사회적 세계에 끌려 들어온 육체적 존재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인간은 자기 자신의 삶을 자각하였고, 자기 자신과 주변 세계에 대한 의식을 꾸준히 키웠으며, 삶을 목표를 가진 열린 길로 만드는 새로운 물질적, 영적 능력의 발전 가능성을 자기 안에 품은 유일한 피조물이다. [각주:8]

 

인간의 본성은 원칙일 뿐 아니라 능력이기도 하다. 즉, 인간은 이성과 사랑의 능력을 발전시키는 만큼 자신의 본질에 도달한다. 인간은 인간이기 때문에 이성과 사랑의 능력이 있으며 그 반대도 가능하다. 다시 말해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사랑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인 것이다. 자신을 자각하고 자신과 자신의 실존적 상황에 대해 진술하는 능력은 인간을 인간으로 만든다. 그리고 바로 그 능력이 인간 본성의 기본 요인이다. [각주:9]

 

따라서 자유는 사실이라기보다 가능성이다. 인간의 진짜 인격의 실현인 것이다.[각주:10]

 

피곤한 사람, 절망에 빠진 사람, 염세주의자는 자유에 도달할 수 없다. 피곤할수록, 절망에 젖어 있을수록, 염세적일수록 얻을 수 있는 자유는 줄어든다. '열정적인 사람'만이 자유로울 수 있다. 심리학적으로, 퇴보에 빠지지 않고 전진하고 진보하려 노력하는 사람만이 자유로울 수 있다. 독립과 동시에 주변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포함하는 진보를 추구하는 사람만이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다. [각주:11]

 

인간은 자각에 이르는 만큼만, 현실을 인식하는 만큼만 자유로워진다. [각주:12]

 

'사람들이 말한다'는 표현을 이용해 우리는 그 누구도 어떤 것을 실제로 책임지지 않는 무의미한 수다의 세계로 들어선다. [각주:13]

 

"나는 내가 누군지 안다." 돈키호테는 말한다. 인생의 의미에 대한 질문은 진짜에 대한 질문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진짜 인간에게는 정신이 중요하다. 진짜가 아닌 인간은 비정신적이다. 특수한 형이상학적 태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각주:14]

 

더 정확히 말하면 포이어바흐와 마차도가 가르친 대로 나의 실존에 이미 함께 주어진 너의 실존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우리 각자는 사회가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타자의 존재 역시 우리 각 개인의 일부이기에 사회가 존재하는 것이다. 인간은 본성상 타인을 위한 존재이다.[각주:15]

내가 내 전공을 사랑하는 이유.

 

게다가 타인의 가장 깊은 내면에 숨은 본질은 그의 침묵 탓에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이런 침묵에는 부정적 면과 긍정적 면이 있다. 그 뒤로 몸을 숨기는 데 일조한다는 점에서는 부정적이지만, 타인이 자기 자아의 복사품이어서는 안 될뿐더러 실제로 내가 알고 존중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우리가 방해하지 말아야 할 사적 공간이 존재한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다. [각주:16]

 

요약하자면 우리는 자신을 이해하고 사랑하고 인식할 수 있을 때에만 타인을 인식하고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다. 하지만 의식적 헌신이 곧 자신의 사적 공간을 포기한다거나 타인의 사적 공간을 침해한다는 뜻은 아니다. [각주:17]

뼈에 새길 것.

 

어린아이들 역시 자발성의 사례를 제공한다. 아이들에게는 진짜 자기 감정을 느끼고 자기 생각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자발성은 아이들의 말과 생각에서, 얼굴에 드러나는 감정에서 나타난다. [각주:18]

 

자발적 활동은 자아의 온전함을 희생하지 않고도 고독의 공포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자아의 자발적 실현을 통해 인간은 새롭게 세상-인간, 자연, 자기 자신-과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이런 자발성의 가장 중요한 요인은 사랑이다. 하지만 자아가 다른 사람 속으로 녹아버리는 그런 사랑이나 다른 사람을 소유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랑은 아니다. 그 사랑은 개인의 자아를 보존하며, 다른 사람을 자발적으로 긍정하고, 다른 사람과 하나가 되는 그런 사랑이다. 사랑의 역동적 성격은 분리를 극복하고 하나가 되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개성을 잃고 싶지 않은 욕망에서 탄생하는 양극성에 있다. [각주:19]

 

자유에 내재하는 근본적인 분열-개성의 탄생과 고독의 고통-이 인간의 자발적 활동을 통해 더 높은 차원에서 해소되는 것이다.

모든 자발적 활동에서 개인은 세계를 자기 안으로 받아들인다. 그 과정에서 개인의 자아는 온전해지고 더 강해지며 더 탄탄해진다. 자아는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만큼 강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힘은 물질의 소유에도, 감정이나 사고 같은 정신적 자질의 소유에도 있지 않다. 물건의 사용이나 사고 같은 정신적 자질의 소유에도 있지 않다. 물건의 사용이나 조작도 힘을 주지 못한다. 우리가 어떤 물건을 이용한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 것이 되지는 않는다. 인간이건 생명 없는 사물이건 창조적 활동을 통해 진정한 관계를 맺는 것만이 우리의 것이다. 우리의 자발적 활동이 낳은 속성들만이 우리의 자아에 힘을 주고, 자아가 온전할 수 있도록 기틀을 닦아준다. [각주:20]

 

자발적으로 행동하지 못하고 진정한 느낌과 생각을 표현하지 못하는 무능력, 그로 인해 타인과 자신에게 가짜 자아를 내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 열등감과 무력감의 뿌리이다. 의식하건 안 하건 자기 자신이 아닌 것보다 더 부끄러운 일은 없으며, 진짜 자기 것을 생각하고 느끼고 말하는 것보다 더 큰 자부심과 행복을 주는 것도 없다. [각주:21]

 

인간은 진정으로 행복을 줄 수 있는 유일한 만족-활동의 순간 체험하는 것-을 잃고서 잡았다고 믿는 순간 실망을 안겨주는 환영과 성공이라는 이름의 가짜 행복의 뒤를 쫓아다닌다. [각주:22]

알고도 늘 당하게 되는.

 

두 유기체가 생리학적으로 다른 것처럼 두 사람의 인격을 이루는 개인적 토대 역시 동일하지 않다. 진정한 자아의 발전은 항상 이런 특수한 토대를 바탕으로 한 성장이다. 이 한 사람에게 고유한, 이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씨앗의 발아, 유기적 성장이다.

유기적 성장은 타인의 자아가 가진 특수성을 자신의 자아가 가진 특수성 못지 않게 최대로 존중해야만 가능하다. 자아의 고유함을 이처럼 존중하고 장려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문화가 이룬 가장 값진 업적이다. 그런데 바로 그것이 오늘날 위험에 처한 것이다. [각주:23]

 

여기서 '독창적'이라는 말은 어떤 생각을 그전에 다른 누구도 해본 적 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 생각의 기원이 그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그 생각이 그의 활동, 그의 생각에서 나왔다는 의미임을 강조하고 싶다. [각주:24]

 

우리 사회에서는 일반적으로 감정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분명 창의적 사고는-다른 창의적 활동과 마찬가지로-감정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지만 감정 없이 생각하고 생활하는 것이 이상적인 태도가 되어버렸다. '감정적'이라는 말은 불균형과 같은 뜻이 되었고, 심지어 정신 장애의 뜻으로 해석된다. 이 기준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심하게 허약해질 것이다. 그의 사고는 빈곤해지고 단조로워질 것이다. [각주:25]

 

하지만 항상 그렇듯 억압하여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웠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각주:26]

내가 2학년 때, 연숙 교수님 강의를 듣던 중 머리가 쿵- 했던 부분.

안보이는 것이지, 모르는 것이지, 그게 없는게 절대 아니다.

 

점점 더 많은 사실들만 기억하면 결국에는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라는 비장한 미신을 섬긴다. 상호 연관 없이 이리저리 흩어진 수많은 개별 지식들을 학생들에게 주입시킨다. 학생들의 시간과 에너지가 점점 더 많은 사실을 배우는 데 쓰이기 때문에 정작 사고를 할 시간은 거의 남지 않는다. 물론 사실의 습득이 없는 사고는 공허하고 허구일 뿐이다. 하지만 '정보'만으로는 너무 적은 정보와 마찬가지로 사고를 가로막는 걸림돌이 될 수 있다. [각주:27]

 

진리는 힘없는 사람들의 가장 강력한 무기 중 하나이다. 하지만 진리는 외부 세계에서 방향을 잡는데에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인간 내면의 강인함은 자신에 대한 진리를 아는지의 여부에 크게 좌우되기 때문이다. 자신에 대한 환상은 지팡이와 같다. 걷지 못하는 사람에게 도움은 되지만 그를 더 약하게 만들 뿐이다. 인간은 자신의 인격을 온전하게 완성할수록, 다시 말해 '자신을 잘 꿰뚫어볼수록' 더 강해진다. "너 자신을 알라." 이것은 인간의 힘과 행복을 목표로 하는 기본 계명이다. [각주:28]

 

이 모든 이유에서 우리는 우리가 듣는 것과 더 이상 진정한 관계를 맺지 못한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감정과 비판적 판단력의 훼손에 흥분하지 않으며,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점점 더 무관심해진다. [각주:29]

 

전제 조건은 진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다. 현대인은 자신이 추구하는 것이 정말로 스스로 원하는 것인지를 고민할 시간을 내지 않는다. 학교에 다닐 때는 좋은 성적을 받고 싶고, 어른이 되어서는 성공의 사다리에 더 높이 오르고 싶고, 돈을 벌고 명성을 얻고 싶고, 더 좋은 차를 사고 여행을 하고 싶다.

하지만 한 번씩 이런 악착같은 노력을 멈출 때면 의문이 밀려들지도 모른다. "정말로 그 자리에 오르면, 더 좋은 차를 사면, 이 여행을 할 수 있으면 그 다음에는? 이 모든 것이 다 무슨 소용일까? 이 모든 것을 원하는 사람이 정말 나일까? 행복해질 것이라고 다들 말하지만 이루고 나면 허망해질 목표를 좇아 달리는 것은 아닐까?" 이런 질문이 떠오르면 사람들은 소스라치게 놀란다. 이 질문이 한 인간의 모든 활동, 즉 그가 원하는 것의 관념을 떠받치는 기틀에 의혹을 제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불안을 조장하는 생각은 최대한 빨리 떨쳐버리려 노력한다. 그런 의문으로 괴로운 것은 그저 피곤하거나 기분이 울적하기 때문이라고 여기고 원래 자기 것이라 여기는 목표를 계속해서 좇아간다. [각주:30]

 

하지만 그 대가는 크다. 자발성과 개성을 포기하면 삶은 좌절한다. 그들은 생물학적으로 아직 살아있지만 그의 감정이나 영혼은 이미 죽었다. 계속 움직이긴 하지만 생명은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각주:31]

 

직접 만든 작품이 자신의 신이 되어버린 것이다. 인간은 여전히 세계의 중심이라는 착각에 빠져 있지만, 옛날 그의 조상들이 신을 생각하며 느꼈던 바로 그 강도 높은 무의미함과 무기력의 감정이 그를 사로잡고 있다. [각주:32]

 

인간은 상품뿐 아니라 자기 자신도 팔면서 스스로를 상품으로 느낀다. 육체노동자는 육체의 힘을 팔고 상인과 의사, 사무직 노동자는 자신의 '인격'을 판다. 생산물이나 서비스를 판매하려면 '하나의 인격'이 되어야만 한다. 이 인격은 상냥해야 하지만 인격의 주인은 그것 말고도 여러 가지 다른 기대들을 더 충족시켜야 한다. 에너지와 솔선수범의 정신도 갖추어야 하고 그밖에 그의 특수한 위치가 요구하는 것들도 구비해야 한다. [각주:33]

ㅇㅔ리히 프롬씨.. 당신.. 정말..

ㅠㅠㅠㅠㅠ내가 작년에 일을 시작하면서 든 생각이랑 똑같다 정말! 내가 에리히 프롬한테 고민상담한줄..

이런 생각이 이어지다가 굉장히 공허함을 느꼈음. 엄청난 가면을 쓰고 일을 한다는 생각때문.

정말로 연예인의 삶이 이런 것인가, 함. 대중이 원하는 모습만을 언제나 하고 있어야 하니까.

물론 나의 경우에서는 아이들이 원하는 모습을 해준다기 보다는, 교사라는 특성상 인격적 모델이 되고 싶은 바람이 더 컸지만. 뭐 대동소이한 것 같다.

 

추상적 고객으로서 그는 중요하지만 구체적 고객으로서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가 백화점에 발을 디딘다고 해도 그 누구도 기뻐하지 않으며 그 누구도 그의 소망에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가 물건을 산다 해도 그것은 우체국에 가서 우표를 사는 행위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각주:34]

 

사람들에게 다른 주제, 예를 들어 정치에 대한 의견을 물어보아도 같은 현상을 목격할 수 있다. 평범한 신문 독자에게 특정 정치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면 그는 자신이 읽은 내용을 상당히 정확하게 들려주면서 그것이 '자신의' 의견이라고 주장할 것이며 -이것이 중요한 지점이다-그가 피력한 의견이 자신이 고민한 결과라고 확신할 것이다. [각주:35]

띵-

 

비판적 사고의 억압은 아주 어릴 때부터 시작된다. 다섯살만 되어도 아이는 벌써 엄마의 거짓을 알아챈다. 예민하게는 엄마가 입으로는 늘 사랑과 친절을 들먹이면서도 실제는 차갑고 이기적이라는 사실을 알아챈다. 그보다는 덜 예민하다면 엄마가 늘 자신의 드높은 도덕적 원칙을 강조하면서도 다른 남자와 부적절한 관계를 갖는다는 사실에서 엄마의 거짓을 눈치챈다. 아이는 모순을 느낀다. 정의와 진리를 바라는 그의 감정이 상처를 입는다. [각주:36]

 

따라서 어떤 주장이 논리적인지의 여부만으로는 그것이 합리화인지 확실히 알 수 없다. 그 사람의 내면에서 작동하는 심리적 동기도 함께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당사자가 무엇을 생각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생각하느냐다. 자신의 적극적 사고에서 나온 생각은 항상 새롭고 독창적이다. [각주:37]

 

그의 자존감은 사랑하고 생각하는 개별 인간으로서의 자기 활동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회, 경제적 역할에서 나온다.

사물이 말을 할 수 있다면 "넌 누구니?"라는 질문에 타자기는 "나는 타자기야."라고 대답할 것이다. 자동차라면 "난 포드야." 혹은 "난 뷰익이야." "난 캐딜락이야."하고 대답할 것이다. 인간에게 "넌 누구니?"라고 물으면 "난 회사원이야." "난 의사야." 혹은 "난 유부남이야." "난 두 아이의 아빠야."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리고 그의 대답은 해당 사물의 대답이 갖게될 의미와 상당히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 이는 스스로를 사랑과 공포와 확신과 의혹을 느끼는 한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사회 시스템에서 특정한 기능을 담당하는 진정한 본성에서 소외된 추상으로서 느끼는 방식이다. [각주:38]

 

무력감을 희미하게 의식은 하면서도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으로 그 뾰족한 가시가 무뎌지는 경우, 무력감을 억압하는 세 번째 반응이 나타난다. 이 경우 무력감은 과보상 행동과 은폐 목적의 합리화로 대체된다. 과보상의 가장 흔한 경우가 분주함이다. 깊은 무력감을 억압한 사람들이 특별히 활동적이고 분주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이 무기력한 인간의 정반대라고 생각할 정도까지 분주하다. 그들은 항상 무슨 일이든 해야 한다. [각주:39]

뜨끔.

지난 내 11월.

 

문제점이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아이를 너무 예뻐하고 응석받이로 키우면서 아이를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 양육 태도 역시 심각하다. 응석받이 아이들은 분명 보살핌과 보호를 받지만 자신의 힘과 자신에게 힘이 있다는 느낌은 마비된 상태나 다름없다. 필요한 것은 전부 넘치도록 얻고, 원하는 모든 것을 바랄 수 있으며, 하고 싶은 모든 말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의 상황은 근본적으로 포로로 붙잡힌 왕자와 같다. [각주:40]

 

얌전하게 말을 잘 들으면 원하는 것을 많이 얻을 수 있지만 그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얻지 못하며, 어른이 개입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부모가 적대적인 모습을 보이고 아이 역시 반항심을 키워 부모로부터 떨어져 나가 독자적인 삶을 시작해야 할 지점에서 부모의 친절이 모든 원칙적 반항심의 발전을 가로막아 아이를 점점 무능하고 무력하게 만든다. 정신분석을 진행하다가 어릴 적 부모가 필요 이상으로 오랫동안 등굣길을 따라다니고 옷 입는 것을 도와주었을 때, 어떤 옷을 입을지, 옷을 많이 겹쳐 입을지 얇게 입을지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었을 때 얼마나 무력한 분노를 느꼈는지 문득 기억을 해내는 경우가 종종 있다. [각주:41]

우리 부모님께 감사했다.

 

다른 사람을 사실대로 본다는 것은 그를 투영 없이, 왜곡 없이 객관적으로 본다는 뜻이며, 이는 투영과 왜곡을 낳는 자기 내부의 신경증적 '악덕'을 극복한다는 의미이다. 내적 현실과 외적 현실을 인식하기 위해 완벽하게 각성한다는 의미이다. 그런 내면의 성숙에 도달한 사람만이, 자신의 투영과 왜곡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는 사람만이 창조적으로 살 것이다. [각주:42]

 

타인에 대한 나의 체험이 있는 그대로의 그를 향하고 나의 응답을 결정하는 것이다.

 

그럴 때 나는 있는 그대로의 상대에게 반응한다. 타인에 대한 나의 체험이 있는 그대로의 그를 향하고 나의 응답을 결정하는 것이다. 나는 머리나 눈이나 귀로 응답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의 내 온 인격으로 응답한다. 내 온몸으로 생각하고 내 가슴으로 본다. 어떤 대상에게 내 안에 존재하는 실제의 힘으로, 그야말로 응답의 능력을 가진 온 힘으로 응답한다면 그 대상은 대상이기를 멈춘다. 나는 그것과 하나가 되어 더 이상 단순한 관찰자가 아니게 된다. 나는 그것의 재판관이 아니다.

이렇게 보고 응답하고 인식하고 인식 대상을 알아보는 감각을 갖추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할까? (진짜 삶의) 첫 번째 조건은 감탄의 능력이다. 아이들은 이 능력을 아직 갖고 있다. 노력을 총동원하여 새로운 세상에서 방향을 찾고 항상 새로운 사물을 붙잡아 알아간다. 당황하고 놀라고 감탄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창조적으로 응답할 수 있다. 하지만 교육과정을 거치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감탄의 능력을 잃는다. 이제 자신은 모르는 것이 없으며, 감탄은 무지의 증거라고 생각한다. 세상은 더 이상 기적으로 가득하지 않고 사람들은 세상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감탄의 능력이야말로 예술과 학문의 모든 창조적 결과를 낳는 조건이다. [각주:43]

감탄의 능력.

감탄이라 칭하지만 전반적인 감정을 아우르는 것 같다. 놀라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오래되진 않았지만 살다보니, 어느 특정한 감정만 잘 배설하는 사람이 있더라..

 

(진짜 삶의) 두 번째 조건은 집중력이다. 서구 문화에서는 희귀한 것이다. 우리는 늘 분주하지만 집중하지 못한다.

다섯 가지 일을 동시에 하면서 그 어떤 일도 제대로 하지 않는다. 여기서 '아무것도 안 한다'는 말은 그 일이 우리 자신의 표현이 아니라는 뜻이다. 진정으로 집중을 할 때는 지금 이 순간에 하는 일이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다. 어떤 사람과 이야리를 나누건, 어떤 글을 읽건, 산책을 하건, 이 모든 일을 집중해서 한다면 나에게는 지금 여기서 내가 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과거나 미래에서 산다. 하지만 실제 경험으로서의 과거나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여기만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인식과 응답은 여기 지금에서만 존재한다. 지금 이 순간 하고 보고 느끼는 것에 전념한다면 말이다. [각주:44]

 

그는 자신이 생각한다고 상상하지만 사실은 '그것이 내 안에서 생각한다'는 표현이 더 옳을 것이다. 그는 레코드플에이어와 같은 착각을 한다. 생각을 할 줄 안다면 레코드플레이어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지금 모차르트의 심포니를 연주해." 하지만 우리 모두는 우리가 레코드판을 턴테이블에 걸었고 그것이 자기 안에 녹음된 음악을 그저 재생할 뿐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각주:45]

 

하지만 자신의 자기와 자아를 진정으로 느끼는 사람은 스스로를 자기 세계의 중심으로, 자기 행동의 진짜 장본인으로 경험한다. 그것이 바로 내가 말하는 독창성이다. 내가 말하는 독창성은 새로운 발견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기원을 두는 경험이다. [각주:46]

 

이런 공포와 순응의 강박은 나 자신을 창의적인 내 행위의 장본인으로 느끼는 '자아' 감정을 키워야만 극복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말이 결코 자기중심적이거나 이기적이 되라는 의미는 아니다. 정반대로 나는 나를 타인과의 관계의 과정에서만 '나'로 느낄 수 있다. [각주:47]

 

우리는 인간종이 누리거나 언젠가 누리게 될 모든 가능성을 대변하지만 짧은 생애 동안 이 가능성 중에서 미미하게 작은 부분밖에는 실현하지 못한다. [각주:48]

인간종이 누리거나 언젠가 누리게 될 모든 가능성을 대변.

ㅠㅠㅠㅠㅠㅠㅠ이렇게 멋있고 맛있는 말이라뇨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진짜 삶을 산다는 것은) 매일 새롭게 태어날 준비를 하는 것이다. 실제로 탄생은 아이가 태아로 존재하기를 포기하고 스스로 숨 쉬기 시작할 때 일어나는 단 한 번의 과정이 아니다. [각주:49]

 

인간은 인간 고유의 이분의 지배를 받는다. 인간은 안전을 의미하는 과거 상태의 포기를 두려워하지만 자신의 힘을 더 자유롭게, 더 완전히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하는 새로운 상태에 도달하고자 한다. 인간은 자궁으로 돌아가고 싶은 소망과 완전히 새로 태어나고 싶은 소망 사이를 항상 이리저리 오간다. 모든 탄생의 행위는 용기를 필요로 한다. 놓아버릴 용기, 자궁을 포기하고 엄마의 가슴과 품을 떠나며 엄마의 손을 놓고 마침내 모든 안전을 버리고 단 하나, 즉 사물을 실제로 인식하고 그것에 응답하는 자신의 힘만을 믿는 용기를 필요로 한다.

태어날 준비 -모든 안전과 착각을 포기할 준비-는 용기와 믿음을 필요로 한다. 안전을 포기할 용기, 타인과 달라지겠다는 용기, 고립을 참고 견디겠다는 용기다.

사고와 감정에서 자기 경험의 현실성을 확신하고 믿고 신뢰할 수 있는 것이 믿음이다.[각주: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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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당장 그 소나타가 나를 부르는데 열여섯 살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할 이유가 무엇이라는 말인가? 음악에는 나이가 없다. 마음과 정신의 성숙함은 달력의 햇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각주:1]

 

청중은 모든 시간을 가지고 너에게 귀를 기울이고 있다. 여유를 가져라! 네 앞에 영원의 시간이 있으니! 너 자신을 마음껏 표현하라! 네가 원하는 대로 음악을 지휘하라! 연주하는 사람은 너니까 너 자신의 주인이 되어라. 너만의 고유한 소리, 너만의 고유한 음악성을 창조하라. 현재를 살라, 앞으로의 시간을 미리 생각하지 말라! 그러기 위해서는 온 힘을 다해서 연습해야 한다! 외적이 아닌 내적으로 표현하라. 외적으로 표현할 경우 건방지고 경박한, 즉 우스꽝스러운 음악이 되고 말 위험성이 있다! [각주:2]

음악을 수업으로 바꾸어본다면?

사실 엄청난 것이었다. 내 앞에는 모든 학생들이 자신의 모든 시간을 가지고 내게 귀를 기울이고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그때 그가 나에게 베풀어준 것은 단순히 한 번 연주하는 기회만이 아니었다. 그는 나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나의 직관을 따라야 하며, 나 자신에게 최대한 충실하고 솔직하게 다가가야 한다는 신념을 확인시켜주었다. 그가 내게 준 것은 새로운 희망이었다.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내가 솔직하게 들려주고 드러냄으로써 이해받을 수 있다는 희망이었다. [각주:3]

나의 직관을 믿기.

경험적으로 말해보건대 정말 나의 직관이란 것은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무서우리만큼 예리한 것이 자신에 대한 자신의 직관.

 

우리들 눈에 보이지 않는 온전하고 완전한 정의는 존재하기 마련이다. 진정한 마음을 보호해주는 법 위의 법. [각주:4]

진정한 마음을 보호해주는 법 위의 법.

내가 막연히 하던 생각을 이렇게 예쁘게 표현한 부분을 보면 너무너무 신난다. 반갑고.

 

그 장소에 나를 응원하는 사람이라고는 한 명도 없었다. 그러나 다른 참가자들과 동행한 부모들이 자신들의 신동 자녀들에게 불어넣는 어마어마한 긴장감을 관찰 중인 나에게 이런 부재는 오히려 그곳이 편안히 숨 쉬는 공간이 되도록 작용했다. [각주:5]

 

오랜 꿈을 이루었는데도 나의 목마름은 여전했다. 그 사실을 막 알아차렸고, 그것은 나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그렇다면 나의 진정한 꿈은 무엇이란 말인가? 갈증을 궁극적으로 해소해줄 샘으로 나를 이끌어줄 꿈은 도대체 무엇일까? [각주:6]

나만이 하는 고민이 아닌 것.

ㅜ_ㅜ 하물며 임현정 피아니스트도 이런데, 나는 오죽했으랴. 가끔 사고실험으로 해보는 '내게 써도 써도 줄지 않는 돈이 생긴다면?'은 이러한 고민에 꽤 도움되는 결론을 준다.

 

나도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육체는 하나의 옷에 불과하며, 죽을 때는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한다는 것을. 내가 아무리 재산이 많다고 해도 그것을 저세상에 가져갈 수 있는가? 나에게는 오히려 영원히 지속되는, 저 세상에서도, 그 어디에서도 함께하는 나의 영원한 본질을 풍성하게 키우는 것이 진정으로 지혜롭고 온당한 것이었다. 내면의 본질적인 아름다움, 보이지 않는 섬세한 아름다움의 영원한 재산. 나는 그 재산을 끊임없이 늘리고 싶었다. [각주:7]

나도 같은 생각. 그치만 임현정씨는 무려 16살에 이런 생각을 했다. 정말 나이는 숫자에 불과할 뿐임.

나도 그 재산을 끊임없이 늘리고 싶다.

 

어느 날 한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소말리아에서 기근으로 죽어가는 아이들에 대해서 나에게 한 말이 기억난다. 그자에 따르면, 그런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은 아무 짝에도 소용이 없단다. 왜냐하면 어차피 그 아이들은 "아무것"도 되지 못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란다. 그런데, 모든 것을 손에 넣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그자야말로, 그런 식으로 그렇게 이야기하는 그자야말로 자기 자신이 말한 그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어버린 것이 아닐까? [각주:8]

 

자아의 소멸은 그 자체로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자아는 환상 속에서 삽니다. 다른 것들로부터 분리된 채 소유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산다는 말이죠. 모든 괴로움과 원망이 거기에서 비롯됩니다. 자아는 스스로를 독립적이라고, 자신의 힘만으로 살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나무들과 마찬가지로 산소와 햇빛, 바람, 흙 등 여러 가지 요소들이 필요합니다. 제 아무리 영리한 사람이라도 혼자서는 살 수 없습니다. 이런 자아-이렇게 보잘것 없는 소자아-를 버림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모든 것과 하나 된 큰 나'를 만나게 됩니다. 어린아이들이 쓰는 말로 하자면 이런 식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두가 나'라고 말입니다. [각주:9]

임용때 공부했던 대아(大我)와 소아(小我)를 여기서 만나다니.

이 책을 읽으면서 불교 경전들을 읽고 필사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앙리 바르다 교수님께서 하신 말을 다시 되새기며 더욱 당당하게 나아갔다.

"넌 열다섯 살이 아니라, 3000살이야, 3000살!"[각주:10]

참 좋다. 제 나이가 아닌 사람. 나도 더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해야지.

 

실패란 존재하지 않는다. 또다른 한 번의 경험을 쌓았을 뿐이고 한 번 더 반복했을 뿐이다. 그리고 오로지 반복이 부족했음을 발견한 위대한 순간이다. 언제나 다시 하면 더 나아지는 법, 포기하지 않는데 어떻게 실패가 존재한단 말인가.[각주:11]

 

내가 그를 바라보고 있는 이곳까지 그 사람의 광대한 내면이 전해졌다. 아무도 모르게 세상을 주유하는 요기같다고 할까. 평범한 인간들의 "고만고만한 공통의 관심사"에서 저만치 비껴서 살고 있는 자유로운 존재라고 할까. [각주:12]

 

퀸 엘리자베스 뮤직채플에서 전개되는 나의 삶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늘 나를 따라다니던 두려움과 불안을 잊어버리고 처음으로 나는 경계심을 내려놓았다. 음악은 아주 까다롭고 절대적인 예술이며, 영감이란 오직 자신의 모든 것을 전적으로 투자하는 자에게만 허용된다는 그 엄중한 진실을 잠시 제쳐두었다. 일종의 편안함이랄까, 하여간 물질적으로나 음악적으로나 어느 정도의 안락함을 즐기면서 그냥 사람들이 나에게 하라고 하는 것을 열심히 했다. 독자성, 그리고 나 자신이 그토록 악착같이 지켜왔던 정신의 독립을 손에 넣기는 어렵지만 잃어버리는 것은 순식간이라는 사실을 아직 난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각주:13]

 

"예술은 사랑이다, 예술은 사랑이다, 예술은 사랑이다..." 나는 이 문장을 세상 사람 모두와 공유하기 위하여 만트라처럼 거듭 되뇌인다. 다시 한번 나는 나의 선택이 옳았음을 확인했다. 나의 본능을, 나의 기질을 따르리라, 그래서 아주 멀리 가리라. [각주:14]

서로 사랑하는 도덕 이라고 내가 내 수업에 붙인 이유

사랑은 정말 정말 크고 위대하다. 모든 것을 품는 것.

 

"어린아이들에게 너무 많은 가르침을 주려는 것은 그 아이들을 빨리 자라라고 억지로 잡아당기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따뜻한 격려가 회초리보다 훨씬 효과적이다. 당신의 아이들에게 절대로 바보라는 말 따위는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말은 긍정적이고 평온한 표정보다 결코 나을 것이 없다"라고 16세기 한국 문필가 퇴계 이황이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믿는다. [각주:15]

문득 교실에서 아이들은 수행평가를 하고, 나는 이 부분을 읽고 있는데 '안전한 교실'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내가 앉아있음으로써 아이들이 안전함을 느끼고 안정됨을 느낀다면, 내가 우리 집에서 우리 부모님 아래에서 느꼈듯이, 그거면 내 소임을 다한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으로 든 생각. 그 안전과 안정 속에서 나는 크고 넓게 자랄 수 있었으니까.

 

열두 살에 한국을 떠나 프랑스로 갔을 때, 자유롭다는 것은 곧 파리 국립고등음악원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했다. 지금은 오직 하나의 자유만이 있다. 바로 내면의 자유이다. 내가 음악을 통해서 찾고자 하는 자유도 그것이다. 이렇듯 나의 추구는 완성되기는 커녕 이제 겨우 시작 단계이다. [각주:16]

이 책을 관통하는 메시지 "자유"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스승님에게 물어보았다.

"진정한 행복은 그 어떤 외부조건에도 상관없이 지금 여기 내 마음이 행복으로 가득 차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나 아닌 것이 없으면 내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깨닫는 순간 이 세상 모든 것과 나는 하나가 됩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모두가 행복할 수 있으려면 내가 진정으로 행복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지요. 내가 행복으로 충만되어 있어야만 다른 이에게 행복을 줄 수 있는 것이지요."[각주:17]

 

스승님은 또 우리가 도와준 덕분에 산다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냉철하게 우리의 삶을 한번 관찰해보라고 하셨다. 즉 자기 자신이 했다고 뽐낼 수 있는 비율은 우리의 삶에서 고작 5퍼센트도 안 된다는 것이다. 스승님은 우리가 95퍼센트 이상은 도움을 받아 살아가는 것을 깨닫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일깨워주셨다. 그때 우리는 "내가 했다, 내가 한다"라고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덕분에 했습니다, 덕분에 합니다"라는 관점으로 바뀌게 된다고 하셨다.

피아니스트로서 생각을 해보자.

어린 시절에 누가 나를 응원했는가?

누가 나를 믿었던가?

무대까지 누가 피아노를 옮기는가?

누가 그 피아노를 만드는가?

누가 연주회를 조직하는가?

누가 음반을 제작하는가?

누가 그 음반들을 듣는가?

누가 음악회장을 찾는가? 누가?

그렇다. 연주자로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내 덕분"이 아닌 "모든 이들의 덕분"이다. [각주: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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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교수로서 하는 이은 가르치는 일이 아니라 배우는 일이다. 정확히 가르치기 위해서는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 되니까 이 직업의 본령은 차라리 배움에 가깝다. 내가 재직 중인 조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학생들에게 배우며 이 글들을 썼다. 내가 제자로 살 때는 선생이 제자를 사랑한다는 말이 거짓말인 줄 알았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게 됐다. [각주:1]

수업을 하는 건 나지만, 늘 배우는 쪽은 오히려 나다. 교사로서 나도 끄덕일 수밖에 없던 곳.

 

 


슬픔에 대한 공부 - 슬픔

 

피해자는 자신이 얼마나 아픈지를 그 양과 질 그대로 알아야 할 사람이 있다면 그게 바로 가해자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가해자 본인의 자발적 역량만으로는 그런 결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가해자의 성품과 노력의 차이는 결과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근원적 무능력, 즉 '타인의 슬픔을 똑같이 느낄 수 없음'이라고 요약될 그것과 관계하는 사태이기 때문이다. 이 점을 고통스럽게 절감할 때 피해자는 가해자를 교육하여 그로 하여금 제 무능력을 뛰어넘게 만들고 싶다는 강렬한 교육열을 느끼게 될 것이다. [각주:2]

인간의 근원적 무능력..

 

"우리가 스스로 야기한 상처에 대해서는 아무런 동정심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야기하지 않은 고통 앞에서는 울 수 있어도 자신이 야기한 상처 앞에서는 목석같이 굴 것이다."(사이먼 메이, <사랑의 탄생>, 문학동네, 2016, 292) 이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자신이 원인을 제공한 슬픔에 더 깊이 공감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행동한다. 이 경우 타인의 슬픔은 내가 어떤 도덕적 자기만족을 느끼며 공감을 시도할 만한 그런 감정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추궁하고 심문하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 슬픔은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 나를 불편하게 할 것이다.[각주:3]

정말 읽으면서 소름돋는 대목이었다. 인간의 민낯을 이렇게 여과없이 알려줘도 되는걸까?

이어서 떠오르는 나의 경험들, 그리고 내가 겪은 상황들.

 

아가멤논과 스티븐과 우리 사이에는 단 하나의 결정적인 공통점이 있어 다른 많은 차이점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자신을 유지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한, 하나의 생명체라는 것. 이것은 거부할 수도 박살낼 수도 없는 인간의 조건이다. <킬링 디어>가 엄밀한 의미에서 '비극'인 것은 이 인간 조건의 비극성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특정한 결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바로 결함이라는 것. 그러므로 인간이 배울 만한 가장 소중한 것과 인간이 배우기 가장 어려운 것은 정확히 같다. 그것은 바로 타인의 슬픔이다. [각주:4]

 

논리를 갖다 댈 영역이 아니라는 느낌 때문이었다. 이 세상의 슬픔 중에서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 것은 많지 않겠으나, 그런 논리들이 그 슬픔에 '위로'가 되지는 못할 것이다. [각주:5]

 

결론을 당겨 말하자면 이렇다. 어떤 책이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으려면 그 작품이 그 누군가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담고 있어야 한다는 것. 위로는 단지 뜨거운 인간애와 따뜻한 제스처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 나를 위로할 수는 없다. 더 과감히 말하면, 위로받는다는 것은 이해받는다는 것이고, 이해란 곧 정확한 인식과 다른 것이 아니므로, 위로란 곧 인식이며 인식이 곧 위로다. 정확히 인식한 책만 정확히 위로할 수 있다. [각주:6]

이 작가님, 정말 꼭꼭 씹어서 주신다. 너무 감사한 분. 이런 분의 책을 읽으면 정말로 행복해진다. "이 책 아껴서 읽는 중이야"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이 달에만 해도 몇 번을 한 말이기도 하다. 또 몇 번을 추천한 책이기도 하고.

 

제대로 아는 사람만이 '제대로 앎' 그 자체로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다. 두 저자가 연출자이고 작가이기 때문에 특별히 슬픔에 대해 연구했으리라. 모르는 것을 표현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각주:7]

 

"순수한 휴식은 슬픔의 고통을 치료해주는 가장 효과적인 치료제다. 그러나 슬퍼하는 사람이 참 하기 어려운 것 가운데 하나도 휴식이다."(<슬픔의 위안>, 김명숙, 현암사, 161) 휴식이 왜 어려운가. 저자들은 "슬픔이 원기를 고갈시키는 것처럼, 좋은 감정 역시 에너지를 무척이나 소진시킨다는 점(165)을 지적한다. 많은 사람들이 내게 와서 따뜻한 위로를 건넨다. 그것은 고마운 일이므로 나는 좋은 감정으로 응대한다. 그러나 그 응대는 그 자체로 나의 감정적 자원을 크게 소모시키는 일이다. 그런 일들이 피곤하다고 느껴지면 고마워할 줄 모르는 나 자신에게 마음이 불편해져서 그것이 또 나를 갉아먹는다.

(중략)

저자들은 이렇게 말을 잇는다. 슬픔에 빠져 있지만 말고 외출도 하고 사람도 만나라고 말하는 이들의 헛소리에 신경 쓰지 말라고. 당신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그저 아무 일도 안 하고 쉬는 것일 뿐이라고. 집안일도 남에게 맡겨버리고 필요하면 수면제도 먹으라고. 수면제 대신 캐머마일 차를 드셔보시라고 말하는 친척의 말은 샌드위치 그만 먹고 도장이나 핥으라는 말과 같으니 과감히 무시하라고. 함게 기도해주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이렇게 말하라고. "기도는 제가 직접 할 테니 설거지나 좀 해주시겠어요?"(168) 이쯤 되면, 정확히 알지 못하면 제대로 위로할 수 없다는 말이 무엇인지 실감할 수 있지 않은가. 문학에서도 그렇고 인생에서도 그렇다.[각주:8]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기도는 제가 직접 할 테니 설거지내 해주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이렇게나 쿨하고 멋질 일이냐구 정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트라우마라는 말의 가장 오래된 뿌리는 '뚫다'라는 듯의 그리스어다. 트라우마에 의해 인간은 꿰뚫린다. 정신분석 사전은 그 꿰뚫림의 순간을 구성하는 요소들로 충격의 강렬함, 주체의 무능력, 효과의 지속성 등을 들고 있다. 그러나 이런 설명으로는 실감이 발생하지 않는다. 그래서 언젠가 다음과 같은 설명을 들었을 때에야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아주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트라우마에 관한 한 우리는 주체가 아니라, 대상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나는 트라우마를...'이라는 문장은 애초에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직 '트라우마는 나를...'이라고 겨우 쓸 수 있을 뿐이다.

한 인간이 어떤 과거에 대해 '주체'가 아니라 '대상'이 되어버리는 이런 고통이 얼마나 참혹한 것인지 당사자가 아닌 이들은 짐작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 많이 공부하고 더 열심히 상상해야 하리라.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대상으로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잊는다. 그걸 잊은 사람들이 그들에게 말한다. 이제는 정신을 차릴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더 이상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지 말라고. 이런 말은 지금 대상으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주체가 될 것을, 심지어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주체가 될 것을 요구하는 말이다. 당신의 고통이 나를 불편하게 한다는 말은 얼마나 잔인한가. 우리가 그렇게 잔인하다.

며칠 전 광주트라우마 센터의 초대를 받아 강연을 했다.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감히 수락한 것은, 내가 부족한 사람임을 인정하고 물러서는 것으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상처와 위로'에 대해 요즘 내가 어떤 공부를 하고 있는지를 말하기 위해 갔다. 강연 중에 '문학은 나태한 정신을 고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상처 입은 마음을 위로 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내용의 말을 하다가 잠시 주춤했다. 누군가에게는 아직도 살아 있는 현실인 '고문'을 비유로 사용하는 일은 이제 그만두어야겠다는 생각을 그 순간 처음으로 했다. 계속 공부해야 한다. 누군가의 터널 속 어둠의 일부가 되지 않기 위해서. [각주:9]

정말 계속 공부해야 한다. 계속 고민해야 하고, 계속 상상해야 한다. 내가 알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 내가 알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모르는 것이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므로.

계속 공부해야한다고 말씀해주셔서 이 교수님이 너무 좋다. ㅠㅠㅠㅠㅠㅠㅠㅠ정말 좋다. 한 번도 뵌적 없지만, 너무 좋다 ㅠㅠㅠㅠㅠㅠㅠ나도 수업듣고 싶어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교수님의 학생이 되고 싶어요...힝

 

이제 그는 한번 알게 되면 다시는 원상태로 돌아갈 수 없는 한 가지 비밀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가장 완벽한 사랑의 경우에서조차 한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덜 깊게 사랑한다는 사실이었다. 똑같이 착한, 똑같이 재능을 타고난, 똑같이 아름다운 두 사람이 있을 수는 있지만, 상대를 똑같이 사랑하는 두 사람은 있을 수 없다.(손턴 와일더,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 샘터, 2010, 97)[각주:10]

 

그 안간힘의 본질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사건은, 그것을 감당해낸 사람만을, 바꾼다. 한수는 제가 저지른 일에서 도망쳐버리고 말았지만, 혜화는 스스로 아이를 낳았고 또 잃었다. 이런 종류의 사건이 한 사람을 어떻게 또 얼마나 변화시키는지,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다 알 수 없으리라. 혜화는 생명의 귀함을 제 육체로 실감하는 사람, 생명의 버려짐을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병들거나 버려진 개를 위해 살기, 그것이 혜화의 두 번째 삶이 되었다. [각주:11]

 

그러므로 한수가 혜화 앞에 다시 나타난 것이 그 자신에게는 나름대로 최소한의 자격과 명분을 갖춘 것으로서 필연적이고 필요한 일이었겠으나 혜화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일단 혜화가 그동안 느낀 절망감과 배신감이 해소되지 않은 데다가, 그 감정을 억누르고 겨우 뿌리내린 삶이 다시 뿌리부터 흔들리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혜화 쪽에서도 그에 상응하는 동기가 마련되지 않는다면 한수의 기도는 제 죄책감을 해소하려는 일방적이고 이기적인 한풀이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만다. [각주:12]

 

이 장면에서 이 영화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닥쳐오는 슬픈 일을 미리 알고 막아낼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그 슬픔을 어떻게 겪어내느냐에 있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한수가 혜화에게 준 가장 큰 상처는, 그가 끝내 그의 모친을 설득하지 못한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혜화가 가장 고통스러울 때 그의 곁에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두 사람이 다시 만나 해야 할 일은, 그들이 함게 만든 아이를 혜화 혼자 떠나보내야 했던 그 순간을 재연해서, 이번에는 함께 그 아이를 떠나보내는 일이다. 그러니까 그들에게 필요한 일은 아이를 '다시 찾는'일이 아니라 아이를 '다시 잃는' 일이었다. [각주:13]

 

상처와 고통의 양을 저울 위에 올려놓는 일이 비정한 일인 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비정한 일은, 네가 아픈 만큼 나도 아프다고, 그러니 누가 더 아프고 덜 아픈지를 따지지 말자고 말하는 일일 것이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실제로 덜 아픈 사람이다. 지배하는 사랑과 미성숙한 사랑의 공통점 중 하나는 저울을 사용할 줄 모르거나 사용하지 않으려 하는 데 있다. [각주:14]

 

우리가 흔히 삶의 진실이라고 부르는 것은 저 인생의 얼굴에 스치는 순간의 표정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 표정을, 어떻게 말로 표현하나. 행복한 가족의 어느 가장이 아내에게 한마디 말도 없이 문득 자살을 감행할 수도 있는 게 삶이라는 것을, 어떻게 설명하나. 그냥 보여줄 수밖에. 그 남자의 뒷모습만을 하염없이 보여줄 수밖에. 비트겐슈타인이 말했다. "세계가 어떻게 있느냐가 신비스러운 것이 아니라 세계가 있다는 것이 신비스러운 것이다."<논리철학논고>(1921)의 후반부다. [각주:15]

 

중년 웨이터는 젊은 동료를 부드랍게 나무라며 그와는 다른 태도를 취한다. "나는 카페에 밤늦게까지 머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 편이야."(<깨끗하고 불빛 환한 곳>, 어니스트 헤밍웨이, 240쪽) 이윽고 노인은 떠나고 젊은이는 서둘러 퇴근한다.[각주:16]

나도 좋아! 카페에서 밤늦게까지 머물기 좋아.

이렇게 밤늦게 까지 카페에서 따뜻한 커피 마시며 머무는 생각을 떠올리면, 대학생때 자주가던 카페 노리가 떠오른다. 노랑 불빛 만연한 그곳은 (당시에 내가 생각했던 촌스러운 청주라는) 세계와 단절된 다른 세상이었다. 가장 서울스러움을 대변해주는 곳이었으니까. 그곳에서 보낸 시간들은 아직까지도 충만한 기억으로 내 어딘가에 남아있다. 고마운 곳, 시간들.

 

"나는 사랑이 안으로 침입하는 것인지 밖으로 터져 나오는 것인지조차도 아직 알지 못한다." 사랑은 바이러스처럼 침입해서 나를 점령해버리는 것인가, 아니면 죄수처럼 갇혀 있다가 나라는 감옥을 뚫고 나오는 것인가. [각주:17]

 

달콤한 고통이 무엇인지를 꿈과 잠의 주체인 우리는 안다. 꿈과 잠에 비유해본다면, 그녀의 문장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한없이 눈물을 흘리다가 탈진한 상태로 깨어나서는 한참을 더 울게 되는 그런 꿈이고, 탈진한 상태로 깨어나서 한참을 더 울다가 사랑하는 사람의 품에 안겨 그 슬픔이 달콤한 안도감으로 서서히 바뀌는 것을 느끼는 순간 다시 찾아오는 그런 잠이다. [각주:18]

한참을 바라본 부분. 어떻게 '달콤한 고통'을 이렇게 표현할 수가 있지?

 

우리는 특정한 순간에만 슬픈 것이 아니라 사실은 대체로 슬프기 때문이 아닌가. 인간은 본래 슬픈 짐승이고 우리는 모두 슬픔의 식민지가 아닌가. [각주:19]

인간은 본래 슬픈 짐승. 대체로 우리는 슬프다.

 

돌아보지 말라고 하면 결국 돌아보게 된다. 이 모티프가 구약의 창세기에서 한국의 민담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발견되는 것은 이 설정이 욕망의 본질(금지가 있는 곳에 위반이 있다)을 드러내는 효과적인 장치이기 때문일 것이다. [각주:20]

 

오르페우스 신화가 비극적인 것은 이것이 사랑하는 연인을 제 손으로 한 번 더 죽인 사람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별의 순간에 연인은 나를 떠남으로써 내게서 한 번 죽는다. 그런데 더 사랑하는 사람은 더 사랑하는 사람의 위치에 서있기 때문에 이별의 순간에 상대방을 질리게 만들 수 있다. 죽은 연인을 살리려는 노력이 외려 그를 한 번 더 죽이게 되는 경우다. 이 경우 떠난 것은 너이지만, 네가 돌아올 수 없게 만든 것은 내가 되고 만다. [각주:21]

 

세상에는 참지 않는 사람들이 있고 참아내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서로 역할을 바꾸는 경우는 거의 없다. 불공평한 일이다. 참지 않는 사람들은 늘 안 참고, 참는 사람들은 늘 참는다. 참지 않는 사람들은 못 참겠다고 말하면서 안 참는다. 그들에게는 늘 '참을 수 없는' 이유가 있다. 그러나 참는 사람들은 그냥 참는다. 그들이 참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봐주고 염려해주는 사람도 없다. [각주:22]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맞아. 아유 못참겠어! 라고 말하면서 안 참지. 읽으면서 웃었던 부분.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당신이 늘 울음을 참아왔으므로 당신과 비슷한 사람을 알아본 것이다. 당신은 보이지도 않는 그 사람의 성대를 들여다보고 있다. 왜 성대인가. 눈물은 눈에서 흐르지만 울음은 목구멍에서 치솟는다. 그래서 울음 참는 일이 '울음을 삼킨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각주:23]

 

다음 시를 보니, 당신은 참을 수 없다고 말하는 또 다른 당신의 말조차 못 들은 척했다. 왜 그 말을, 잘 듣는(effect) 약이 대신 들어야(listen) 하나. 왜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만 말하나. [각주:24]

캬.. 진짜 맛있는 글이다 정말. 이렇게 대구마저 잘 할 일입니까!!!!!!!! 증맬루 교수님 너무 므찌자나요!!!!!!!!!!!!!!!!!!!!!!!!!!!!!!!!!!!!!!!!

 

그러니 이 시는 결국 "그 젊은이는 천진하게 여자에게 웃었다"와 "여자는 그 젊은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라는 두 문장으로 요약된다. 아니, 더 짧게는, "천진하게"와 "물끄러미"의 어긋남에 모든 게 들어 있다. 사내가 창피해했거나 화를 냈거나 혹은 허세라도 부렸다면, 그녀는 희망을 가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사내는 "천진하게" 웃었다. 그녀는 깨달았을 것이다. 이 사내는 바뀌지 않겠구나, 나는 이 천진함을 견디지 못하겠구나, 결국 이 사내를 미워하게 되겠구나. 그러니 그녀의 "물끄러미" 안에는 또 얼마나 많은 슬픔이 있었을까. [각주:25]

 

어떤 자리이건 어떤 장르이건 능란하게 소화해내는 이가 프로일 것이지만, '할 수 없는 것은 할 수 없다'고 말하는 이는 예술가일 것이다. 존재의 필연성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들 말이다. 그들은 말한다. '난 그런 것은 할 수 없어요. 어제는 할 수 있었을 거예요. 내일도 혹시 가능할지 모르겠군요. 그러나 지금은, 지금은 도저히 할 수 없습니다.'[각주:26]

 

그의 고통은 수다스럽지 않다. 진정한 고통은 침묵의 형식으로 현존한다. 고통스러운 사람은 고통스럽다고 말할 힘이 없을 것이다. 없는 고통을 불러들여야 할 때 어떤 가수들은 울부짖고 칭얼댄다. 그는 그럴 필요가 너무 없다. [각주:27]

 

자신의 진실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 채 규정되는 모든 존재들은 억울하다. 이 억울함이 벌써 폭력의 결과다. '폭력'의 외연은 가급적 넓히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이런 정의를 시도해본다. '폭력이란? 어떤 사람/사건의 진실에 최대한 섬세해지려는 노력을 포기하는 데서 만족을 얻는 모든 태도.'[각주:28]

섬세해지려는 노력을 포기하는 데서 만족감을 얻는 모든 태도. 폭력의 사전적 정의가 아닐지라도, 정말 좋다. 내년에 폭력 수업을 하게 되면 이렇게 말해주어야지! 출처를 밝히고!

 

"그 이중성 자체가 학대받은 아이들의 특징이에요." 이 말은 나를 흔들어놓았다. 그와 동시에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학대받은 아이들에 대해서, 나는 잘 모르고, 그 학생은 안다는 것. [각주:29]

 

"저는 불판 위에서 구워지는 고기를 보는 일도 힘겨울 때가 있어요." 바로 이런 사람이기 때문에 오히려 그 소설을 쓸 수 있었으리라. 이것은 '폭력에 대한 감수성'의 문제다. 이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더 민감해져도 좋다고 나는 생각한다. [각주:30]

 

 


삶이 진실에 베일 때 - 소설

 

어딘가에 단편소설은 삶을 가로지르는 미세한 파열의 선 하나를 발견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고 썼었다. 삶의 어딘가에 금이 가고 있는데 인물들은 그것을 모른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고 나서야 그들은 파열을 깨닫는다. [각주:31]

 

내가 타인을 보는 곳 말고 타인이 나를 보는 곳으로 가기, 거기서 내 눈을 버리고 타인의 눈을 얻기, 그리고 마침내 그 타인의 눈으로 나를 보게 되기. [각주:32]

 

나도 따라 울었다. 이별은 슬픈 것이니까. 나의 눈물에 거짓은 없었다. 그러나 졸업식 날 아무리 서럽게 우는 아이도 학교에 그냥 남아 있고 싶어 우는 건 아니다.(<그림움을 위하여>, 문학동네, 2013, 76)[각주:33]

 

화자는 커피숍에서 젊은이들을 바라보며 이토록 솔직하게 질투하고 또 연민한다. 노인이 재현의 대상이 되는 일도 드물지만 그들이 재현의 주체가 되는 일은 더더욱 드물다. 아무래도 재현의 권력은 젊은이들에게 있으니까. 그런 환경에 익숙해져서일까, 가끔 젊은이들은 노인에게는 마치 내면이라는 것이 없다는 듯 행동할 때가 있다. 선생의 소설에는 재현 권력의 통쾌한 역전이 있다. 덕분에 알게 된다. 온 세상이 죄다 젊은이들만을 위한 '멍석'인 세상에서 노년의 내면은 제대로 주목받지도 이해되지도 못했다는 사실을, 재현의 장에서 노인들은 눈과 입을 모두 빼앗겼다는 사실을. [각주:34]

그래서 정말 가끔은 많이 무섭다. 내가 더이상 젊은이가 아닐까봐. 현명하지 못한 걱정인 건 알지만 그래도 때때로 나를 찾아오는 두려움.

 

"창부는 격정의 와중에서도 냉정하고, 언제나 자기가 도발시킨 쾌락의 초연한 관객이며, 남들이 황홀해서 도취에 빠질 때에도 그녀는 고독과 냉담을 느낀다. 요컨대 창부는 예술가의 쌍둥이인 것이다."(<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창비, 1996, 226) 그들은 이런 태도에서 '정신의 귀족주의'를 발견했고 바로 그것에서 따분한 삶의 탈출구를 찾았다. [각주:35]

 

유다를 지배한 것은 '탐욕'이 아니라 '금욕'이라고, 선행과 행복은 신의 것이지 인간의 것이 아니라는 것, 그래서 신의 영광을 드높이기 위해 유다는 스스로 추락했다는 것. 무한한 금욕의 정신으로 천국을 포기하고 지옥으로 갔다는 것. [각주:36]

 

유다의 행위가 '신뢰의 궁극적 형태로서의 배반'이라고 말한다. 어떤 이가 공적 영웅이 되려면 누군가의 배반이 필요한 경우가 있다는 것, 그럴 때는 그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만이 기꺼이 그를 배반할 수 있다는 것. 그렇다면 유다는, 가장 사랑하는 대상을 배반해야만 그 사랑을 완성할 수 있는 상황에 처했던, 비극적인 인물이다. 물론 신학적으로는 터무니없는 오독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문학은 이 오독의 빛에 의지해 인간이라는 심해로 내려간다. [각주:37]

 

소설에서 음악이 흐른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가. 노래는 거기 그대로 있는데 삶에는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 사랑은 식고 재능은 사라지고 희망은 흩어진다. 삶의 그런 균열들 사이로 음악이 흐를 때, 변함없는 음악은 변함 많은 인생을 더욱 아프게 한다. 이 세상을 흐르는 음악이, 흐르면서, 인생을 관찰하는 이야기. 그러니까 인물들이 음악을 듣는 것이 아니라 음악이 인물들의 얘기를 듣는 이야기. 인생은 짧고 음악은 길다. [각주:38]

 

저는 모국어에 갇혀 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역설적이게도 그것이 바로 갇혀 있는 자의 생각이었군요. 세상에는 해답을 알기 전에는 문제가 뭔지조차 알 수 없는 종류의 일이 있습니다. [각주:39]

 

이런 얘기는 좀 쓸쓸하지만 그래도 해볼까. 우리가 어떤 소설을 읽다가 내려놓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독자 각자가 소설에 기대하는 최소한의 어떤 것이 책의 뒷부분에서도 제공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되는 그 순간에 책을 내려놓겠지. [각주:40]

그래서 내가 ㅠㅠ 읽다 만 책이 있다. 정말 슬프게도 경선님의 책이라니. ㅠㅠ 아직 2/3쯤 읽었는데 너무 암울하기만 하다유ㅠㅠㅠㅠㅎ우어어엉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비판적 자각이 정도 이상으로 축적되면, 이라고 소설은 답한다. 여기가 핵심이다. 철거민들이 죽어나가고 동물들이 살육되는 세계에서 죄의식 없이 살려면? 첫째 아무 자각 없이 살아서 분리를 모면하거나, 둘째 분리되더라도 더 윤리적인 쪽을 죽여라. 독한 전언이다. [각주:41]

 

경쾌하게 현대성의 디테일들을 연구한다. 이번에는 영수증이다.

한 장의 영수증에는 한 인간의 소우주가 담겨 있다. ... 술 먹은 다음 날, 화장실 변기에 쏟아놓은 끈적한 토사물처럼 영수증은 우리가 토해낸 일상을 투명하게 반영한다. 몇 개의 숫자, 몇 개의 단어로. 인생이 쓸데없이 길어지는 걸 비웃는, 기이한 미니멀리즘의 세계.(<아주 보통의 연애>, 문학동네, 2011, 10-11)[각주:42]

보면서 웃었던 부분. ㅋㅋ이렇게 재밌게 글을 쓸 수 있다니. 부러운 사람.

 

로버트 펜 워런은 <우리는 왜 소설을 읽는가?>(1962)라는 글에서 이런 대답을 했다. "소설은 우리에게 우리가 원하는 것만을 주지는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소설이 우리에게, 우리가 원하는지조차 몰랐던 것들을 줄 수도 있을 거라는 사실이다."[각주:43]

 

먼저 '쓰기"에 대해. "자신을 비난하지 않고 매일 쓴다고 해서 반드시 글을 잘 쓰게 된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더 나은 인간이 된다는 사실만은 장담할 수 있다. ...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우리의 모습은 달라진다."(<우리가 보낸 순간,소설>, 221-222) 인간은 긍정적인 신호보다 부정적인 신호를 다섯 배 더 강하게 받아들인다는 것, 그러므로 한 번 비난을 받으면 다섯 번 칭찬을 받아야 마음이 원래 상태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것, 글을 쓰는 행위는 자신을 긍정하는 일인 것이어서 그 덕분에 우리 존재가 실제로 바뀔 수 있다는 것 등이 그의 체험적 결론이다.

그리고 '읽기'에 대해. 그는 '무용한 독서'의 소중함을 말하는 와중에 이런 문장을 적었다. "우리가 지금 좋아서 읽는 이 책들은 현재의 책들이 아니라 미래의 책이다. 우리가 읽는 문장들은 미래의 우리에게 영향을 끼친다. 그러니가 지금 읽는 이 문장이 당신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다. '아름다운 문장을 읽으면 당신은 어쩔 수 없이 아름다운 사람이 된다.'" 읽고 쓰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는 후배로서 선배의 결론은 큰 위로와 격려가 된다.[각주:44]

정말 그런 것 같다. 23살, 대학교 4학년 때 내가 그랬다. 독서 교양 강의에서 읽는 책들과, 전공에서 만나는 숱한 원전들을 통해 나는 바뀌었다. '어떻게 바뀌었는데?' 누가 물으면 명쾌하게 대답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나는 그 때를 기점으로 정말 변화했다는 걸 스스로 직감한다.

그래서 끊임없이 읽으려 한다. 특히 마음이 복잡하고 시끄러울 땐 더욱이. 더 책을 놓지않으려한다.

 

"저는 멘토가 될 자격도 능력도 없지만 이것만은 말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꽤 많은 것들이 여러분 뜻대로 안 될 겁니다. 특히 인간관계가 그렇겠죠. 아무리 조심을 해도 분명히 상처를 주거나 받게 될 거예요. 그 난관을, 여러분은 지극히 이기적인 방식으로 돌파하려고 할 것이고, 마침내 돌파할 거예요. 인간이니까. 인간이란 그런 존재이니까. 그리고 훗날 회한과 함께 돌아볼 때가 올 텐데, 바로 그때, 뭔가를 배우게 될 겁니다. 그리고 아주 조금 달라질 거예요. 내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나는 아주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됩니다."

인간은 무엇에서건 배운다. 그러니 문학을 통해서도 배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게서 가장 결정적으로 배우고, 자신의 실패와 오류와 과오로부터 가장 처절하게 배운다. 그때 우리는 겨우 변한다. 인간은 직접 체험을 통해서만 가까스로 바뀌는 존재이므로 나를 진정으로 바꾸는 것은 내가 이미 행한 시행착오들 뿐이다. 간접 체험으로서의 문학은 다만 나의 실패와 오류와 과오가 어떤 종류의 것이었는지를 '파악'하는 데 도움을 주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피 흘릴 필요가 없는 배움은, 이 배움 덕분에 내가 달라졌다고 믿게 할 뿐, 나를 실제로 바꾸진 못한다. 안타깝게도 아무리 읽고 써도 피는 흐르지 않는다.

피 흘려 깨달아도 또 시행착오를 되풀이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생은 반복들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점점 더 좋은 사람이 된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그러나 믿을 수밖에. 지금의 나는 10년 전의 나보다 좀 더 좋은 사람이다. 10년 후의 나는 더 좋아질 것이다. 안 그래도 어려운데 믿음조차 없으면 가망 없을 것이다. 문학은 그 믿음의 지원군이다. 피 흘리지 않으면 진정으로 바뀌지 않는다고는 했지만, 거꾸로 말하면, 피 흘리지 않고 인생을 시뮬레이션 할 수 있는 공간이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각주:45]

 

2010년대 이후 한국 사회는 어쩌면 새로운 계몽의 시대로 접어든 것처럼 보이는데, 이 계몽의 물결은 앞서 인용한 칸트의 저 문장에서 '지성'의 자리에 '감수성'을 넣을 것을 요청한다. 오늘날 '미성숙한'(즉, 계몽되지 못한) 인간이라 불리는 이들이 결여하고 있는 것은 지성이 아니라 감수성이기 때문이다. 성숙한(계몽된) 인간이 갖고 있는 감수성이란, '젠더 감수성'이나 '인권 감수성'이라는 개념에서 그 용례를 찾아볼 수 있는 것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들을 이해하고 행여 그것에 대한 잘못된 지식/믿음(즉 '무지'와 '미신')이 '차별'의 근거로 작동할 수 있는 상황을 예방하거나 비판할 줄 아는 민감함을 의미한다. 이런 감수성은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인 것이 아니다. 나에게 그것이 없다는 것은 내가 누군가에게 상처와 고통을 줄 수 있는 가능성을 상시적으로 품고 있다는 뜻이다. [각주:46]

모르는 게 자랑이 아니며, 핑계가 되지 않는다. 정말 내가 생각하는 부분 그대로!!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이 절대 아니다. 없다는 것은 내가 누군가에게 언제라도 상처와 고통을 줄 수 있다는 것!!

 

타인의 고통에 대한 민감성과 그를 외면하지 못하는 결벽성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길러지는 것이다. 타인에게 열려 있는 통각(痛覺)이 마비돼 있거나 미발달된 이들이 하는 정치는 우리를 고통스럽게 한다. [각주:47]

아마 내가 예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굉장히 이기적이었고(물론 아직도 현저한 부분이 그러하다), 여타의 따뜻한 감정들에 대해서 촌스럽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인간의 깊은 곳까지 내려가서 그 어둠 속에 앉아 있어본 작가는 대낮의 햇살에서도 영혼을 느낄 것이다. 내게 작품의 깊이란 곧 '인간 이해'의 깊이다.[각주:48]

영혼을 느낀다.

 

문제는 이것이다. 어떤 사람이 타인의 고통을 이해할 줄 아는 깊이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가. 내게는 분명한 기준이 있다. 고통의 공감은 일종의 능력인데, 그 능력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자신이 잘 모르는 고통에는 공감하지 못한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한심한 한계다. 경험한 만큼만, 느껴본 만큼만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고통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다고 늘 생각한다. 자의든 타의든 타인의 고통 가까이에 있어본 사람, 많은 고통을 함께 느껴본 사람이 언제 어디서고 타인의 고통에 민감할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곳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보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각주:49]

 

물론 다른 이들도 열심히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열심히 살아서 입신출세한 사람을 선망할 수 있어도 존경까지 할 필요는 없다. 나는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스스로 그 고통을 함께하기로 결심한 사람, 타인의 고통을 덜어주려고 자신의 안락을 포기한 사람들만을 존경한다.

(중략) 성품이 곧 능력이다. 이 판단이 정치적으로는 매우 순진한 것일 수 있음을 안다. 그러나 고집을 부리고만 싶다. [각주:50]

 

오멜라스의 어느 지하실에는 아무 죄도 없는 한 아이가 짐승처럼 묶인 채 굶주림과 외로움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 왜인지는 모르지만 여하튼 그 아이 하나가 그런 고통을 받아야만 오멜라스의 그 풍요로운 행복이 가능하다는 것. 이런 비열한 사회적 계약을 알고도 우리는 계속 이 오멜라스에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가. 그러나 누군가가 당장 그 아이를 구출해내야 한다고 말할 때 다른 누군가는 이렇게 답하리라. 시기상조, 라고. [각주:51]

우리 사회에 만연한 시기상조론을 이렇게 비판해주시는 작가님.

 

나는 그러고 싶다는 유혹을 느끼면서도 그 유혹에 저항하려 애쓰고 있다. 그 대상이 누구건 어떤 이들을 간편하게 '규정'하고 '배제'하는 행위는 그 자체로 폭력일 수 있기 때문이다. [각주:52]

 

나쁜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누구나 무엇을 이용한다. 공허한 삶을 '의미'로 채우기 위해서는 이용할 무엇이 필요하다. 나에게 할 일이 있다는 것, 그 일을 할 때 나는 중요한 사람이 된다는 것, 그러므로 나는 여전히 살 가치가 있다는 것... 그런 느낌이 우리를 사로잡을 때 삶은 얼마나 충만해지는가.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태극기 집회는 정치적 저항이라기보다는 존재론적 축제일지도 모른다. [각주:53]

 

저들을 '괴물'이라고 간주해버리면 마음이 편해진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나를 그들로부터 완벽하게 구별/구원해낼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윤리적 판타지다. [각주:54]

 

이어 그는 '배우란 무엇인가'를 물었다. "배우가 하는 유일한 일은 우리와 다른 사람의 삶 속으로 들어가서 그것이 어떤 느낌인지 관객들에게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메릴 스트립은 작년 최악의 연기로 트럼프가 장애인 기자를 흉내 내던 순간을 꼽았다. 타자에 대한 공감을 유도하는 것이 연기의 본질인데 트럼프의 그것은 정반대의 목적에 기여하는 연기였기 때문이라는 것. 다음과 같이 말할 때 그는 조금 울먹였다. "그 연기는 제 가슴을 무너지게 했고 지금도 잊히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영화가 아니라 실제였으니까요."[각주:55]

연기 그리고 배우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유명인을 향한다고 해서 조롱이 풍자로 변하지는 않는다. 오늘날의 매체 환경 속에서 실명이 노출된 유명인과 익명의 보호를 받는 네티즌 중에서 누가 더 강자인가. 유명인이라면 감수해야 할 고통이라는 것이 있다는 말은 가학을 합리화하는 궤변이다. [각주:56]

 

비판은 언제나 가능하다. 풍자는 특정한 때 가능하다. 그러나 조롱은 언제나 불가능하다. 타인을 조롱하면서 느끼는 쾌감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저급한 쾌감이며 거기에 굴복하는 것은 내 안에 있는 가장 저열한 존재와의 싸움에서 패배하는 일이다. 이 세상에 해도 되는 조롱은 없다. [각주:57]

 

"근대에 이르러 헤아릴 수 없이 복잡하고도 정교한 방식으로여성이 배치된 원리 그 자체를 가리키는 미소지니의 구조적 측면이 이 용어(여성혐오)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김신현경, <말과활>, 2016년 가을호> 핵심은 '구조적 혐오'에 있는데 그보다 '개인적 혐오'의 층위를 먼저 떠올리게 만든다는 단점이 있다는 것. 그래서 남성들로 하여금 '나는 여성을 혐오하지 않는다'라는 개인적 층위의 반론을 제기하게 만드는 면도 있다는 것. 일각에서는 말을 어떻게 바꿔도 이해할 사람은 하고 안 할 사람은 안 할 것이라는 회의론도 있지만 말이다. [각주:58]

!!!!!!!!!!!

어떤 샘이 페미니스트 여학생에게 했던 정말 순수한 질문을 하는 걸 보았을 때 "그래서 네가 여자로서 받은 차별이 뭐가 있어? 세 가지만 말해봐", 그때 내가 느꼈던 어딘가 잘못된 것 같다는 느낌. 혼자 3일을 고민하다가 내렸던 결론이랑 똑같은 부분을 만났다. 정말 말도 안돼. 이럴 수가.

분명 저 학생이 말하는 차별은 여성으로서의 차별을 말하는 것인데, 개인으로서 ㅁㅅ의 차별을 말하라니 질문이 잘못된 것 아닌가.

미소지니 혹은 여성혐오라는 워딩에 대한 저 논의도 비슷한 맥락이라니. 슬푸당.

 

군사독재 시절과는 달리 이제 국가는 죽음을 방치하는 방식으로 살인을 한다. [각주:59]

 

가르시아 마스케스의 자선전 제목은 '이야기하기 위해 살다'이지만 소설가가 아닌 우리에게는 '살기 위해 이야기하다'라는 말이 더 실상에 가까울 것이다. 우리는 대체로 '나'라는 서사가 어떻게 진행되어왔고 또 진행될 것인지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내가 '나'라는 서사의 주인공인 동시에 작가라고 믿는다. 그러다 어떤 사건이 벌어져서 서사의 흐름에 균열이 오거나 반전이 생기면 '다시 쓰기'를 해서 그 사건을 내 삶 안으로 통합해낸다. 예컨대 예기치 못한 이별을 겪고 나서 '아픈 만큼 성숙해지고'라는 옛 노래 제목을 떠올리는 순간, 당신은 당신의 삶을 '쓰고'잇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각주:60]

 

저런 끔찍한 일이 나에게 닥치지 않았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그러나 그 느낌을 공적으로 발설하는 것은 무례하고 유아적인 행위다. [각주:61]

 

 


시는 없으면 안 되는가

 

필사적인 노력에 신비로운 것이라고는 없다. 노력이란, 시도하고 실패하고 다시 시도하고 다시 실패하는, 처절한 세속의 일이다. 조금도 신비롭지 않은 그 노동이 멈추면 시인도 함께 소멸한다. [각주:62]

처절한 세속의 일.

 

폭력과 싸우는 일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릴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수단과 방법을 세심히 가려야 한다고 믿는다. [각주:63]

 

시 평론가 데이비드 오어가 그의 책 <아름답고 무의미한>에서 보고하기를, 어떤 임의의 X에 대해 '나는 X를 좋아한다'와 '나는 X를 사랑한다'의 구글 검색 결과를 비교해보면, 대체로 '좋아한다(like)'가 '사랑한다(love)'보다 세 배 더 많다고 한다. 예컨대 '나는 음악을 좋아한다'가 '나는 음악을 사랑한다'에 비해 훨씬 많다는 것. X의 자리에 '영화', '미국', '맥주' 등등을 넣어도 역시 마찬가지. 그러나 이상하게도 '시(poetry)'만은 결과가 반대여서 시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두 배 더 많다고 한다. 왜일까? 나로 하여금 좀 더 나은 인간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사람은 내가 '사랑하는'사람들이다. 그리고 훌륭한 시를 읽을 때, 우리는 바로 그런 기분이 된다.[각주:64]

 

생존의 트랙을 정신없이 달리다가 문득 이런 의문을 갖는 때가 오는 것이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의미가 있지?' 가장 성공적인 질주를 하는 것처럼 보이는 인간조차도 가끔 이런 의문에 걸려 넘어진다. 이것은 인간이 의미를 추구하는 동물이라는 또렷한 증거다. 인간은 의미를 잊고 살 수는 있어도 의미를 빼앗긴 채 살 수는 없다. 즉 '진정한 삶'을 사유한다는 것은 곧 '삶의 의미'를 사유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삶의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 더 줄이면 이렇다. '왜 사는가?' [각주:65]

 

우리 시대 서바이벌리즘의 전도사들은 반문하리라. '정답이 없는 질문을 던지는 릴케의 시 따위를 도대체 왜 읽어야 한단 말인가?' 나의 오랜 대답은 이렇다. '왜냐하면 삶이란 의미를 찾기 위해 질문을 던지는 그 순간에만 겨우 의미를 갖기 시작하는 것이니까.' 이 대답은 아직 충분히 강하지 못하다. 그래서 나는 (당신과 함께) 더 많은 시를 더 필사적으로 읽지 않으면 안 된다. [각주:66]

 

"너는 너의 삶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시인을 따라 루브르의 토르소를 상상하며 느긋하게 시를 읽어나가다 보면 이 마지막 구절이 죽비처럼 어깨를 내리친다. 왜인가.

첫째, 바꾸라 했으니 'A에서 B로'라는 지침이 있을 법도 한데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지금 어떤 상태에 있건 당신은 바뀌어야 한다. 지금 자신을 바꾸지 않아도 되는 사람은 없다. 둘째, 언제 이 구절을 읽든 우리는 똑같은 명령을 다시 받기 때문이다. '그동안 바뀌려고 노력했는가? 계속 더 바뀌어야 한다.' 요컨대 아폴론의 불완전하고 미완성인 몸통은, 바로 우리의 삶이 언제나 그처럼 불완전하고 미완성인 상태에 있다고, 그러므로 변화란 '예외도 없고 끝도 없는' 우리 모두의 숙제라고 말한다. 삶이 아주 느린 자살처럼 느껴질 때 나는 이 시를 자주 복용한다. [각주:67]

 

"유명해지기 전에 로댕은 고독했다. 그리고 그에게 명성이 찾아온 뒤에 그는 어쩌면 더 고독해졌는지도 모른다. 명성이란 결국 하나의 새로운 이름 주위로 모여드는 온갖 오해들의 총합일 뿐이기 때문이다." [각주:68]

최근 본 영화 <호밀밭의 반항아>가 생각났다. 명성을 얻고 주인공은 더욱 자기 자신에게 파고들었다.

 

토니 타키타니는 거의 평생을 혼자 살면서도 한 번도 고독하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다. 고독이 깊은 습관이 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 앞에 한 여인이 나타나고 토니는 변한다. 토니는 이렇게 생각한다. "고독이 돌연 알 수 없는 무거운 압력으로 그를 짓누르며 고뇌에 빠지게 했다." 그녀를 만난 후에야 고독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 것이다. 사랑은, 이제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려주면서 지금까지의 삶은 부자연스러운 것이었다고 속삭인다. [각주:69]

 

우리는 '고독이 밀려왔다'라는 표현을 흔히 사용하지만, 고독은 어쩌다가 밀려오는 것이 아니라 늘 그 자리에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고독이 가끔 밀려오는 것이 아니고, 고독하지 않다는 착각의 시간들이 가끔 밀려오는 것이다. [각주:70]

 

그것은 진심이다. 입김은 찬 것을 녹이기도 하지만 뜨거운 것을 식게도 한다. 눈물은 당신을 감동시키기도 하지만 당신을 얼어붙게도 한다. 이처럼 사랑이 변한다는 것은, 동일한 것이, 어느 날 문득 정반대의 의미를 갖게 되는 일이다. 그때 우리는 '최초의 입맞춤'으로 돌아가고 싶어서 가슴을 치며 울고 싶어진다. 그 순간의 진심을, 이 시인은 알고 있는 것 같다. [각주:71]

 

아카시아 가득한 저녁의 교정에서 너는 물었지 대체 이게 무슨 냄새냐고

그건 네 무덤 냄새다 누군가 말하자 모두 웃었고 나는 아무 냄새도 맡을 수 없었어

다른 얘들을 따라 웃으며 냄새가 뭐지? 무덤 냄새란 대체 어떤 냄새일까? 생각을 해봐도 알 수가 없었고

흰 꽃잎은 조명을 받아 어지러웠지 어두움과 어지러움 속에서 우리는 계속 웃었어

너는 정말 예쁘구나 내가 본 것 중에 가장 예쁘다 함께 웃는 너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였는데

웃음은 좀처럼 멈추질 않았어 냄새라는 건 대체 무엇일까? 그게 무엇이기에 우린 이렇게 웃기만 할까?

꽃잎과 저녁이 뒤섞인, 냄새가 가득한 이곳에서 너는 가장 먼저 냄새를 맡는 사람, 그게 아마

예쁘다는 뜻인가 보다 모두가 웃고 있었으니까, 나도 계속 웃었고 그것을 멈추지 않았다

안 그러면 슬픈 일이 일어날 거야, 모두 알고 있었지[각주:72]

(<구관조 씻기기>, 황인찬, 민음사, 2012, <유독> 전문)

스무 살 후로 처음 내가 직접 사 본 시집!

아직은 시가 어렵기만 하다. 나도 척척 읽어내고 싶은데 ㅠㅠ..

 

당신이 한번 포기한 적 있는 대상은, 절대로 포기 못 할 대상이 다시는 될 수 없다. 그것을 포기할 때, 절대로 포기 못 하겠다는 그 마음까지 함께 포기한 것이므로. 그러므로 한번 포기한 대상을 다시 포기하는 일은 처음보다 훨씬 쉬워진다. [각주:73]

 

"우리말의 '같이'는 영어의 'like'와 'with'의 뜻을 함께 갖는다. 뭐든 당신과 '같이' 하면 결국엔 당신'같이' 된다는 뜻일까." 늘 시와 같이 살면 시와 같은 삶이 될까, 안 될까. 우리는 영원히 시를 포기하지 말기. [각주:74]

 

나는 그런 글을 쓰고 나면 내 삶이 조금은 더 가치 있어졌다고 느끼는 부류의 사람이다. 누구에게나 그렇겠지만, 도대체가 시간이 너무 없다. 그 얼마 없는 시간을, 내 삶을 더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어주는 일에 나는 써야 한다. [각주:75]

 

정확하게 말하고 싶다는 이런 욕망은 정확하게 사랑받고 싶다는 다른 욕망과 연결돼 있다. 정확하게 사랑받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부족한 알몸"이 부끄럽다. 그런데 네가 나를 안으려들까 봐, 혹은 내가 너에게 안기고 말까 봐, 했던 말을 하고 또 하면서 딴청을 부려야 했다. 내 알몸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도록, 네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해주면 좋겠다. 그때 나는 정확하게 사랑받고 있다고 느낄 것이다. [각주:76]

 

 


넙치의 온전함에 대하여

욕망과 사랑의 구조적 차이를 이렇게 요약해보려고 한다.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는지가 중요한 것은 욕망의 세계다. 거기에서 우리는 너의 '있음'으로 나의 '없음'을 채울 수 있을 거라 믿고 격렬해지지만, 너의 '있음'이 마침내 없어지면 나는 이제는 다른 곳을 향해 떠나야 한다고 느낄 것이다. 반면,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지 않은지가 중요한 것이 사랑의 세계다. 나의 '없음'과 너의 '없음'이 서로를 알아볼 때, 우리 사이에는 격렬하지 않지만 무언가 고요하고 단호한 일이 일어난다. 함께 있을 때만 견뎌지는 결여가 있는데, 없음은 더이상 없어질 수 없으므로, 나는 너를 떠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나의 없음을 당신에게 줄게요>, <정확한 사랑의 실험>, 마음산책, 2014, 26)[각주:77]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면 당신은 지금 사랑 속에 있는 것이다. '홀로 있을 때가 아니라 그와 함께 있을 때, 나는 더 온전해진다.'[각주:78]

아직까지 나는 너랑만 사랑을 했었나보다. 네 안에서 나는 가장 자유로웠고, 온전했었다.

너라는 사람만이 줄 수 있는 것인지, 혹은 그 긴 시간이 가져다줄 수 있는 것인지. 아직은 그걸 잘 모르겠다 나는. 어려워 여전히.

 

우리가 오늘날에도 사랑이라는 것을 하게 되는 것은 하나일 때보다 둘일 때 우리가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다. 나는, 내가 부족한 인간이라는 사실로 더 이상 고통받지 않아도 되게 해주는 누군가를 만나서, 온전해진다. 다만 그것은 위 신화가 말하는 것처럼 운명적 짝을 다시 만나 이뤄지는 기적이 아니라, 상대방이 나로 인해 더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상호 배려로 성취되는 일일 터이다. [각주:79]

상호 배려.

 

위 대사는, 이런저런 요소들이 내 인생을 구성하고 있는데, 거기에는 당신이라는 요소가 없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읽힐 소지가 있다. 이것은 사랑 속에서 주체가 '온전해지는' 일과는 다르다. 아무리 가장 중요하고 또 가장 소중한 요소라 할지라도 요소는 한낱 요소일 뿐이다. 내가 사랑하는 당신을 채우는 '요소'가 아니라 나를 세우는 '구조'(여야 한)다. 나는 당신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당신 속에서 온전해진다. 결여는 여전히 있되 그 결여가 더는 고통이 되지 않는, 온전한 사람.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나를 그런 사람이 되게 한다. [각주:80]

 

그 글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누구나 결여를 가지고 있고 또 부끄러워 대개는 감춥니다. 그러다가 어떤 결정적인 순간에 서로 상대방의 결여를 발견하고,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 결여 때문에 서로가 서로에게 불가결한 존재가 되는 일이 벌어집니다. 나(너)만이 너(나)의 결여를 이해하고 또 보듬을 수 있다는 확신에 함께 도달하는, 작은 기적 같은 순간 말입니다. [각주:81]

 

왜냐하면 누구나 제 몫의 결여를 갖고 있는 것이 인간이고, 또 그런 인간이 홀로 살아가기에는 너무도 버거운 것이 바로 인생이라는 사실을 언젠가부터 저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사랑이란 궁극적으로 우리가 서로를 살아가게 하는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대체로 이기적인 우리가 다음과 같은 놀라운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사랑 속에 있을 때입니다. '나는 사랑한다, 내가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너를 살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너를 살게 함으로써 나 역시 살 가치가 있게 되기 위해서.'

신이 있다면 그가 우리를 사랑하겠지만, 신이 없다면 우리가 서로를 사랑해야만 한다는 것. 이것이 인간의 연약함이자 위대함이라는 것. 그러므로 사랑에 관한 한, 언제나 이렇게 말할 수밖에요. 곁에 있어줄게. 우리가 온전해지기 위해서. [각주:82]

가장 떠오르는 대상은 우리 애들.

많이 많이 사랑하는 아가들.

 

사랑받는 사람이 되는 가장 정확한 방법은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정확한 길이기는 하지만, 쉽고 빠른 길은 아니다.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타인과의 섬세하고 복잡한 커뮤니케이션에 성공해야 한다. 그 어렵고 느린 길을 걸을 능력도 의지도 없는 이들은 그 대신 권력을 가지려 한다. 권력을 얻어 명령의 주체가 되면 커뮤니케이션을 생략해도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각주:83]

타인과의 섬세하고 복잡한 커뮤니케이션.

맞아 맞아 . 끄덕!!!!

 

인간(과 자연)에 대한 당신의 모든 관계는, 당신의 의지의 대상에 상응하는, 당신의 현실적인 개인적 삶의 '특정한 표현'이어야 한다. 당신이 사랑을 하면서도 되돌아오는 사랑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면, 즉 사랑으로서의 당신의 사랑이 되돌아오는 사랑을 생산하지 못한다면, 그리고 당신이 사랑하는 인간으로서의 당신의 생활 표현을 통해서 당신을 사랑받는 인간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당신의 사랑은 무력하며 하나의 불행이다. [각주:84]

 

그런 비판으로는 아무 것도 바뀌지 않는다. 비판당하는 적은 황당한 불쾌감을, 비판하는 나는 얄팍한 우월감을 느끼게 될 뿐, 그 이후 둘은 '이전보다 더 자기 자신인' 존재가 되고 말 것이다. [각주:85]

 

원래 당신은 하나의 '얼굴'이었다. 적어도 전화가 발명되기 전에는 그랬다. 걸어가서 기다리지 않으면 당신을 만날 수 없었다. 당신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당신의 맞은편에 앉아 당신의 얼굴을 바라본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시선을 감당해내는 일이다. 그리고 표정이 머금고 있는 의미를 해독하는 일이다. 나와 당신이 친밀한 사이가 아니라면 이 일은 만만찮은 에너지가 소모되는 노동이다. 이때 당신은, 내가 잘 알지 못하므로 그만큼 부담스러운, 타인이다. 현대 인문학에서 흔히 '타자'라고 부르니까 그렇게 하자. 이때 당신은 '얼굴-타자'다.[각주:86]

다정하다. 아날로그만이 주는 따뜻함.

 

'당신이 틀렸다'고 말하는 부정문이 아니라 '당신은 전적으로 옳지는 않다'는 부정문으로, 전래동화에서처럼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스스로 옷을 벗게 만드는 것이라는 듯이, 세상의 힘센 주장들에게 자신을 되돌아볼 시간을 준다. 이것은 부정을 확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확신을 부정하기 위한 부정문이다. [각주:87]

 

단호한 승리도 단호한 실패도 없다. 오로지 그렇다는 사실만이 단호할 것이다. [각주:88]

 

개인의 고유성은 그 사람이 사용하는 어휘와 어법에서도 생겨난다. [각주:89]

 

이 대화 직후에 미도리가 말없이 '나'의 품에 안겨 오는 것은 당연하다. 이 정도 성의라면 감동받을 만한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너무'라는 간편하고도 흔해빠진 부사어에 습관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이를 여섯 줄의 문장으로 바꿔낸 성의(물론 이것은 사랑의 힘이다)에 있다. 상대방이 자신에게 클리셰(상투어)를 남발한다는 것은 그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각주:90]

내가 <노르웨이 숲>을 보고! 좋았던 부분인데 교수님도 똑같이 발췌하여 생각을 적어주셨다. ㅠㅠ 봄날의 곰이라니 ㅠㅠㅠㅠ헝

내가 너를 유난히 애틋하게 생각하고, 그저 고마운 마음이 드는 건 이 점에서도 이유가 있겠지?

 

이광수는 동경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있던 아내 허영숙에게 이런 편지를 보냅니다.

"5월부터 매달 학비는 60원 보내리다. 그리고 여름 양복값 보낼 터이니 얼마나 들지 회답하시오. 공부하는 중이니 저금 아니해도 좋소. 학비가 곧 저금이오. 여름옷에는 레인코트 같은 것이 있어야 하겠으니 모두 값을 적어 보내시오." 이 책을 엮은 강인숙 선생은 이렇게 덧붙이셨군요. 1930년대에 남편을 두고 두 번이나 유학을 간 여인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뒷받침해준 남편이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라고. [각주:91]

ㅠㅠㅠㅠㅠ이광수 뭔데 스윗해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오늘부터 정주행갑니다 ^^777777

 

책을 다 읽고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손편지라는 것은 왜 별 내용이 없어도 이렇게 마음을 움직이는 것일까. 편지는 문어체의 공간입니다. 가족에게 보내는 다섯 줄짜리 편지라해도 일단 편지의 세계로 들어가면 그이의 말투는 으레 그래야 한다는 듯이 달라집니다. 그런데 이것이 단지 양식의 문제만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 문어체의 공간 안에서만 비로소, 구어체로는 담을 수 없는 그 자신도 몰랐던 진심이 '발굴'되고 심지어 '생산'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라면 말입니다. 문어체만의 특별한 힘이라고 할까요. [각주:92]

 

물속에 살고 있으면서 정작 물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물고기. 우리도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고 잇는 현실(물)이라는 것은 그 대부분이 엇비슷한 일상과 그것의 권태로운 반복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그것이 너무 익숙하고 진부한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생각이라는 것을 하기가 가장 어려운 대상이라는 것. 그래서 우리는 실제로 그것에 대해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일상과 그 반복이야말로 우리 인생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면, 그것들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사느냐 하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이 아닌가? [각주:93]

 

생각하는 방법이란 곧 선택하는 방법이라는 것. 어떤 현실과 맞닥뜨렸을 때 이를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다른 생각을 의식적으로 선택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늘 같은 방식으로만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상 생각을 하지 않는 것과 같다. [각주:94]

 

삶은 그 자체로 가치 있거나 무의미한 것이 아니며, 어느 쪽이 될 것인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는, 아주 심각한 이야기다. [각주:95]

 

네 번째, 곤란을 겪고 나서도 배우지 않는 사람. 이쯤에서 우리는 속으로 생각한다. '내 비록 태어나면서부터 도를 알지는 못하였고, 또 꾸준히 배움에 힘썼다고 자신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곤란을 겪고 나서는 시행착오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나는 공자가 우리의 이런 속생각을 예측하고 바로 다음과 같은 말을 하기 위해 이 모든 인간유형론을 고안한 게 아닐까 상상해본다. '너는 네 생각과는 달리 3번이 아니라 4번인 것이다.' 나는 내 시행착오가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 이유를 이렇게 납득했다. [각주:96]

 

이를테면 좋은 '멘토'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멘토르'가 되어야 한다는 얘기다. 지혜와 명성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신뢰라는 것. 나를 잘 아는, 내 편인, 그런 사람만이 나를 진정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 [각주:97]

나의 방법이 틀리지 않았어 라고 이야기해주는 것 같았다. 토닥토닥.

 

말하기보다 글쓰기가 더 어렵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만큼 말을 쉽게 해왔다는 뜻일 수 있다. 지금보다 훨씬 미성숙했던 시절, 나는 참 많은 말을 함부로 했던 것 같다. 처음부터 그런 생각을 하며 직업을 택한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내가 글을 쓰는 사람이 된 것이 다행스럽다고 여긴다. 내게 글을 쓴다는 것은 극도로 천천히 말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충분히 생각할 수 있고 잘못을 수정할 수 있으며 오해를 덜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말이 있는 세계에 글도 함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그래서 나는 육체적으로 말하기가, 정신적으로는 글쓰기가 더 편하다. [각주:98]

작년에, 너랑 많은 이야기들을 하며 우리는 그랬지. '말을 아끼자' 혹은 '듣자'라고. 꽤 오래간 잊고 지냈던 것 같다. 그때 우리는 건강한 생각을 한 것 같아. !!

 

모두가 자신만의 매체를 갖게 된 이 시대가 선사한 축복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내 눈에 더 잘 보이는 것은 국민 모두가 언론인이 되면서 발생하기 시작한 명백한 재앙들이다. 언론이 권력이라고 불리는 것이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닌 것은 세상에 뿌려져 회수할 수 없게 되는 문장만큼 끈질기게 살아남는 것이 달리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펜이 칼보다 강하다는 말을 한 치의 의혹도 없이 믿는다. [각주:99]

 

확실히 작품은 사람과 비슷하다. 첫인상이 전부는 아니라는 점에서 말이다. 더 심각하고 진지하게 말하자면, 한 번 보고는 아무것도 제대로 알 수 없다는 점에서 말이다. 이것은 평론가로서 내가 갖고 있는 '직업윤리'이지만, 창작자들에게 기대하는 '작업윤리'이기도 하다. [각주:100]

 

 

정말!! 내가 죽기전에 신형철 교수님 그리고 책들을 알게 되어서 너무 행복하다.

작년의 책이 '모멸감' 그리고 '개인주의자 선언'이었다면 올해의 책은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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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지도 못하게 얘기가 꼬이면서 오는 말에 가는 말로 응수하는 거친 말다툼이 한바탕 이어진 뒤, 지금까지 두 사람을 이어주던 유대감이 치명적으로 손상되고 말았다는 느낌이 있었다. 그녀 안에 돌덩이처럼 딱딱해져서 죽어버린 것이 있었다. [각주:1]

이럴 때 나는 머리에서 하고 소리가 나는 것 같다. 일말의 모든 기대조차 사라지는 소리. 그리곤 입을 닫게 된다.

정말 하루키의 표현처럼 내 안에 돌덩이처럼 딱딱해져서 죽어버린 것이 생긴다.

 

나와 그녀는 우연한 기회에 각자의 스무 살 생일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것이 어떤 하루였는가, 라는 것이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스무 살 생일에 대해 잘 기억하고 있다. [각주:2]

나의 스무 살 생일? 엉엉 울었다. 기숙사 앞에서. ㅋㅋㅋ

슬픈 일이 있었던 게 아니다. 하루 종일 데이트를 했고, 기숙사 앞에서 생일의 마지막 선물과 편지까지 받았다. 그런데 왜 울었을까 나는. 아마 기대했었기 때문이리라. 생일에 받을 편지에 대해, 편지의 내용에 대해, 생일에 듣고 싶은 말들에 대해. 

그리고 다른 모습이지만 또 비슷하게 스무 다섯 살 생일을 보냈다.

 

비가 바람에 휘날려 창유리에 부딪치면서 불규칙한 소리를 울렸다. 침묵이 이어지는 동안, 노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의 눈을 보고 있었다. 그녀의 귓속에서 시간이 불규칙한 고동을 새겼다. [각주:3]

적막이 이는 때를 정말 잘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귓속에서 시간이 불규칙한 고동을 새겼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귓볼을 긁적였다. 예쁜 모양의 귓볼이다. "인간이란 어떤 것을 원하든, 어디까지 가든, 자신 이외의 존재는 될 수 없는 것이구나, 라는 것. 단지 그것뿐이야."[각주:4]

 

"...(중략)... 나이를 먹는다든가 먹지 않는다든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생일이라는 것은 당신에게 일 년에 딱 한 번 밖에 없는 정말로 특별한 날이니까 이건 좀 더 소중하게 여겨야지요. 그리고 유례를 찾기 힘든 그 공평함을 축복해야지요."라고. [각주: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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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벗이여, 자네게 나는 약속하겠어. 마음을 고쳐먹겠다고 말야. 내가 이제까지 늘 하던 대로 운명이 우리에게 마련해 준 조그마한 불행을 부질없이 되씹던 그런 습관을 이젠 더 이상 계속하지 않겠다. 현재를 있는 그대로 즐기겠어. 과거는 과거대로 흘려보내고 말야. 확실히 자네 말이 옳았어. 친구여, 만일 인간이 그처럼 풍부한 상상력을 발휘해서 지나간 불행에 대한 추억을 불러일으키려고 하지 않고 차라리 현재를 무난하게 참고 견디어나간다면 인간의 고통은 훨씬 줄었을 거야. [각주:1]

 

인간이란 어디서나 다 마찬가지니까 말이야. 사람들은 대개 오로지 생계를 위해서 대부분의 시간을 소비하다가 약간 남아 돌아가는 자유 시간이라도 생기면, 도리어 마음이 불안해져서 거기서 벗어나려고 온갖 수단을 다 쓴단 말이다. 아아, 이것도 인간의 운명이라고 할 것인가! [각주:2]

 

인간의 일생이 일장춘몽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여러 사람들이 절감하였겠지만 내 주위에서도 그 느낌은 항상 그림자처럼 맴돈다. 인간의 활동이나 연구도 어쩔 수 없는 한계에 사로잡히는 것을 볼 때, 그리고 모든 활동이 우리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데 집중되고 있으며, 욕망이라는 것 자체에도 우리의 불쌍한 삶을 연장시키는 것 말고는 다른 목적이 없다는 사실을 통찰할 때, 그리고 또 연구가 어느 단계에 올라 만족할 수 있음은, 인간이 자신이 갇혀 있는 감방의 벽에다가 여러 풍경과 형상들을 화려하고 밝은 색으로 그려놓고 기뻐하고 있는 식의 허울 좋은 체념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될 때 나는 할말이 없어지고 만다. [각주:3]

 

어린아이들이란 스스로 무엇인가 원하면서도 무엇 때문에 원하는지를 모른다고 한다. 이 점에 관해서는 박식한 교사들이나 사부들의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그러나 어른들도 어린애들과 마찬가지로, 이 지상을 정처없이 비틀거리고 돌아다니며, 자기들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조차 모른 채, 이렇다 할 목적에 따라 행동하지 못하고 과자나 흰자작나무 회초리에게 지배당하는 실정이다. [각주:4]

 

그렇지, 그렇게 할 수 있는 자네들에게 어떤 뜻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겸허한 마음으로 인식한 사람, 여유 있게 사는 시민 하나하나가 그들의 조그마한 정원을 손질하여 낙원으로 꾸밀 줄 알고, 불행한 사람마저 그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거리면서도 끈기 있게 스스로의 길을 걸어가고 있으며,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이 햇빛을 다만 1분 간이라도 더 오래 쳐다보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사람은- 그렇지. 그런 사람은 말없이 자기 자신 속에서 스스로의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역시 인간이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그는 아무리 제약을 받고 있더라도, 항상 마음속에서도 자유라는 즐거운 감정을 간직하고 있다. 자기가 원하면 언제라도 감옥 같은 이 세상을 벗어날 수 있다는 그런 자유의 감각 말이다. [각주:5]

자유의 감각.

그리고 그 자유를 즐기는 사람은 서로 알아볼 수 있는 것 같다. 잘은 모르지만 아마도?

 

반면에 뭐니뭐니 해도 모든 규칙은 자연의 진실한 감정과 자연의 정다운 표현을 파괴하는 것이다. <그 말은 너무 심해 규칙이란 단지 제한을 하고 쓸데없는 덩굴을 베어낼 따름인데>라고 자네는 말하겠지. 이것 보게! 내가 자네에게 비유를 하나 들어주지. 그것은 사랑의 경우와 똑같다고 할 수 있다. 젊은 청년이 어떤 아가씨에게 연정을 품고, 날이면 날마다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그녀를 따라다니며, 모든 정력과 재산을 쏟아부으면서, 자기가 그녀를 위해 온몸을 바치고 있음을 줄곧 나타내려고 한다고 하자. 그런데 그때 속물 하나가, 즉 어떤 공직에 종사하는 남자가 나타나서 그 젊은이에게 이렇게 말한다고 하자. <여보시오, 젊은 양반, 내 말 좀 들어봐요! 사랑을 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당연한 일이겠지만, 단 인간다운 사랑을 해야 돼요. 자기의 시간을 둘로 나눠서 한쪽은 일하는 데 쓰고, 다른 한쪽, 즉 쉬는 시간을 여자에게 바치도록 해야지요. 당신의 재산을 헤아려보고 꼭 필요한 경비를 뺀 다음, 나머지를 가지고 여자에게 선물을 하는 것쯤은 나도 말리지 않아요. 그것도 너무 자주 해서는 못쓰고 여자의 생일이라든가 세례일 같은 날에만 해야지요.> 만약에 그 젊은이가 그런 충고에 따른다면 그는 쓸만한 인물은 될 것이다. 나도 그런 젊은이라면 어떤 영주에게나 직원으로 채용해 달라고 추천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애인으로서의 그는 그것으로 끝장이다. 만약 그가 예술가라면 그의 예술도 마지막이지. [각주:6]

아직 나는 낭만적인가보다. 현실 감각이 적으면 어때, 그게 난데. 살아보지 못했으니 미래에 어떤 생각을 할지 아직은 잘 모르지만, 그래도 지금은 모든 것에 충실하고 충만해지고 싶다. 한없이 퐁당.

지극히 현실적이기에 나는 아직 25살이니까..

 

벗이여, 우리 어른들과 동등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오히려 본보기로 삼고 우러러보아야 할 이 어린이들을 사람들은 항용 하인처럼 다루고 있다. 어린이들은 의지를 가져서는 안된다는 식이다! 그렇다면 우리 어른들은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단 말인가? 도대체 어디서 그런 특권이 있다는 것이지? 우리가 그들보다 나이가 많아서 더 현명하단 말인가? 하늘에 계신 거룩한 하느님, 당신의 눈으로 보시면 오직 나이 많은 어린애와 나이 적은 어린애가 있을 뿐이고, 그 밖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그 어느 쪽을 더 기꺼워하시는지는 당신의 아드님이 까마득한 옛날에 이미 일러주셨나이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그분을 믿고 있지만, 그분의 말씀을 들으려곤 하지 않고 자기를 표준으로 삼아 아이들을 기르는 것이다. [각주:7]

 

그럭고 보니 인간이 서로를 괴롭히는 것처럼 불쾌한 일은 없다. 그중에서도 화가 치밀 정도로 지긋지긋한 일은 젊은이들이 온갖 즐거움에 스스로의 문을 활짝 열어놓을 수 있는 인생의 꽃다운 청춘기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얼굴을 찌푸리고 즐거운 나날을 망쳐버리는 일이다. 그들은 상당한 시일이 지난 다음에야 비로소 돌이킬 수 없이 좋은 시간을 낭비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늦은 것이다. [각주:8]

 

그저 내 마음속에 다음과 같은 진리의 소리를 깊이 되새겼다. 즉, 우리는 신이 우리를 대하듯 어린아이들을 대해야 하며, 신은 우리로 하여금 꿈속을 헤매듯 비틀거리게 할 때 우리를 가장 행복하게 해주시는 것이라는 진리말이다. [각주:9]

 

오늘 나는 로테를 찾아갈 수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했겠나? 나는 하인을 그녀에게 보냈지. 그저 오늘 로테에게 다녀온 사람을 내 곁에 두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심부름 갔던 하인이 돌아오기를 얼마나 간절하게 기다렸는지, 그리고 또 그가 돌아오는 모습을 보고 얼마나 기뻐하며 반겼는지 모른다! 창피한 생각만 없었다면, 그의 머리를 두 손으로 부둥켜안고 키스라도 퍼부었을 것이다. [각주:10]

얼마나 좋아하면, 그사람에게 다녀온 사람을 곁에 두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을까? 귀여운 베르테르.

 

자네가 주장하는 이론은 이것이지. 즉, 로테에 대해서 희망을 걸 수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없는가, 이 두 가지 중의 하나이다. 좋다! 희망이 있다면, 어디까지나 희망을 버리지 말고 그 소원을 이루도록 노력하라. 그러나 만일 희망이 없다면 용기를 내서 그 모든 정력을 소모시키는 비참한 감정으로부터 벗어나도록 최선을 다하라, 이 말이지- 친구, 그럴듯한 말이다- 그러나 말하기는 쉬워도, 실천하기란 어려운 법이다. [각주:11]

 

<인간의 본성에는 한계가 있어요> 하고 나는 이야기를 계속 했다. <기쁨, 슬픔, 괴로움 등 희로애락의 감정을 참는 데도 한도가 있는 법이고, 그 한도를 넘으면 당장에 파멸하고 말아요. 따라서 이런 경우 어떤 사람이 강하다 약하다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일이건 육체적인 일이건 간에 자기의 고통의 한도를 견디어낼 수 있는가 없는가가 문제지요. 따라서 나는 자기의 목숨을 스스로 끊는 사람을 비겁하다고 부르는 것은 마치 악성 열병에 걸려 죽어가는 사람을 겁쟁이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해요>[각주:12]

 

불행한 일이다! 빌헬름! 나의 활동력은 방향을 바꾸어 불안한 게으름으로 변하고 말았다. 멍청하니 하릴없이 지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어떤 일이 손에 잡히지도 않는다. 내게는 공상도 없어졌고 자연을 감상하는 정서도 사라졌으니, 이제 책은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일어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잃는다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 거나 마찬가지다. 자네에게 맹세코 말하거니와 나는 정말로 품팔이 노동자나 되었으면 하고 생각할 때가 많다. 그러면 적어도 아침에 잠에서 깨어날 때마다 그날 하루의 전망과, 욕망이나 기대 등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알베르트가 산더미 같은 서류에 파묻혀 있는 것을 보고 부러워하며, 내가 그를 대신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상상해본다. [각주:13]

나를 잃었을 때, 가난함을 날카롭게 표현한 것 같다. 먼 이야기가 아닌 사실 내 이야기.

 

나는 이제 나 자신과 훨씬 더 잘 어울리게 되었다. 확실히 우리는 모든 것을 우리와, 그리고 우리를 모든 것과 비교해 보도록 만들어진 모양이다. 그래서 행불행은 우리 자신과 비교하는 대상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고독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 문학의 환상적인 이미지에 영향받은 우리의 상상력에는 본질적으로 더 높은 것을 추구하려는 충동이 담겨 있기 때문에, 우리는 많은 피조물을 한층 고양시킨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가장 낮은 자리에 놓이게 되어 우리 이외의 것은 모두 우리 보다 훌륭하고 누구 할 것 없이 우리보다는 완전해 보인다. 그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우리에게는 모자라는 것이 여러 가지 있다고 우리는 느낀다. 그런데 우리에게 부족한 바로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부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단 마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까지 모조리 그 사람에게 주어버리고, 그 사람에게는 어떤 이상적인 삶의 즐거움마저도 부여되어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행복한 사람이 한 명 완성되는 것인데, 이처럼 완벽하게 이룩된 사람이란 사실은 우리 스스로의 창조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와 반대로 우리가 아무리 힘이 약하고 고생이 되더라도, 있는 힘을 다해서 줄곧 앞으로 나아간다면, 비록 꾸무러리며 갈짓자 걸음으로 걸어간다고 하더라도 돛대를 달고 노를 저어가는 다른 사람보다도 어느 결에 앞서가게 된다는 것을 종종 알게 된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과 나란히 서거나 다른 사람을 앞질러 갈 때 비로소 참다운 스스로의 감정이 생기는 법이다. [각주:14]

 

물론 나도 매일 절실하게 깨닫고 있는 터이지만, 자기 자신의 표준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판단한다는 것을 정말 어리석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내겐 할 일이 태산같이 많은 데다가 내 가슴도 이처럼 거세게 물결치고 있으니까. 아아, 나는 다른 사람이 무슨 짓을 하든지 상관하고 싶지 않다. 다른 사람들이 나도 내 길을 갈 수 있도록 내버려두고 아무 참견도 하지 말아주었으면 좋겠다.[각주:15]

우리 알아서, 저마다, 각자, 잘 삽시다! !!!!!!!

 

그 옛날 어렸을 때, 내 산책의 목적지이자 한계선이었던 그 지점, 이제 나는 그 나무 밑에 다시 서게 되었다. 그것은 지금 얼마나 많이 변했는지 모른다! 그 당시 나는 철없이 그저 행복에 잠겨서 알 수 없는 세계를 무척 그리워했지. 그리고 그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기만 하면, 동경하며 갈구하는 이 내 가슴을 가득히 채워주는 수믾은 마음의 양식과 기쁨을 담뿍 얻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나는 넓은 세상에서 되돌아 왔다. [각주:16]

내가 동경하던 서울. 바라보고 떠올리기만 해도 벅찼으니까. 서울이라는 곳은. ㅎㅎㅎㅎㅎ 이제는 그냥 내가 살고 있는 한 도시가 되어버렸지만.

 

그분은 그 뿐 아니라, 내 마음보다는 내 지성과 재능을 더 높이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내게는 내 마음만이 유일한 자랑거리이며, 오직 그것만이 모든 것의 원천, 즉 모든 힘과 행복과 불행의 원인이다. 아아,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은 누구나 다 알 수 있다. 그러나 나의 마음은 나 혼자만의 것이다. [각주:17]

나의 마음은 나 혼자만의 것이다.

너무 좋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도 마음이 자랑인 사람이 좋다. 그 사람만의 것이니까. 나이를 불문하고 누구든, 참 매력적이다.

 

그녀는 알베르트보다 나와 결혼했더라면 더 행복해졌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알베르트는 그녀가 마음속에 품고 있는 은근한 소원을 남김없이 풀어줄 만한 그런 인물은 아니다. 감수성에 일종의 결함이 있지. 결함이라, 그 해석은 자네의 자유지만, 똑같은 느낌으로 가슴이 뛰는 그런 마음의 공감이라는 것이 알베르트에게는 없단 말이다. 함께 좋아하는 책을 읽으면서 내 마음과 로테의 마음이 하나로 부딪치는 그런 대목에 가서도, 그 밖에 수많은 여러 사건에서 제3자의 어떤 행위에 우리가 감동하여 소리를 지르지 않을 수 없는 경우에도 동요하지 않는다. [각주:18]

또 너무 좋았던 부분!!

감수성에 일종의 결함. 똑같은 느낌으로 가슴이 뛰는 그런 마음의 공감.

스물 한 살 때였나, 노리터에서 몇몇 어쩌다 모이게 된 과사람들이 묻는 나의 이상형은 감수성이 있는 사람이라고 대답했던게 떠오른다. ㅋㅋ 시간이 흘러 감수성이 있는 사람의 정의가 희미해져, 나의 이상형을 대변하기에는 거리가 있다고 생각될 때쯤 이 글을 만났다. 베르테르 식의 해석이라면 맞다, 나의 이상형은 감수성 있는 사람. 나랑 똑같은 혹은 비슷한 느낌으로 가슴이 뛰는 마음의 공감. 무엇을 보고 마음이 하나로 부딪치는, 여러 사건에서 감동하며 함께 소리를 내지를 수밖에 없는.

그 점에서 아마 베르테르가 말한대로, 로테는 덜 행복할 수도 있겠다. 마음속에 품고 있는 은근한 소원을 남김없이 풀기 힘들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로테가 결정한 것이니까 그것이 옳고 그르다고는 굳이 재단하고 싶지 않다.

 

그녀의 검은 눈동자를 쳐다보기만 해도 나는 벌써 행복에 잠긴다! 그런데 은근히 화가 치미는 것은, 알베르트가 -만약에 내가 그 사람이라면 행복해할 만큼- 그렇게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각주:19]

그치.. 그럼 화가 나지. ㅁㅐ우매우ㅋㅋㅋㅋ.. 감사하기라도 하란 말이야!

 

나는 이렇게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녀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모든 것을 삼켜버리고 만다. 나는 이렇게도 많은 것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녀가 없으면 모든 것이 무(無)로 돌아가 버리고 만다. [각주:20]

나의 모든 것을 의미있게 하는 사람. 그래서 내가 '우주'라는 말을 좋아한다. 전부이니까. 나의 끝이자 마지막 전부라는 거니까.

 

이럴 때 베르테르를 그녀의 형제로 바꿀 수만 있다면! 그녀는 얼마나 행복할 것인가! [각주:21] 

우리가 진짜 가족이라면,

ㅋㅋ

말도 안되는 외침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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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겠어. 아니, 빈집에 혼자 있기 싫어서였을 거야.

니나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으나 이 말 속에는 불안이, 불안과 절망이 담겨 있었다. 나는 무슨 일인지를 알아야만 했다. 나는 지금 물어보기로 결심했다.

사람들이 네게 무슨 일을 저질렀니?

저릴렀다고? 니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그런식으로 상상하지 마. 여기에 더 이상 머무를 수가 없기 때문이야. 왜냐하면... 그녀는 말을 멈췄다가 빠르게 그러나 낮은 어조로 계속했다. 왜냐하면 내 인생을 바꾸어야만 하기 때문이야. [각주:1]

 

내가 왜 그랬는지 모릅니다. 여름 탓일까요. 나는 풍만함 그리고 포만함을 참을 수 없습니다. 자연은 정지해 있으며 동경을 잃어버렸습니다. 나는 그래서 공허하며 피곤을 느낍니다. 스스로가 가치 없어보입니다. 나는 자주 이른 새벽에 깨어납니다. 모든 것이 아직 빈 상태이고 회색으로 싸여 있을 때 말입니다. 그때마다 나는 공포, 누군가 내 목을 조르는 듯한 공포를 느낍니다. 삶에 대한 공포, 살아야만 한다는 것에 대한 공포입니다. 이때는 어떤 위대한 생가곧 나를 도울 수 없습니다. 신에 대한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이러한 공포에 단독으로 내맡겨져 있죠. 최악의 경우가 지나가면 나는 이것이 도대체 무엇이었는지 이해하려고 애씁니다. 여러가지 대답이 나옵니다. 내가 인생에서 아무것도, 어떤 의미 있는 것도 이루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감, 내 인생을 그냥 사라지고 있으며 나는 살지 않았다는 불안감, 나는 실수를 저질렀으며 영원히 내 인생은 작은 궤적 속에서 움직일 뿐이라는 불안감들입니다.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나에게서 어떤 의미있는 것이 나올 수 있겠어요. 이 무슨 오만인지요. 그렇지만 나는 이것을 당신한테만은 말할 수 있습니다. 내 속에 있는 무언가가 <너는 무언가를 이룰 수 있어>하고 나에게 말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이 <무언가를>이 무엇인지 모릅니다만 그것을 느낄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또 나는 그 무언가를 이루지 못할까봐 불안합니다. 그 무언가를 영원히 상실할까봐 불안합니다. 영원히 말입니다. 그것은 너무나 끔찍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불안의 가장자리, 아직 포착 가능한 불안의 제일 바깥 가장 자리에 불과합니다. 실체는 뭔지 모릅니다. [각주:2]

종종 내가 느끼는 불안과 감정을 내것처럼 표현해 놓은 곳. 책을 읽다 이런 부분을 만나면 반갑고 좋다. 나만 그런게 아니니까. 나만 속상한게 아니니까.

 

지난 얼마 동안 나는 얼마나 자주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는가. 나는 무엇 때문에 더 살아야 하는가, 라고. 나는 인생의 즐거움을 느끼지 못한다. 또, 꼭 필요한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에게 기쁨도 주지 못하는 이런 인생을 계속 영위해야 할 의무도 알지 못한다. 이전에는 공포를 느꼈으나, 이제는 나와 삶을 연결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에 평안함을 느낀다. 무한한 적막감이 나에게 입을 벌리고 있다. 엄청난 무기력이, 어떤 환멸이나 권태에서 비롯된 거싱 아닌 무관심이 나를 가득 채우고 있다. 나는 성공했으며 약간의 재산도 있다.

 

나는 언젠가 내가 인생의 무의미함에 대해 깊게 탄식했을 때 니나가 한 말을 기억하고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인생의 의미에 대해 묻는다면 그는 그 의미를 결코 알게 되지 못할 거예요. 그것을 묻지 않는 자만이 해답을 알아요. [각주:3]

 

죽은 뒤에 생전의 죄를 속죄할 수 있다면 나는 그렇게 할 것이오. 내가 지은 죄란 결단을 회피했다는 것이오. 나는 그것이 비겁했기 때문일까 스스로에게 물어보오. 그러나 그렇지 않소. 아마 유약했기 때문일 것이오.[각주:4]

 

언니는 그 사람과... 니나는 망설였다. 그러다가 재빨리 말을 마쳤다. 행복했어? 휴, 니나. 행복이 뭐니? 우리는 평화롭게 사는 거야. 공통의 관심이 있고 한 신문사에서 같이 일해. 자식이 없고 우리는 자식 없는 것을 좋게 여기고 있어. 멋진 집이 있고, 자동차, 개, 그래, 멋진 셰퍼드들이 있어. 그 밖에 더 뭘 바라야만 돼?

그때 물론 나는 이것이 행복일까, 하고 자문했다. 그러나 나는 불행하지 않았고, 삶에 대해 지나친 요구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행복하다고 나 자신과 타협할 수 있었다.

사랑에 대해서 언니는 알고 있어? 니나는 질문했다. 요는 사랑이 무언지 알고 있느냐는 거야.

그래, 하고 나는 말했다. 그러면서 나는 불쾌해졌다. 사랑이란 누군가에게 속해 있다는 감정이야. 오로지, 그리고 철저하게 말야. [각주:5]

 

나는 죽고 싶은 거예요. 이해 못하시겠어요? 사는 것보다, 여기서 사는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게 있다는 걸 알고 있어요. 공부하고, 먹고, 자고, 직업을 갖고, 결혼하고, 아리를 낳고, 이런 게 다 뭐죠? 이것만으로는 모자라요. 사람들은 그런 것에 익숙해져서 마치 거기에 의미가 있는 것처럼 스스로에게 타이르죠. 그래요, 다른 어떤 것은 필요로 하지 않고, 또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의미가 있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내가 어떻게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겠어요? 멋진 순간이 우리의 삶에 존재한다는 것을 나는 책에서 읽었어요. 사랑을 하거나 혹은 아이를 낳거나 혹은 어떤 진리를 발견한 순간이 그렇다는구뇽. 그러나 그런 건 영원히 계속되지 않아요. 우리는 그저 맛만 보고 조금 구경하고 그리고 다시 빼앗기고 말아요. 이건 절대로 나에겐 충분치 못래요. 그래서 나는 죽고 싶어요. 이해하시겠어요?[각주:6]

 

당신은 내 삶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습니다. 당신은 내 본질 중 굳어 있는 부분을 용해시켰습니다. 당신은 나에게 좋은 일을 베풀고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일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나는 마치 숨쉬는 공기처럼 당신이 필요합니다. 당신을 찾으려 나는 거리를 헤맵니다. 당신을 만나야겠습니다. 부디, 부디, 내 이야기를 들어주십시오. 나를 찾아주시든지, 아니면 단 한 줄이라도 좋으니 소식을 주십시오. 나의 삶을 당신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각주:7]

 

우울에 관해서 생각하고 있었어. 니나는 천천히 말했다. 온갖 아름다운이란 것이 일시적이고 다만 얼마 동안 빌려온 것이라는 것을 알아버린 사람, 그리고 우리가 인간들 틈이나 나무와 극장과 신문 사이에 있으면서도 마치 차가운 달 표면에 앉아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고독하다는 것을 알아버린 사람은 누구나 다 우울하지.

니나!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니? 네가 삶을 기쁘게 사는 줄 알았는데. 왜 삶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거야? 너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잖아?

그랬지. 니나는 대답했다. 우울은 인식의 시초일 뿐이야. [각주:8]

우울은 인식의 시초일 뿐이다. 정말 너무 맞는 말이라 깜짝 놀란 부분! 우울할 때(우울이라기 보다 예민해진다고 해야하나, 그럴 때) 모든 감각들이 더욱 날을 세운다. 모든 것들이 기민하게 다가오고 느껴진다.

 

가끔 저녁에 거리로 나갈 때가 있어. 특히 여름날 저녁때 그래. 그러고는 전등이 켜 있고 라디오 소리가 새어나오는 방안이나 정원을 들여다보곤 해. 거기에는 사람들이 앉아 있지. 그러면 나는 가족에 대해서, 그리고 나에게 잘해 주고, 내가 의지하고, 밤에는 나를 안아줄 한 남자에 대해서 끔찍하지만치 강렬한 동경을 느껴. [각주:9]

 

 

내 생각에 사람들이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계속해서 생기에 차 있을 때야. 그리고 마치 미친 자가 자기의 고정 관념에 몰두하듯이 무언가에 몰두하고 있을 때야. [각주:10]

그래서 사랑을 하면 행복해진다고들 하나보다. 모든 것이 색을 입은듯 생기 있어지고, 잠을 못자도 쌩쌩하며, 별 일들에도 웃음이 피기 마련이니까. 다시 태어난 것 같은 기분이니까. 매일이 봄처럼 생동하니까.

또 무언가에 몰두할 때. 그렇다. 그래서 내가 4학년을 너무너무 그리워하는 것일테지. 지금도 직업에? 일상에? 몰두하는 것은 맞지만, 그래도 그때가 그리운 건 나에게 몰두하는 때라서가 아닐까. 아니면 사실은 이조차도 나의 미화인지도. 가장 심적으로 힘들었던 때를 꼽으라면 분명 그 1년에 속한 날일테니까.

 

그러내 내 생각에는 네가 그 애를 계속 옆에 둘 수 없을 것 같구나. 아니, 곁에 두다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아주머니는 미소짓기만 했다. 그러고는 나를 당황하게 하는 말을 했다. 물론 뜻밖의 말은 아니었다. 나 자신도 그전에 이미 수백 번이나 생각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말했다. 그애는 네가 갖고 있는 조용한 세계에서는 살 수 없을 거다. 뜨거움, 소란, 변화들이 있어야 하는 애다. 그 애는 많은 모험을 무릅쓸 그런 종류의 여자다. [각주:11]

 

자기 자신도 모르면서 인간이 무엇인지 알겠다는 것은 웃기는 일이야. 그 당시 나는 어렸고 매우 혼란한 상태에 있었어. 언니도 알아? 아침에 일어났을 때 전날과 아주 달라진 자신을 발견하는 거야. 갑자기 다르게 걷고, 다르게 글을 쓰고, 다르게 말을 하는 거야. 다른 사람은 눈치채지 못하지만 자기 자신은 잘 알고 있지. 우리는 이렇게도 될 수 있고, 혹은 전혀 다르게 될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거야. 우리는 자기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고 자기 자신과 게임을 할 수 있어. 책을 읽으면서 책 속에 있는 이런저런 인물과 자기가 비슷하다는 것을 느끼는 경우가 있잖아? 다른 책을 읽으면 또 다른 모습이 보이고, 끝없이 이런 일이 반복되는 거야. 자기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수백 개의 서로 다른 자아가 보여. 어느 것도 진정한 자아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모든 게 미정이야.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 될 수 있어. 사실은 이 여러 자아 가운데 하나의 자아만을, 미리 정해져 있는 특정한 하나의 자아만을 선택할 수 있을 뿐이지만.

그래. 나는 말했다. 그렇지만 가끔 우리는 선택이 잘못된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될 때가 있지. 혼자 있을 때, 아주 고독할 때, 자신의 내부에서 어떤 것이, 자기 자신의 모습이 떠오르는 거야. 우리는 그것을 보지. 자기 자신을 말이야. [각주:12]

 

누구나 우릴 보면 자매라고 여길 것이다. 똑같은 얼굴이다. 그러나 나는 내 얼굴이 훨씬 예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우리가 나란히 걸어갈 때 니나를 쳐다본다. 내 얼굴은 말끔한데 니나의 얼굴은 표정이 가득하다. 바로 이것이다. 니나는 이 얼굴을 위해 비싼 대가를 치렀다. 나도 니나처럼 독일에서 전쟁과 고난을 함께 겪었다면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속 편한 생각일 뿐이다. [각주:13]

 

그러나 그녀 역할이 더 쉬운 것이었다. 더 격한 감정에 사로잡힌 사람이 항상 불리한 법. 감정이 어디서나 그를 방해하고, 자기의 정열에 걸려 넘어지고, 패배할 때마다 더 우스꽝스러운 짓을 한다. 찬스는 매번 줄어들지만 감정은 더욱 격렬해진다. [각주:14]

 

이건 정말 지나쳐. 나는 말했다. 사랑을 재능과 결부시키고 있어. 사랑하니까 사랑하는 것이지, 재능이 많고 적음은 부차적 문제라고 생각해. [각주:15]

 

아름답군요. 나는 니나에게 말했다. 찢어서 유감입니다, 암기하실 수 있습니까?

아니요. 니나는 말했다. 벌써 잊었어요. 쓴 것은 잊어버려요. 그것은 나와는 상관없는 것이니까요. 그건 이미 지나버린 것만을 말하죠. 나는 그 동안 나이를 먹었는걸요. [각주:16]

 

당신은 나에게 몹시 고독하다고 말했고 그 말에 대해 나는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당신은 진부하게 받아들였을 테지만, 그러나 사실입니다. 나는 오래전부터 사람은 누구나 외로운 것이며 이것은 어떻게 할 수 없는 무서운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각주:17]

 

나는 자유롭게 있어야 한다는 것 외에는 분명히 알고 있는 것이 없습니다. 나는 내 속에 수백 개의 가능성이 있는 것을 느껴요. 모든 것은 나에게 아직 미정이고 시작에 불구합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자신을 어떤 것에다 고정시킬 수 있겠습니까. 나는 정말 내가 누구인지 모릅니다. 당신에겐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나는 정말로 나를 모릅니다. [각주:18]

 

 

독자는 재미를 요구하고 있어. 작가는 좇아가기 쉬운 편안한 이야기를 제공해야 하는 거야. 처음에는 이것이 일어나고 다음에는 그것, 그러고는 또 저것, 그리고 행복이든 불행이든 결말이 나야 해. 마치 극장에서처럼 모든 것이 깨끗하게 결말이 나야 해. 그러면서 사람들은 자기가 리얼리스트라고 생각하는 거야. 하지만 정작 인생에는 한 가지 계산서도 없고 아무런 결말도 없는데 말이야. 결혼도 결말이 아니고, 죽은도 겉보기만 그렇지 결말이 아니고. 생은 계속 흘러가는 거야. 모든 것은 혼란스럽고 무질서하고 아무 논리도 없으며, 모든 것은 즉흥적으로 생성되고 있어. 그런데 사람들은 거기서 한 조각을 끌어내서는, 현실에는 없고 삶의 복잡함에 비하면 우스울 뿐인, 작고 깔끔한 설계에 따라 그것을 건축하고 있어. 모두가 꾸민 사진에 지나지 않아. 내 소설도 마찬가지야. [각주:19]

 

언니는 어떻게 생각해? 훨씬 덜 아름답고 덜 효과적이지. 독자는 쉽게 남을 믿는 한나를, 또한 자기 자신과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는 한나를 조금은 부끄럽게 생각할 거야.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것이 더 진실에 가까워. 우리는 영웅이 아니야. 가끔 그럴 뿐이야. 우리 모두는 약간은 비겁하고 계산적이고 이기적이지. 위대함과는 거리가 멀어. 내가 그리고 싶은 게 바로 이거야. 우리는 착하면서 동시에 악하고, 영웅적이면서 비겁하고, 인색하면서 관대하는 것, 이 모든 것은 밀접하게 서로 붙어 있다는 것, 그리고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한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행위를 하도록 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아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걸 말야. [각주:20]

 

나는 이 지역과 도시 전체를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니나는 중얼거렸다. 언니는 이런 감정을 가져본 적 있어? 여태까지 애착을 갖고 있던 것이 지긋지긋해지는 것, 갑자기 아주 지긋지긋해지는 일 말이야. 하루라도 더 참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거야. 모든 것이 이전과 똑같아. 방과 집과 거리 모두가 말이야. 갑자기 모든 것이 변해서, 밉고, 참을 수 없이 적막하고, 적의를 품은 듯 보이게 돼. 그러면 떠나야만 하는 거야. 정말 떠날 때가 된 거야. 자기도 모르게 이미 우리는 이 모든 사물들로부터 자기 자신을 끄집어냈던 거야. 사물들은 스스로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들을 보니까 사는 거야. [각주:21]

 

해뜨기 직전의 시간은 인간을 좋아하지 않는 시간이었다. 쌀쌀하고 냉정하고 차가우며 엄격했다. 세상이 드러나기 바로 직전의 휴식 시간, 마치 자연이 호흡을 멈춘 듯한 시간, 어떠한 소리도 생명력이 없는 듯한 무시무시한 시간, 해뜨기 직전의 시간은 시간보다는 영원에 더 가까웠다. 이날 아침 나는 처음으로 그 시간이 내뿜는 완강한 적의를 느꼈다. [각주:22]

 

나는 모든 다른 남자들이 굴욕적이라고 여기는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나는 니나가 부르자 마치 개가 주인의 휘파람 소리를 듣고 달려가듯 그녀에게 간다. [각주:23]

언젠가 니가 내게 했던 말.

 

니나는 망설이면서 말했다. 이해하실지 모르겠어요. 커다란 저항감을 갖고 시작한 일에 마침내 적응해 버리는 것 말이예요. 아니죠. 적응한 것은 아니죠. 받아들인 거죠. 제 말뜻을 이해하시죠? 인간이 순응만 하면 참을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요. [각주:24]

씁쓸한 구절. 적응이 아니라 결국 받아들이게 되는 것. 내 삶에서도 언제나 그래왔다. 그래서 자조적인 말도 있지 않은가, 죽으란 법은 없다는.

 

봐라. 너는 중요한 인식의 순간에, 적나라한 진실 앞에서, 도망치고 있다. 다시 들어가라. 노인을 보고 너 자신을 보라. 비록 두렵기는 하겠지만 전혀 해는 안 되는 법. 이것도 삶의 일부일 뿐. 모든 것을 경험해야 한다. 추악한 것을 보려고 하지 않는 것은 중요한 것을 보지 않으려고 하는 것과 같다.[각주:25]

경험하지 못한 것을 상상하지 못한 탓에 없다고 생각하지 말기. !! 경험이 늘 키워왔다. 그게 나든, 너든, 누구든.

 

슈타인의 일기는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매우 깨끗했고 단정했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의식적으로 공들인 필체였다. 니나는 이 글씨체를 싫어했다. 아주 기교적이고, 꼼꼼하고, 신중한 특성이 지나치게 강조되어서 과장된 느낌, 부자연스러운 느낌을 주었다. 생명력이 없었으며, 단지 틀만 있을 뿐이었다. 점차 나도 이 글씨체에서, 그리고 이 남자에 대해서 저항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내가 읽은 것은 나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는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각주:26]

과장스럽다. 생명력 없이 단지 틀만 있을 뿐. 전부 모서리처럼 다가오는 글.

 

당신은 절르 알고 있어요. 그렇지만 당신은 그걸 시인하려고 하지 않아요. 당신은 정신이 무엇인지, 정신도 배고픔, 비 또는 더위와 마찬가지로 현실적이라는 점을 알고 있어요. 또 정신에 쫓기는 일이 매우 불쾌한 것이라는 것도 알고 계세요. 당신은 그런 경험을 틀림없이 하셨을 거예요. 그런데 왜 귀 먹고 눈먼 시늉을 하시는 거죠? [각주:27]

 

처음으로 나는 슬픔도 재산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지금 내 나이는 마흔여덟이다. [각주:28]

슬픔도 재산이라니. 마흔여덟 누군가의 깨달음이라면 그건 거의 옳다고 할 수 있겠지. 그렇지만 사실 지금 나는 슬픔이 제일 싫은데. 슬픔 속에서 허우적이기 싫어서 단선적인 생각과 결정을 하는 나인데. 이같은 의미에서 내 재산은 상당히 빈하겠군.. ㅠ

 

나는 이미 오래전에 남편과 멀어졌다. 나는 나 혼자만의 생활을 하고 있다. 그는 이 부분에 대해 어떤 간섭도 하지 않는다. 니나가 그를 사랑하느냐고 물은 적이 있었지. 나는 그를 사랑한다. 나의 집을 사랑하는 것처럼, 나의 달콤한 습관들을 사랑하는 것처럼. 그는 나의 습관이다. 그렇다 해도 이런 인식이 전혀 나를 아프게 하지 않는다. [각주:29]

나의 집을 사랑하는 것처럼 그를 사랑한다. 그는 나의 습관이다.

그저 습관이 된 것이지, 우리는 이미 멀어진 것이다. 게다가 이러한 전체의 인식 조차 나를 슬프게 하지 않는다. 정말 습관이 되어버린 것.

 

약간의 안정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 나에게는 좋은 일이었어. 진정한 안정은 물론 아니었어. 그러나 당시에 이런 것은 문제가 안 됐어. 멋진 가을이었고 나는 훌륭한 아내가 될 준비가 되어 있었어. 청춘에 종지부를 찍고 퍼시와의 생활에 나를 맞추었어. 우리는 부엌 살림을 사기 시작했어. 여기서는 냄비를, 저기서는 커튼 천을 하는 식으로 말이야. 신부 역은 매력적이었어. 나는 단정해지고, 스스로 중요해지고, 아주 달라졌다는 느낌을 갖게 되었어. 퍼시는 어렸고, 약간은 부박하고, 흥분하길 잘했어. 그리고 나를 약간 비웃는 것 같았지만 나는 개의치 않기로 했어. 아니, 퍼시의 이런 면을 좋아했고 이런 것이 퍼시의 우월한 표시인 것처럼 나는 생각했으니까. [각주:30]

 

나는 말하고 싶었어. 아니라고, 슈타인은 당신의 정신과 감정의 빈곤함 때문에 당신을 미워한 것이라고. 그때 나는 잠시나마 퍼시와 결혼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퍼뜩 느꼈어. 그러나 나는 더 생각해 보려고 하지 않았어.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충실하려고 들었어. 나는 신들의 경고를 흘려들었으며 그래서 그 때문에 벌을 받았어. [각주:31]

가장 무서웠던 말. 자신만이 느끼는 직감, 직관을 신들의 경고라고 표현한 부분이 예리하다. 자신에게 중요한 일일수록 사실 그 직감(직관)이 맞을 확률이 대개 높으니까.

정신과 감정의 빈곤함. 이 부분은 참 어렵다. 빈곤하다고 해서 불편함을 느끼지도 못할 뿐더러 사실 빈곤의 잣대마저도 개개별로 상이하기 때문에. 어렵다. 지극히 상대적인 빈부이기 때문에. ㅠㅠ 그치만 가장 무섭다. 대화의 8할 이상을 차지한다고 생각하니까. ㅠㅠ

 

니나는 내가 가지려고 했고 되기를 원했던 모든 것에 대한 비유일지 모른다. 그렇게라도 항상 있어주면 좋겠다. 니나는 생 자체에 대한 비유이다. [각주:32]

슈타인도 니나를 동경했었나보다.

 

니나의 방문이 나의 평화를 위협했다. 인위적인 평화가 존재한다. 속이 텅 비고 부서질 것 같고 모든 이음새가 삐그덕 거리는 평화다. [각주:33]

 

나는 떠나고 싶다. 나의 안온함이 있는 집에 가고 싶다. 이런 식의 거창하고 한번도 가본 적 없는 위험한 세계로 들어가는 것보단 질서가 잡힌 집에서 사는 게 더 낫지 않은가? 모르겠다. 더 이상은 모르겠다. 갑자기 하나 이상의 질서가 존재했다. 많은 종류의 질서가 있었다. 모든 것이 맞든가 아니면 모든 것이 틀렸다. 매우 혼란스러웠다. [각주:34]

 

마침내 나는 모든 경험으로 미루어볼 때 운명은 운명이며 인생의 중요한 일들은 당사자들의 머리 너머에서 결정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각주:35]

 

마침내 마이트는 내가 결혼에 적합한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느냐고 물었다. 더 중요한 것은 결혼이 과연 할 만한 것인지, 도움이 되는지,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 보는 것이라고 마이트는 말했다.

마이트의 결혼은 내가 아는 사람들 중 드물게 모범적인 경우라고 생각해 왔으므로 이런 마이트의 질문은 나를 당황하게 했다. [각주:36]

 

그녀는 내가 혼자서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 그녀에게 무관심해졌다는 것을 조금도 몰라. 친구여, 여자들은 우리를 항상 실망시킨다네. 그러나 그는 현명하게도 -나에게는 그렇게 생각되었다- 다음과 같이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도 여자들을 실망시킨다네. 진정한 결혼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네. 체념만 있을 뿐이지. [각주:37]

 

그녀는 왜 나를 부른 것일까? 내가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다. 그녀 가까이 있는 것이 나에게는 고통인 것도 알고 있다. 나는 니나가 이미 7년 전부터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도 왜 그녀는 나에게 자유를 돌려주지 않는 것일까. 자기가 얼마나 잔인한지 니나는 모르고 있다. 그녀의 대단한 총명에도 불구하고 니나는 다른 여성들보다 나을 것이 없다. 그리고 나는? 나는 다른 남자들보다 똑똑한가? 웃기면서도 끔찍한 유희라고 할 수밖에. 나는 그녀를 계속해서 방문할 것이다. 미친 짓! 어리석은 짓! 그러나 그녀 없는 나의 인생은 무언가? [각주:38]

1920년대에도 사랑이라고 불리는 것은 이렇게나 복잡하다. ㅋㅋㅋㅋㅋㅋ루이제 린저 선생님.. 아직도 2018년인데도 저도 그래요. ㅠㅠ

 

지금까지 살았는데요? 나는 살려고 해요. 나는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을 사랑해요. 그러나 당신은 이해할 수 없어요. 당신은 한번도 살아본 적이 없으니까요. 당신은 삶을 비켜갔어요. 한번도 모험을 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당신은 아무것도 얻지도 못했고 잃지도 않았어요. [각주:39]

 

나는 그녀를 초대하는 게 약간 불안했다. 그녀의 생동감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니나가 변화되었다고 생각했다. 지난해의 저 숨막히는 명예심, 쉽게 끓고 쉽게 끝나는 정열, 분주함, 과도 노출 등을 전혀 볼 수 없었다. 이 모든 것은 하나의 과정에 불과했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분주함으로 자기를 내몰아 자기에게 부과된 침묵에서 벗어나려는, 필연적으로 실패하게 되는 시도였다. [각주:40]

 

우리는 서로 만나긴 했지만 어느 누구도 상대방의 문지방을 넘어서지 못한 거요. 문지방 너머 다른 사람의 왕국이 있는 그곳으로 말이오. 당신은 나의 생을 인정할 수 없었소. 당신의 인생과는 너무 달랐던 거요. [각주: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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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에 남아 있는 사람

"그래, 사랑이 없어지면 대신 자유가 생겨서 좋지."

진심이었는데 준호가 안쓰럽게 나를 바라봤다.[각주:1]

 

최악의 상황을 다 겪으면서도 그 여자 곁에 머무르기로 했다면, 그것을 사랑이라 부르지 못한다면 무엇을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까. 어쩌면 나는 상대의 최악을 견디지 못해서 헤어진 것은 아닐까. [각주:2]

 

 


안경

소미는 남자 취향이 일관되게 분명했다. 그녀는 안경 쓴 남자를 한 치의 유보 없이 편애했다. [각주:3]

소미 나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애들도 언젠가 안경만 씌우면 좋아한다고 내게 했던게 생각난다. 그런데 나만 그런게 아닌가보네. 흐흐

 

소미는 꼭 안경이어야 하는 이유를 백 가지도 더 댈 수 있었다. 우선 특정 물건에 항시 의존해야 하는 태생적 취약함에 끌렸다. 섬세하고 절제된 손동작으로 안경을 다루는 순간에도 매료되었다. 무언가에 집중하며 콧등의 안경을 추켜올릴 때, 안경다리 끝을 입술에 대고 골똘히 생각에 잠길 때, 두 눈을 깜빡거리며 손수건이나 티셔츠 끝자락으로 안경알을 닦을 때, 그리고 사랑을 나누기 전 협탁 위에 안경을 벗어둘 때 소미는 그 남자를 조금씩 더 사랑했다. 사랑의 행위 도중에도 기어코 속속들이 살펴봐야겠다며 팔을 뻗어 다시 안경을 찾아 낄 때의 엉큼함조차도. [각주:4]

이런 이런 때마다 그 남자를 조금씩 더 사랑했다니. 설레는 표현이다. 누군가가 늘 반복적으로 하는 행동을 두고, 그 행동을 할 때마다 점점 더 네가 좋아져, 라니... 너무 로맨틱하잖아ㅠㅠ 예를 들어 누군가가 내게 머리를 귀뒤로 쓸어넘길 때마다 조금씩 네가 더 좋아져 라고 하는 것과 같달까. 으앙 .. ㅋ혼자 쥬금

아 그리고 어쩜ㅋㅋㅋㅋㅋ 안경쓴 사람의 매력을 이렇게나 자세히 열거할 수 있을까ㅋㅋㅋㅋㅋㅋㅋ 하 만족

 

죽음에 이르게 되더라도 존재는 반드시 어딘가에 머무는구나 싶어요. 절대로 끊어지지 않는 것들이 있어요. 이를테면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나더라도 그와 함께했다는 감각은 영원히 남잖아요. 반대로 증오 같은 감정도 마음 한구석을 차지한단 말이죠.[각주:5]

 

가짜로는 마음을 움직일 수 없습니다. 오직 진짜만이 마음을 꿈틀거리게 하죠. [각주:6]

내가 믿는 진심의 가치.

 

"마음이 따뜻하셔서 그래요."

남자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두 사람 사이에 나비 한 마리가 날아든 것 같았다. 소미는 가슴속이 간지러워서 남자를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겨우 고개를 드니 사려 깊은 눈빛이 안경 안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봄바람이 그의 앞머리를 살랑살랑 흔들어댔다.[각주:7]

마음이 따뜻한 사람은, 마음이 따뜻한 사람에게 마음이 따뜻하다고 할 줄 안다.

꺄알이ㅏㄹ알일이ㅏㄹ아구ㅠㅠ 이 책을 읽으며 이 단편이 가장 심장이 간질간질. ㅠㅠ웬 낭독회에서 이런 사람을 만난다면 나도 가고 싶다. 그리고 굉장한 클리셰라고 할지는 모르겠지만 너무 낭만적인 만남도 됴타됴아 ㅠㅠㅠㅠㅠㅠㅠㅠ 허ㅠㅠㅠㅠㅠㅠ 인연은 이렇게 만나나봐요..

 

 


치앙마이

영욱이 희진의 등을 어루만지면서 눈물 뚝, 반복해서 귓가에 속삭였다. 딸아이가 울 때마다 이렇게 달래주겠구나. 희진은 눈물범벅이 된 와중에도 영욱이 한 아이의 아빠임을 새삼 통감했다. 어떤 흔적은 영원히 지워버릴 수가 없었다. [각주:8]

 

먹고 마시면서도 대화는 끊이지 않았다. 영욱은 지적이면서 상냥했고, 희진은 호기심과 재치가 넘쳤다. 혼자서도 충분히 괜찮았던 두 사람은 같이 있을 때 더욱 즐겁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각주:9]

 

거짓말. 희진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자신을 배려한 선의의 거짓말이었다. 영욱은 전혀 괜찮지 않았다.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 사람을 너무나 사랑하면 원치 않아도 절로 알게 되는 것들이 있었다. 갑자기 방 안의 공기가 갑갑하게 느껴졌다. [각주:10]

 

나는 자유다.

희진은 몇 번이나 그 말을 되뇌었다.[각주:11]

 

그저 타인의 불행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한 결론에 이르자 희진의 눈에서 봇물 터지듯 눈물이 흘러나왔다. 마사지가 끝나 잠에서 깬 희진이 눈가를 닦아내자 맑은 눈빛의 그녀는 가슴에 손을 얹으며 한숨을 쉬었다. 당신의 슬픔을 나도 느낀다는 듯이. 그 아픔을 대신 표현해주겠다는 듯이. 그것은 마음을 다한 위로였다.

그런데.

희진은 지금 자신보다 더 불행한 사람은 없다고 확신하면서도 더한 불행을 보고 이 정도면 괜찮다는 위안을 얻고 싶었던 것이다. 그 못난 마음이 너무 창피해서, 그녀에게 너무 미안해서 울음이 터졌다. [각주:12]

 

"그이가 호텔로 나를 데리러 왔을 때부터 머지않아 우리가 헤어질 것을 직감했어. 어쩌면 끝이 보이니까 더 인생 최고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것 같아. 슬아야, 네가 이해할 수 있을까? 살다 보면 어떤 순간이 너무도 완벽해서 오히려 슬퍼질 때가 있단다. 왜냐하면 그토록 완벽한 순간은 일생에 단 한 번밖에 찾아오지 않는다는 걸 알거든. 그래서 아줌마는 후회 없이 꿈을 꿀 수 있었어."

(중략)

"그거 아니? 시간은 결국 우리 편이야. 애쓴 만큼 보답해주고 상처를 관대하게 보듬어주기도 한단다. 슬아도 처음엔 나를 싫어했지만 지금은 이렇게 얼굴 마주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잖아?"[각주:13]

너무 너무 좋았던 부분. 내가 슬아이기도 했다가, 희진이기도 했다가.

 

"사람을 사랑하거나 사랑받는 것만큼 인생에서 중요한 일은 없다고 생각해. 슬아도 나중에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아빠처럼 해. 그거면 돼. 마찬가지로 슬퍼해야 할 때 충분히 슬퍼하고. 불완전한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은 딱 거기까지야."[각주:14]

불완전한 인간.

종교적인 색채가 띄지만, 나또한 진리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

불완전하기에 우리는 너그러울 수밖에 없다. 언젠가 나또한 실수를 할 수 있고, 언젠가 나도 저 상황을 겪게 될 수도 있고, 언젠가 나도 아플 수 있다. 그래서 오늘도 이해하고 들어주려한다. 오해하지 않고 싶어서.

지난 여름에 했던 독서모임에서 보건샘께서 하셨던 말씀이 떠오른다. 주변에서 잉꼬부부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던 보건샘께서는, 비결은 하나인 것 같다고. 물론 본인도 남편이 맘에 안드는 점이 당연히 없지 않다고. 그러나 우리 인간이 모두 불완전한 존재임을 남편도, 나도 안다고. 그렇기에 웬만한 것들이 이해가 된다던 말씀.

쉽게 이야기하셨지만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혼자만의 노력으로 되는 것도 아니며, 둘의 노력을 유지하기도 어려운 일이니까.

그때 보건샘께서 참 좋은 분을 만나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우리가 잠든 사이

건너편에서 일본인 커플이 승무원 모자를 쓰고 포토 이벤트에 참여하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차창 밖 경치에 대해 안내하던 낭랑한 목소리의 승무원이 두 사람의 기념사진을 찍어주었다.

"잘 어울리네. 예쁘다."

어머니가 그 모습을 바라보며 흐뭇해했다. 젊음은 그 자체만으로도 눈부시니까. [각주:15]

 

 


나의 이력서

"잘 잤어? 날이 좋으니까 보고 싶다."

그는 다투고 난 다음 날도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는듯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평소처럼 전화를 거러왔다. 한없이 밝은 목소리에 울컥한 소영이 가시 돋친 말투로 쏘아붙였다.

"대체 왜 이래? 관두고 싶으면 그냥 그렇다고 말해. 사람 맞음 갖고 장난하는 거야 뭐야."

수화기 너머에서 침묵이 흘렀다. 소영은 내심 마음의 준비를 했다.

"네가 좋아서 그래. 사람이 좋은 데 무슨 이유가 필요해."

다정한 목소리에 긴장이 풀리며 온몸에서 힘이 빠졌다.

"내가 널 사랑한다고."

지훈은 더없이 확고한 어조로 소영의 입을 막았다.

정말 소중한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말은 허구였다. 소영은 자신이 아주 오래전부터 사랑한다는 말을 간절히 원해왔고, 총체적이고 유보 없는 사랑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누가 뭐래도 너는 존재 그 자체만으로 좋은 사람이자 근사한 여자라고 긍정해줄 사랑. 어느덧 그녀의 가슴속에서 희뿌연 안개가 걷히고 따스한 바람이 나부꼈다. 소영은 겹겹이 입고 있던 마음의 갑옷을 떼어 내려놓기로 결심했다. [각주:16]

다정한 이라는 말이 없었어도 다정하다고 생각했을 거야! ㅋㅋㅋ누구라도!!!

하.. 간질간질. 그렇게 좋아할 수 있지. 간질간질..

 

그럼에도 두 사람은 형식적으로 연인 관계를 유지했다. 아직은 상대를 놔주고 혼자가 될 자신이 없었다. 어떤 종류의 관성이 두 사람 사이에서 작용했다. 점점 관계에 침전물이 쌓여갔다. 평소에는 드러나지 않다가도 사소한 계기로 부딪힐 때 작은 앙금들은 맹렬한 폭발을 불러왔다. [각주:17]

 

존재하는 것은 그저 한 여자와 한 남자의 원시적인 성욕과 수면욕, 그리고 관습화된 친밀함이었다. 잠든 내내 그녀의 숨결이 그의 목덜미를 덥혔고 그의 입술은 그녀의 이마에 닿아 있었다. 그렇게 또 한 번 둘은 이별의 위기를 넘겼다. [각주:18]

 

지훈은 무슨 일이 있어도 먼저 이별을 고하지 못할 터였다. 소영을 위해서라기보다는 그런 책임을 감당할 수 없어서였다. 그간의 일들이 떠올랐다. 서로 상처만 주고받으며 조금씩 무뎌져간 흔적만이 가득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사랑에 대한 확신도 시간의 흐름에 떠밀려 엷어지고 있었다. 그사이 많은 것이 변했다. [각주:19]

 

일을 그만두거나 직장과 가정을 함께 짊어지는 것, 어느 쪽도 썩 마음에 드는 선택지가 아니었다. 조금 잘났다 싶은 남자들은 예외 없이 자기를 떠받들고 챙겨주는 여자를 원했다. 관계 유지에 들이는 노동도 대개 여자가 맡아줄 것을 요구했다. 소영은 이제 그런 것들이 지겨웠다. 대신 연하의 무해한 남자들을 만났다. 체력과 호기심이 넘치는 그들은 연상의 여자를 성적으로 만족시키려 애썼고, 소영은 그런 단순한 열정이 싫지 않았다. 물론 업무 관계로 만나는 남자는 철저히 배제했다. 질척거리거나 개인 영역을 침범하려 하거나 삶의 방식을 판단하거나 구속하려고 할 때도 가차 없이 끊어버렸다. 소영이 원하는 것은 몸과 마음을 온전히 자기 자신이 통제하고 있다는 실감이었다. [각주:20]

 

 


Keep Calm and Carry On

규칙적인 운동은 일상을 바꾸고 삶의 활력을 되찾아주었으니까.[각주:21]

아직 내가 인생에서 알지 못한 것 중 명확한 하나는 이것? 운동의 기쁨? 활력?

 

'상대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보기'는 그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 지켜온 원칙이었다. [각주:22]

 

"그 마음도 이해는 가요. 나이가 들면 감동할 일도, 재밌는 일도 적어지고 매사에 시큰둥해지거든요. 저도 그랬어요. 죄다 별일 아닌 것처럼 하찮게 여겼는데 잃고 나서 깨달았죠. 아, 사는 힘은 작은 데서 오는구나. 사소해 보이는 일이라도 집중하다 보면 살아갈 힘이 채워지는구나. 아프고 나서야 그 의미를 깨닫게 되었으니 이 나이 먹도록 헛살았죠."[각주:23]

작년을 지배하던 마음과 생각.

작은 데서 오는 힘, 사소해 보이는 일에 집중하는 데서 오는 힘. 그렇구나. 

 

"한데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제대로 된 삶이라는 건 열이면 열, 백이면 백 기준이 다 다른 것 같아요. 주관적이죠. 이게 맞는 길인지, 내가 원했던 길인지 스스로 질문해가면서 찾아갈 뿐이에요. 그 과정 자체가 인생이 아닐까 싶어요."[각주:24] 

너와 내가 많고 많은 이야기를 하면서 내렸던 결론이랑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결국 고민하며 살아야 한다던 결론.

 

 


사월의 서점

그가 생각하는 어른이란, 현실에서 도망치지 않으면서 일상을 단정하고 정성스럽게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각주:25]

크...................... 경선님 사랑해요..

 

그 대신 양식 있는 시민으로 사는 일, 인간으로서 품위와 존엄을 유지하는 일, 종교나 권력에 얽매이지 않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일, 그리고 뱃살이 나오지 않게 관리하는 일이 그에게는 중요했다. [각주:26]

 

그는 아내의 생리 주기를 숙지하며 그 기간에 아내가 충분히 쉴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불 속에서 포근히 품에 안고 아내가 잠들 때까지 가만히 등을 쓸어내리곤 했다. 그날이 아라면 아내의 옷을 하나씩 벗기고 정해진 순서대로 정교하게, 정성을 다해 사랑을 나눌 터였다.[각주:27]

내가 정말 정말 좋아하는 것. !!!!!!!!!!!!!!!!!!!!!!

그나저나 미용실에서 머리하는데... 이부분부터 급격히 야설스러워섴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진짜 땀났다. 하.. 머리해주시는 선생님이 남자라서 더 눈치보였다.. 하.. 이런 책 아닌데.. 오해하시면.. 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래도 읽었다ㅠㅠㅠㅠㅠㅠ재밌으니까...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그즈음 수현은 자신이 혼자인 삶에 제법 잘 맞고 어쩌면 그런 삶을 가슴속 깊이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오피스텔로 돌아오면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부엌에 서서 저녁 식사를 만들고, 바로 설거지와 뒷정리를 했다. 아침에는 청소할 시간이 없어서 저녁에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면서 바닥을 쓸었다. 이어서 샤워를 하고, 다음 날 입을 옷을 다렸다. 이를 닦고 치실까지 사용하고 나면 그제야 휴식 시간. 침대맡 고요한 불빛 아래 원없이 책 속으로 빠져드는 그 시간을 하루 중 가장 사랑했다. [각주:28]

수현? 저세요 ♥

너무 좋아

 

수현이 몇 번 와도 사월은 그를 항상 처음 맞이하는 손님처럼 대했다. 다른 손님도 똑같이 대하는 걸 보고 편안한 거리를 유지하기 위한 나름의 접객 방식이라는 걸 깨달았다. [각주:29]

 

"왜 그런 걸 궁금해하는 걸까요? 나이요? 나이가 그 사람에 대해 알려주는 건 너무나 제한적이에요."

"그렇다면 수현 님은 제가 몇 살인지, 남자 친구가 있는지, 혼자 사는지 전혀 궁금하지 않으신 걸로 이해할게요."

사월이 장난스럽게 눈웃음을 지어보였다.

궁금하지 않았다기보다는 이미 알고 있었다. 블로그를 통해 유추가 가능했다. 서른하나. 작년까지 만나는 사람이 있었지만 서점을 오픈하는 시점에 헤어짐. 구조해온 새끼 길고양이를 키우며 자취 중.

"그럼, 저에 대해서 뭐가 궁금하세요?"

갑작스런 질문에 수현이 헛기침을 했다. 사월은 수현을 빤히 쳐다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저라면.. 그 수많은 체크무늬 옷들은 어디서 구하시는지, 기억나는 가장 어릴 때 일은 무엇인지, 어떤 일로 처음 돈을 벌어봤는지, 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는 영향을 끼친 사람이 누구인지, 꾸준히 수집해온 물건이 있는지, 없애버리고 싶은 습관이 뭔지.. 이런 것들이 궁금할 것 같습니다."[각주:30]

나도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궁금한게 많아진다. 시시콜콜한 것들. 궁금하다. 그사람이 무엇으로 이루어져있는지, 내가 온 시간을 함께 할 수 없었고 없을테니까 모든게 궁금하다. 더 많이 알고 싶고.

수현이 사월에게 한 질문들이 너무 사랑스럽다.

난 저런 질문들을 받으면 어떤 ? 대답을 할까? 해야할까? ㅋㅋ 아마도 가장 먼저 귀여워서 웃음이 날 것 같다.

 

 


나의 총평.

'치앙마이'라는 단편을 보고, 방콕의 이야기가 꽤나 길었음에도 무리 없이 읽어내는 모습에 놀랐다. 임경선님이랑 함께하는 건 왠지 용기가 나는걸까.

벌써 아득한 태국 그리고 나의 방콕.

 

2018년 10월에 임경선 작가님을 소설로 만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했다.

어제와 오늘, 이렇게 블로그에 책 리뷰를 남기면서 갑자기 추워진 날씨와 고온으로 설정해둔 엉덩이난로로 많이 행복했다. 벌써 따뜻함이 가져다주는 노곤함을 느끼는 계절이 오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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