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SMALL
격무에 치이다 퇴근해 찾은 술집과 카페들은 얼마나 그럴 듯하고 멋진지. 쾌적한 테이블 간격, 근사한 조명과 인테리어, 편안한 공기. 업무 보고나 긴 회의도 없고 어딘가 불편하지만 웃으며 매일 인사를 나눠야 하는 사람도 없는 곳. 확실히 그즈음의 나는 어떻게든 회사생활을 정리하면 삶의 질이 달라질 거라는 허무맹랑한 생각으로 중국 호떡처럼 부풀어 있었다. 덩치가 크지만 안이 텅 비어 있어 한입 베어 물면 푹 하고 부서지는 허무한 그 빵 자체였다. 돌이켜보면 사회생활 경험이라곤 회사에 출퇴근하는 것이 전부였기에 품을 수 있었던 생각들이다. 일은 방식이 어떻든 누구에게나 전쟁인 것을 지금은 안다.(27)

 

여러모로 엉성했다. 그러나 홈페이지는 이제 막 출발하는 사람들의 등을 가볍게 밀어준다고 생각한다. 올릴만한 작업이 없다 싶어도 만드는 것이 좋다. 주소를 선점하고 간단한 문구라도 걸어두면 준비가 되어 있다는 느낌을 준다. (36)

 

불운은 나의 사정을 봐주지 않고 잔혹할 정도로 포개어질 수도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불운이라 부르는 것이었다. (108)

 

어딘가 무너져 내리고 있을 때 듣는 말들은 내 주변 어딘가를 머물 뿐 바로 귀에 들어오진 않았다. 하지만 그저 어떤 말이라도 건네려고 하는그 마음을 알아서 고마웠다. 한강이와 걷던 길, 한강이가 있던 장소에서 다시 하루하루를 보내는 건 끔찍하면서도 다행인 일이었다. (108) 

 

먼저 태어나는 것은 거추장스러운 일이 아닐까 생각했다. 장녀의 장점도, 단점도 있지만 그 어느 쪽으로도분류할 수 없는 성가시고 귀찮은 느낌이 내내 있었다. 뭐든 미리 겪어본다는 것은 좀 어려웠다. 어떠한 조언이나 사례 없이 매 순간이 처음일 때, 언니가 있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조금씩 센스가 남다른 친구들은 늘 언니가 있는 친구들이었다. (112)  

 

나름의 노력을 기울일 정도로 나는 자연스러운 사진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조금 더 부연하자면, 자연스럽게 사진을 찍으러 나가고 싶어지는 사진도 무척 좋아한다. 나에게 좋은 창작물의 기준은 노래 부르고 싶어지는 노래, 글 쓰고 싶어지는 글, 그림 그리고 싶어지는 그림 같은 것이다. 자연스럽게 그러한 마음들이 불러 일으켜지는 누군가의 결과물들을 좋아한다. 비상하고, 위대하고, 감히 범접도 할 수 없는 스케일의 창작물도 누군가는 만들어내야 하고 너무나도 대단하다고 생각하며 소비하지만 즐기는 것으로 만족한다. 반면 나는 역시 작은 세계를 만들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맞다. 압도하는 무언가보다는 가능하다면 "나도 뭔가 해보고 싶다"라는 마음이 순환되는 창작을 하고 싶다. 여백이 있어서 잠시 머물 수 있는 사진, 가볍게 카메라를 들고 산책이라도 나가고 싶게 하는 사진이 지금까지는 나의 목표다. 잔잔한 무언가를 별 탈 없이, 오래 오래 만들어내길 바란다. (263) 

 

무섭고 긴 밤이면 스티븐 스필버그가 영화를 만드는 과정 중 가장 싫은 순간에 대한 질문에 '차에서 내릴 때'라고 답변했다는 일화를 떠올린다. 차에서 내리면 현장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그 순간부터 촬영장을 진두지휘해야 하니까. <죠스>와 <ET>의 아버지, <환상 특급>과 <백 투 더 퓨처>의 감독,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거장조차도 그 중압감에서 벗어나기는 힘든 모양이다. 그러면 마음이 한결 편해지는 것이다. 저 대단한 사람도 통과할 수밖에 없는 감정인데 나 같은 범인이 비켜갈 수 있을 리 없다고. 그가 TED에서 '창의적인 사람이 되기 위한 10가지 방법' 같은 타이틀을 달고 강연을 한들 저 한마디만큼 내게 위로가 될까. 다큐멘터리 <스코어>에 나온 작곡가 한스 짐머의 명언 "어떻게 할지 전혀 감이 안 잡히는데, 그냥 다시 전화해서 다른 사람 쓰라고 할까..."를 생각하며 창작자들 각자의 공포와 두려움을 떠올려본다. 
힘 빼고 즐기며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최후의 최후까지 고통스러워하며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있다. 천재도 거물도 무엇도 아닌 나는 결국 후자에 감정 이입을 하게 된다. 결국은 모두가 불안과 공포를 모래주머니처럼다리에 묶고 무게를 이겨가며 터벅터벅 걸어 나가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면 어쩐지 꺾이는 무릎으로라도 한발 한발 용기를 내서 나아가고 싶어지는 것이다. (270)  

 

늘 많이 찍고 오래 찍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지만 많이 찍는 것보다는 오래 찍는 사람에게 점점 더 무게를 싣게 된다. 왜냐면 오래 찍으려면 여러 가지를 섬세하게 조절하는 방법을 배워야 함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재능도, 근력도, 기개도, 운도. 그래서 무리하는 습관을 조정하고 조금씩 더 쉬고, 덜 찍으며 가려고 한다. 철저하게 계획해서 오래오래 찍고 싶기 때문에. 반세기전의 기세 좋은 사진가처럼, 때로는 욕망을 숨기지 않으며. 흑백 사진 속에서 마가렛 버크화이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 인생과 경력은 우연이 아니었다. 철저히 숙고했다." (292) 

 

언제나 거대한 led 전광판의 마음으로 살고 있다. 누군가는 지나가다 고개를 들어 발견할 것이라는 마음으로 뭔가를 전송한다. 이제는 특별히 노력하지 않아도 만족스러울 정도로 업무 의뢰가 들어온다 해도, 그 양과 별개로 내가 해온, 또 하고 있는 일을 알리는 것도 중요한 일이므로 흐름을 놓치지 않으려 작업물을 올리는 편이다. 중요한 건 계속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리듬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포트폴리오 업데이트는 그 자체로 나의 중요한 궤적이 되기도 하기 때문에 습관을 들이는 게 중요하다. 함께 일해보고 싶은 업체에 먼저 메일을 보내거나 하는 적극적인 성격이 아니라면, 스스로의 자취를 단단히 만들어두는 데에 공을 들이는 것도 괜찮다. 잘 모아두고 분류해두면 누구든 알아보게 되어 있다. (299)  

 

반응형
LIST
반응형
SMALL
그리고 나는 곧 깨달았다. 면도도 잘 안 하고 후줄근해 보이는 이 말라깽이 청년은 자신을 위해 철저히 반자본주의적인 새로운 시스템을 발명했다. 그는 사람들의 인성을 믿었다. 그는 은행에 적금을 넣는 것보다 이 작은 도시의 거의 모든 사람의 마음에 도덕적 의무라는 유동자산을 저축하기를 더 좋아했다. 그는 자신이 가진 약간의 재산을 눈에 보이지 않는 자산에 투자한 것이었다. 제아무리 완고하고 의심이 많은 사람이라도 기술이나 노동을 돈벌이 수단으로 거래하지 않고 부탁받은 모든 일을 당연한 듯 흔쾌히 처리한 후 즉각적인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마음의 빚을 진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16)  

 

패배나 굴욕의 수치심으로 영혼을 다친 사람에게 다가가는 일이 절대 쉽지 않음을 잘 알지만, 이때의 경험을 통해 나는 누군가를 돕고 싶은 첫 번째 충동에 주저 없이 순종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웠다. 공감의 말과 행위는 도움이 가장 절실한 순간에만 참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33)

 

평범하지 않은 사건들이 사방에서 벌어지더라도 일상생활은 평범하게 계속 이어진다.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이런 동시성을 나는 한 신문에 실린 항공사진을 보고 명확히 이해했다. 사진에는 살인적인 폭격이 쏟아지는 참호와 옆 들판에서 일하는 농부가 같이 담겼는데, 농부는 아무일 없다는 듯 말을 끌며 밭을 갈고, 콩코르드 광장에서 왕이 처형될 때 센강의 낚시꾼들이 했던 것과 똑같이 폭격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러므로 역사적 시대의 모든 낭만적 상상을 진실에 맞게 지우면, 역사적 사건이 벌어지는 바로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사건을 경험하고 그에 참여하기보다 오히려 그것을 잊으려 애쓴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55)   

 

과도한 긴장은 일종의 마비를 일으킨다. 2000년 전에 이미 그리스 극작가들은 이것을 비극의 법칙으로 알고 있었다. 소포클레스와 아이스킬로스는 극의 길이를 두 시간, 길어야 세 시간으로 제한해야 하는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비극이 한없이 길어지면, 그것에 몰두하는 능력의 오히려 감소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모두 이 숙명적 비율을 체감하고 있다. 세계의 극이 길어질수록 점점 더 끔찍해지고, 사건이 자극적일수록 그것을 진심으로 연민하는 능력이 더욱 줄어든다. 전쟁에 대한 끊임없는 생각은 마음을 파괴하고, 시대가 우리에게 연민을 더 많이 요구할수록, 우리의 지친 영혼이 느낄 수 있는 연민은 더 줄어든다. (56) 

 

전쟁이 발발하고 1년이 지난 지금, 수천 명의 죽음에서 느끼는 감정은 이전에 수백 명의 죽음에서 느꼈던 감정보다 훨씬 약해졌다. 신문 보도는 아무 감흥도 불러일으키지 않고, 뇌에만 도달할 뿐, 피로한 상상력과 과로에 지친 피곤한 심장에는 닿지 않는다. 그리고 지금 내가 무엇을 가장 깊이 괴로워하는지 자문하면, 목숨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의 고통에 연민을 느끼는 공감 능력까지 죽이는 이 엄청난 고통의 시대에, 모든 일에 연민을 느낄 여력이 더는 남아 있지 않은 것이락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한때 몹시 경멸했던 센강의 낚시꾼들을 문득문득 떠올리게 된다. 그들을 경멸한 것이 어쩌면 너무 부당했던 게 아닐까? (59) 

 

그는 계속 고치고 다듬었다. 그는 다시 고치고, 가까이에서 보고, 물러나서 확인하고, 작업대를돌리고, 중얼거렸다. 목에서 꿀꺽대는 이상한 소리가 났고, 이내 눈빛이 빛났고, 다시 화를 내며 눈썹을 찌푸렸다. 그는 점토 한 줌을반죽하여 작품에 덧입히고 거기서 다시 조금씩 긁어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작업을 시작하고 말았다.
그렇게 시작된 작업은 30분, 한 시간, 한 시간 반이 지나도 끝나지 않았다. 그는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내가 거기 있다는 사실조차 완전히 잊었고, 나는 그런 모습에 충격과 감동을 동시에 받았다. 그는 자기가 초대한 손님이 뒤에서 보고 있다는 것을 전혀 감지하지 못했고, 낮인지 밤인지조차 몰랐으며, 시간도 장소도 잊었다. 그는 오로지 자신의 작품과 그 너머에 보이지 않게 존재하는, 그가 성취하고자 했던 더 높고 더 진실한 형태만 응시했다. 그의 육중한 몸이 가볍게 움직였고, 어떤 깨달음이 흡사 술에 취한 듯한 그의 존재를 감쌌다.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인식하지 못한 채, 마치 천지창조 첫날의 신처럼 홀로 창조 작업에 전념했다. 시간과 공간과 세상을 그토록 완벽하게 잊을 수 있다니, 젊은 나로서는 처음 경험하는 큰 충격이었다. 그 한 시간에 나는 세상의 모든 예술과 성과의 궁극적 비밀을 확실히 이해했다. 그것은 바로 집중이었다. 크든 작든 어떤 작업이든, 수행하기 전에 마음을 가다듬어야 한다. 너무 자주 수백 가지 사소한 일에 분산되고 쪼개지는 의지를 진정으로 원하는 한 가지에 집중하는 영혼의 결단이 있어야만, 오직 그런 결단력으로만 진정으로 일할 수 있다. 손님에게 무례일 수도 있지만, 그는 나를 완전히 잊었고, 그렇게 나는 없는 사람처럼 위대한 대가 뒤에 숨을 죽이고 주변의 대리석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그 한 시간에, 나는 지금까지 내게 없었던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완벽을 향한 의지로 모든 것을 잊는 열정! 크든 작든 자기 일에 완전히 몰입할 수 있는 사람만이 그일을 제대로 해낼 수 있다. 다른 마법은 없다. 나는 그 한 시간에 이것을 깨달았다. (75) 

 

어쩌면 선함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드물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자연의 많은 것들이 그렇듯, 알폰소 에르난데스 카타가 실천하며 살았던 그런 고귀한 형태의 선함은 매우 드물 것입니다. 흔히 선함은 약한 마음, 다른 사람의 강한 요구에의 굴복, 수동적 태도, 심지어 약점으로 취급됩니다. 하지만 알폰소 에르난데스 카타의 선함은 미덕이자 힘이었습니다. 그의 선함은 능동적이었고, 치유와 격려의 힘을 신비하게도 늘 균일한 규모와 강도로 발산한다는 의미에서 나는 그의 선함을 심지어 방사능 같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자신을 더 많이 내어줄수록 그는 더욱 그 자신으로 남았습니다. 그것은 늘 활동하는 깨어 있는 선함, 그에게 중요한 모든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선함이었습니다. 그것은 그저 한 인간의 선함이 아니라, 한 시인의 선함이자 상상력이 풍부한 본성에서 나오는 선함, 가장 귀중한 작은 감탄을 끊임없이 자아내는 생산적인 선함, 의식적으로 고안된 지적인 선함, 언제나 대상이 명확한 선함이었습니다. (85)

 

그것은 마치 큰 충격을 받고 높은 곳에서 추락했다가 다시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며 자문하는 것과 같았다. 
"여긴 어디지? 지금이 20세기 맞아?"
그러나 세상에서는 곧 진정시키는 목소리가 들렸다.
"신중해지자. 이것은 독일인만의 내부 문제다. 독일인들이 자기네 나라에서 뭘 하든, 하고 싶은 대로 하게 그냥 두자. 독일인들이 서로 잘 알아서 할 것이다. 국경을 넘지 않는 한,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다."
심각한 착오다! 어떤 판단을 내릴 때, 내 나라냐 남의 나라냐를 기준으로 삼는 경우 어쩔 수 없이 늘 같은 형태로 발생하는 착오다. 모든 인간은 권리와 신성한 의무를 지닌 불가분의 통일체고 어떤 깃발과 이름과 이념으로 저질러지든 범죄는 범죄라는 사실을 망각할 때 발생하는 착오다. (100)  

 

그러나 동료 여러분, 인류가 짐승이 된 명백한 퇴행 때문에 우리는 믿음과 낙관을 잃어버렸지만, 그 대신 이 시련에서 얻은 것도 한 가지 있습니다. 나는 오늘날 우리 각자가 정신적 자유의 필수성과 신성함을 그 어느 때보다 새롭고 절절하게 인식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지금 우리는 삶의 가장 신성한 가치를 아주 특이한 방식으로 체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밝은 대낮에 별을 보지 못하듯, 삶의 신성한 가치가 살아 있을 때는 그것을 망각하고, 삶이 평온할 때는 삶의 가치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영원한 별들이 얼마나 찬란하게 하늘에 떠 있는지 알려면, 먼저 어두워져야 합니다. (116)

 

반응형
LIST

'::: >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랑과 결함 :: 예소연  (0) 2025.01.07
다만 빛과 그림자가 그곳에 있었고 :: 정멜멜  (4) 2024.12.31
희랍어 시간 :: 한강  (3) 2024.12.20
진주 :: 장혜령  (2) 2024.11.19
날씨와 얼굴 :: 이슬아  (2) 2024.11.19
반응형
SMALL

컴퓨터로 쓰기는 너무 오랜만인 일기.

3시간 정도 줌미팅을 했다. 매튜와. 

넋두리의 함정은 하면 할수록 되풀이된다는 것. 

숏컷이 아님은 일견 자명해보이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마음도 전연 없다. 어쩌겠어. ㅎㅎ

아무튼 고맙고 감사한 일이, 실망스러운 일보다 많으니까. 

문득 2025 카테고리를 신설해야겠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내일 쓰지 않으면 마지막이 될 2022~ 카테고리의 글. 

2017에서 2022로 넘어갈 때보다 2022에서 2025로 넘어가는 시기가 체감상 훨씬 길게 느껴진다. 압축적으로 밀도 있게 지낸 거겠지. 

대관절 잘 해내고 싶다. 그리고 그럴 수 있고. 

반응형
LIST

' :: > 2022~'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4.11.13.수  (5) 2024.11.13
2024.10.27.일  (1) 2024.10.27
2024.10.26.토  (3) 2024.10.26
2024.10.25.금  (0) 2024.10.25
2024.10.23.수  (1) 2024.10.23
반응형
SMALL

 

창밖으로 살풍경한 연립주택들이 드문드문 주황빛 전등들을 밝히고 있다. 아직 잎이 나지 않은 어린 활엽수들은 검고 깡마른 가지들의 윤곽을 어둠 속에 숨기고 있다. 그 황량한 풍경을, 거구의 대학원생의 겁먹은 얼굴을, 희랍어 강사의 핏기 없는 손목을 그녀는 묵묵히 응시한다. (18)

 

당신의 얼굴은 어머니 쪽을 더 닮았지요.
질끈 묶은 검은 머리채와 다갈색 피부도 보기 좋았지만, 가장 아름다운 것은 눈이었습닌다. 고독한 노동으로 단련된 사람의 눈. 진지함과 장난스러움, 따스함과 슬픔이 부드럽게 뒤섞인 눈. 무엇이든 섣불리 판단하지 않고 일단 들여다보겠다는 듯, 커다랗게 열린 채 무심히 일렁이는 검은 눈. (35)

 

잘 보이지 않으면 가장 먼저 소리가 잘 들릴 거라고 사람들은 생각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가장 먼저 감각되는 것은 시간입니다. 거대한 물질의 느리고 가혹한 흐름 같은 시간이 시시각각 내 몸을 통과하는 감각에 나는 서서히 압도됩니다. (39)

 

인간의 모든 고통과 후회, 집착과 슬픔과 나약함들을 참과 거짓의 성근 그물코 사이로 빠져나가게 한 뒤 사금 한줌 같은 명제를 건져올리는 논증의 과정에는 늘 위태하고 석연찮은 데가 있기 마련입니다. 대담하게 오류들을 내던지며 한 발 한 발 좁다란 평균대 위를 나아가는 동안, 스스로 묻고 답한 명철한 문장들의 그물 사이로 시퍼런 물 같은 침묵이 일렁이는 것을 봅니다. (44)

 

kalepa ta kala.
칼레파 타 칼라.

아름다움은 아룸다운 것이다.
아름다움은 어려운 것이다.
아름다움은 고결한 것이다. 

세 번역이 모두 그르지 않은 것은, 고대 희랍인들에게 아름다움과 어려움과 고결함이 아직 분절되지 않은 관념이었기 때문이다. 모국어에서 '빛'이 처음부터 밝음과 색채라는 두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69)

 

동향이라 더 춥다고 어머니는 불평하시곤 했지만 난 그게 더 좋았어. 새벽에 깨어서 거실로 나오면 모든 가구들이 푸른 헝겊에 싸여 있는 것 같았지. 파르스름한 실들이 쉴새 없이 뽑아져나와 싸늘한 공기를 그득 채우는 것 같은 광경을, 내복 바람으로 넋 없이 바라보며 서 있곤 했어. 마치 황홀한 환각 같던 그 광경이 약한 시력 때문이었다는 걸 그땐 알지 못했지. (73)

 

'수난을 겪다'는 뜻의 동사와 '배워 깨닫다'는 뜻의 동사입니다. 거의 흡사하지요? 그러니까 지금 이 부분에서, 소크라테스는 일종의 언어유희로 두 가지 행위가 비슷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85)

 

왜 일 년 동안 까만 옷만 입어야 돼?
덤덤한 목소리로 그녀는 대답했다.
마음이 밝아질까봐 그런 거 아닐까.
마음이 밝아지면 안 돼?
죄스러우니까.
할머니한테? ... 그치만 할머닌 엄마가 웃으면 좋아하잖아.
그제야 그녀는 아이를 돌아보고 웃었다. (89)

 

인간의 몸은 슬픈 것이라는 걸. 오목한 곳, 부드러운 곳, 상처 입기 쉬운 곳으로 가득한 인간의 몸은. 팔뚝은. 겨드랑이는. 가슴은. 샅은. 누군가를 껴안도록, 껴안고 싶어지도록 태어난 그 몸은. (124)
반응형
LIST
반응형
SMALL
애기 아빠는 어디 갔대? 언제나, 돌아서기도 전에 어른들은 아이가 눈에 안 보이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아니 그애가 보이긴 보이는데 반쯤만 보이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소리 낮춰 쉬쉬하며. 쯧쯧 혀를 차며. 아이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 척 어른들 이야기를 주워듣는다. 눈먼 이야기들을 훔쳐온 오늘은 평소보다 호주머니가 무겁다. 그애는 도둑질을 좋아한다. 왜냐하면 그 일은 자신만의 비밀을 갖는 일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 비밀은 어른들도 친구들도 경찰들도 결코 알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144) 

 

나는 사장 아들의 결혼식 답례품으로 쓰일 물건을 만들고 그것을 포장하면서, 직원들 모두가 군말 없이 결혼식 안내를 맡거나 뒷일 하는 모습을 보면서, 사장이 오십 인분자리 케이크를 검도하듯 큰 칼로 썰어나갈 때 관객처럼 박수치는 우리를 보면서, 다음날 아침이면 어제를 잊은 듯 만원 지하철에 몸을 싣고 있는 자신을 보면서, 통근 버스를 기다리며 줄 서 있을 때 스마트폰 화면을 응시하거나 자기 발끝만을 내려다보는 사람들 뒷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완전한 각자라고 느낀다. 돈을 번다는 것, 이 사회에서 돈을 번다는 것은 각자라는 고독을 철저히 견디는 일임을 느낀다. (181)

 

우리는 부재가 채워지기를 열망하지만, 정작 빈자리가 채워진 뒤엔 그것이 우리가 원하던 것은 아님을 알게 된다. 아버지는 딸이 중학생이 되던 해 집으로 잠시 돌아왔는데, 건넌방을 쓰기 시작한 그 남자가 오자 내가 기다리던 나의 아버지는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187) 

 

그래서 결국은 어떻게 됐나. 생각 있는 애들은 다 거리로 나오고 별것 아닌 것들이 죄 보신해 한자리씩 차지했지. 그것들이 지금 젊은 사람들 윗사람이 되어버렸고. 그게 큰 실수였어. 우리 중 누구도 그렇게 멀리 내다볼 안목은 없었고. (202)

 

그 비닐하우스 어딘가에서 그들은 왔다. 종점에서 회차하는 이 버스 안에 탄 젊은 사람은 오직 먼 곳에서 온 그들뿐이었다. 버스 운전사나 그곳 출신일 늙은 승객들에게 외국인 남자들은 익숙한 존재처럼 보였다. 떠나간 아들딸의 빈자리를 대신하는 검은 유령들. (222)

 

빛은 잘 들어옵니까.
바람은 불어옵니까.

커튼을 젖혔습니다. 찬란한 햇빛이 쏟아질 줄 알았는데 커튼을 열어도 사방 어둠뿐이었던 반지하의 실내에서 나는 이 집의 주인을 돌아보고 있었습니다. 

언제나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세입자가 집주인에게, 우리가 죄수에게 묻는 질문이 동일하다는 것은.
우리가 가둘 수 없는 것의 안부를 묻는 일은. (267) 

 

한 남자의 뒷모습을 보았다.
철교 위 열차 안으로 겨울 햇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왼손에 낡은 갈색 서류가방을 든 채, 그는 자기 앞에 놓인 유리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쉴새없이 풍경이 흘러갔다. 미래로부터 과거를 향해 한 사람이 복사되고 있는 것처럼. (272) 

 

그녀는우리가 글 쓸 때, 사진가가 피사체를 마주하는 것과 같은 윤리 의식이 필요하다 했다. 이야기를 타인에게서 가져오는 것이기도 하니까. 또한 모든 소설은 얼마간 자전적이며 많은 작가의 초기 작품은 자기 이야기에서 출발한다고 했다. 그러니, 자신에게서 가장 가까운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해보세요. (277)

 

진심으로 말한다는 것은 그만큼의 강도로 누군가 듣고 있음을 믿음으로써 가능하다. 진심으로 듣는다는 것 역시 그와 같은 강도로 상대가 말하고 있음을 믿음으로써 가능하다. 화자는 청자를 향해 말함으로써, 청자는 화자를 향해 귀를 기울임으로써 서로의 존재를 나타나게 한다. 장은 그렇게 생겨나며 그때 표현은 표현으로서 성립한다. (288) 
반응형
LIST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