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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념과 달리 윤리학은 착하게 사는 법을 족집게처럼 알려주는 학문이 아니다. 그건 오히려 도덕적 직관이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를 분해하는 작업에 가깝다. 귀찮다는 이유로 부상자를 무시하려는 사람을 상상해보자. 이 사람이 잘못하고 있다는 건 당연해 보인다. 그런데 왜 잘못된 걸까? 당연히 잘못된 태도이기 때문에? (22)

 

이것만이 합당한 대응인가?  혹시 나는 개인적인 분노를 정의감과 혼동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무엇보다도, 악인처럼 보이는 누군가에게 분노를 표출하고 공격성을 드러내는 것이 그 자체로 정의로운 일인가?
철학자 오언 플래너건은 달라이 라마를 만났을 때 홀로코스트를 멈추기 위해 히틀러를 죽이겠냐는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달라이 라마의 대답은 이렇다. 
"누군가는 히틀러를 죽여야 합니다. 하지만 화를 내서는 안 됩니다."
히틀러를 상대할 때가 아니더라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분노하지 않더라도 선행을 하거나 악을 막을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의분으로 인해 악해지기도 한다. (29)

 

선은 악에 분노하고 악인을 벌하는 것 이상의 복잡함으로 이루어진다는 것. 타인의 결점에 과한 관심을 쏟는 건 악질적인 스포츠일 뿐이지 선행이 아니라는 것. (30)

 

교도소 수감자조차 판사와 변호사를 탓하고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변명의 여지를 남겨둔다.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거나, 오해였다거나,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다거나 하고. 형량이 결정된 후에도 똑같은 주장을 관철하는 것은 진심의 증거일 것이다. 그러면서도 동료 재소자의 한탄을 내심 비웃고, 자신이 피해자가 되면 도덕과 정의의 문제에 신경을 곤두세운다. 스티븐 핑커가 도덕화 간극Moralization gap이라부른 현상이다. (46)

 

제본스의 역설Jevons paradox*이 지적한 것처럼, 세탁기와 청소기가 가사 부담을 획기적으로 줄일 것이란 전망과 달리 실제로는 가사의 기준을 높였던 것처럼, 에너지 효율이 높아질수록 저력 사용량이 더불어 증가하는 것처럼, 발전과 혁신은 새로운 욕망을 빚어낸다. 그리고 이따금 욕망은 개선과 해결을 막는다. (58)

*석탄 에너지의 효율이 증가할 경우 에너지 가격이 하락하고, 이로 인해 신규 자본이 유입되어 결과적으로는 석탄 사용량이 증가하는 반동효과Rebound effect가 나타난다.

 

물론 '서비스가 공짜라면 바로 당신이 상품이다'라는 격언처럼 디코럼의 컨설팅에는 보이지 않는 비용이 숨어 있다. (67)

 

영원한 성장이란 공허한 수사학에 불과하다.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것은 시작과 끝이지 영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71)

 

뉴욕대학교 사회문화연구대학 교수인 앤드루 로스가 지적한 것처럼 필수적인 사회재를 부채로 조달하게끔 하는 경제는 비도덕적*이다. 취직을 위해 대학에 가야 하며, 대학에 가기 위해 학자금 대출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그 일례다. (73)

*크레디토크라시 

 

수레바퀴는 이런 일들에 까다로운 태도를 보여준다. 필요한 행동이 아니라면 자제하라는 것이다. 잘못된 점을 지적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걸 빌미로 으스대서는 안 되고, 퉁명스러운 직원을 만난 뒤 친구에게 푸념을 털어놓는 건 괜찮지만 방송 출연자에게 욕설 댓글을 남겨서는 안 된다. 그 사람이 실제로 사악하고 멍청해서 결코 가까이 지내고 싶지 않은 부류여도 마찬가지다. 악인을 비난하는 게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행위일지라도 모든 악인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비난할 필요는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98)

 

심술궂은 말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이런 태도는 일반적으로 권장되는 것이다. 실제로 수레바퀴 대응 센터의 행동 지침은 다음과 같은 권유 사항으로 이루어져 있다.

- 타인의 잘못을 찾아다니거나 깎아내리며 자부심을 느끼지 마세요. 다양한 가능성을 고려하세요.
- 타인이 언짢은 이야기를 한다면 그 언짢음의 이유를 천천히 점검한 후, 사실관계와 논리만을 침착하게 반박하세요. 감정적으로 휩쓸리지 마세요. 조롱하거나 으스대거나 과도하게 분노하지 마세요. 혹은 무관심이야말로 가장 큰 공격임을 떠올리세요.
- 실질적인 피해가 있다면 변호사를 고용하거나 경찰을 부르세요. 급한 상황에서는 정당방위도 허용됩니다.
- 그 밖의 문제에 대해서는 항상 이 사실을 떠올리세요, 누군가가 정말로 악한 일을 하고 있다면 지옥에 갈 겁니다. 지옥에 함께 따라 들어가지 마세요. 여기에 남아 있으세요. (104)

 

물론 그런 악덕이 오로지 개인의 소관이라 볼 수는 없다. 고통과 역경은 인간을 단련시키기 전에 꺾어놓기 때문이다. 사회적 거부를 겪은 사람은 거짓말과 탐욕이 많아지고, 각박해지고, 분란을 일으키는 경향이 있다. 가해자가 될 확률도 크다. 그러다가도 건강한 관계를 맺는 데 성공하면 도리어 보통 사람들보다 우호적이고 긍정적인 못브은 보여준다는 연구는 수레바퀴의 의지를 뒷받침하는 것처럼 보인다. <레 미제라블>에서 미리엘 주교가 장발장의 도둑질을 용서한 것처럼, 장발장이 회개한 것처럼 우리가 맺는 관계도 그래야만 한다는 것이다. (111)

 

하지만 타인을 조롱하는 건 선행이 아니고, 열등감이 부끄러운 것이라면 우월감도 부끄러운 것이어야만 한다. 최소한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둘 모두를 버려야 한다. 수레바퀴가 요구하는 것은 타인을 용서하고, 자신의 잘못을 직시하고, 모두에게 도움이 되려 하는 태도이지 다른 무엇이 아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옛 기억이 얽힌 문제들은 제3자가 함부로 말을 얹을 수 없는 경우가 대다수다. (124)

 

존재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인간을 품에 안았다는 이유만으로 당연히 짊어져야 하는 의무들이 있다. (156)

 

인간은 통계상의 수치보다도 내러티브에 더 이끌리는 경향이 있다. 인식 가능한 피해자 효과Identifiable victim effect라 불리는 현상이자 수레바퀴 컨설턴트들이 결연을 권장하는 이유다. 지구 반대편에 또 다른 아들딸이 있다면, 자신의 상실이 그 아이에게는 축복이 된다면 거부감을 누그러뜨릴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167)

 

글라우콘은 기게스의 예시를 통해 "이처럼 불의를 행하더라도 아무런 불이익을 받지 않는 사람은 마음껏 사익을 추구할 것이며, 따라서 정의 자체에는 구속력이 없다"는 논변을 펼칩니다. 그리고 이런 문제 제기는 시간이 흐르며 도덕성의 정당화Justification for morality 문제라는 이름을 얻습니다. 무엇이 정의이고 도덕인지는 알겠으니, 거기에 실제적인 구속력을 부여하는 요인이 무엇인지 설명해보라는 것입니다. 아무도 없는 운동장에서 큰 돈을 주웠다고 가정할 경우, 그냥 챙겨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 분명한데도 주인을 찾으려 애쓸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까다롭게 만드는 것은, "그것이 정의로운 일이기 때문에 정의롭게 행동해야 한다"는 주장이 순환논증이라는 사실입니다. 자기 자신을 근거로 삼는 논증은 건전하지 않지요. 따라서 스터바James P. Sterba는 도덕성의 정당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선결문제 요구의 오류를 범하지 않는 논증이, 도덕과 무관한 외부적인 이유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193)

 

 

단요, 단요. 숱하게 들어온 작가였어서 그런지 대출해 놓고도 쉽게 펴지 않았던 책. 
그런데 정말 충격적이었다.

봄 부장님의 말이 떠오른다. 

"김동식 작가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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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임신 중단 수술을 받았고, 수술비는 그가 부담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그렇게라도 그에게 책임을 지우고 싶었다. 나에게 평생 잊히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 그에게는 단숨에 잊힐까 두려웠다. 한때 나는 이런 생각이 찌그러진 마음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그의 마음이 전혀 찌그러지지 않은 채로 온전한 것. 그것이 문제였다. 석주야, 마땅한 기회를 줘서 고마워. 삼 년이 지나 형석은 정말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돈을 내어주었다. 삼 년 전에는 몇십만원이라는 돈이 그렇게나 큰 돈이었는데. 무사히 대기업에 취직한 형석에게는 이제 가뿐하게 내어줄 수 있는 돈이 되었다. (21)

 

"근데 넌 지금 혼자 있고 싶지 않을 뿐이야."
맹지가 조용히 말했다.
"아니야."
"그럼?"
내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맹지가 덧붙였다. 너는 너를 돌봐야 해. 좀처럼 항변할 수 없었다.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나를 돌보려면 나를 돌아보아야 하는데, 나는 나를 돌아보는 데 미숙했다. 일은 졸렬하게 하지만, 누군가를 좋아할 때는 손쓸 수 없을 만큼 좋아했다. 사랑에 있어서는 늘 나를 함부로 대하고 선을 넘어버렸다. (33) 

 

어쩌면 한 사람의 역사를 알면 그 사람을 쉬이 미워하지 못하게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227)

 

그런데 병원 생활이라는 게 그랬다. 개인의 모든 식생에 집중하게 되었고 작은 변화 하나에도 심장이 내려앉거나 자그마한 희망을 품게 되었다. (235)

 

그렇게 생각하니 발걸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이런 식으로 사는 걸 버텨왔지 싶었다. 내일과 내일모레의 일을 생각하며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그러다보니 저절로 살아졌지. (257)

 

살아갈수록 연을 맺은 생명이 늘어갔다. 어쩌면 그 무게로 인해 모든 존재가 늙어가는 게 아닐까. 참 무턱대고 많은 생명을 키웠다. (279)

 

정선이가 배를 퉁퉁 두드렸을 때, 정말 그저 뱃살이 나왔을 뿐이란 걸 믿게 되었을 때, 나는 내가 은근히 정선이의 삶이 내 생각대로 나아가길 바라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내가 누구보다 남의 불행을 소비하면서 스스로를 멸시하는 사람이라는 것도. 왜냐하면, 나는 그런 식으로 멋대로 남을 판단하고 그사람의 최악을 상상하며 내가 사회에서 받은 온갖 모욕을 감수하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331) 

 

제가 태어났을 때 손가락이 여섯 개였대요. 그래서 태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제거 수술을 받았어요. 그런데도 제 오빠는 늘 저를 육손이라고 불렀어요. 사람들은 가끔 무슨 짓을 해도 우리의 형태가 바뀌지 않는 것처럼 굴어요. (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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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무에 치이다 퇴근해 찾은 술집과 카페들은 얼마나 그럴 듯하고 멋진지. 쾌적한 테이블 간격, 근사한 조명과 인테리어, 편안한 공기. 업무 보고나 긴 회의도 없고 어딘가 불편하지만 웃으며 매일 인사를 나눠야 하는 사람도 없는 곳. 확실히 그즈음의 나는 어떻게든 회사생활을 정리하면 삶의 질이 달라질 거라는 허무맹랑한 생각으로 중국 호떡처럼 부풀어 있었다. 덩치가 크지만 안이 텅 비어 있어 한입 베어 물면 푹 하고 부서지는 허무한 그 빵 자체였다. 돌이켜보면 사회생활 경험이라곤 회사에 출퇴근하는 것이 전부였기에 품을 수 있었던 생각들이다. 일은 방식이 어떻든 누구에게나 전쟁인 것을 지금은 안다.(27)

 

여러모로 엉성했다. 그러나 홈페이지는 이제 막 출발하는 사람들의 등을 가볍게 밀어준다고 생각한다. 올릴만한 작업이 없다 싶어도 만드는 것이 좋다. 주소를 선점하고 간단한 문구라도 걸어두면 준비가 되어 있다는 느낌을 준다. (36)

 

불운은 나의 사정을 봐주지 않고 잔혹할 정도로 포개어질 수도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불운이라 부르는 것이었다. (108)

 

어딘가 무너져 내리고 있을 때 듣는 말들은 내 주변 어딘가를 머물 뿐 바로 귀에 들어오진 않았다. 하지만 그저 어떤 말이라도 건네려고 하는그 마음을 알아서 고마웠다. 한강이와 걷던 길, 한강이가 있던 장소에서 다시 하루하루를 보내는 건 끔찍하면서도 다행인 일이었다. (108) 

 

먼저 태어나는 것은 거추장스러운 일이 아닐까 생각했다. 장녀의 장점도, 단점도 있지만 그 어느 쪽으로도분류할 수 없는 성가시고 귀찮은 느낌이 내내 있었다. 뭐든 미리 겪어본다는 것은 좀 어려웠다. 어떠한 조언이나 사례 없이 매 순간이 처음일 때, 언니가 있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조금씩 센스가 남다른 친구들은 늘 언니가 있는 친구들이었다. (112)  

 

나름의 노력을 기울일 정도로 나는 자연스러운 사진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조금 더 부연하자면, 자연스럽게 사진을 찍으러 나가고 싶어지는 사진도 무척 좋아한다. 나에게 좋은 창작물의 기준은 노래 부르고 싶어지는 노래, 글 쓰고 싶어지는 글, 그림 그리고 싶어지는 그림 같은 것이다. 자연스럽게 그러한 마음들이 불러 일으켜지는 누군가의 결과물들을 좋아한다. 비상하고, 위대하고, 감히 범접도 할 수 없는 스케일의 창작물도 누군가는 만들어내야 하고 너무나도 대단하다고 생각하며 소비하지만 즐기는 것으로 만족한다. 반면 나는 역시 작은 세계를 만들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맞다. 압도하는 무언가보다는 가능하다면 "나도 뭔가 해보고 싶다"라는 마음이 순환되는 창작을 하고 싶다. 여백이 있어서 잠시 머물 수 있는 사진, 가볍게 카메라를 들고 산책이라도 나가고 싶게 하는 사진이 지금까지는 나의 목표다. 잔잔한 무언가를 별 탈 없이, 오래 오래 만들어내길 바란다. (263) 

 

무섭고 긴 밤이면 스티븐 스필버그가 영화를 만드는 과정 중 가장 싫은 순간에 대한 질문에 '차에서 내릴 때'라고 답변했다는 일화를 떠올린다. 차에서 내리면 현장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그 순간부터 촬영장을 진두지휘해야 하니까. <죠스>와 <ET>의 아버지, <환상 특급>과 <백 투 더 퓨처>의 감독,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거장조차도 그 중압감에서 벗어나기는 힘든 모양이다. 그러면 마음이 한결 편해지는 것이다. 저 대단한 사람도 통과할 수밖에 없는 감정인데 나 같은 범인이 비켜갈 수 있을 리 없다고. 그가 TED에서 '창의적인 사람이 되기 위한 10가지 방법' 같은 타이틀을 달고 강연을 한들 저 한마디만큼 내게 위로가 될까. 다큐멘터리 <스코어>에 나온 작곡가 한스 짐머의 명언 "어떻게 할지 전혀 감이 안 잡히는데, 그냥 다시 전화해서 다른 사람 쓰라고 할까..."를 생각하며 창작자들 각자의 공포와 두려움을 떠올려본다. 
힘 빼고 즐기며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최후의 최후까지 고통스러워하며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있다. 천재도 거물도 무엇도 아닌 나는 결국 후자에 감정 이입을 하게 된다. 결국은 모두가 불안과 공포를 모래주머니처럼다리에 묶고 무게를 이겨가며 터벅터벅 걸어 나가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면 어쩐지 꺾이는 무릎으로라도 한발 한발 용기를 내서 나아가고 싶어지는 것이다. (270)  

 

늘 많이 찍고 오래 찍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지만 많이 찍는 것보다는 오래 찍는 사람에게 점점 더 무게를 싣게 된다. 왜냐면 오래 찍으려면 여러 가지를 섬세하게 조절하는 방법을 배워야 함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재능도, 근력도, 기개도, 운도. 그래서 무리하는 습관을 조정하고 조금씩 더 쉬고, 덜 찍으며 가려고 한다. 철저하게 계획해서 오래오래 찍고 싶기 때문에. 반세기전의 기세 좋은 사진가처럼, 때로는 욕망을 숨기지 않으며. 흑백 사진 속에서 마가렛 버크화이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 인생과 경력은 우연이 아니었다. 철저히 숙고했다." (292) 

 

언제나 거대한 led 전광판의 마음으로 살고 있다. 누군가는 지나가다 고개를 들어 발견할 것이라는 마음으로 뭔가를 전송한다. 이제는 특별히 노력하지 않아도 만족스러울 정도로 업무 의뢰가 들어온다 해도, 그 양과 별개로 내가 해온, 또 하고 있는 일을 알리는 것도 중요한 일이므로 흐름을 놓치지 않으려 작업물을 올리는 편이다. 중요한 건 계속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리듬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포트폴리오 업데이트는 그 자체로 나의 중요한 궤적이 되기도 하기 때문에 습관을 들이는 게 중요하다. 함께 일해보고 싶은 업체에 먼저 메일을 보내거나 하는 적극적인 성격이 아니라면, 스스로의 자취를 단단히 만들어두는 데에 공을 들이는 것도 괜찮다. 잘 모아두고 분류해두면 누구든 알아보게 되어 있다. (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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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는 곧 깨달았다. 면도도 잘 안 하고 후줄근해 보이는 이 말라깽이 청년은 자신을 위해 철저히 반자본주의적인 새로운 시스템을 발명했다. 그는 사람들의 인성을 믿었다. 그는 은행에 적금을 넣는 것보다 이 작은 도시의 거의 모든 사람의 마음에 도덕적 의무라는 유동자산을 저축하기를 더 좋아했다. 그는 자신이 가진 약간의 재산을 눈에 보이지 않는 자산에 투자한 것이었다. 제아무리 완고하고 의심이 많은 사람이라도 기술이나 노동을 돈벌이 수단으로 거래하지 않고 부탁받은 모든 일을 당연한 듯 흔쾌히 처리한 후 즉각적인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마음의 빚을 진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16)  

 

패배나 굴욕의 수치심으로 영혼을 다친 사람에게 다가가는 일이 절대 쉽지 않음을 잘 알지만, 이때의 경험을 통해 나는 누군가를 돕고 싶은 첫 번째 충동에 주저 없이 순종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웠다. 공감의 말과 행위는 도움이 가장 절실한 순간에만 참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33)

 

평범하지 않은 사건들이 사방에서 벌어지더라도 일상생활은 평범하게 계속 이어진다.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이런 동시성을 나는 한 신문에 실린 항공사진을 보고 명확히 이해했다. 사진에는 살인적인 폭격이 쏟아지는 참호와 옆 들판에서 일하는 농부가 같이 담겼는데, 농부는 아무일 없다는 듯 말을 끌며 밭을 갈고, 콩코르드 광장에서 왕이 처형될 때 센강의 낚시꾼들이 했던 것과 똑같이 폭격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러므로 역사적 시대의 모든 낭만적 상상을 진실에 맞게 지우면, 역사적 사건이 벌어지는 바로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사건을 경험하고 그에 참여하기보다 오히려 그것을 잊으려 애쓴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55)   

 

과도한 긴장은 일종의 마비를 일으킨다. 2000년 전에 이미 그리스 극작가들은 이것을 비극의 법칙으로 알고 있었다. 소포클레스와 아이스킬로스는 극의 길이를 두 시간, 길어야 세 시간으로 제한해야 하는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비극이 한없이 길어지면, 그것에 몰두하는 능력의 오히려 감소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모두 이 숙명적 비율을 체감하고 있다. 세계의 극이 길어질수록 점점 더 끔찍해지고, 사건이 자극적일수록 그것을 진심으로 연민하는 능력이 더욱 줄어든다. 전쟁에 대한 끊임없는 생각은 마음을 파괴하고, 시대가 우리에게 연민을 더 많이 요구할수록, 우리의 지친 영혼이 느낄 수 있는 연민은 더 줄어든다. (56) 

 

전쟁이 발발하고 1년이 지난 지금, 수천 명의 죽음에서 느끼는 감정은 이전에 수백 명의 죽음에서 느꼈던 감정보다 훨씬 약해졌다. 신문 보도는 아무 감흥도 불러일으키지 않고, 뇌에만 도달할 뿐, 피로한 상상력과 과로에 지친 피곤한 심장에는 닿지 않는다. 그리고 지금 내가 무엇을 가장 깊이 괴로워하는지 자문하면, 목숨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의 고통에 연민을 느끼는 공감 능력까지 죽이는 이 엄청난 고통의 시대에, 모든 일에 연민을 느낄 여력이 더는 남아 있지 않은 것이락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한때 몹시 경멸했던 센강의 낚시꾼들을 문득문득 떠올리게 된다. 그들을 경멸한 것이 어쩌면 너무 부당했던 게 아닐까? (59) 

 

그는 계속 고치고 다듬었다. 그는 다시 고치고, 가까이에서 보고, 물러나서 확인하고, 작업대를돌리고, 중얼거렸다. 목에서 꿀꺽대는 이상한 소리가 났고, 이내 눈빛이 빛났고, 다시 화를 내며 눈썹을 찌푸렸다. 그는 점토 한 줌을반죽하여 작품에 덧입히고 거기서 다시 조금씩 긁어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작업을 시작하고 말았다.
그렇게 시작된 작업은 30분, 한 시간, 한 시간 반이 지나도 끝나지 않았다. 그는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내가 거기 있다는 사실조차 완전히 잊었고, 나는 그런 모습에 충격과 감동을 동시에 받았다. 그는 자기가 초대한 손님이 뒤에서 보고 있다는 것을 전혀 감지하지 못했고, 낮인지 밤인지조차 몰랐으며, 시간도 장소도 잊었다. 그는 오로지 자신의 작품과 그 너머에 보이지 않게 존재하는, 그가 성취하고자 했던 더 높고 더 진실한 형태만 응시했다. 그의 육중한 몸이 가볍게 움직였고, 어떤 깨달음이 흡사 술에 취한 듯한 그의 존재를 감쌌다.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인식하지 못한 채, 마치 천지창조 첫날의 신처럼 홀로 창조 작업에 전념했다. 시간과 공간과 세상을 그토록 완벽하게 잊을 수 있다니, 젊은 나로서는 처음 경험하는 큰 충격이었다. 그 한 시간에 나는 세상의 모든 예술과 성과의 궁극적 비밀을 확실히 이해했다. 그것은 바로 집중이었다. 크든 작든 어떤 작업이든, 수행하기 전에 마음을 가다듬어야 한다. 너무 자주 수백 가지 사소한 일에 분산되고 쪼개지는 의지를 진정으로 원하는 한 가지에 집중하는 영혼의 결단이 있어야만, 오직 그런 결단력으로만 진정으로 일할 수 있다. 손님에게 무례일 수도 있지만, 그는 나를 완전히 잊었고, 그렇게 나는 없는 사람처럼 위대한 대가 뒤에 숨을 죽이고 주변의 대리석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그 한 시간에, 나는 지금까지 내게 없었던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완벽을 향한 의지로 모든 것을 잊는 열정! 크든 작든 자기 일에 완전히 몰입할 수 있는 사람만이 그일을 제대로 해낼 수 있다. 다른 마법은 없다. 나는 그 한 시간에 이것을 깨달았다. (75) 

 

어쩌면 선함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드물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자연의 많은 것들이 그렇듯, 알폰소 에르난데스 카타가 실천하며 살았던 그런 고귀한 형태의 선함은 매우 드물 것입니다. 흔히 선함은 약한 마음, 다른 사람의 강한 요구에의 굴복, 수동적 태도, 심지어 약점으로 취급됩니다. 하지만 알폰소 에르난데스 카타의 선함은 미덕이자 힘이었습니다. 그의 선함은 능동적이었고, 치유와 격려의 힘을 신비하게도 늘 균일한 규모와 강도로 발산한다는 의미에서 나는 그의 선함을 심지어 방사능 같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자신을 더 많이 내어줄수록 그는 더욱 그 자신으로 남았습니다. 그것은 늘 활동하는 깨어 있는 선함, 그에게 중요한 모든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선함이었습니다. 그것은 그저 한 인간의 선함이 아니라, 한 시인의 선함이자 상상력이 풍부한 본성에서 나오는 선함, 가장 귀중한 작은 감탄을 끊임없이 자아내는 생산적인 선함, 의식적으로 고안된 지적인 선함, 언제나 대상이 명확한 선함이었습니다. (85)

 

그것은 마치 큰 충격을 받고 높은 곳에서 추락했다가 다시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며 자문하는 것과 같았다. 
"여긴 어디지? 지금이 20세기 맞아?"
그러나 세상에서는 곧 진정시키는 목소리가 들렸다.
"신중해지자. 이것은 독일인만의 내부 문제다. 독일인들이 자기네 나라에서 뭘 하든, 하고 싶은 대로 하게 그냥 두자. 독일인들이 서로 잘 알아서 할 것이다. 국경을 넘지 않는 한,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다."
심각한 착오다! 어떤 판단을 내릴 때, 내 나라냐 남의 나라냐를 기준으로 삼는 경우 어쩔 수 없이 늘 같은 형태로 발생하는 착오다. 모든 인간은 권리와 신성한 의무를 지닌 불가분의 통일체고 어떤 깃발과 이름과 이념으로 저질러지든 범죄는 범죄라는 사실을 망각할 때 발생하는 착오다. (100)  

 

그러나 동료 여러분, 인류가 짐승이 된 명백한 퇴행 때문에 우리는 믿음과 낙관을 잃어버렸지만, 그 대신 이 시련에서 얻은 것도 한 가지 있습니다. 나는 오늘날 우리 각자가 정신적 자유의 필수성과 신성함을 그 어느 때보다 새롭고 절절하게 인식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지금 우리는 삶의 가장 신성한 가치를 아주 특이한 방식으로 체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밝은 대낮에 별을 보지 못하듯, 삶의 신성한 가치가 살아 있을 때는 그것을 망각하고, 삶이 평온할 때는 삶의 가치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영원한 별들이 얼마나 찬란하게 하늘에 떠 있는지 알려면, 먼저 어두워져야 합니다.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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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로 쓰기는 너무 오랜만인 일기.

3시간 정도 줌미팅을 했다. 매튜와. 

넋두리의 함정은 하면 할수록 되풀이된다는 것. 

숏컷이 아님은 일견 자명해보이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마음도 전연 없다. 어쩌겠어. ㅎㅎ

아무튼 고맙고 감사한 일이, 실망스러운 일보다 많으니까. 

문득 2025 카테고리를 신설해야겠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내일 쓰지 않으면 마지막이 될 2022~ 카테고리의 글. 

2017에서 2022로 넘어갈 때보다 2022에서 2025로 넘어가는 시기가 체감상 훨씬 길게 느껴진다. 압축적으로 밀도 있게 지낸 거겠지. 

대관절 잘 해내고 싶다. 그리고 그럴 수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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