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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회가 끝나고 식사를 하러 가는 버스 안에서, 참석자 중 한분이 나에게 조용히 물었다.
"그런데 왜 결정장애라는 말을 쓰셨어요?"
짧은 한마디였다. 그건 질문이 아니었다. 나의 잘못을, 더 정확하게는 혐오표현을 하지 말자던 사람이 결정장애라는 말을 사용하는 모순을 지적한 것이었다. 많은 장애인들이 참석해서 듣고 있던 자리에서 나는 내가 '장애'라는 말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의식조차 못하고 있었다. (6)

이 부분을 읽고,
뜨끔하지 않을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우리가 너무 쉽게 말했던 '결정장애'라는 말은 그 안에 무서운 뾰족함과 폭력들을 담고 있었던 거다.

 

나를 둘러싼 말과 생각들을 하나하나 훑는 작업은 마치 세상을 다시 배우는 느낌이었다. 나는 다른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는 생각은 착각이고 신화일 뿐이었다. 누군가를 정말 평등하게 대우하고 존중한다는 건 나의 무의식까지 훑어보는 작업을 거친 후에야 조금이나마 가능해질 것 같았다. 내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나를 발견하는 일 말이다. (10)

 

희망적인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차별을 하지 않으려 한다는 사실이다. 다만 차별이 보이지 않을 때가 많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선량한 시민일 뿐 차별을 하지 않는다고 믿는 '선량한 차별주의자'들을 곳곳에서 만난다. (11)

그러게. 희망적인 부분인 것은 맞다. 그래서 의식이 중요한 거겠지.

 

소수자 때문에 다수자가 차별받는다는 '다수자 차별론'은 어떻게 가능할까? 다수자 차별론을 들여다보면, '소수자가 차별받지 않는다'는 전제에서 시작한다. 과거에 차별이 있었더라도 현재는 해결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소수자에게 도움을 주는 정책은 특혜일 뿐이며, 상대적으로 다수자에게 부당한 차별이 된다. (22)

 

호의와 권리에 대한 이 이른바 '명언'은 불평등한 권력관계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무언가 베풀 수 있는 자원을 가진 사람은 호의로서 일을 하고 싶다. 자신이 우위에 있는 권력관계를 흔들지 않으면서도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런 호의성(시혜성) 자선사업이나 정책은 그저 선한 행동이 아니다. 내가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따라 주고 말고를 결정할 수 있는, 통제권이 온전히 나에게 있는 일종의 권력행위이다. 만일 당신이 권리로서 무언가 요구한다면 선을 넘었다고 비난할 수 있는 권력까지 포함한다. (27)

나랑 우리 아이들이 생각났다. 그러네. 나는 정말 한참 멀었다.

 

특권을 가졌다는 신호가 있다면 큰 노력 없이 신뢰를 얻고, 나를 있는 그대로 표현해도 안전하다고 느끼며, 문제가 발생하면 해결할 수있다는 느낌들이다. 나에게 알맞게 주변 환경이 만들어져 있어 끊임없이 주변을 의식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편안한 상태이다.
특권을 알아차리는 확실한 계기는 그 특권이 흔들리는 경험을 할 때이다. 더이상 주류가 아닌 상황이 될 때, 그래서 전과 달리 불편해질 때, 지금까지 누린 특권을 비로소 발견할 수 있다. 한국인으로서 한국에서 주류로 생활하다가 외국에서 이방인으로서 불안하고 두렵고 화나는 경험을 한 적이 있다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하지만 성별처럼 다른 위치에서 경험해보기 어려운 조건이라면 평생 그 특권을 모를 수도 있다. (32)

 

누군가는 여전히 특권이란 말이 불편할 수 있다. 한국인으로서 혹은 남성으로서 이렇게 살기 힘든데 나에게 무슨 특권이 있는 거냐고 질문을 던질 수있다. 불평등이란 말이 그러하듯, 특권 역시 상대적인 개념이다. 다른 집단과 비교해서 자연스럽고 편안하고 유리한 질서가 있다는 것이지, 삶이 절대적으로 쉽다는 의미가 아니다.
물고기에 비유해 생각해보자. 흐르는 물결을 따라서 헤엄치는 물고기는 그 물결을 가로지르거나 거슬러 올라가는 물고기보다 편하다. 하지만 물결을 따라가며 헤엄치는 물고기를 보고 그저 편하다고만 할 수 없다. 삶은 어떤 모습으로든 우리를 힘들게 한다. 게다가 기회가 주어지는 만큼 과업이 따르고, 높은 자리에 오를수록 책임이 무거워지는 법이다.
그러니 누구의 삶이 더 힘드냐 하는 논쟁은 결론을 내리기 어렵다. "모두가 똑같이 힘들다"라는 말도 맞지 않다. 그보다는 서로 다르게 힘들다고 봐야 한다. 불평등한 구조에서는 기회와 권리가 다르게 분배되고, 그래서 다르게 힘들다. (33)

모두가 다르게 힘들다. 라니.

 

평등을 총량이 정해진 권리에 대한 경쟁이라고 여긴다면, 누군가의 평등이 나의 불평등인 것처럼 느끼게 된다. 사실은 상대가 평등해지면 곧 나도 평등해지는 것이 더 논리적인 추론인데도 말이다. (36)

 

고정관념은 자신의 가치체계를 드러내는 일종의 자기고백인 셈이다. (47)

그래서 '말'을 줄이게 된다. 특히 내 생각을 담은 말이라면 더욱이.

 

무엇이 문제였을까? 차별을 단일 차원으로 바라보면 왜곡 현상이 일어난다. 차별을 일차원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은 다른 차원에서는 특권을 가지고 있고 딱 한가지 문제만 해결되면 되는 사람에게는 의미가 있다. 예컨대 흑인이면서 이성애자 남성인 사람은 인종차별의 문제만 없다면 주류가 된다. 마찬가지로 여성이면서 백인 이성애자인 사람은 성차별의 문제만 없다면 주류가 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여성이고 흑인이면서 동성애자라면 어떨까? 앞에서 말한 흑인 여성들의 사례처럼 차별을 단면적으로 접근하면 어디에서도 구체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흑인 내에서 주변화되고 여성 내에서도 주변화되면서 흑인 여성에 대한 차별이 은폐되는 것이다. (55)

 

어렵고 복잡하다. 하지만 이 다중성을 생각해야 비로소 내가 차별을 받기도 하지만 차별을 할 수도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여성으로서 차별을 받는다고 해서 모든 측면에서 약자인 것은 아니다. 사회경제적인 불평등으로 생활이 어렵다고 해서 항상 약자의 위치에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여러가지 이유로 중첩된 차별을 겪고 있고, 그래서 차별받는 집단 속에서 더 차별을 받기도 한다. 차별은 두 집단을 비교하는 이분법으로 보이지만, 그 이분법을 여러 차원에서 중첩시켜 입체적으로 보아야 차별의 현실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다. (58)

 

하지만 차별은 생각보다 흔하고 일상적이다. 고정관념을 갖기도, 다른 집단에 적대감을 갖기도 너무 쉽다. 내가 차별하지 않을 가능성은, 사실 거의 없다. (60)

 

유리한 지위에 있다면 억압을 느낄 기회가 더 적고 시야는 더 제한된다. 차별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고, "예민하다" "불평이 많다" "특권을 누리려고 한다"며 상대에게 그 비난을 돌리곤 한다.
그래서 의심이 필요하다. 세상은 정말 평등한가? 내 삶은 정말 차별과 상관없는가? 시야를 확장하기 위한 성찰은 모든 사람에게 필요하다. 내가 보지 못하는 무언가를 지적해주는 누군가가 있다면 내 시야가 미치지 못한 사각지대를 발견할 기회이다. 그 성찰의 시간이 없다면 우리는 그저 자연스러워 보이는 사회질서를 무의식적으로 따라가며 차별에 가담하게 될 것이다. 모든 일이 그러하듯 평등도 저절로 오지 않는다. (79)

자성할 것.

 

토머스 포드와 동료들은 비하성 유머가 마음속 편견을 봉인해제시킨다고 설명한다. 사람들은 어떤 집단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편견을 가지고 있더라도 보통의 상황에서는 사회규범 때문에 드러내지 못한다. 하지만 누군가 비하성 유머를 던질 때 차별을 가볍게 여겨도 된다는 분위기가 조성된다. 그 결과 규범이 느슨해지고, 사람들은 편견을 쉽게 드러내면서 차별을 용인하거나 그런 행동을 하게 된다. 이런 설명을 편견규범이론prejudiced norm theory이라 부른다. (88)

교실 속 교사의 역할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된 부분.
착한 선생님 코스프레를 하느라, 비하성 유머에 웃어버리진 않았을까.
못 들은척 넘긴 적은 없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난 용기가 부족했고 비겁했다.

 

잔혹성은 발신자와 수신자 사이의 엄청난 간극에서 온다고 했다. 고든 호드슨과 동료들이 연구에서 밝히듯, "농담은 농담일 뿐"이라고 가볍게 여기는 생각 자체가 사회적으로 약한 집단을 배척하고 무시하는 태도와 연관되어 있다. 유머, 장난, 농담이라는 이르으로 다른 누군가를 비하함으로써 웃음을 유도하려고 할 때, 그 '누군가'는 조롱과 멸시를 당한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놀려도 되는' 특정한 사람들에게 집중되고 반복된다. 우리가 누구를 밟고 웃고 있는지 진지하게 질문해야 하는 이유이다. (91)

상동.
진짜 부끄러워진다.

 

누군가를 향한 놀림을 '가벼운' 농담으로 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 사람의 사회적 위치와 권력을 알려준다. 반대로 원하지 않는 기표가 자신에게 부착되는 경험은 소수자로서 사회적 위치와 무력한 상태를 확인시켜준다. 당신은 스스로 원하는 방식으로 호명되고 있는가? 당신은 타인이 원하는 방식으로 호명하고 있는가? 당신의 호명 권력은 어느 정도이며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 (96)

 

특히 유머로 던진 말에 정색을 하고 대응하기는 쉽지 않다. 유머와 놀이를 가장한 비하성 표현들은 그렇게 '가볍게 만드는 성질'때문에 역설적으로 '쉽게 도전하지 못하게 만드는 강력한 힘'을 가진다. 이런 언어 공격은 인간 내면의 아주 본질적인 부분에 비수처럼 날아와 꽂히는 반면, 그 말이 왜 문제인지 설명하기는 너무나 어렵고 설명할 기회의 순간은 짧다. 우리는 대개 말문이 막힌 채 그 찰나의 기회를 놓친다. (중략)
한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 유머의 중요한 속성 중 하나는 청중의 반응에 의해 성패가 좌우된다는 점이다. 그러니 "누가 웃는가?"라는 질문만큼 "누가 웃지 않는가?"라는 질문도 중요하다. '웃찾사'의 흑인 분장 사건처럼 웃지 않는 사람들이 나타났을 때 그 유머는 도태된다. 누군가를 비하하고 조롱하는 농담에 웃지 않는 것만으로도 "그런 행동이 괜찮지 않다"는 메시지를 준다. 웃자고 하는 얘기에 죽자고 달려들어 분위기를 싸늘하게 만들어야 할 때가, 최소한 무표정으로 소심한 반대를 해야 할 때가 있다. (99)

내게 부족한 자세.
나는 왜 웃지 않는 걸 못하는가 ㅠㅠ.....
웃자고 한 얘기에 죽자고 달려들어도 된다. 그래 봅시다! 화이팅 현아!

 

능력주의를 표방하는 사람이 더 불공정할 수 있다니 왜일까? 자신이 편향되지 않다고 여기는 착각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자신이 객관적이고 공정하다고 믿을 때 자기확신에 힘입어 더 편향되게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 편견에 고삐가 풀리는 것이다. (112)

그래서 더 조심해야겠다 나도. 그리고 난 편향된 사람이다. 잊지 말자.

 

학교나 군대에서 단체로 혼나본 적이 있다면 기억을 떠올려보자. 나의 경우도 학급 학생 중 누군가가 잘못했을 때, 학급 전체가 체벌을 당한 기억이 꽤 많다. 이때 문제를 일으킨 당사자가 아닌 사람은 억울하다. 이유없이 벌을 받으니 말이다. 당사자인 경우에는 단체 체벌 후 따라오는 괴롭힘을 감당해야 한다. 단체 체벌의 억울한 '피해자'들이 당사자에게 보복하기 때문이다. 한 학급의 학생이 몇십명이 되고, 그중 적어도 몇명은 무엇이라도 실수하고 잘못을 한다. 산술적으로 따져도 단체 체벌은 일상적으로 반복될 수밖에 없다. (122)

마음이 무거워진다. ㅜㅜ...
나는 물론 좁은 의미에서의 단체 처벌은 하지 않지만, 정색하기와 같이 넓은 의미에서의 단체 처벌은 할텐데.
이조차 폭력적일 수 있고, 당사자를 괴롭힐 수도 있을테니까.
에구구..

 

이 와중에 '다문화아동'이라는 단어는 왜곡된 한국의 풍경을 보여준다. 다문화라는 말은 본래 다양한 문화의 상호존중과 공존을 강조하는 사상인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에서 온 것이다. 다문화주의는 각자의 정체성을 존중하는 평등한 관계를 전제로 한다. 특정 문화를 우위에 놓거나 일방적으로 선을 긋고 배척하는 행동과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그런데 한국사회에서는 '다문화'가 사람을 지칭하는 단어가 되어버렸다. '진짜' 한국인이 아닌 사람을 구분하는 용어로 쓰이는 것이다. (132)

 

너무 반복되어 익숙하게 느껴지는 장면일지도 모르겠지만, 조금만 바꾸어 생각하면 매우 낯선 광경이기도 하다. 가령 중고등학교나 대학교의 축제를 생각해보자. 누군가는 어떤 학교의 축제가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다. 학교에서 열리는 축제 자체를 썩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작정하고 찾아가서 축제를 방해하는 장면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대부분은 그냥 축제에 참석하지 않는 것으로 끝난다.
누군가 미리부터 축제를 방해하고 애써 축제 장소까지 가서 저주와 욕설을 퍼붓고 폭력을 가하는 장면을 상상하기 어려운 건, 대개는 사태가 심각해지기 전에 해결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무례함과 무질서를 만드는 사람들을 주최 측이 당장 쫓아낼 것이고 경찰이 단호히 협조할 것이다. 이것을 '충돌'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일방적인 방해이니 '범죄'라고 부를 것이고, 이런 행동은 대중의 지탄을 받는다. 이것이 익숙한 반응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퀴어문화축제는 좀 다르다. 축제를 방해하는 사람보다도, 축제를 여는 사람들에게 비난이 향한다. 사람들은 "꼭 사람들이 많은 장소에서 축제를 해야 하느냐?"고 묻는다. 성소수자인 건 받아들일 수 있는데,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해결할 일이지 굳이 광장으로 나와야 하느냐, 사람이며 의상이며 모두 낯선 그 풍경을 왜 '억지로' 다른 사람들에게 보게 하느냐고 묻는다. 말하자면 장소가 틀렸다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광장이나 공원이나 거리는 '퀴어'가 있을 자리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럼 퀴어의 자리는 어디인가? (136)

진짜 당연한 건데, 이렇게 적어야 하는 상황이라니.
또 적었는데, 그리고 읽었는데, 또 아무렇지 않게 '내 눈 앞에서는 보고 싶지 않다'고 말하던 그 선생님.
이번 연수가 가장 실망스러웠던 건, 몇몇이들의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아무 말 때문이다.

 

공공의 공간에서 거절당한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사람을 소수자로 만드는 중요한 성질 가운데 하나다. '소수'라는 건 수의 많고 적음으로만 결정되지 않는다. 여성처럼 숫자로는 많아도 어쩐지 공공의 장에서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137)

아직도 2학년 때, 연숙교수님께서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신 게 떠오른다.
장애인 인권에 대해서 배우고 있을 때,
'왜 우리 교실에는 장애인이 없을까?', '왜 우리 과에는 장애인이 없는가?'라는 질문을 던져주셨고
나는 그제야 내가 있었던 숱하게 많은 공간에서 장애인을 마주한 경험이 별로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 날은 아직도 내게 충격으로 기억된다.

 

실제로 우리는 꽤 자주 누군가에게 경고를 보내기 위해 거리에서 시선을 사용한다. 거리를 걸을 때 누구에게 시선이 머무르는지 생각해보자. 남성 두명이 손을 잡고 걸을 때, 여성이 노출이 많은 옷을 입었을 때, 지저분한 행색의 사람이 지나갈 때 등 자신도 모르게 시선이 그들을 따라간 적이 있지 않은가? 거리는 모든 사람의 공간이어야 하지만 모두에게 똑같이 허용된 공간이 아니다. 거리에는 사람과 행동을 규율하는 규칙과 감시체계가 있다.
즉 거리는 중립적인 공간인 듯 보이지만 그 공간을 지배하는 권력이 존재한다. 익명의 다수가 시선으로써, 말이나 행위로써, 혹은 직접적인 방해나 법적 수단을 통해 그 거리에 어울리지 않는 불온한 존재들을 단속하는 데 동참한다. (139)

 

사실 누구나 어디서든 싫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살면서 내가 있는 자리와 나의 위치에 따라 싫은 걸 싫다고 표현하지 못하는 상황을 수없이 경험한다. 싫은 걸 싫다고 표현할 수 있는 건 권력이다. (중략)
하지만 권력을 가진 사람이 사용하는 싫다는 표현은 다르다. 사장이 어떤 직원을 싫다고 말할 때, 교사가 어떤 학생을 싫다고 말할 때, 이건 단순한 개인 취향이 아니며 권력관계의 변동도 아니다. 바로 권력 그 자체이다. 무수한 차별이 싫다는 감정에서 나오고, 그 감정이 누군가의 기회와 자원을 배제할 수 있는 권력으로 작동한다. 주류 집단이 누군가를 싫다고 지목함으로써 '낯선 것'을 솎아 내는 판옵틱한 감시체제가 작동을 시작하고 공공의 공간을 통치한다.
그렇기에 이성애자가 하는 "동성애자가 싫다"는 말은 동성애자가 "이성애자가 싫다"고 하는 말과 같지 않다. 마찬가지로 비장애인이 하는 "장애인이 싫다"는 말은 장애인이 하는 "비장애인이 싫다"는 말과 같지 않으며, 국민이 하는 "난민이 싫다"는 말은 난민이 하는 "국민이 싫다"는 말과 같지 않다. 말 자체가 아니라 그 말을 하는 주체 사이의 권력관계가 그 말의 의미와 결과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143)

절대로 절대로 "걔 싫어"라고 교사로서 학생을 싫어하지 말아야지. 만약 싫다면 적어도 저 말을 발화하지는 않아야지. 절대.

 

모두에게 표현의 자유가 있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다수자와 소수자의 자유는 같지 않다. 존 스튜어트 밀이 <자유론>에서 지적하듯, 다수자는 소수자의 의견을 거침없이 공격할 수 있다. 반면 소수자는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표현을 순화하고, 상대방에게 불필요한 자극을 주지 않도록 극도로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도록 요구된다. 다수자는 소수자의 이야기를 듣지 않으면서 잘 말하라고 요구한다. 그렇게 사실상 침묵을 강요한다. (171)

진짜 맞는 말.
극단적인 가상 상황을 설정해보자.
한 학생을 부르고 그것도 '교무실'에서 혼낸다.
학생이 무어라고 대답하고 반성하는 말을 할 때마다
교사가 "뭐라고?"
"뭐?"
"뭐?"
"그래서?"
라고만 몇번 반복해도 이내 아이는 풀 죽고, 교사는 쉽게 침묵을 강요할 수 있다.
마음이 아프다.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표현을 순화하고, 상대방에게 불필요한 자극을 주지 않도록 극도로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건 학생뿐만 아니라 또다른 누군가 앞에서 내 모습이기도 하다.
현실적인 측면 한정해서는, 그래서 우리는 약자를 보호하고, 존중해야겠지.

 

다양성을 강조하는 말로 종종 사용되는 "다름은 틀림이 아니다"라는 흔한 구호도, 여기서 '다름'이 주류 집단의 기준에서 '일탈'된 무언가를 지칭하고 있다면 그 자체로 '틀림'을 전제하는 형용모순이 된다. (184)

 

김현아(선량한 차별주의자).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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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우리 학교 독서모임에서 했던 내 부분 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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