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을 한 무리로 보지 말고
한 사람 한 사람으로 대하자고 말하다가
그 주장 역시 어쩌면
내가 주류 집단의 안락의자에 앉아
소수집단을 어떻게 봐주자고 말하는
마음 편한 훈수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7)
강제로 끌려간 위안부, 군국주의, 민족주의 이야기로 무겁게 시작한 관계는 차츰 일상에 대한 이야기로 바뀌었고, 나는 그가 내 뿌리 깊은 무거움을 가볍게 해 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아니 어쩌면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몸과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게 좋았던 것 같다. 언제 처음 손을 잡았는지, 언제 처음 입을 맞추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쓰쿠바대학의 호수였는지, 엑스포 전시관 앞 연못이었는지, 긴 산책길이었는지, 자전거를 세워 놓은 다리 위였는지. 함께 시간을 보내고 나면 가벼워지는 발걸음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을 내려놓게 하는 묘한 편안함. 그게 시작이었다. (19)
나는 생산성, 효율, 자기 규율, 책임감, 성실의 잣대로 그를 보면서, 한국 사회에서 나만큼 살아 내지 못하는 그가 답답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한국에서 살아가는 방식이나 풍습, 제도나 행정 문제들을 신나서 설명해 주었는데, 나중에는 자꾸 물어보는 그를 왜 아직도 이걸 모르느냐는 눈으로 쳐다보게 되었다. 어느새 그가 내게 줬던 가벼움은 철없음으로, 긴장을 풀어 준 유머는 유치함으로, 쫓기지 않게 사는 여유는 게으름으로 생각되었다. 나를 도와주려고 하면 '내 일은 내가 알아서 잘하니까 네 일이나 잘하세요'하는 비아냥거림이 마음속에서 올라왔다. 한국 남자가 얼마나 말없이 듬직한지, 얼마나 기계와 컴퓨터를 잘 다루는지, 얼마나 성실한지를 넌지시 이야기하고 뒷말을 생략한 채 입을 다물었다. 침묵 속에는 비난을 끈적하게 묻혀 두었다. 내 사랑은 늙고 밀랍처럼 차갑게 굳어 갔다. (22)
'침묵 속에 비난을 끈적하게 묻혀 두었다'
이 표현 앞에서 나는 부끄러웠다.
내가 생각하는 나의 (무수한)나쁜점 중 하나.
그렇게 될 거다. 법에 따라서. 조사 결과에 상관없이 사람들은 여전히 이들의 삶이 더 어렵고, 이들이 자신들보다 더 불행할거라도 믿을 거다. (34)
나중에 결혼 소식을 알려 드리니 박수를 치며 반가워하면서도 다시 이 질문을 했다.
"그런데 문화적 차이가 커서 힘들지 않을까요?"
"여러분은 남편과 문화적 차이를 느끼지 않으세요?"
토니가 다시 묻자, 남편과 족히 30년은 같이 살아온 이분들이 크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중략)
토니는 어짜피 결혼은 문화가 다른 사람이 만나서 사는 일인 것 같다고 했다. 영국과 한국의 문화 차이가, 서로 다른 가정에서 성장한 남자와 여자의 차이, 혹은 개인의 성격 차이보다 더 큰지는 모르겠다고 했다. 결혼은 성장 과정이 다른 사람이 만나 서로 생각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해하면서 사는 것이 아니겠냐고도 했다. (36)
ㅋㅋ나도 웃으면서 수긍했던 부분.
정말 객관적인 문화가 달라야만 문화가 다른걸까?
진짜 사람은 하나의 우주라서, 문화가 다른 정도가 아니라 누굴 만나든 우주가 다르다.
부부싸움은 보통 상대방이 나하고 생각이 같을 거라고 가정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 같다고, 내가 말 하지 않아도 내 마음을 알 거라고, 그래서 상대가 내 마음을 몰라 주거나 내 생각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때 섭섭하게 되는 것 같다고. 그런데 아예 '우리는 다르다. 상대는 내가 자란 문화에서 자연스럽게 여기는 모든 것이 익숙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면, 내 감정이나 생각은 말하지 않아도 상대가 '어련히 알아서' 가늠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내가 '적극적으로 설명해야' 하는 거라고 여기고 행동하게 될 거라고. (37)
어느 날 다문화 교욱에 대한 회의를 하고 시교육청 담당 장학사와 점심 식사를 한 적이 있다. 점심을 먹으면서 '우리 아이들도 교육부 통계에 잡히는 다문화 학생'이라고 말했다. 흥미로워하는 그에게 우리 집 이야기를 좀 더 했더니 웃으며, '이 다문화'는 '그 다문화'가 아니라고, '선생님네는 다문화가 아니라 글로벌'이라고 했다. 우리보다 잘사는 나라에서 온 백인 배우자와 한국인이 결혼해서 만든 가정. 더욱이 영어를 쓴다. 부모 모두 고등교육을 받았고 경제적으로도 어렵지 않다. 법률적 용어가 어떻든 상관없이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이런 경우는 '다문화'가 아니라 '글로벌'이다. (중략)
장학사와 이야기를 나눈 뒤 나는 사람들에게 더 자주 우리 가족을 다문화 가족으로, 우리 아이들을 다문화 청소년이라고 소개했다. 결혼 이주자와 한국 국적자가 만나 이룬 다문화 가족에는 한 가지 모습만 있는 게 아니라고 얘기하고 싶어서 그랬던 것 같다. (중략)
그때 나는 우리 가족을 그냥 여느 가족으로 봐주기를 원했으면서도, 반대로 누군가가 우리를 구분해서 지어 놓은 그 이름으로 소개했다. 다문화 가족에 대해 사람들이 그려 놓은 전형성이 싫어서 그랬다. (53)
'전형성'에 대하여 이 책을 읽는 동안 많이 생각해보게 된 것 같다. 나조차 깊이 빠져있는 전형성의 진흙.
다문화, 다문화 가족, 다문화 아동 청소년, 다문화 학생. 이 말들은 마치 다양성을 존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한 무리의 사람들을 이 범주 안에 집어넣고 한 가지 색을 칠해 버리면서 그 안에 있는 개개인의 다양한 색깔을 지워 버릴 가능성이 매우 높은 말들이다. 그래서 나는 이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말은 우리가 살면서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다름'을 섬세하게 풀어 가도록 격려하기보다는, 피부색이나 생김새처럼 눈에 보이는 겉모습이 다른 점에만 주목하게 만들어서, 다양성의 문제를 민족이나 인종 문제로만 축소시켜 버리는 오류를 일으킨다. 그래서 나는 이 말에 찬성하지 않는다. (55)
<선량한 차별주의자>에서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래서 '퀴어'들의 단어 투쟁에 대해서도 나왔지.
대학때 2학년이었나? 연숙교수님 수업에서 우리 조가 맡은 연구주제는 '성소수자'였다.
내가 기억하기로 제일 재밌고 유익했던 팀플이었다. 윈윈을 몸소 느낄 수 있었던 시간.
내가 몰랐던 것도 많이 배웠고, 준비도 재밌고, 발표도 재밌었다. 지금 내가 가진 아주 협소하지만 작은 상식은 그때 공부했던 것들이다.
그 시간이 지금 내가 <선량한 차별주의자>, <후아유>를 읽는데 도움을 준다니.
나는 이 새로운 '것'이 사물이나 정보가 아니라 '사람'일 때, 혹은 '사람과 관련된 것'일 때 좀 더 신중하고, 좀 더 성찰하는 태도를 갖기를 희망한다. 그래야 내가 낯선 이를 볼 때 그를 좀 더 깊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그래야, 낯선 이가 나를 볼 때도 내가 온전히 이해받을 수 있을 것 같다. (58)
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제 우리가 진지하게 '역사를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를 고민할 때가 왔다는 생각을 했다. 다양한 민족적 배경을 가진 학생이 모여 있는 교실에서는 그동안 한국 사람들끼리 토론 없이 동의했던 '우리' 역사에서 벗어나 여러 가지 다른 처지와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는 역사를 가르쳐야 할 것 같다. 이제 정말 '국사'가 아닌 '역사'를 가르쳐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70)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 4학년 때 중학교로 교생실습을 가보니 시간표가 이상했다. '국사'가 아니라 '역사'로 바뀐 것. '음.. 세계사도 같이 배우니까 역사라고 하나?'정도의 물음이 들었고 그것을 답으로 혼자 차용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에 대한 답을 들었다. 아주 우연히도.
그러네 정말..
우리는 '국사'가 아닌 '역사'를 가르치고 배워야할 때네.
다문화 아이들은 한동안 사람들의 고정관념과 무지, 미숙함이 만들어 내는 차별적 언어와 행동을 겪게 될 거다. 어떤 이는 비열하게 공격하기도 할 거다. 그럴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잘 가르쳐 주는 것, 그것도 어른들의 몫이다. 하긴 그 대처 방법은 이 아이들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가르쳐 주어야 한다. 누구도 가해자이기만 하거나 피해자이기만 하진 않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배워야 하는 '함께 사는 법'은 스스로 가해자가 되지 않도록 성찰하는 것과 함께 피해자가 되었을 때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것, 두 가지 다 아니겠는가. (76)
그러나 그녀들도 나도 잘사는 나라에 온 것은 맞지만 그만큼 내 삶도 더 잘살게 된 것은 아니었다. 나는 내 몫의 삶을 확인하고 당황했다. (87)
어디든 가야 할 것 같아서 찾아갔지만 나는 점차 플레이그룹이 불편해졌다. 아이를 데려온 다른 엄마들하고 나누는 대화때문이었다. 처음엔 괜찮았다. 안녕하세요(hi). 애기 이름이 뭔가요(What's her/his name)? 몇 개월인가요(How old is she/he)? 아이가 귀엽네요(She/He is very cute). 서로 이런 인사를 나누었다. 반가웠다. 뭔가 나한테 사회적 관계가 생긴 것 같았다. 다음 날도 갔다. 이번에는 다른 사람들과 또 이런 인사를 나누었다.
일주일쯤 지나고 나니 며칠째 책의 첫 페이지만 읽고 또 읽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똑같은 순서의 똑같은 질문과 대답. 바뀌는 것이라고는 귀엽다 대신에 예쁘다, 잘생겼다, 순하다, 활기차다, (눈이)맑다, (키가)크다 같은 다른 형용사를 쓰는 것뿐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였다. 그들 사이로 들어가서 다음 페이지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너무 어려웠다. 가끔 "다음에 차나 한잔하자"고 얘기한 적이 있었는데 그 '다음'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어울리지 못하는 공간에 머무르는 것, 남이 말 걸어 주기를 기다리는 것, 다른 엄마들끼리 친밀한 대화를 나누는 것을 멀리서 바라보는 것, 늘 책의 첫 페이지만 읽는 것, 그래서 서글픈 마음이 들었지만 나는 날마다 플레이그룹을 찾았다. 그렇게 해야 애린이가 영국 어린이들의 문화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문화적 결핍이 일어날 것 같았다. (91)
그 가운데 하나는 이런 규정에 대해 우리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동의하기 때문이 아닐가? 예를 들면 이런 생각들 말이다. 중학교에 들어가려면 적어도 초등학교를, 고등학교에 들어가려면 적어도 중학교를 졸업한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는 생각, 상급 학교를 가고 다음 학년으로 올라갈 수 있는 건 책가방을 들고 학교를 왔다 갔다 했던 그 시간과 성실함의 '보상'이라는 생각, 그동안 학교 열심히 다닌 아이들과 집에서 놀다가 온 아이들이 같은 학년에 들어가는 것은 '불공평하다'는 생각, 대안학교나 홈스쿨링을 하면 학력 인정이 안 된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선택해 놓고 지금 와서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염치없다'는 생각. 이런 생각이 마음속에 있으면 편입학 규정을 그렇게 정한 것은 마땅하고 옳은 일이라고 동의하게 된다.
그런데 이 생각을 조금 더 들여다보면 이런 생각과 닿아 있는 것이 아닐까? 무언가를 얻으려면 그만큼 노력하라는 생각, 규정을 따르지 않은 자신을 탓하지 않고 제도 탓을 하고 있다는 생각.
하지만 세상에는 누구나, 아무 조건 없이, 마땅히 누려야 하는 권리라는 것이 있다. 바로 인권, 기본권이라고 하는 것이다. 어린이나 청소년들이 교육받을 권리도 그중 하나이다. 교육의 기회는 성실한 사람에게 주는 상이나 자격을 갖춘 사람들만 가질 수 있는 배타적 권리가 아니라, 누구나 누릴 수 있는 보편적 권리이다. (124)
누구하고나 친하게 지내는 것, 그게 가능한 일일까 싶다.
친하게 지내려면 공통의 관심사도 있어야 하고, 취향도 맞아야 하고, 무엇보다도 같이 노는 게 즐거워야 한다. 친한 것은 '감정'과 관련된 일이다. 감정은 억지로 강요하기 어렵다. 그래서 누구와 '친해지라'고 말하는 것은 무리한 요구이다. 대신 누구에게 '친절하라'고 가르칠 수는 있다. 친절한 것은 '행위'이기 때문이다. 친하지 않아도 상대방에게 인사하고 말 걸고 도와줄 수 있다. 그건 친절한 행위이다. 행위는 가르칠 수 있다. 친절하다 보면 친해질 가능성도 있다. 그러다가 친해지면 좋지만 아니어도 할 수 없다. 아닌 경우가 훨씬 더 많을 거다. 어쨌든 처음부터 다른 사람과 친해지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무리한 부탁이고 처음부터 그걸 기대하면 실망하게 된다.
선생님들은 학생들에게 북한 출신 청소년이나 다문화 청소년과 친하게 지내라고 가르칠 때가 많다. 마음을 열라고, 친구가 되어 주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건 서로에게 부담이다. 어차피 그건 누가 하라고 해서 되는 일도 아니다. 친해지라고 하지 말고 차라리 친절하라고 가르치는 게 어떨까. 그리고 친절한 행위가 어떤 것인지 알려 주고 몸에 익히게 하면 어떨까. 혹시 아나, 서로가 서로에게 친절하다 보면 그래서 자신을 좀 더 편하게 드러낼 수 있게 되면 시간이 지나 진짜 친해질지도. (129)
남편과 나는 한국에 돌아온 뒤 우리 이름을 걸고 어학원을 운영했다. 우리 학원에는 원어민 교사가 네 명 있었다. 미국인 제이미 선생님은 우리가 교무실에서 한국말로 이야기할 때 늘 신경 쓰고 있는 게 보였다. 특히 자신의 이름이 들리면 더 그랬다. "아 그 아이는 작년에 제이미 선생님 반이었지." 같은 별 뜻 없는 말이 대부분인데도 말이다. 그러다가 생각했다. 나라도 그렇겠구나. 내가 한국어를 가르치러 중국에 갔는데 중국 선생님들이 다 중국어로 이야기하다가 웃기도 하고 그러다 가끔 내 이름이 들리면 나도 불안하겠다.
그래서 나는 원어민 교사들이 같은 공간에 있으면, 그리고 이야기하는 내용이 일과 관계있을 때는 사소한 것이라도 가능하면 영어로 이야기하려고 했고, 그냥 잡담 같은 거면 우리는 지금 이 러저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라고 미리 알려 주었다. 그리고 이들이 못 알아듣는다고 그 앞에서 없는 사람 취급을 하며 아무말이나 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말을 못 알아듣는다고 보이지 않는 사람 취급하는 것, 오해와 불신을 만드는 확실한 방법이다. (134)
그 아이들이 쉬는 시간에 모여서 러시아어로 이야기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는 일이 아니었다. 그저 내가 모르는 말을 쓰고 있으니, 상황을 통제하고 싶어 하는 내 마음이 불편해진 것 뿐이다. 그건 그 아이들이 잘못한 게 아니라 내 문제이다. 이 아이들은 처음에 데리고 온 학교 선생님 말처럼 똑똑했고 열심히 수업에 참여했다. 그래서 1년 과정이 지나고 나서 상을 많이 받았다. 아이들을 좀 더 알게 되자 그들끼리 하는 러시아어도 그다지 시끄럽게 들리지 않았다. (135)
나에게 하는 말이기도 한 부분.
상황을 통제하고 싶은 내 마음때문에 아이들을 매일 속단하고 재단해버린다.
반성할 것.
북한 출신 청소년들이 한국에 와서 학교생활을 하면서 당황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시험 방식이다. 북한에는 보기 가운데 답을 고르는 선다형 문제가 없다. 10여년 전에 들은 이야기이다. 한 아이가 "다음 중 틀린 것을 고르시오"하는 문제를 보고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아니, 맞는 것을 아는 것도 바쁜데 왜 틀린 것까지 알아야 합니까?" (139)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이런걸 팩폭이라고 하나요.
너우 웃기고 귀여웠다. 그러네. 맞아 니말이. ㅋㅋㅋ 앞으로 안 내야겠다.ㅎㅎㅎㅎ...
한국에서 일하는 이주 노동자들이 만든 스탑크랙다운 밴드를 동영상으로 본 적이 있다. 그들의 노래 <We love KOREA> 가사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누가 뭐래도 우리는 노동자 / 작업복에도 아름다운 일꾼 / 피땀 흘리면서 당당히 살아간 / 세상을 바꾸는 / 한국을 만드는 노동자
밴드를 소개해 준 아웅틴툰 씨가 그랬다. 우리는 한국을 만든다고, 한국을 움직이는 거의 모든 기계에 우리가 만든 부품이 안 들어간 게 없다고, 엘리베이터에도 에스컬레이터에도 자동차에도 냉장고에도 우리가 만든 부품이 꼭 하나는 들어간다고. (154)
아이들에게 다문화 단원에서 꼭 보여줘야지.
"We make KOREA" 정말.
각자 너무 바쁘면 관계에서 '관심'은 사라지고, '관리'만 남는다. (162)
가르쳐 주지 않고 야단치는 것, 시어머니들만 그러는 게 아니다. 사실 많은 이들이 그 비슷하게 행동한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상대가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알고도 안 하는' 상대를 야단치게 된다. 그런데 가르쳐 주지 않으면 정말 모를 수가 있다. 특히 다른 문화권에서 온 경우는 그렇다. (중략)
미얀마에서 온 아웅틴툰 씨는 사장님과 부장님 앞에서는 늘 팔짱을 꼈다. 미얀마에서는 그게 윗사람에게 하는 공손한 태도였다. 그는 그게 영국의 식민지 시절에 생긴 전통이라고, "내가 당신을 공격하지 않습니다. 나는 무기가 없습니다"는 표시하고 했다. 그래서 그도 그렇게 했다. 그런데 한국인 사장님과 부장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어른 앞에서 팔짱 끼고 있는 것이 거남해 보이는 행동이어서 이분들은 그가 건방지다고 생각했다. (166)
수업시간에 꼭 알려줄 예화.
매번 코를 부비고, 침을 뱉는 일화만 알고 설명했지 이건 나도 처음 보았다.
안타까움이 밀려온다. 사실 이런걸 찾아내서 알려줄 일이 아니라, 함께 대화하며 직접 배우고 나누어야하는 건데.
그리고 책에서 얻은 좋은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fUEU14EaQro
나는 동네 슈퍼마켓에서 작은 것도 신용카드로 산다. 내 이름 석 자를 서명하는 그 순간이 좋기 때문이다. 이름을 쓰는 순간, 내 앞에 있는 점원에게 이렇게 말하는 기분이 든다.
'당신이 보고 있는 내가 나의 전부가 아니랍니다. 나는 이곳에 오기 전에 당신이 모르는 많은 경험을 했고, 지금은 내 삶의 순간일 뿐입니다. 나는 당신이 지금 보고 있는 것보다 큽니다.'
그렇게 우리말로 내 이름을 쓰고 나면 장바구니를 든 손에 힘이 생기고 발걸음이 당당해진다. (175)
그런데 이 시선은 그들에게만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는 아무도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연고도, 배경도, 고급 취향도, 돈도, 자격증도, 노동 영웅다운 성실함도 없이 한국 땅에 온 북한 이주민을 보는 시선. 그게 무엇인지, 그 시선을 받는 게 어떤 느낌인지 우리 모두 조금씩은 알지 않는가. 우리 기억 저편에 묻어 둔 모멸감을 들추어 보면. (183)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사람들이 잘 들어주는 일은 뜻밖에 힘이 세다. 말하지 못하면 한이 된다. 마땅히 해야 할 말을 못하면, 살아서는 화병이 생기고 죽으면 원귀가 된다. (199)
북한 출신 주민을 '먼저 온 미래'라고 하는 사람도 많다(이 표현은 오랫동안 북한 출신 청소년을 지원하는 일을 하는 윤상석 선생이 10년도 훨씬 전에 처음 썼다. 이 자리를 빌려 밝힌다). 나도 이 표현을 좋아한다. 이들이 미래에 통일된 한반도에서 함께 살 수많은 북한 사람보다 앞서서 남한으로 온 것은 맞다. 그래도 먼저 온 미래다. 그리고 우리가 이들과 남북한이 함께 사는 연습을 조금이나마 미리 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미래 사회의 한 조각이 먼저 온 것도 맞다. 그런 뜻에서 나는 먼저 온 미래라는 말을 통일을 준비하면서 우리가 무엇을 배우고 익혀 나갈지 성찰하게 하는 말로 이해한다. 나는 이 표현을 좋아하지만 이들에게 먼저 온 미래라는 사명감을 갖게 하고, 통일 한국의 여명을 밝히리라는 기대를 담아 이 말을 쓰고 싶지는 않다.
그들이 통일 역군이 될지 말지, 자신이 먼저 온 미래라는 사명감을 가질지 말지는 스스로 결정할 문제이지 우리가 그러라고 떠맡길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것이 아니듯이, 이들도 "한반도 통일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온 게" 아니다. (236)
'먼저 온 미래'라니 진짜 멋있는 표현이다.
나도 이번해부터는 아이들에게 꼭 알려주어야지. 먼저 온 미래와 함께 지내는 우리라니, 공연히 우리까지 근사해지는 것 같다.
어떤 일을 하는 궁극적 목적이 그 일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는 상태를 만드는 것인 경우가 있다. 누군가를 도와주는 일도 그런 일 가운데 하나인 것 같다. 타인의 지속적인 도움이 없어도 혼자서 잘 살 수 있도록 해 주는 것, 자식을 키우는 일을 포함해서 모든 돌보는 행위는 어느 정도 그런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려면 지금은 도움이 필요한 약한 존재가 결국 혼자 설 수 있는 힘을 가지도록 도와줘야 한다. (237)
나는 그가 나를 기억하고 있는 것이 고마웠다. 왜 그는 고향의 소설가를 앞에 두고 내 이야기를 했을까? 그것은 아마 내가 그의 이야기를 오랫동안 들어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구술사의 고전 <The Voice do the Past>에서 톰프슨이 구술에는 '치유적' 성격이 있다고 말한 것은, 말하는 과정에서 억눌러 놓았던 특정 기억들을 해방시키고 비로소 자신의 삶을 온전히 통합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기억 하고 싶지 않은 것, 후회하는 것, 고통스러웠던 것, 증오했던 것, 그리운 것들이 마음결 구석구석에서 기어 나와 말로 표현되는 순간, 그 기억은 더 이상 사람을 지배하지 않게 된다. 듣는 사람의 역할은 단지 조용히 있어 주는 것뿐이다. (259)
아무래도 내 삶의 이야기는 지금까지의 시즌을 마치고 새로운 시즌을 준비해야 할까 보다(그러자 애린이와 린아가 응원해 줬다. 많은 시리즈에서 시즌2가 제일 재미있다고! 시즌1에서 자기의 캐릭터를 확실히 드러 낸 인물들이 시즌2에서는 훨씬 자유롭게 행동한단다. 큰 격려가 되었다.). 드라마를 한숨 돌리고 다시 시작할 때 '시즌'이라고 이름 붙인 것은 참 적절하다. 나도 한 시절, 한 계절을 보낸 것 같다. (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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