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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니

사람들이 그러던데요. 자식을 키우는 엄마는 강해야 하지만 손주를 키우는 할머니는 강하고 인자하고 명랑하기까지 해야 한다고. (16)

 

아이는 아름다웠다. 곱고 사랑스럽고 반짝반짝 빛났다. 내 핏줄이 뻗어간 가지 끝에 이런 것이 맺혀 있다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감사하고 뭉클한 존재였다. 흩날리는 벚꽃잎 같고, 밤새 쌓인 첫눈 같았다. 세상에 하나뿐인 보석들만 모아 정성껏 세공해서 만든 귀한 그릇 같기도 했다.
그 빛나는 그릇에 매일같이 담기는 타는 듯이 뜨겁고 검은 약을 남기지 않고 받아 마시는 것이 내 일이었다. (20)

 

몸이란 건 웃기고 요망한 덩어리라 음식물처럼 혼자만의 시간도 주기적으로 넣어줘야 제대로 일을 하겠다고 우아를 떨어댔다. 평소에는 내가 그저 기름 약간 거죽 약간을 발라놓은 뼈 무더기 같다가도, 조용한 방에 앉아 컵에 따른 소주를 천천히 목으로 넘기고 있으면 그나마 사람이라는 더 높은 존재로 회복되는 기분이었다. (21)

 

여긴 왜 이래?
네? 뭐가요?
어째 이리 상처도 흉도 하나 없어. 애 보는 사람이.
그러게요. 아, 여기 하나 있다.
이게 뭐야?
<은하친구들> 캐릭터 도장요. 지희가 안 받는다고 해서 제가 대신 받았는데 안 지워져요.
잘했다. 안 지워질 거야. 너 이제 큰일났다.
사십 년 지나도 안 지워질까요?
사십 년 지나도 안 지워져.
그러면 좋겠다.
왜?
할머니랑 이 얘기 한 거 기억날 테니까요. (37)

 

대니  그 일을 영원히 계속하죠. 오직 나를 위해서요. ... 그런데 할머니는 그렇지 않았어요. 할머니의 어떤 어려움은 없어지지 않는 것 같았어요. 견디는 거죠. 그런 건? 같이 시간을 보내는 동안 알게 된 거예요. 다른 게 또 있어요. 할머니는 행복한 순간에도 견딜 때가 있었고, 견디는 순간에도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 같은 표정일 때가 있었어요. 저에게는 그게 의미가 있었어요.
질문  아름다웠나요?
대니  잘은 모르겠어요. 내가 그 순간 무슨 의미로 그 말을 했는지요. 몰라서 미안해요. (43)

 

말들은 장식이다. 혹은 허상이다. 기억은 사람을 살게 해주지만 대부분 홀로그램에 가깝다. (47)

 

 


굿바이

검은 손이 손바닥을 위로 해 천천히 펴지더니 당신 족으로 다가온다. 몸은 꼿꼿이 그 자리에 서 있지만 당신의 마음은 움찔, 뒤로 물러난다. 피치 못한 사정이 아니라면 저기 닿는 일은 없었으면 하고 당신은 바란다.

 

검은 손이 손바닥을 위로 해 천천히 펴지더니 당신 쪽으로 다가온다. 몸은 꼿꼿이 그 자리에 서 있지만 당신의 마음은 움찔, 뒤로 물러난다. 피치 못할 사정이 아니라면 저기 닿는 일은 없었으면 하고 당신은 바란다. (52)

표현봐.. 8ㅅ8

 

 


쿤의 여행

오른쪽으로... 하고 중얼거리던 할머니는 나를 보더니 웅얼거림을 뚝 멈추고 말했다.
아이고, 떨어졌네? 아기가 돼버렸어. 아니, 어느 쪽으로 다녔는데 떨어져버린 거야?
나는 무서움을 참고 박스 무더기를 할머니 앞에 내려놓았다. 돌아서서 집으로 향하려는데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생은 하지 마! 고생하는 거랑 크는 거랑은 아무 상관도 없어. (92)

 

우리가 사귀기로 한 데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당시 유행하던 체코 작가의 똑같은 책을 우연하게도 동시에 읽고 있었고, 서로의 쿤이 마음에 들었다. 그때 그의 쿤은 어딘가 서글퍼 보였고, 아마 그때의 그에게 물었다면 내 쿤도 마찬가지라는 대답이 돌아왔을 것이다. 쿤 뒤에 탄 소년과 소녀는 서로를 보지 못했을 거라 나는 확신한다. (97)

 

이제, 무엇이든 되고 싶은 것이 되어봐.
나는 가만히 서 있었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물음표가 내리누르는 것 같았고, 텅 빈 객석이 나를 적대하는 느낌이었다.
나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랬다. 그게 내가 되고 싶은 것이었다. 그러나 어떻게 눈을 깜빡일지, 어떻게 숨을 쉬어야 할지조차 나는 알 수 없었다.
내가 가만히 있자, 그녀는 내게 세상에서 가장 있고 싶지 않은 장소를 떠올려보라고 했다. 그런 곳을 상상해. 가장 어둡고 무겁고 슬픈 곳을. 그리고 거기서 뛰어나와 달리기 시작해. 나 자신이 죽도록 싫어지면 난 그렇게 해. 달리다보면 반대편의 장소가 떠올라. 내가 되고 싶었던 내가, 아직 보이지는 않지만 거기서 기다리고 있는 게 느껴져.
그래서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110)

 

 


루카

싫은 것을 좋다고 하기는 절대로 싫다는 성난 마음 때문에 눈매가 사나웠으나 남의 기분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그만큼 강해서 전체적으로 눌리고 주눅 든 표정의 덩어리가 되어 간신히 버티고 있는 상태였다. 일하기 싫은 이유를 솔직히 말하면 박봉에도 성실하게 출근하는 다른 사람들이 상처받을 테고 그냥 다니다간 내가 죽겠고, 길게 말하자면 그렇지만 짧게 말하자면 나는 그저 겁이 많았다. (119)

가끔 내가 짓는 표정일 수 있겠구나.
이상한 모양을 하고 있겠구나 나는.

 

마주 앉은 사람의 피부 한 겹 아래까지 닿을 듯 꼿꼿한 시선이 있었고 말로 사람들을 이끄는 사람답게 동굴 안에서부터 울려 나오는 것 같은 목소리가 있었으며 주목과 주시 속에서 살아온 사람 특유의 피로한 윤기가 지우다 만 분장처럼 얼굴 여기저기에 묻어 있었다. (122)

아 진짜 이렇게 쓸 수 있나?
한참을 눈으로 매만져 보았던 표현.

 

전날 밤부터 시작된 통화가 새벽 두시까지 이어졌고 나는 전화기를 든 채 잠들었다가 정오가 다 되어 간신히 눈을 떴는데 너에겐 피곤한 기색이 없었다. 너의 얼굴은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말하고 있었다: 1) 함께 있지 않을 때에도 나는 내 공간에서 몸을 움직여 네가 모르는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고 있고 2) 내가 이렇듯 매력적인 사람이라는 걸 네가 알아주었으면 하며 3) 그렇지만 나는 우리가 함께 할 이야기에 죽음을 각오하고 폭포 속으로 온몸을 던지는 새들의 절박함과 시리고 날카로운 열정이 아니라 생활이 만들어내는 무해하고 보드라운 거품들과 건강한 웃음이 더 많았으면 해. 네가 말없이 하고 있는 말들이 나를 기쁘게 했고 나는 너의 초대를 받아들였다. (124)

아이고.....

 

우리는 또다른 빛 하나를 집에 들였다. 모임 사람들에게 우리의 관계를 밝히고 모두를 초대한 것이다. 루카 너에겐 어땠을까. (124)

 

가끔 만나면 모임 사람들은 우리를 하늘이 맺어준 커플이라고 불렀고 그런 말에 나는 굳이 토를 달지 않았다. 함께 사는 동안 너와 나는 별로 싸우지 않았다. 싸워야 할 것 같은 분위기가 흐르면 심각해지기 전에 어느 한쪽이 먼저 미안하다고 말했다. 어느 영화의 대사에 대놓고 반항하는 십대들처럼, 우리는 사랑하기 때문에 미안하다는 말을 서로에게 아끼지 않았고 그 점을 걱정해본 적은 없었다. 그것이 우리의 방식이었으므로. 나는 너에게 정말로 미안할 때가 많았으므로. 나는 깔끔한 성격이 못 돼서 거실을 매번 어질러놓고 치우기 싫어하는 내가 미안했다. 네가 싫어하는 담배를 끊지 못하는 내가 미안했다. 나중에는 집에 생활비를 조금밖에 가져오지 못해서 미안했다. 무엇보다도, 네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이 나는 미안했다. (133)

 

사람들이 추천작이라며 별을 여러 개 붙여둔 드라마였고 나는 단지 너와 무언가를 같이 보고 싶었다. 너와 극장에 나란히 앉아 영화를 본 것이 대체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 네가 등뒤에서 중얼거렸다.
딸기.
나는 한쪽 귀에서 이어폰을 뺐다.
죽어버린 것이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
고개를 돌려 보니 너는 책상 위로 몸을 수그린 채 연필을 사각사각 움직이고 있었다. 뭐가 죽었는데? 세탁할 때가 지난 것처럼 보이는 너의 낡은 하늘색 수면바지를 쳐다보다가 나는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네가 대답했다. 나는 잠시 그대로 있었고 너는 더이상 말하지 않았다. 나는 몸을 원래대로 돌리고 한쪽 귀에 이어폰을 도로 꽂았다. 이어폰에서는 내가 좋아하지도 않는 최신 케이팝이 쿵쾅쿵쾅 울리고 있었다. 드라마 다운로드 상태를 다시 확인하는데 천천히 코가 매워지기 시작했다. 눈물이 만들어져 모이고 있었다. 그냥 너를 보고 있다가 등을 돌려 하던 일들을 계속한 것뿐인데 방금 전 내가 한 단순한 동작들의 연속이 왜 그러게 서글픈지 알 수 없었다. 언제부턴가 우리의 대화는 잘못 깎은 연필심처럼 끊겨나갔다. 그러지 않았던 날들이 생각났다. 아무것도 아니야, 따위의 말이 나오지도 않았고 설령 그런 말이 나온다 한들 거기서 허망하게 대화가 끝나버리는 일도 없었으며 방에서 음악을 들을 때 서로에게 방해가 될까봐 이어폰을 사용하지도 않았다. 언제나 같이 듣고 같이 느꼈다. 너는 둥근 주걱 모양으로 길어질 때까지 발톱들을 그냥 놔두지 않았고 나는 식탁에 함부로 그릇들을 탁, 탁 내려놓지 않았다. 무엇보다 나는 너에게서 그렇게 빨리 등을 돌려 돌아앉이 않았다. 그 사실을 견딜 수 없어 나는 거실로 나갔다. 욕실에 들어가 옷을 벗고 샤워기를 틀었다. 델 것처럼 뜨거운 물 아래 오래 서 있었다. (138)

ㅠㅠ 마음이 정말 먹먹했다..
으윽 너무 싫어 저 때의 마음, 상황, 공기.
그래서 나는 매번 도망쳤다.

 

처음에는 나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러나 이제 너에게는 나 말고도 신이, 부서진 부분이 많을지언정 가족이, 어떤 공동체가, 다른 삶이 다시 필요해진 것이었다.
나는 그런 것들이 필요하지 않았다. 나는 신을 만나본 적이 있었다. 루카, 내가 너를 만난 것이 그가 존재한다는 증거였다. 내가 그 신에게 경배를 드리고 기도를 바칠 필요는 없었다. 그는 가만히 존재하는 것만으로 스스로를 증명하는 신이었고 나에게도 너를 사랑하는 것 외에 다른 무언가를 요구하지 않았으므로. (143)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눙물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그곳에 함께 가보자는 건 내 생각이었다. 예배를 보는 동안 우리는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예배가 끝나자 사람들이 와서 인사를 했고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정식으로 등록을 하지 않겠느냐고, 여기서는 모두 이웃처럼 친하게 지낸다고 우리에게 권했다. 강요로 느껴지지 않는 부드러운 말들이었다. 다른 부분들도 걱정한 것만큼 이상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기도를 하고 노래를 부를 때 자신을 필요 이상으로 열어야 한다는 점이 조금 낯설게 느껴졌을 뿐이었다. 그날 그 교회에서 나는 너의 신에게 너와 헤어지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우리가 이미 오래전에 헤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49)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루카, 나는 너에게 네가 왜 루카인지 묻지 않았다. 예전에도 지금도 나는 그것이 잘못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너 역시 내가 왜 딸기인지는 묻지 않았으니까. 나는 이제 너와 함께가 아니고 여전히 어떤 것들에 대해서는 묻지 않은 채 살아간다. 어떤 일들은 그저 어쩔 수 없고 어떤 일들은 노력해도 나아지지 않으며 함께 살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어떤 사람들과는 함께 살 수 없다. 그저, 그럴 수 없다. 삶이라는 이름의 그 완고한 종교가 주는 믿음 외에 내가 다른 무언가를 믿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내 믿음을 지켰고 너를 잃었다. 그 사실이 가끔 나를 찌르지만 나는 대체로 평안하다. 그런데 루카, 너는 어떠니. 너는 그곳에서 평안하니. 루카였고 예성이였던 너는. (150)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우리는 어떤 것들에 대해서는 묻지 않은 채 살아간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러브 레플리카

냉정히 말해 바다에서 헤엄을 치고 나와 간이 탈의실에서 수영복을 벗을 때면 사타구니에 엉겨들던 젖은 모래와의 관계보다 나을 것이 없었다. 시간은 경의 내부로 들어오지 않았다. 마른 시간들은 경의 팔다리를 타고 떨어져 혼란스럽게 뒤섞였고 젖은 시간들은 뭉쳐 덩어리를 이루고 있다가 한꺼번에 사라졌다. (154)

저런 표현을 어떻게 생각해내지??????

 

 


핍은 그런 그녀와 함께 가끔 우스꽝스럽고 대체로 쓸쓸하며 때로는 갈비뼈가 쓰릴 만큼 서글픈 역할을 최선을 다해 연기하는 것이 자신에게 남은 소명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가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 조금이라도 안다면, 그 소명이 바로 그것과 가장 닮은 것이었다. 그러나 때로는 그런 생각 뒤에 과연 그럴까 하는 생각이 곧바로 따라붙기도 하는 것이었다. 과연 그런가? 이것이 내 남은 삶의 전부인가? 더이상 열일곱 살로 보이지 않는 이 여자애와 함께 날마다 눈을 뜨고, 밥 위에 짠 과자를 얹어 먹고, 점점 줄어드는 대화와 늘어나는 짜증을 애써 무시하면서, 마치 미래 같은 것이 있는 것처럼 스스로를 속이며 하루하루 무참하게 투명해져가는 것이? 찾을 수도 죽여버릴 수도 없는 그 어른들처럼 되어가는 것이? (201)

 

핍이 소리친다. 어쩌라고. 나보고 대체 어쩌라는 거야? 우리가 뭘 어쩔 수 있었어? 없었어. 방법이 없었다고!
갑작스레 쏟아지는 그 말들에 얀은 기가 질린 듯 그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단호한 표정을 되찾으려 노력하면서 중얼거린다. 핍, 나 이제 갈게.
핍이 귀를 의심한다. 헤어지자고, 그녀가 다시 말한다. 그들의 나라에는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울려퍼질 것 같던 그 말들을, 지금 그녀가 또렷한 목소리로 한다. 이 순간을 연기하는 자신을 핍은 몇번인가 상상했으나, 지금 무대에서 펼쳐지는 것은 상상과는 다르다. 더 지루하고, 더 이중적이다. 헤어지자는 그녀의 말에 허우적대면서, 그 말을 먼저 한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는 비겁한 안도감이 가슴을 꿰뚫고 가는 것을 핍은 느낀다. 그러면서도 또다시, 생각한다. 그녀를 조금은 다치게 하고 싶다. 나 혼자라면 너무 억울하다. (225)

 

식탁 위 빈 곳을 보며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다.
그러다가 그만두었다.
숨결이 핍의 어깨를 들어올렸다가 내려놓았다. 들어올렸다가 또 내려놓았다. 그의 눈이 젖어들었다. 마치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어떤 벅찬 깨달음이 그의 내부에 날아와 박혔고, 이제 그의 몸을 뚫고 나오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모두가 듣고 싶어할 그 말들을, 핍은 끝내 들려주지 않을 것이다.
그 말들은 침묵과 재에 감싸인 채 영원한 미지로 남을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것을 공평함이라고 부를 것이다. (234)

 

 


엘로

주문으로 엘로가 줄어드는지 마는지, 그런 건 신경쓰지 않았다. 손님이 나가면 그의 감정은 문턱에서 멈췄다. 따라간들 어찌할 것인가. 짐작건대 뭔가 폭포 같은 걸 만나게 될 것 같았다. 두 손바닥을 한껏 펼쳐 그들의 머리 위로 폭포처럼 쏟아지는 불행을 향해 뻗었다가 옷에 튄 물 몇 방울에 움찔하며 뒷걸음질칠 자신이 너무 빤했다. 폭포란 걸 알면서 굳이 손을 갖다 대고, 내 손은 왜 이리 작을까, 그렇게 진심인지 아닌지도 실은 알 수 없는 혼잣말을 반복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뻗었던 손을 주춤주춤 거두어 주머니에 넣는 일 자체가 황망하지 않겠는가. (296)

내가 아픈 아이들을 대할 때? 상담할 때? 태도랑 비슷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비겁해보인다. 그런데 난 용기도 없다.

 

그러나 결국 그는 선을 그었다. 가늘지만, 그에게는 단단한 결계와도 같은 선이었다. 그는 작은 손바닥을 자꾸만 들여다보고 탓하는 대신 그 손바닥이 할 수 있는 일을 지키고 싶었다. 그것마저 잃을 수는 없었다. 약간의 돈을 받고, 꼭 그만큼의 행운을 준다. (296)

 

"그게 흑마법인지 어떻게 아십니까."
마르한이 긴 사연을 털어놓았다. 아자레는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저는 마법은 전혀 모릅니다. 아버지의 재능은 저에게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으로 보고 들으며 나이를 먹었고, 정확하지는 않아도 대략적으로 사람을 식별하는 눈 정도는 갖게 되었습니다. 흑마법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흑마법'이라는 말 자체를 사용하지 않아요. 당신처럼 자신에 대한 의심 때문에 먼길을 걸어오지도 않습니다. 고양이 일은 당신 때문이 아닐 수도 있어요."
"꽃이 시드는 걸 제 눈으로 봤습니다. 모르는 사이에 사람들에게 불운을 불어넣고 엘로를 키우지 않았을까 두렵습니다."
"사람들은 모르는 사이에 많은 것을 주고받는답니다. 행운만큼 불운도 주고 또 받을 수밖에 없어요. 마법이 아니라도 말이지요." (304)

 

다만... 자신이 하는 일이 누군가에게 작은 기쁨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만은 그의 몸속에 여전히 남아 있었다.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것은 태어날 때부터 그의 몸속에 깊이 박혀 있던 핵심이어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334)

 

봉부장님이 빌려주시며 추천해주신 책.
이 책을 읽고 좋다고 추천해줄 수 있는 사람이라니,
진짜 어떤점이 별로인걸까.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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