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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빙긋 웃음이 나왔다. 로제는 9시에 오기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7시였다. 시간은 충분했다. 침대에 길게 누워 두 눈을 감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을 시간, 긴장을 풀 시간, 휴식을 취할 시간, 하지만 저녁마다 반드시 휴식을 취해야 할 만큼 고단하게, 낮 동안 자신이 무언가에 열정적으로 몰두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이 창문에서 저 창문으로 배회하게 만드는 이 불안정한 무기력이 어떤 것인지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어린 시절 비 오는 날이면 느끼곤 했던 무기력이었다. (10)

 

그녀는 로제에게 설명할 수 없으리라. 자신이 지쳤다는 것, 그들 두 사람 사이에 하나의 규율처럼 자리 잡은 이 자유를 이제 자신은 더 이상 어떻게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그 자유는 로제만 이용하고 있고, 그녀에게는 자유가 고독을 의미할 뿐이 아니던가. 자신이 그가 몹시 싫어하는 악착스럽고 독점욕 강한 여자가 된 것 같다는 말을 그녀는 그에게 할 수 없으리라. 문득 그녀는 아무도 없는 자신의 아파트가 무섭고 쓸모없게 여겨졌다. (11)

 

그가 그녀에게 이런 사실을 고백한 것은 불과 얼마 전이었는데, 그 고백 자체가 그녀에게는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그녀는 자신의 이해심과 애정으로 인해 그녀가 슬그머니 그의 상담자 역을 떠맡게 되었다는 사실에 점점 더 커져 가는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바로 그녀의 삶이 아닌가. 그런데 그는 그 사실을 잊고 있었고, 그녀는 정말이지 존경받을 만한 신중함으로 그가 그 사실을 잊는 것을 돕고 있는 셈이었다. (15)

 

로제는, 아마도, 가끔은 그녀를 필요로 하리라... 하지만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잠들고 깨는 데 필요하다거나 열정적으로 필요해서가 아니라 본능적으로만 필요로 할 뿐임을 그녀는 때때로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가만히, 가슴 아프게 고독을 되씹었다. (17)

 

그녀가 담배 한 개비를 집어 들자 그가 그녀에게 라이터를 내밀었다. 두툼한 트위드 재킷 아래로 우스꽝스럽게 나와 있는 두 팔목은 무척 가늘고 소년티가 났다. '이런 외모를 가진 사람이 저렇게 사냥꾼 같은 모피 옷을 입어선 안 되는데.'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순간 그녀는 그를 챙겨 주고 싶은 욕구를 느꼈다. 그는 그녀 나이의 여자에게 모성애를 불러일으키기에 꼭 알맞은 그런 부류의 청년이었다. (24)

시몽은 차은우..같이 생겼을 것 같아..... ㅎㅎㅎㅎㅎㅎ....

 

"그리고 당신, 저는 당신을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발합니다. 이 죽음의 이름으로, 사랑을 스쳐지나가게 한 죄, 행복해야 할 의무를 소홀히 한 죄, 핑계와 편법과 체념으로 살아온 죄로 당신을 고발합니다. 당신에게는 사형을 선고해야 마땅하지만, 고독 형을 선고합니다."
그는 말을 멈추고는 포도주를 한 모금 길게 마셨다. 폴은 반박하지 않았다.
"무시무시한 선고로군요."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가장 지독한 형벌이죠. 저로서는 그보다 더 나쁜 것, 그보다 더 피할 수 없는 것을 달리 모르겠습니다. 제겐 그보다 더 두려운 게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그럴 겁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입 밖에 내어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저는 때때로 고함을 지르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나는 두려워, 나는 겁이 나, 나를 사랑해줘 하고 말입니다."
"저 역시 그래요." 그녀는 의지와는 달리 속내를 털어놓았다. (44)

내가 이 책을 읽은게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부분.
이 부분을 만나서 너무 좋았고 지금도 좋다. 다시 봐도 좋은 부분.

 

그녀는 자기 팔을 잡고 있는 이 말 없는 청년에게 애정 같은 것을 느꼈다. 이 낯선 청년이, 일시적이지만 그녀의 동반자가 되어, 한 해의 마지막에 황량한 길을 함께 걷고 있었다. 산책의 동반자든 인생의 동반자든, 자신과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 그녀는 언제나 애정을 느꼈다. 그들, 무척 다른 동시에 아주 가까운 그들이 그녀 자신보다 더 훌륭하다는데에 대한 감사 같은 것이었다. 생활이 윤택해지자마자 헤어졌던 전남편 마르크의 얼굴과 그녀를 몹시 사랑했던 또 다른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로제의 얼굴이 떠올랐다. 머리속에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그녀에게 생기를 주고 표정을 바뀌게 하는 유일한 얼굴이었다. 한 여자의 삶에 세 동반자들이 있었다는 것, 그것도 모두 좋은 동반자들이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대단하지 않은가? (45)

때 때마다 좋은 동반자들이 함께 해줬으니까, 사실 그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진심으로.

 

그리고 그는 그런 점에 흡족함을 느꼈으리라. 언제나처럼 그는, 그 자신이 그토록 접촉하고 싶어하는 너무도 이질적인 이런 아름다운 육체가 불명료하고 편협한 작은 두뇌의 지시를 받으며 삶 한가운데를, 거리 한가운데를 활보하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두려움과 측은함과 거리감을 느꼈다. (48)

 

그녀는 이번 이틀 동안 할 수 있었을 일들을 상상해 보았다. 로제와의 산책, 로제와의 대화, 저녁, 그리고 통째로 놓여 있는 시간, 해변처럼 매끄럽고 따뜻한 온종일과 더불어 서로의 곁에서 잠을 깨는 일을. 그녀는 전화기를 향해 몸을 돌렸다. 친구와 점심을 먹을 수도 있었고 저녁에 누군가의 집으로 브리지 게임을 하러 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동시에 이틀 동안 혼자 있어야 한다는 것이 두려웠다. 그녀는 애인 없는 여자로서 보내야 하는 일요일이 몹시 싫었다. 가능한 한 늦은 시각까지 침대에서 책을 읽고, 사람들로 붐비는 영화관에 가고, 아마도 누군가와 함께 칵테일 파티에 참석하거나 저녁 식사를 하고 나서 마침내 집으로 돌아와 그 흐트러진 침대를, 아침 이후 정지해 있었던 듯한 그 느낌을 맞닥뜨려야 했다. (50)

와.. 작가는 작가임을 실감케 한다.
집으로 돌아와 그 흐트러진 침대를, 아침 이후 정지해 있었던 듯한 그 느낌이라니.

그러면서 폴은 부인과의 대화를 일에 관한 것으로 국한하려 필사적으로 노력했지만 테레사는 막무가내로 주제에서 벗어나 여자들끼리의 속내 이야기로 돌아가곤 했다. 늘 그랬었다. 폴의 얼굴에는 안정되고 자족적인 무언가가 있었고, 그것이 상대에게서 요란한 수다를 끌어내곤 했다. (52)

 

그도 그럴 것이 맑은 11월의 하늘에 다시 나타난 태양이 그 순간 그녀의 방을 따뜻한 빛과 음영으로 채웠던 것이다. '오늘 6시에 플레옐 홀에서 아주 좋은 연주회가 있습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어제 일은 죄송했습니다.' 시몽에게서 온 편지었다. 폴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웃은 것은 두 번째 구절 때문이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그 구절이 그녀를 미소 짓게 했다. 그것은 열일곱 살 무렵 남자아이들에게서 받곤 했던 그런 종류의 질문이었다. 분명 그 후에도 그런 질문을 받았겠지만 대답 같은 걸 한 적은 없었다. 이런 상황, 삶의 이런 단계에서 누가 대답을 기대하겠는가? 그런데 그녀는 과연 브람스를 좋아하던가? (56)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나를 궁금해하고, 내가 궁금한 나머지 내가 브람스를 좋아하는지까지 궁금해진 거겠지.. 그렇게 나를 궁금해하는 마음과 태도가 너무 간지럽다. 대부분이 궁금해하지 않는 부분까지 궁금해하는 사람. 그런 사람들에게서 매번 나도 매력을 느껴왔던 것 같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그 짧은 질문이 그녀에게는 갑자기 거대한 망각 덩어리를, 다시 말해 그녀가 잊고 있던 모든 것,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던 모든 질문을 환기시키는 것처럼 여겨졌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자기 자신 이외의 것, 자기 생활 너머의 것을 좋아할 여유를 그녀는 여전히 갖고 있기는 할까? 물론 그녀는 스탕달을 좋아한다고 말하곤 했고, 실제로 자신이 그를 좋아한다고 여겼다. 그것은 그저 하는 말이었고, 그녀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어쩌면 그녀는 로제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한다고 여기는 것뿐인지도 몰랐다. 아무튼 경험이란 좋은 것이다. 좋은 지표가 되어 준다. 스무 살 때 그랬던 것처럼 그녀는 누구에겐가 속내를 털어놓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58)

나도 해당하는 부분인 것 같다. 누군에겐가 속내를 털어놓게 되는 지점, 그곳은 내 관계의 모든 분수령이 되어준다. 현호에게도 그 어느 날, 내가 쉽게 타인에게 말 못하는 나의 속내를 털어놓았을 때부터였으니까. 그리고 그 속내를 들어주는데서 그치는게 아니라 존중하고 이해하는 그의 태도가 참 좋았다. 그리고 여전히 그 점이 내가 제일 좋아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사실 저는 연기를 하고 있어요. 당신과 함께 있을 때, 저는 촉망받는 젊은 변호사이자 사랑에 빠진 연인이자 버릇 나쁜 아이 역할을 연기했지요. 하지만 당신을 안 이후 제가 연기한 그 모든 역할은 당신을 위해서였어요. 그게 사랑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64)

 

"당신은 로제를 사랑하지만 지금 혼자 있습니다. 당신은 일요일마다 혼자 있겠지요. 당신은 혼자 저녁 식사를 하고, 아마도... 아마도 종종 혼자 잠들겠지요. 하지만 저라면 당신 곁에서 잠들 겁니다. 밤새도록 당신을 품에 안고, 당신이 자고 있는 동안 당신에게 입 맞출 겁니다. 저라면 그 이상으로도 사랑할 수 있어요. 그런데 그 사람은 더 이상 그렇지 않죠. 당신도 알겠지만..." (64)

끄윽... 심댱.. ㅇ<-<

 

그는 다른 여자를 만나면서도, 심지어는 폴에게 거짓말을 하면서도 폴에게 괴로움을 안겨 줄 생각 같은 건 꿈에도 없었다. (66)

신기하지.

 

"난 자유로운 남자야"라는 자신의 마지막 말이 그를 좀 불편하게 하고 있었다. 그것은 '책임에서 자유로운 남자'라는 뜻이었다. 그는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가능한 한 빨리 폴을 만나고 싶었다. 그녀만이 그를 안심시킬 수 있었고 그녀는 그렇게 해 줄 것이었다. (69)

얼마나 위태한 모습인가. 그때는 모를 수밖에..

 

편지에다 그녀는 '빨리 돌아와요.'라고 쓰지 않았던가. 그는 그 구절로 인해 자신이 지나친 기대를 품었다는 사실보다, 그 구절을 읽고 어리석게도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확신에 찼었다는 사실이 더 유감스러웠다. 그는 잘못 알고 행복해하기보다는 제대로 알고 불행해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80)

 

그녀는 그를 끝까지 밀어붙여 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다가, 이어 그런 잔인성을 뉘우쳤다. 그런 잔인성, 곧 복수에 대한 불합리한 욕구는 그녀 자신의 슬픔의 이면이었을 뿐, 시몽은 그런 대접을 받을 이유가 없었다. (81)

슬픔의 이면.

 

하지만 그는 메지에게, 그 여자의 어리석음과 육체에, 그 여자가 벌이는 끔찍한 소동과 지독한 질투심에,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 여자가 그에 대해 키우는 뜻밖의 열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 여자는 매일같이 그의 얼굴에 더할 수 없이 노골적으로 그런 열정을 퍼부어 댔고, 그 지독한 뻔뻔스러움에 그는 매혹당했다. 그는 줄곧 뜨거운 터키탕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인생에서 이런 생생한 열정을 불태우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일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고, 그는 그것에 굴복했다. 그가 폴과의 약속을 취소하고(그러면 폭은 평소와 같은 어조로 "괜찮아, 로제. 내일 만나."라고 대답했다.) 메지의 방으로 돌아가면, 그 여자는 눈물을 흘리며 그가 원한다면 자신의 직업을 포기하겠다고 단언했다. 그는 주의 깊게 스스로를 관찰하면서 자신이 이 어리석은 관계를 어디까지 참아 낼 수 있을까 자문했다. 그런 다음 그는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녀가 아양을 떨기 시작하면, 그는 반쯤은 우둔하고 반쯤은 상스러운 그녀의 중얼거림에서 이제껏 경험하지 못했던 관능적인 흥분을 느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을 찾춘 채 줄곧 폴을 쫓아다니는 이 시몽이라는 청년은 무척 편리한 존재였다. 메지와의 관계를 끝내는대로 사태를 바로잡고 폴과 결혼하리라. 로제는 아무것도 확실한 수 없었고 자기 자신조차 신뢰할 수 없었다. 그가 확신하는 유일한 것은 그 무엇으로도 부술 수 없는 폴의 사랑이었고 몇년 전부터 그녀에게 집착해 온 자기 자신의 마음뿐이었다. (86)

 

앞에서 차를 세우긴 했지만, 시동을 끄지는 않았다... 순간 그녀는 로제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리라는 것, 자기 집까지 올라오지 않으리라는 것, 이 모든 것이 그가 기득권자로서 갖고 있는 것을 잃을까봐 취한 조심스런 행동일 뿐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폴은 차에서 내린 다음 나직하게 "잘 가."라고 인사하고는 길을 건넜다. 로제는 즉각 차를 출발시켰다. 그는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92)

비겁해!!!!!!!!!!!!!!! 진짜 싫어!!!!!!!!!!!!!!!!!!!!!!!!!! 으으으
근데 나도 언젠가 저런 적이 있겟지.... ㅜㅜ..

 

'나는 당신을 무척 힘들게 할 것이고, 그건 경솔한 짓이다.' 운운하는 형식적인 신중함이 종종 그 직전이나 직후에 벌어진 사건을 암시한다는 것, 그런 신중함은 대개 낙심에서 나온 것이라는 생각은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폴 역시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녀는 두려움에 사로잡혔고, 이제는 무의식적으로 그가 자신을 보러 와 주기를, 자신이 그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겨울의 단조로운 나날, 고독한 그녀 앞에 끝없이 펼쳐진 집과 상점 사이의 똑같은 길들, 로제 아닌 다른 이의 목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수치심과 더불어 수화기를 든 것을 후회하게 만드는, 지독히도 배신감을 느끼게 하는 전화, 그리고 영영 되찾을 길 없는 긴 여름에 대한 향수, 그 모든 것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무슨 일인가 일어나야 한다.'라는 절박감과 더불어 그녀를 무력하고 수동적으로 만들었다. (95)

 

폴은 눈 감은 그의 얼굴과 긴장한 그의 손을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사실 지난 열흘 동안 그녀는 가슴 아프도록 그가 그립지 않았던가. 끊임없는 그의 존재감, 그의 감탄, 그의 집요함으로 인해 감각상의 습관 같은 것이 만들어져, 어떤 이유로도 그로부터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녀 쪽으로 향해 있는 그의 얼굴에는 평소의 그 표정, 서른아홉 살 난 여자를 정신적으로 만족시켜 줄 만한 표정이 떠올라 있지 않았다. (97)

 

"저는 정말이지 당신 없이는 못 살겠어요. 그동안 저는 공허 속에서 왔다 갔다 했을 뿐이에요. 권태를 느낄 수조차 없었어요. 저 자신을 박탈당해 버렸어요. 당신은요?" (98)

 

그녀는 고개를 들어 자신과 얼굴을 맞대고 있는, 아직 어린 티가 가시지 않은 그 얼굴을 바라보기가 두려웠다. 그녀는 자기 자신을, 사려 깊고 단호한 폴을 다시 대하기가 두려웠다. 스스로의 행동에 대해 판단하기가 두려웠다. (99)

 

폴은 이 공백 기간 동안 로제를 되찾고자 애썼다. 적어도 다시 로제와 만나, 다시 그와 화합할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녀는 흥분한 어린아이 같은 로제를 발견했을 뿐이다. 자신을 낮추는 그녀의 노력은 감동적이었다. (100)

 

시몽은 전화로는 말을 더듬으면서도, 직접 얼굴을 대하면 "저는 행복해요. 당신을 사랑해요."라고 당당하게 말하곤 했다. 시몽이 그녀에게 가져다준 것은 완벽한 어떤 것, 적어도 어떤 것의 완벽한 절반이었다. 이런 일은 혼자가 아니라 둘이어야 완벽하다는 것을 그녀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101)

어떤 것의 완벽한 절반, 이라니.

 

그 자신에 대해 말하면서, 시몽은 사랑은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받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녀에게는 그 말이 유난히 특이하게 여겨졌다. 그녀는 자신이 개입된 이 연애의 초입에서, 예를 들어 로제와의 관계 초기에 있었던 흥분과 약동 대신 발끝까지 휘감은 거대하고 나른한 권태를 느꼈다. 모두들 나에게 분위기를 바꿔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애인을 바꾸게 되는군 하고 그녀는 서글프게 생각했다. 덜 성가시고 더 파리지앵답고 너무나 자주 만나 주는 애인으로... 그녀는 거울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볼 때면 고개를 돌려 버리거나 얼굴을 콜드크림으로 덮어 버렸다. (101)

너무 웃기고 재밌는 부분ㅋㅋㅋㅋㅋ 하.. 나의 분위기를 바꾸라니 애인을 바꾸게 되는군 이라니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리하여 아침이 오자 그들은 막 잠에서 깨어난 척 차례로 하품을 하고 조용히 기지개를 켰다. 하지만 둘이 동시에 그러지는 않았다. 시몽이 돌아눕거나 팔꿈치를 괴고 몸을 일으키면, 폴은 관계 후 나누는 첫 눈길, 그 어떤 동작보다도 통속적이고 결정적인 그 눈길이 두려워 본능적으로 이불 속을 파고들었다. 참다못해 그녀가 먼저 몸을 움직였을 때, 시몽은 신경을 곤두세운 채 두 눈을 감고 밤 동안 함께 했던 행복감이 너무 빨리 스러져 버리지는 ㅇ낳을까 두려워하며 숨을 참고 있었다. (104)

 

그는 그녀의 가슴에 머리를 묻고, 그녀의 팔오금과 어깨와 뺨에 부드럽게 키스하고,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당신 꿈을 꿨어. 이제는 당신 꿈만 꿀 거야." 그녀는 다시 그를 껴안았다.
시몽은 그녀를 직장까지 데려다 주고 싶다면서 그녀가 원한다면 길모퉁이에 내려 주겠노라고 말했다. 폴은 조금 서글픈 어조로 자신은 아무에게도 자기 행동을 보고할 필요가 없노라고 대답했다. 그들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을 깬 것은 시몽이었다.
"6시 전에는 나올 수 없어? 나랑 점심 식사를 하면 어때?"
"그럴 시간 없어. 나는 나오지 않고 샌드위치를 먹을 거야."
"그럼 난 6시까지 뭘 하지?" 그가 투덜거리듯 말했다.
그녀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불안했다. 그들이 저녁 6시에 만나는 게 의무 사항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그에게 할 수 있을까? 다른 한편, 매일 저녁 그가 작은 자동차에 탄 채 문 앞에서 조바심을 내며 자신을 기다려 주리라고 생각하자 그녀는 벅찬 행복감을 느꼈다... 매일 저녁 누군가 나를 기다려 주다니. 저녁 8시 기분이 내키면 방심한 태도로 전화나 걸어오는 대신...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105)

좋으면서도 답답한 마음이겠지 폴은. 
너무 잘 알 것 같기도 하고. 또 시몽의 마음을 알 것 같기도 하고.

 

전화기를 향해 습한 층계를 내려가면서 그녀는 약간 짜증이 났다. 시몽과 있을 때와는 전혀 달랐다. 시몽은 몹시 열성적이고 즐거워하고 그녀를 배려할 채비가 되어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문을 열어 주고, 그녀의 담배에 불을 붙여 주고, 그녀의 사소한 욕구 하나 하나를 채워 줄 태세가 되어 있었다. 이제 시몽은 그녀가 원하는 것을 그녀 자신보다도 미리 알아채곤 했는데, 그것은 의무라기 보다는 배려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109)

갓시몽.......♡

 

'내가 의도적으로 저 사람의 아픈 곳을 찌르는 건 이번이 처음이군.'하고 그녀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생각했다. (114)

으 너무 마주하기 싫은 순간.
나는 대개 이런 경우에 헤어짐이 머지 않았음을 직감했던 것 같다.
가장 아픈 곳을 가장 아프게 찌를 수 있다는 건, 그사람보다 내가 더 중요해지는 때인 거니까.

 

그녀는 시트를 어깨 끝까지 끌어당겼다. 몸은 나른한 행복감에 젖어 있었지만 이 낯선 곳에서 딴 데 정신이 팔린 듯 말이 없는 로제, 끝없이 펼쳐진 저 밭과 함께 하루를 보내야 한다는 끔찍한 생각에 그녀는 지레 질려 있었다... 그녀는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창문 좀 닫아 달라고 했잖아." 그녀가 건조하게 다시 말했다.
로제는 골루아즈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날의 첫 담배였다. 그런 다음 그는 불쾌한 동시에 감미로운 담배의 쓴 맛을 음미했다. 등 뒤에서 메지가 그에게 적의를 키우는 것을 그는 초조한 기분으로 감지했다. '저 여자가 화가 난 나머지 튕겨지듯 자리에서 일어나 차를 타고 파리로 돌아가 버리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함께 다닐 만한 길 잃은 개를 한 마리 찾아내 하루 종일 들판을 돌아다닐 텐데.' 그는 완전히 혼자가 되는 것은 두려웠던 것이다. (118)

비겁한 모습, 그리고 익숙하다.

 

"아! 그렇지 않아. 생각나는 대로 말하지 마."라고 소리치며 그는 거북함(그것이 사실이었으므로)과 안도감(이런 대화가 그들의 상황을 전형적인 것으로 만들어 주었고, 그로서는 성가신 사랑에 화를 내는 남자의 역할에 익숙했으므로)을 동시에 느꼈다. (119)

 

그녀는 두 눈에 눈물을 그렁거리며 팔을 뻗어 그를 꼭 끌어 안았다. 그를 안심시키려 애쓰는 그녀 자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몽, 그런 생각을 하다니 당신은 미쳤어... 당신은 정말 어린아이 같아... 자기, 내 가엾은 자기..." 그녀는 그의 이마와 두 뺨에 키스했고, 순간적으로 그런 자신이 마침내 모성의 경지에 이르렀노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그녀 자신에게 잔인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그녀 안의 무엇인가가 고집스럽게 지금 시몽이 느끼는 일반적이고 오래된 고통을 달래 주는 일에 만족해하고 있었다. (125)

 

"...(전략)... 지금 당신은 행복해지기에는 지나치게 로제에게 집착하고 있어. 지금 당신은 우리의 사랑을 우연한 것이 아니라 확실한 그 무엇으로 받아들여야 해. 내가 그렇게 만들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고. 이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132)

 

왜냐하면 흐르는 시간이 그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없애야 하는 것은 로제와의 추억이 아니라 폴 안에 있는 로제라는 그 무엇, 그녀가 집요하게 매달려 있는, 뽑아 버릴 수 없는 고통스러운 뿌리 같은 그것이었다. 이따금 그는, 자신이 그녀를 사랑하게 된 이유, 줄곧 그녀를 사랑하는 이유가 고통을 감수하는 그 한결같은 태도 때문이 아닐까 자문했다. (136)

고통스러운 뿌리.

 

"나의 희생양. 나의 사랑스러운 희생양. 나의 귀여운 시몽!" 생전 처음으로 그녀는 자신이 불가피하게 상처입히지 않을 수 없는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데에서 오는 끔찍한 쾌감을 경험했다.
이 '불가피함'에는 응분의 결과가 따르리라. "어째서 당신은 나보다 로제를 더 좋아하는 거지? 그 무심한 사내의 무엇이 내가 당신에게 매일 바치는 이 열렬한 사랑보다 낫다는 거지?" 같은, 언젠가 시몽이 그녀에게 던질 질문들, 고통당하는 입장에서 응당 제기할 만한 질문들이 그녀를 괴롭혔다. 로제에 대해 설명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그녀는 지레 겁에 질렸다. 그녀는 로제를 가리켜 '그'가 아니라 '우리'라고 말하게 되리라. 왜냐하면 그녀로서는 그들 두 사람의 삶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자신이 그들의 사랑을 위해 육 년 전부터 기울여 온 노력, 그 고통스러운 끊임없는 노력이 행복보다 더 소중해졌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었고, 바로 그 자존심이 그녀 안에서 시련을 양식으로 삼아,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로제를 자신의 주인으로 선택하고 인정하기에 이르렀는지도 몰랐다. (139)

 

그녀는 좀 더 울고 싶기도 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싶기도 했다. 익숙한 그의 체취와 담배 냄새를 들이마시자 구원받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울러 길을 잃은 기분도. (149)

아 정말 나의 리뷰 마지막 문장이자, 이 짧은 두 문장.
진짜 너무 잘 알 것 같아서 심장이 서늘해지는 기분이다.
익숙한 살냄새와 옷냄새 숨냄새를 맡으면 구원받은 듯한 기분이 들지만, 그와 동시에 '이게 아닌데'라는 생각이 드는 때. 길을 잃은 기분과 길에 잘못 들어선 기분이 함께 든다.
아.. 으으
그런데 나는 늘 비겁했어서, 일시적이고 단편적인 구원을 얻고자 매번 그들의 목에 얼굴을 파묻었던 것 같다. 그리고 대부분은 (머지않아? 금세? 이어서?) 길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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