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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고생 많았다 나야!
어둑어둑해진 학교를 뒤로 하고 왠지 캄캄한 도로.
주유하고 나니 자연스레 재생된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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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수리 픽업으로 오늘 처음 대중교통으로 학교에 와봤다. 대기는 깨끗하지 않지만 햇살이 많이 풀려 봄 같은 낮이다. 내가 운전을 하지 않으니 책이나 일기를 쓸 시간이 조금은 생기네.

거리의 곳곳에는 벚꽃이 피기 시작해서 정말 봄인가, 싶은 날이다. 운전하면서 보는 벚꽃은 딱 그만큼 빠르게 잊힌다. 그래서 시간의 흐름을 느끼기 어렵다.

친구가 볼 때까지 손을 흔드는 반가움이란.

이맘때엔 굳이 함께 벚꽃을 보러 가곤 했다. 벚꽃을 보러 간다는 무리들이 있으면, 슬그머니 함께 가 어색한 사람들이랑도 시간을 함께 했다. 벚꽃과 잘 어울리는 옷은 봄 날씨에는 맞지 않아서, 매해 봄은 춥다고 느꼈다.

아침 조회 시간에 아이들도 나도 독서를 하고 있다. 생각보다 너무 잘 해주고 있고, 모두가 숨소리마저 죽이고 책을 읽는 아침이 참 소중해서 혼자 웃음이 샌다.
내가 고른 책은 고명재 시인의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 그의 문장은 낮고 흰 것에 가깝다. 지하철이든 교탁 앞이든 눈물이 나서 혼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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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스트는 위고를 열심히 읽었다. 그는 <되찾은 시간>에서 "풀은 자라야 하고 아이들은 죽어야 한다"는 위고의 말을 인용한 뒤 덧붙인다. 예술의 잔인한 법칙은 존재들이 죽어야 하고 우리 자신도 고통이란 고통은 다 겪고 죽어야 하는 것이라고. 진실하지만 서늘한 말이다. 좋은 작가는 아첨하지 않는다. 오랜 친구처럼 우리에게 진실의 차가운 냉기를 깊이 들이마시라고 무심한 얼굴로 짧게 말한다. (9) 

 

실비아 플라스도 똑같은 불만을 토로했다. "도로 인부들, 선원과 군인들, 술집의 단골손님들과 어울리고 싶은 이 목마른 갈망ㅡ이름 없이, 귀 기울여 들으며, 기록하며, 난장판의 일원이 되고 싶은 갈망이ㅡ이 모든 게 내가 여자아이라는 사실 때문에 망가져버리고 만다. 공격당하고 포격당할 위험이 상존하는 여성이기 때문에. 남자들과 그들에 대한, 온 마음을 사로잡는 이런 관심은 그들을 유혹하고자 하는 욕망이나 은밀한 관계로 유인하는 도발로 곡해되는 일이 흔하다. 아, 제기랄, 그렇다. 나는 가능한 한 모든 사람들과 최대한 깊은 대화를 나누고 싶다. 야외에서 잠을 자고, 서부로 여행을 하고, 밤에 마음껏 자유롭게 나다닐 수 있다면 좋겠다." (30)

 

버지니아는 우리에게, 아니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네 안에 사랑받지 못할 어떤 결핍, 열등함이 존재하는 게 아니다. 그저 너의 사샤는 자신의 인생을 찾아 떠나갔을 뿐이야. (34)

 

그들은 근사한 목재를 얻은 목수처럼 외친다. 하지만 아이가 제 욕구를 드러내며 짜놓은 계획표대로 움직이지 않을 때 그들은 존재의 복수성plurality을 절감한다. '얘는 나와 다른 존재구나. 대화가 필요해!' (43)

 

과잉 생산되고 과잉 소비되는 사물은 인간에게 유용하지 않다. 생산성에만 유용할 뿐. 더 많은 소비를 외치는 열망은 더 많은 노동을 외치는 열망의 다른 얼굴이다. 이 열망은 다른 동료 인간들에게서 행위와 사유의 가능성을 빼앗고, 그들을더 많은 노동, 더 위험한 노동으로 내몬다. <인간의 조건> 마지막 장에서 아렌트는 탄식하는 어조로 이를 "노동하는 동물의 승리"라고 표현했다.  (45)

 

하지만 죽음 자체는 체험되지 않는다.  죽음이 덮쳐와 그를 '다른 누군가'로 만들 뿐이다. 블랑쇼는 이것을 '비인칭의 죽음'이라고 보른다. 나(1인칭)와 너(2인칭)도 아니고 그/그녀(3인칭)도아닌 누군가의 죽음이기 때문이다. '존재했었으나 지금은 없는' 아무도 아닌 누군가는 비인칭이라 할 수 없다. (59) 

 

카프카가 '문학적 전복'에 관해 친구 오스카 폴락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를 읽어보자. "만일 우리가 읽는 책이 주먹질로 두개골을 깨우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책을 읽는단 말인가? (...)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고통을 주는 재앙 같은, 우리가 우리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누군가의 죽음 같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멀리 숲속으로 추방된 것 같은, 자살 같은 느낌을 주는 그런 책들이지, 책이란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해." 위대한 책들의 타격 아래서 우리는 번번이 죽고 또 번번이 다른 존재로 태어난다. 문학의 공간이란 그런 곳이다. (61)

 

사람을 멀리하는 외로운 사람, 괴짜라는 일부 설명과 달리 에밀리 디킨슨의 시들은 다정하고 심오하다. 그녀는 다른 사람의 영혼을 찾아다니는 이의 모습은 "음악을 다 연주할 때까지/ 건반을 더듬는 연주가"를 닮았다고 쓴다.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그/녀의 여러 건반을 하나하나 눌러보고 그 소리를 들으며 그/녀를 알게 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에밀리는 친구들에게 천 통이 넘는 편지를 보냈고 특히 여자 친구들과 깊은 우정을 나눴다. (85)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누군가 내게 편지로 물었다.
이것은 내가 바로 그 사람에게 묻고 싶었던
질문이었다. 
- <20세기의 마지막 문턱에서>에서

쉽고 명징하지만 마음을 울리는 시구다. 21세기를 시작하는 문턱에서 우리는 이메일이나 디엠으로 똑같은 질문을 하고, 100년이나 200년 뒤에는 어떠면 목성에 있는 한 도시에서 역시 이 물음을 던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시를 읽지 않았다면 우린 묻도록 허용된 숱한 실용적인 질문 대신 이런 막연한 질문이나 반복하고 있는 자신을 부끄러워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또다시, 늘 그래왔던 것처럼,/ 앞에서 언급했듯이,/ 순진하기 짝이 없는 질문들보다/ 더 절박한 질문들은 없다"로 끝나는 시의 마지막 연을 읽고 나면, 이 질문이 어리숙한 나만의 것이 아니라 모두의 것이라는 사실에 위로를 받게 된다. 스무 살의 한 친구가 편지에 적어 보낸 이 질문을 받고 우물쭈물했던 사람이 나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92)    

 

"고통이나 비참함 앞에서 달아나지 마라. 덧없는 이익들, 특권들, 일시적인 명예들 때문에 네 자신 안에서 네가 그리도 잘 느끼고 있는 것의 가장 작은 조각까지도 양보하지 마라." 이렇게 말했던 루오는 노년에 발표한 판화집 <메제레레>로 많은 이에게 감동을 주었다. '미제레레miserere'는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miserere mei Deus'라는 라틴어 성경 구절에서 온 제목이다. (107)

 

미국의 심리치료사 메리 파이퍼는 난민들과 상담하는 중에 그들에게 용기 있게 행동한 기억이 있는지 물었다. 모두 전쟁으로 가족과 집을 잃고 미국으로 온 피해자들이었지만, 그들의 이야기에 약간의 변화를 주면 정체성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보스니아에서 온한 젊은 여성은 군인들이 몰려왔을 때 자신이 여동생을 문 뒤로 밀어 넣어 동생이 강간당하지 않게 보호했다고 말했다. 이 기억을 떠올리며 그녀는 자신이 더럽혀졌다고 느끼는 대신 고결하다고 느끼게 된 것 같았다고 파이퍼는 전한다. 새롭게 기억하는 일을 통해 이 여성은 자기 삶의 폐허 같던 장면에서 살아갈 용기와 싸울 힘을 얻은 것이다. 기억은 "일종의 갱신/ 심지어/ 어떤 시작, 기억이 여는 공간은 새로운/ 장소여서.". 시 쓰기를 통해 삶은 늘 새롭게 기억되어야 한다. 시인이란 그렇게 믿는 존재이다. (123)   

 

프랑스 철학자 피에르 자위는 <드러내지 않기>에서 우주 창조를 설명하는 모델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그리스 사상에서 기원하는 '유출' 모델로, 이 세계가 신 또는 무한자의 선한 자기표현으로부터 만들어졌다고 보는 입장에서 나왔다. 전능한 존재가 자기 밖으로 흘러넘치면서 자기를 드러내는 활동에서 모든 게 생겨났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유대교의 카발라 사상에서 나온 '침춤tsimtsoum' 또는 '수축' 모델이다. 무한자가 세계를 창조하면서 유한자가 거처할 공간을 마련해주기 위해 만물에게 가운데 자리를 내주고 자신은 가장자리로 물러났다는 것이다. 어느 쪽이 더 설득력 있는지를 따지는 것은 신학자와 철학자의 일이다. 그러나 평범한 이들에게는 종교적 태도란 두 가지 모두를 뜻한다. 신성해진다는 것은 다른존재를 위해 사랑을 흘러넘치게 표현하는 일인 동시에 타자를 위해 물러서며 자신을 한껏 움츠리는 일이다. (127) 

 

나의 전부를 비밀 없이 상대와 나누고 싶고, 또 상대의 전부를 알고 싶다는 욕망은 사랑을 막 시작한 연인들에게 종종 발견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끝없이지속될 경우에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밀란 쿤데라는 이 투명성이 오래된 유토피아(신이 내 모든 슬픔과 고통을 하나도 빠짐없이 알고 계시는 곳)의 특징이면서 현대적 삶의 가장 무시무시한 양상이라고 말한다. 투명성의 법칙에 따르면 국가적인 일들은 점점 불투명해지는 반면 사적 개인들은 자신의 건강 상태, 재정 상태, 가족 상황을 남들에게 제공하는 일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매스미디어가 그렇게 하기로 결정내리기만 하면 그는 심지어 사랑, 질병, 죽음에서조차도 은밀한 순간이라곤 단 한 순간도 찾을 수 없게 된다." (128)     

 

고대 그리스인들은 억압 속에서도 용기 내어 진실을 말하는 것을 '파레시아parrhesia'라고 불렀는데, 획일적인 무대에서 퇴장하는 것, 강요된 발언을 거부하고 침묵하는 것 또한 파레시아만큼이나 용감한 행위이다. (130) 

 

뒤셀도르프는 산업이 흥성한 서독의 대표적인 부자 도시이다. 그곳에서 시인은 이른바 '팔꿈치 사회'를 목격한다. 그것은 자기가 앞서기 위해 타인을 팔꿈치로 밀쳐내야만 하는 경쟁사회를 말한다. 이런 사회에서 드러내기란 얼마나 비싼 것을 먹고 입는지, 얼마나 비싼 데 사는지를 과시하는 일, 소유와 소비의 경쟁적 과시와 동의어가 된다. 
피에르 자위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나 인정을 받기 위한 끝없는 싸움에 휘말리지 않고" 다른 존재들을 사랑하고 연대감을 느끼는 유일한 방법은 "존재들에게 자리를 내주는 드러내지 않는 처신뿐"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다른 존재에게 공간과 시간의 일부를 내어주며 그를 돌볼 때 그 역시 우리를 돌본다. 시인은 한 지인이 키우는 반려견에게서 이런 진실을 새삼 발견한다. 인간이 작은 개에게 자기 곁을 내어주면서 요청한다. "작은 개는 위험을 무릅쓰고/ 몸을 던지거라, 허공에서/ 빙그르 돌며/ 제 주인이/ 곁으로 뛰어와 주기를 기다리며// 보여주거라/ 작은 개는 공감을/ 그리고한 인간을/ 사랑하거라." 시인은 이 사랑을 받기 위해서 "주인이 치르는 대가"는 "그 작은 개의 개가 되는 것"이라고 노래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작은 개가 그 곁을 내주며 돌봐주는 반려동물일 뿐이다. 이 동물이 작은 개에게 간절히 희망하는 것은 한 가지다. "뛰어올라주었으면, 친구, 작은 개여/ 외로움의/ 목젖까지". (131)       

 

"무겁지만 한결같은 걸음걸이로, 아무리 해도 끝장을 볼 수 없을 고뇌를 향해 다시 걸어 내려오는 (...) 그 순간순간 시지프는 자신의 운명보다 우월하다. 그는 그의 바위보다 강하다." (141) 

 

친구 귀스타브 티봉이 베유 사후에 단상을 모아 출간한 <중력과 은총>을 평온하게 읽기는 어렵다. 마치 심장 속의 먹물주머니를 터뜨리는 것 같다. 가령 "달걀 한 알을 얻기 위해 새벽 한 시부터 아침 여덟 시까지 꼼짝 안 하고 서 있을 수 있지만,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기는 힘들다"라는 문장에서처럼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강력한 힘은 고급한 동기보다 저급한 동기에 있다는 신랄한 주장을 만날 때 그렇다. 부정하고 싶지만 사실 일상에는 그런 장면들이 즐비하지 않은가? 베유는 저급한 동기의 에너지가 중력처럼 인간을 아래로 끌어당길 때, 은총만이 그를 상승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147)

 

슬픔에 빠진 아이는 늘 구석에 가서 웅크린다. 겁에 질린 동물들이 찾는 곳도 구석이다. 세상에서 버려진 기분이 들 때 우리는 구석으로 숨는다. 바슐라르에 따르면 구석이야말로 안전에 대한 몽상을 충족시켜주는 진정한 집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편안하게 거주한다고 말할 수 있는 곳은 상처받는 순간에 숨을 수 있고 비밀의 은신처가 될 수 있어야 하니까. 어쩌면 집은 "세계 안의 우리들의 구석"이라고 표현하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물론 이 시적 정의에 반감이 생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모두에게 집이 안전한 곳은 아니기 때문이다. 욕설과 폭력은 없었다고 해도 상처 없이 유년을 보내는 운 좋은 아이는 드물다. 열일곱 살에 대학에 입학할 만큼 우수해서 어린 시절 내내 부모에게 사랑만 받았을 것 같은 비평가 수전 손택도 자신의 유년기를 이렇게 정의했다. '징역형'. 그래서 우리는 집을 떠난다. 새로운 집을 찾아서! "태어난 집에 대립하여 이번에는 꿈꾸는 집의 이미지가 나타나는 것이다. 삶에서 때늦게, 그러나 물리칠 수 없는 용기로써 우리들은 여전히 이렇게 말한다. 이루지 못한 것을 이제 이루리라. 집을 지을 것이다." (156)

 

암몬조개의 화석을 보자. 이 조개껍질의 신비는 그저 다채롭고 화려한 형태에 있는 것이 아니다. 형태를 취하려는 순간, 연체동물이 삶에 관한 중요한 선택과 결정을 해야 한다는 것. 이 연약한 동물은 고뇌한다. 왼쪽으로 감길 것인가, 오른쪽으로 감길 것인가. 최초의 소용돌이를 결정하는 결정들, 그 뒤로 무늬를 만들어내는 연속적인 결정들이 그의 껍데기를 신비롭게 한다. 늘 "자기 종種의 회전 방식을 어기는" 조개들의 의지 덕분에 무한하게 다양한 무늬의 집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158) 

 

살림살이뿐만 아니라 모든 일에서 가능한 한 짧은 시간에 최대한 많은 결과를 내야 한다는 생산성의 논리에 철저히 반대하는 것이 몽상의 논리다. 몽상은 여유 없는 곳에서는 생겨나지 않는다. (162)

생산성과 몽상, 여유. 
근래 곰곰히 생각하던 것들. 

 

몽상가는 어떻게 정성스러운 손길과 새로운 눈길을 가지게 되는가? 무엇보다 습관적이고 기계적인 행동을 제거해야 한다. 정성스러움에는 능숙한 몸짓으로 일을 처리하기, 부지런함, 성실함으로 환원되지 않는 것이 있다. 아무리 능숙하더라도 일을 하는 사람이 한없이 지루하게 느끼며 그 활동에서 어떤 기쁨도 느끼지 못할 때 그에게 정성스러움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기계적으로, 다만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그 일을 수행할 뿐이다.
바슐라르는 우리가 우리의 삶에 한결 더 깊이 참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인간이 어떻게 사물들에 스스로를 주고 스스로에게 사물들을 줌으로써 그것들의 아름다움을 완성할 수 있는지를 느낄 수 있다." 살림살이의 영역이든 또 다른 노동의 영역이든 우리가 장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바로 이러한 느낌 속에서 일한다. 그렇다면 새로운 눈길이란 무엇인가. 몽상가의 새로운 눈길은 사물에 대한 깊은 몽상을 통해서 그가 새로운 이미지를 살(체험)게 되었을 때 생겨난다. (164)  

 

지성적 안정법 이외에도 우리가 자유로워질 수 있는 또 다른 안정법이 있다. 몽상가의 방식이다. 우리는 다르게 사유할 뿐만 아니라 다르게 느낄 수 있다. 사물들에 대한 몽상을 통해 우리는 다른 이미지 속에서 살아간다. 바슐라르는 이것을 "이미지의 안정법"이라고 표현한다. 의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지만 받아들이기 힘든 일들이 존재한다. 그럴 때 우리를 돕는 것은 '다르게 느끼는 일'이다. 네덜란드의 현상학자 판덴베르흐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들은 성찰로써는 해결의 희망이 없는 문제들의 해결을 계속해 살고 있는 것이다." 소소한 골칫거리로부터 인생의 중대한 문제들에 이르기까지 여러 종류의 고통을 맛보게 되고 그것들을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깨달음에 다가가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깨닫기 전에도 그 순간들을 살아야만 한다. 또 고통의 참된 인과관계를 파악했다고 믿지만 여전히 고통을 느낄 때가 있다. 어떤 문제들 앞에서는 고통의 원인을 따지기보다는 다르게 느껴보려고 하는 게 더 낫다. (167)  

 

존 버거의 소설 <A가 X에게>에서 A는 정치범으로 감옥에 갇힌 무기수인 연인에게 편지를 쓴다. A는 X를 처음 만나던 해에 그들이 함께 훈련용 비행기를 탔던 일을 상기시킨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낙하산 줄의 길이를 맞춰주고, 말아서 접은 다음 버클을 채워주는 그 일은, 이상하게도, 사랑하는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의 단추를 풀고, 지퍼를 내리고, 옷을 벗기는 일과 그리 다르지 않았어요." 엄혹한 정치적 현실 속에서 연인들을 부드러운 애무로 젖어드는 시간을 즐기는 대신 투쟁에 쓸모가 될 기술을 익힌다. 그러나 X에게 그것은 어려운 현실 속에서 데이트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던 가여운 연애의 기억이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높은 곳에서 떨어진다. 삶은 늘 추락하는 순간을 품고 있다. 그러나 사랑하는 이가 나에게 안전한 추락을 위한 옷, 낙하산을 입혀주고 있다. 이제 추락은 없고 낙하만이 존재할 것이다. 떨어짐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 당신과 함께라면 그것은 안전하다. 그녀는 그렇게 느낀다. 침대의 황홀경 속에서 연인의 부드러운 손길로 높이 떠오른 육체의 기쁨이 다시 낮은 고도로 빠르게 떨어져 내리듯 말이다. (169)    

 

역사학자 미슐레는 콜레주드프랑스(프랑스의 유서 깊은 대중 교육기관)에서 파면됐을 때 학생들로부터 이런 말을 듣고 큰 위로를 받았다고 한다. "우리는 당신의 강의에서 아무 것도 배우지 않았습니다. 단지 사라졌던 영혼이 우리 안으로 다시 돌아왔을 뿐입니다." (180)

 

어머니는 푼크툼(남들은 무심코 지나치는 세부 사항이 말을 걸며 나만 아는 기억 속으로 나를 데려가는 경우가 있다. 사진의 한 부분에서 '마치 화살처럼' 날아와 나를 꿰뚫고 내 마음을 물들이는 요소가 푼크툼이다)을 말하는 데 특별히 적합한 물질적 존재다. 우리는 그녀의 품에서 잠들었고 그녀를 안았고 그녀를 만졌다. 몸으로 만나는 최초의 타인이었기에 그 존재가 있었다는 확신을 다른 어떤 대상들보다 강렬히 불러일으킨다. 또한 바로 그 이유로 우리가 만질 그 몸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상실감이 폭력적일 만큼의 고통을 주는 것이다. 강력한 부재의 고통은 바로 그 사람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내 가슴속에서 무성하게 자라난다. 씨앗을 심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자라나는 나무처럼. (184)  

 

'백인식 소유자white man keeper'는 "재산을 돌고 도는 선물의 순환 고리에서 빼내 창고나 박물관에 두는" 사람이다. 선물은 정확히 이러한 백인 소유자의 본성에 반대한다. 우리가 받은 것은 우리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에게 나눠 주는 것이 선물의 원리이다. 그런데 인디언식 선물은 서로 주고받는 게 아니다. 대체로 받은 것은 제삼자에게 건네지고 그에 의해 또 다음 사람에게 건네진다. 이처럼 선물이 대가 없이 건네질 때마다 사람들 사이에는 느낌과 생기가 생겨난다. 수건돌리기가 놀이의 공동체를 만들어내듯 선물은 계속 돌아가며 사람들 사이에 결속감을 부여하고 느낌의 공동체를 만들어낸다. (194)  

 

1971년 미국의 포드사는 소형 자동차 핀토를 출시했는데, 가벼운 후방 충돌에도 연료탱크에 불이 날 위험이 있었다. 안전장치가 없으면 매년 180명이 죽고 180명이 다칠 거라 예상되었지만, 국가고속도로교통안전국이 계산한 1인당 인명 손실 비용이 20만 달러였기에 포드사는 이 장치를 달지 않기로 했다. 사망, 상해 보상에다 부서진 찻값을 다 물어줘도 안전장치 총 설치비용 1억 3750만 달러의 절반도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출시 이후 차량 화재로 500명 이상이 죽었지만 방침은 달라지지 않았다. 1980년 인디애나주에서 소녀 세 명이 핀토 사고로 불에 타 숨졌을 때도 배심원들은 포드사의 무죄를 선언했다. 그러다가 비슷한 시기 캘리포니아주의 한 재판에서 배심원단이 생산자 책임을 물으며 포드사가 차량 소유주에게 1억 2500만 달러를 지급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포드사는 리콜을 실행했다. 두 명만 죽어도 배상금이 리콜 비용을 초과하기 때문이었다. 이런 계산법을 우리는 상품경제의 합리성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195)   

 

이사야 벌린의 <고슴도치와 여우>는 제목 덕분에 많은 이들에게 알려진 책이다. 이 제목은 "여우는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고슴도치는 하나의 큰 것을 알고 있다"는 그리스 시인 아르킬로코스의 말에서 따온 것이다. 여우는 영리한 짐승이지만 고슴도치는 바늘 같은 가시를 우는 것 말고는 특별히 재주는 부릴 줄 모른다. 그러나 여우가 온갖 꾀를 내어도 고슴도치의 확실한 호신법 하나를 당해낼 수 없다. (200) 

 

미국 작가 손더스는 <작가는 어떻게 읽는가>에서 브레후노프의 '단순한 몸짓'을 설명하기 위해 자신이 겪은 일화를 소개한다. 한번은 그가 탄 비행기의 엔진이 고장 나 15분간 추락의 공포를 겪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는 평소 이런 상황이 오면 자신은 지나온 삶에 대해 잠시 감사한 후 차분하게 일어나 다른 승객들을 쿰바야(영적 합일)의 분위기로 이끌 거라고 상상해왔다. 그러나 실제 상황이 닥치자 정신은 마비되고 오줌을 지릴 것 같은 공황에 빠졌다. 그때 옆 좌석에 있던 어린 소년이 겁에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아저씨, 원래 이러기로 되어 있는 거예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는 자신의 심장이 아이에게로 나가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심장이 ~에게로 나간다one's heart goes out to'라는 표현은 누군가를 가엾게 여긴다는 뜻의 관용구이다. 손더스는이렇게 덧붙인다. "무언가 특별한 일처럼 들리지만 그게 우리 심장이 늘 하려고 하는 일이다. 누군가에게로 나가는 것." 그건 가장 절박한 순간에도 우리를 찾아오는 단순하고 불가피한 몸짓이다. 손더스는 정신을 차리고 거짓말을 했다. "그래 맞아."
끝까지 품위를 유지하는 어른으로 남겠다는 고상한 결단 뒤에 한 행동이 아니었다. 그저 오랜 세월 부모 노릇, 가르치는 교사 노릇을 하며 누군가를 진정시키고 안심시키려고 했던 습관이 그렇게 되었다. 손더스는 자신의 에너지가 신경증적으로 안으로 향하는 게 아니라 아이를 향해, 내 바깥의 타자를 향해 나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브레후노프도 늘 하던 대로 했을 거라고 말한다. 다만 "오랫동안 오직 자신만을위해 사용되었던 타고난 에너지의 방향이 바뀐다." (204)    

 

니체는 춤추는 별을 언급한 다음, 행복을 찾아 다니는 것은 비천한 인간의 일이라고 덧붙인다. 행복이 현대인을 지배하는 새로운 신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이다. 사라 아메드는 <행복의 약속>에서 우리가 행복이라는 관념 아래 특정한 삶의 방식을 강요당한다고 말한다. 행복이 지배의 기술이 되었다는 것이다. 행복은 이제 우리가 따라야 할 절대적으로 올바른 길로 간주된다. 이를 확인해주는 기본 지표들도 있는데, 결혼이나 안정된 가족 같은 것들이다. 그래서 많은 부모가 이렇게 말한다. '얘야, 우리가 바라는 것은 너의 행복뿐이다. 그러니 네가 뭘 하고 싶든 좋은 학교에 입학하고 대기업에 취직해라. 때 맞춰 결혼하고 행복한 주부, 행복한 가장이 되어라. 빨리 안정을 이루어라...' 
그러나 세상의 아이들아, 정해진 궤도에서 이탈하는 삶은 불행할 거라는 협박에 굴하지 말고, 혼돈을 기꺼이 맛보며 천천히 네 자신이 되어라. 남이나 스스로에게 자신의 성과를 증명하려고 서두르지 마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다만 나 자신을 기다리는 것을 배웠을 뿐이다." 점점 조급해지고 불안해지는 우리를 향한그의 다정한 전언이다. (211)  

 

첫 답장에서는 일종의 신원확인이 이루어졌다. 물론 카푸스가 어디 사는 누구인지, 혹은 누구의 아들인지를 확인한 것은 아니다. 릴케는 그가 정말 시인이 맞는지를 묻는다. "무엇보다도 먼저, 당신이 맞는 밤의 가장 고요한 시간에 '나는 쓰지 않으면 안 되는가'라고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 이 진지한 물음에 굳세고도 단순하게 '나는 쓰지 않을 수 없다'는 말로 대답할 수가 있다면, 그때에는 당신의 생활을 이 필연성에 따라 구축하십시오." 카푸스는 자신의 시가 괜찮은지를 물었지만, 릴케는 물음의 순서를 바꿔보는 게 어떻겠냐고 답한 것이다. 결과물이 어떤지는 쓸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단하는 일에 부차적이다. 가령 좋은 가수가 되지 못할 바에는 가수가 되지 않겠다고 결정하는 것은 확실히 생존에 유리하다. 하지만 그것은 '노래하는 사람'이라는 존재의 필연성을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작가라는 곤경, 가수라는 곤경, 화가 혹은 배우라는 곤경. 필연성은 하나의 이름 아래 주어질 모든 곤경에도 불구하고 오직 그 이름으로 불리기를 원하는 사람에게만 생겨나는 위대한 속성이다. (215) 

 

이런 당부들도 인상적이지만 한 편지 말미에 적힌 릴케의 문장은 더욱 눈길을 끈다. "당신을 위로하려고 애쓰는 자가 때때로 당신을 기쁘게 하는 단순하고 조용한 말 그늘에서 아무런 고생도 없이 살고 있다고는 생각지 마시기를. 그의 삶도 많은 고생과 슬픔에 차 있고, 당신보다 훨씬 뒤져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그러한 말을 찾아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217)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가 절실한 지혜를 담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것은 릴케 역시 젊은 시인이라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시의 길을 완주한 뒤 얻은 지혜의 엑기스를 전하는 게 아니다. 릴케는 카푸스처럼 시의 모험을 나선 중이다. 그래서 그가 시인에게는 늘 고독이 필요하며 이 고독을 아주 평범하고 값싼 결합과 교환하고 싶은 때가 있을지라도 견뎌야 한다고 썼을 때, 이 문장들은 카푸스를 향할뿐만 아니라 릴케 자신을 향하고 있기도 하다. 특히나 이렇게 말할 때 그렇다. "당신 마음속의 해결되지 않은 모든 것에 대해서 인내를 가져주십시오. 그리고 물음 그 자체를 닫혀 있는 방처럼, 아주 낯선 말로 쓰인 책처럼 사랑해주십시오." 아직 <말테의 수기>의 집필이 시작되기 전이고 <두이노의 비가> 같은 걸작의 구상과 집필은 단초조차 보이지 않던 1903년, 그 막막한 시절의 편지에서 릴케는 스스로를 다독이며 인내를 가져야 한다고 썼다. 젊은 예술가들은 얼마나 많은 날을 인내해야 할까? (219)   

 

다만 당신이 정말 원하는 것을 배우려 할 때 이 무능력(나는 할 수 없다, 나는 이해를 잘 못 한다)이라는 속임수를 마음에서 떨쳐내라. "이해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 이야기할 것만 있다." 이제, 용기를 가지고 그 이야기를 시작하라. (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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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크인 후 해운대 암소갈비를 먹다 !

갑자기 부산에서 이모가 되다 !

ㅠㅠㅠ 너무 축하해 내칭구 앙뽀ㅠ
2박 3일 임신여행(?) 가보자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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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불황'이라는 말이 있다. '경제활동이 전반적으로 침체되는 상태'를 가리키는 '불황'을 원용한 개념으로, 사람들 사이의 교류와 소통이 줄어드는 현상을 가리킨다. 지금 세상에서는 사회적 불황이 경제적 불황 못지않게 문제가 되고, 그 둘이 서로 맞물려 악순환의 고리에 빠지기 쉽다. 가난이 외로움을 낳고, 소외가 깊어지면 경제활동도 힘들어진다. 예전에는 물질적으로 쪼들려도 가족이나 이웃 간의 유대로 삶을 지탱했다면, 이제는 빈곤 계층일수록 고립이 심하고 그로 인해 더 가난해지는 것이다. 일거리를 구하는 연결망이 끊기고 일상의 소소한 도움을 주고받는 이웃이 사라지면서 살림살이가 팍팍해지기 떄문이다. 아이들도 마찬가지여서, 저소득층일수록 '나 홀로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 소통 능력이 감퇴하고 학력도 저하된다.
이것은 한국만의 상황이 아니다. 사회학자 로버트 D. 퍼트넘이 신자유주의 물결 속에서 원자화되어가는 미국인들의 삶을 묘사한 책 <나 홀로 볼링Bowling alone>(2000)에서 잘 드러나듯이, 사회적 단절과 커뮤니티의 붕괴는 많은 선진국에서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다. 영국도 2018년 정부에 외로움 담당 부서를 설치하고 고위급 책임자minister(한국에서는 흔히 '장관'으로 잘못 번역되는데, 실제로는 장관secretary of state 밑에 있는 여러 부장관 가운데 한 명이다)도 임명하여 신선한 화제가 된 바 있다. 사람들 사이의 유대가 해체되는 것은 개인적 삶뿐 아니라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요인으로도 지적된다. (7)

 

비가시화는 사실상 성원권의 박탈로 이어진다. 다른 한편 미디어가 첨단화되면서 정보와 이미지가 폭주하게 되는데, 특정 집단에 대한 편견이 그를 통해 증폭되는 경향이 있다. 직접 대면하지 못하는 타자일수록 엉뚱한 모습으로 왜곡되기 쉬운 것이다. (9)

 

온몸이 젖어서 짜증 날 수 있는 경험을 일종의 축제처럼 승화시키는 힘은 서로를 든든하게 지켜주는 관계에서 생겨나는 것이리라. 삶의 토대가 점점 위태로워지는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 가운데 하나는 '안전 기지'다. 사랑과 자유가 공존하고 너와 내가 상생하는 우정의 마당이다. 사람이 사람을 살리는 관계에 대한 기억 또는 소망을 불러내면서 세상을 조금씩 '새로 고침'해나갈 수 있다면, 우리의 일상에 생기가 스며들 것이다. (13)

 

그런데 아쉬운 점이 있다면 원격 근무나 유연 근무가 전문직, 관리직, 사무기술직 등 일부 직종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의료진, 돌봄 노동자, 배달업자, 소방관 등 이른바 필수 노동자들은 재난 상황에서도 변함없이 사람들과 접촉했다. 필수 노동자란 미국의 로버트 라이시 교수가 코로나19에 의해 새로운 계급 분열이 일어났다면서 내놓은 개념*으로, 실직의 위험은 적지만 팬데믹 상황에서도 업무를 수행하느라 감염 위험에 노출된 직종을 말한다. 미국에서는 필수 노동자를 'The Essentials', 영국에서는 'key workers'라고 부른다. 코로나19는 사회가 유지되고 일상이 영위되는 데 핵심이 되는 일이 무엇인지, 그들에 대한 인식과 처우가 합당한지를 새삼 질문하게 해주었다. (27)

* 라이시 교수에 따르면,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사회가 '신카스트 시대'에 접어들었는데 원격 노동자The Remotes, 필수 노동자The Essentials, 무임금 노동자The Unpaid, 잊힌 사람들The Forgotten의 네 계급으로 나뉘게 되었다.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코로나19가 계속되며 불황이 지속되는 가운데 여성 실직자가 늘어나면서 남편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졌고, 폭력을 당해도 피신하기 어려워진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이런 현상을 가리켜 '섀도우 팬데믹shadow pandemic'이라고 하는데, 코로나 기간 동안 폐쇄된 가정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이 늘어난 것을 가리킨다. (30)

 

표정이 감정을 유발한다는 것, 그래서 보톡스 주사나 신경계통 질환으로 얼굴 근육이 마비되면 감정이 둔해진다는 것이 흥미롭다. 마음이 울적할 때 억지로라도 웃으면 기분이 나아지는 것도 마찬가지 원리로 설명할 수 있겠다. 결국 표정은 상대방뿐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한데, 얼굴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의 파동이 자신에게도 감지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화 중에 그 기운을 주고받으면서 서로가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얼굴은 그 자체로 하나의 언어라고 할 수 있다. (43)

 

지금 우리는 각종 미디어를 통해 엄청난 볼거리를 접할 수 있지만, 세상과 맞닿는 접촉면은 오히려 점점 비좁아지는 듯하다. 특정 부류의 사람들이 시야에서 사라져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blind spot가 여기저기에 생겨난다. 눈에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은 무의미하고 하찮은 존재로 주변화되는 것이고, 투명인간으로 취급되면서 사회의 성원권이 박탈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비대면에 수반되는 비인간화, 타인이 자신과 동등한 인격체가 아니라 사물로 대상화되는 것은 양극화가 심화되는 우리 사회의 중대한 도전이다. 점점 깊어지는 소외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48)

 

무엇보다 두드러지는 것은 이용 시간이다. 2021년 글로벌 가상사설망 VPN서비스 기업 노드VPN이 연구 조사 기관인 신트에 의뢰해 18~54세 성인 인터넷 사용자를 조사한 결과, 한국인이 일생 동안 인터넷 사용에 쓰는 시간은 34년으로 아시아 국가 중 가장 긴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수치일 뿐 아니라 세계에서도 두번째로, 1주일에 평균 51시간을 온라인에서 보낸다. 그 가운데 18시간은 업무 관련이며 33시간은 다른 활동으로 사용하는데, 유튜브나 OTT를 통한 영상 감상에 주 20시간 이상을 쓰는 것으로 조사됐다. 
한국인이 온라인에서 생활하는 34년은 기대 수명 83세를 기준으로 보면 40퍼센트에 달하는 시간이다. 그런데 이것은 잠자는 시간까지 포함한 수치다. 하루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수면 시간을 빼고 계산하면 60퍼센트가 된다.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고 식사하고 몸을 씻는 시간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시간을 온라인에서 보낸다고 볼 수 있다. 여행지를 선택할 때 와이파이가 잘 터지는가가 중요한 고려 사항이 될 정도로, 이제 인터넷은 우리 삶과 사회의 모든 부분에서 절대적인 인프라가 되었다. 인터넷이 없었던 시대에 우리가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를 떠올려보면, 인류가 전혀 다른 세상으로 넘어왔음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89)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의 전치형 교수는 2년 동안 온라인 수업을 하면서 학습 공동체의 본질에 대해 깨닫게 된 점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온라인 수업에서 우리가 놓친 것, 테크놀로지가 아직 제공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각자 다른 경로로 한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바깥 세계의 위험을 견뎌내는 가운데 뭔가 중요한 질문에 함께 매달리고 있다는 감각이다. 그 감각을 일깨워 작은 학습 공동체들을 다시 꾸리는 것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대면 수업의 기술이다." 어떤 공통의 과제를 중심으로 마음이 이어지는 것, 무엇인가를 함께 탐구하면서 내면이 확장되는 감각은 교유깅 결코 놓칠 수 없는 실재감이 아닐까. (116)

 

자기 삶에 내재되어 있는 타자성을 일깨워주는 타인을, 사회학자 엄기호는 '손님'이라고 칭한다. 주인이 손님을 맞이하면서 깨닫게 되는 것은, 자신이 태초부터 주인이 아니라 그 집 혹은 그 땅의 첫번째 손님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그것을 알아차리면 '환대'로써 감사를 표한다고 한다. 물론 자신의 타자성을 받아들이지 못할 수도 있는데, 그때는 환대가 아닌 적대감을 드러낸다. 엄기호 교수의 말을 들어보자.

자신의 타자성을 발견하는 데서 오는 환대와, 자신의 타자성을 부정하고 싶을 때 나타나는 적의가 동일한 어원을 갖는 것은 특히 의미심장하다. 환대는 'hospitality'이고 적의는 'hostility'다. 이 두 가지 말은 'host'라는 같은 어원을 지니며 여기서 host는 '주인'이자 '손님'이라는 뜻을 동시에 지닌다. 즉, 자신의 타자성을 발견하는 두 가지 태도에서 정반대의 행동이 나타날 수 있다. 환대는 자신의 타자성을 깨닫게 해준 것에 대해 감사해하며 첫번째 손님이라는 위치로 돌아올 때 발생한다. 반면 적의는 내가 주인 노릇 잘하고 있는데 괜히 나의 타자성을 발견하게끔 하고 대면하게 하는 상대방을 제거하여 그 사실을 영원히 감추고 싶을 때 생겨난다*. (134)

* 엄기호, <단속사회>, 창비, 2014, 271~272쪽.

 

오늘날 우리는 옆에 사람을 두고 노골적으로 휴대폰과 바람을 피우며, 어찌 된 일인지 이러한 부정을 다 같이 수용하기에 이르렀다.
- 노리나 허츠, <고립의 시대>에서 (142)

 

모처럼 가족이나 친구들이 모인 자리에서 각자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느라 서로를 홀대하는 일 또한 흔하다. 강의를 듣거나 회의에 참석하면서도 집중하지 못한다. 영어에서는 그런 행동을 가리키는 신조어로 'phubbing'이 생겨났는데 무시하다, 냉대하다, 거절하다는 뜻의 'snub'에 'phone'을 합성한 단어다. 상대방을 무시하거나 냉대할 의도는 없다. 시선이 화면에 가 있고 신경이 그쪽으로 쏠려 있어서 마음을 다하지 못할 뿐이다. 즉, 주의가 흐트러져서 무심해진 것이다. (143)

 

한림대 강남성심병원 이홍석 교수는 더 포괄적인 차원에서 문제를 지적한다. "사람의 뇌는 예측할 수 없는 대상과 오감을 통한 상호작용에서만 고르게 발달한다. 이때 뇌의 회로가 촘촘하게 엮이고 기능이 강화된다. 그런데 스마트폰은 사람과의 접촉이 아니다. 뇌의 수만 개 회로 중 스마트폰이 전달하는 일방적인 영상을 받아들이는 단 하나의 회로만 움직인다. 그동안 다른 회로는 쓰지 못해 점점 퇴화한다. (...) 스마트폰 속에는 일방적인 사물의 움직임만 있을 뿐이다. 자신의 말이나 행동에 다른 사람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는다." (150)

 

그런데 주의력은 도구적인 역량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수전 손택은 이렇게 말한다. "도덕적 인간이 된다는 것은 모종의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며, 그럴 의무를 진다는 것이다. (...) 도덕적 판단은 본질적으로 주의를 기울이는 능력에 달려 있다. 이 능력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한계의 범위는 확장될 수 있다." (167)

 

이른바 '관심 경제attention economy'(주목 경제라고도 번역된다)의 영역이 빠르게 확장되고 있다. '관심 자본'이라는 개념도 등장했다. 김곡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오늘날 관심interest은 곧 이익interest이다. 관심을 주고받는 것은 노동이 되었다. 관심이 가치다.*" (171)

* 김곡, <관종의 시대>, 그린비, 2020, 114쪽

 

이 프로그램을 창안한 메리 고든은 그 경험을 이렇게 풀이한다.

'공감의 뿌리'에 참여하는 학생과 프로그램 진행에 도움을 주는 어른들은 '아기의 지혜'라는 중요한 지혜를 배운다. 아기는 행동과 감정이 꾸밈없고 순수하다. (...) 아기에게는 교실 안 모든 학생이 새로운 경험이다. 아기는 학생 한 명 한 명과 만날 준비가 되어 있다. 아기의 눈에는 인기 많은 학생도 없고 말썽꾸러기 문제아도 없다. 다만 침울하거나 근심에 싸인 학생이 자꾸 눈에 들어올 뿐이다. 아기는 대개 이런 학생에게 손을 내민다. 늘 소외당하고 따돌림당하던 학생은 아기와 공감 관계를 형성하면서 사회적 포용 영역으로 들어간다. (...) 아기는 경계나 규정에 얽매이지 않고 직관에 따라 골고루 사랑을 나눠준다*. (181)

* 메리 고든, <공감의 뿌리>, 샨티, 2010, 27~28쪽.

 

그림을 보는 눈과 환자를 보는 눈은 많은 점에서 상응하는 것이다. (185)

 

허먼은 <우아한 관찰주의자>의 저자로, 책의 원제는 'Visual Intelligence'(시각적 지능)다. '시각적 지능'이란, 보이는 것을 넘어 본질을 꿰뚫어 보는 관찰력을 의미한다. (188)

 

이러한 훈련을 통해 주의력이 신장되면 인지능력의 향상에 도움이 되는 것은 물론, 예술적 감수성 또한 고양된다. '아름답다'는 말의 어원이 '알음+답다'라는 견해가 있다. 무엇을 제대로 알고 나면 아름다움을 느낀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는 만큼 느낀다'라는 말과도 상통한다. 심미적 감각은 섬세한 관찰력을 요구한다. 눈으로 빤히 보면서도 놓치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제대로 보아야 한다. 깊이 들여다보면 새로운 것이 드러나면서 발상과 혁신의 실마리가 된다. 인공지능으로 대신할 수 없는 것 가운데 하나가 '안목'이다. 주의 깊은 관찰을 창의성의 토대를 이루고, 행복한 삶의 원천이 된다. (191)

 

외로운 사람들이 많아지면 사회가 어떻게 달라질까. 나치즘의 광기를 몸소 체험하면서 인간의 실존에 대해 사유한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가 발흥하는 토양에 외로움이 자리 잡고 있음을 간파했다. 고립은 개인의 문제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이다. (206)

 

테레사 수녀에게 기자가 질문했다. "수녀님은 기도를 많이 하시는데, 하나님께 무슨 말씀을 드리세요?" 테레사 수녀가 대답했다. "저는 아무 말씀도 드리지 않아요. 그냥 듣고만 있어요." 기자가 말했다. "아, 그러시군요.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무슨 말씀을 하시나요?" 테레사 수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분도 아무 말씀을 하지 않으세요. 저와 마찬가지로 그냥 듣기만 하신답니다." 즉, 하나님과 인간이 서로를 경청하는 것이 기도하는 말이다. (212)

 

이야기의 미덕은 무엇인가. 불쾌하고 화나는 경험도 누군가에게 에피소드로 들려주면, 감정을 내려놓고 상황을 객관화하면서 자아를 성찰할 수 있다. 밤에 '이불 킥'을 하느라 잠 못이룰 만큼 부끄러웠던 기억도 친구와 만나 수다를 떨다 보면, '유체 이탈' 화법을 구사하면서 즐거운 해프닝으로 웃어넘길 수 있다.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거기에 귀 기울여주는 사람이 있을 때, 우리는 좀더 너그러운 마음으로 힘든 현실을 견딜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안전 기지 또는 전환 장치가 없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온라인에서 극단적인 언사로 분노를 배설하게 된다. 그런 지경으로 내몰리지 않기 위해서는, 가까이 있는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정서적 안식처를 마련해야 한다. 
자신의 이야기가 온전하게 경청되는 공간은 무너진 삶을 수습하고 자아를 회복하는 길을 열어준다. (215)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어 일체감을 느낄 때 생명의 힘이 배가된다. 
그것을 입증하는 흥미로운 실험이 있다. 오랫동안 인간관계를 연구해온 진화심리학자 로빈 던바는 수십 명의 자원자에게 비디오를 보여주며 디스코형의 네 가지 기본 춤동작을 배우게 했다. 그는 자원자들을 그룹으로 나눠 춤을 추도록 했는데, 어떤 그룹에게는 같은 음악을 듣고 정확하게 같은 동작으로 동시에 춤을 추라고 지시하고, 다른 그룹에게는 각각의 멜로디에 맞춰 모두 다르게 몸을 흔들라고 했다. 디스코가 끝난 후, 팔에 혈압 측정 장치를 두르고 장치를 팽창시켜 그 압박을 어느 정도까지 견딜 수 있는지를 측정했더니, 동시에 같은 춤을 춘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훨씬 더 잘 견딜 수 있었다고 한다. 자신이 혼자가 아님을 온몸으로 느낄 때, 자연 진통제인 엔도르핀이 분비되어 통증에 대한 역치를 높여준 것이다*. (221)

* 마르타 자라스카, <건강하게 나이 든다는 것>, 어크로스, 2020, 246~247쪽. 

 

"나는 그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니 그 사람에 대해 좀 더 많이 알아야겠다." - 링컨(231)

 

그러한 이치는 생태학에서도 확인된다. 생태계를 움직이는 원리 가운데 하나로 '가장자리 효과edge effect'가 있다. 땅과 바다, 숲과 평원처럼 둘 이상의 생물군의 서식지가 맞붙어 있는 경우, 그 경계를 이루는 지역에 종 다양성과 밀도가 높아지는 것을 가리킨다. 각각의 서식지에 깃들어 있는 생태적 자원들이 뒤섞이면서 풍부한 환경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공간에 작은 서식지들 여러 개가 공존하고 있다면, 경계가 그만큼 늘어나고 가장자리 효과도 더 뚜렷하게 나타나게 된다. (232)

 

베르브너가 일하는 <디 차이트>는 그러한 경험을 토대로 2017년 '독일이 말한다' 프로젝트를 출범시켰다. 온라인상에서 극단화되는 정치적 대립과 소수자에 대한 편견 등을 극복하고자 기획한 행사인데, 사회적으로 민감한 사안들에 대해 정반대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끼리 짝을 지어 의견을 주고받는 형식이다. 참가자들은 '경청한다, 경험을 바탕으로 말한다, 상대를 존중한다'는 원칙을 함께 읽고, 가벼운 이야기부터 출발해 토론에 들어간다. 두 시간 정도 대화를 끝내고 나면 참가자의 절반 이상이 색안경을 끼고 보았던 상대가 평범한 이웃임을 깨닫고, 전체의 20퍼센트 정도는 상대방의 말에도 몇 가지 설득력이 있음을 인정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수정하게 된다고 한다. 극단적인 생각을 누그러뜨리고 공통분모를 찾아가는 이 대화 마당에는 매년 2~3만 명이 참여하고, 유럽의 여러 나라와 미국에서도 '유럽이 말한다' '미국이 말한다'라는 이름으로 대면 토론이 열리고 있다*. (243)

* 바스티안 베르브너, <혐오 없는 삶>, 판미동, 2021, 240쪽. 

 

미국 MIT공과대학교 경영대학원의 에드거 H. 샤인과 피터 샤인 교수는 그런 식으로 소통할수록 조직은 상투적인 대답과 어색한 침묵 속에서 경직될 뿐만 아니라 생산성도 떨어진다고 지적하며, 그 대안으로 '겸손한 질문humble inquiry'을 제안한다.
여기서 '겸손함'이란, 형식적으로 자기를 낮추는 자세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질문할 때 자기가 정말로 그 문제에 대해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상대방에게도 그런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 중요하다. 자기 능력만으로는 복잡한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한계를 정직하게 받아들이면서 함께 배우려는 마음이 되어야 한다. (중략)
물리학자 데이비드 봄은 대화의 핵심을 이렇게 짚은 바 있다. "참된 대화는 둘 또는 그 이상의 사람들이 서로가 자신의 확실성을 기꺼이 보류하려고 하는 것이다." 확신은 진실로 나아가는 데 걸림돌이 된다. 확신을 내려놓고, 명료함을 구해야 한다*. (247)

* 미래학자 밥 조핸슨Bob Johansen은 <Full-Spectrum Thinking: How to Escape Boxes in a Post-Catergorical Future>이라는 책에서 "명료함Clarity에는 보상이 따르고 확신Certainty에는 처벌이 따른다", "확신의 유혹에 저항하면서, 가능성의 비탈을 가로질러 명료함을 구하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고 말한다. 

 

보통 '희귀 질환'이라고 말하는데, '희귀하다'는 단어는 '드물고 귀하다'라는 뜻이라서 질환에는 맞지 않는 수식어다. 대신 '희소 질환'이라 표현할 수 있다. (250)

 

이러한 상황에서는 모두가 모두의 능력과 지식을 활용하고, 사안에 따라 유기적인 도움을 주고받아야 한다. 이는 교육의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바꿔놓고 있다. 지식이 일부에게 독점되고 교육의 기회가 제한되어 있던 시대에는 교사의 가르침이 절실했다. 그러나 정보와 지식이 폭증하고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된 지금, 그 무한한 자료들 가운데 필요한 것을 선별하고 조합하여 자기 나름의 지성을 쌓아가는 역량이 점점 중요해지고 있따. 에리카 다완과 사지-니콜 조니는 그것을 '연결지능'이라는 개념으로 제시하는데, 그 의미는 '세계의 다양하면서도 이질적인 사람들과 복잡한 정보 관계망, 여러 분야의 지식과 경험, 자원 등을 결합하고 연결해 통합을 이루어나감으로써, 다가오는 인류의 미래를 결정하는 가치와 의미를 창출하고 난관 타개의 돌파구를 발견하는 재능*이라고 말한다. (253)

* 에리카 다완, 사지-니콜 조니, <연결지능>, 위너스북, 2016, 18쪽.

 

보이는 것들이 보는 것을 가로막는다.
보여지는 것들이 보아야 하는 것들을 뒤덮는다.
보란 듯이.
보인다. 보여진다. 보인다. 본다.
보인다. 보이지 않는다. 보인다.
보지 못한다.
- 윤해서, <홀>* (264)

* 윤해서, <코러스크로노스>, 문학과 지성사, 2017

 

한글 프로그램에는 한글과 영어의 자동 변환 기능이 있다. '한/영' 키를 일일이 누르지 않아도, 철자의 조합이 한글인지 영어인지를 분간해서 단어를 띄워준다. 그런데 그 기능이 오히려 귀찮을 때가 있다. 입력한 영어 단어가 신조어라서 아직 등록되어 있지 않고, 마침 그 철자의 조합으로 한국어가 있어서 자동 변환될 때다. 그 가운데 하나가 'SNS'인데, 그 문자 키는 '눈'과 동일하다. 영어 키보드로 설정해놓고 'SNS'를 타이핑해도, '눈'으로 바꿔서 띄워준다. 그래서 각 철자를 한 칸씩 띄어서 입력하고 다시 이어붙이는 번거로움을 감수해야 한다. 키보드에서 'SNS'와 '눈'이 같은 문자 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우연의 일치다. 우리의 눈이 SNS에 속박된 일상을 깨우치는 것일까. (265)

 

'고독'이라는 단어에는 상이한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그 두 글자에 각각 '립'자를 붙여보자. '고립'과 '독립'이 된다. 근대 들어 등장한 개인은 '독립'을 통해 자유를 추구했고, 자기만의 인생을 향유하려 했다. 그런데 그것이 타인과의 관계를 배제하는 방향으로 흐를 때 '고립'에 이르고 만다. 거기에서 벗어나 관계를 맺어보려 하지만, 상대방을 통해 자신의 결핍을 채우려는 에고 때문에 비틀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더욱 단절되고 고립된다. 내면의 중심이 분명하게 세워진 사람만이 인간관계에서 자기중심성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다. 모처럼 주어진 '고독'의 시간이 '고립'으로 내몰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독립'을 훈련할 수 있다면 타인과의 만남도 한결 충실해진다. 자족의 넉넉함과 공생의 기쁨으로 상대방을 기꺼이 맞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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