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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부터 소망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면 시적인 사람이 되고 싶다고 대답했었다. "시인이 아니라 시적인 사람이 되고 싶다고요?" "네." (33) 

 

십 대 중반부터(중간에 잠시 헤어진 기간이 있긴 했지만) 이십 대 중반까지 만났으니 나나 우리 부모님에게나 첫사랑의 이미지는 상당히 디테일하게 각인되어 있다. 그와 헤어지고 나서 한동안 데이트하던 모든 상대를 첫사랑과 적극적으로 비교해가며 저울질하던 때도 있었다. (중략) 나도 첫사랑이 남긴내 취향의 원형 같은 것이 여전히 내 무의식에 존재하여 계속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내가 여태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들은 모두 그 원형의 굴레 안에서 돌고 돌았던 것일까. (65)

내가 꽤 억울해했던 지점을 요조가 이렇게 적어놓다니.
그리고 나는 그 원형의 닮은꼴만을 찾다가, 내가 찾는 게 원형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한때 나도 누군가의 굴레에 얽혀들어간 적이 있었다. 적극적으로 다가오던 모두와 신이 나서 연애하고 또 죽어라 헤어지던 내 생의 춘추전국시대 구간에 있었던 일이다. (66)

내 생의 춘추전국시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진짜 빵터져서 꼭 기억하리라 다짐했다. 나도 꼭 써먹어야지..

 

이종수의 자는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가 소리 죽여 울 때가 가끔 있다. 입을 약간 벌린 채 편하게 자고 있는 그 모습이 정말이지 죽음의 얼굴과 닮아 있기 때문이다. 이종수가 죽게 되면 이런 얼굴일까. 영문도 모르고 곤하게 자고 있는 얼굴 앞에서 그런 생각을 하며 혼자 청승맞은 예행을 하다보면 지금의 초초분분이 얼마나 지극하게 소중한 것인지, 이런 귀한 시간을 마냥 흐르게 두고서 바보 같은 얼굴로 잠들어 있는 이종수가 얼마나 연약하고 가여운 존재인지가 절절하게 느껴졌다. (72)

생각만해도 목이 매웠다.
종종 '지형이가 죽으면 어떡하지' 하고 생각해본다. 아무 자신이 나질 않는 내 마음을 확인하고는 오래 오래 같이 있고 싶다고 되뇌인다. 그런데 입을 약간 벌린 채 편하게 자고 있는 모습이 죽음과 닮아있다고 생각하니 더 진하게 슬퍼졌다. 아직 오지 않은 일들이지만, 말도 안 되는 바람이지만, 그 시간이 오기까지 더 미뤄졌으면.

 

나는 글을 쓸 때 장강명을 따라 하고 있다. 먹을 때는 김홍란을 따라 하며, 소비할 때는 허세과를 따라 한다.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따라 하는 삶이 나에게 굉장히 잘 맞는 것 같다. 앞으로도 타인들을 유심히 응시하면서 따라 하고 싶은 것을 발견할 때마다 신나게 따라 할 생각이다. 내년 이맘때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 (122)

따라 하면서 사는 삶을 생각도 못 해봤다.

헉. 왜지?
아마도 따라 하는 건 좋지 못한 것이라고 공공연하게 배우고, 들어왔기 때문이겠지. 마치 표절처럼. 치팅.

그런데 좋은 걸 따라하는 건 어떨까?
좋은 습관을 따라해 내 것으로 만드는 일, 자기계발서에서 이야기하는 골자 아냐?

나도 따라 해봐야지. 따라 하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니까.
내가 눈여겨 보던 이들의 눈여거 보던 점들부터!

그러다 보면 내년 이맘때 나도 어떤 사람이 되어있을까?

 

종교가 있는 사람들은 좋겠다. 뭔가를 빌 곳이 있는 사람들이 부럽다.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자기 나약함을 그곳에 기대 세워두고 쉴 수 있는 사람들은 정말 좋을 것이다. (155)

 

내가 경험한 초등학교 시절의 수많은 추억들이 이 학교 안에서도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을 것이다. 고궁이나 박물관이 아니라 그냥 동네 초등학교에만 와도 소중하고 은밀한 역사들이 콸콸 흐르고 있는 것을 느낀다. 나는 그냥 그 둘레를 짐짓 태연히 어슬렁거린다. 어른들이 으레 그렇듯 '나도 이런 시절이 있었지' 같은 생각을 하면서. 초등학교를 다니면서 단 한 번도 내가 어리고 불완전한 존재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나는 충분히 세상을 알 만큼 알고 있으며 이만하면 충분히 컸다고 늘 생각했다. 학교 공부도, 애들과 노는 것도, 그러다 다투는 것도, 맘에 드는 상대 때문에 맘을 졸이고 상대의 마음이 내 것 같지 않아 상처를 받고 하는 일들도 어리다고 해서 어설프고 가볍지 않았다. 내가 성인이 되어 경험했을 때와 다름없이 언제나 진지하고 심각했다. (161)

 

가야 해요, 하고 그 애가 제 몸에 비해 큰 감이 있는 백팩을 덜컹덜컹 흔들면서 갑자기 문으로 걸어갔다. 나는 다급하게 또 와! 하고 소리쳤다. 네! 대답을 들었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작은 충격을 받았다. 매번 충격적이다. 그 자그마함이, 너무 작은 손과 운동화가, 몸에서 나는 여린 냄새가, 총체적인 어설픔이. 나도 저런 몸이었다. 희로애락에 휘둘리며 하루하루 진지하게 세상에 맞서던 내가 저런 작은 몸 속에 있었다. (136)

 

이런 일을 매일 겪었다. 이런 일을 매일 겪다보면 어떤 얼굴이 되는지 혹시 아는가? 나는 안다. 본 적이 있다. 예전에 차가 있던 시절, 주차 공간이 아닌 곳에 슬금슬금 주차하려고 폼을 잡을 때마다 어디선가 득달같이 달려나와 무섭게 성을 내던 얼굴들. 나는 책방을 열고 나서야 그 구겨진 얼굴을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나 같은 사람을 매일같이 겪지 않고는 절대로 지을 수 없는 얼굴. 결국 나도 어느새 똑같이 따라 짓고 있는 그 얼굴. (175) 

 

 

 

 

몇몇 분들의 극호(?)로 높은 기대를 가졌던 책.
그래서인지 기대 보다는 싱거웠다. 나쁘진 않지만 그렇다고 썩 좋지도 않은 싱거운 맛. 요조 같았다. (나쁜 의미가 아니라 정말 글이 요조 그녀 같았다.)

작년쯤 마포중앙도서관에서 한 임경선 작가와 요조 작가의 <여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북토크에 간 적이 있다. 그때 처음 본 임경선 작가님과 요조 작가님. (그 후로 임경선 작가님은 커피스트에서 또 뵘) 실제로 본 임경선 작가는 쿨을 넘어 시니컬에 가까운 태도였고, 본능적으로 나는 그런 냉소적인 태도를 피하는 사람이기에 상대적으로 신수진 작가의 말에 귀기울이게 됐다. 특히나 속삭이는 것 같은 목소리가 참 매력적인 신수진 작가.

그런 의미에서 아마 이 책도, 독(讀)보다는 낭독(朗讀)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그의 목소리로 이 책이 읽혀진다면 아마 나는 더 좋은 인상을 받았으리라.

무튼!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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