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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2021년 올해의 책.
읽는 내내 너무 좋아서 종이 가장자리를 자꾸만 매만지게 했던 책.
이슬아X정혜윤
이: (생략) NG가 난 부분만 잘라서 모으셨다고요. 버려진 릴테이프 찌꺼기를 모았더니 120분짜리가 되었다면서요. 한숨 소리, 콧물 소리, 기침 소리, 이상하게 꼬인 발음 같은 소리들만 모인 테이프요.
정: 그 릴테이프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말이 뭔지 아세요?
이: 뭐예요?
정: "피디님, 다시 할 수 있어요?"
이: 아, '다시' 군요.
정: 네. "다시 해요", "다시 할게요" 이런 말들이에요.
이: '다시'라는 말은 아름다움의 역사에 가장 먼저 포함시킬 만한 단어라고 쓰셨지요. 제가 <사생활의 천재들>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에요. 페이지를 통째로 외우고 다녀요.
정: 저는 '다시'라는 단어가 그렇게 부드러워요. 다시 하고 싶어 하는 마음. 다시 잘해보고 싶은 마음. 실수를 만회하고 다시 용서받고 다시 힘을 얻고 다시 깨졌던 관계는 복원되고. 어쨌든 '다시'라고 말하는 사람의 마음 안에 이미 있는, 새로 출발하는 능력요. (17)
이: 언젠가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해요. 유족 분들이 역지사지라는 말을 너무 고통스러워하신다는 이야기였어요.
정: 유족들이 입 밖에 절대로 내지 않는 말이 있어요. 아무리 입안에 맴돌아도 그 말은 안 해요. "너도 한 번 당해봐"라는 말이에요. "시신 장사 하냐"는 말을 들으면 '당신도 한 번 겪어보세요'라는 말이 여기까지 올라오는데도 있는 힘을 다해서 참아요. 자신의 윤리로는 할 수 없는 말이라서요. 그 이유는 자기가 겪고 있는 게 너무 고통스럽기 때문이에요. 어지간히 고통스러워야 너도 한 번 겪어보라고 할 텐데, 인간으로서 그 말만은 차마 못하겠는 거예요. 그 분들은 '당신도 당해 봐라'가 아니라 '당신은 그런 일을 당하지 마세요'라고 말해요. 저는 이것보다 숭고한 인간의 마음은 없다고 생각해요. 유족들은 말하죠. '재난이 반복되지 않으면 좋겠다'고요. 저는 사람들이 그 말을 허투루 듣지 않을 수 있다면 세상은 변할 거라고 생각해요. 그 말 뒤에 있는 세계, 그 고통을 생각하면 사회뿐 아니라 우리의 차가워진 인간성도 변해요. (19)
이: 다른 이들의 고통을 그만 생각하고 싶은 때는 없으셨나요?
정: 그만 생각하고 싶지 않았어요. 이 분들은 어떻게 살까? 분명히 엄청 죽고 싶을 텐데, 찢어질 만큼 고통스러울 텐데, 어떻게 이겨내지? 그 생각을 참 많이 했어요. 우리도 각자의 슬픔이 있어요. 각자 견디는 게 있어요. 그래서 이 슬픈 사람들이 살아가는 힘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싶었어요. 누군가 용기를 냈다는 것은 우리 모두의 용기가 될 수 있어요. 개인적으로 변한 게 있다면 '나 힘들어'라는 말을 한 적이 없어요. 제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해요. (23)
정: 그러니까 저는, 사람들이 슬프고 외로운 날에 기억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 나보다 더 슬픈 사람의 이야기요?
정: 그 뜻이 아니에요. 그냥 세상에 나보다 슬픈 사람이 있다는 걸 기억하자는 게 아니에요. 누군가가 나보다 더 슬픈데, 그가 엄청난 용기를 내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는 것이지요. 용기를 말하는 거예요. 저 스스로한테 얘기해요. 저 사람들이 내는 용기를 봐라. 저 사람들이 내는 저 큰마음, 저 멀리 가는 마음을 봐라. 그러고서 생각해요. 저기로 같이 가자고. 저 방향이라고. (26)
저 큰마음. 저 멀리 가는 마음.
감히 다다를 수 없겠지만 기울어야 하는 방향.
지난 해에 안티 '동물 축제' 페스티벌이 있었어요. <동축반축>이라고 동물 축제를 반대하는 축제였죠. 웬만한 지역 축제는 동물 이름을 달고 진행돼요. 쭈꾸미 축제, 대하 축제, 고래 축제, 산천어 축제. 그런데 결국은 쭈꾸미, 고래, 소를 잡아먹는 축제예요. 시선의 이동이 없지요? 동물의 입장에서 보면, 동물의 눈으로 보면 축제가 아니라 죽음의 카니발이예요. 이 만연한 동물 먹는 축제에 반대하는 축제를 한 번 열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왜냐하면 동물은 말할 수 없어요. 말할 수 없는 동물을 어떻게 대하느냐는 아주 중요해요. 우리는 생명을 함부로 대하는 것을 무심코 정당화시켜요.
제가 피디 생활을 하다 가만히 깨달은 게 있어요. '먹고사니즘'으로 다 설명되는 분위기라는 거예요. 지역에서 그런 축제를 해도 '달리 먹고살 방법이 없잖아'라고 말하면 사람들이 대충 다 이해해줘요. 왜냐하면 왠지 그 말이 맞는 것 같으니까요. 이런 사람을 상상해 봐요. '먹고사니즘은 먹고사니즘이고, 그래도 인간이 그러면 안 되지.'
저는 '그래도 인간이 그러면 안 되지'라고 말하는 사람이 그리워요. 먹고사니즘에서 조금만 해방되면 다른 존재들에게 이렇게까지 안 잔인해도 되거든요. 인간이 이렇게까지 무뎌지지 않아도 되고요. (31)
정: 책이 뭐냐면 결국 어떤 목소리를 듣는 거예요. 책 속에는 목소리가 있어요. 저에게 책은 영상 지원이 아니라 음성 지원이에요. 책을 읽는다는 건 '이것은 중요한 이야기구나, 잊지 않는 게 좋겠어.' 이걸 배우는 과정이기도 해요. (중략)
옛날에 콜트콜텍이나 쌍용자동차 투쟁 현장 가면 그런 말을 많이 들었어요. "피디님 같은 분이 있어서 저희가 삽니다." 처음엔 그 말 듣고 민망해서 "뭐예요"하고 긁적긁적 했는데 그건 저를 향한 말이 아니었어요. 사방천지에 모두가 비난하는 말만 들릴 때 비난하는 말을 하지 않는 어떤 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곤경에 빠진 사람을 살게도 해요.
글쓰기는 흔히들 자아표현이라고 하는데 저는 좀 생각이 달라요. 저한테 글쓰기는 자아 형성, 자아 해방, 자아 이동인 듯해요. 누가 나보다 나은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게 얼마나 좋은 생각인지 감탄하게 되고 동시에 저한테는 절망하지요. 감탄과 절망, 이 둘 사이를 오락가락 하면서 새로운 내가 만들어지는 듯도 해요. (중략)
호시노 미치오라고 알래스카의 자연을 촬영한 사진작가가 있었어요. 그 사람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야영을 많이 해요. 추우니까 습관적으로 모닥불을 피워요. 무심코 야영지에서 불을 피우는데 어떤 할머니가 와서 호시노 미치오에게 물어 봐요. 지금 뭐하고 있냐고. 호시노 미치오는 불을 피우고 있다고 대답하지요. 그러니까 할머니가 한마디 해요.
"미치오, 그렇게 추워?"
저는 그 말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요. 그 지방에선 나무가 귀하거든요. 더 추워지면, 사람들에게 그 나무가 더 절실하게 필요하겠쬬. "그렇게 추워?" 라고 물으면 순식간에 쪼그라들지요. 저도 가끔 저에게 물어요. "그렇게 힘들어?" 그럼 저절로 이 대답이 나와요. "그렇게는 아니고." 그러니까 "그렇게 추워?"도 저를 형성한 말 중에 하나예요. (중략)
세상에서 유일하게 중요한 게 나뿐이라면 곤란할 것 같아요. 내 속은 내가 알잖아요. 뻔히 아는 내가 있는데, 나의 별로인 모습을 내가 다 아는데 온 세계가 나 하나로 축소되면 안 되잖아요. 정말 슬픈 건 영혼 없이 서로를 대하는 거예요. 내가 유족한테 배운 것이 "너는 그런 일을 당하지 마라."하는 마음이잖아요. 내가 좀 더 슬퍼해서 이 분들께 좋은 일이 생긴다면 굳이 피해야 할까요? 내가 슬프지 않은 게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지는 않아요. 물론 가슴이 진짜 아프죠. 혼자서 울죠. 그래도 알아요. 내가 통과하면 다른 누군가에게는 더 나은 일이 생길 수 있다는 걸요. (43)
정: 연민 아니에요. 이타심도 아니에요.
이: 그럼 무엇이에요?
정: 깨끗이 존경하는 거예요. 저는 연민으로 잘 못 움직여요. 저를 움직이는 가장 큰 힘은 존경심이고 감탄이에요. 그들은 슬프기는 하지만 불쌍한 사람들은 아니에요. 저보다 훨씬 괜찮고 위대한 사람들이에요. 우리는 유족들은 너무 불쌍하다고, 안 됐다고 착각해요. 절대 아니에요. 너무 슬프지만, 사람이 저렇게까지 용감할 수 있구나, 저렇게까지 깊을 수 있구나, 하는 존경과 감탄이 저를 움직이는 거예요. 사실 저 이타심 별로 없어요. 이렇게 생각하는 게 저한테 역시 좋은 일임을 아는 거죠. 어디에 샘이 있는지 아는 동물처럼.
이: 저는 지금까지 이타심으로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드린 질문이 부끄러워요. 존경에 대한 경험치가 별로 없다는 걸 알게 돼서요.
정: 저는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을 진심으로 좋아해요. 닮고 싶어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내 얼굴을 찾고 싶고요. 책도 거울이에요. 책에서 얼굴을 찾을 수 있어요. 책에 얼굴을 비춰볼 수 있어요. 책을 읽는 것은 샤워하거나 세수하는 것과도 같아요. 몸이 아니라 영혼을. (44)
정혜윤 PD님의 책은 단 한 권 읽어본 적이 있다.
이 인터뷰집을 읽는 내내 정혜윤 감독님과의 인터뷰가 제일 좋았다고 생각하며, 꼭 다른 책들도 읽어보아야겠다는 생각을 되풀이했다.
내게는 정혜윤 PD님 또한 참 용기있는 분이라 느껴졌다.
그래서 존경할 수 있는 사람.
이슬아X김한민
이렇게 시작하는 소설이 있다.
Monday
me.
Tuesday
me.
Wednesday
me.
Thursday
me.
폴란드의 작가 비톨트 곰브로비치의 소설 <일기>의 첫장이다. 월요일, 나. 화요일, 나. 수요일, 나. 목요일, 나. ... 그야말로 만날 나뿐인 것이다. 비대한 자아가 어느 요일에나 반복되고 있음을 말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한국의 작가 김한민은 이 문장들을 짚으며 최고의 소설 오프닝인 것 같다고 말했다. 내가 너무 나였음을, 그저 나이기만 했음을 직시하게 만든다고. 그는 현대의 경제를 이코노미(economy)라기보다는 이고노미(egonomy)라고 부르는 게 더 어울릴 거라고 말하기도 했다. (54)
그런데 위대한 사람은 없어도 위대한 만남은 있는 것 같아요. 두 사람이 만나서 위대함이 생기는. 한 사람씩 보면 다 별 거 없고 우스꽝스럽기도 한데, 만났을 때 생기는 스파크가 있죠. (107)
나는 그게 나, 나와 지형이라고 종종 생각한다.
이: '비공감주의'라는 말을 만들었던 2012년 즈음에는 어떤 것들을 생각하셨나요?
김: 당시에도 공감이 큰 키워드였어요. 사람들이 공감을 '나의 메시지에 네가 동의하느냐'는 의미로 쓰더라고요.
이: "내 말에 공감해?"라는 맥락에서요?
김: 네. 그런 공감이더라고요. 근데 그건 공감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제가 동물의 고통에 대해서 이야기했을 때 바로 그 날 당장 비건을 실천한 사람들만 공감했다고 말한다면, 그렇게나 폭 좁게 사람들을 정의한다면, 얼마나 이기적인 해석이에요. 다양한 방향의 공명과 에코가 있잖아요. 심지어 동의하지 않고 막 반론을 제기한 사람에게서도 저는 공감을 봐요. 공감은 동의가 아니니까요.
공감과 동의를 같이 쓸 때 오히려 공감은 더 소외돼요. 공감의 본질은 그게 아니에요. 좋은 접근은 서로 차이가 뭔지 알아가는 거예요. 차이를 덮어놓고 보는 게 아니죠. 수많은 '좋아요'와 '공감' 버튼을 누르며 공감의 표현들 속에서 지내온 지금 세대가 어떤가요? 공감의 세대여야 하는데 오히려 단절이 더 많죠. (111)
이슬아X김원영
이: 청소년들은 관계에서 생존 본능에 가깝게 움직이는 것 같아요. 주류가 되려고 혹은 주류에 속한 애들이랑 틀어지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게 생각나요. 다시는 청소년기로 돌아가고 싶지 않네요. (219)
나도.
나는 왜인지 청소년기를 떠올리면 자주 부끄러워진다.
뭣 모르고 뱉었던 말이 무수하고, 뭣 모르고 행했던 일이 가득해서.
조금 더 일찍 읽고, 생각할걸.
이 책을 읽으면서 너무 좋은 나머지 신이 나서
블로그에 일기도 쓰고, 라샘께 카톡도 하고, ㅂ부장님 얼른 드려야지 생각도 하고, 지형이에게도 빌려주겠노라 카톡했다.
제목이 <깨끗한 존경>인 만큼, 역시 첫 인터뷰이인 정혜윤 작가님의 대목이 정말 강렬하다.
이슬아와 정혜윤 덕분에 아직까지 다 읽지 못한 <그냥, 사람>을 이제는 용기내 마저 집어들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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