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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도둑
행복이 마취제와 같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지는 않았다. 행복에 겨운 사람은 타인의 불행 앞에서 무례해지는 법이었다. P의 품에 얼굴을 묻는 안나. 행복한 안나. 나는 꼭 닫힌 안나의 방문을 쳐다보았다. 집안에 유일하게 닫혀 있는 안나의 방문. (50)
부드럽고 그윽하게 그이가 웃음짓네
학원 수업은 때때로 정해진 시간보다 길어지기도 했다. 그럴 때면 그녀는 그가 만나러 올 때까지, 이십 분이고 삼십 분이고 커피숍에 앉아 그를 기다렸다. 그는 언제나 피로와 미안함이 뒤섞인 얼굴을 하고 커피숍 문을 열고 들어왔다. 기다린 시간과 달리 함께 있는 시간은 무척 빨리 갔다. 주로 떠드는 것은 그녀였고 그는 웃거나 그녀의 말에 추임새를 넣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그와 함께 있는 것이 마냥 좋았다. 가끔 그는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신나서 이야기를 펼쳐놓다가 그런 그와 눈이 마주칠 때면 그녀는 왠지 마음이 무거워져 얼른 눈길을 피했다. 그의 눈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차리기에 그때 그녀는 너무 어렸다. 그러나 그녀는 이제 그의 눈빛에 무엇이 섞여 있었는지 알앗다. 그것은 말하자면 질투심이었을 것이다. 그가 한 번도 제대로 누려본 적 없는 젊을을 향한 질투. 그녀는 그 눈빛을 떠올릴 때마다 알 수 없는 죄책감을 느꼈다. 그가 그녀를 비난한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99)
그가 독일에서 모든 것을 그녀에게 의존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독일어라고 해봐야 당케와 이히 리베 디히 정도밖에 알지 못하고, 그가 태어난 고장의 억양이 고스란히배어 있는 영어는 문장을 이루지 못하고 자꾸 분절되었으니까. 그렇지만 그녀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그를 보는 것은 뭐랄까, 이물스러운 느낌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그를 만난 이후 지금까지 길을 찾는 것은 언제나 그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의 뒤를 따르기만 하면 됐다. 그것이 그들이 관계를 맺는 방식이었다. (100)
그게 참 이물스럽게 느껴져서 나도 도망쳤던 때가 있다.
그리고 한참 시간이 지나서야 나도 지난 우리가 맺어온 관계의 방식과는 다른 모양을 내가 소화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거짓말 연습
다른 여자와 잤어. 그러므로, 친구들이 하는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내뱉는 문장들은 어쩌면 그렇게 상투적이었을까. 한두 문장으로 요약한 타인의 삶이 얼마나 진부해질 수 있는가를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그와 나 사이에 있었던 무수한 시간들이, 기억들이, 몸짓들이, 지극히 통속적인 한 문장으로 완결되었다. 나는 소음 속에서 입을 굳게 닫았다. (190)
그래서 우리가 어떤 이를, 어떤 이의 삶을 납작하게 뭉개어 말하면 안 되는 것이겠지.
꽃 피는 밤이 오면
회사에서 시위하는 여자를 내몰기 위해 바리케이드를 세웠다고 했다. 바리케이드 밖으로 밀려나 출퇴근할 때나 겨우 지나치는 여자와 눈이 마주칠까 두려워 고개를 푹 숙이고 잰걸음으로 그 앞을 지나칠 때마다 당신은 식은땀이 났다고 했다. 가정을 지키기 위해 비겁해지는 나 자신이 두려워. 당신은 어느 날 밤, 침대 위에서 내 손으로 당신의 눈을 가리며 말했다. (231)
아. 진짜.
너무 맵다 목이.
비겁해지는 게 두렵다고 말하면서 내 손으로 자기 눈을 가리고, 눈을 꼭 감고 있는 지형이를 상상하면 너무너무 슬퍼진다. 겪어보지도 않은 일인데도 마치 있었던 일 만큼 마음이 일렁인다.
그토록 불안한 상황에서 낳을 수는 없었으므로 우리는 아이를 포기했다. 피로감에 잠식당해 서로 주고받을 말들이 줄었다. 우리는 익숙한 얼굴의 이웃만큼만 친밀했고, 오래전에 헤어진 남매처럼 서먹했다. 서로의 탓이 아닌 것쯤은 알았는데도 과로의 시간이 누적되고 서운함이 켜켜이 쌓이면서 우리는 새된 목소리로 싸웠다. 네가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어떻게 이렇게 내 마음을 모를 수가 있어. 빗나가고, 빗나가고, 빗나가던 마음들. (235)
감히 내가 '가장' 좋아한다고 말하는 백수린 작가님.
왜인지 그의 글을 읽으면 마음이 자주 울적해지는데 또 그만큼이나 투명해진다.
왜 좋냐는 물음에는 "그냥"이라고 밖에 대답할 길이 없다.
그냥 작가님과 글은 내 취향이다.
나도 잘 모르는 내 안의 어떤 것을 자꾸 건드리는 느낌.
<여름의 빌라>는 더 좋았는데, <폴링 인 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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