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SMALL
나는 빨리 새 학년에 올라가고 싶었다. 틀이 잡혀 굳어지기 전의 말랑하고 유동적인 관계의 반죽 속에 뒤섞여 나만의 친교를 차근차근 맺어가고 싶었다. 그래서 겨울방학이 끝나고 삼학년 진급을 앞두었을 때 반 아이들이 호들갑을 떨며 친구와의 작별을 슬퍼하는 모습을 유쾌하고 냉담하게 지켜볼 수 있었다. (45)
내가 원한 게 바로 그런 장면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더 어지럽고 혼란스러웠다. 이상한 수치심과 함께 다짜고짜 다언을 공격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내게 조금 으르렁거렸다는 이유로 아픈 개를 발로 차듯, 옳지 않은 일인 줄 알면서도 나는 다언에게 상처가 될 만한 말을 하고 싶었다. 다언이 그랬으니 나도 그래도 될 것 같았다. 그러나, 가만있자, 나는 잠시 숨을 골랐다. 다언은 그 사건 이후로 나 같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을 것이다. 위로해주려고 다가왔다가 그녀의 공격성에 놀라 당황하거나 분개하는 사람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니 관두자고 생각했다. 어떤 말을 내뱉든 나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가 될 뿐이었다. (63)
권여선 작가님의 글을 읽고 나면 마음이 한동안 어지럽다.
속초에서의 둘째날 오후에서 새벽 동안 다언이처럼 나도 어려웠다. 반바지, 한만수, 노란 원피스 등등 여러 단어들이 뭉쳤다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끈도 오늘 서울 오는 길에서까지 종종 생각났다.
반응형
LIST
'::: >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흰 :: 한강 (0) | 2022.04.27 |
---|---|
시의 인기척 :: 이규리 (0) | 2022.04.27 |
장미의 이름은 장미 :: 은희경 (0) | 2022.04.19 |
소설 보다 겨울 2021 :: 김멜라 외 (0) | 2022.04.10 |
마음이 흐르는 대로 :: 지나영 (0) | 2022.01.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