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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놀 :: 김멜라 

눈점은 먹점의 입술에 자기 입술을 맞대고 애인의 손길에 따라 몸의 감각을 집중하면 자기도 모르게 잠에 빠졌다. (중략) 잠의 장막이 막 눈점의 의식을 덮으려 할 때 먹점이 말했다. 그 말의 진의를 파악하기도 전에 눈점은 잠들었고, 깨어났을 때 여전히 먹점의 입술이 눈점의 입술과 맞닿아 있었다. 한 시간이 넘도록 두 사람이 서로의 숨결을 느끼며 잠들었다는 사실에 눈점은 안온한 만족에 젖어 먹점에게 물었다. (14)

나도 좋아하는 거라, 읽으며 나른해지는 것 같았다. 지형의 숨결이 떠오르는 것 같기도 하고.

 

먹점은 말없이 책들을 책장에 꽂았다.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눈점의 마음을 모르고 있었는지 생각하며. 눈점의 버스 사고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는 것도 인정했다. 걱정하고 같이 화를 냈지만 그보다 더 크게 눈점이 서둘러 그 기억을 딛고 일어나 일상으로 돌아가길 바랐다. 눈점을 갉아먹는 불안과 두려움, 그 감정을 외면하기 위해 식탁 위 음식들에 더 시선을 쏟고 배를 채웠다는 것을. 매일 아침 약을 삼키고 잠들기 전에 또 약을 먹는 눈점을 보며 그녀에게 다른 어떤 말을, 다른 어떤 행동을 해야 했다는 것을. 버스 기사를 찾아 잘못된 걸 바로잡으려 했던 눈점을 막지 말았어야 했다는 것을. (51)

너무 사랑하는 사람이 겪는 일에도 이렇게 한계를 느끼고 마는 우리. 

 

 

부용에서 :: 남현정

나는 어둠의 경사로로는 되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어둠을 지나는 것은, 설령 그것이 무엇 하나 새로울 것 없는 어둠이라 하더라도, 어느 정도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나에게는 그럴 만한 용기가 남아 있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내게 보이는 저 유일한 문을 향해 달려갔다. (102)

매번 하는 이별이 힘든 이유. 매번 겪는 슬픔이 여전히 슬픈 이유겠지.
이런 어둠을 피해 다른 문으로 가는 것을 회피라고 칭할 수 있을까? 그건 어떤 새로운 '용기'가 아닐까. 
문을 열었을 때 우리는 그곳이 밝을지, 어두울지 모르니까 그건 또다른 모종의 '용기'가 필요한 일일테다. 

무슨 선택이든 실은 우리는 용기를 잔뜩 내어 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 <작가란 무엇인가 1>에 실린 포크너의 인터뷰를 읽다가 몹시 와닿는 말이 있었어요. "예술가에게 필요한 유일한 환경은 평화, 고독, 너무 비용이 많이 들지 않는 즐거움뿐"이고, "나쁜 환경은 좌절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는 상황"일 것이라는 그의 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요. (103)

올해 근무지가 바뀌었다. 
그래도 두 번째 학교라서인지, 아니면 이미 이곳에서 좋은 분들을 넘치게 만난 탓인지, 관계에 큰 기대와 욕심이 없다. 어쩌면 나 스스로 기한을 둔 곳이라 그런가? 

어쨌든, 좋은 동료들을 만났다.
그리고 그뿐이지, 대부분의 시간은 '고독'을 택한다. 

점심시간마다 안산에서 산책하는 것을 4월의 목표로 삼았다. 점심을 먹고, 새콤달콤한 에티오피아를 찐하게 내려서는 컵에 담아 "혼자" 산책한다. 엄마와 영통하며 초롱이를 보기도 하고, 안산에 흘러나오는 음악을 듣기도 하고, 만발해 흐드러지는 개나리를 보기도 하고, 주변의 이것 저것 눈에 담기도 하면서. 

이런 산책을 나가기 전에, '부장님 모시고 갈까?' '교감샘 모시고 갈까?' '민정샘 데려갈까?' 생각이 얼핏 스치기는 하지만, 그러지는 않았다. 왠지 안산을 산책하면서까지 나를 노동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냥 좀 두고 싶었다, 나를. 

복잡다단한 이유가 있겠지만, 올해 그리고 이 학교에서 나는 고독을 희구하고 또 향유한다. 그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각종 제반도 갖춰져있기도 하고 내 상황도 그렇고. 
그런데 아주 조오금 더 필요해서ㅡ현실적인 측면보다는 개인의 만족감 측면에서ㅡ출근 전 오전 시간을 써보려고 한다. 요즘은 해가 이미 길어져서 아침에 일어나면 이미 방 안이 환하다. 그리고 묘하게 '게으른' 기분이고 또 그래서 좀 더 뭉그적댄다. 지형이 말한 것처럼 '아침에 하는 고민'을 줄여야겠다고 생각했다. 몇분에 나갈지, 언제 일어날지, 무엇을 입을지, 몇분 버스를 탈건지, 어떤 택시를 부를건지. 아침에 이미 풀full이다. 
보다 아침을 간단하고 명료하게 시작해야지. 

또 한 달 정도 학생이 되어보니, 나는 도제식 교육에 적합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잘 흡수하고 잘 가꾼다. 그래서 든 생각이 다른 것도 도제徒弟해보자. 여러 욕심들은 차치하고, 그냥 단순하고 느릿하게 아침을 열기 위해서. 나라고 못 할 건 없잖아? 

 

저는 문장들에 다소 집착하는 습성이 있어요. 잘 씌어진 이야기보다 잘 씌어진 정확한 문장 하나에 더 이끌리는 편입니다. 제가 아포리즘을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할 텐데요. 잘 씌어진 문장들을 읽고 나면 순간 모든 세상이 일시 정지되는 느낌이 듭니다. 정지된 세상 주위로 그 문장에 얽힌 여러 상황, 생각 이미지들이 한꺼번에 나타났다가 순식간에 사라지는데... 그러고 나서는 경탄과 질투, 탄식, 절망과 같은 온갖 감정에 휩싸입니다. (107)

정말 정말 공감! 

이번에 <어떤 양형 이유>를 ㅂ부장님께 보내면서, '아 김현 책을 이 봄에 꼭 읽어야지.' 생각했다.
ㅂ부장님이 추천하고, 추천하다 선물해주시기까지 한 책인데 여즉 펴보질 않았다. 두꺼워서. 그리고 왠지 실망할(?)까봐. 

그런데 문득 든 생각이었으니, 내가 꾸리는 모종의 모임의 첫 책으로 선정해도 좋겠다. 
오늘 집에 도착하면 저 책부터 꺼내봐야지. 아직 가름해둔 책이 많지만, 언젠가 또 읽으면 되지. 

 

제가 질문을 이해한 대로 말씀드리자면,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만남이나 사건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다는 생각을 종종 해요. 우리는 만남과 사건, 장소에 부딪히듯 마주할 수밖에 없고 그렇게 부딪혀온 모든 만남, 사건, 장소는 어떤 식으로든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닐까. 우리가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수많은 일로 우리의 자아가 형성된 것이라면, 자아는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운명의 문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113)

 

용부라는 단어를 찾아보니 "변변하지 못하고 졸렬한 사나이庸夫"라는 뜻과 더불어 "어떤 일을 하기 위하여 용기 있게 떠나감勇赴"이라는 뜻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116)

 

우리는 자신의 행복을 바라는 관성에서 벗어나 타인의 행복을 진정으로 바랄 수 있을까? (117)

무해하지만 벗어나지는 못하는ㅡ혹은 않는ㅡ 내 관성들에는 무엇이 있을까?

 

 

이중 작가 초롱 :: 이미상

그럼에도 그날 '악하다'는 말이 나온 까닭은 소설이 악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악하다는 말에 취해 있었기 때문이다. 소설 창작반에서는 뜬금없이 어떤 말이 유행했다. 복기나 오독처럼 평소 잘 쓰이지 않는 한자어가 유행했고 그러면 너도나도 아무 때고 그 말을 썼다. 악하다,도 그런 말 중 하나였다. '되짚다'보다 '복기'가, '잘못 읽다'보다 '오독'이 더 그럴듯하게 느껴지듯, '생각이 짧다' 정도면 족했을텐데도 사람들은 기어이 초롱의 소설에 대해 악하다는 표현까지 썼고 거기에는 '아' 해도 될 것을 '악!' 하고야 마는 문학의 낯간지러운 과장과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부당한 환기가 맴돌이치고 있었다. 초롱도 그 점을 잘 알았지만 그렇다고 상처를 덜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123)

 

어쨌든 우리는 비웃음을 샀다. 조롱을 당했고 스스로 혼란스러웠다. 우리는 글만 읽고 없는 피해에 눈물 흘렸으며 없는 피해자에 연대했으며 없는 가해자를 처벌했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흔들렸다. 글만으로는 내 편을 알아볼 수 없다는 무력감, 글이 발산하는 강렬함이 진정함의 징표가 되지는 못한다는 당혹감이, 진짜에, 글과 글쓴이의 심장이 하나인지에 더욱 집착하게 했다. 그 와중에초롱의 글이 유출된 것이다. (129)

 

예전부터 초롱은 궁금했다. 삶에 어떤 위기가 닥쳐야 소극성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과연 나라는 사람이 설사가 나온다고 화장실에서 앞사람을 밀칠 수 있을까? 배우자의 불륜 상대에게 물을 끼얹거나, 의료 사고로 가족을 죽게 한 병원 앞에서 1인 시위를 할 수 있을까? 자의식을 이기는 시련이란 무엇일까? (131)

질문 자체가 갖는 아포리즘. 

 

그리고 '밈'으로서의 초롱에 대해서는... 소설에서 여러사람이 초롱의 이름을 빌려 마음껏 글을 쓰는데요. 조연정 평론가의 심사평에 등장하는 "더럽혀진 이름인 '초롱'을 빌려 글쓴이의 심장으로부터 절대적으로 해방된 글쓰기의 자유를 누리게 된다"는 표현이 근사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글들을 저는 '초롱-글'이라고 부르곤 했는데요. 그러면 여름밤을 밝히는 청사초롱의 행렬이 떠올라 기분이 좋았지요. (157)

 

 

정말 오랜만에 독서를 했다.
3월이 되고서는 독서 습관을 놓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부담없이 펼칠 수 있고 금세 완독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그래서인지 부쩍 속도가 났고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다시 책에 손이 갔다. 
왠지 읽을 텍스트가 너무 많아서 책까지 읽기에 심적으로 부담이 됐었나보다. 그런데 역시나 책은 그 자체로 환기였다. 다행히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었고, 인사이트를 얻기도 하고, 위안도 되고. 
그리고 나라는 사람의 직업에서 바라보자면, 아이들에게도 의미 있는 순간을 주는 듯하다. 
항상 아이들은 내가 교실에 들고 오는 '책'들을 궁금히 여겼는데, 그러면서 자연스레 무형의 교육이 이루어지는 것 같기도 하다.

다행이다 책무로서의 책 읽기와 취미로서의 책 읽기가 다르지 않아서. 
그리고 나는 활자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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